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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에 달가듯이 2014. 12. 10. 12:42

역사 속의 전쟁 이야기  [1800년대] 

 

 

1805년 10월 21일

 - 영국 넬슨 제독, 트라팔가 해전에서 프랑스ㆍ스페인 연합함대 격파

 

 

1805년 10월 21일, 호레이쇼 넬슨(Horatio Nelson) 제독이 지휘하는 영국 함대가 스페인의 트라팔가 앞바다에서 프랑스와 스페인의 연합 함대를 격파합니다.

당시 유럽대륙을 석권한 나폴레옹은 영국 침공을 결심하고 도버 해협 연안에 2천여척의 수송선과 13만 명의 지상군을 집결시켰습니다. 나폴레옹의 계획은 프랑스의 주력함대로 프랑스항구를 봉쇄하고 있는 영국 해군을 서인도 제도로 유인하고, 영국 함대가 분산된 틈을 타 영국 해협을 장악한다는 것이었습니다.

 

1805년 8월 24일, 나폴레옹은 프랑스 해군의 빌뇌브 제독에게 “6시간만 영국 해협을 장악하면 프랑스군은 영국 본토에 상륙할 것이다. 그러니 6시간만 넬슨의 발을 묶어 두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사실 이 명령은 현실성이 없는 것이었죠. 대규모의 부대를 상륙 시키는 데는, 6시간이 아니라 6일이 걸려도 어려운 일이었으니까요.

 

더군다나 상대는 영국 해군이었습니다. 대륙에서는 프랑스군이 연전연승했지만, 프랑스 해군은 이미 몇 차례 영국 해군에게 패배를 당한 터였습니다.  불합리한 명령을 받은 빌뇌브 제독이지만 함대를 출항시킬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폴레옹의 전제정치 아래서 유능한 해군 장교들은 숙청당하고, 군대에서 쫓겨나지 않으려면 황제의 명령에 복종해야 했으니까요.  

 

 

호레이쇼 넬슨 제독. (Horatio Nelson, 1758.09.29~1805.10.21)

 

 

 

 

한편, 프랑스와 스페인 함대가 스페인의 카디즈 항에 입항했다는 소식을 들은 넬슨은 영국함대를 이끌고 9월 28일에 카디즈 앞 바다에 도착합니다. 넬슨 함대는 전열함(영국 해군은 군함을 6등급으로 분류했는데, 전열을 유지할 수 있을 만큼 강력한 무장과 방어력을 갖춘 대형함선(1~3급)을 전열함(Ship of line)이라 불렀습니다) 27척, 프리깃함 4척, 함포 2,500문에 승조원 2만명 규모였습니다.

 

10월 18일 , 빌뇌브 제독은 ‘함대를 지휘하여 나폴리로 향하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영국 함대의 주력을 유인하기 위한 작전이었죠. 출동 명령을 받은 다음 날, 프랑스-스페인 연합함대 33척은 닻을 올리고 카디스항을 떠납니다.

 

빌뇌브 함대가 출항했다는 소식을 영국 감시선으로부터 들은 넬슨은 최대 속력으로 트라팔가 곶을 향하여 밤을 세워 항해했습니다. 10월 21일 새벽, 드디어 양측의 함대는 바다위에서 마주칩니다. 넬슨은 예하 함대를 둘로 나누어 각각 종렬진을 편성 프랑스-스페인 함대로 접근합니다.

 

한편 빌뇌브 함대는 전방부대 12척은 2열 종진, 본대 21척은 3열 종진으로나아가고 있었는데, 영국 함대가 접근하자 빌뇌브 제독은 모든 함선에게 단종진 전열을 펴도록 명령합니다. 이 명령으로 프랑스-스페인 함대는 옆바람을 맞게 되면서 혼란이 야기됩니다.

 

설상가상으로 몇 년전 나일해전에서 넬슨 제독에게 참패를 당한 기억이 있는 빌뇌브 제독은 마지막 순간 배를 돌려 다시 카디스로 돌아가려고 결심합니다. 적을 눈앞에 두고 꽁무니를 뺄 생각을 했던거죠. 그는 전 함대에게 북쪽으로 180도 반전할 것을 명령합니다.

 

 

공격을 눈앞에 둔 순간에 뱃머리를 돌려 새 진형을 만들려하니 전열은 흐트려지고, 그러는 사이 영국군 함대의 선봉은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습니다. 넬슨은 둘로 나눈 자신의 함대 중 제1전대를 직접 지휘하여 프랑스-스페인 함대의 중앙을 격파함으로써 전열을 끊고, 부사령관 콜링우드가 지휘하는 제2전대로 하여금 적의 후미를 돌파할 계획이었습니다.

 

10월 21일 정오, 드디어 넬슨의 기함 ‘빅토리’(HMS Victory)에 교전 신호기가 올라갑니다. “영국은 여러분 각자가 자신의 의무를 다해줄 것을 기대한다” ‘빅토리’함이 빌뇌브 제독의 기함 ‘뷔상토르’를 향해 돌진해  들어 갑니다.

 

이른바 ‘넬슨 터치’라 불리는 전술로 적 함대의 중앙을 기습적으로 격파해 전열을 끊은 다음 적함들을 각개 격파하겠다는 의도였습니다. 순풍을 탄 빅토리함의 50문의 대포가 뷔상토르함을 향해 불을 뿜었습니다.

혼전을 거듭한 끝에 넬슨의 제1전대는 프랑스-스페인 함대의 전열을 끊는데 성공했고, 콜링우드의 제2전대도 일사분란하게 움직입니다. 두 함대간의 전투는 트라팔가 곶 해상에서 큰 파도에 밀리면서 치고받기를 계속했죠

 

 

 

오후 2시 프랑스-스페인 함대의 기함 ‘뷔상토르’가 항복했고, 빌뇌브 제독도 포로가 됩니다. 프랑스-스페인 연합함대의 33척 중 19척이 격침되거나 영국 해군에 나포되고, 6천명이 죽거나 부상을 입었고, 2천명이 포로가 되었죠.

 

승리를 거둔 영국 함대는 전열함 단 한척이 반파되었을 뿐 침몰한 함정은 없었고 1천6백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습니다. 그러나 그 사상자 중에는 영국 함대의 사령관 넬슨제독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빅토리함 후부 마스트의 높다란 다락에 선 채로 전투를 지휘하던 넬슨의 가슴에 프랑스군이 쏜 총탄이 박힌거죠. 그는 숨을 거두기 직전 “나는 내 의무를 다했다. 하느님께 감사한다”는 짤막한 말을 남깁니다. 

 

 

넬슨의 죽음은 이순신 제독의 죽음 같이 극적인 것이었습니다.

 

 

트라팔가 해전의 결과로 영국을 정복하려는 나폴레옹의 야심은 물거품이 되었고, 영국 해군은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했습니다. 이는 영국이 19세기 내내 세계의 바다를 지배함으로써 해가 지지 않는 대영제국의 기틀이 되었죠.

 

조선이 낳은 불세출의 영웅 이순신 제독처럼, 영국민들은 아직도 트라팔가와 넬슨을 잊지 않고 매년 10월 21일을 트라팔가 승첩의 날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2005년 10월 21일, 트라팔가 해전 200주년 기념 국제 관함식.

 

 

 

1815년 6월 18일 - 나폴레옹, 워털루에서 패전

 

1815년 오늘, 벨기에 브뤼셀 남쪽 15Km 지점의 ‘라 벨 아리안스’ (La Belle Alliance) 에서 벌어진 전투는 이후 유럽의 운명을 바꿔놓았습니다. 이 전투의 승자인 웰링턴 공은 자신의 사령부가 있던 곳의 이름을 따 이 치열했던 전투의 이름을 붙였죠. 그리고 후세 사람들은 이 전투를 ‘워털루’ 전투로 부르고 있습니다.

 

1812년 러시아 원정에 실패하고, 이듬해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제4차 대(對)프랑스 동맹군에게 패배한 나폴레옹은 프랑스 황제의 자리를 빼앗기고 지중해의 ‘엘바’섬으로 유배를 떠납니다.

 

하지만 전후처리 문제를 놓고 동맹국 사이에는 다툼이 벌어졌고 이 틈을 타 나폴레옹은 1815년 2월 25일 엘바섬을 탈출해 프랑스 남부에 도착합니다. 나폴레옹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된 ‘루이 18세’는 군대에 나폴레옹을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리지만, 나폴레옹을 잡으러 보낸 군대가 오히려 자신들의 옛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하자 외국으로 도망치고 말죠.

 

닷새 뒤인 2월 20일, 나폴레옹은 시민들의 열렬한 환호 속에 파리에 무혈입성 합니다. 권좌에 복귀한 나폴레옹은 자신에 반대하는 유럽 국가들과 협상을 통해 사태를 해결하려 합니다. ‘자신은 전쟁을 원하지 않고, 다만 프랑스만을 통치하겠다’는 것이었죠. 하지만 영국과 프러시아를 주축으로 한 동맹군은 프랑스에 전쟁을 선포하고 군대를 집결시킵니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Napoleon Bonaparte, 1769.8.15~1821.5.5)

전쟁을 피할 수 없다고 느낀 나폴레옹도 군대을 소집해 주력군 12만 4천명을 프랑스 북쪽, 벨기에로 이동시킵니다. 벨기에 브뤼셀에는 영국, 네덜란드, 벨기에 등의 연합군 9만 5천명이 주둔하고 있었죠. 또 벨기에 리에주에서 출발한 프러시아군의 규모는 11만 3천명이었습니다.

 

병력면에서는 프랑스군이 열세였지만, 연합군과 프러시아군이 합류하기 전에 각개격파 한다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본 나폴레옹은 신속하게 기동하여 ‘한 놈씩 손 봐 준다’는 계획을 세우죠. 먼저 나폴레옹은 '네이' (Ney) 원수에게 병력 2만 4,000명을 맡겨 웰링턴 공이 지휘하는 영국군과 ‘카트르 브라’ (Catre Bra)에서 전투를 벌이게 하고는 자신은 8만 병력을 이끌고 1월 16일, ‘리니’ (Ligny)에서 프로이센군과 일전을 벌입니다.

 

이 전투에서 1만 6천명의 사상자를 낸 프로이센군은 퇴각하죠. 프로이센군의 총사령관 ‘블뤼허’ 원수도 말에서 떨어져 부상한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나폴레옹은 프로이센군이 동쪽으로 퇴각했다고 오판을 합니다. 프로이센군이 심각한 타격을 받은 것은 사실이었지만 완전히 재기불능 상태에 빠진 것은 아니었죠.

 

나폴레옹은 17일 아침, ‘에마뉘엘 드 그루시’ 원수에게 3만 명의 병력을 지휘하여 프로이센군을 추적하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하지만, 그 시간 프로이센군은 동쪽으로 도주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웰링턴 군과의 합류를 위해 서쪽으로 진군 중에 있었죠. 한편, 억수같은 비가 쏟아지는 가운데 웰링턴 군은 ‘몽 쉘 장’에 방어진지를 구축합니다.

 

웰링턴 군의 전면에 포진한 프랑스군은 보병 사단을 전면에, 기병 여단을 후방과 좌,우 양익에 배치합니다. 웰링턴은 보병대를 프랑스군의 전면에 전개 시키고 그 후방에 기병대를 집중 배치했죠. 프로이센군이 도착할 때까지 최대한 시간을 벌어보겠다는 계산이었습니다.

마침내 6월 18일, 운명의 날이 밝았습니다. 그런데 웬일인지 나폴레옹의 공격개시 명령이 떨어지지 않고 있었죠. 전날의 비로 벌판이 진흙탕으로 변해버려 기병과 대포의 이동이 어렵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당시 심한 치질을 앓고 있었던 나폴레옹이 심한 고통에 시달린 나머지 진군명령을 내려야할 시기를 놓쳤다고도 합니다. 어쨌든 프랑스군에게 공격명령이 내려진 것은 오전 11시였습니다. 결과적으로 이것이 전투의 승패를 갈라놓았던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하게 됩니다.   

