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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에 달가듯이 2014. 12. 10. 18:40

역사 속의 전쟁 이야기  1921년 ~ 1940년 

 

 

1922년 10월 28일 - 무솔리니, 로마진군

 

 

 

1922년 오늘, ‘베니토 무솔리니’(1883∼1945)가 이끄는 이탈리아 파시스트당의 무장조직 ‘검은 셔츠단’ 4만 명이 수도 로마로 진군합니다.

 

파시스트들의 위협에 직면한 당시 이탈리아 총리 ‘루이지 팍타’는 쿠데타군을 진압할 정부군을 동원하기 위해 계엄령을 결의했으나 실현되지 못했습니다. 국왕 ‘빅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가 이 명령서에 서명하지 않았기 때문이죠. 당시 이탈리아의 정치상황은 그야말로 살얼음판이었습니다.

 

한해 전 치러진 총선에서 보수당이 최다득표를 하긴 했지만 139석을 차지하는데 그쳤고, 제2당인 사회당이 127석, 그 뒤를 인민당(107석)과 기독교민주당(68석)을 얻었죠. 합종연횡의 정치상황 속에서 국왕은 자신이 캐스팅보트를 행사하기를 바랐습니다.

 

게다가 당시 이탈리아 상황은 사회주의 혁명에 대한 중산층의 두려움과 제1차 세계대전의 승전국이었음에도 실익이 거의 없었던데 대한 실망감으로 전 국민이 상대적 박탈감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이 불안한 정국 속에서 의석수 36석에 불과한 파시스트당의 우두머리 무솔리니가 쿠데타를 감행한 것이었죠.

 

빅토리오 국왕이 검은 셔츠단의 로마 입성 하루 뒤인 29일 무솔리니를 수상에 지명, 쿠데타 군 편에 섬으로써 극우 파시스트 정권이 수립됩니다. 파시스트의 집권을 도왔던 세력 중에는 국제 자본 한몫을 했죠.

 

특히 ‘JP 모건’ 같은 미국계 자본은 무솔리니를 ‘빨갱이의 파업에서 이탈리아를 구할 애국자’라며 지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이런 지원은 파시스트 정부에 대한 금융대출로 이어졌고, 이탈리아와 나치 독일이 동맹을 맺을 때까지 10여 년간 이어졌습니다.

 

정권을 잡은 무솔리니는 “모든 것은 국가를 위해 존재한다. 아무것도 국가에 반대할 수 없다.”고 선언합니다. 집권 이후 파시스트들은 물리적 폭력보다는 법률적 강제에 점점 더 많이 의존했습니다. 파시스트당을 제외한 모든 정당은 불법화됐으며 법률을 만들 수 있는 권리까지 무솔리니가 독차지했죠.

 

파시스트 정부는 1925~26년에 지하 조직을 단속하는 결사법과 파업을 금지하는 노동관계 규율법을 비롯한 무수한 법률들을 쏟아냈습니다. 그런 조치들은 한때 이탈리아 국민들의 지지를 받아 무솔리니를 카이사르에 이은 걸출한 영웅으로 여겨지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성 잃은 광기’는 무솔리니 자신뿐 아니라 전 이탈리아 국민을 파멸의 구렁텅이로 몰고 갑니다. 고대 로마 제국의 영광에 대한 환상은 에디오피아 침공으로 이어졌고, 1940년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면서 종말을 재촉하게 되죠.

 

이탈리아의 파시즘은 독일 나치즘, 일본 군국주의와 함께 전체주의의 기반이 되어 전 세계를 전쟁과 공포로 얼룩지게 했습니다.

 

독재자 무솔리니의 최후는 비참했죠. 연합군이 이탈리아에 상륙하자 정부 클라라와 달아나다 공산 게릴라에 붙잡혀 1945년 4월 28일, 총살당합니다. 총구 앞에 선 그의 마지막 말은 “내 가슴에 쏴라”였습니다. 

 

 

 

1923년 11월 8일 - 히틀러, 비어홀 폭동 일으키다

 


1923년 오늘, 히틀러가 이끄는 나치당원 600여명이 뮌헨의 한 맥주홀을 습격, 바이마르 정부에 맞서 폭동을 일으킵니다. 뮌헨을 중심으로 하는 바이에른 지방은 1차 대전에서 독일이 패전한 후, 극우분자들의 소굴이 되다시피 했습니다.

 

신생 정당이었던 나치당을 이끌게 된 히틀러는 한 해전, 이탈리아에서 무솔리니가 ‘로마 진격’을 통해 파시스트 체제를 수립한데 크게 고무되어 있었고, 같은 방식이 독일에서도 가능하리라 생각하고 있었죠. 세계대전에서의 패전으로 극심한 경제난을 겪고 있던 독일은 설상가상으로 1923년 1월, 프랑스군이 루르 지방을 점령하자 전국민적인 저항 분위기가 확산되었습니다. 당시 바이에른 지방에서는 비델스바흐 왕가의 부활을 기도한 왕당파 세력들이 득세하고 있었고, 이들은 베를린 정부로부터 분리 독립을 주장하고 있었죠.

 

극우 비합법 군사조직들과 연합하여 베를린으로 진격, 취약한 바이마르 공화국 체제를 무너뜨리고 정권을 획득하겠다는 나치는 이들 왕당파 세력들과는 확실히 거리가 있었지만, 이들 두 세력은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한 상황이었습니다.

 

아직 제대로 기틀을 잡지 못한 나치는 바이에른 군부의 지지가 필요하였고, 왕정복고를 꿈꾸던 세력들은 나치의 대중조직이 아쉬웠던 것이죠. 1923년 10월부터 바이에른의 분리주의 세력에 대한 중앙정부의 압력이 가중되자, 바이에른 왕당파와 나치는 손을 잡고 행동을 개시합니다.

 

 

초창기의 나치 당원들

 

11월 8일 밤, 600명의 나치 ‘무장돌격대’ (SA) 대원들과 함께 바이에른 지도자들의 집회가 열리던 뮌헨 ‘뷔르가브로이하우스’를 습격한 히틀러는 이들을 인질로 삼고 권총으로 협박한 끝에 자신들의 ‘혁명’에 협력하겠다는 다짐을 받아냅니다.

 

하지만 바이에른 구왕가와 가톨릭 세력이 반란에 동조하지 않고, 베를린에서도 육군 사령관 제크트가 반란에 반대를 표명하자 히틀러 일파는 곧 고립되고 맙니다.

 

이튿날, 불리한 형세를 전환시키기 위해 3천명의 시위대를 조직한 나치는 경찰과 충돌하였고, 경찰의 발포로 시위대는 뿔뿔이 흩어집니다. 11월 11일 경찰에 체포된 히틀러는 민족주의 언론의 주목을 받으며 재판을 받게 되었고, 역설적으로 이 재판을 통해 무명의 히틀러는 독일국민들에게 알려지게 됩니다.

 

법정최저형인 5년형을 선고 받은 히틀러는 안락한 감옥 속에서 나치즘의 성서로 불리는 ‘나의 투쟁’ (Mein Kampf)을 저술했고, 다음 해 성탄절 특사로 풀려납니다.


한 편의 코미디 같은 폭동이었지만, 이를 계기로 뮌헨 이외의 지역에는 그 존재조차 알려지지 않았던 나치는 독일을 구원할 새로운 정치세력으로 각광받게 되었죠.

 

히틀러는 이 폭동을 통해 무력 봉기를 통한 정권 획득을 포기하고 의회주의로 돌아서게 됩니다. 그리고 채 10년이 지나지 않아 나치는 독일국민들의 합법적 선거를 통해 정권을 획득하게 됩니다. 끔찍한 비극의 시작이었습니다.

 

 

 

1932년 12월 19일 - 윤봉길 의사 순국

 

마지막으로 남길 말은?”, “사형은 이미 각오하고 있었으므로 아무 할 말이 없다”

 

1932년 12월 19일 오전 7시 27분, 일본 이시카와현 미고우시 일본 육군 9사단 공병작업장에서 윤봉길 의사에 대한 총살형이 집행됩니다. 이마에 총알을 맞은 윤 의사는 입회한 군의관에 의해 13분 후인 7시 40분 절명했음이 확인됩니다.  그의 나이 25세였습니다. 

 

윤 의사는 그 해 4월 29일, 상하이 홍커우 공원에서 열린 ‘천장절 및 전승 축하 기념식’ 단상에 폭탄을 던져 일본 상하이 파견군 사령관 ‘시로카와’ 대장과 상하이 일본 거류민 단장 ‘가와바타’를 폭사 시키고, 제 9사단장 ‘우에다’ 중장, 제 3 함대 사령관 ‘노무라’, 주중공사 ‘시게미쓰’ 등에게 중상을 입혔습니다.

 

의거 직후 현장에서 체포된 윤 의사는 상하이 주재 일본 헌병대에서 가혹한 고문과 취조를 받고 그해 5월 25일 일본 상하이 파견군 국법회의에서 ‘ 살인과 살인 미수, 폭발물 단속 벌칙 위반’ 등의 혐의로 사형을 언도 받았죠.

