우리역사/삼국이전

구름에 달가듯이 2014. 12. 5. 07:39

단군을 넘어 고조선을 넘어 6회 ~ 10회 [김운회의 新고대사 ]

 

 

6. 고조선 뿌리는 숙신, BC 2000년 이전 은나라 방계국가

 

 

 

1 갈석산의 전경. 『사기』에 “연나라는 발해와 갈석산의 틈새에 하나로 모이는 곳으로, 동북으로는 오랑캐와 접하고 있다”고 한다. 여기서 오랑캐는 동이, 즉 고조선이다. 그래서 이 지역은 고조선 연구에서 중요하다. 2 대릉하 상류. 고조선 영역의 핵심 쟁점 가운데 하나인 패수인데 사서들을 종합하면 패수는 란하 또는 대릉하다. 대릉하의 발원지 가까이에 새롭게 떠오르는 최고의 인류문화 발상지인 홍산문화의 유적지가 있다. 3 고조선 영역에서 발견된 구멍무늬토기. [사진=권태균]

 

⑤고조선의 실체Ⅱ

청나라 고증학자 호위(胡渭)는 우공추지(禹貢錐指)에서 “산동반도는 요(堯) 임금 때부터 조선의 땅”이라고 썼다. 사기“요(堯)임금은 의중을 시켜 우이(<5D4E>夷:또는 욱이[郁夷])의 땅, 즉 해 뜨는 곳(양곡·暘谷)에서 일출을 경건히 맞게 하였다(卷1 五帝本紀 堯)”고 하는데 주석에 “우이(<5D4E>夷)의 땅은 청주(靑州)”라고 했다. 청주는 현재의 산동반도다. 이 기록은 서경(書經) 요전(堯典)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 우이는 누구인가.

우공추지 “동이 9족은 우이이고, 우이는 조선의 땅(四庫全書 經部 禹貢錐指 4卷)”이라고 했다. 나아가 사기에서 “양곡은 바로 해 뜨는 곳(日所出處名曰陽明之谷)”이라고 한다. 양곡을 매개로 산둥반도=양곡=조선의 관계가 성립하는 것이다. 일단 이 기록이 고조선과 관련된 가장 오래된 시기, BC 2400년경의 기록이다.


그러나 고조선 연구에서 더 중요한 부분은 숙신(肅愼)이다. 고조선 그 자체이거나 고조선의 뿌리이기 때문이다. 숙신은 물길(勿吉)·말갈(靺鞨) 등으로 불리다 후일 여진족·만주족이 됐다고 알려져 있지만 조선과 깊은 연관을 가지고 있다.

삼국지에는 “정시(240~248) 때 위나라가 고구려를 침공하자 고구려왕 궁(동천왕)은 매구루(買溝婁)로 달아났고, 관구검은 현도태수 왕기를 파견해 추격하게 했는데 옥저를 1000여 리 지나 숙신씨의 남쪽 경계에까지 이르렀다(<6BCC>丘儉傳)”고 나온다.

 

 옥저는 현재 함흥·신포 지역, 매구루는 현재 원산에 가까운 문천이다. 그러므로 숙신씨의 남방 한계선은 최소 금강산 일대 또는 강릉까지로 추정할 수 있다. 당시 위나라에서는 한반도를 숙신의 나라 가운데 남부 지역으로 지칭한 것이다.

 

 

고려사(高麗史)에는 “건녕 3년(896) 왕융(王隆)이 군(郡)을 들어 궁예(弓裔)에게 귀부하자 궁예는 크게 기뻐하여 왕융을 금성태수로 삼았다. 그러자 왕융이 말하기를 ‘대왕께서 만약 조선·숙신·변한의 땅을 통치하는 왕이 되시려면 무엇보다 송악에 먼저 성을 쌓으시고 저의 맏이(고려 태조 왕건)를 그 주인으로 삼으시는 것이 가장 좋은 방책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하자 궁예가 이를 따라 왕건을 그 성주로 삼았다(太祖紀)”고 돼 있다.

 

이때 조선은 한반도라기보다 고조선의 옛땅, 숙신은 만주 또는 한반도 중부, 변한은 한반도 또는 남한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숙신은 고조선 중심부라는 느낌을 주는 말이다. 청나라 때 편찬된 흠정만주원류고(欽定滿洲源流考)의 머리글에는 금사세기(金史世紀)를 인용, “숙신은 한나라 때는 삼한(三韓)이라 했다”고 돼 있다.

이처럼 숙신과 조선(고조선)이 혼용되는 사례는 많다. 고조선 혹은 그 일부를 숙신으로 보거나 조선과 숙신을 상호연결된 독립 주체로 보는 식이다. 이런 혼용은 전설의 시대에서부터 청나라까지 지속적으로 나타난다.

숙신에 대한 가장 이른 기록은 사기에 나온다. “(우 임금은) 남으로는 북발, 서로는 융적 강족, 북으로는 산융과 발식신(發息愼) 등을 위무했다.” (卷1 五帝本紀 舜) 우(禹) 임금은 전설상의 인물로 정확한 시기를 말하기는 어렵지만 일단 BC 2000년경 인물로 추정한다.

 

그런데 이에 대한 주석으로 후한 때 대학자 정현(鄭玄)은 “식신(息愼)은 숙신으로 동북방 오랑캐”라고 해설했다. 일주서(逸周書)에도 “직신(稷愼)은 숙신(王會解篇)”이라고 한다. 숙신은 중국 전설의 시대부터 존재해왔던 나라 또는 민족이며 ‘발식신=발숙신’임도 알 수 있다.

여기서 사용된 발식신은 다른 용례를 찾기 어렵고, 가장 가까운 표현이 관자에 나오는 최초의 조선 언급인 발조선(“發朝鮮文皮”:管子 卷23)이어서 발조선은 발식신의 전음(轉音)으로 추정된다. 즉 ‘식신=숙신=직신 =조선’으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숙신이나 조선은 어떤 민족명을 한자를 빌려 표현한 음차어라는 점과 고조선은 전설시대 때부터 중국민과 함께 존재했던 민족임을 알 수 있다.

죽서기년에는 “식신(또는 숙신)이 BC 1120년(무왕 15년)과 BC 1107년(성왕 9년)에 각각 사신을 주나라에 파견했다”고 한다. 이는 후한서“주 무왕이 은나라를 타도한 후 숙신 사신이 왔다”는 기사(卷115, 東夷傳)와 일치한다. 기록이 사실이라면 고조선은 은나라의 방계(형제국)로 사신을 파견할 정도로 정비된 형태의 국가였으며, 숙신이 고조선의 전신이라면 은나라의 북부에 있던 숙신이 은나라 유민과 결합해 고조선이 발전적으로 통합됐을 가능성이 있다.