 

프랑스군은 포격을 통해 보병사단의 진격로를 여는 한편, 웰링턴군의 주력을 유인하기 위해 프랑스군 좌익에 있던, 전략적으로 별 가치가 없는 위그몽성 저택을 집중적으로 공격하고 있었습니다. 웰링턴으로 하여금 이곳이 프랑스군의 목표라고 믿게 하려는 의도였죠.

 

하지만, 웰링턴은 이에 넘어가지 않고 자신의 예비 병력을 풀지 않았습니다. 웰링턴은 방어에 전력을 다하면서 프러시아군이 도착하기를 기다리고 있었죠. 연합군의 주저항선은 전진해 오는 프랑스군에 대해 가로로 긴 3Km의 산등성이였습니다.

 

양측의 전력이 비슷한 상황에서 나폴레옹은 프로이센군을 추격하기 위해 내보낸 ‘그루시’ 원수를 불러들이기 위해 전령을 보내지만, 그루시 장군은 엉뚱한 곳에서 프로이센군을 찾고 있었습니다. 정오 무렵, 멀리서 대규모 군대가 이동하는 것이 목격됩니다.

 

하지만 나폴레옹이 애타게 기다리던 그루시의 군대가 아니었죠. 웰링턴 군과 합류하기 위해 이틀을 달려온 프로이센군이었습니다. 다급해진 나폴레옹은 프로이센군의 진격로 쪽으로 예비 병력이었던 4개 보병사단을 급파합니다.

 

프로이센군이 웰링턴과 합류한다면 각개격파는 물 건너간 얘기가 되어 버리고, 프랑스군의 패배가 불 보듯 뻔한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네이' 원수의 기병 돌격.


기병 공격과 보병의 정면 돌격에도 웰링턴군의 전선이 열리지 않자 전황은 교착 상태에 빠집니다. 오후 4시, 다급해진 나폴레옹은 포격을 재개했고, 웰링턴은 포격으로 인한 병력 소모를 막기 위해, 병력을 능선 너머로 후퇴시킵니다.

 

이것을 영국군이 후퇴하는 것이라고 잘못 판단한 ‘네이’ 원수는 휘하의 기병을 총동원해 공격에 나섭니다. 원래 기병의 돌격은 강력한 돌파력으로 충격을 주어 적어 방어선을 뚫는 데는 유용하지만, 뚫린 방어선을 넓히고 진격로를 만드는 것은 보병의 역할이죠

 

그런데 용감하지만 의욕만 너무 앞섰던 네이 장군은 보병의 지원 없이 기병의 일제돌격을 명령한 것입니다. 멀리서 이를 지켜보던 나폴레옹은 놀라서 네이 장군의 돌격을 저지하려 했지만, 그에게는 돌격을 멈추게 할 수단이 없었습니다.

 

나폴레옹뿐만 아니라 웰링턴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죠. 지축을 울리며 달려드는 4천 8백 명의 기병 돌격 앞에 언덕 위에 있던 영국군 포병 11개 포대는 삽시간에 무너져 버렸고, 1만 4천명의 웰링턴 군 보병도 언덕 뒤로 물러나서 방진을 펴며 방어에 급급합니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승기를 잡기에는 영국군 보병의 방진이 너무도 견고했죠. 기병의 돌격도 보병의 총검 숲 앞에서는 무력했습니다.

 

 

스스로도 말을 네 마리나 잃어가며 선두에서 기병의 돌격을 지휘하던 네이 원수는 또다시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릅니다. 영국군 보병의 방진을 무력화시키기 위해서 정말 필요했던 것은 보병이었음에도, 오후 5시 네이 장군은 휘하에 남아 있던 기병 10개 연대 4천5백 명 모두를 긁어모아 기병 돌격을 명령한 것이었죠. 그에게는 기병 말고도 예비대로 보병 사단과 여단이 각각 하나씩 있었지만 말입니다.

 

만약 그가 이 보병대를 활용해 기병과 합동으로 공격을 펼쳤더라면 이미 한계에 달했던 영국군 보병의 방진을 무너뜨릴 수도 있었겠지만 상황은 이미 벌어지고 난 후였습니다.

 

뒤늦게야 자신의 실책을 알게 된 네이 장군은 보병에게 진격 명령을 내렸지만, 이미 프랑스군의 기병대는 만회할 수 없는 피해를 입고 있었죠. 더군다나 네이 장군은 기병의 아까운 희생으로 차지한 영국군 포대의 포들을 고스란히 내버려 두는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65문에 달했던 포들은 프랑스 기병대가 후퇴하고 난 뒤 고스란히 다시 영국군의 수중에 들어가 다시 프랑스군에 포탄을 날리기 시작했던 것이죠.

 

 

'웰링턴' (Arthur Wellesley Wellington, 1769.5.1~1852.9.14)

 

이제 전투의 주도권은 웰링턴 공에게로 넘어갑니다. 오후 6시, 프로이센군이 전장에 도착해 무너진 좌익을 보강하자 웰링턴은 보병을 4열 횡대로 산개시켰습니다. 나폴레옹이 최후로 투입한 근위대 8개 대대 병력조차 영국군의 치열한 포화 속에 단 2백 명 만이 남은 채 포위되고 맙니다.

 

프랑스 근위대의 지휘관 ‘캉브레’ 장군은 항복을 권유하는 영국군을 향해 ‘근위대는 죽어도 항복하지 않는다’며 마지막 저항의 의지를 불태웠지만, 우뢰와 같은 영국군의 포성 앞에 프랑스군은 속수무책으로 쓰러져 갑니다. 나폴레옹의 ‘100일 천하’의 종말이었습니다.

 

워털루 전투에서 프랑스군의 전사자 수는 5만 명, 영국군과 프러시아군은 각각 1만5천명과 7천명을 잃었습니다.  나폴레옹은 다시는 돌아 올 수 없는 남대서양의 세인트헬레나 섬으로 추방되었으며, 1821년 그 곳에서 눈을 감았습니다. 그의 나이 52세였습니다.

 

 

1818년 9월 12일 - 미국의 발명가 ‘리처드 게틀링’ 출생

 

 

1818년 오늘, 연발로 총탄을 발사하는 게틀링건을 고안한 미국의 발명가 ‘리처드 게틀링’이 노스캐롤라이나주 머니스넥에서 태어납니다.

 

게틀링은 어려서부터 기계조립에 남다른 재능이 있었으며,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농기구의 작동 모습을 관찰하고 농업용 기계를 발명하는 데 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의사이기도 했던 그는 이앙기, 대마파쇄기, 증기 경운기, 모터로 움직이는 자동 경운기 등을 발명해서 특허를 얻었죠. 하지만 발명가로서 게틀링의 이름을 역사에 남긴 것은 1862년 그가 만들었던 게틀링건이었습니다.

 

여러 개의 총신이 돌아가면서 탄환을 발사할 수 있는 속사화기인 이 화기의 초기 모델은 수동으로 크랭크축을 돌려 발사하도록 했기 때문에 기관총이라고 하기엔 좀 민망했지만, 개량형에는 전기 모터를 장착하여 그 성능을 향상시켰죠.

 

게틀링건은 1866년 미 육군에 의해 제식 무기로 채택될 당시에는 분당 600발을 발사할 수 있을 정도로 개량되었습니다. 특히 1898년 터진 미국-스페인전쟁에서는 미 육군과 해군이 사용하여 그 위력을 톡톡히 발휘합니다.

 

 

미 해군이 도입한 케틀링건.

 

애초 리처드 게틀링은 이 무기가 전쟁을 억제할 수 있는 무기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고 발명했다고 합니다. 당시에는 병력이 우세한 군대가 숫자가 적은 군대를 일방적으로 살육할 수 있었고, 약자는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죠.

 

게틀링은 자신이 고안한 무기가 병력의 우위로 약한 집단을 공격하려는 강대국의 도발을 억제하는 수단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었죠.

 

하지만 게틀링 건이 그 치명적인 성능을 과시했던 것은 미군의 아메리카 원주민 소탕작전, 영국군의 아프리카 침략 등이었습니다. (뭐 멀게 갈 필요 없이 우리나라의 동학 혁명군을 공격했던 관군과 일본군도 게틀링 건을 장비했습니다.) 여전히 강자를 더욱 강하게 해주는 수단으로 전락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개틀링건도 맥심이 발명한 수냉식 기관총이 나오면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됩니다. 거추장스럽게 큰 데다 기계식으로 동작하는 게틀링건의 발사속도에 비해 가스작동식의 맥심 기관총은 훨씬 가벼운데다 발사속도 역시 우위에 있었죠. 이 때문에 1, 2차 세계 대전 당시에는 게틀링건은 거의 자취를 감추었고 가스작동식의 기관총이 주종을 점하게 됩니다.

 

그런데 현대에 오면서 사라질 뻔한 게틀링건은 다시 군의 주목 받게 되었죠. 가스작동식 기관총은 하나의 총열을 사용하기 때문에 연발사격을 계속하면 총열이 쉽게 과열되었고, 재밍(총탄이 걸리는 것)이 생기면 기관총 자체가 무용지물이 되는 경우가 생겼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개틀링건은 총탄이 발사되든 말든 한번 돌아가면 자동으로 탄피가 빠지게 되어 재밍의 염려가 없었고, 여러 개의 총열을 사용하기 때문에 다수의 탄환을 장시간 발사해도 무리가 없었기 때문이죠.

 

제네럴 일렉트로닉사는 7.62mm탄을 사용하는 6연장 공냉식 전동 기관포를 개발하고, 이 무기를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불의 신 ‘발카누스’ (Vulanus)의 이름을 따서 ‘발컨 미니건’이라 부릅니다.

 
 
 

7.62mm NATO 탄을 사용하는 6연장 공냉식 전동 벌컨건 (GAU-17A).

 

발컨 미니건에는 7.62mm탄을 사용하는 것 외에도 5.56mm와 20mm 등 다양한 규격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무기는 현재도 항공기와 헬리콥터 등에 장착되어 사용되고 있죠. 게틀링이 만든 수동식 게틀링건은 전동식으로 발전하고, 이것이 오늘날 다양한 구경의 벌컨 미니건으로 발전해온 것입니다.


 

 

 

미 공군 A-10 공격기에 장착된 GAU-8 (30mm) 기관포.

 

 

1847년 9월 14일, 미군 멕시코시티 점령



1847년 9월 14일, 윈필드 스콧(Winfield Scott) 장군이 지휘하는 미 육군이 멕시코의 수도
멕시코 시티를 점령합니다.

 

1824년 치열한 독립투쟁 끝에 스페인 통치로부터 벗어난 신생 독립국 멕시코. 독립 당시 멕시코의 북부 영토는 지금의 텍사스, 네바다, 유타, 캘리포니아州를 포함하는 광대한 영역이었습니다.

 

이 지역의 개발을 위해서는 거주자들이 정착해야만 했는데, 신생 독립국의 능력으로는 한계가 있었지요. 그래서 이 지역을 개발하기 위해 정책적으로 미국으로부터 정착자들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는데, 바로 이것이 화근이었습니다.
 

1827년 텍사스의 미국 이주자들은 이미 1만2천명을 넘어섰고, 이 숫자는 5천 여 명에 불과한 멕시코 거주자들의 숫자를 훨씬 상회하는 숫자였습니다.

 

멕시코 정부는 미국 이주민들의 이주를 금지했지만 이미 때는 늦어서, 1836년 미국인들은 샘 휴스턴을 수장으로 하는 독자적인 텍사스 공화국 성립을 선포합니다. 멕시코 정부 입장에서는 외국 이민자들의 반란에 다름 아니었습니다.

 

 

 

알라모 요새 전투. 미국-멕시코 전쟁의 신호탄이었습니다.

 

멕시코 대통령 산타아나는 6천명의 병력을 동원, 텍사스州 산 안토니오 미국인 정착지의 알라모 요새를 공격합니다. 미국인들에게는 텍사스의 독립을 위해 최후의 한 사람까지 싸우다 전멸한 전투로 기억되는 이곳에서 2백 여 명의 미국인 정착자들이 사망합니다.

