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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에 달가듯이 2014. 12. 10. 18:52

역사 속의 전쟁 이야기 1941년 ~ 1950년 

 

 

1941년 3월 11일 - 미국 ‘무기 대여법’ 발효, 대외 중립노선 폐기

 

'무기 대여법'에 서명하는 루즈벨트 대통령.

 

1941년 오늘, 루즈벨트 미국 대통령이 연합국에 대한 무기 공급을 목적으로 하는 ‘무기 대여법’ (Lend-Lease Act)에 서명합니다. 미국이 참전하기 전이었지만 이 법에 의해 막대한 양의 무기와 군수물자가 영국과 소련, 중국을 비롯한 연합국에 공급됩니다.

 

또한 이 법은  전쟁 물자를 판매할 때, 해당국이 대금을 선불로 지불하고 직접 운송하도록 요구한 ‘캐시 앤 캐리’ (Cash & Carry Act)  법안을 무효화시켰습니다. 당시 ‘무기 대여법’의 가장 큰 수혜대상이었던 영국 경제가 전쟁으로 피폐해져 더 이상 무기를 구입하고 운송할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었죠.  

 
 
연합국에 보내는 항공기를 선적하는 미국 노동자들.

 

1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의 일에는 개입하지 않는다는 것이 미국 정부의 일관된 입장이었고,  1935년 미국 의회에서 제정된 중립법은 교전국과의 통상이나 교전국에 대한 차관을 금지하고 있었습니다. 그 목적은 물론 미국이 다른 나라의 전쟁에 휘말려 들어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였죠.

 

이런 미국의 고립주의는 1930년대 세계를 휩쓴 전체주의의 위협 앞에 놓이게 됩니다. 당시 국제정세는 독일과 이탈리아의 나치즘과 파시즘, 그리고 일본제국주의가 세계평화를 위협하는 상황이었죠.

 

1939년 9월, 나치 독일이 폴란드를 기습 공격함으로써 마침내 제 2차 세계대전이 터지게 됩니다. 독일군은 승승장구, 단 5주 만에 폴란드를 집어 삼키고, 이듬해 가을에는 프랑스까지 무릎을 꿇립니다.  

 

 
 
화물선에 선적되는 M3 '리' 전차.

 

1940년, 3선에 성공한 루즈벨트 대통령은 선거 운동 기간 중에 중립여론을 의식해 미국이 전쟁에 직접 참가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여러 차례 천명한 바 있지만, 대통령에 취임하고 나서는 국민 설득에 나섭니다.

 

1941년 1월, 세 번째의 대통령 임기를 시작하면서 발표한 연두교서에는 그의 이런 논리가 담겨있습니다. 그는 “독재자들이 폭탄으로 창조하려고 하는 전제 정치라는 새 질서에 정반대되는 도덕적 질서의 구현”을 미 의회에 호소했죠.

 

세계가 전체주의의 마수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미국이 ‘민주세계의 병기고’ 역할을 해야 하며, 영국을 비롯한 연합국에 무기와 군수물자를 원조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루즈벨트의 표현에 따르면 ‘이웃집에 불이 났으면 불을 끄라고 호스를 빌려줄 수도 있는 것 아닌가?’라는 것이었죠.

 
 
영국군 병사들이 타고 있는 이 전차는 미국에서 만들어진 '셔먼' 전차 입니다.


‘이웃집에 붙은 불을 끄지 않으면 내 집에도 옮겨 붙을 것’이라는 루즈벨트의 호소는 미국 의회에서 격렬한 토의를 거쳐 ‘무기 대여법’ 통과로 결실을 맺습니다. 찬성과 반대는 단 한 표 차이였죠. 2차 대전 중 이 법에 의해 연합국에 지원된 무기의 총액은 모두 500억 달러(영국 310억 달러, 소련 110억 달러)를 웃돌았습니다.

 

거대 공업국 미국의 생산력과 결합한 ‘무기 대여법’은 파시즘에 맞서 치열한 싸움을 전개하던 연합국들에게 기사회생의 기회를 제공했습니다. 미국은 마치 풀빵을 찍듯이 무기들을 만들어 내죠. 전쟁 중 미국이 제작한 항공기는 총 32만 4천 759대, 항공모함도 141척이나 만들었습니다. 리버티선이라고 불렸던 7천 톤급 화물선 1척을 만드는 데는 불과 3일이 걸렸을 뿐입니다.  

 
 
전시표준선(戰時標準船) 리버티급, 미국은 전쟁기간 동안 이 배를 하루 평균 3.5척씩 만들어 냈습니다. 또 이 배들은 연합군 군수물자 수송의 75%를 담당함으로써 승리에 공헌했습니다.

 

2차 대전 중 모두 38개국이 이 법에 의해 무기를 지원 받았으며, 미국은 ‘전쟁특수’라는 호황을 맞아 전쟁을 치르며 경제가 성장한 유일한 국가가 되었죠.  1941년 12월, 진주만 공습으로 미국은 마침내 전쟁에 발을 들여 넣게 되지만, 사실상 미국의 참전은 ‘무기 대여법’이 발효되던 1941년 3월 11일부터 시작되었다고 보는 것이 보다 정확할 것 같습니다. 또한 이 법은 미국이 고립주의에서 탈피해 초강대국으로 가는 이정표가 되었습니다.      

 

 

1941년 5월 27일 - 영국 해군, 독일 전함 '비스마르크' 격침

 

 

1941년 5월 27일 오전 10시 40분, 독일 해군의 자랑이었던 전함 ‘비스마르크’가 영국 해군의 집중공격을 받고 대서양 바다 밑으로 침몰합니다.

 

선체 길이 242m, 폭 36m, 높이 15m, 만재배수량 약 5만900t에 달하는 비스마르크(KMS Bismarck)는 일본의 ‘야마토’가 건조되기 전까지 당대 최대의 전함이었죠.

 

이 전함은 사정거리 35㎞에 이르는 380㎜ 주포 8문과 150㎜ 부포 12문, 기타 소구경포 44문의 강력한 무장을 갖췄으면서도 시속 30노트로 고속 항진이 가능했습니다. 1940년 8월 24일 취역한 비스마르크는 몇 달 동안의 시험 항해를 하면서 실전 투입을 기다리고 있었죠

 

 

4만 9천톤 급 전함 '비스마르크', 당대 최대의 전함이었습니다.

 

독일 해군은 1941년 3월, ‘라이뉘붕’ (Rheinubung, 라인연습)이라는 이름의 작전을 구상합니다. 이 작전은 독일 해군 총사령관 ‘에리히 레더’ 제독의 작품으로 북해의 ‘킬’(Kiel)에서 전함 비스마르크와 순양함 ‘프린츠 오이겐’을 북대서양으로 출동 시키고, 점령지 프랑스의 ‘브레스트’(Brest)에서 순양전함 ‘샤른호스트’와 ‘그나이제나우’를 남대서양으로 파견하여 영국으로 향하는 호송선단들을 공격하는 것으로 시작될 계획이었죠.

 

영국의 유일한 생명선인 해상보급로를 독일 군함들이 휘젓고 다니면, 영국이 전 해군력을 동원하여 이 4척의 독일 함대를 잡기 위해 몰려 들테니 그때를 틈타 ‘유보트’(U Boat)들이 호위를 받지 못하는 수송선단을 공격해 괴멸시킨다는 작전이었습니다.