춘추좌전(春秋左傳)에 주나라 왕이 신하를 진나라에 보내어 한 말 가운데 “무왕이 은나라를 이긴 후(BC 1100여 년경) 숙신·연·박이 주나라의 북쪽의 땅이 되었다(昭公九年)”고 한다. 즉 주나라의 북쪽에 숙신·연·박이 연하여 있다는 말이고 연(燕)은 현재의 베이징 부근이다.

 

 이 박은 고대 한국인을 지칭하는 발(發)의 전음(轉音)으로 추정되고, 중국에서도 고구려의 선민족인 맥족(貊族)으로 보고 있다(劉子敏古代高句麗同中原王朝的關係). 이것은 이후 순자“진(秦), 북으로 호맥(胡貊)이 접한다”, 사기“진(秦) 승상 이사(李斯)가 북으로 호맥(胡貊)을 쫓았다”는 기록과 대체로 일치한다(<5회 참고>). 나아가 박·숙신은 발신식(발조선)의 다른 표현으로도 추정된다. 결국 주(周) 초기 숙신 영역의 남방 경계가 고죽국에 근접한다.

사기(史記)“공자(BC551~BC479)가 진나라(현재의 카이펑 인근)에 머물 때 화살 맞은 매들이 떨어져 죽자 공자가 ‘이 화살은 숙신의 것’이라고 했다(卷47 孔子世家)”고 한다. 공자가 숙신의 화살을 정확히 알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화살 맞은 매가 멀리 날지 못했을 것이니, BC 6세기 숙신의 영역은 넓게 잡으면 현재 허베이(河北) 북부, 황하 이북이나 연나라 이북인데 이는 고조선 영역과 대체로 일치한다.

 

이 기록은 국어(國語:춘추시대 8국 역사서)에 바탕을 둔 것으로 전한 때 유향(劉向)이 지은 설원(說苑)(卷18 辨物篇), 한서(漢書)(卷27五行志) 등에도 전한다.

한나라 말기 양웅(揚雄·BC53~AD18)이 저술한 방언(方言)에는 “조선과 열수 사이”라는 말이 20회 이상 나타난다. 대표적인 것은 “연의 경계 밖으로 더러운 오랑캐인 조선과 열수의 사이(第1)” “무릇 초목이 사람을 상하게 하는 북연과 조선 사이를 일컬어 초망(가시덤불)의 땅이라 한다(第2)” “연나라의 동북쪽과 조선, 열수의 사이를 일컬어 목근(무궁화)의 땅이라고 한다(第5)” 등을 들 수 있다.

 

대체로 고조선을 낮춰 보는데 이런 경우는 중국을 괴롭힌 경우 많이 나타난다. 다루기 힘든 상대라는 의미다. 방언에 나타나는 기록들을 토대로 보면, 고조선은 연나라 북쪽에 연이어 있다. 이는 숙신과 고조선 영역이 일치함을 확인시킨다.

문제가 되는 부분은 열수(列水)다. 지난 2000여 년간 한국에서는 고조선의 대동강 중심설이 일반적 견해였다. 고려 때 삼국유사, 조선의 동국통감(東國通鑑)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 동사강목(東史綱目) 아방강역고(我邦疆域考) 등을 거치면서 견고해졌다. 고조선의 수도는 현재의 평양, ‘패수(浿水)=청천강(또는 대동강)’ ‘열수(冽水)=대동강(또는 한강)’ 등으로 보고 있다.

중국 최고(最古) 지리서인 산해경(山海經:BC3~4C로 추정)에는 “열수 동쪽에 열양(列陽)이 있고 그 동쪽에 조선이 있는데 바다의 북쪽, 산의 남쪽에 위치해 열양은 연나라에 속한다(卷12 海內北經)”고 한다. 같은 책에 “동해의 안, 북해의 모퉁이에 나라가 있고 이 나라를 조선이라고 부른다(卷18 海內經)”고 한다.

그런데 열수가 대동강이라면 이 기록은 틀렸다. 대동강(또는 한강) 동쪽에 열양이 있고 그 동쪽에 고조선이 있다면 고조선은 현재의 함흥이나 강릉이다. 고조선은 이 지역을 단 한번도 지배한 적이 없다. 그러므로 열수는 대동강이 아니다.

사기 조선열전의 주석으로 실린 사기집해(史記集解)에는 “조선에는 습수(濕水)·열수(洌水)·산수(汕水) 등의 강이 있는데 이 세 강이 합해 열수가 된다. 아마도 낙랑이나 조선은 이 강의 이름을 따서 지었을 것이다(朝鮮列傳)”라고 한다. 그런데수경주에는 습여수(濕餘水)가 나오는데 이 강이 유수(濡水:란하의 다른 명칭)와 합류하는 강이라고 한다(濡水). 현대의 대표적 고대사가 리지린은 “이 습여수가 바로 습수”라고 지적한다.

따라서 열수는 란하다. 리지린은 “열수는 란하의 지류인 무열수(武列水)와 같은 강”이며 그 근거로 수경주“유수가 흐르는 도중 무열계(武列溪)를 지나면서 이곳을 무열수라 하고 무열수의 약칭이 열수”라고 한 기록과 열하지(熱河志) “란하가 과거 무열수”라 하고, 건륭황제의 저작인 열하고(熱河考)수경주에서도 “열하는 무열수”라고 하는 기록을 들었다. 즉 ‘란하=무열수=열하=열수’라는 것이다.

 

열하지의 기록에 따르면, 한나라 이전까지는 란하를 유수라 했고 그것을 난수(難水)라고 썼으며, 당나라 때 이르러 란하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러므로 열수는 란하 유역이나 대릉하 유역에 있어야 한다. 따라서 산해경에 나오는 동해는 현재의 서해, 북해는 발해인 것이다.

숙신은 한(漢)나라 이전에는 허베이 지역과 남만주 지역에서 나타나고, 한 이후에는 만주와 한반도에서 나타난다. 이는 고조선의 영역과도 일치한다. 고조선 기원을 연구했던 러시아의 L. R. 콘제비치도 한국의 역사적 명칭에서 “사료에 나타나는 고대 조선족과 숙신족의 인구 분포가 지리적으로 서로 일치하고, 숙신과 조선족의 종족 형성 과정이 유사하며 새를 공동 토템으로 가지고 있으며 두 민족 모두 백두산을 민족 발상지로 보고 있다”는 점 등을 토대로 조선이라는 말이 숙신에서 나왔다고 했다.

숙신과 조선이 동계(同系)라는 점을 대표적 선각인 신채호도 지적했다. 신채호는 “발숙신(發肅愼)이 발조선(發朝鮮) 대신 사용되었기 때문에 ‘조선=숙신’인데, 만주원류고에서 건륭대제가 숙신의 본음을 주신(珠申)으로 인정하였기 때문에 조선의 음도 결국은 주신이 된다”고 했다. 고대 문헌에서는 조선·숙신·식신 등이 구분 없이 사용되고 있어 ‘조선=숙신=식신’이라고 봐야 한다.