 

그런데 이 전투는 멕시코 입장에서는 크나 큰 실수였죠. 6천명의 멕시코군 주력이 13일동안 알라모 요새의 미국인들과 싸우고 있을 때, 텍사스 독립국의 지도자 샘 휴스톤은 2천명의 병력을 동원할 수 있었죠.

 

산 하신토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멕시코군 주력을 격파한 샘 휴스톤은 멕시코 대통령 산타아나까지 포로로 잡았습니다. 산타아나는 할 수 없이 군대를 철수 시키고 텍사스의 독립을 승인합니다. 그리고 1845년, 한반도의 세 배 넓이를 가진 텍사스州는 미국의 28번째 州로 편입되어 미국의 영토가 됩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멕시코州의 남쪽 영역이 어디까지인가의 문제를 놓고 멕시코와 미국 사이에 분쟁이 벌어집니다. 멕시코는 누에체스 강이 경계라고 주장했지만 미국은 그 보다 훨씬 남쪽의 리오그란데 강이 국경이라고 주장하죠.

 

이 무렵 미국인들 사이에 이른바 'Manifest Destiny (자명한 운명)'라는 단어로 상징되는 팽창주의 사상이 득세하고 있었죠. 존 오설리번이라는 뉴욕의 저널리스트가 처음 이야기한 이 말의 핵심은 ‘미국은 서부로 진출해서, 대서양 연안에서 태평양 연안에 이르는 북미 대륙을 지배 할 당연한 권리를 신으로부터 부여 받았다’는 것이었죠.

 

비록 텍사스州를 빼앗았지만 아직도 멕시코의 영토는 미국의 서부 진출을 가로막고 있었고, 북미 대륙에서 멕시코를 축출하기 위해서는 또 한 번의 전쟁이 필요했습니다.

 

 

미국인들이 생각하는 '자명한 운명'은 끊임없는 영토의 확장에 다름아니었습니다.
 

1846년 미국 정부는 자카리 테일러(Zachary Taylor) 장군이 이끄는 기병대를 분쟁 지역인 리오그란데강 유역에 파견하고, 멕시코 정부에 대해서는 남쪽의 국경 확정 문제와 뉴 멕시코와 캘리포니아의 매입문제를 상의하자고 제의 합니다.

 

말이 매입이지 광대한 영토를 헐값이 넘기라는 협박에 다름 아니었습니다. 그러던 와중에 4월 24일, 리오그란데 강을 정찰하던 미군과 멕시코군 간에 충돌이 발생해서 11명의 미군 병사들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미국이 기다리던 기회가 온 것입니다. 당시 미국 포크(James Folk) 대통령은 5월 11일 의회 연설을 통해 “멕시코 군대가 미국의 영토에 침입해 미국인의 피를 흘리게 했다”며 전쟁 승인을 요청 합니다.

 

그러나 의회의 전쟁 비준에 앞선 5월 9일, 이미 자카리 테일러 장군의 미군은 공격을 개시하여 멕시코군을 리오그란데 이남지역으로 밀어 넣고 있었습니다. 6월 18일에는 캘리포니아 소도마에서 30명의 미국인 정착민들이 ‘캘리포니아 공화국’을 선포했고, 다음 달 미국령에 합류합니다.

 

 

 자카리 테일러 장군의 멕시코 북부 공략.


개전 초기 멕시코 북부 전선에서 승리를 거둔 미국은 전쟁을 멕시코 심장부까지 확대하기로 결의하고, 자카리 테일러의 군대가 멕시코군을 압박하는 사이, 1847년 3월 9일 윈필드 스콧 소장이 지휘하는 1만 명의 미군을 멕시코 중부 베라크루즈에 상륙시킵니다.

 

베라크루즈를 함락시킨 미군은 4월 17일, 멕시코 시티로 통하는 요충지 케로 고르도까지 손에 넣습니다. 이 곳은 멕시코의 수도에서 불과 120km 떨어진 곳이었습니다.  

 

 
 

차풀테펙 요새 공략전.

 

멕시코에 상륙한 지 6개월이 지난, 9월 초순 어느새 미군은 멕시코 시티의 관문 차풀테펙(Chapultepec) 요새에 당도해 있었습니다.  원래 멕시코 왕실의 여름 별장인 차풀테펙 요새는 당시엔 멕시코 사관학교 건물로 쓰였는데, 50미터 고지에 이중으로 성벽을 만든 견고한 요새였죠.

 

9월 13일 아침, 포 사격을 신호로 8개 중대로 구성된 미군 선봉부대가 요새에 대한 공격을 시작합니다. 사전에 정찰을 통해 치밀한 공격계획을 세운 미군은 사다리를 타고 요새 내부로 진입하죠. 그동안 미군의 포대는 격렬한 사격으로 멕시코군의 저항을 격파합니다.

 

미군의 사상자는 8백 여 명, 멕시코군은 2천 6백명이 죽거나 사로잡혔고, 사령관인 브라보 장군까지 미군의 포로가 됩니다. 이 전투에는 멕시코 사관학교 생도들도 참가했는데, 대부분 10대 소년들인 생도들의 피해도 적지 않았죠.

 

그리고 그들 중 6명의 생도가 퇴각명령도 거부하고 미군과 싸우다 전사합니다. 멕시코 군기를 몸에 두르고 성벽 밖으로 뛰어내려 스스로 목숨을 끊은 생도도 있었지요. 군기를 적에게 빼앗기는 치욕을 당하느니 차라리 깃발과 함께 산화하겠다는 뜻이었습니다.

 

 

차풀테펙 요새에서 산화해간 어린 사관생도들을 추모하는 기념비.
 

그리고 다음 날인 9월 14일 거칠 것이 없어진 미군은 마침내 멕시코 시티를 함락 시킵니다.  이듬해인 1848년 2월 2일, 미국은 과달루페 이달고 조약을 통해 원하는 모든 것을 얻어냅니다.

 

지금의 미국 남서 지역과 캘리포니아 지역의 310만 평방km 라는 엄청난 지역을 멕시코 정부로부터 사들이는데, 그 대가는 겨우 1500만 달러였습니다. 1 평방 킬로미터 당 5달러라는 엄청난 헐값이었죠.

 

 

과달루페 이달고 조약으로 멕시코로부터 빼앗은 영토.

 

 

이 전쟁으로 멕시코 영토의 거의 절반에 이르는 북쪽 영토는 영구히 미국의 땅으로 편입 되었고, 멕시코 민중의 패배감은 오늘날까지도 치유되지 않았습니다. 흔히들 미국-멕시코 전쟁을 남북전쟁의 전초전이라고 합니다.

 

멕시코로 부터 빼앗은 거대한 영토는 새롭게 편성되는 여러 州를 만들었고, 이 州들의 노예제에 대한 허용여부를 놓고 미국의 여론은 분열되고 마침내 거대한 내전의 늪으로 빠져 들게 되니까요. 그리고 멕시코와의 전쟁에서 실전 경험을 얻은 지휘관들이 남군과 북군으로 나뉘어 서로 피를 흘리며 싸우게 됩니다.
 

나중에 멕시코의 대통령이 되는 포르피오스 디아스(Porfirio Díaz, 1830~1915)는 이렇게 한탄했다고 하는군요.
“불쌍한 멕시코여. 신으로부터 너무 멀리, 미국으로부터 너무 가까이 있구나!”

 

 


1861년 4월 12일 - 남부 연맹군 섬터 요새에 포격, 남북전쟁 발발

 

 

 

 

1861년 오늘, 사우스캐롤라이나州의 수도 찰스턴 항에 있는 연방군 기지 ‘포트 섬터’ (Fort Sumter)에 남부 연맹군의 포탄이 떨어집니다. 4년간에 걸쳐 70만 명이 목숨을 잃은 미국 남북 전쟁의 첫 포성이었습니다. ‘에이브러험 링컨’이 연방 대통령에 취임한지 한 달만의 일이었죠.  


1860년 대통령선거 결과는 노예제도의 철폐를 주장하는 북부와 공화당의 승리로 돌아갔으며, 이는 곧 노예노동에 기반한 경제구조를 가지고 있던 남부의 위기를 의미했습니다.

 

곧 남부의 일곱 개 주는 연방으로부터 이탈, 이듬해 2월 남부연맹을 결성합니다. 링컨 대통령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죠. 4월에 들어 링컨 대통령이 섬터 요새에 주둔하고 있던 연방군에 식량을 보내려 하자, 남부 연맹은 이를 남부 연맹에 대한 연방정부의 부당한 개입이라고 판단합니다.

 

그리고 연방군을 몰아내기 위해 섬터 요새에 포격을 개시한 것이었습니다. 3일간의 포격전 끝에 요새의 연방군은 항복을 하고, 링컨 대통령은 이를 연방정부에 대한 반역행위로 규정하고 군대를 소집하여 진압을 명령합니다. 
 

 

남북전쟁전의 북부와 남부의 세력 판도.

 

이후 버지니아, 테네시, 노스캐롤라이나, 아칸소 등 4개 州가 남부 연맹에 가담하고 켄터키, 미주리, 메릴랜드 3개 州는 연방에 머무릅니다. 연맹에 가담한 버지니아州에서도 동부와 이해관계를 달리하는 서부 지역은 1963년에 웨스트버지니아州로 떨어져 나와 연방에 복귀합니다.

 

전쟁이 시작될 당시 북부와 남부의 경제 규모는 인구는 1천 9백만 명 대 9백만 명 (노예 3백5십만 포함), 철도 연장 2만 마일 대 1만 마일 등 현격한 차이를 보였습니다. 노예 해방이라는 거창한 명분을 내걸었지만, 전쟁의 원인은 북부의 공업자본 대 남부의 농업자본간의 대립이었습니다.

 

남부는 새로 개척된 서부에 대농장 건설을 원했던 반면 북부는 공산품을 소비할 자영농 육성책이 필요하다고 판단했고, 농산물의 자유무역을 바랐던 남부와 달리 북부는 제조업 보호를 위해 고율관세를 바탕으로 한 보호무역을 밀고 나갔죠.

 

노예해방이 주요한 이슈로 떠오른 것도 전쟁 중반 이후부터의 일이었습니다. 인구가 북부의 반에도 미치지 못했던 남부 연맹이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흑인 노예들을 군수 공장이나 요새 구축 등에 노무자로 동원할 수밖에 없었는데, 링컨 대통령은 노예제의 뿌리를 흔들면 남부의 저항을 꺾을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죠.  

 

 

 

1865년 4월 12일 남부 연맹이 항복할 때까지 인명피해는 막대했습니다. 북부 연방은 2백만 명의 동원자 가운데 전사자 36만 명, 남부 연맹은 7십만 명 중에 25만 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전쟁이 벌어졌던 국토도 황폐화되었고, 특히 남부 지역의 피해는 극심하여 전쟁전의 생활수준을 회복하는데 수십 년이 걸렸습니다. 전쟁사적으로 남북전쟁은 근대전쟁의 효시라고 볼 수도 있는 대규모 전쟁이었고, 보병의 산병 전술이 일반화 되는 등 전쟁양상도 이전과는 달라졌습니다.

 

 

1865년 1월 31일, '로버트 리' 장군 남부연방군 총사령관 임명 

 

'로버트 E. 리' 장군. (1807.1.19~1870.10.12)


 1865년 오늘, ‘로버트 E. 리’(Robert Edward Lee) 장군이 남부 연맹 의회의 결의에 따라 남부 연맹군 총사령관의 자리에 오릅니다. ‘제퍼슨 데이비스’ 남부 연맹(Confederate States of America) 대통령은 자신이 맡았던 군 지휘권을 ‘리’ 장군에게 이양하죠. 지휘권을 인수한 '리' 장군은 대대적인 전열 정비에 나서지만 이미 기울어진 전세를 역전시키기엔 역부족이었습니다.  