 

'귄터 뤼첸스' 제독, 그는 '라이뉘붕' 작전의 책임자였습니다

 

그런데 이 작전은 시작하기 전부터 틀어져 버렸습니다. 순양전함 ‘샤른호스트’가 심각한 기관고장을 일으켰고, ‘그나이제나우’조차 4월 6일 브레스트 항을 기습한 영국 뇌격기의 어뢰를 얻어맞고 6개월간 전투불능 상태에 빠졌던 것이죠.

 

‘라이뉘붕’ 작전의 지휘관 ‘귄터 뤼첸스’ 중장이 작전의 연기를 주장하지만, 총사령관 ‘레더’ 제독은 북해의 밤이 더 짧아지기 전에 작전을 강행할 것을 명령 합니다. 마침내 1941년 5월 18일, 전함 비스마르크는 중순양함 프린츠 오이겐을 앞세우고 ‘코텐하펜’을 출항합니다.

 

독일 해군은 출항을 극비리에 붙였지만, 이 거대한 전함의 행방은 곧 영국 해군의 정보망에 걸려들었습니다. 5월 21일, 영국 해군의 정찰기가 노르웨이의 베르겐 근해에서 연료보급을 받고 있는 비스마르크의 모습을 포착합니다.

 

이 보고를 접한 영국 해군은 ‘L.E. 홀랜드’ 제독이 지휘하는 전함 ‘프린스 오브 웨일즈’와 순양함 ‘후드’에 6척의 구축함을 붙여 ‘비스마르크’를 뒤쫓기 시작합니다. 다음날에는 전함 ‘킹 조지 5세’와 항공모함 ‘빅토리어스’, 순양함 ‘리펄즈’가 영국 본토 함대 사령관 ‘존 토베이’ 제독의 지휘 아래 추격전에 가세하죠.

 

 

영국 함대를 향해 사격하는 '비스마르크'

 

5월 23일 저녁 7시, 덴마크 해협을 빠져나가던 ‘비스마르크’는 영국 순양함 ‘노포크’와 ‘서포크’를 조우, 짧은 포격전을 벌입니다. 시정 150m의 자욱한 안개 덕분에 양군 다 피해는 없었지만, 380mm 주포 사격의 충격으로 비스마르크의 전방 레이더가 파손되죠.

 

비스마르크 발견 보고를 들은 영국 해군은 전함 ‘리나운’, 항공모함 ‘아크로열’, 순양함 ‘셰필드’로 구성된 세 번째 함대를 출격시킵니다. 5월 24일 새벽 4시 30분, 순양함 ‘서포크’로부터 비스마르크의 정확한 위치를 보고 받은 홀랜드 제독은 함대에 전투준비를 명령하죠.

 

5시 52분, 양국 함대의 거리가 23Km로 좁혀졌을 때, 영국함대는 일제히 포격을 개시합니다. 하지만 비스마르크는 멀쩡했고, 비스마르크가 응사한 포탄이 순양함 후드의 탄약고에 명중, 대폭발을 일으킨 후드는 선체가 두 동강 나며 물속으로 빨려 들어갑니다.

 

1,400여명의 승조원 중 억세게 운이 좋았던 단 세 명을 제외하고 함대 사령관 홀란드 제독까지 불귀의 객이 되고 말죠. ‘프린스 오브 웨일즈’도 8발의 포탄을 얻어맞고, 함교 근무자 전원이 사망한 가운데 필사적으로 도망갑니다.

 

전투 개시 10분만의 일이었습니다. 비스마르크에 명중한 영국 해군의 포탄은 단 두 발이었는데, 치명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보일러실에 난 포탄 구멍으로 바닷물이 들이 차서 속력이 떨어지고 있었고, 연료탱크에선 검은 중유가 새어나와 바다 위에 비스마르크의 항적을 뚜렷이 남기고 있었죠.

 

비스마르크의 함장 ‘에른스트 린데만’ 대령은 ‘뤼첸스’ 제독에게 독일의 항구로 귀항할 것을 건의하지만, ‘뤼첸스’ 제독은 프랑스의 ‘생 나제르’ 항구로 향할 것을 명령하죠.

 

 

전함 '후드'의 침몰

 

한편, 복수심에 불타는 영국 해군은 추격의 고삐를 바짝 죄고 있었습니다. ‘후드’가 격침당하고 ‘프린스 오브 웨일즈’가 피해를 입는 동안, 대서양 각 해역에 흩어져 있던 영국의 함대는 전속력으로 몰려들고 있었죠.

 

짙은 안개 속에서 영국함대의 추적을 벗어나기도 하고, 영국 항모 ‘빅토리어스’에서 발진한 뇌격기 공습에도 아무런 피해를 입지 않은 비스마르크였지만, 운은 거기까지였습니다. 5월 26일, 오전 9시 영국 해군의 수상기 ‘카타리나’가 우연히 비스마르크를 발견합니다.

 

“북위 49도 33분, 서경 21도 50분, 브레스트로부터 서방 750마일 해상에 속력 20노트, 침로 150도로 항진하는 전함 1척 발견”, 이대로라면 하루 뒤에는 독일 공군의 엄호가 가능한 영역으로 들어갈 판 이었죠

 

 

영국 항모 '아크 로열'에서 '소드피시' 뇌격기들이 발진합니다

 

항공모함 ‘아크 로열’에서 이륙한 ‘소드피시’ 뇌격기들이 비스마르크를 향해 달려듭니다. 캔버스 천으로 만들어진 복엽날개를 가진 소드피시 뇌격기들은 당시 기준으로 보아도 시대에 뒤떨어진 구식이었습니다.

 

하지만 비스마르크의 대공포들이 쏘아 대는 포탄세례에도 불구하고 소드피시들은 용감하게 날아와 어뢰를 떨굽니다. 2발의 어뢰가 비스마르크에 명중하죠. 한 발은 선체 측면의 두꺼운 장갑판에 부딪쳐 폭발했지만, 다른 한 발이 치명적이었습니다. 어뢰가 조타실에 적중한 것입니다.

 

때마침 비스마르크는 어뢰를 피하기 위해 왼쪽으로 한껏 선회하는 중이었는데, 2개의 방향키가 어뢰의 폭발로 왼쪽으로 고정된 채로 멈춰 버린 것이었죠. 이제 비스마르크는 방향을 바꾸지도 못하고 다가오는 영국 해군의 주력함대쪽으로 곧장 직행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소드피시 뇌격기들이 투하한 어뢰 2발이 비스마르크에 적중합니다

 

5월 27일, 날이 밝아오면서 멀리 수평선상에는 영국 함대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전함 ‘킹 조지 5세’와 ‘로드니’, 순양함 ‘노포크’가 서서히 상처 입은 비스마르크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죠. 오전 8시 47분, 전함 로드니의 사격을 시작으로 전 영국 함대가 포문을 열고 비스마르크에 포탄 세례를 퍼붓습니다.

 

로드니의 세 번째 일제 사격이 비스마르크의 1번 포탑에 적중하는 것을 시작으로 비스마르크는 만신창이가 되어갑니다. 상처 입은 맹수가 몸부림치듯 비스마르크의 승조원들은 필사적으로 응사했지만 중과부적이었습니다.

 

한 시간 동안 비스마르크에 적중한 명중탄은 600여 발에 달했습니다. 마침내 오전 10시, 비스마르크의 모든 포가 침묵합니다. 이미 사령관 ‘뤼첸스’ 제독도, 함장 ‘린데만’ 대령도 전사한 후였죠. 10시 15분, 지휘권을 인수한 기관장 ‘게르하르트 유나크’ 소령은 전원 퇴거 명령을 내립니다.