그러므로 숙신의 역사를 바탕으로 보면, 고조선은 전설의 시대부터 역사에 뚜렷이 존재해온 민족이라는 점이 분명해진다. 고조선은 은나라의 방계국으로 주나라 초기에는 사신을 보낼 만큼 일정한 국체를 가졌으며, 황하 유역 이북을 지배하다 은나라 멸망 후 은의 유민과 결합해 보다 확대된 고조선을 건설한 것으로 보인다. 이것이 초기 고조선의 모습이다.

 

 

7. 위만은 억지 중국인 … 후한서삼국지서 중국 성 ‘위’ 붙여

 

 

 

발해만으로 흘러드는 대릉하의 랴오닝성 상류 부분. 강폭이 300~400m가 될 만큼 넓고 깊다. 이 강은 동이족의 나라 은(殷)이 BC 11세기께 중국 한족의 나라 주(周)에 의해 멸망한 뒤 은의 제후였던 기자가 만든 ‘기자의 나라’를 흘렀던 강이다. 고조선 땅이 된 이 대릉하 지역을 BC 3세기 중국 연나라가 침입해 장악하지만 고조선 만왕은 이 땅을 회복한다. [사진=권태균]

 

⑥위만의 정체성

주희(朱熹)의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천하를 통일한 은나라 탕 임금은 옛 성현들의 후손들이나 은나라에 공로가 있는 사람들을 고죽 등의 나라에 봉했다(古聖賢有功者之後 封孤竹等國 各有差)”고 했다.

 

이 기록은 BC 1600년경의 일로, 전적으로 신뢰하기는 어렵지만 기후의 고죽국이 은나라 초기부터 존재했으며, 은나라의 왕가와 가까운 제후국이었음도 알 수 있다.  이 고죽국은 고조선의 역사와 그 영욕을 함께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한국인들의 주요 이동로인 까닭에 ‘고대 동북아의 화약고’라고 할 수 있다. 고조선과 연(燕)나라의 정세변동에 따라 부침이 많았던 지역이다.

고조선은 BC 4세기 이후 보다 독자적인 고대국가 체제를 갖추고 인근 연나라와의 투쟁과 더불어 성장했다.  한때 연의 침공으로 요하 동쪽까지 밀렸지만 연의 멸망 후 진(秦)나라와 대치했다. 중국 최초의 통일국가인 진(BC 221~BC 206)은 내부 정비와 흉노의 위협 때문에 ‘멀고 지키기도 어려운’ 고조선까지 공격하지는 않았다.

 

진 멸망 뒤 한이 들어서자(BC 202) 과거 연나라 지역에서 BC 190년을 전후로 (위)만이 고조선으로 넘어와 정권을 장악했다. 이 (위)만이 문제다.

사마천(司馬遷)의 사기

“조선왕 만(滿)은 본래 연나라 사람이다. 연나라가 전성기일 때 진번과 조선을 복속하여 관리를 두고 장성과 요새를 쌓았다. 진나라가 연나라를 멸망시켰을 때 요동의 외요(국경 밖의 땅)에 속했다.

한나라가 흥한 후 그곳이 멀고 지키기도 어려워 다시 요동의 요새를 수축하고 패수에 이르러 경계를 삼고 연에 속하게 했다.

연나라왕 노관이 배반해 흉노에 들어가니 만이 망명하여 1000여 명의 무리를 모으고 퇴결만이(<9B4B>結蠻夷·오랑캐)의 모습으로 동으로 달아나… 여러 망명자들을 규합하여 그들의 왕이 되었고 왕검에 도읍을 정하였다”

(卷115 朝鮮列傳)고 했다. 이 기록은 큰 흐름은 보여주지만 구체적인 사실과 해석에서 문제투성이다.


 

 

 

우선 고조선이 연의 속국인 듯 기록돼 있는데 사실이 아니다.

▶고조선과 연의 갈등이 극심했던 점

▶연나라 장수가 침입해 고조선이 후퇴한 기록이 분명한 점

▶진 멸망기에도 고조선이 건재한 점

▶만(滿)은 고조선으로 ‘망명’한 점 등은 고조선이 절대 속국이 아님을 보여준다.

 

그런데 철저한 중화주의자였던 사마천이 이런 사실을 무시하고 고조선의 역사를 왜곡한 것이다. 중국 고대사 전문가인 이성규(서울대) 교수는

 

 “사마천은 한나라 주변 국가는 대부분 중국인(漢族)이 건설했다고 한다. 남월(南越)은 진나라 관리 출신(南越列傳), 운남(雲南)의 전왕(<6EC7>王)은 초나라 장왕의 후손(西南夷列傳)이라는 식이다. 진한(辰韓:신라 전신)의 주민이 진(秦)나라의 고역을 피해 망명한 진나라의 후예라고 주장한 것도 동이 사회에 잡거한 중국인의 비중을 부각시키려는 의도다”라고 말한다.

‘만(滿)’이 연나라 사람이라는 것도 의심스럽다. 그동안 이를 놓고 논란이 많았다. 그가 연나라 사람이 아닐 수 있다는 증거는 많다. 만이 나타나는 최초 기록인 사기에는 위(衛)라는 중국식 성이 붙지 않았다. 그냥 ‘만(滿)’이라고 썼다.

 

 만의 복장도 전형적 동이의 모습이었다. 또 고조선의 준왕은 국경수비대장을 맡길 만큼 만을 신임했다. 만은 왕이 된 뒤 국호를 그대로 고조선(조선)으로 불렀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만의 정체성은 ‘(고)조선인’에 가깝다.

진시황이 연나라를 멸망(BC 226)시키고 위만이 이 지역을 떠나는 시기(BC 190년경) 이 지역은 북방인과 한족의 완충지대로 국적을 단정하기도 곤란하다. 비유하자면 만주사변(1931)에서 해방(1945)까지 시기의 연변 조선족과 유사하다.

또 중요한 것은 고조선이 “왕검에 도읍을 정하였다(都王儉)”는 기록이다. 그 주석에 “창려(昌黎)에는 험독현이 있다(昌黎有險瀆也)”라고 하는데, 이에 대한 해설로 2세기 후반의 학자인 응소(應<52AD>)는 “요동의 험독현은 조선왕의 옛 도읍”(“遼東險瀆 朝鮮王舊都”史記 卷115)이라고 한다.

 

창려는 과거의 고죽국 지역이므로 왕검은 현재 베이징 동부 지역이다. BC 2세기께 고조선은 연나라에 뺏긴 과거 고죽국 영토를 회복한 것이다. 다만 그 시기는 한나라 장군인 번쾌와 주발의 대군이 이 지역을 평정(BC 195)하고 철수한 이후로 보인다.