미국역사의 대사건인 남북전쟁은 유능한 장군들이 활약한 무대였지만, 북부와 남부를 통틀어 ‘로버트 리’ 장군만큼 추앙받는 인물은 아마 없을 겁니다. 그는 훌륭한 군인이었을 뿐만 아니라 온화한 인품을 가진 진정한 신사였습니다.

 

그의 인격은 적인 북군들마저 감화시킬 정도였으니, 한번은 포로로 잡힌 북군 장교가 자신의 모자를 남군 병사에게 빼앗겼다고 그에게 불평하자 그 자리에서 자신의 모자를 벗어주며 정중히 사과를 했다고 하죠.

 

한 번도 북군들을 가리켜 ‘적’이나 ‘양키’라고 부르지 않고 ‘그 친구들’이라고 말했던 ‘리’장군은 남부 버지니아 출신이었지만 노예제도에는 부정적이어서 “노예제도는 도덕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악”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죠.  

 

남북전쟁은 ‘노예제도 철폐를 위한 전쟁’만은 아니었습니다. 사실 노예해방 자체가 목적이었다기보다는 값싼 노동력이 필요했던 북부 공업지역과 노예제도를 바탕으로 한 남부 농업지역의 대립이었죠. 또 남부인들 입장에서 보자면, 州정부를 간섭하려는 중앙정부에 대한 투쟁이라는 측면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남북전쟁이 터질 당시 연방군에 몸담고 있었던 ‘리’ 대령에게 링컨 대통령은 새로 편성되는 군 사령관직을 제의했지만, 그의 고향인 버지니아 州가 연방을 탈퇴하자 36년간 몸담았던 군을 떠납니다.

 

연방 공화국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고, 그래서 남부의 연방탈퇴에 회의적이었던 그였지만 고향을 상대로 총부리를 들이댈 수는 없었습니다. "투쟁과 내란이 형제애를 대신한다면 나는 나의 조국을, 그리고 인류의 번영과 진보를 애도할 것이다." 
 

고향으로 돌아와 버지니아군 총사령관을 맡은 ‘리’는 북군의 진격이 예상되는 길목에 병사들과 장비들을 집결시켜, 북군의 진격을 번번이 무산시켰습니다.

 

하지만 그는 남부가 전쟁에서 승리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최종적으로는 북부의 전쟁의지를 꺾을 수 있을 정도의 군사적 목표만 달성해도 성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병력, 무기, 보급 등 모든 면에서 우위에 있는 북군을 봉쇄하기 위해 그는 대담한 기동과 북군의 의표를 찌르는 공격으로, 제2차 ‘불런’ 전투,  ‘프레데릭스버그’ 전투 등에서 승리합니다.

 

특히 1863년 5월, ‘챈설러즈빌’에서 벌어진 전투에서는 2배가 넘는 북군을 상대로 아군을 양쪽으로 갈라 적을 포위하는 대담한 작전을 펼쳐 승리를 거두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리’ 장군이 지키고 있는 버지니아 전선을 제외한 모든 전선에서 북군은 승리를 거두고 있었고, 전황은 점점 남부에 불리하게 진행되었습니다. 북군은 병력 손실을 곧 보충할 수 있었고, 공업생산을 기반으로 한 풍부한 군수물자가 보급되었지만 ‘리’의 군대에게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특히 게티즈버그의 패배 이후 남부 연맹군은 전쟁의 주도권을 완전히 상실합니다. 탈영병들이 속출하고 줄어든 병력은 다시 보충되지 못했죠. 게티즈버그에서의 패배에 책임을 느낀 ‘리’ 장군은 사임의사를 밝혔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사실 그 말고는 파국이 눈앞에 다가와 있는 상황에서 남군을 맡을 장군이 없었던 것이죠.


남부군 총사령관에 오른 ‘리’는 남부 연맹의 수도 ‘리치몬드’를 방어하기 위해 최후의 방어선을 구축합니다. 1865년 4월까지 그랜트 장군이 지휘하는 압도적인 북군의 공격을 가까스로 막아내지만, 굶주린 병사들은 사기가 떨어진 장교들의 지휘에서 벗어나 사방으로 흩어졌습니다.

 

마침내 리치몬드가 북군의 수중에 떨어지자 그는 더 이상의 저항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고 4월 9일, 북부 버지니아의 ‘애포머톡스’에서 북군 사령관 ‘율리시스 그랜트’ 장군에게 항복합니다. 일부 장교들은 산속으로 도망가서 게릴라전을 계속할 것을 주장했지만, 전쟁의 승패가 결정되었다고 느낀 ‘리’는 부하들에게 더 이상의 저항을 그만 둘 것을 간곡히 호소하죠.


“4년 동안 비할 데 없는 용기와 불굴의 투지로 분투를 해온,  우리 북버지니아 군은 압도적인 숫자와 물량으로 인해 항복을 하게 되었습니다. 마지막까지 헌신했던, 수많은 전투를 훌륭히 수행해낸 우리 병사들을 믿지 못해서가 아님은 굳이 말할 것도 없습니다. 

 

다만 이 전쟁을 계속함으로써 발생할 수많은 손실들을 보충할 수 있는 가치를 더 이상 찾지 못하기 때문에,  본인은 고향사람들을 위해 묵묵히 싸워준 병사들의 무익한 희생을 피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중략) 여러분의 고향에 대한 불굴의 의지와 헌신에 끝없는 찬사와,  본인에게 보내 준 여러분의 친절하고 사려 깊은 배려에 대한 소중한 기억을 안고, 여러분 모두에게 애정 어린 작별 인사를  보냅니다.”

 

비록 패장이었지만, 항복 조인식에서 ‘리’장군이 보여준 품위 있는 태도는 북군들의 존경까지 받을 정도였습니다. 항복 뒤 버지니아주 렉싱턴 대학의 학장으로 취임한 그는 전쟁으로 황폐화된 남부의 재건에 앞장서면서 인재육성에 전력을 다했습니다.

 

 


 

1875년 4월 9일, '애포머톡스'에서 북군의 그랜트 장군에게 항복하는 리 장군.

 

남부가 항복을 하고 얼마 되지 않은 일요일, 한 때 남부 연맹의 수도였던 ‘리치몬드’의 백인 교회에 한 흑인이 들어섰습니다. 교회에선 한창 성찬식이 진행되고 있었는데, 이 흑인은 제단 앞으로 나아가 무릎을 꿇었죠. 일순간 교회 안에 있던 백인들이 술렁였습니다.

 

비록 북군에 항복은 했다지만, 백인 교회에서 감히 흑인이 성찬식에 참여하겠다고 나선 것이었습니다. 졸지에 ‘검둥이 노예’와 함께 포도주잔에 입을 대게 된 백인들의 자존심은 상할 데로 상해 있었죠. 

 

(미국 남부에서 버스의 흑백 좌석 분리제도가 없어진 것이 겨우 40여 년 전이니, 당시 백인들의 분노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수치스러운 패배의 상처를 안고 있는 백인 신도들 사이에서 “검둥이를 끌어내라”는 외침이 나 올 무렵, 한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사람들을 헤치고 제단 쪽으로 걸어갔습니다.

 

그리고는 그 흑인의 옆에 나란히 무릎을 꿇었죠. 이 남자가 누구인가 알아차린 신도들은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는 다름 아닌 남부 연맹군의 총사령관이었던 ‘리’ 장군이었기 때문입니다.

 

남부인들 가운데 누구보다도 패전에 대한 회한과 상처가 깊었을 ‘리’장군이 흑인과 더불어 성찬을 받기위해 무릎을 꿇으리란 것을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이윽고 술렁거리던 백인 신자들은 잠시 전 그들이 느꼈던 분노를 접고 말없이 일어나 제단 앞에 줄을 서기 시작했습니다. 

 

 


‘로버트 E. 리’ 장군은 비록 전쟁에서는 패했지만, 그만큼 군인으로서나 한 인간으로서 존경 받을만한 장군을 역사에서 찾기란 쉽지 않습니다. 남부가 패배하리란 것을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고, 연방군에 남아서 승리의 영광을 누릴 수도 있었지만 그는 고향 사람들의 고통에 기꺼이 함께하겠다고 결심했죠.

 

전쟁이 끝난 뒤, 그는 “모든 것을 다시 선택하라고 해도, 나는 똑같은 선택을 했을 것이다”고 대답했다고 하죠. 1870년 세상을 떠난 ‘리’장군은 그가 학장으로 일했던 렉싱턴 대학(오늘날의 렉싱턴 & 리 대학)의 교회 묘지에 안장되었고, 사후 백 여 년이 흐른 1975년, 포드 대통령에 의해 미국 시민권을 회복합니다.

 

 

1875년 9월 20일 - 일본 함대가 조선 수비대와 전투를 벌인 운요(雲揚)호 사건 발생


 

1875년 오늘, 강화도에 주둔한 조선 수비대와 영해를 침범한 일본해군 포함 운요(雲揚)호간에 교전이 벌어집니다. 1873년 집권 10년 만에 쇄국정책을 펴오던 대원군이 실각하자 호시탐탐 대륙진출의 기회를 노리던 일본내 정한론자들이 힘을 얻게 됩니다.

 

일본 정부는 1874년 외무성 이사관 모리야마 시게루를 부산에 파견해 조선 정세를 탐지하고, 이듬해 5월 수로측정을 구실로 ‘운요’호와 ‘다이니테이보’(第二丁卯)호를 조선 근해에 보내 위협을 가하는 이른바 ‘포함외교’를 시도합니다.

 

22년 전인 1853년, 일본인들이 흑선이라고 부르는 함대를 몰고 와 무력시위로 일본의 개항을 이끌어낸 미해군 페리 제독의 수법을 그대로 답습한 것이었죠.  
 

일본 군함들은 부산에 들어와 배에 설치되어 있는 포신의 덮개를 내려 위압적인 자세를 과시하며 조선 연안을 함부로 측량하였으며, 때로는 포를 쏘아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였습니다. 이 두 척의 군함은 남해를 거쳐 동해안으로 북상하면서 한바탕 무력시위를 벌입니다. 

 

9월 20일, 운요호는 강화도 동남쪽 난지도(蘭芝島)에 정박했고, 함장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 외 수십 명의 승조원들이 보트에 나누어 타고 식수를 구한다는 명목하에 초지진(草芝鎭)으로 상륙을 시도합니다. 

 

이것은 국제법상 이치에 맞지 않는 행동이었습니다. 국교도 수립되어 있지 않은 나라의 해안을 마음대로 측량하거나, 식수를 구하겠다고 상륙을 시도하는 것은 국제법상 불법적인 행동인 것이죠. 한양으로 들어오는 가장 중요한 해상관문인 강화도는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이후 낯선 배의 출현을 늘 경계해 오고 있었습니다.

 

강화해협을 방어하던 조선 수비대는 침입해오는 일본 보트에 포격을 가했고, 이에 이노우에는 운요호로 철수하여 즉각 초지진에 대대적인 포격을 가했습니다. 당시 조선 수비대의 화포는 임진왜란 당시에 쓰던 화포에서 별 발전이 없었지만, 운요호는 160mm와 140mm 함포를 각각 1문씩 갖추고 있었습니다.

이어 일본군은 지금의 인천국제공항이 들어선 영종진(永宗鎭)에 포격을 가한 후, 육전대를 상륙시켜서 일대 격전이 벌어졌는데, 활과 구식 화승총으로 무장한 조선수비대는 근대식 무기를 휴대한 일본군을 대적할 수 없어서 첨사 이민덕(李敏德) 이하 400~500명이 패주하고 말았습니다.

 

조선군의 피해가 사망자만 35명이었는데 비해, 일본군은 2명의 경상자만 낸 일방적인 전투였습니다. 일본군은 무기를 약탈하고 영종진 주민들에 대해 살육과 약탈을 자행한 뒤 나가사키(長崎)로 돌아갑니다.