 

일제는 윤 의사를 당초 폭탄 투척 현장인 홍커우 공원에서 공개 처형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지만, 인류평화를 위해 침략군을 응징한 영웅이 될 수 있다는 점과 국제 여론의 악화를 우려해 11월 18일 오사카 위수형무소로 윤 의사를 옮깁니다. (야마구치 다카시 著, ‘윤봉길 암장의 땅, 가나자와에서’)

 


거사 직전 김구 선생(좌)와 윤봉길 의사

 


 일제가 남긴 여러 기록들을 보면 윤 의사의 사형집행을 첩보작전을 방불케 하듯 극비리에 진행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윤봉길의 호송 도착과 사형 집행은 절대 극비로...,신문 기자 등의 탐색과 기타 대중의 눈에 띄지 않게...” 윤 의사가 오사카 위수 형무소를 떠난 시간은 사형집행 하루 전인 12월 18일 오전 6시 25분, 오사카 헌병대 소속 4명의 사복 헌병들에 의해서였습니다.

 

일본 헌병은 주위의 눈을 피하기 위해 목적지인 가나자와에서 한 정거장을 일부러 지나쳐 모리모토역에 내린 다음 자동차편으로 가나자와 위수 구금소로 윤 의사를 압송합니다.

 

다음 날 오전 6시 30분 윤 의사는 가나자와 헌병대장의 지휘 하에 자동차로 구금소를 출발, 오전 7시 15분 형장에 도착합니다. 윤 의사는 마지막 순간까지 의연함을 잃지 않았습니다. “범인은 사형을 미리 각오했으므로 이때에 이미 하등 말 할 바 없음을 진술했음. 그 언어는 일본어로서 명료하고 약간 쓴웃음을 지었고, 그 태도는 극히 대담 침착했음” (가나자와 헌병대장 ‘소노 요시히코’가 작성한 ‘상해 폭탄범인 윤봉길 사형집행에 관한 보고 통첩’) 
 

윤봉길 의사의 매장지는 광복 이듬 해인 1946년, 독립운동가들에 의해 가나자와의 쓰레기 소각장 아래에서 발견되었고, 같은 해 조국의 품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1962년 정부는 윤 의사에게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합니다. 

 

 

1936년 3월 7일 - 나치 독일군 라인란트 진주

 

 

쾰른에서 라인강을 넘어 라인란트로 진주하는 독일군.

 

1936년 오늘 새벽, 나치 독일군이 국제조약에 의해 비무장지대로 묶여있던 라인강변 라인란트(Rheinland) 로 행진해 들어갑니다. 1935년 3월 16일, 독일의 재무장을 국내외에 선언한 이후, 1년 만의 일이었죠.

 

제1차 대전의 결과로 체결된 베르사이유 강화조약은 라인강의 동안(東岸) 50km의 지대, 이른바 라인란트를 비무장화하는 한편, 독일이 라인강 서안(西岸)의 전 독일영토와 라인강 동안(東岸) 50km 이내의 독일영토에서 요새를 설치하거나 군대주둔이나 군사훈련 등의 행위를 하는 것을 엄격히 금지하고 있었죠. 따라서 독일군의 라인란트 진주는 전쟁을 불러올 수도 있는 도발행위였던 것입니다.

 

  

라인란트 재점령을 보도한 당시의 독일 신문.

 

사실 당시 독일군은 전쟁을 치를만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죠. 1차 대전의 패전국 독일은 징병제가 금지되었으며 공군도 보유하지 못했고, 총 병력도 상한선이 10만 명으로 묶여 있었습니다.

 

히틀러가 집권한 이래 독일군의 재무장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지만 아직은 전력이 미흡하여 라인란트로 진군한 독일군 병력도 보병 3개 대대에 불과했습니다. 독일 공군도 비무장 상태나 다름없었죠.

 

훗날 히틀러는 당시를 회상하며 “라인란트에 진주한 후 48 시간 동안이 내 인생에서 가장 신경이 곤두섰던 시간 이었다. 만일 프랑스가 반격을 했더라면 우리 독일군은 그 즉시 퇴각해야 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당시 독일군은 아직 약체였기 때문이다.”라고 밝힌 바 있습니다.

 

실제로 라인란트의 독일군은 프랑스군이 개입하면 즉시 후퇴하라는 명령을 받고 있었습니다. 당시 유럽 최대 규모의 육군국 이었던 프랑스군의 병력은 100만 명에 육박하고 있었습니다.

 

 

1939년 9월 1일, 폴란드를 공격하기 전까지 나치 독일이 무혈점령 했던 지역들입니다.

 

히틀러로서는 자신의 정치적 생명을 걸고 도박에 올인한 셈입니다. 세계는 숨을 죽이고 프랑스의 움직임을 지켜보았습니다. 과거 50년 동안 독일과 두 차례의 전쟁을 치렀던 프랑스가 자신들의 코앞으로 진격한 독일군을 그냥 놓아 둘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죠.

 

하지만, 프랑스 정부의 반응은 의외였습니다. 프랑스는 독자적으로 군사 행동을 할 능력을 갖추고 있었지만 그럴만한 결단력이 없었습니다.

 

1차 대전에서 참전한 20~32세 청년들의 40%에 달하는 엄청난 전사자를 낸 프랑스 국민들의 입장에선 애써 전쟁을 외면하려는 의식이 강했죠. 영국마저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자 프랑스군 참모장은 동원령이 떨어지지 않는 한 군사작전을 펴지 않겠다고 버텼고, 프랑스 정부는 동원령 선포를 거부했습니다.

 

프랑스 정부는 결국 이 문제를 국제연맹에 제소하는 식의 소극적이고 외교적인 수단으로 해결하려고 했습니다. 속으로 쾌재를 부른 것은 히틀러였습니다.

 

그는 라인란트를 손아귀에 넣은 후 의회 연설에서 이 군사행동을 ‘독일 평등을 위한 투쟁의 종말’이라고 선언했지만, 실제로는 ‘투쟁의 시작’일 뿐이었습니다. 3주 뒤 총선에서 독일 국민들은 98.8%의 압도적인 지지로 히틀러에게 찬성표를 던졌습니다.

 

 

1938년 3월 12일, 독일군에 편입된 오스트리아군의 행렬.

 

 

 1938년 9월 30일, 주테덴란트에 무혈입성한 독일군.

히틀러의 도박은 그 후로도 계속되어 2년 뒤에는 오스트리아와 주테덴란트를, 그리고 1939년 3월에는 체코슬로바키아 전체를 합병합니다. 독일군은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행군해 들어갔고, 그동안 영국과 프랑스 정부는 강 건너 불구경으로 일관했죠.

 

그 결과는 1939년 9월 폴란드 침공으로 이어졌으며, 마침내 전 세계를 전쟁의 참화 속으로 끌고 들어간 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습니다.

 

역사에 가정이란 부질없는 일이지만, 만약 프랑스 정부가 독일군의 라인란트 진주를 묵인하지 않았더라면 그 이후의 역사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는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었을지도 모릅니다.

 

히틀러의 정치적 생명은 끝장났을 것이고, 수천만 명이 소중한 생명을 잃을 일도 없었겠죠. 어느 시대 누구에게나 전쟁을 결심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일 것입니다.

 

하지만 프랑스 정부는 히틀러의 모험주의에 대해 단호한 군사행동을 취하지 않음으로써 스스로 안전보장 체제를 포기하였고, 그 대가는 온 인류가 치러야 했습니다. 

 

 

패전국 프랑스 시민의 눈물.

 

 

1937년 4월 26일 - 독일공군, 게르니카 폭격

 

 

71년 전 오늘, 독일 공군 폭격기들이 스페인 북부 바스크 지방의 소도시 게르니카에 대대적인 폭격을 가합니다.

 

‘볼프강 폰 리히트호펜’ 대령이 이끄는 독일 ‘콘도르 군단’ 43대의 폭격기에서 쏟아낸 소이탄과 고성능 폭탄으로 바스크인 들의 옛 수도였던 인구 5천의 게르니카市의 가옥 80%가 잿더미가 되었으며, 1654명이 사망했고 889명이 부상당했습니다. 희생자들의 대부분은 노인과 부녀자, 그리고 어린이 들이었죠.

 

 

폐허로 변한 게르니카 시가지.

당시 스페인은 사회당, 좌익 공화파, 공산당으로 구성된 인민전선 정부와 북아프리카 주둔군 사령관이었던 프랑코 장군이 이끄는 파시스트 반란군 사이의 내전이 진행 중이었습니다.

 

1936년 2월 선거로 집권한 인민전선 정부는 토지개혁을 비롯한 일련의 혁명적 정책을 수행하였는데, 이에 대해 불만을 가졌던 지주와 자본가 세력들을 등에 업은 프랑코 장군이 반란을 일으켰던 것입니다.

 

1936년 7월 17일 스페인령 모로코에서 시작된 내전은 대리전의 성격도 띄고 있었는데, 당시 히틀러와 무솔리니가 집권하고 있던 독일과 이탈리아가 파시스트 반란군에 무력 원조를 제공하였고, 사회주의 소련 정부는 인민전선 측에 각종 무기를 제공합니다.