 

 

이제 타오르는 거대한 고철덩이에 불과한 비스마르크였지만, 여전히 자신의 운명을 거부하고 바다위에 떠있었고, 이 전함의 숨통을 끊어 놓은 것은 영국 구축함 ‘도세트셔’가 발사한 어뢰였습니다. 도세트셔는 비스마르크의 우현에 어뢰 2발, 좌현에 어뢰 한발을 발사했고 비스마르크는 큰 물기둥과 함께 가라앉기 시작합니다.

 

10시 40분, 비스마르크는 밑바닥을 하늘로 쳐들고 전복되었고, 선미 쪽부터 대서양 깊은 바다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죠. 9일전 출항할 때 비스마르크에 타고 있던 2천4백 명의 승조원 중 110명만 구조되었습니다.

 

전사자들 중에는 독일 해군 사관학교 생도 400명도 포함되어 있었죠. 임관의 영광도 누려보지 못한 20대 초반의 젊은 생도들이 피의 폭풍우에 휘말려 사라져 간 것입니다.

 

 

구조된 비스마르크의 승조원들은 110명에 불과했습니다

 

비스마르크의 침몰로 ‘라이뉘붕’ 작전은 실패로 돌아갔고 독일 해군은 제해권 확보에 실패했습니다. 비스마르크의 침몰은 한 시대를 풍미했던 ‘거함거포’ (巨艦巨砲) 주의의 종말을 예고하는 것이었죠. 최신 전함이 구식 복엽기에 의해 치명상을 당하고 격침된 사건은 세계 각국의 해군을 긴장시키기에 충분했고, 이후 해전의 주인공은 전함에서 항공모함으로 옮겨 갔습니다.

 

1941년 8월 14일, 아우슈비츠의 성자 콜베 신부 선종

 

 

아우슈비츠 수용소 정문, ‘일하면 자유로워질 수 있다’

 

"내가 가졌던 작은 믿음이 완전히 산산조각 나버렸다. 신이 존재한다면 사람이 산채로 화로에 던져지거나 아기들의 작은 머리가 총 개머리판에 맞아 박살이 나고 자루에 넣어져 가스에 살해되도록 하지는 않을 것이다"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에서 목숨을 잃은 14살의 유대계 폴란드 소녀 루트카 라스키어가 쓴 일기의 한 구절입니다. 1939년 폴란드를 침공한 독일군은 바르샤바로부터 300km 떨어진 작은 도시 ‘오시비엥침’ 인근의 폴란드군 병영을 접수했습니다.

 

그리고 나치 독일은 ‘선의에 따라 유대인을 보호 수용하는 장소’라는 말로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를 선전했죠. 실상은 친위대 장관인 하인리히 힘러가 주동이 되어 가시철망과 고압전류가 흐르는 울타리, 기관총이 설치된 감시탑을 갖춘 공포의 강제수용소였습니다.

 

1940년 6월 최초로 폴란드 정치범들이 수용되었고, 1941년 히틀러의 명령으로 대량살해시설로 확대되었으며, 1942년부터 대량 학살이 시작 되었습니다. 

 

 

이곳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는지 정확한 집계는 없지만 많게는 4백만명, 적게 잡아도 1백 50만 명의  유태인과 폴란드 양심수, 소련군 포로, 집시 등이 학살  당했습니다.

 

유럽 각지에서 열차로 실려 온 사람들 중 쇠약한 사람이나 노인, 어린이들은 곧바로 공동 샤워실로 위장한 가스실로 보내져 살해되었습니다. 희생자의 유품은 재활용품으로 사용했고, 장신구는 물론 금니까지 뽑아 금괴로 만들었으며, 머리카락을 모아 카펫을 짰습니다.

 

1941년 7월말, 수용소 14동에서 포로 하나가 탈출했습니다. 친위대가 출동해서 도망친 포로를 찾았지만 행방을 찾지 못했습니다. 14동에 수용된 모든 사람들이 죽음의 공포에 떨어야 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탈출자가 24시간 안에 잡히지 않을 경우에는 그 사람이 소속된 14동의 수용자중 다른 열 사람이 죽음을 맞아야 했기 때문이죠.

 

 

다음 날 아침이 되자 수용소 소장이 일렬로 늘어선 수용자들 중에 처형시킬 사람들을 골라냈습니다. "너, 너, 그리고 너!" 그리고 수용소장에게 지목된 한 사람, 전 폴란드군 부사관이었던 프란치세크 가조우니첵크가 울부짖기 시작했습니다. “ 오, 제발. 절 살려 주세요. 내겐 아내가 있어요. 불쌍한 자식들도 있다구요. 제발...”

 

그때 누군가 대열을 벗어나 소장 앞으로 다가와서 소장에게 말했습니다. "저 사람 대신 제가 죽게 해주십시오." “너는 누구지?” 소장이 그에게 물었습니다. "16670번, 막시밀리안 콜베, 가톨릭 신부입니다. 결혼하지 않았기에 아이도 없습니다. 부디 저 사람과 바꿔주십시오." 이 말이 소장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제안을 받아들이겠다." 울고 있는 가조우니첵크의 번호와 이름이 사형수 리스트에서 지워지고, 대신 콜베 신부의 번호와 이름이 올라갔습니다.

 

 

막시밀리안 마리아 콜베(Maximilian Maria Kolbe), 1894~1941

 

그리고 콜베 신부를 포함한 10명은 악명 높은 지하 감방, 굶어 죽어야 나올 수 있는 아사감방(餓死監房)으로 향했습니다. 콜베 신부는 죽음을 기다리는 다른 수감자들을 위로하고 격려했습니다.

 

음식은 물론 물 한 모금도 마시지 못하는 아사감방에서 울부짖는 죄수들을 조용하게 할 수 있는 방법은 죽음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콜베 신부와 함께 있는 죄수들은 누구도 저주하지 않고 비록 힘이 빠진 목소리지만 기도하고 찬송을 할 뿐입니다. 사형장이 사랑의 불꽃이 피는 성당이 되었던 거죠.

 

3일이 지났을 때 한 사람이 죽었고, 나머지는 허기와 갈증에 야위어가며 주말까지 살았습니다. 2주가 지나가자 네 사람이 살아남았는데, 콜베 신부도 그중 하나였습니다. "다음 작업을 위해 감방을 치우도록." 소장이 명령했습니다.

 

치운다는 말은 배설물과 냄새 제거를 의미했고, 또한 뼈가 보일 정도로 앙상하게 말라 겨우 숨만 붙어 있는 상태로 바닥에 누워있는 아직 생존해 있는 수감자들을 제거한다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수용소 의사가 감방 문을 열었을 때, 9명의 동료를 먼저 다 보낸 후 혼자 남은 콜베 신부는 벽에 기대어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준비된 독약주사 앞에 뼈만 남은 팔을 내어 줍니다. 1941년 8월 14일, 막시밀리안 콜베 신부는 그렇게 숨져갔습니다.

 

프란치세크 가조우니첵크 (Franciszek Gajowniczek), 1900~1995

1972년 10월 독일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15만 명 유럽인들이 함께 모였습니다. 동료 죄수를 위해 대신 목숨을 바친 한 사람을 기념하기 위한 모임이었습니다. 그 자리에는 백발의 노부부가 있었죠. 남편의 이름은 가조우니체크였습니다. 그는 그 자리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내 생명만을 갖고 살고 있지 않습니다. 내 안에는 콜베 신부님의 생명도 함께 살아가고 있습니다...” 1995년 숨질 때까지 가조우니체크는 누군가가 자기를 위해 죽으므로 대신 살게 된 자기 자신을 존귀하게 여기면서 한 평생을 살았습니다.