사건 후 일본은 이 포격전의 책임을 조선측에 전가하고, 군함을 잇달아 파견해 무력시위를 벌이며 조선 정부의 사죄와 조선 영해의 자유 항해, 강화도 부근 개항 등을 요구했습니다.

 

"화친이냐, 전쟁이냐. 둘 중의 하나를 택하라. 그것도 오직 조선의 태도 여하에 달려 있다."마침내 일본 정부는 6척의 군함과 수송선, 400여 명의 병력과 함께 전권(全權) 대표단을 파견해 1876년 2월 27일 강화도조약(한일수호조약)을 강제로 체결했습니다. 이는 국제법적 토대에서 양국 간에 이뤄진 최초의 외교 행위이자 최초의 불평등 조약이었습니다.

 

 

목재 소형 포함 운요호, 영국에서 만들어진 배수량 270톤의 작은 배였습니다.

 

이 사건을 일으킨 운요호는 1875년의 시점으로 보아도 별로 대단한 수준의 배는 아니었는데도, 이전의 신미양요 때보다도 훨씬 뒤떨어지는 군사력을 제대로 상대하지 못했던 조선 정부의 무능을 생각하면 참으로 안타까운 마음이 앞섭니다.  

1875년 9월 20일(고종 12년 음력 8월 21일) 일본제국 해군 포함 ‘운요호’가 강화도 초지진 포대까지 불법 접근하여 조선군에게 포격하여 피해를 입힌 ‘운요호 사건’이 발생합니다. 

 

당시 운요호는 조선이 문호개방에 미온적인 태도를 벌이자 무력시위로써 조선을 굴복시키기 위해 운요호를 포함한 군함 5척을 조선 근해에 파견했습니다.  22년 전, 미국 페리 제독의 ‘포함 외교’에 굴복하여 문호를 개방했던 자신들의 전례를 그대로 재현한 것이었죠.

 

일본은 영국에서 건조한 근대식 목조 증기선인 운요호를 부산에 보내 함포사격을 하는 등 무력시위를 벌이고 남해안을 거쳐 서해를 거슬러 강화도 동남방 난지도에 도착합니다. 
 

운요호의 함장 ‘이노우에’ 소좌는 ‘담수를 구한다’는 명목으로 보트에 군인들을 태워 강화도 연안을 정탐하면서 초지진까지 접근합니다.  당시 해안을 경비하던 조선군은 아무 예고도 없이 다가오는 일본군 보트에 포격을 가하죠. 
 

이를 빌미로 운요호는 함포(160mm,140mm각 1문씩)를 이용하여 조선군에 맹포격을 가하는 한편, 그들의 육전대를 영종진(오늘날의 영종도)에 상륙시켜 주민들에 대한 살해과 약탈, 방화를 자행했습니다. 
 

조선군의 낡은 무기로는 근대식 화기로 무장한 일본군을 당해낼 수 없었기에 전사자 35명, 포로 16명의 인명피해를 입고 대포 35문, 화승총 130여 정과 군기 등을 약탈당합니다. 일본군의 피해는 경상자 2명에 불과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모든 책임을 조선 정부에 전가합니다. 이듬해 일본은 전권대사를 조선에 파견하여 운요호에 대한 포격 책임을 추궁함과 동시에 개항을 요구하죠.

 

허약한 조선 정부는 이를 받아들여 수호조약 체결 교섭에 응하기로 하고, 1876년 음력 2월 3일 조선-일본 양국 사이에 불평등 조약인 강화도 조약을 맺게 됩니다.  제국주의 일본의 대륙침략 서막이 열리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최근 연구에서 운요호 사건을 기획한 장본인이 ‘이토 히로부미’일 가능성이 높다는 분석이 나와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지난 5월 김흥수 공군사관학교 교수(사학)가 발표한 논문 ‘운요호 사건의 주모자는 누구인가’에 나온 내용입니다.

 

‘이토 히로부미 문서’ 제 1권 ‘비서류찬 조선교섭 1’에 실린 운요호 관련 사료 중 당시 일본 정부의 대외정책 관련 법률 조언을 했던 프랑스 법학자 ‘귀스타브 에밀 부아소나드’가 작성한 각서를 분석한 김 교수는 운요호 사건이 우발적으로 발생했다는 일본 정부의 주장과는 달리 치밀하게 계획되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김 교수는 운요호가 포격당할 경우 ‘메이지 정권과 외교관계를 수립하면 보상을 강하게 요구하지 않겠다’고 조선측과 협상하라고 적혀 있는 이 각서가 운요호가 일본을 떠나기 하루 전 작성되었고,  이 문서는 외교와는 관련이 없는 공부성 용지에 기록되었으며, 당시 이토 히로부미는 공부성의 수장이었다는 점을 들고 있습니다.   

 

 

1876년 6월 25일 - 수(Sioux)족 전사, 미국 제7 기병대 섬멸

 

 

 

1876년 오늘, 추장 ‘시팅 불’ (앉은 황소, Sitting Bull)이 이끄는 수(Sioux)족과 샤이엔(Cheyenne)족 전사들이몬태나 주 ‘리틀빅혼’에서 ‘조지 암스트롱 커스터’ 중령이 이끄는 미 육군 제 7기병대 263명을 섬멸합니다.

 

 

서부를 향한 미국의 팽창은 남북전쟁으로 인해 잠시 주춤했다가, 1860년대 후반, 본격적으로 재개됩니다. 이 무렵 콜로라도州와 몬태나州에서 발견된 금광은 일확천금을 꿈꾸는 백인들을 불러들였고, 미시시피 강에서 로키산맥까지 펼쳐진 대평원 또한 백인 정착민들에는 경작할 땅과 부를 의미했습니다.

 

벌떼처럼 몰려오는 침입자들의 존재는 조상 대대로 자유롭게 살아오던 아메리카 원주민들에게는 커다란 위협이 되었고, 원주민들은 백인들의 군대와 정착민들을 공격했습니다. 1868년, 미국 정부와 수우족은 ‘제2차 라라미 요새 조약’을 맺습니다.

 

수우족이 백인들에 대한 공격을 중단하는 대가로, 미국 정부는 사우스 다코타州 서부와 와이오밍州 동쪽의 땅을 수우족의 땅으로 인정한다는 내용이었죠. 그리고 수우족의 성지인 ‘파하 사파’ (Blackhill, 검은 산)은 어떠한 경우에도 침입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했던 거죠.

 



하지만, 이 약속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1876년 봄, 파하 사파에서 황금이 발견되자 삽시간에 1만 5천 명의 백인 채굴꾼들이 수우족의 성지를 침범합니다. 미국 정부도 백인 정착민에 대한 수우족의 공격을 빌미 삼아 군대를 보내 원주민들을 더 서쪽으로 밀어 붙일 것을 명령 하죠.

 

이를 위해 미 육군은 몬태나州 ‘리틀빅혼’ 강 유역의 수우족을 삼면에서 압박할 계획을 세웁니다. ‘조지 크룩’ 준장이 지휘하는 본대는 남쪽에서, ‘존 기본’ 대령의 연대는 서쪽에서, 그리고 ‘알프레드 테리’ 장군의 부대는 동쪽에서 접근합니다. ‘조지 암스트롱 커스터’ 중령이 지휘하는 제 7 기병대는 ‘테리’ 장군의 부대에 속해 있었죠.

 
 

'조지 암스트롱 커스터' 중령.

 

6월24일, 제 7 기병대는 리틀빅혼 강 동쪽에 도착합니다. 수우족과 샤이엔족이 대규모로 집결해 있다는 정보를 정찰병들이 전해왔지만, 미군 지휘부는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습니다. 하지만 수우족에게는 ‘시팅 불’과 ‘크레이지 호스’라는 용맹한 지도자들이 있었습니다.

 

추장 시팅 불은 용기과 지략을 두루 갖춘 인물로 수우족 전체를 이끌고 있었고, 크레이지 호스 또한 뛰어난 전략가이자 결연한 전사로 평가 받는 인물이었습니다. 이에 비해 제 7 기병대의 지휘관 ‘커스터’ 중령은 용감했지만 성급한 사람이었죠.

 

1861년 웨스트포인트를 동급생중 최하위로 졸업한 그는, 남북전쟁 당시에는 과감한 돌격으로 ‘게티즈버그’와 ‘어퍼모톡스’ 전투의 승리에 기여했죠. 중위계급에서 임시 준장으로 몇 계단을 뛴 엄청난 수직 진급을 한 것으로도 유명한 카스터는, 그러나 그가 지휘하는 부대의 사상률이 엄청나게 높은 것으로도 악명이 높았습니다.

 

그 이유는 신중한 판단이 요구될 때에도 무조건 과감한 돌격으로 국면을 돌파하려는 성급한 성격 때문이었죠.

 

 

 

 

수우족의 지도자 '시팅불'.

 

6월 25일 일요일, 화창한 햇빛이 내리 쬐는 가운데 커스터는 자신의 병력을 셋으로 나누어 원주민 캠프를 향해 접근합니다. 약 210명의 기병 5개 중대는 자신이 직접 지휘하고, ‘마르쿠즈 르노’ 소령에게는 3개 중대(140명)를, 나머지 3개 중대는 ‘프레드릭 벤틴’ 대위에게 맡깁니다.

 

자신은 북쪽에서, 르노는 남쪽에서, 그리고 벤틴의 부대는 보충용 탄약을 싣고  뒤를 따르다 유사시 어느 쪽이든 지원한다는 계획이었죠. 하지만 리틀빅혼 강의 서안을 따라 전개해 있던 수우족과 샤이엔족 전사들은 2천 여 명에 달했고, 무엇보다 커스터의 기병대가 그들의 땅을 침범하는 것을 면밀히 주시해 오고 있던 터였습니다.


 

 

수우족 전사들의 첫 재물이 된 것은 르노 소령이 지휘하는 부대였습니다. 이들은 원주민들의 캠프에 접근하다 수우족 전사들의 거센 공격을 받고 강가로 무질서하게 패주합니다. 강 너머에서 리노군의 교전을 목격한 커스터 중령의 본대는 적당한 도하점을 찾지 못하고 시간을 허비했죠.

 

이들이 간신히 협곡을 넘어설 즈음 르노 부대를 물리친 원주민 전사들이 들이닥치기 시작했습니다. 지형 정찰도 제대로 안된 상태에서 세 배가 넘는 적과 맞닥뜨렸던 제7 기병대는 우왕좌왕했습니다. 그들 대부분은 말에서 내려 자신의 말을 쏘아 죽인 후 엄폐물로 삼고 저항합니다.

 

대부분의 원주민 전사들은 활로 무장하고 있었지만, 좁은 지형에선 활도 충분히 위력을 발휘했고 기병대원 들은 하나 둘씩 쓰러져 갔습니다. 공포에 질린 병사 몇몇은 자신의 머리에 대고 권총을 발사하기도 했죠. 위대한 전사 크레이지 호스는 선두에서 미군들의 숨통을 끊어 놓았습니다.


 

한편 커스터를 구원하러 와야 할 벤틴 대위의 부대도 몰려드는 원주민 전사들을 상대하느라 제 코가 석자였던터라 꼼짝달싹하지 못했죠. 미군 측의 생존자가 하나도 없는 상태에서 커스터의 최후가 어떠했는가는 기록에 남아있지 않습니다만, 아마도 그의 최후의 전투가 두 시간 이상 가지는 않았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르노 소령의 잔존 부대원과 벤틴의 부대는 가까스로 원주민 전사들의 공격을 방어할 수 있었고, 미군의 반격을 우려한 수우족은 천막을 걷고 남쪽으로 이동합니다. 커스터 중령을 포함한 263명의 미군 전사자가 발견된 것은 전투가 끝난 지 이틀만의 일이었습니다.