 

또한 유럽의 여러 나라와 미국을 포함한 전 세계 55개국으로부터 양심적인 지식인들과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한 수 만 명의 국제 의용군이 결성되어 인민전선 정부를 돕기 위해 참전합니다. 이렇듯 스페인 내전은 당시 존재하던 모든 사상이 총 집결한 이데올로기의 각축장이 됩니다. 

 

 

파시스트군의 반란에 맞서 싸운 인민전선 병사들.

 

오래된 참나무 아래 바스크인 들의 첫 번째 의회가 열리던 유서 깊은 도시 게르니카가 속해 있는 둘레 바스크 지역에 파시스트의 공세가 시작된 것은 1937년 3월말 이었습니다.

 

프랑코의 측근 ‘에밀리오 몰라’ 장군의 참모장 ‘후안 비곤’ 대령은 인민전선 측의 기를 꺾기 위해서는 본보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독일 공군 지휘관 ‘리히트호펜’ 대령과 게르니카를 공습할 계획을 세웠죠.

 

후일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에서 독일공군 총 사령관 ‘헤르만 괴링’이 실토한 폭격 이유는 "독일 공군력을 기술적 차원에서 시험해보기 위한 것" 이었고, 공습의 가장 큰 목적은 ‘적에게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목표가 지나칠 정도로 너무 효과적으로 달성되었던 탓에 오히려 당황한 것은 파시스트들이었습니다.

 

끔찍한 학살의 현장은 ‘더 타임즈’의 조지 스티어 기자의 기사를 통해 전 세계에 보도되었고, 그의 기사들은 “게르니카의 학살이 붉은 군대의 방화에 의한 것”이라는 반란군의 악선전을 잠재웠습니다.

 

게르니카 학살사건은 전 세계인들의 공분을 불러 일으켰고, 파시스트들과 나치 독일 정부는 자신들의 만행을 은폐하기에 급급했습니다. 

 

 

내전에서 승리한 프랑코 장군이 군대의 사열을 받고 있습니다.

파리에 머물고 있던 ‘파블로 피카소’가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것은 폭격이 있은 후 2주 만인 5월 11일의 일이었죠. 마침 그는 파리 만국박람회 스페인관에 걸릴 벽화를 구상하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피카소는 조국에서 벌어진 학살극에 분노했고, 붓을 든 한 달 만에 세로 3.5m, 세로 7.8m의 대작을 완성 합니다. 죽은 아이를 안고 있는 어머니, 하늘을 향해 울부짖는 사람, 미친 듯 울어대는 말 등 사람과 동물의 처참한 고통을 흰색과 검은 색, 회색만을 사용하여 강렬하게 묘사한 그의 그림은 전쟁의 야만성과 폭격의 잔혹성을 생생하게 고발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피카소는 자신의 그림에 폭격을 당한 도시의 이름을 붙입니다. 그 해 열린 파리 만국박람회에 전시되었던 ‘게르니카’는 박람회가 끝난 뒤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으로 옮겨집니다.

 

전쟁이 국제전으로 번질 것을 우려한 영국과 프랑스 정부의 중립 정책과 인민전선 측의 분열로 1939년, 프랑코는 내전에서 승리합니다.

 

그는 죽을 때까지 37년간 스페인의 독재자로 군림했고, 마침내 피카소의 ‘게르니카’가 조국 스페인의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에 영구반환된 것은 독재자가 죽은 후인 1981년의 일이었죠. 전쟁의 폭력성과 부도덕성을 생생하게 고발한 ‘게르니카’는 오늘도 말없이 인류의 양심에 호소하고 있습니다. 

 

 

  

 

'게르니카', 1937년 파블로 피카소 作.

 

 

 

1937년 7월7일 중일전쟁의 도화선이 된 루거우차오(蘆溝橋) 사건 발생

 

 

 

노구교, 12세기 초반에 지어진 이 다리에서 울려 퍼진 총성이 중일전쟁의 도화선이 됩니다.

루거우차오(노구교)는 베이징 남서쪽 50km 융딩강[永定河]을 가로지르는 길이 270m의 하얀 석교로 마르코 폴로의 동방 견문록에 기록되어 있을 정도로 유서 깊은 다리입니다. 1937년 당시 이 곳에는 풍지안 장군이 이끄는 중국육군 제 37사 예하 2개 중대가 주둔 하고 있었습니다.

 

 

 

도열해 있는 중국 국민당군 장교들,

항일의지는 높았지만 현대전을 치룰 장비도 전술도 없었습니다.

 

1937년 7월 7일 밤,  펑타이[豊台]에 주둔한 일본 육군의 보병 일개 중대가 이 부근에서 야간훈련을 하고 있던 중 몇 발의 총소리가 난 후(이 총성이 중국의 항일세력에 의한 것인지, 일본군 특무기관의 자작극이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병사 한 명이 행방불명되었습니다.

 

일본군 중대장 시미즈 대위는 이 병사가 중국군에게 포로가 되었거나 살해당했다고 판단을 했고 지휘부에 그렇게 보고를 합니다. 그런데 잠시 후 실종되었던 병사가 어기적거리며 나타납니다.

 

시미즈 대위가 어떻게 된 영문인지 추궁하자 이 병사 “용변이 급해서...”라고 대답을 했다는군요. 그렇습니다. 이 병사의 실종은 총성과는 상관없는 급한 생리현상 때문이었던 거죠.

 

 

 

사격을 준비중인 일본군 포병

 

전말을 파악한 중대장이 다시 상부에 보고를 하지만 침략의 구실만을 찾고 있던 일본군 지휘부는 이 사실을 숨기고 대치하고 있던 중국군측에 ‘실종된 병사를 찾기 위해 중국군 주둔지로 들어가 수색을 하도록 허락 해줄 것’을 강력히 요구 합니다.

 

당연히 중국군은 이 요구를 받아 들이지 않았고,  일본군은 중국군으로부터 사격을 받았다는 구실로 펑타이에 주둔하고 있던 보병연대 주력을 즉각 출동시켜 중국군을 공격, 다음날인 8일에 루거우차오를 점령합니다.

 

7월 11일 중국 정부의 양보로 현지협정을 맺어 사건은 일단락되는 듯 했지만 일본은 군대를 증파하여 7월 28일 베이징(北京)과 텐진(天津)에 대한 총공격을 개시합니다.

 

 

 

북경에 입성하는 일본군

 

베이징 교외에서 발생한 이 헤프닝은 중국측 사망자만 천이백만명에 이르는 중-일간 전면전쟁으로 비화되었고, 중국 내부에서는 이 사건을 계기로 제2차 국공합작이 이루어집니다.

 

 

2005년 5월 20일자 중국 인민보에 실린 사진, 노구교에 꿇어 앉은 이 사람은 혼다 타쓰타로라는 아흔두살의 일본 노인인데 중일전쟁에 참전하여 자신이 학살한 중국인들의 영전에 사죄를 하고 있습니다..

 

사족 - 루거우차오 사건이 중국과 일본간의 전면적인 전쟁 상태를 몰고 온 것은 확실하지만 사실 일본이 중국에 대한 침략 행위을 노골적으로 시작한 것은  1931년 만주사변, 더 멀게는 메이지 유신때 부터 추구된 팽창시기 부터 보아야 하는 것이 맞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인지 중국에서는 만주사변부터 1945년 2차대전 종전까지의 시기를 합쳐서 '15년 전쟁'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1937년 11월 4일, 전함 야마토 기공  

 

 

 

전함 야마토는 만재 배수량 72,809톤, 길이 263미터에 달하는 거대 전함이었습니다.

 

1937년 11월 4일, 일본 해군 구레 공창에서 7만3천 톤급 전함 야마토(大和)가 기공됩니다. 이 거대전함에는 주포로 460밀리 3연장 포탑 3개가 탑재되었고, 실리는 연료의 양만해도 구축함 3대의 무게에 맞먹는 6천 3백 톤에 달했으니 야마토의 거대한 덩치를 실감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전함 야마토는 거함거포주의(巨艦巨砲主義)사상의 산물이었습니다. 거함거포주의란 사거리가 긴 거대 함포를 장비한 전함으로 적 함대를 공격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라는 이론입니다.

 

20세기 전반을 풍미했던 이 사상의 핵심은 바로 ‘누가 더 멀리서 더 센 포탄을 날리느냐’로 집약됩니다. 더 큰 포를 싣기 위해서는 더 큰 덩치의 배가 필요하고, 이렇게 해서 강대국들 간의 건함 경쟁이 벌어지게 되죠. 이 거함거포주의 사상은 20세기 전반기 해군 전술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개장 공사중인 야마토, 

들어 올린 포신과 그 밑에 가건물을 비교하면 포의 크기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강대국들 간의 전함 건조 경쟁은 1차 대전 후 열린 워싱턴 해군 조약으로 제동이 걸리게 됩니다. 이 조약은 각국마다 보유할 수 있는 전함의 크기와 척수를 제한하는 것을 주된 골자로 하고 있었는데, 유럽 열강들에 비해 불리하게 적용된 조약에 일본 군국주의자들은 큰 반발을 하고 나섭니다.

 

해군 주력함에 있어서 미국과 영국, 일본의 비율은 각각 5:5:3으로 정해졌고, 몇 년 뒤 열린 런던 군축 조약에서는 미국과 영국이 각각 15척씩, 일본은 9척으로 결정됩니다.