고조선 왕 만(滿)이 왕검성을 도읍으로 하여 건국할 당시 한나라는 국내 사정이 매우 혼란했다. 사기에 따르면 BC 200년 태원(太原)을 지키던 한신(韓信)이 흉노에 항복하자 한 황제 유방(劉邦)은 32만 대군을 끌고 친정에 나섰지만 평성(현재의 다둥·大同)에서 포위되어 뇌물을 바쳐 겨우 탈출했고, 이후 엄청난 곡식과 비단·솜을 공물로 바쳐 흉노를 무마하였다.

 

BC 199~196년 유방은 한신의 잔당과 진희(陳<8C68>) 등의 반란을 진압하느라 분주했고, BC 195년은 연왕이었던 노관이 흉노에 투항하자 대군을 파견하여 진압한 후 고향인 패(장쑤성 펑샨)에서 쉬었다. 이후 흉노는 고조선과 함께 만리장성 지역까지 남하하고 있었다.

‘만(滿)의 고조선’은 고조선이란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다. 그런데도 이후의 사서는 ‘위만 조선’이라 해서 고조선과 분리시킨다. 문제는 사기보다 300~400년 늦게 쓰여진 삼국지 후한서 등에서 비롯됐다.

삼국지에는 “연나라 사람 위만(衛滿)은 북상투에 오랑캐 옷을 입고 다시 와 기자를 대신하여 그들의 왕 노릇을 하였다”(“燕人衛滿, <9B4B>結夷服, 復來王之” 三國志 ‘魏書’ 東夷傳 濊)고 하고, 후한서에는 “연나라 사람 위만이 조선으로 피했다”(“燕人衛滿避地朝鮮” 東夷列傳 第75)고 썼다.

 

그동안 ‘만(滿)’으로만 알려진 이름에 당시 동북에 흔한 중국 성(姓)인 ‘위(衛)’를 붙여 위만(衛滿)이라고 부르고 있다. 과거를 왜곡한 중화주의 사서의 영향으로 이후 ‘위만의 조선’이란 인식이 생겨난 것이다.

삼국지는 또 “위만에게 나라를 빼앗긴 조선후 준(準)은 시종들과 궁녀들을 데리고 바다로 달아나 한 땅(한반도 남부)으로 살면서 스스로 한왕(韓王)이라고 하였다. 그 후 왕계는 끊어졌지만 지금도 한 땅의 사람들은 그를 받들어 제사를 지내는 사람들이 있다.”(“衛滿所攻奪, 將其左右宮人走入海, 居韓地, 自號韓王. 其後絶滅, 今韓人猶有奉其祭祀者.”三國志‘魏書’ 東夷傳 韓)라고 하여 중국인 위만의 고조선과 원래의 고조선을 분리하기 위해 이전의 ‘고조선 왕조가 멸망했다’고 기록했다.

그런데 이후 나타나는 고조선(만조선)의 정체성은 이전보다 더 강화되고 한나라와의 투쟁도 더욱 심화되는 형태로 나타난다. 앞서 나온 ‘왕검에 도읍’이라는 기사로 보면, 고조선은 진한 교체기의 혼란을 틈타 BC 2세기 초반 전국시대의 연나라 영역이었던 고죽국 지역을 점령해 왕검성을 건설한 것은 사실로 인정된다. 이에 따라 고조선과 한나라의 갈등은 불가피했을 것이다.


극심한 갈등 속에서도 한나라는 고조선을 공격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BC 2세기 한나라 초기에 흉노는 만리장성 이북을 대부분 장악했고 고조선은 한나라와 흉노의 완충지대에 있었기 때문이다. 고조선은 이런 지정학적 요소를 이용해 한과는 중개무역의 이익을 취하고 흉노와는 우호적 관계를 유지한 것으로 보인다.

사기“흉노의 좌현왕과 그 장수들은 주로 동방에 살고 있는데 예맥과 조선에 접하고 있다”(史記 匈奴列傳)는 기록은 흉노의 구체적인 위치, 조선과의 관계를 직접 보여준다. ‘흉노가 조선과 예맥에 접한다’는 말은 우리가 ‘오랑캐’라 부르던 동호·선비·오환·숙신 등은 서로 다른 민족이 아니며 중국이 흉노라 부르는 민족임을 알 수 있다.

한서“(한무제는) 동으로는 조선(朝鮮)을 정벌해 현도군과 낙랑군을 일으켜 흉노의 왼팔을 잘랐다”(“東伐朝鮮 起玄<83DF> 樂浪 以斷匈奴之左臂” 漢書 卷73 韋賢傳)고 한다. 이 표현은 중국이 흉노와 고조선을 동일 계열의 민족으로 보고 있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만약 고조선 왕 만(滿)이 중국인이라면 고조선은 흉노보다는 한나라와의 외교를 강화했겠지만 고조선은 오히려 흉노와 더 가까웠다. 바로 이 점에서도 만(滿)은 중국인일 수가 없다.


BC 2세기는 고조선이 저력을 보여주는 시기였다. 춘추 전국시대의 수많은 제후국이 멸망해 사라졌지만 고조선만은 의연히 존재하면서 한나라와 흉노의 세력관계를 적절히 이용하고 그 사이에서 이익을 취해 거의 한 세기를 번영했다. 그러나 기회만 노리던 한나라는 BC 129~119년 북방을 공격했고 흉노세력이 약화되자 본격적으로 고조선을 침공했다.

그로부터 11년 후 한나라와 장기간 대치하던 고조선은 BC 108년 결국 한(漢)에 의해 무너졌다. 그러나 고조선과 한의 전쟁기록은 고조선의 전쟁수행 능력이 상당했음을 보여준다. 사기에 한나라가 육·해군을 동원해 1년 동안 공격하였으나 자중지란으로 계속 실패하자 ‘한족의 전매특허’인 이간계(離間計)로 조선을 정벌했다고 나온다.

 

조선을 한나라에 팔아넘긴 5대 매국노(임신5적)들인 참(參), 한음(韓陰), 왕겹(王<550A>), 장(長), 최(最) 등은 한나라의 작은 제후로 봉해졌다. 참은 홰청후(<6F85>淸侯), 한음은 적저후(狄<82F4>侯), 왕겹은 평주후(平州侯), 장은 기후(幾侯), 최는 온양후(溫陽侯)가 됐다.

이들 봉지가 대부분 고죽국이나 왕검성에 가까운 곳이다. 사기색은(史記索隱)은 위소(韋昭) 등의 주장을 인용해 “홰청과 온양은 제(산동반도), 적저는 발해(渤海), 평주는 양부(梁父), 기는 하동(河東)”이라고 했다. 이들 봉지가 고조선 땅이란 분명한 증거는 없지만, 일반적으로 봉지는 자신이 속한 곳의 땅인 경우가 있기 때문에 5개 봉토의 분포는 고조선 영역이 일부는 산동 북부까지 미칠 수도 있다는 또 다른 증거일 수 있다.