인간이 처할 수 있는 가장 밑바닥에서 인간성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법입니다. 아우슈비츠 생존자들의 증언을 들어보면 수용소에서 가장 악질적인 범죄는 다른 사람의 빵을 훔쳐 먹는 것이었다고 하지요.

 

몸이 쇠약해져 노동을 할 수 없다고 판단되면 바로 가스실로 보내져 생을 마감해야 했으니, 남의 빵을 훔치는 행위는 타인의 생명을 갈아 먹는 행위와 같았을 겁니다. 반면 중노동과 굶주림에 시달리면서도, 기력이 없어 누워 있는 동료를 위해 자기 몫의 빵을 나누어 준 사람들도 있었으니 어쩌면 인간에게 구원의 한 가닥 희망은 남아 있는 모양입니다.    

 

콜베 신부는?  나치 희생자들중 시복된 최초의 인물
 
1894년 1월 8일 폴란드 로츠 근처 즈둔스카볼라에서 태어난 라이몬드란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고 1907년 꼰벤뚜알 프란치스코회에 입회하여 막시밀리안이란 이름을 얻었습니다. 1911년에 유기 서원을 하였고, 1917년에는 로마에서 성모의 기사회를 조직하였습니다. 1918년, 그는 로마에서 서품받고 폴란드로 귀향하여 월간 "성모의 기사(Rycerz Niepokalanej)"를 창간하였습니다.
 
1927년, 그는 와르소에서 25마일 거리가 되는 곳에 무염성모의 마을을 세웠는데, 그는 이와 비슷한 마을을 일본과 인도에도 세웠습니다. 1939년 나치에 반대한 혐의로 비밀경찰에 체포되었다가 일단 석방된 뒤, 1941년 2월 유대인들과 폴란드 지하조직을 도왔다는 죄목으로 다시 체포당했습니다.

1971년 10월 17일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복자(福者)로 선포되어 나치 희생자들 가운데 로마 가톨릭 교회로부터 시복(諡福)된 최초의 인물이 되었고, 1982년 10월 10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하여 시성되었습니다 

1941년 9월 3일 - 나치, 아우슈비츠에서 독가스 학살 시작  

 

 

1941년 오늘, 소련군 포로 6백 명과 유태인 2백 5십 명이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에서 독가스로 처형됩니다. 이는 아우슈비츠를 비롯한 유럽에 산재한 강제 수용소들에서 이후로도 4년 가까이 계속되었던 대량학살, ‘홀로코스트’의 전주곡이었습니다.


히틀러의 유태인 박해는 그가 1933년 1월 30일 총리가 된지 한 달 만에 시작되었습니다. 유태인들은 공직에서 쫓겨났으며 유태인 소유의 기업과 상점은 문을 닫아야 했죠. 더욱이 1939년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2차 대전이 발발한 뒤, 유태인들은 더 이상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학교에 다니거나 직업을 가질 수도 없었고, 모든 재산을 몰수당했으며 주거는 집단 거주 지역인 ‘게토’ 안으로 한정되었습니다. 여섯 살 이상의 모든 유태인들은 ‘다윗의 별’이라 불리는 노란색 표지를 겉옷에 달아야 했고, 열두 살이 넘는 유태 남성들은 군수공장 등에서 강제 노역에 종사해야 했습니다.

 

 

1944년 공중에서 촬영된 아우슈비츠 수용소.


전쟁 초기 유럽 대륙을 나치가 석권한 뒤, 대서양 연안에서 볼가강 유역에 이르는 독일 점령지역의 모든 유태인들에게 시련이 닥칩니다. 그들 대부분이 게토와 강제 수용소로 보내진 것이죠. 그리고 나치의 수뇌부들이 이들의 운명을 결정 합니다.

 

 ‘유태인 문제의 최종 해결책’, 그것은 한 민족의 절멸을 뜻하는 것이었습니다. 동부 유럽에서 나치는 조직적인 처형부대를 운영하면서 유태인들과 공산주의자, 집시들을 색출하여 집단적으로 살해하였습니다.

 

1941년 6월, 소련을 공격한 이래 최초 열 달 동안에만 55만 명이 이들 처형부대에 의해 목숨을 잃어야 했죠. 사실 나치는 집권 이래 유태인들뿐만 아니라 독일 시민이라 할지라도 그들에 의해 ‘생존할 가치가 없는 존재’라고 낙인찍힌 장애인들과 동성애자들 같은 국외자들도 가차 없이 살해해오던 터였습니다.

 

그리고 가스는 대량 학살을 가능케 한 효율적인 수단이었던 것입니다. 아우슈비츠 외에도 폴란드 동부의 베우제크, 소비보르, 트레블린카 등에 대규모 절멸 수용소가 건설되었습니다.

 

 

 

나치가 대량학살에 사용한 '치클론-B'는 공기와 접촉하면 맹독성의 시안화수소 가스를 만들어 냈다.

 

이 수용소들에는 마치 샤워실처럼 꾸며 놓은 가스처형실과 시신들을 소각하기 위한 대규모 화장시설들이 들어섰습니다. 나치의 강제 수용소들은 사실상의 살인 공장이었던 것입니다. 유럽 각지에서 사전에 면밀하게 계획된 시간표에 따라 수많은 기차들이 수용소로 희생자들을 실어 날랐습니다.

 

나치는 노동력이 있는 건강한 사람들은 강제노동수용소로 보내고 (이들도 결국 죽게 되었지만), 노약자와 어린이들을 비롯한 허약자들은 바로 가스실로 보냈습니다. 가스실에는 수건과 비누까지 준비되어 영락없는 목욕시설 같이 보였지만, 몸을 씻기 위해 옷을 벗고 샤워장으로 들어간 그 누구도 다시는 그 옷을 입지 못했죠.

 

이들에게 쏟아진 것은 따뜻한 온수가 아니라 치명적인 ‘치클론-B’ (Zyklon-B) 가스였습니다. 원래 살충제로 개발되었던 이 가스 50g 으로 체중 50Kg의 성인 5천명을 죽일 수 있을 정도였죠. 이 가스를 마신 사람들은 끔찍한 고통을 겪다가 숨이 끊어졌습니다.  

 

 

희생자들의 안경이 쌓여 있습니다.

 

얼마나 많은 유태인들과 러시아인, 동성애자들이 절멸수용소에서 목숨을 잃었는지는 정확한 통계가 없습니다. 동유럽에서 나치의 수용소들을 해방시킨 소련군의 집계에 의하면 아우슈비츠에서만 4백만 명이 희생되었으며 이 중 유태인들은 2백 5십 만 명 정도라고 알려져 왔죠.

 

하지만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아우슈비츠에서 살해당한 사람들은 110만 명에서 150만 명으로 추산되고 있으며, 유태인이 가장 많았던 것은 확실하지만 정확한 숫자는 알 수 없다고 합니다.

 

지난 2001년 아우슈비츠 수용소 해방 60주년 기념식에서 어느 수용소 생존자의 말은 인류에게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습니다. “세계는 아우슈비츠로부터 무슨 교훈을 얻었는가? 여전히 인종과 피부색,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사람들은 서로 싸우고 죽이고 있다”


나치가 자행했던 대량학살은 인간성 안에 숨어 있는 악마의 사악함을 잘 보여주었습니다. 하지만 이 끔찍한 비극이 가능했던 것은 어쩌면 인간의 이기심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나는 유태인이 아니니까...’, 이런 식으로 자신과 관계없는 일에 대해서는 극도로 무관심 했던 동시대인들의 이기심 말입니다.