 

일본 해군 수뇌부는 이 숫자의 열세를 메우기 위해 거대 전함을 만들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고(일본은 보유할 수 있는 전함의 최대 크기가 3만5천 톤 급으로 묶여있었습니다만), 그 계획의 산물이 바로 전함 야마토 였습니다.     

그런데 야마토가 탄생하던 1930년대 후반, 이미 해전의 양상은 급격히 바뀌게 되는데 그 이유는 항공기의 급속한 발전과 항공모함의 출현 때문이었습니다.

 

전함의 함포 사정거리 훨씬 밖에서 수 십대의 항공기를 띄워 적함을 공격할 수 있게 되면서 상대적으로 대공능력이 취약한 전함들은 항공기의 손쉬운 상대가 되었습니다.

 

1941년 2월 준공되어, 진주만 공습 이후 일본 제국해군 연합함대의 기함으로 쓰이기도 했던 야마토는 미드웨이, 마리아나, 레이테 등의 해상전투에 참가하였지만 이렇다 할 활약을 보이지 못했고, 일본의 전세가 기울면서 물자난을 겪게 되자 가뜩이나 연료를 많이 소비하는 야마토는 항구에 묶여 있는 신세가 되고 맙니다.  

 
 

야마토의 최후, 탄약고의 유폭으로 대폭발을 일으킨 야마토는 바다속으로 사라집니다.


일본이 패망으로 치닫던 1945년 4월, 오키나와에 상륙한 미군을 공격하기 위해 야마토에게 출동 명령이 내려지죠. 하지만 출항 때부터 야마토의 움직임을 면밀하게 감시해온 미군에게 포착된 이 거대 전함은 최후의 순간을 맞이합니다.

 

4월 7일 오후 12시 37분, 미 해군 항모 엔터프라이즈와 호넷 등에서 발진한 400여대의 함재기들은 야마토 함대에게 벌떼처럼 달려듭니다. 그리고 이 공격 앞에 전함은 7만톤의 거대한 쇳덩어리에 불과했죠.

 

삽시간에 폭탄과 어뢰를 뒤집어 쓴 야마토는 탄약 저장고에 번진 화재로 대폭발과 함께 바닷물 속으로 사라집니다. 3천 여명의 승조원중 생존자는 단 270명에 불과했습니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거함거포주의 사상의 최후를 상징하는 모습이었습니다.  

 

 

 

1938년 8월31일 클라비츠 방송국 습격 사건

 

 

글라이비츠 방송국

1939년 8월 31일 저녁 8시, 폴란드 국경에 이웃한 글라이비츠의 라디오 방송국을 폴란드 군복을 입은 일단의 남자들이 습격 합니다. 이들은 건물 안에 있던 직원들과 경비원을 꽁꽁 묶고 방송을 통해 ‘폴란드가 독일에 전쟁을 선포한다,

 

폴란드인이여 궐기하라!’는 내용의 폴란드어 선언문을 낭독합니다. 요란한 총성과 함께 이들이 사라지고 난 뒤 방송국 건물 앞에는 사살된 폴란드 군인 시체 한 구가 발견 됩니다. 

같은 날 밤 11시, 베를린에서는 선전장관 괴벨스가 국내외 기자들을 모아 놓고 긴급 기자회견을 열었습니다. “이런 식의 테러는 용납 할 수 없으며 독일 민족의 사기는 꺾이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폴란드는 그 댓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그리고 다음날인 9월 1일 새벽,  독일 육군은 전격적으로 폴란드 국경을 넘었고 수도 바르샤바에는 독일 폭격기의 폭탄이 떨어집니다. 이로써 앞으로 6년간 수 천만명의 목숨을 앗아갈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게 됩니다.

히틀러의 폴란드 침공에 빌미가 되었던 글라이비츠 방송국 습격사건의 전모는 독일이 패망한 뒤 열린 뉴렌베르크 전범 재판에서 드러나게 됩니다.

1939년 5월 전군 최고 지휘관을 소집한 자리에서 폴란드 공격을 결심한 히틀러는 전쟁의 명분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친위대(SS) 장관 하인리히 힘러에게 공작을 지시합니다. 폴란드 군복과 신분증, 무기 등은 독일군 정보부에서 마련했고, 이 작전을 수행할 책임은 친위대 소령 알프레드 나우요크스에게 맡겨집니다.

 

  

 

알프레드 나우요크스


작전은 폴란드 군복을 입은 독일군이 방송국을 공격한다. 방송국을 점령한 폴란드군은 폴란드어로 폴란드가 독일에 선전포고 했다는 성명서를 읽는다. 현장에 폴란드군의 시체를 남겨 놓는다. 기자들을 불러 모아 현장의 사진을 찍게 한다. 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런데 폴란드 군복을 입고 총질이야 할 수 있지만 현장에 남겨질 시체는 어떻게 구했을까요? 8월말 나우요크스 소령과 6명의 공작대원들은 글라이비츠 북쪽의 소도시 오베른으로 향합니다.

 

오베른에는 나찌의 강제수용소가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그들은 사살당한 폴란드군 역할을 할 ‘재료’들을 인수합니다. ‘깡통’이라는 암호명이 붙은 이 ‘재료’들은 바로 강제수용소의 죄수들이었습니다.

 

그리고 8월 31일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작전 실행 암호를 접수한 나르요크스는 전 인류를 불행으로 끌고 간 희대의 대 사기극을 벌이게 됩니다.   

나우요크스는 뉴렌베르크 전범 재판에서 “명령을 받고 방송국 근처로 죄수들을 운반했다. 그들은 살아 있었지만 의식은 없는 상태였다.”고 증언했습니다.

 

그리고 폴란드 군복을 입힌 이 죄수들에게 등뒤에서 총격을 가합니다. 마치 도망치다가 총에 맞은 것처럼 보이기 위해서였죠.

나우요크스 소령을 제외하고 이 음모극에 가담했던 대원들은 전쟁 중에 모두 숙청되었고, 자칫 역사의 미궁에 빠질 뻔했던 이 사건의 전모는 공작의 하수인이었던 나우요크스에 의해 드러나게 됩니다.         

 

 

 

1939년 8월 23일 - 독소 불가침 협정 체결

 


1939년 오늘 세계인들을 놀라게 한,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납니다. 상호간 불가침을 주요 골자로 하는 독일과 소련간의 협정이 맺어진 것이었죠. 사상적으로 결코 서로를 인정할 수 없었던 두 나라간의 협정에는 상호 불침략이외에도 한쪽이 제3국의 공격을 받을 시 제3국 원조 금지, 상호간에 정보교환 ·협의를 위하여 접촉, 상호 분쟁의 평화적 해결 등을 천명하고 있었습니다.

 

슬라브족을 인간 이하의 인종으로 경멸하는데다 공산주의자를 박멸해야할 바퀴벌레 정도로 인식하던 히틀러와 나치를 비롯한 파시스트 체제를 척결 대상으로 보고 있던 스탈린이 손을 잡으리라곤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습니다.

 

희대의 두 독재자가 ‘적과의 동침’을 선택한 이면에는 당시의 국제 정세가 큰 몫을 하고 있었죠. 집권한 후 아리아민족의 우월성을 제창하며 대독일 건설을 부르짖던 히틀러는 1938년 오스트리아를 병합하고, 이듬해에는 주테덴 지역의 독일인 자치권을 주장하며 체코마저 집어 삼켰습니다.

 

하지만 영국과 프랑스는 강 건너 불 보듯 대응할 뿐이었습니다. 사실 사회주의의 팽창을 극도로 두려워한 서구사회는 히틀러가 집권했을 당시만 해도 내심 독일을 볼세비키들의 파도로부터 서유럽을 지켜줄 방파제 정도로 인식을 하고 있어서 나치즘의 증장을 방관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히틀러의 영토적 야심이 노골적으로 드러나면서 자신들의 국가 이익이 위험하다고 판단됨에 따라 이번에는 소련 쪽에 추파를 던집니다. 독일의 팽창에 위기를 느끼고 있던 소련도 영국, 프랑스와의 협조를 모색하고 나서죠.

 

스탈린은 파시즘 체제에 대항하기 위해 영국을 포함한 ‘평화전선’을 구축하여 군사동맹으로 발전시키고  싶어 했습니다. 하지만 발트해 3국의 할양문제를 영국이 거절하면서 스탈린은 서방 국가들이 소련을 이용하려한다는 의심을 품게 됩니다.

 

 

  적과의 동침?

 

이렇게 일이 틀어지자 히틀러가 소련에 접근합니다. 독일은 1차 대전에서 패전한 뒤 빼앗겼던 단치히 지방의 반환을 명분으로 폴란드를 침공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고, 스탈린 또한 1917년 사회주의 혁명 이후 상실했던 러시아 제국의 영토에 대한 야심이 있었기 때문에 두 독재자는 의기투합 할 수 있었습니다.

 

불가침 협정은 이미 전쟁을 결심하고 있던 히틀러에게는 동서 양 전선에서 각각 프랑스-영국군과 소련군을 한꺼번에 맞서야하는 부담을 덜 수 있게 해주었고, 언젠가는 독일과 전쟁이 일어나리라는 것을 알고 있던 스탈린도 전쟁에 대비한 시간을 벌 수 있어 좋았던 것이죠.