-------------------------------------------------------------------------------------------------------------------------------------------

 

8. 고조선 유민 추, 옛 고죽국 땅서 고구려 건국 시동

 

 

중국 사서엔 고구려 발상 지역이 중국 란하~현재 선양 지역으로 나타난다. 초기 고구려 영역 가운데를 대릉하가 흐른다. 대릉하 상류에는 조양이란 지역이 나타난다. 아침을 뜻하는 조(朝)와 햇빛을 뜻하는 양(陽)이다. 이조양은 우리말로 아사달이라는 뜻이 담겨있다고 한다. 아사는 아침을, 달은 벌판을 의미하는데 조양이 아침해가 뜨는 벌판이라는 뜻이라고 보는 것이다. 사진은 현재의 조양시와 시를 가로지르는 대릉하다. [사진=권태균]

 

⑦고조선과 고구려


BC 108년 고조선은 멸망했다. 제대로 된 기록도 남기지 못한 채 역사에서 사라졌다. 흉노와 더불어 만리장성 이북을 지배했던 고조선의 붕괴는 거대한 유민의 파도를 일으켰다. 첫 갈래는 고조선 옛터에 남은 사람들이다. 그들은 부여에서 유입된 세력들과 함께 고구려를 태동시켰다.

후한서(後漢書)“예와 옥저, 고구려는 본래 모두가 옛 조선 지역” (東夷列傳濊)이라 했고 수서(隋書)에는 “고려(고구려)의 땅은 본래 고죽국이었다”고 했다(裵矩傳). 구당서“고려는 본래 고죽국이다. 주가 기자를 봉하여 조선이라 했다.” (“高麗本孤竹國 周以封箕子爲朝鮮,” 舊唐書裵矩傳)고 한다. 즉 수·당 시대에는 ‘고죽국=조선=고구려’로 파악하고 있다. 고죽국은 현재의 베이징 동부 지역이므로 고구려는 고조선 옛 땅에서 시작된 것이다.

고구려에 대한 최초의 정사 기록은 한서로 “한무제 원봉 3년(BC 108) 조선을 멸망시키고 다음 해 4군을 설치하는데 현도(玄<83DF>)군에 고구려현이 설정되었다”는 것이다. 한서에는 왕망이 말하기를 “하구려(고구려 비칭)는 유주에 속하고 4만5000여 호에 인구는 22만 명”이라면서 그 주석에 “현도군은 과거 진번에 속했고 조선 오랑캐의 나라(地理志下 玄<83DF>郡)”라고 했다.



 

 

한사군은 고조선 옛 땅에 설치한 4개 행정구역으로 BC 108년 낙랑·임둔·진번을, 이듬해에 현도군을 설치했다고 한다. 조선시대까지 현도를 현재의 함흥으로 봤다. 그런데 한서“현도군은 유주에 속한다…현도군은 고구려, 상은태(上殷台), 서개마(西蓋馬) 등의 세 현”이라고 했다. 유주는 후한 때의 주 이름으로 현재의 베이징~랴오닝(遼寧)성 남부 지역이다. 여기에 “고구려는 본래 고죽국”이라는 수서구당서의 기록을 고려한다면 현도는 결코 함흥이 될 수 없다. 현재의 베이징에 가까운 지역이다. 이를 한서수경주(水經注)가 검증해준다.

한서“고구려현의 요산은 요수(遼水)가 나오는바 서남으로 요대(遼隊) 에 이르러 대요수(大遼水)로 들어간다.” (“高句驪 遼山遼水所出 西南至遼隊入大遼水.”(地理志 玄<83DF>郡)라고 한다. 수경주에 따르면 대요수와 합류하는 백랑수(白狼水)는 교려(交黎)를 지나는데 이곳이 바로 창려(베이징 동남)다.

문제는 요수를 달리 요하(遼河)라고도 하고 고대에는 상류를 낙수(樂水), 하류를 대요수라고도 했다는 점이다. 수서“요산은 북위가 요양(遼陽)이라고 했는데 … 개황 16년(596) 요주에 속했다(遼山后魏曰遼陽 … 十六年屬遼州)”고 했다. 요양은 현재의 선양(瀋陽) 또는 랴오양(遼陽)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현도군 고구려현의 위치는 현재의 란하(루엔허)에서 선양 가운데 위치했음을 알 수 있다.

한서의 현도군에 관한 주석으로 “과거에는 진번군으로 조선 오랑캐(朝鮮胡)의 나라이고 고구려(高句驪)현은 구려 오랑캐(句驪胡)다” (地理志下 玄<83DF>郡)라는 기록과 위략(魏略)“연나라 사람 위만이 오랑캐의 옷(胡服)을 입고”라는 기록을 보면 중국이 고구려와 조선을 동일 계열의 호(胡)로 보고 있음이 나타난다. 이를 동이(東夷)라는 개념과 결부시키면 동호(東胡)라는 보통 명사가 도출된다. 중국에서 호(胡)는 일반적으로 흉노(匈奴)를 말한다.

고조선 멸망 후 전한 시대(BC 202∼AD 7)를 통틀어 고구려에 대해 제대로 된 기록은 발견되지 않는다. 즉 고조선이 무너지고 100여 년 뒤인 AD 1세기 초까지도 고구려는 건국되지 않고 한나라의 자치현(自治縣)과 같은 형태로 있으며 압박을 받고 있었다.

한서에는 “(AD 12년) 왕망(王莽)이 고구려를 징발하여 오랑캐들을 정벌하려고 하였는데 이를 따르지 않았다. 이에 고구려인들을 강박하자 오히려 요새 밖으로 달아났다. 나라의 법을 범하고 도적질을 일삼자 요서(遼西) 대윤(大尹) 전담(田譚)이 이를 추격하다 오히려 피살되었다. 주군(州郡)에서는 이 모든 책임이 고구려후(高句麗侯)인 추(騶)에 있다고 하였다…예맥이 큰 반란을 일으키자 엄우(嚴尤)에게 명하여 이들을 정벌하게 하였다. 엄우는 고(구)려후 추(騶)를 유인하여 오게 한 후, 머리를 베어 장안에 전하였다”(王莽傳)라고 한다.

추(騶)는 한편으로는 명목상 한나라의 제후였지만 북방 세력(흉노)과도 긴밀했기 때문에 중화 편집증을 가진 왕망(신 황제)의 요구를 거절한 것이다. 추가 왕망의 요구를 거절한 것은 고구려가 정상적인 정벌이 불가능할 정도로 강한 세력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추는 한나라의 위계에 빠져 처참한 최후를 맞았다.

이 사건은 고구려 자치현 사람들에게는 충격이었으며 민족적 각성을 일깨우는 중요한 계기가 됐을 것이다. 이 ‘추’가 후일 ‘주몽’의 이름을 빌려 신격화된 것으로 추정된다. 문헌 기록상 기원 전후로 추(騶)를 제외하고는 고구려의 건국 시조에 해당되는 어떤 실존 인물도 없기 때문이다. 주몽·추모(鄒牟) 등은 ‘추(騶)’의 전음으로 추정된다.