 

또 지구촌 곳곳에서 되풀이 되는 인종 학살의 역사는 인류의 미래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죠. 녹두님 표현대로 오늘날 팔레스타인에서 자행되는 ‘유태인들의 나치질’과 히틀러가 독일 국민들의 합법적 선거에 의해 집권했다는 사실은 언제나 곰PD의 가슴을 서늘하게 만듭니다.

 

 

1941년 10월 2일, 독일군 모스크바 총공격 개시

 

 

1941년 오늘, 페도르 폰 보크(Fedor von Bock) 원수가 지휘하는 독일 육군 중부집단군이 소련의 수도 모스크바에 대한 총공세를 시작합니다. 이 대공세에 붙여진 작전암호는 태풍(Operation Wotan). 작전의 목표는 겨울이 오기 전에 모스크바를 함락 시키는 것이었습니다.

 

같은 해 6월22일, 러시아를 전격적으로 침공한 독일군은 4개월 남짓한 기간 동안 놀라운 속도로 소련 영내 깊숙한 곳까지 침투해 9월 말에는 모스크바의 코앞까지 도달해 있었죠. 

 

위로부터 독일 북부군, 중부군, 남부군의 진격로.

 

원래 히틀러는 전쟁 시작 후 3,4개월 안에 모스크바를 함락할 수 있으리라 낙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전쟁 초기 독일군의 파죽지세와 같은 진격은 점차 소련군의 결사적인 저항으로 속도가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무엇보다 독일군의 전략적인 목표가 모호했습니다.

 

히틀러가 천연자원과 곡물이 풍부한 코카서스와 우크라이나 공략을 모스크바 점령보다 우선했기 때문에 중부집단군은 핵심전력인 구데리안 기갑군을 남부집단군에 배속시켰고, 그 바람에 전력이 크게 약화되어 있었죠. 그래서 중부집단군의 스몰렌스크 공략작전은 7월부터 9월까지 지속되어 2달간 모스크바 공략작전이 늦어졌습니다.

남부집단군이 키에프와 스몰렌스크를 함락시킨 이후에야 남방전선으로 전속되었던 구데리안 기갑군을 재정비할 수 있었고, 이 때문에 독일군은 레닌그라드와 키에프에 잇는 선에서 정지하고 있다가 모스크바 진격은 9월 30일이 되어서야 재개되었던 거죠.

 

히틀러는 "3개월의 준비 끝에 우리는 겨울이 오기 전 우리의 적들을 박살낼 가능성을 얻게 되었다. 모든 준비는 끝났고, 오늘 우리는 이 해의 마지막 전투를 시작한다."고 승리를 자신했죠.

 

1941년 8월에 찍은 독일군 전차부대의 진격모습.

 

모스크바로 진격하는 독일 중부집단군은 제 2, 제 4, 제 9군을 주력으로 구성되어 제 2, 제 3, 제 4의 3개 기갑군 및 공군(Luftwaffe) 제 2 항공단의 지원을 받고 있었습니다. 작전 투입 인원은 백만 명에 달하였으며, 1,700 대의 전차, 14,000 문의 화포, 950 대의 항공기가 동원되었습니다.

 

이에 맞선 소련군은 125만 병력과 전차 1,000 대, 화포 7,600 문, 항공기 677 대를 투입한 상태였죠. 그러나 소련군 병사들은 전투 경험 없는 신병들이 다수였으며 대전차 병기 등 중요 전투장비도 부족하였고, 전차 또한 구형이었습니다. 

 

러시아의 동장군은 독일군 대부분이 경험해보지 못했던 무서운 적이었습니다.


대공세 직후, 소련군의 수 개 야전군을 포위, 섬멸한 독일군의 진격은 모스크바 서쪽 120km 근방의 모자이크스(Mozhaisk) 방위선에서 정지 되었습니다.

 

피를 흘려 시간을 버는 소련군의 결사적인 방어 때문이기도 했지만 도로와 들판을 진흙창으로 만든 가을장마 영향이었죠. 광활한 소련의 비포장 도로는 질퍽한 수렁으로 변해 독일군 장비들의 발을 묶었습니다.

 

장마가 끝나고 찾아온 추위는 땅을 얼려 독일군은 전진을 계속할 수 있었지만 독일군은 러시아의 겨울이라는 무서운 적과 맞닥뜨렸습니다. 백삼십년전 나폴레옹의 프랑스 군대도 패퇴 시켰던 장군중의 장군, 러시아의 동장군(冬將軍-General Winter)이었습니다.

 

 

 

 초기 독일군 공세에서 밀린 소련 정부는 10월 초, 모스크바를 사실상 포기하고 수도를 600km 후방의 쿠이브이셰프시로 이동시켰으나 스탈린은 끝까지 모스크바를 지킬 것이라며 모스크바에 남았습니다. 모스크바 방어전 지휘관으로는 소련의 명장 게오르기 쥬코프 원수가 임명되었습니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모든 시민이 참호를 파고  방어진지 구축에 동원되었고 멀리 시베리아에서 출발한 증원군이 속속 도착했죠.   

총력전! 모스크바의 모든 공장들은 군수품 생산공장으로 변했습니다.

 12월초, 독일군의 첨병부대는 모스크바의 심장부인 크레믈린궁 서쪽 30km 지점까지 진출하여 쌍안경으로 이를 확인할 수 있었지만, 거기까지가 한계였습니다. 12월 모스크바의 기온은 영하 20도에서 영하 50도를 넘나들었죠. 사실 소련의 입장에서는 예년에 비하여 포근한 날씨였지만, 겨울 군복을 지급 받지 못한 독일군들은 극심한 추위에 떨어야 했으며, 13만 이상의 독일군이 동상에 걸려 전투를 포기해야 했습니다.

 

추위는 기계들도 피해갈 수 없었죠. 총에 발라 놓은 윤활유는 꽁꽁 얼어붙어 작동불량 상태를 만들었고, 추위에 노출된 자동차와 전차들의 엔진은 시동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구데리안 장군은 일기장에 모스크바 공격은 실패로 끝났으며, 독일군은 소련군의 전투력과 국토의 크기, 그리고 날씨를 과소평가하였다고 적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12월5일, 전면적인 붕괴를 막기 위해 휘하 부대의 전투를 중단시킵니다.

 

 이제는 반격이다!

 

반격을 위해 모스크바가 함락될 위기에 처해있던 순간에도 1백만 명이 넘는 군대를 아껴두고 있던 소련군은, 이 틈을 타서 전면 반격에 나섰습니다.  이 반격이 독-소전쟁 개전 후 처음으로 독일군을 패퇴시켰으며 남북에서 모스크바를 공격하고 있던 독일군이 물러남으로써 모스크바 방어전은 소련군의 승리로 끝납니다.

 

모스크바를 지키기 위한 전투에서 소련의 손실은 120만명에 이르고, 독일군 손실은 40만명에 이를 것이라고 추정되고 있습니다. 1965년, 소련정부는 대독전쟁 승리 20주년을 맞아 모스크바를 '영웅도시'로  선포합니다. 

 

 

1941년 12월 7일 - 일본군, 진주만 기습 공격  

 

 

1941년 12월 7일 일요일 아침, 일본군이 하와이 제도 오하우 섬의 진주만을 전격 공습합니다. 이날, 하와이 북쪽 280마일 해상까지 진출한 일본해군 기동부대에서 출격한 전폭기들은 세 시간 남짓한 시간동안 미국 태평양 함대의 주요 전투함들과 항공기들을 파괴합니다.

 

일본은 기습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공격시간으로 일요일 아침을 택했고, 휴일을 맞아 단잠에 빠져 있던 미 육군과 해군 장병들은 쓰라린 대가를 치러야 했습니다.