 

마침내 1939년 8월 23일 오전 10시, 기한 10년의 ‘독-소 불가침 협정’이  독일 외상(外相) 리벤트로프와 소련 외상 몰로토프에 의해 발표됩니다. 이 조약은 독일과 소련이 동유럽을 분할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이를 통해 폴란드를 비롯한 많은 동부 유럽 국가들과 북구의 핀란드가 독일과 소련의 팽창주의에 피해를 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조약이 체결된 후 꼭 1주일 뒤인 9월 1일 이른 아침, 독일군이 폴란드 국경을 넘으면서 인류 역사상 최대 규모의 전쟁인 2차 세계 대전이 터집니다. 그리고 나찌 독일군이 폴란드를 유린하던 9월 17일, 소련군도 폴란드를 공격합니다.

 

동서 양쪽에서 협공을 받은 폴란드는 9월 27일 수도 바르샤바가 독일군에 함락되자 백기를 들고 말았죠. 국토는 양분되어 각각 독일과 소련에 분할 점령됩니다.

 

 

 

폴란드를 분할 점령한 독일군과 소련군 장교들이 지도를 들여다 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적과의 동침은 채 2년이 가지 않아 파국을 맞고 말았죠. 1941년 6월 1일, 독일군이 소련을 기습 공격함으로써 불가침 조약은 휴지조각이 되어 버렸습니다. 독일에게 소련의 광활한 곡창지대와 유전은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선 매력적인 먹이였기 때문입니다.

 

불시에 기습을 당한 소련은 이후 독일과의 4년 동안의 전쟁에서 2천5백 만 명의 희생자들을 낳았습니다. 독-소 불가침 협정은 냉혹한 국제관계에서 영원한 동지도, 영원한 적도 없다는 것을 잘 보여줄 뿐만 아니라 실질적 조치 없이 협정만으로는 결코 평화를 지켜낼 수 없다는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1940년 5월 10일 - 독일군, 벨기에 전면 침공 
 

1940년 5월 10일 새벽 4시 30분, 독일군이 전차를 앞세우고 중립을 지키고 있던 벨기에와 네덜란드 국경을 넘어 전면적인 기습을 감행합니다. 독일군의 목표는 프랑스였습니다.

 

이미 한 해전 폴란드를 기습 침공해 ‘전격전’ (Blitzkrieg,블리츠크리크)란 세상에 단어를 등장시켰던 독일군은 폴란드를 공격한 직후 영국, 프랑스와 전쟁 상태에 돌입했지만 영국은 원정군을 편성만 했고, 프랑스 역시 국경 지역에서 무기력한 군사 시위만 계속했을 뿐입니다.

 

단 몇 주 만에 폴란드가 나치 독일에 무릎을 꿇은 뒤에도 영국, 프랑스 동맹군의 실제적인 군사행동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때문에 역사가들은 폴란드 함락 뒤부터 독일군이 서부 유럽에 대한 전면침공을 감행한 1940년 5월 10일까지의 기간을 전쟁 상황이되 실제적인 전투는 없었던 ‘가짜전쟁’  (Phony war)라 부르기도 합니다. 

원래 연합국이 예상하고 있었던 독일군의 주공격 방향은 네덜란드 남부·벨기에 북부 지역이었죠. 그보다 더 남쪽의 독-불 국경지역 대부분은 전쟁 전에 프랑스가 엄청난 건설비를 들여 만들어 놓은 철벽의 방어선인 ‘마지노선’이 펼쳐져 있어서 공격이 불가능하다고 생각되었습니다.

 

연합군은 히틀러가 제1차 세계대전 때처럼 벨기에 북부 쪽으로 독일군을 보낼 것으로 판단하고 그곳으로 부대를 이동시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연합국이 독일의 침공루트가 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던 벨기에 북부 지역과 수백 킬로미터에 걸쳐 건설된 마지노선이 끝나는 사이에는 ‘아르덴’ 숲이라고 부르는 해발 350~500미터의 고원지대가 펼쳐져 있었습니다.

 

연합군 지휘관들은 아무도 이 숲에 주목하지 않았죠. 빽빽하게 나무들이 들어선 이곳을 현대화된 기갑부대가 통과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영국과 프랑스군 지휘관들은 일종의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이죠.


하지만, 독일군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이미 전차를 중심으로 한 기동부대를 전쟁의 주역으로 내세운 독일은 연합국이 예상치 못했던 아르덴 숲을 프랑스를 공격하기 위한 주공격 루트로 삼고 있었던 것이죠.

 

물론 연합군을 기만하기 위해  ‘폰 보크’ 장군이 이끄는 독일 B집단군을 벨기에 북부로 보내 영국·프랑스군을 유인하는 전술을 펼쳤습니다. 벨기에 북부로 진입한 독일군을 막기 위해 연합군은 벨기에의 ‘브레다’로 집결해 방어선을 형성하기 시작했습니다.

 

마치 전쟁 상황은 1차 대전의 재현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B집단군의 벨기에 공격은 아르덴 숲을 가로지르는 주 공격선을 은폐하기위한 조공(助攻)에 불과했죠. 벨기에 북부지역과 마지노선 사이의 아르덴 숲으로 ‘룬트슈테트’ 장군이 지휘하는 독일 A집단군이 물밀듯이 밀려왔던 것입니다.

 

아르덴 숲을 통과한 독일군은 전진방어를 펼치기 위해 벨기에에 집결해 있던 영국군과 프랑스군을 배후에서 공격했고 후방이 차단된 연합군은 큰 혼란에 빠졌습니다. 

 

 

독일군에 항복하는 프랑스 전차병.


연합군이 우왕좌왕하는 사이 독일군의 전차부대는 거침없이 내달렸습니다. 독일군 기갑부대의 진격속도가 어찌나 빨랐는지 후속부대가 미처 따라가지 못할 정도여서 오히려 독일군 사령부는 정지 명령을 내릴 정도였습니다.

 

공격 닷새 만인 5월 15일 네덜란드가 항복하고, 5월 19일에는 독일군이 영국해협까지 도달함으로써 영국·프랑스군은 남북으로 분단되었죠. 북부에 고립된 연합군은 독일 A집단군의 압박으로 점차 해안으로 몰리고 있었고 5월 28일에는 벨기에가 항복합니다.

 

고립된 연합군은 유일한 보급항인 ‘덩케르크’ (Dunquerque) 만을 간신히 지키고 있었고, 이 항구를 통해 6월2일까지 영국군 22만 명, 프랑스·벨기에군 11만여 명이 간신히 영국 본토로 탈출합니다. 6월 4일, 독일군이 덩케르크를 점령함으로써 북부에서의 전투는 끝이 납니다. 

 

 

파리 에펠탑 앞에 선 아돌프 히틀러.

 

1단계 작전을 완료한 독일군은 프랑스 본토에 대한 본격적인 침공을 개시합니다. 이제 목표는 파리였습니다. 북프랑스로부터 좌측에서는 B집단군, 중앙에서는 A집단군이 내륙으로 깊숙이 밀고 내려가죠. 

 

B집단군은 솜 강의 남부로 진격, 파리의 젖줄 센 강을 압박했고 6월9일 A집단군의 ‘구데리안’ 기갑군단은 랭스(Reims) 부근에서 프랑스군 전선을 돌파합니다.

 

6월10일에는 눈치를 보고 있던 이탈리아가 독일 측에 참전을 선언함과 동시에 남프랑스 국경지대를 공격하기 시작합니다.

 

6월 14일, 마침내 파리가 함락되고 프랑스가 완전 항복을 선언한 것은 그로부터 8일 후의 일이었죠. 독일군이 공격을 개시한지 6주만의 일이었습니다. 유럽 최대의 육군국이었던 프랑스의 항복은 전 세계에 큰 충격을 주었죠.

 

프랑스 전역(戰域)에서 연합군은 전사·실종 19만 명, 포로 약 20만 명의 손실을 입었고 독일군은 전사 2만7000명·실종 1만8000명을 포함해 총 15만6000명의 병력 손실을 입었습니다. 


1940년 5월 17일 - 프랑스 마지노선 붕괴

 

 

1940년 오늘, 프랑스가 난공불락의 요새라고 세계에 자랑하던 ‘마지노선’ (Maginot Line)이 독일군의 공격에 맥없이 무너집니다.

 

 

'앙드레 마지노' (1877~1932)프랑스 육군 장관,

그는 1차대전에 사병으로 참전해서 입은 부상으로 평생 불구로 살아야 했습니다.

 

마지노선은 1차 대전을 자신의 국토에서 치른 프랑스인들의 경험에서 탄생한 것으로 총연장 약 750Km, 벨기에에서 스위스 까지 독일과의 국경선을 따라 만든 영구 요새선(要塞線)이었습니다.

 

160억 프랑을 들여 1927년부터 1936년까지 10년간에 걸쳐 건설한 이 방어용 요새선은 당시 프랑스 육군 장관 ‘앙드레 마지노’ (Andre Louis Reno Maginot)의 이름을 따서 마지노선이라고 불렀죠.