양서(梁書)에는 “(서기 32년) 고구려왕이 사신을 파견하고 조공하였고 이때 비로소 고구려왕을 칭하였다”(高句麗傳)라고 한다. 즉 대무신왕 12년경에 왕을 칭했다는 것이므로 고구려는 바로 이 시기에 서서히 고대국가의 형태를 갖추게 된 것이다.

 

고려시대 삼국사기에는 태조 대왕(53~146)을 국조왕(國祖王), 즉 건국 시조라 하는데 이것은 바로 이 시기에 고대국가의 면모를 일신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다만 태조왕의 생몰연대(97세 서거)가 당시 상황으로 보아 상식적이지 못하므로 여러 왕들의 업적을 통합해 이를 건국 시조화한 것이란 해석이 가능하다.

고구려 전문가인 서울대 노태돈 교수는 삼국사기의 건국신화는 4세기 소수림왕(371∼384) 때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고 부여계에 대한 우월성을 강조하기 위해 확립됐다. 이때 고구려 초기왕계도 함께 정립됐을 것이다. 소수림왕은 고구려를 구성하는 여러 집단과 귀족들을 결속시켜, 왕실을 중심으로 단결을 도모하기 위해 시조에 대한 신성화 작업을 강행했을 것”이라고 한다.

고구려는 같은 계열인 부여계를 정치적으로 통합하기 위해 부여계의 신화를 흡수한 것으로 추정된다. 고구려 신화는 부여 신화의 복사판이다. 삼국사기“동부여왕 해부루가 죽고 금와(金蛙·금개구리)가 즉위하였는데, 이때 금와왕은 태백산 남쪽 우발수(優渤水)에서 하백(河伯)의 딸 유화(柳花)를 만났다…어느 날 유화는 햇빛을 받고 임신하여 알 하나를 낳았다. 그 알에서 남아(男兒)가 나와 성장하니 이가 곧 주몽이다” (고구려 본기)라 한다. 이 신화에는 ‘햇빛에 의한 회임’과 ‘금와왕’이라는 두 가지 중요한 역사적 코드가 숨겨져 있다.

첫째, ‘햇빛에 의한 회임’과 관련된 이야기를 갖고 있는 실존 인물은 기록상 동호의 영웅 단석괴(檀石槐)가 유일하다. 삼국지“흉노의 한 제후가 3년 전장에서 돌아오니 아내가 아이를 낳았다. 제후는 아이를 죽이려 했다. 아내가 ‘낮에 천둥소리가 들려 하늘을 보니 번쩍이는 빛이 입에 들어와 임신하여 출산했으니, 이 아이는 필시 크게 될 것’이라고 했다. 제후가 안 믿으니 아내는 친정집에 아이를 보냈다. 아이는 자라면서 기골이 크고 용맹할 뿐 아니라 지략이 뛰어나 부락이 그를 경외하고 복종하여 마침내 부족장으로 추대되었다”고 한다.

 

단석괴는 선비족(동호의 후예)의 영웅으로 현재의 허베이(河北)에서 둔황(敦煌)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을 다스린 지배자였다. 고구려는 장렬히 산화한 고구려후 추의 일생을 존숭하여 동호의 영웅인 단석괴의 출생신화에 부여계의 신화를 흡수, 북방 패자임을 과시하기 위해 신화를 강화한 것이다.

둘째, 고구려와 부여의 원뿌리가 되는 나라의 왕을 금와왕(金蛙王)이라고 한 부분이다. 금와왕(금개구리왕)은 알타이인의 시조다. 알타이에 퍼져 있는 알타이인의 아버지, 탄자강 설화는 “옛날 알타이에 탄자강(개구리왕이란 뜻)이란 노인이 살았는데 하루는 붉은 개구리와 싸우던 흰 개구리를 구했다. 이 일로 그는 소원을 들어주는 댕기를 선물로 받아 부자가 되고 꾸르부스탄(하늘의 신)의 막내딸을 아내로 맞는다” (양민종 알타이 이야기)라는 것이다. 따라서 부여의 기원이 바로 알타이 지역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알타이 지역의 민담과 설화는 1940년대 러시아 민속학자 가르프와 쿠치약 등에 의해 집중적으로 채록되었는데, 알타이 지역은 콩쥐팥쥐 우렁각시 나무꾼과 선녀 혹부리 영감 심청전 등의 원산지다. 이 가운데 나무꾼과 선녀는 만주족의 건국신화다. 물론 부여·고구려의 신화가 거꾸로 알타이로 넘어갔을 가능성도 있다. 향후 연구 과제다.

위략(魏略)“옛날 북방에 고리(<69C0>離)라는 나라가 있었다. 그 나라 왕의 시녀가 임신을 하자 왕이 죽이려 하였다. 그러자 시녀가 말하기를 닭 알 크기의 기운이 (하늘에서) 내려와 아이를 가지게 되었다고 하였다… 그 아이의 이름은 동명(東明)인데 활을 잘 쏘았기 때문이다… 이후 동명은 수도를 건설하고 부여를 다스렸다” (三國志 魏書 扶餘傳 주석)는 기록이 있다. 부여는 바로 고리국에서 나왔다는 말이다.

이어 삼국지(三國志)에 “고구려는 북으로는 부여에 접하고 있다… 동이들이 과거에 하던 말에 따르면 고구려는 부여의 별종으로 언어라든가 다른 대부분의 일들이 부여와 같다고 한다”(魏書 高句麗)라고 했다. 부여세력 일부가 고구려 건설에 합류했음을 알 수 있다. ‘고조선·부여계→고구려’라는 역사의 흐름이 생겨난 것이다.

위략에 나타나는 고리(<69C0>離)는 이후 고리(高離:삼국지(三國志)), 고리국(藁離國), 탁리(<69D6>離:논형(論衡)), 삭리(索離), 콜리(忽里: Khori), 고려(高麗), 구려(句麗), 고구려(高句麗) 등으로 나타난다. 사기당서(唐書: 940) 당운(唐韻: 751) 또는 명나라 때의 정자통(正字通: 1671)에서 ‘려(麗)’라는 글자의 발음은 ‘[리(li)]’로 난다. 따라서 대체로 위의 발음은 ‘까오리’에 가깝다.
고구려는 요동에서 한나라 세력을 몰아내는 한편 부여로 세력을 확대했다. 동시에 추의 죽음을 기리고 거기에 부여와 단석괴 신화를 결합해 정치적 이데올로기로 삼은 것이 고주몽의 건국신화라고 볼 수 있다. 고조선이 사라진 옛터에, 고주몽으로 환생한 고구려왕 추(騶)의 수급(首級)이 흘린 혈흔(血痕) 위로 새로운 역사의 꽃이 피어난 것이다.