 

미국이 자랑하던 ‘아리조나’(USS BB-39)와 ‘캘리포니아’(USS BB-44)를 포함한 전함 4척이 침몰하는 등 모두 18척의 주요 전투함이 침몰하거나 대파되었으며, 180여 대의 항공기가 파괴되었죠.

 

인명피해는 사망자가 2,403명, 부상자 1,178명에 달했습니다. 특히 7발의 어뢰와 폭탄을 얻어맞은 전함 ‘아리조나’는 화약고가 대폭발하며 1,177명의 수병들과 함께 물밑으로 가라앉았습니다.

 

 

메이지 유신 이래 팽창정책을 추구하던 일본 제국은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켰고, 1937년에는 중국과 전쟁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1939년 9월 나치 독일이 전쟁을 일으키자 프랑스와 네덜란드, 영국령의 아시아 식민지들에 침략의 마수를 뻗치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일본의 세력 확장을 경계한 미국 정부는 1941년 7월 25일, 미국 내 일본 자산의 동결령을 내립니다. 이미 철강과 고철의 대일 수출을 금지한데 이어 두 번째 경제 제재인 자산 동결령은 사실상의 석유 수출 금지 조치였습니다.  

미국 내의 일본 자산의 거의 대부분은 석유 구매를 위한 자금이었으니까요. 석유 수입량의 80%를 미국에 의존해왔던 일본으로선 동결령이 계속되면 군을 유지하기조차 힘들어 지는 상황이었던 거죠.

미국 정부의 동결령이 내려진 사흘 후, 일본군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를 침공합니다. 이렇게 되자 사태를 관망하던 영국과 네덜란드도 미국편을 들고 나섭니다. 이른바 ‘ABCD 포위망’(미국, 영국, 중국, 네덜란드의 대일 봉쇄망)이 만들어진 거죠. 일본 제국이 침략전쟁을 계속 수행하기 위해선 석유를 비롯한 천연자원들이 필요했고, 일본군은 당시 세계 3대 산지 중 하나였던 네덜란드령 보르네오를 노렸습니다. 

 

그던데 일본이 보르네오를 비롯한 이른바 남방 진출을 가로막는 가장 큰 걸림돌이 하와이의 미 태평양함대였던 겁니다. 결국은 미 해군을 그대로 두고서는 작전 성공이 보장될 수 없다는 압박을 받게 되죠. 

 

 

일본 연합함대 사령관 야마모토 이소로쿠 제독.

 

기습 계획은 연합함대 사령관 '야마모토 이소로쿠'(山本五十六) 제독의 책임 하에 수립되었습니다. 주미 일본 대사관의 무관을 지내 거대 공업국 미국의 저력을 잘 알고 있었던 야마모토 제독은 기습을 통한 속전속결이 아니고서는 승산이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죠.

 

'작전계획 Z', 미국 태평양 함대를 공격하기 위한 작전 암호명이었습니다. 이 작전계획에 따라 11월 26일, '나구모 쥬이치' 중장이 지휘하는 제1항공 함대가 항공모함 6척과 함재기 400여 대·전함 2척·순양함 4척·구축함 9척·잠수함 3척·급유함 8척을 거느리고 일본을 출발합니다.

 

 

공격을 당하기 전의 진주만, 미 태평양 함대의 근거지였습니다

기습을 성공시키기 위해 한편으로는 미국과 위장 평화협상을 진행하면서, 일본 기동함대는 3500마일의 긴 항로를 무전 사용마저 금지한 철저한 침묵 상태로 항진해 갔습니다. 11일간의 긴 항해 끝에 하와이 북쪽 해상에 도달한 나구모 함대는 12월 7일 일요일 아침6시, 제1 제파 183기의 함재기를 발진시켜 진주만을 공습한 거죠.

그런데 진주만 공습은 일본이 전술적으로는 큰 성공을 거두었다고 볼 수 있지만, 진주만 기지내의 유류저장고에 대한 추가 공습이 이루어지지 않은 점(만약 진주만의 유류 저장소가 파괴되었다면 미 해군의 대일 방어선이 하와이에서 미국 서부해안으로 물러나게 되었을 것이고, 아마도 이후의 역사는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때마침 진주만을 떠나 있던 미 태평양 함대의 항공모함들이 단 한대의 손실도 입지 않은 점을 고려하면 전략적인 측면에선 절반은 실패한 작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특히 일본의 가장 큰 실수는 미국을 전쟁에 끌어들였다는 것입니다.  

진주만 공습을 위해 출격하는 일본 전투기들.

 

선전포고도 없이 단행된 진주만 공습은 반전 고립주의에 빠져 있던 미국인들의 대일 적개심에 불을 붙였으며, 미국이 2차 세계대전에 본격적으로 참전하게 된 계기를 제공했습니다.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은 공습 다음 날, 긴급 소집된 의회 연설에서 “진주만을 상기하라”며 미국인들의 애국심을 자극했고, 이 구호는 2차 대전 내내 미국인들의 단결을 상징하는 슬로건이 되었습니다.

진주만의 원수를 갚자!


1962년, 진주만 기습 때 가라앉은 전함 아리조나함 위에 기념관이 만들어 집니다. 상부 구조물은 철거했지만, 선체는 일부러 인양하지 않아 전함의 잔해가 기념관 아래 그대로 놓여 있습니다. 침몰한 아리조나함의 연료탱크에서는 아직도 기름이 조금씩 새어나와 물 위로 솟아 올라오는데, 미국인들은 이 기름방울을 ‘아리조나의 눈물’(The tears of Arizona)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아리조나 기념관(USS Arizona Memorial).

 

 

 

1942년 10월 23일, 엘 알라메인 전투 시작

 

 

 

1942년 10월 23일 21시 40분, 북아프리카 주둔 영국군의 포병대가 독일군 진지를 향해 일제히 포격을 시작합니다. 엘알라메인(El Alamein)전투의 시작이었습니다. 엘 알라메인은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남서쪽 100km 지점에 위치한 육상교통의 요지로 이집트와 리비아를 잇는 길목이었습니다. 

 

  2차대전 초기, 유럽 대륙과 떨어져 있던 북아프리카는 전쟁의 광풍에서 떨어져 있는 듯 보였습니다. 그러나 아돌프 히틀러의 승승장구에 자극을 받은 이탈리아의 뭇솔리니는 지중해를 이탈리아의 영토로 둘러 야심을 드러내면서 북아프리카는 2차 대전의 주요 전장으로 변합니다.

 

1940년 9월, 이탈리아군은 5개 사단의 병력으로 이집트를 전격 침공합니다. 침공 3일 만에 70마일을 전진하는 등 이탈리아군의 침공은 순조로워 보였지만, 이집트 주둔 영국군이 반격을 개시하자 상황은 달라집니다.

 

불과 3만명이 조금 넘는 영국군에게 13만명의 이탈리아 침공군이 포로가 되는 수모를 겪었으며, 패주하는 이탈리아군은 자신들이 출발한 리비아조차 지켜내지 못할 위기에 몰립니다.  

 

'사막의 여우' 에르빈 롬멜 장군(1891.11.15~1944.10.15)

 

다급해진 뭇솔리니가 히틀러에게 구원을 청하자, 히틀러는 에르빈 롬멜(Erwin Johannes Eugen Rommel) 장군과 2개 기갑 사단을 북아프리카 전선으로 급파합니다. ‘전술의 귀재’, ‘사막의 여우’로 불리는 롬멜장군의 등장이었습니다.