 

1차 대전에서 엄청난 인적, 물적 피해를 입은 프랑스로서는 독일이 다시 침공하더라도 막아낼 수 있는 든든한 요새가 필요했고, 그래서 독일과의 접경지역에 마지노선을 건설한 것이었습니다.

 

마지노선은 프랑스가 당시 최첨단 토목과 건축기술을 총동원하여 완전한 지하설비와 대전차 방어 시설을 구비한 초근대적 요새시설이었고, 주둔군의 주거지역엔 냉난방 시설과 오락시설 등이 완비되었을 뿐 아니라 방어선을 연결하는 지하철도 망도 건설되었죠. 때문에 이곳을 정면 돌파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여겨졌습니다.

 

 

 

마지노선에 구축된 요새의 단면.

 

 

 

요새선을 이어주는 지하철도.

 

1939년 9월, 나치 독일군이 폴란드를 기습 침공하여 단 3주 만에 폴란드 전역을 점령하는 것을 보면서도 전쟁준비가 안된 프랑스와 영국은 강 건너 불구경 하듯 바라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프랑스 인들은 국경 지역에 건설해 놓은 마지노선이라는 방벽 안에서 자신들의 평화는 영원히 깨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환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특히 프랑스군의 수뇌부는 독일군이 폴란드 전역에서 보여준 전광석화 같은 ‘전격전’에 대처하지 못한 채, 아직도 1차 대전 당시의 방어 제일주의에 빠져 있었습니다.

 

마지노선이 난공불락의 요새임에는 틀림 없었지만, 결정적인 약점이 있었으니 당시 중립을 지키고 있던 벨기에와의 국경은 무방비 상태였다는 것이죠.

 

마지노선의 끝은 프랑스 도시 ‘스당’ (Sedan)남쪽까지만 뻗어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프랑스군은 이 무방비 지역에 대한 방어대책을 세워 놓았는데 독일이 이 지역으로 침공할 것을 대비하여 유사시 정예부대를 벨기에와 네덜란드로 이동시킨다는 작전계획을 세워두고 있었습니다.

 

 

붉은 색 실선부분이 마지노선이 구축된 지역입니다.

1940년 5월 10일, 나치 독일군은 벨기에와 네덜란드에 대한 총공격을 개시합니다. 중립국은 공격하지 않는다는 국제관례도 침략자에겐 아무런 이유가 되지 못했죠.

 

당시 서부전선에 투입된 독일군 병력은 총 136개 사단이었고, 이에 맞선 프랑스와 영국군은 104개 사단, 벨기에군은 22개 사단 규모였습니다.

 

양측의 병력 차이는 거의 없었으며, 전차의 수는 프랑스가 3천 254대, 독일이 2천 574대로 오히려 프랑스군이 수적 우위에 있었습니다.

 

침공 전에 예상했던 것처럼 독일군이 네덜란드와 벨기에로 쏟아들어 오자 프랑스군과 영국군은 벨기에로 집결합니다. 이제 전쟁은 1차 대전의 재판이 되는 듯 했죠. 하지만 파국은 뜻밖의 곳에서 시작되었습니다.

 

 

 

프랑스와 독일, 벨기에 삼국의 국경선이 만나는 곳에는 ‘아르덴숲’ (Ardennes)이라고 불리는 길이 150Km의 삼림지대가 펼쳐져 있었습니다. 이곳은 숲이 무성하게 우거진 곳으로, 지형 자체도 굴곡이 심하고 도로도 좁아 대규모 기갑부대가 통과한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습니다.

 

1차 대전의 영웅인 프랑스의 ‘앙리 패탱’ 원수도 “아르덴 고원을 통과할 수 있는 군대란 있을 수 없다”고 단정하고 있었죠. 따라서 프랑스군은 이곳에 15개 예비 사단만을 배치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독일군은 기갑사단 7개를 비롯, 총 45개 사단을 이곳에 투입합니다. 변변한 방어시설도 없던 이곳을 독일군은 3일 만에 돌파했고, 허를 찔린 프랑스군은 독일군의 공세를 막아보려 했지만 독일 기갑부대의 진격을 따라갈 수는 없었습니다.

 

후일 ‘사막의 여우’로 불리게 될 ‘롬멜’ 장군의 제 7 기갑사단이 마지노선의 측면인 세당에 출현한 것은 5월 16일 밤의 일이었습니다. 난공불락으로 믿어왔던 마지노선이 무력화되는 순간이었죠.

 

일단 아르덴 숲을 통과한 독일 기갑부대는 빠른 속도로 프랑스를 남북으로 가로질렀고, 북부에 고립된 영국과 프랑스군 주력은 후방이 차단된 채 '덩케르크' (Dunkerque)항을 통해 영국으로 간신히 철수했습니다.

 

 

 

연합군의 '덩케르크' 철수작전,

영국은 각종 선박을 동원해 6월4일까지 30만 명의 연합군 병력을 철수시킵니다.

프랑스군은 마지노선에 50개 정예사단을 배치해 놓고 있었는데, 이들은 요새 안에 틀어 박혀 저항다운 저항도 못하고 독일군에 포위되어 항복할 수밖에 없었죠. “프랑스는 폴란드와 다르다”고 호언장담했던 프랑스군 참모총장 ‘가믈랭’의 말이 무색하게 프랑스가 항복하기 까지는 채 6주가 걸리지 않았습니다.
 
프랑스인들의 가장 큰 적은 어쩌면 나치 독일군이 아니라 그들의 낡은 사고에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기관총과 철조망으로 상징되던 1차 대전과 달리 전차와 항공기가 전투의 주역이 된 2차 대전에서는 지상 요새가 절대적인 방어선이 될 수 없음을 프랑스군 수뇌부는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역사상 최악의 ‘삽질’로 꼽히는 마지노선이 오늘날 ‘든든한 최후의 방어선’이란 의미로 쓰이는 것은 역설적입니다.

 

 

 

1940년 9월 15일, 영국전투의 날

 

 1940년 여름, 섬나라 영국은 외로운 싸움을 하고 있었습니다. 동맹국 프랑스는 독일군의 공세에 겨우 6주를 버티고 무너져 버렸고, 유럽 대륙을 지배하게 된 나치 독일의 위세 앞에 영국의 운명은 풍전등화 같았습니다. 대륙과의 사이에 가로놓인 좁은 바다만이 영국을 지켜주는 방패였죠.
 

노르웨이에서 프랑스까지 자신의 손에 넣은 히틀러는 7월 16일, 독일군에 영국 침공을 준비할 것을 지시합니다. 이렇게 해서 일명 ‘바다사자’(Sea Lion) 계획이 수립되죠.

 

프랑스에 파견됐다 가까스로 철수한 영국 지상군은 대부분 작전 불능 상태여서, 독일군이 영국에 상륙하기만 하면 영국의 패망은 눈에 빤히 보이는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세계 최강을 자랑하는 영국 해군을 제압하지 않고는 영국 해협을 건너는 일은 불가능했죠. 그러기 위해서 히틀러는 먼저 제공권을 완전히 장악해야한다는 것을 깨닫고 독일 공군 총사령관 헤르만 괴링 원수에게 영국 본토에 대한 대대적인 공중작전을 지시합니다.

 

  

영국전투 당시의 주요 비행기지 위치.

히틀러의 명령을 받은 괴링은 8월 13일, 2천5백대의 가용 항공기를 총동원하여 영국공군을 무력화하기 위한 ‘독수리’(Eagle) 작전을 개시합니다. 'The Battle of Britain' 즉, 영국전투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런데 폴란드와 프랑스에서 눈부신 활약을 한 독일 공군은 영국 공군을 과소평가해서 터무니없는 낙관을 합니다. 영국 본토 전역을 폭격을 통해 장악하는 데는 단 4주일 밖에 걸리지 않을 것이라는 예상을 했던 거죠.

 

그들은 총 900대의 영국 전투기를 한 달에 300대 이상씩 격추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영국의 항공 산업 능력을 감안하면 한 달에 200대의 새 전투기를 생산한다고 해도 매월 100대 이상의 전투기 세력을 감소시킬 수 있다고 계산했고, 넉넉히 3개월이면 영국의 상공을 장악할 수 있다고 예상했습니다.

 

 

 
 영국공군 전투기부대 사령관 '휴 다우닝' 대장,

사람들은 그를 '뾰루퉁한' 다우닝이라고 불렀지만, 탁월한 지도자였습니다.

 하지만 영국 공군이 호락호락한 상대는 아니었습니다. 영국 공군 전투기 사령부의 휴 다우닝 장군은 무뚝뚝하고 사교성이 떨어지는 사람이었지만, 탁월한 선견지명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가용한 전투기와 조종사들을 싹싹 긁어모아 독일공군과의 일전을 준비하고 있었죠. ‘휴 다우닝의 병아리들’이라고 불렸던 당시 영국 공군 전투기 조종사들의 평균 연령은 21세에 불과했고, 비행 경력도 일천했으나 곧 벌어지는 독일 공군과의 전투는 곧 이들을 베테랑 전투 조종사로 만들게 됩니다. 