 

9. 고조선의 계승자들 - 선비족도 고조선의 한 갈래, 고구려와 형제 우의 나눠[ 끝]

 

 

1 고조선 후예들이 외부의 공격으로 몰려 집결한 곳으로 후에 선비족 발상지로 알려진 알선 동굴. 헤이룽장성과 몽골이 접하는 지역에 있다. 선비족은 AD1세기께 이곳을 떠나 초원으로 이동했다. 이 지역을 흐르는 강이 아리하(阿里河)인데 이 이름은 아무르강, 압록강, 한강, 알천(경주)에 반영돼 있어 민족 이동의 징표가 된다.

 

고조선 멸망 뒤 유민 일부는 고조선 남부와 해안을 중심으로 부여에서 유입된 세력과 연합해 고구려를 건국한다. 다른 갈래들은 고조선 북부에서 국가 형태를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선비나 오환으로 불리며 할거했다. 크게 보면 고조선 후예들은 고구려부(高句麗部)와 선비오환부(鮮卑烏桓部)로 나눠지고, 선비오환부는 다시 모용부(慕容部)·탁발부(拓拔部)·우문부(宇文部)·단부(段部) 등으로 분류된다.

 

 

2 알선동 지역에서 발견된 명문(銘文). 위서에 따르면 북위의 태무제 때(443) 지역 부족들이 나라의 발상지를 발견했다고 보고했다. 태무제는 동굴에서 제사를 지낸 뒤 축문을 새기고 돌아왔다. 축문은“위대한 선조들 덕에 천하를 다스리게 됐고 조상의 은덕으로 무궁 발전할 수 있도록 축원한다”는 내용이다.   [권태균 제공]

 

BC 2세기 한나라는 ‘흉노’를 견제하는 완충지대를 만들기 위해 요하상류의 동호(東胡·선비오환부)를 한나라 5부 북쪽으로 옮기려 했다(後漢書 烏桓鮮卑列傳). 그런데 흉노가 이를 간파해 동진하자 동호는 선비산(鮮卑山)과 오환산(烏桓山)으로 달아났다. 그러자 이들을 선비 또는 오환으로 부르게 됐다(烏桓鮮卑列傳)고 한다. 이들의 명칭이 시기에 따라 임의로 붙여진 것임을 알 수 있다.

전국책(戰國策) “조(趙)나라… 동으로 연나라와 동호의 경계가 있다” 하고 사기“연나라 북쪽에는 동호와 산융(山戎)이 있고 이들은 각기 흩어져 계곡에 거주하고 있다… 흉노의 동쪽에 있어 동호라고 했다(匈奴列傳)”고 하는데 동호 지역이 모두 고조선 영역이다. 따라서 동호는 고조선인들을 말한다.

 

 

그런데 오환이 처음 나타나는 사기의 기록엔 “연나라는… 북으로 오환부여, 동으로 예맥조선과 서로 접하고 있다(貨殖列傳 烏氏<502E>)”고 한다. 이 기록은 흉노의 동진으로 동호가 오환산으로 들어가 오환족이 됐다는 후한서와 어긋나 의심스럽다. 또 부여는 북만주 일대이므로 연나라 ‘북’이라면 고조선 지역인데 사기는 이를 오환 지역으로 본 것이다. 결국 부여와 조선이 모두 예맥의 국가인데 ‘오환부여’니 ‘예맥조선’이니 하므로 오환은 예맥의 다른 표현일 수도 있다.

오환산은 적산(赤山), 즉 울라간(Ulagan)에서 나왔을 것으로 추정된다. 요사 지리지에 의하면 “오주(烏州)는 원래 오환의 땅으로 요하(遼河)·오환산(烏桓山) 등이 있으며 경주(慶州)에는 적산(赤山)이 있다”고 한다. 오환산은 현재 홍산문화의 중심지인 츠펑(赤峯)이다. 츠펑은 몽골어로 ‘울라간 하다(Ulagan Hada)’라고 하는데 원사(元史)에도 적산(赤山)으로 명기돼 있다. 붉은 산(울라간)은 태양을 상징하는 것으로 ‘아사달’ ‘조선’과 연관되지만 아직 구체적인 문헌적 연계는 찾지 못하고 있다.

흉노와 후한의 대치 국면에서 고조선은 번영하지만 한 무제의 침공으로 흉노는 후퇴하고 고조선은 멸망한다(BC 108). 많은 유민이 발생하고 이들 대부분은 잡거(雜居)한다. AD 46년을 전후해 북방 일대는 메뚜기의 습격으로 수천 리가 붉게 변하고 초목이 말라 죽어 황무지가 되는 등 천재지변이 발생한다(後漢書 南匈奴列傳). 흉노는 내분으로 남북 흉노로 분열했다(48년).

 

이를 틈타 고조선의 후예(또는 동계)인 오환선비는 흉노를 막남(莫南) 지역까지 몰아 오르도스(현재 네이멍구(內蒙古) 바우터우 인근) 일대까지 세력을 확장했다(後漢書 卷90 烏桓鮮卑列傳).

고조선은 2세기께 선비족을 중심으로 재통합된다. 옛 고조선의 북부인 요서 지역에서 단석괴(檀石槐)는 후일 칭기즈칸만큼 강력한 세력을 형성했다. 단석괴는 광활한 영역을 통치하기 위해 제국을 동·중·서부로 나눠 각각 대인을 배치했다. 동부는 현재의 허베이(河北) 핑취안(平泉)~랴오양(遼陽), 중부는 탕산(唐山)~베이징(北京), 서부는 베이징~둔황(敦煌)에 이르는 지역이었다.

단석괴 사후 2세기 말 이 지역은 구력거(丘力居)로 이어진다. 황제를 칭한 그는 영역을 확장해 청주·서주·유주·기주 등 네 주를 점령했다(三國志 魏書오환전). 3세기 초에는 구력거의 조카 답돈(踏頓:?~207)이 황제위를 이었다.

 

당시 북중국의 실력자였던 원소(袁紹:? ~ 202)는 답돈과 우호 관계를 맺고 친척의 자식을 자기 딸로 꾸며 시집을 보냈다(魏書 무제기). 답돈은 위 무제 조조(曹操)의 정벌 때 참수됐다. 이 시기를 전후로 고구려는 옛 고조선 남부 지역인 요하에서 벗어나 한반도 북부 지역으로 이동한 것으로 보인다.

그 후 가비능(軻比能:?~235)이 여러 부족을 통솔해 위(魏)나라와 대립하다 암살되자 분열돼 모용부·탁발부·우문부·단부로 재편됐다. 이들 가운데 모용부가 가장 강해 전연(前燕:337∼370)과 후연(後燕:384∼409)을 건국했다.

4세기엔 ‘조선’이라는 이름이 다시 나타난다. 진서“모용외가 건무(후한 광무제의 연호) 초에 정벌 전쟁을 하여 공이 크게 쌓여 조선공(朝鮮公·조선왕)에 봉해졌고 이를 모용황이 계승하였다(晉書 卷109)”고 했다. (고)조선의 이름이 고구려 아닌 모용황으로 이어진 것이다.