 

롬멜의 아프리카 군단과 영국군은 리비아의 트리폴리에서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까지 1천4백마일에 이르는 사막지대에서 1년이 넘는 격전을 벌입니다.

 

1942년 6월 21일, 마침내 롬멜장군의 독일군은 영국군의 ‘토부룩 요새’를 함락시키고, 6월30일에는 엘 알라메인까지 이르렀습니다.

 

수세에 몰린 영국은 8월 중순, 영국 제8군 사령관에 버나드 몽고메리(Bernard Law Montgomery) 장군을 임명하고 일전을 준비합니다. 몽고메리 장군은 패배의식에 젖어 있는 부하들을 다독거리면서 용의주도하게 반격을 준비하죠. 

 

롬멜 장군의 숙적, 버나드 몽고메리 장군(1887.11.17~1976.3.24)

 

한편, 잠시의 숨고르기를 한 롬멜 장군은 전투가 길어질수록 보급 사정이 원활치 못한 독일군에 불리할 것이라고 판단하고 8월 31일 영국군에 대한 대공세에 나섭니다. (당시 독일 아프리카 군단이 한 달 동안 필요로 하는 보급물자는 3만톤 이었지만, 실제 보급된 것은 6천톤 수준이었습니다)

 

그러나 접근로에 매설된 지뢰를 처리하는데 꼬박 하루를 소비하고, 알람 엘 할파 능선에서 몽고메리군의 매복에 걸린 독일 아프리카군단은 49대의 전차를 잃고 퇴각하고 맙니다.

공격자에서 방어자로 입장이 바뀐 롬멜은 멜 알라메인을 사수하기로 마음먹고 독일군 방어 전면 60km에 폭 8km로 지뢰 50만발을 매설해 이른바 ‘악마의 뜰'을 만듭니다. 영국군이 전진하기 위해서는 이곳을 돌파하는 길밖엔 없었죠.

 

 

 

공격에 나선 영국군 전차대.

 

몽고메리는 주공을 북쪽의 가장 강력한 진지로 정하고 10월 23일 총공격을 개시합니다. 독일군은 전투 초기부터 불운이 겹칩니다. 

 

영국군의 포격으로 통신시설들이 타격을 입은데가, 마침 신병치료차 독일로 귀국한 롬멜 장군 대리로 사령관직을 수행하던 시투메 대장이 전사하는 바람에 아프리카군단의 지휘계통은 큰 혼란을 겪게 됩니다.

한편, 지뢰밭을 통과하던 영국군도 예상 밖의 큰 타격을 입습니다. 지뢰 사이에 묻어둔 대형 폭탄들이 폭발해 한꺼번에 1개 소대의 병사들이 흔적도 없이 날아가 버리는 참사가 속출했습니다.

 

선두에 섰던 장교들이 모두 전사하는 대대들도 생겨났죠. 엘 알라메인 전 지역이 아비규환으로 변한 가운데 공격하는 영국군이나 방어하는 독일군, 어느 쪽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집니다.

 

작전 개시 이틀 만에 영국군은 사상자 6천명, 전차 130대를 잃는 큰 피해를 입습니다. 몽고메리의 참모들은 그에게 작전중지를 건의하지만 몽고메리 장군은 단호했습니다.

 

보급부족에 시달리는 독일군을 밀어 붙이는 데는 물량 공세가 가장 확실한 수단이라고 생각했던 거죠. “아직도 사용가능한 전차들이 900대나 있다. 그것들은 소모품이다”

 

 

독일군의 88밀리 포, 원래 대공포였던 이 포 앞에 수많은 영국군 전차들이 고철이 되었습니다.

 

10월 26일, 영연방군의 오스트레일리아 제 9사단이 북쪽에서 독일군의 지뢰밭을 돌파하는데 성공합니다.  전날, 완쾌되지 않은 몸을 이끌고 급거 귀환한 롬멜 장군은 예비로 남겨두었던 90경기갑사단을 투입하고, 방어선 남쪽의 제21기갑사단에 북쪽으로 향할 것을 명령합니다. 

 

그는 이 명령이 어떤 의미인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북쪽으로 투입한 기갑사단들을 더 이상 다른 곳으로 보낼 연료가 없었던 것이죠.

 

 

 

롬멜이 예비 병력을 방어선 북쪽으로 이동시킨 사실을 간파한 몽고메리는 북쪽의 주공을 현재 위치에서 8km남쪽의 독일군과 이탈리아군 경계선으로 이동시킵니다. 곧 강철과 강철이 맞붙고, 피로 피를 씻어 내는 치열한 격전이 벌어집니다.

 

독일군의 대전차포는 진격해 들어오는 영국군 전차들을 차례로 격파했지만, 전투가 끝날 무렵 독일군의 전차는 30대 남짓으로 줄어 있었습니다. 독일군의 사상자는 3만3천명, 기갑전력과 포병은 90%가 괴멸상태였습니다.

 

11월 2일, 롬멜장군은 전선을 사수하라는 히틀러의 명령을 어기고 휘하 부대에 후퇴명령을 내립니다. 영국군의 피해도 막심했습니다. 사상자 1만5천명에 전선 돌파의 핵심이었던 기갑부대의 피해는 막심했습니다. 이름만 남은 사단도 여럿이었을 정도니까요.

후퇴를 하면서도 롬멜 장군은 잔존 병력을 유지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샬롬파 할파야 고개 매복전에서는 추격해 오는 영국군에게 큰 피해를 입히기도 했죠.

 

그러나 11월 8일, 최초의 미군이 모로코와 알제리에 상륙하는 등 이미 전세가 기울었다고 판단한 롬멜 장군은 더 이상 아프리카 군단의 재기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 전면적인 철수를 지시합니다.  

고심하는 롬멜 장군, 비록 패했지만 그는 보기 드문 명장이었습니다.

 윈스턴 처칠 수상이 “우리는 엘 알라메인의 승리 이후, 두 번 다시 패배를 맛본 일이 없었다”고 평가할 정도로, 이 전투는 2차 대전의 분수령을 마련한 중요한 싸움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1942년 11월 12일, 과달카날 해전

 

 

과달카날(Guadalcanal)은 남태평양 솔로몬 군도에 속한 영국령 섬으로 일본군이 점령하기 전까지는 세계인들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은 미개발지였습니다.

 

하지만 호주군은 이 지역 일대에 감시원들을 배치해놓고 있었고, 1942년 6월 일본군이 조선인 노무자들을 동원해 과달카날에 비행장을 건설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시점에서 과달카날 섬은 갑작스럽게 연합국의 조명을 받게 됩니다. 만약 일본군이 이 비행장을 활용하여 주변 해역을 장악하게 되면 미국과 호주를 잇는 보급선이 위협 받게 될 테고, 그렇게 된다면 호주마저 일본군의 수중에 떨어질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연합군은 일본이 이 비행장을 완성시키기 전에 과달카날에 상륙하여 미국-호주 사이의 보급선을 지켜내고 나아가서는 이 섬을 일본에 대한 반격의 초석으로 삼기 위한 전투 계획을 수립 합니다. 작전의 명칭은 워치타워(Watch Tower,망루)로 명명되었죠.

 

 

 

 1942년 8월 7일, 과달카날섬에 상륙한 미 제1 해병사단은 일본군의 산발적인 저항을 물리치고 다음 날 오후 비행장을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비행장이 미군 손에 들어가자 미-일 양측은 해상을 통해 과달카날섬에 증원군을 보내기 시작했고 이 과정에서 모두 7번의 각기 다른 해상전투가 벌어집니다.