 

테리 장군이 파견한 정찰대가 커스터가 직접 지휘하던 5개 중대 210명과 르노 소령의 부대원 53명의 시신을 발견한 것이죠. 커스터 중령은 심장과 왼쪽 관자놀이에 총상을 입고 죽어있었습니다. 전사자 중에는 커스터의 두 동생 '톰 커스터'와 '보스톤 카스터',  처남 '제임스 칼훈'과 조카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먼 훗날, 현장을 목격했던 한 샤이엔족 여성은 미국 정부의 관리에게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여인들이 바느질용 송곳으로 커스터의 귀에 구멍을 뚫었어요. 다음번에는 그가 남의 말에 더 잘 귀 기울일 수 있도록”


 

 

'크레이지 호스'.

 

 

군사적인 측면에서 리틀빅혼 전투는 적을 포위, 섬멸하려다가 거꾸로 각개격파 당한 전형적인 사례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커스터 중령은 적정을 살피려는 정찰 활동마저 게을리 한 채 자만에 빠져 부대를 세 개로 쪼개는 만용까지 부렸습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리틀빅혼’에서의 승리는 오히려 원주민들의 종말을 가속화하는 계기가 되었죠. 전투를 지휘한 시팅불은 캐나다로 피신했다가 1881년 미군에 항복합니다. 그 뒤 한동안 ‘버펄로 빌’의 ‘와일드 웨스트 쇼’를 따라 떠돌기도 했던 그는 사우스 다코타로 돌아갔는데, 그곳에서 그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을 두려워한 미국 정부가 그를 체포하려 합니다.

 

이를 저지하려는 자신의 추종자들과 경찰의 총격전에 휘말린 시팅불은 경찰이 쏜 총에 머리와 옆구리를 맞아 사망합니다. 크레이지호스도 미군의 끈질긴 추격으로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리다, 리틀빅혼 전투 이듬해인 1877년 5월 6일, 네브라스카州 레드클라우드에서 미군에 항복합니다.

 

로빈슨 요새에 감금되었던 그는 넉 달 뒤인 9월 5일, 탈출을 시도하다 경비병의 총검에 찔려 살해당합니다. 자유를 위해 치열하게 살아왔던 서른 다섯 해의 끝이었습니다. 크레이지호스의 시신은 그의 부모에 의해 사우스 다코타의 ‘운디드니’ (Wounded knee, 상처 난 무릎)에 묻혔습니다.

 

1890년 12월 27일, 수우족 일족 400여 명이 크레이지 호스가 묻힌 운디드니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커스터의 옛 부대인 제7 기병대에 의해 마을 근처에 억류됩니다.

 

다음 날 아침 원주민들의 무장을 해제하는 과정에서 총기사고가 있었고, 기병대의 군인들이 “리틀빅혼을 기억하자”는 고함소리와 함께 학살극을 벌이기 시작합니다. 200여 명의 여성과 어린이를 포함한 300여 명의 수우족이 이곳에서 목숨을 잃었습니다.

 

치졸하고 야만적인 복수극이었죠.  오늘도 조용히 귀 기울여 보면 어디선가 영혼이나마 대초원을 마음껏 질주하는 시팅불과 크레이지호스의 말발굽 소리가 들려올 듯 하네요.

 

 

 

1890년 12월 27일, 운디드니의 대학살

 

 

 

수우족의 구전 기도문

 

바람 속에 당신의 목소리가 있고 당신의 숨결이 세상 만물에게 생명을 줍니다.

나는 당신의 많은 자식들 가운데 작고 힘없는 아이입니다.

내게 당신의 힘과 지혜를 주소서.

 

나로 하여금 아름다움 안에서 걷게 하시고

내 두 눈이 오래도록 석양을 바라볼 수 있게 하소서.

당신이 만든 만물들을 내 손이 존중하게 하시고

당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내 귀를 열어 주소서.

 

당신이 우리 조상들에게 가르쳐 준 교훈들을 나 또한 알게 하시고

당신이 모든 나뭇잎, 모든 돌 틈에

감춰 둔 교훈들을 나 또한 배우게 하소서.

내 형제들보다 더 원대해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가장 큰 적인 나 자신과 싸울 수 있도록 내게 힘을 주소서.

나로 하여금 깨끗한 손, 똑바른 눈으로

언제라도 당신에게 갈 수 있도록 준비시켜 주소서.

그래서 저 노을이 지듯이 내 목숨이 사라질 때

내 혼이 부끄럼 없이 당신에게 갈 수 있게 하소서.

 

 

1879년 8월 28일 - 줄루족의 왕 케츠와요, 영국군에 항복하다


 


1879년 오늘, 남아프리카 줄루족의 왕 ‘케츠와요’ (Cetshwayo)가 영국군에 항복합니다. 줄루란드를 침략했던 영국군에 맞서 싸운지 7개월 만의 일이었습니다.

 

 

원래 줄루족은 14세기경 동부 아프리카에서 남하해온 응구니족의 일파로, 19세기 초반까지 몇 개의 수장국으로 분리되어 있었으나, 1818년 ‘검은 나폴레옹’ 샤카가 등장하여 주변 부족들에 대한 정복전쟁을 펼쳐 강력한 줄루왕국을 건설했습니다.

 

줄루왕국은 한반도 크기의 6배에 달하는 광대한 영역과 백 여 개가 넘는 부족을 복속시켰죠. 그러나 세력을 확장하던 줄루족은 1838년 보어(Boer, 네덜란드계 백인)인들과의 전투에서 패배한 후, 40여 년 동안 줄루란드라 불리는 그들의 땅에서 목축업을 기반으로 자립적으로 살아오고 있었습니다.


 

줄루란드를 침공한 영국군.

 

 

당시 영국은 빅토리아 여왕의 재위기간 동안 ‘해가지지 않는 나라’로 불릴 정도로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었고, 식민지 확보의 광풍 앞에 남아프리카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영국은 케이프 식민지를 기반으로 세력을 확대 시키고 있었고, 그 북방에는 보어인이 건설한 트란스발 공화국과 오렌지 자유국이 있었습니다.

 

1867년 트란스발에서 금광이 발견되고, 오렌지 강변에서 다이아몬드가 발견되자, 영국은 이 지역에서의 주도권 확립을 획책합니다. 샤카 왕의 조카 케츠와요가 즉위할 무렵, 트란스발 지역을 병합한 영국은 줄루란드에 대해서도 사실상 지배권을 행사하려 하죠.

 

케츠와요는 일언지하에 그 요구를 묵살했고 1879년 1월 초, 영국군은 ‘프레드릭 테시거’장군의 지휘아래 3개 사단을 파견해 줄루족 정벌에 나섭니다. 기세등등하게 정복전쟁에 나선 영국군은 줄루족이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리기 까지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1월 22일, 이산들와나에서 영국군 24연대 1,400여 명의 장병들은 2만 명의 줄루족 전사들의 공격을 받고 거의 전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습니다. 하지만 이미 화력에서 압도적인 우위에 있는 영국군에게 생가죽으로 만든 방패와 ‘아세가이’라고 불리는 짧은 창을 든 줄루 전사들이 이기기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점차 전열을 가다듬은 영국군은 줄루란드의 수도 ‘울룬디’로 접근해 옵니다. 줄루족은 ‘에스고우’와 ‘캄불라’ 전투에서 강력히 저항했지만, 결국 6월 4일 울룬디에서 패하고 말았습니다. 케츠와요 왕은 피신하였지만 8월 28일, 영국군에게 체포되고 말죠.


 

 

줄루 왕국의 마지막 왕 '케츠와요'.

 

비록 패전국의 왕이었지만, 케츠와요는 당당했다고 전해집니다. 자신에게 항복할 것을 요구하는 영국군 장교에게 “소령 따위에게 항복할 수는 없다. 장군을 데려와라”고 했는가 하면, 영국군이 제공한 말도 거부하고 감옥까지 자기 발로 걸어갔습니다.

 

케츠와요를 폐위시킨 영국 정부는 줄루란드를 13개의 작은 나라들로 쪼개어 자신들의 보호령으로 만들었죠. 하지만 이렇게 쪼개진 소국들 간에, 또 부족들 간에는 피비린내 나는 내전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당황한 영국 정부는 다시 케츠와요를 복위시키려 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고, 1884년 케츠와요는 독살되고 줄루족의 왕국도 붕괴되고 맙니다. 오늘날까지 남아프리카 공화국이 겪고 있는 인종간의 극한 갈등과 대립, 빈부 격차, 부족 간의 갈등의 씨앗이 뿌려진 것입니다.

 

 

1883년 6월 27일 - 조선 정부, 기기국(機器廠) 창설  

 

 

 

1883년(고종 20년) 오늘, 조선정부가 한양 삼청동에 독자적인 근대식 무기를 제조하기 위한 기기국을 창설 합니다. 서구 제국주의의 식민지 쟁탈전이 가속화되던 당시, 근대적 무기와 군대를 확보하는 것이 국가의 독립에 필수적이라는 것을 고종과 그 측근들은 잘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1881년 일본을 방문한 신사유람단은 일본의 근대화에 깊은 인상을 받았고, 조선에서도 근대적 무기를 생산해야 한다는 의견을 내놓았죠. 또, 같은 해 청나라에 파견된 영선사 일행 또한 같이 데리고 간 기술자를 텐진기기국(天津機器局)에 배속시켜 화약과 탄약 제조법, 각종 자연 과학 지식과 외국어를 배우게 하였습니다.


이듬해인 1882년말 귀국한 영선사 일행은 종사관 김명균(金明均)이 데리고 온 텐진공장(天津工匠) 4명과 함께 기기창 창설을 준비하게 됩니다. 여기에 일본에서 화약제조 기술을 익힌 기술자들이 합류해 기기창을 설립하게 된 것이죠. 기기창의 주요 시설로는 독일에서 수입한 12마력 증기기관과 일본제 총기제조 설비가 있었습니다. 
 

 
부국강병의 의지로 출범한 기기창이었지만, 고종의 기대와 달리 별 신통한 성과를 내지는 못했습니다. 사료에는 기기창에서 무기와 탄약을 제작했다고 적혀 있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품목을 얼마나 생산했는지에 대한 기록은 하나도 없습니다. 다만 소량의 탄약과 뇌관, 소화기 등이 만들어졌으리라는 추측만 할 뿐이죠.

여기에는 기술력 부족, 일본과 청나라의 방해공작도 작용했지만, 무엇보다 외국제 완제품 무기로 근대국가를 만들 수 있다는 조선 지도층의 착각이 큰 몫을 했습니다. 당시 국가 재정의 1/4에 달하는 예산이 국방비에 쓰였고, 외국제 무기를 사오는데 국방예산의 상당부분이 쓰였지만 군수지원 체제를 생각지 않은 마구잡이식 수입은 혼란만 부추길 뿐이었습니다.

당시 조선 군대에는 청나라를 통해서 들여온 영국제 엔필드(Enfield) 소총, 러시아제 베르단(Berdan) 소총, 일본제 무라다(村田) 소총 등이 잇달아 도입됩니다. 하지만 장기적 전략이 부재한 상태에서 그때그때 들여온 복잡한 무기체계에 제대로 된 부품ㆍ탄약 관리와 군수지원이 이뤄질리 만무했습니다.

결국 조선정부는 무기 상인들의 배만 불려주는 봉 노릇을 했던 것이지요. 박노자 교수의 당시 조선의 상황에 대해 이런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러시아제 베르당 소총.

 

 

 

 

 
 

독일제 마우저 소총.

 

미국제 레밍턴 소총.

  

영국제 엔필드 소총.

 

 

일본제 무라다 소총.