 

 

 영국공군(RAF) 전투기 조종사들의 평균 연령은 21세,

윈스턴 처칠 수상은 "일찍이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적은 사람들에게 은혜를 입은적은 없었다"라는 말로 이 어린 조종사들에게 헌사를 바칩니다.


 

독일 공군 최초의 목표물은 영국해협을 따라 배치된 레이더 기지들 이었습니다. 1935년 와츤와트가 개발해서 처음으로 실전에 배치된 레이더는 70마일 거리에서 독일기의 방향, 고도, 대수까지 알아 낼 수 있었죠.

 

독일 공군의 공습을 받은 레이더 기지 중에는 열흘 동안이나 사용불능 상태가 된 곳도 있었지만 영국 공군은 피해사실을 철저히 숨겼고, 독일측도 공습 성과를 알 방법이 없었죠.

 

일주일동안 영국의 레이더 기지에 대한 폭격을 실시한 독일 공군은 이 폭격이 별 효과가 없다고 판단했고, 영국 공군 비행장에 대한 공습으로 목표를 전환합니다.  

 

비행장을 공격당한 영국 공군은 내륙으로 기지를 이동시키면서 기세가 한풀 꺾인 듯 보였습니다. 사실 이 단계에서 쌍방의 항공기 손실은 극심했지만, 특히 독일 공군은 영국에 비해 두 배 이상의 항공기 손실을 기록했습니다.

 

괴링은 영국공군이 보유한 전투기가 3백대에 불과할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사실은 그 두 배가 넘는 수가 남아 있었습니다. 독일공군은 영국 남동부의 비행기지들을 집중 공격하여 남아 있는 영국 전투기를 그곳으로 유인, 섬멸하려했죠.

 

하지만 다우닝 장군은 독일의 계략을 간파하고 가급적 독일 전투기와의 공중전은 회피하고 폭격기만을 집중적으로 공격했습니다. 남아있는 영국 전투기 세력을 유지하면서 시간을 최대한 시간을 끌려는 고육지책이었죠. 이렇게 되자 독일 전투기들은 그들의 폭격기를 엄호해야 하는 임무를 하나 더 떠맡게 되었습니다.

 

 

 '적기출현', 긴급출동하는 영국공군 조종사들.


8월 24일, 아주 우연하게 일어난 사건 하나가 영국전투의 향방을 돌려놓는 역할을 합니다. 이날 밤 야간 공습에 나선 독일 공군 폭격기중 2대가 항로를 잃고 헤메다가 아무데나 폭탄을 떨어 뜨리고 기지로 돌아가는데, 하필이면 그 폭탄이 떨어진 곳이 런던의 중심부였습니다.

 

이곳에 떨어진 폭탄은 유서 깊은 세인트 질 교회를 파괴하고, 집으로 돌아가던 시민들을 살상했죠. 사실 히틀러는 런던에 대한 공습을 엄격히 금지하고 있었고 이 날의 사건은 누가 보아도 계획적인 것으로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다음 날 밤, 영국 공군의 폭격기들이 베를린 교외의 룰레벤을 보복 폭격 합니다. 이에 격노한 히틀러는 영국에 재보복하기 위해 대대적인 런던 폭격을 명하는데 이 결정이 빈사상태에 빠져 있던 영국 공군에게 회생의 기회를 제공하게 됩니다.

 

 

독일공군의 런던폭격은 영국공군에게 기사회생의 기회를 제공했습니다.

 독일 공군은 엄청난 양의 폭탄을 밤낮으로 런던에 쏟아 부었지만 전략적으로는 별 가치가 없는 소모전에 다름 아니었습니다.

 

무거운 폭탄을 싣고 날아 온 폭격기들은 날쌘 영국공군 전투기의 좋은 표적이 되었고, 폭격기를 엄호해 온 독일 전투기 역시 연료 부족문제로 런던 상공에서 오래 지체할 수 없었습니다.

 

상황이 이러함에도 허풍장이 헤르만 괴링은 히틀러에게 영국 공군은 이미 결딴났다고 잘못된 보고를 하고, 이에 도취된 히틀러는 영국 상륙을 감행하려는 결심을 합니다. 
 

9월 15일, 화창한 날씨 속에 700대의 독일 전투기와 400대의 폭격기들이 런던을 향해 날아옵니다. 때를 기다리고 있던 영국 공군은 휘하의 24개 비행중대가 가지고 있던 300여 대의 전투기들을 총동원해서 독일기 요격에 나섰고, 이 날 하루 종일 격렬한 공중전이 벌어져 하늘에는 온갖 방향으로 비행운이 꼬리를 끌었습니다.

 

독일 폭격기들의 태반은 런던에 닿지도 못하고 격추되거나 동체가 벌집이 된 채로 귀환해야했죠.

 

 

 1940년 9월 15일, 런던상공은 어지러운 비행운으로 가득 찼습니다.

 다음 날 아침, 영국의 신문들은 ‘독일공군기 185대를 격추’ 시켰다고 대서특필을 했습니다. 사실 이 숫자는 과장된 것이었죠. 실상은 독일 공군기 격추 56대, 영국 전투기 손실 26대였습니다.

 

하지만 독일 공군의 노련한 항공기 승무원 수 십명이 기내에서 전사했고 구사일생 기지로 돌아가긴 했지만 다시는 비행이 불가능한 항공기가 또 수 십대, 대륙으로 돌아가다 연료가 떨어져 해면에 불시착한 독일 전투기가 또 20여 대였습니다.

 

같은 날 영국공군 폭격기들이 영국해협에서 상륙작전을 준비하던 독일 해군의 수송선과 예인선들을 공격해 백 여척을 격침함으로써 독일군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입힙니다. 히틀러는 할 수 없이 ‘시 라이언’ 작전의 무기연기를 명령 합니다.     

 

 

 영국전투에는 망명한 폴란드 출신 조종사들도 참가했습니다.

 

독일공군의 패인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공군의 임무를 지상군을 지원하는 역할에 한정해서 육군의 ‘장거리 포병’같은 개념으로 운용했다는 것이 주요한 원인으로 꼽히고 있습니다.

 

사실 ‘전격전’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낸 폴란드 침공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독일 공군의 임무는 지상군을 전술적으로 지원하는 것 이상은 아니었죠. 이런 개념에서 공군을 운용하다 보니 자연히 장거리 폭격기나 전투기 개발에는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던 것이죠.

 

영국전투 당시 독일공군의 주력 전투기였던 메샤슈미트(Me-109)는 비행시간이 80분에 불과해서 영국 해협을 오가는데 걸리는 60분을 제외하면 영국 상공에서 전투를 할 수 있는 시간은 불과 20분 미만이었습니다.

 

 

 
독일공군의 주력 전투기 Me-109는 훌륭한 전투기였지만, 결정적으로 비행시간이 짧았습니다.


또 독일공군의 패배를 앞당긴 것은 그들의 수장 헤르만 괴링 원수의 근거 없는 낙관때문이기도 했습니다. 애초 예상과 달리 영국은 매월 450~500대의 전투기를 생산해 냈고, 폴란드·프랑스 출신의 조종사들을 받아들여 1400명이 넘는 전투기 조종사를 유지했습니다.

 

영국의 조종사들은 낙하산으로 탈출해도 다시 비행할 수 있었지만, 적지에 떨어진 독일 조종사들에게는 포로수용소로 가는 길 밖에 다른 방법이 없었던 것이죠. 항공기 손실에 못잖게 숙련된 조종사들의 손실은 장차 2차대전의 향방을 바꾸게 됩니다. 

 

 

영국공군 승리의 두 주역 허리케인 전투기

 

 

스피트파이어 전투기

 

역사적인 날이 된 1940년 9월 15일, 영국정부는 이 날을 역사적인 ‘영국전투의 날’(The Battle of Britain Day)로 선언하고 오늘까지 기념하고 있습니다.

 

1940년 9월 17일 '한국광복군' 창설

 

1940년 9월 17일, 중경 가능빈관에서 개최된 '한국 광복군 총사령부 성립전례식'에서

임시정부 국무령 김구 선생(오른쪽)과 김학규 광복군 총사령부 참모(왼쪽).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대한민국 원년(1919년) 정부가 공포한 군사조직법에 의거하여 중화민국 총통 장개석 원수의 특별 허락으로 중화민국 영토 내에서 광복군을 조직하고 대한민국 22년(1940) 9월 17일 한국광복군 총사령부를 창설함을 이에 선언한다.

 

한국광복군은 중화민국 국민과 합작하여 우리 두 나라가 독립을 회복하고자 공동의 적인 일본제국주의자를 타도하기 위하여 연합군의 일원으로 항전을 계속한다.  

과거 30여 년간 일본이 우리 조국을 병합 통치하는 동안 우리 민족의 확고한 독립정신은 불명예스러운 노예 생활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무자비한 압박자에 대한 영웅적 항쟁을 계속하여 왔다.

 

영광스러운 중화민국의 항전이 4개년에 도달한 이래 우리는 큰 희망을 갖고 우리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우리의 전투력을 강화할 시기가 왔다고 확신한다.