진서에는 모용외(慕容<5EC6>)가 조선공에 봉해진 뒤 모용황(재위 337∼348)이 이를 계승하자 내분이 일어났고, 모용황은 이들을 진압하기 위해 험독(險瀆)으로 갔다는 기록이 있다(晉書 卷109). 수경주(水經注)나 청나라 고염무의 일지록(日知錄)에 따르면 이 지역이 바로 현재 베이징 인근으로 과거의 고죽국이다. 이로써 베이징 인근~요동에 이르는 고조선 옛 지역은 조선왕 모용외·모용황이 회복했다.

고조선이 멸망 450여 년 만에 더욱 강력하게 부활한 것이다. 조선왕 모용황은 기존의 고조선 영역뿐만 아니라 훨씬 더 남하해 북중국 주요부를 대부분 장악했다. 중국을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국호를 연(燕·전국시대 연과는 다름)이라고 했다. 이런 현상은 고조선의 후예들이 중국을 지배할 때 나타나는 보편적인 현상이다.

후연은 모용운(慕容雲)으로 이어진다. 진서(晉書)“모용운은 모용보(慕容寶)의 양자로 조부는 고화(高和)인데 고구려의 한 족속이다(慕容雲傳)”고 한다. 모용운은 즉위 후 성을 다시 고(高)씨로 하고 광개토대왕이 사신을 보내어 종족(宗族)의 예를 베풀자(408년), 시어사 이발(李拔)을 보내어 답례함으로써 종족 간의 유대감을 표시했다(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모용씨 세력이 약화된 뒤 탁발씨가 대두해 건설한 국가가 북위(北魏:386∼534)다. 북위 헌문제(454∼476)는 ‘고구려를 정벌해 달라’며 472년 백제 개로왕이 국서를 보내자 꾸짖으며 장수왕을 두둔했고, 장수왕에게 딸을 보낼 것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헌문제의 아들 효문제(471~499) 탁발굉은 고구려 왕족 고조용(高照容:469~519)을 황후로 맞았는데, 그녀가 유명한 문소황태후(文昭皇太后)로 다음 황제인 선무제(499~515)를 낳았다(魏書 文昭皇太后列傳). 선무제의 등극에 황족 일부가 반발하자 문소황태후의 오빠인 고구려의 고조(高肇)가 대군을 몰고 와 북위 조정을 장악했고, 남조 송나라의 대군을 격파하기도 했다(502).

“491년 장수왕이 서거하자, 북위의 효문제가 부음을 듣고 흰 위모관과 베로 지은 심의를 입고 동교(東郊)에서 거애(擧哀)하였다”는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의 기록에 따르면 효문제는 천자(天子)가 아니라 할아버지가 서거한 듯한 애도의 정을 보였다.

이 같은 전연·후연·북위·고구려의 관계는 모용부·탁발씨·고구려가 중국 북부 지역에 서로 다른 나라를 만들었지만 ‘고조선의 후예’라는 인식을 공유했음을 보여 준다.

6세기 북위의 멸망 수·당시대(7~10세기)가 열렸다. 수·당나라는 선비족 전통과 중국 한족(漢族)의 발달된 문화를 결합해 퓨전(fusion) 통치체제를 구성했다. 수나라를 건국한 양견(楊堅)은 한족과 선비족의 혼혈이었고 당나라를 세운 이연(李淵)은 양견의 이종사촌이었다. 전 서울대 박한제 교수는 호한융합(胡漢融合) 또는 호한체제(胡漢體制)라고 평가한다.

동아시아 최초의 거대 국제 국가 당은 ‘선비(鮮卑)의 나라’지만 한화가 극심했고 중국도 한·당나라를 중화의 꽃으로 보고 있어 이 시기를 고조선의 고유성(固有性)만으로 보기는 어렵다. 당나라는 그 정체성을 중립적, 비한비이(非漢非夷)로 파악해야 한다.

이 시기는 많은 북방민족이 한족으로 귀화 또는 편입했고 만리장성 이북에서 북방민의 고유성이 많이 상실되는 계기가 됐다. 고조선의 고유성은 만주에서 거란·고구려·발해가 유지했다.

10세기 번성했던 거란(요나라 중심세력)은 우문부의 후예다. 우문부는 모용부에 의해 궤멸된 뒤 남은 사람들로 후에 거란으로 불렸다. 위서에는 “거란국은 고막해(庫莫奚)의 동쪽에 있는데 고막해와 같은 민족으로… 선조는 동부 우문의 별종이고 처음 모용원진(慕容元眞)에게 격파돼 송막지간(松漠之間)으로 달아나 숨었다(魏書 庫莫奚 契丹)”고 기록했다. 송막지간은 현재 네이멍구다.

요사(遼史) “요나라는 그 선조가 거란이고 본래는 선비의 땅이다. 요택(遼澤)에 살았다(“遼國其先曰契丹 本鮮卑之地 居遼澤中” 遼史 地理志)”고 한다. 이 요택(요하의 삼각주 유역)은 대릉하~요하 유역의 세계 최대 습지로 전국시대에는 고조선 땅이었는데 연나라의 침입으로 고조선이 밀려간 서쪽 국경 지역으로 추정된다.

나아가 요사“요나라는 조선의 옛 땅에서 유래했으며, 고조선과 같이 팔조범금(八條犯禁) 관습과 전통을 보존하고 있다” 했고 요사의 지리지에는 “(수도의 동쪽 관문인) 동경요양부는 본래 조선의 땅(“東京遼陽府本朝鮮之地” 遼史 地理志2)”이라고 기록한다. 고조선의 후예인 거란(동호의 후예)은 모용부·탁발부 등 타 부족의 기세에 눌려 지냈지만 이전의 북위, 수·당과 달리 고조선의 고유 전통을 유지하면서 고조선의 옛 지역을 모두 회복하고 더욱 세력을 키워 중원으로 진출했다.

고조선은 중국의 전설 시대부터 존재했고 BC 7세기엔 춘추 5패나 전국 7웅 같은 국가 형태로 유지됐다. BC 4세기께 보다 독립적인 고대 국가를 형성해 연나라와 경쟁했고 BC 3세기 말에는 진(秦)과 국경을 맞대며 화평을 유지했다.

BC 2세기 흉노와 한나라의 각축 속에서 번영했으며 멸망 후에는 남으로는 고구려와 신라, 북으로는 선비오환에 의해 지속적으로 부활되고 계승돼 왔다. 고조선의 후예들은 4C 모용씨 이후 중국 지배를 본격화하는 특성이 나타나면서 중국 대륙으로 남하하기 시작했다.

 

이후 대부분의 중국 비(非)한족 왕조는 이들이 건설했다. 그러나 중국을 지배하는 과정에서 고조선의 고유성을 상실했다. 고조선의 고유성은 주로 고구려·거란(요)·금·고려·청 등에 의해 유지됐다.

[출처] : 김운회 의 新고대사 / 단군을 넘어 고조선을 넘어 / 중앙 선데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