문제는, 고종이 즐긴 전등이나 자동차·커피와는 달리 ‘근대’라는 것은 국가를 자기 재산으로 아는 절대군주가 외국 후견인들에게 살 수 있는 게 아니란 것이다. 기초 기술 능력, 자체적 기술교육 체제, 자체 생산 능력 등 기초 인프라를 구축하는 일이 제대로 된 ‘근대’로의 첩경이었지만, 주변 요건이 좋지 않은데다 고종에게는 장기적 비전과 투자 의지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면 오늘 우리의 상황을 보자. 지금 한국 통치자들에게는 첨단 무기 생산의 국산화를 위해 핵심 연구인력·시설 육성 등에 장기적, 계획적으로 투자해 대미 의존적인 현 상태를 벗어날 의지가 과연 있을까? 역사가 주는 교훈을 결코 무시해서는 안 된다.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 국립대학 교수

 

 

1885년 11월 14일 - 영국, 제 3차 버마 전쟁 시작

 

 

 

1885년 오늘, 인도 동부 벵골 지역에 주둔하던 영국군이 국경을 넘어 버마를 침략 합니다. 표면적으로는 인도 봄베이의 영국 목재 회사와 버마 정부 간에 티크 목재 채취권을 둘러싼 이권다툼이 전쟁의 발단이었지만, 실상은 프랑스의 힘을 빌려 영국의 압력에 대항하려한 당시 버마 국왕 띠 보(Thibaw)를 축출하고 버마를 식민지로 만들려는 영국의 야욕이 불러일으킨 전쟁이었습니다.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 초까지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던 버마 왕국의 콘바웅(Konbaung) 왕조는 남부의 테나세림(Tenasserim)과 아라칸(Arakan)을 병합하고, 서쪽의 마니푸르(Manipur)와 아샘(Assam)까지 진출합니다. 그런데 당시 영국인들은 동인도 회사를 통해 인도에서 서쪽으로 그 세력을 팽창해 가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해관계의 대립은 불가피한 일이었죠.

 

 

마침내, 1824년 제 1차 영국-버마 전쟁이 터집니다. 2년간 치러진 전투에서 버마의 명장 마하 반둘라 (Maha Bandura)의 활약에도 불구하고 버마는 결국 패배하여 영국과 얀다보(Yandabo) 조약을 체결하는 굴욕을 겪습니다.

 

이 조약에 따라 버마는 영국에게 라카인과 뜨닌다리를 할양하고 영국군이 잉와에 주둔하는 것을 허용 합니다. 전쟁에서 승리한 영국은 교묘한 방법으로 제국주의 정책을 밀고 나가는데, 식민지를 즉각 병합하기 보다는 지역마다 허수아비 왕들을 세워 영국의 보호령으로 만드는 방식이었죠.

 

1852년 랭군의 행정관은 밀수를 시도하던 영국군 장교 두 명에게 탈세혐의로 세금을 추징합니다. 그러나 이들은 적반하장으로 인도의 영국 총독에게 자신들이 버마 당국으로부터 부당한 조처를 당해 큰 손해를 입었다는 전갈을 보내죠.

 

영국은 즉각 손해배상을 버마당국에 요구했고, 전쟁을 피하기 위해 버마정부는 이를 받아들이는 한편 행정관까지 교체합니다. 이 사건 후 격앙되어 있는 버마인들의 감정에 불을 붙이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당시 버마 관청을 출입할 때는 설령 왕족이라 하더라도 반드시 말에서 내려 걸어 들어가는 것이 관례였는데, 영국의 하급 관리들이 버젓이 말을 탄 채로 관청으로 들어갔던 것이죠. 버마 관리들은 이들에게 즉각 사과할 것을 요구 하지만 영국 관리들은 그대로 도망쳐 버립니다.

 

이들이 탄 배가 출항하자 버마군이 발포를 했고, 공격할 빌미를 잡은 영국 함대는 즉각 반격을 개시합니다. 이 반격으로 버마의 함대와 군대가 전멸하고 영국군은 랭군의 주요 지역들을 장악합니다.

 

2차 전쟁 역시 영국군의 승리로 끝났고, 영국은 버마의 3개 항구를 포함하여 기름진 삼각주를 차지합니다. 이로써 버마는 바다로 통하는 모든 지역을 상실하고 졸지에 내륙국가로 전락하게 되죠.

 

 

 

 

 

영국의 침략 의도에 버마는 속수무책이었습니다. 버마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동남아 식민지 쟁탈전에서 영국과 세력균형을 이루고 있는 프랑스를 끌어 들이는 일밖에는 없었죠. 그러나 영국은 버마 정부에 프랑스와의 통상조약 계획을 백지화하도록 요구했고, 버마가 수립하는 그 어떤 외교관계도 영국 정부의 동의하에 이루어져야 한다는 억지를 부립니다.

 

또 버마 왕실이 있는 만달레이에 영국 총독의 대리인과 정규군 1천명이 상시 주둔시키겠다는 통첩을 합니다. 사실 영국은 버마 왕이 이런 무리한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으리라 생각하고 이미 군대를 집결시켜 둔 터였습니다.

 

그러나 영국의 예상을 깨고 최후통첩 만료일인 11월 10일 자정에서 6일이나 전에 버마 왕이 답변서를 보냈지만 영국은 이를  무시합니다. 처음부터 영국의 요구는 전쟁의 빌미를 만들기 위한 구실일 뿐이었습니다.

 

국경을 넘은 영국군은 11일 만에 만달레이까지 들어와 왕궁을 포위하고 ‘띠 보’ 왕의 무조건 항복을 받아 냅니다. 이렇게 1824년, 1852년, 1885년의 세 차례 전쟁에서 패함으로써 콘바웅 왕조는 무너지고 버마는 영국의 식민지로 전락하게 됩니다.

 

영국은 예상되는 반란에 대처하기 위해 3만 명의 정규군과 3만 명의 경찰을 버마 전역에 배치하고, 버마를 인도의 한 주로 편입시킵니다. 

 

영국의 식민지 정책은 교묘하게 진행되어, 인도인들을 버마로 이주시키는 한편, 분할 통치 방식으로 중심부와 산간 지역을 구분해서 각각 관리합니다. 이 정책에 앞장선 이들이 기독교 선교사들이었습니다.

 

불교의 교세가 강한 중심부에서는 기독교의 포교가 힘들자, 여전히 애니미즘 등의 전통 신앙을 믿는 산간 지대로 들어가 선교활동을 벌여 이들 산간 지역의 사람들을 버마족과 괴리시킵니다.

 

친(Chin)족 지역에선, 친족 여성들이 얼굴에 문신을 넣는 것은 버마족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전통적으로 문신을 하는 것이라고 설명하는가 하면, 꺼인(Kayin)족에게는 그들이 잃어버린 이스라엘의 한 종족임을 증명해 주려고도 했습니다.

 

또 영국 정부는 버마의 정체성을 훼손하고 종족간의 분리를 위해 다수족인 버마족과 샨족에게는 군 입대를 금지 시키고 친족, 카렌족, 꺼인족 에게는 군대에 들어올 수 있는 특권을 주었습니다.

 

 

 

50년 넘게 버마 정부와 싸우고 있는 카렌 독립군의 소년 병사.

 

100년에 가까운 수탈을 당한 후, 버마는 독립할 수 있었지만,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 버마의 불행은 영국의 통치기 부터 그 씨앗이 뿌려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1886년 9월 4일, 최후의 아파치 전사 제로니모 미군에 투항

 

 

미군에게 투항한 제로니모 일행이 미군 경비병들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1886년 오늘, 역사상 가장 용맹하고 명민했던 아파치 전사 제로니모가 미군의 Nelson Miles 장군에게 투항하였습니다. 그가 아파치족의 지도자가 되어 미국 정부에 항전을 시작한지 12년만의 일이었습니다. 투항 당시 제로니모의 무리는 여자와 아이를 포함해서 30여명 밖에 남지 않았지만 그들을 쫓는 백인들은 1 만 명에 가까웠습니다.
 

미국 중서부 아리조나州의 별칭은 “아파치의 주(Apache State)”입니다. 아리조나州는 오늘날에도 가장 많은 인디언 보호구역이 있습니다. 서부의 인디언 부족들은 백인 정착민들이 도래하기 훨씬 이전부터 고유한 문화를 일구어왔습니다. 1850년대에서 1880년대까지 서부는 인디언과 백인의 싸움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남북전쟁 이전까지 미국 정부의 인디언 정책은 ‘서부로 몰아내기’였는데, 전쟁이 끝난 뒤부터는 인디언 부족을 말살하고 토벌하는 전략으로 전환합니다. 미국 정부는 노예였던 흑인을 해방시킨다는 명분하에 전쟁을 치뤘지만, 북미 대륙의 옛 주인이었던 인디언들에게는 몰락을 강요했던 것입니다.

 

백인들은 그들의 거주지를 불태웠고, 여자들을 강간했으며 아이들까지 살해했습니다. 자연과 더불어, 자연의 일부로서 살아가던 인디언들에게 주어진 선택은 노예로 살아남는 것 아니면 저항뿐이었죠. 이 길고도 치열한 저항 전쟁에서 가장 두각을 나타낸 인디언 종족이 아파치들이었습니다.

 

제로니모의 원래 이름은 Goyathlay, 아파치 인디언 말로 ‘하품하는 사람’, 그는 아파치의 추장은 아니었지만 영적인 지도자였고, 병을 치료하는 주술사였습니다. 그에게 불행이 닥쳐온 것은 1858년, 백인들에 의해 어머니와 아내, 세 명의 자녀들이 무참히 살해된 사건이었습니다.  이를 계기로 그는 아파치 부족을 이끌고 복수에 나섰습니다.

아파치족은 그의 지혜와 천재적인 전투 지휘에 전적으로 의지했습니다. 적들조차 그보다 영리하고 튼튼한 전사는 없다고 인정했습니다. 그는 미군에게는 악마였고 아파치족에게는 불세출의 영웅이었죠.

 

그는 용맹스럽게 여러 전투를 승리로 이끌어 냈고, 기습으로 미군을 괴롭혔습니다. 그가 마지막으로 잡힐 당시에는 5,000명의 미군 병력 (당시 미국 전체 병력의 1/4)과, 3,000명의 멕시코 병력이 동원될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인디언 부족이 한창 팽창노선을 걷던 미국 정부와 맞서 이기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1886년 9월 4일 제로니모가 투항함으로써 미국 정부와 인디언 간의 전쟁이 막을 내리게 됩니다.

 

그들은 최후까지 싸웠고 패배했습니다. 그리고 제로니모와 아파치들은 그들의 목숨을 건 투쟁을 통해 한 가지 교훈을 남겼습니다. 인간이 사는 데 있어 영혼의 자유보다 중요한 건 없다는 것을.

 

 

미국 정부는 고향 아리조나로 보내주겠다는 약속을 어기고 제로니모와 그의 부하들을 멀리 떨어진 플로리다의 Fort Marion과 Fort Pickens에 있는 수용 시설에 감금합니다. 이 강제 이주과정에서 절반이 넘는 부하들과 식솔들이 결핵과 질병으로 목숨을 잃습니다.

 제로니모는 결국 다시는 고향땅을 밟아 보지 못하고 1909년 2월 17일 포로의 몸으로 숨을 거둡니다. 그의 나이 여든이었습니다. 오늘날, 아리조나州의 아파치 인디언 보호구역에는 9,500여명의 아파치족이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며 살고 있습니다.

 

 

마지막 아파치 전사 제로니모, 1829~1909
 

“바람이 거칠 것 없이 부는 자유로운 곳, 초원에서 나는 태어났다. 거기는 태양 빛을 가리는 아무 것도 없는 곳이었다.  어느 무엇도, 어느 누구도 나를 가둘 수 없는 그 곳에서 나는 태어났다.” - 제로니모

 

 

1887년 11월 17일 - 버나드 몽고메리 원수 출생

 

 

1887년 11월 17일, 2차 대전 당시 연합군 승리의 발판을 마련한 ‘버나드 로 몽고메리’ 장군이 런던에서 출생합니다. 성공회 신부인 아버지 밑에서 자라난 그는 우울하고 답답한 청소년기를 보내야 했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몽고메리는 1907년 샌드허스트 육군 사관학교에 입학합니다.

 

그에게 군대는 일종의 해방구였습니다. 오만하고 타협하지 못하는 성격 탓에 동료 생도를 못살게 굴어 사관학교에서 퇴교 직전까지 갔지만, 그는 간신히 용서를 받고 소위로 임관 합니다.