우리는 중화민국 최고 영수 장개석 원수의 한국 민족에 대한 원대한 정책을 채택함을 기뻐하며 감사의 찬사를 보내는 바이다. 우리 국가의 해방 운동과 특히 우리들의 압박자 왜적에 대한 무장 항전의 준비는 그의 도의적 지원으로 크게 고무되는 바이다.

 

우리들은 한중 연합 전선에서 우리 스스로의 계속 부단한 투쟁을 감행하여 극동 및 아세아 인민 중에서 자유, 평등을 쟁취할 것을 약속하는 바이다. (한국광복군 선언문 전문)

꼭 70년 전인 1940년 오늘 중국 ‘충칭’의 가릉빈관(가릉 호텔)에서 한국광복군이 창설됩니다.

식장의 전면에는 태극기가 교차되어 걸려있었고, 무대 좌우 양측에 “단군의 자손은 끝내 고국에 돌아가고야 말 것이다”, “초나라가 비록 세집 남았어도 진나라를 멸망시킬 수 있다”는 글귀가 붙어 있었죠. 선언문은 당시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령 겸 한국광복군 창설위원회 위원장 김구 선생이 직접 낭독했습니다.

이날은 또 음력 8월 1일로 ‘대한제국 군대 해산일’이기도 했습니다. 1907년 일제에 의해 강제 해산된 대한제국 군대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광복군’으로 재탄생하는 순간이었죠. 임시정부는 포고문을 통해 “광복군은 대한제국 군대가 일제에 의해 강제 해산된 이후 33년간에 걸친 수많은 의병활동과 독립군의 항일 투쟁을 계승한 정규군임”을 내외에 천명했습니다. 때문에 당시 공식적인 행사의 명칭도 ‘창설식’이 아니라 ‘성립전례식’이었습니다.

또 김구 주석은 “광복군은 일본 제국주의를 타도하기 위해 연합군의 일원으로 항전한다”고 창군 목적을 명확히 밝혔죠. 초대 총사령에는 이청천, 참모장에는 이범석이 임명되었습니다.

 

총사령이 광복군에 대한 지휘·통솔과 각종 사무를 관장하고, 군의 동원 및 작전계획은 총참모장에게, 예산·인사 등 군정 부문은 군무부장에게 지시받도록 하여 지휘계통을 이원화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정규군으로서 광복군의 창설은 의병과 비정규군만으로 항일무장투쟁을 펼치던 독립운동 세력에 구심점이 생겼다는 의미와 함께 외교와 선전활동, 단발적인 의거에만 치중하여 그 활동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던 임시정부가 정규 군사력을 보유하게 되었다는 큰 의미가 있습니다.

광복군은 창설되자마자 제일 먼저 중국에서 활동하던 한인 군사 조직 통합을 추진합니다. 1941년 ‘한국청년전지공작대’와 1942년 7월 ‘조선의용대’를 광복군에 편입시켜 4개 지대로 재편성하고 총사령부의 10개 부서를 참모처·총무처·정훈처의 3개 부서로 통합하는 등 대대적 개편을 단행해 전력을 강화했죠.

 

이후 광복군은 중국에 산재해 있던 모든 한인 무장 부대를 통합하는 등 민족적 역량을 결집, 대일 항전을 전개합니다.

1941년 12월 8일 일본의 진주만을 공습으로 태평양 전쟁이 일어나자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2월 9일 대일 선전 포고를 하고, 영국·미국·소련 등 연합군에 군사 대표를 파견해 동맹을 맺고 연합 작전을 전개합니다. 특히 1943년 영국군에 파견된 광복군 9명은 인도 전선에서 대일 심리전에 참가하기도 했죠.

1945년 5월에는 미국 정보기관인 OSS(Office of Strategic Services, 전략사무국)와 독수리 작전을 추진합니다. 이 작전은 광복군이 미군의 특수 훈련을 받은 다음 국내로 잠입, 지하 공작을 전개하다가 광복군과 미군이 상륙할 때 항일 세력을 총궐기시키고 연합군과 합류해 일본군과 전면전을 펼친다는 국내 진공 계획이었습니다. 하지만 작전 개시를 불과 닷새 앞두고 8월 15일 일제가 무조건 항복하자 이 계획은 영영 무산되고 말았습니다.

“아! 왜적이 항복! 이것은 기쁜 소식이라기보다 하늘이 무너지는 일이다. 천신만고로 애써 참전 준비한 것이 다 허사다. 가장 걱정되는 일은 우리가 이번 전쟁에서 한 일이 없기 때문에 장래 국제간에 발언권이 박약하다는 것이다.”

일본의 패망 소식을 들은 김구 주석은 이렇게 탄식했죠. 그 뒤 광복군은 조직을 확대해 국군 자격으로 귀국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지만, 미군정과 중국 국공내전의 혼란 속에서 해체를 선언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광복군은 개인 자격으로 해방된 조국에 돌아올 수밖에 없었고 건군 과정에서도 소외되었죠.

 

조국과 민족의 독립을 위해 피 흘렸던 광복군 출신들은 자신들이 건군의 핵심이 되어야하며 일본제국군 출신은 배제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죠. 결국 광복군 대신 일본군과 만주군 출신들이 군의 주류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1948년 정부 수립 후 창설된 신생 국군에서 광복군 출신은 이범석 초대 국방부장관, 백범 선생의 아들 김신 전 공군참모총장, 안중근 의사의 조카 안춘생 전 육군사관학교 교장, 광복군 참모장을 지냈던 김홍일 전 육군1군단장, 유해준 제1야전군사령부 부사령관을 포함해 모두 200여 명 정도입니다.

 

 

1940년 9월 23일 - 일본군, 인도차이나 반도 침공

 

 

1940년 오늘, 일본 육군이 비시 프랑스 정부의 통치아래 있던 인도차이나 반도를 침공합니다. 19세기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 등 인도차이나 3국을 식민지화했던 프랑스는 2차 대전 초반 독일에 무릎을 꿇었고, 나치의 꼭두각시 정권인 비시 정부가 수립되었죠.

 

인도차이나 반도의 프랑스 식민지 정부 또한 본국의 비시 정권에 빌붙어 있는 처지였습니다. 그런데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생산되는 천연 고무와 석탄, 쌀과 식물성 유지 등은 전쟁수행을 위해 일본에게 꼭 필요한 자원이었습니다.

 

1940년 초여름, 일본은 베트남의 하이퐁 항구와 운남 철도를 이용하여 중국군을 포위한다는 명목으로 북베트남 하이퐁에 조사단을 파견합니다.

 

 

 
사이공 시내로 들어오는 일본군의 자전거 행렬.

 

이를 계기로 일본 정부는 프랑스에 베트남 지배를 용인하는 대신 자국 군대의 베트남 주둔을 허용할 것을 요구합니다. 당시 인도차이나 식민 정부의 총독은 ‘쟝 드코르트’ (Jean Decoux) 제독으로, 그는 일본군의 인도차이나 주둔을 허용할 생각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본국 정부의 눈을 피해 영국, 미국 정부(당시 미국은 전쟁에 참전하기 전이었습니다)와 접촉하기도 했고, 심지어는 중국군과 연합하여 일본군의 인도차이나 진입을 막을 생각도 해보았지만, 별 뾰족한 수는 없었습니다.

 

중국을 침략한 일본군이 보여준 잔인무도한 대학살에 대한 소문은 유사시 인도차이나 반도에 살고 있던 2만 여 명의 프랑스 출신 여성, 어린이들의 생명도 보장할 수 없다는 공포를 불러일으켰습니다.

 

 

비시 프랑스 정부의 인도차이나 총독 '쟝 드코르트' 제독.

 

드코르트 총독이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있던 사이, ‘니시하라 이사쿠’ 일본 제 22군 사령관은 9월 22일을 기하여 일본군이 인도차이나 반도로 들어간다는 통보를 해옵니다. 일본군과 프랑스 식민지 정부 간의 협상 결과 일본군이 사용할 4곳의 비행장과 주둔지가 정해졌지만, 일본군의 진주를 미처 통보 받지 못한 몇 곳에서 프랑스군과 일본군간의 교전이 벌어집니다.

 

하이퐁에서는 일본군의 폭격으로 37명의 베트남 민간인이 사망하였고, 압도적으로 우세한 일본군의 전력 앞에 프랑스 식민지 군대는 곳곳에서 후퇴를 거듭합니다. 사태가 이렇게번지자 당황한 것은 일본 외무성이었습니다.

 

아무리 대동아공영권을 주창하고 있긴 했지만 외교적으로 일본은 나치 독일과는 동맹관계에 있었고, 비시 프랑스 정부는 나치의 사냥개와 같은 존재였기 때문이죠. 
 

이와 같은 혼란은 일본 정부가 비시 정부에 사과하고 포로로 잡은 프랑스군을 석방함으로써 일단 종결되었습니다. 인도차이나 침공군의 총사령관이었던 이사쿠 장군도 사임해야했지요. 이로써 인도차이나 반도는 일본과 비시 프랑스의 이중 지배체제 아래 놓이게 되었습니다. 

 

전쟁 자원을 공급하기 위한 일본의 가혹한 수탈 정책은 급기야 전쟁말기인 1945년 봄, 최악의 기근사태를 초래하여 1백 만 명의 베트남 민중들이 굶어 죽는 참극을 초래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