 

몽고메리의 첫 근무지는 인도였습니다. 금욕주의자에 가까웠던 그는 담배는 물론 술 한 방울도 일절 입에 대지 않았지만, 순전히 싸움 그 자체를 즐기기 위해 동료 장교들과 난투극에 휘말리기도 했지요.

 

1914년, 제 1차 세계 대전이 터지자 프랑스 전선에 배치된 몽고메리는 피비린내 나는 전장에서 지휘관으로서의 능력을 시험 받습니다.

 

몽고메리의 첫 전투는 그가 전선에 배치된 지 사흘 만에 벌어졌죠. ‘르 카토’에서 독일군의 기습을 받은 몽고메리와 그의 소대원들은 치명적인 피해를 입고, 몽고메리 자신도 며칠 동안 행방불명자로 등록되기도 했습니다.

 

1914년 10월, 와이프레스 전투에서 중상을 입은 몽고메리 중위는 전투 중 보여준 용맹성과 무훈으로 무공훈장을 받고 진급하죠. 영국으로 후송되어 치료를 받은 그가 다시 배치 받은 전장은 ‘솜므’ 지역이었습니다.

 

전투 첫 날, 단 하루 만에 영국군 희생자만 5만8천명을 내는 등 피아간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곳이었죠. 여단 참모로 부임한 몽고메리는 1차 대전이 끝날 때까지, 탁월한 참모 장교로서의 경력을 쌓습니다.

 

 

솜므(Somme) 전투.

 


 

1934년 대령으로 진급한 몽고메리는 인도 퀘타에 있는 영국 육군 참모대학의 선임 교관이 되었는데, 논리정연한데다 실전경험까지 더해진 그의 강의는 두고두고 학생들 사이에 명 강의로 회자됩니다.

 

2차 대전이 시작될 무렵 육군 소장으로 진급한 그는 프랑스 전선에서 밀려오는 독일군을 맞아 사단장으로 전투를 치뤘고, 프랑스가 독일에 항복한 뒤에는 영국으로 돌아와 남동부 사령관직을 수행하다가 1942년 8월, 북아프리카 전선의 영국군 제 8군단장에 임명 됩니다. 전임 사령관이 비행기 사고로 사망했기 때문이죠.

 

 

부하들을 방문, 격려하는 몽고메리 장군.

 


 

그가 사령관직을 맡은 제 8군단의 사기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사막의 여우’로 불릴 정도로 신출귀몰 했던 롬멜 장군의 독일 아프리카 군단에게 근 1년 동안이나 쓰라린 패배를 당하고 있던 참이었거든요. 이집트 카이로 부근 엘 알라메인까지 후퇴한 영국군의 사기와 규율은 땅바닥에 떨어져 있었습니다.

 

몽고메리 장군은 부임하자마자 병사들의 사기와 자신감을 불어 넣는 작업에 착수합니다. “나는 여러분을 잘 모르고, 여러분 또한 나를 잘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는 한 팀으로 아프리카 전선에서 승리할 것입니다.” 병사들을 모아 놓고 연설을 시작한 몽고메리는 패배에 찌든 병사들의 분위기를 쇄신하는 것이  자신이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또한 단호하게 “나는 언제든지 롬멜이 공격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좋습니다. 롬멜 더러 공격하라고 합시다. 그때 우리는 바로 맞받아 칠 것입니다. 그 순간이 바로 독일군을 아프리카로부터 몰아내는 순간이 될 것입니다.”라며 병사들의 자신감을 불러일으킵니다. 또 몽고메리 장군은 부지런히 전선을 찾아다니며 병사들의 애로사항을 듣고 그들을 격려 합니다. 

 

 

몽고메리의 부하들은 그를 '몬티'라는 애칭으로 불렀지만,

그를 질시하는 사람들은 빈정대며 '마티니'라고 불렀습니다.

 

 

 

8월 31일 밤, 롬멜군이 ‘아람 할파’ 지역에서 공격을 개시했습니다. 독일군은 수비를 강화한 영국군의 주진지를 우회하여 후방으로 진출하려 했지만, 이미 몽고메리가 주진지 후방을 강화해 놓았기에 큰 손실을 입고 퇴각 합니다. 이 3일간의 전투로부터 한 달 동안 몽고메리 장군은 장비와 병력을 압도적으로 증강시켜 반격을 준비 합니다.

 

몽고메리 장군의 지나치다 싶을 정도의 신중함은 따지고 보면 전력의 집중을 원칙으로 하는 교과서적인 전술이었습니다. 모든 작전 계획이 완벽하지 않을 때 공격을 주저하거나 거부하는 그의 작전태도는 사실 1차 대전 때의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그는 독일군이 수적 열세뿐 아니라 엄청나게 길어진 보급선 때문에 병참지원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을 파악하고 주도면밀한 공격을 개시합니다.

 

     

 

'사막의 쥐' 버나드 몽고메리 장군 과     '사막의 여우' 에르빈 롬멜 장군

 

영국 제 8군의 반격은 5만9천명의 독일군을 사살하거나 포로로 잡고, 500여대의 독일 전차를 파괴했으며 롬멜의 아프리카 군단을 패주 시킵니다.

 

마침내 1943년 5월, 아프리카 서부 해안을 따라 진격해온 미군과 합류함으로써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추축군을 송두리째 뿌리 뽑는데 성공한 몽고메리 장군은 일약 연합군 승리의 발판을 마련한 명장으로 조명을 받습니다. 이  때가 몽고메리 장군의 최전성기였죠.

 

오만하고 자존심이 센데다, 병적일 정도로 미군에 대한 우월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몽고메리 장군은 이후 미국이 작전 지휘권을 행사하게 되자 사사건건 불만을 터트렸지만, 시칠리아 섬 상륙작전을 성공적으로 이끕니다.

 

이 때 부터 미군의 맹장 패튼 장군과의 경쟁은 유명한 일화들을 낳았습니다. 1944년 6월, 역사적인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 몽고메리 장군은 45개 사단, 100만 명의 대군을 지휘하지만, 미군 수뇌부와의 불화로 아이젠하워 장군 밑에서 작전 지휘를 맡게 되죠.

 

 

시칠리 점령 후 악수를 나누는 몽고메리와 패튼. 연합군의 두 명장은 서로를 경원하는 사이였습니다.

 

 


비록 1944년 가을, 그가 기획한 사상 최대의 공수작전인 마켓가든 작전이 실패로 돌아가지만, 21집단군의 사령관을 맡아 독일 심장부로 진격하여 네덜란드와 덴마크, 북부 독일 지역을 점령합니다. 몽고메리 장군은 1945년 5월 14일, 발틱해 뤼덴부르크 헤스 지역에서 독일군의 전면적인 항복을 받아 냅니다.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버나드 몽고메리 장군 역시 장단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장병들의 복지에 대한 세심한 관심은 모든 부하들로부터 인기를 모았지만, 부하들에 대한 과잉 요구와 빈번한 파면 조치는 그를 동료 장군들로부터 소외시키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그의 엘리트주의적인 태도와 오만한 성격은 많은 적을 만들었지만, 처칠 수상은 그의 업적에 대해 “엘 알라메인의 승리 이전 연합군은 한 번도 승리하지 못했고, 엘 알라메인 전투 이후 한 번도 패배하지 않았다”고 평가했습니다.

 

2차 대전 이후 영국 점령군 사령관으로 독일에 부임한  몽고메리 장군은 1951년부터 58년 퇴역할 때까지 영국육군 참모총장, 북대서양 조약기구(NATO) 부사령관을 역임했습니다.

 

군에서 물러난 그는 1976년 3월 25일 88세를 일기로 영국 알튼에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저술에 전념합니다. 사실 한국에서도 몽고메리 장군은 그가 거둔 성과에 비해 인기가 없는 장군입니다.

 

그러나 평생 전쟁을 연구하고 전쟁에서 이기는 방법을 고민한 그의 탁월함은 그의 역저 ‘전쟁의 역사’(A History of Warfare)를 통해 후대에 전해지고 있습니다.

 

 

버나드 로 몽고메리 원수, 1887.11.17~1976.3.25

 


 

“진정한 군인은 타인을 적으로 삼지 않고 인간 내면의 야수를 적으로 삼는다. 한 군인으로서 나는 희망한다. 황금빛 노을이 지고 반목과 싸움을 잠재우는 소등나팔 소리가 울리는 그날이 오기를. 이윽고 찬란한 태양이 솟아오르며 세계 온 나라의 친선과 평화를 깨우는 기상나팔이 울리는 그 시대가 오기를.”     - 버나드 로 몽고메리

 

 

1898년 9월 18일 - ‘파쇼다 사건’ 발생

 


1898년 오늘 식민지 확장 경쟁을 벌이던 영국과 프랑스가 충돌하는 이른바 ‘파쇼다 사건’ (Fashoda Incident)이 발생합니다.

 

19세기 말은 유럽 열강들의 식민지 확보를 위한 경쟁으로 일촉즉발의 위기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습니다. 일찌감치 산업혁명의 안착으로 자본주의가 발달했던 영국과 프랑스, 독일이 원료공급지와 시장을 확대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죠.

 

제국주의의 첨병 역할을 수행한 것은 탐험가들이었습니다. ‘데이비드 리빙스턴’ (1813~1873)과 ‘헨리 모턴 스탠리’ (1841~1904)에 의해 아프리카 대륙 깊숙한 곳까지 유럽인들의 발길이 닫게 되자 아프리카는 곧 열강들의 각축장이 되었죠.


영국은 남아프리카의 케이프타운과 이집트의 카이로를 잇는 종단 정책을 펼쳤고, 이에 맞선 프랑스는 알제리와 마다가스카르를 이어내는 횡단 정책을 추진했습니다. 때문에 두 제국주의 국가의 식민지 확장 경쟁은 필연적으로 충돌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프랑스군의 마르샹 소령이 지휘하는 아프리카 원주민 부대 150여명은 1896년 가봉을 출발한 후 2년간 3,200㎞를 동진한 끝에 1898년 7월 이집트·수단 남부의 나일 계곡 ‘파쇼다’에 도착하여 프랑스 국기를 게양하고 진지를 구축합니다.

 

 

'키치너' 장군을 모델로 한 영국군의 모병 포스터, 그는 후일 육군 원수, 육군장관의 직에까지 올랐지만 1차대전 중 그가 타고 있던 순양함이 독일 잠수함의 어뢰 공격으로 침몰하면서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영국의 키치너 장군은 자신의 병력을 이끌고 수단을 남하하여 9월 2일 하루툼을 점령, 9월18일 파쇼다에 도착한 것이죠. 키치너 장군은 마르샹에게 수단 지역은 영국에 우선권이 있다며 프랑스 국기를 내리고 철수하라고 요구하지만, 일언지하에 이를 거절한 마르샹은 긴급 구원을 요청하는 전령을 본국에 보냅니다.


파쇼다에서의 양군의 대치소식은 영국과 프랑스, 양국의 국민들을 들끓게 하기에 충분했습니다. 전쟁은 불가피하다는 주장까지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돌연 프랑스가 영국에 양보를 합니다. 그 이면에는 급속히 팽창하던 독일 제국주의에 대한 견제 심리가 작용했죠. 당시 프랑스에서는 독일 간첩 혐의를 받았던 유대계 장교 드레퓌스에 대한 재판이 진행되고 있었고, 1871년 보불전쟁의 패배 이후 독일에 대한 보복 분위기가 무르익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프랑스 외무장관 ‘테오필 델카세’는 독일과 맞서는 데 있어 영국의 지지를 얻으려 했기 때문에 국민의 격렬한 항의를 무시하기로 결정합니다.

 

결국 그해 11월 프랑스군이 파쇼다에서 물러나는 것으로 위기는 가까스로 봉합되고, 이듬해 3월 양국은 나일강을 경계로 삼아 이집트는 영국이, 모로코는 프랑스가 각각 차지한다는 합의를 하게 되죠. 하지만 파쇼다에서의 충돌은 제국주의 전쟁으로서의 1차 세계대전을 예고하고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