 

10월, 과달카날의 일본군 병력은 3만6천명으로 증원되어 있었고 정글에서는 비행장을 둘러싼 치열한 전투가 연일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이에 맞선 미군도 11월 5일에는 제 8 해병연대를, 11일에는 육군 제182연대를 상륙 시켰죠. 일본 대본영에서는 12월 하순을 미군에 대한 총공세 시한으로 잡고, 이 작전을 위해 3만명의 병력과 300문의 중화기, 3만톤의 군수물자를 과달카날에 투입하기로 결정합니다.

 

과달카날 섬에 상륙하는 미군.

 

11월 12일 밤에 전함 2척, 순양함 1척, 구축함 16척의 호위를 받으며 일본군 수송선 11척이 수마트라 섬을 떠나 과달카날로 향합니다. 이 수송선들에는 일본 육군 제 38사단 6천여명의 병력과 장비가 실려 있었습니다.

 

일본 함대가 출항했다는 정보를 입수한 미 해군도 대니얼 캐러헌 소장에게 순양함 5척, 구축함 8척을 이끌고 출동하라는 명령을 내리죠. 그리고 13일 새벽, 과달카날 섬과 플로리다 섬 사이의 좁은 해역에서 미국과 일본 함대간에 치열한 혼전이 벌어집니다.

 

이 전투에서 캐러헌 소장의 기함인 순양함 샌프란시스코의 브릿지에 일본군 포탄이 명중, 캐러한 제독이 전사합니다. 이 전투에서 미 해군은 순양함 애틀란타와 구축함 4척이 침몰하고, 일본 해군은 전함 히에이와 구축함 2척을 잃습니다. 

 

 

해전이 계속되는 순간에도 일본군의 수송선단은 계속 남진하여 러셀 섬 인근에서 미군기의 공습으로 6척이 침몰하고, 전함 1척, 순양함 4척, 구축함 9척과 4척의 수송선이 과달카날 인근 사보섬 앞 바다에 도착한 것이 15일 새벽이었습니다. 미리 이들을 기다리고 있던 미군의 전함 2척, 구축함 4척이 일본 함대를 향해 발포를 시작하고 1시간 남짓 전투가 벌어집니다.

 

이 동안 일본 수송선 4척은 가까스로 약 2천명의 병력(출발할 때의 1/3로 줄어든)과 포탄, 식량들을 상륙시킬 수 있었지만, 날이 밝자 출격한 미군기에 의해 수송선 4척은 모두 격침되고 맙니다. 11월 13일에서 15일에 걸친 과달카날 해전의 결과 일본해군은 전함 2척, 중순양함 1척, 구축함 3척, 수송선 10척이 격침당했습니다. 미 해군은 경순양함 2척과 구축함 7척을 잃었죠.

미국측은 과달카날 해전, 일본측은 솔로몬 해전이라고 부르는 이 해전에서 일본군은 무의미한 소모전만 되풀이하고 있을 뿐이었죠. 이를 깨달은 일본군은 다시는 과달카날에 대규모 병력을 투입하지 않았습니다. 이제 과달카날 섬 인근의 제공권과 제해권은 모두 미군의 손에 넘어갔습니다.   

 

 

일본군이 건설하던 비행장을 장악한 미군은 이 비행장에 미드웨이 해전

당시 전사한 해병 항공대 소령 헨더슨의 이름을 붙였습니다. 

문제는 이미 섬에 보내 놓은 병력들이었는데, 이 시점에 과달카날의 일본군은 제 2사단, 제 38사단을 주력으로 약 2만 8천명에 달했습니다. 미군의 압도적인 화력에 시달리는 일본군은 보급마저 부실해 굶주림과 말라리아, 이질 등의 각종 열대성 질병에 시달리고 있었죠.

 

(일본 해군은 산발적으로 밤을 틈타 속력이 빠른 구축함, 잠수함에 보급물자를 실어 날랐지만 이 양은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미군은 일본군의 이 필사적인 보급시도를 ‘도쿄 특급’(도쿄 익스프레스)라고 부르며 조소했지요.) 당장 먹을 것도 없는 과달카날 섬의 일본육군이 막강한 미군을 상대로 비행장을 공격하여 점령한다는 것은 이제는 불가능한 이야기가 되었고, 비행장을 점령하지 못하는 한 과달카날 주변의 제해권이란 것도 아무런 의미가 없는 일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이라면 즉시 과달카날 섬의 포기를 결정하고 철수를 시작했어야 정상이지만, 일본 대본영은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그 이후로도 1달 반이나 질질 끌면서 피해만 키우다가 결국 12월 30일이 되어서야 과달카날 철수를 결정합니다.   

 

 

일본군 소탕에 나선 미군. 영화 '씬 레드 라인'은 이 전투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듬해인 1943년 2월 초순, 마지막 일본군 병력이 철수할 때까지 과달카날에서의 미군 손해는 함선 24척, 전사 1,590명, 부상 7,409명. 일본군의 손해는 함정 24척, 항공기 893대와 그 탑승원 2,362명. 그리고 일본 육군이 투입한 병력 3만 3,600명중에서 전사자 8,200명, 병사자 1만 1,000명으로 미군 측의 3배에 이르는 전사자를 내었습니다.

 

지름이 6Km에 불과한 이 작은 섬을 빼앗기 위해 6개월간의 전투에서 가라앉은 미-일 양군의 군함들이 잠들어 있는 과달카날 해협을 오늘날 ‘쇠 바닥 해협’(아이언 보텀 사운드)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아이언 보텀 사운드에 가라 앉은 전투기의 잔해. 

 

1942년 11월 19일 - 스탈린그라드에서 소련군 대공세 시작

 

 

 

1942년 11월 19일 이른 아침, 스탈린그라드에서 소련군의 대대적인 반격이 개시됩니다. 3천5백 여문의 포가 일제히 불을 뿜고 전차를 앞세운 소련 스탈린그라드 집단군, 돈 집단군, 남서 집단군은 스탈린그라드의 독일 제 6군의 측면을 방어하던 루마니아 제 3군, 제 4군을 순식간에 괴멸 시키고 남북 간에 거대한 포위망을 만드는데 성공합니다.

 

이로써 프레드리히 파울루스 대장의 독일 제 6군 병력 25만 명은 스탈린그라드의 폐허 속에 갇히게 됩니다.

 

원래 이름이 차리친(Tsaritsyn)인 볼가강변의 이 도시는 러시아 내전 당시 이곳을 점령한 볼세비키군이  백군의 끈질긴 포위공격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사수하여 혁명을 완수했던 역사적인 장소로, 1925년 스탈린그라드로 개명되었습니다.

 

이때부터 기계공업 중심지로 집중 개발된 스탈린그라드는 또한 교통상의 요지여서, 코카서스 지방의 석유와 우크라이나 지방에서 생산된 식량이 이곳을 지나는 철도와 볼가 강의 수운을 통해 소련 내부로 공급되고 있었죠. 한 마디로 소련의 생명선이나 마찬가지였던 겁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 상황도.

 

특히 코카서스 지방의 석유를 확보하는 것은 독일군으로서는 사활을 건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소련이라는 거대 공업국과 전쟁을 치르려면 소련의 공업을 움직이는 연료를 차단하는 동시에 독일군의 귀중한 연료가 될 러시아 유전지대의 확보가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었던 것이죠.

 

1942년 6월말, 코카서스의 유전지대를 장악하기 위한 독일군의 이른바 청색작전(Operation Blue)이 발동됩니다. 동부전선에 투입된 독일군의 절반이 이 작전에 동원되었고, 치열한 전투 끝에 9월 12일 독일군이 스탈린그라드 시내로 진입합니다. 이때부터 이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치열한 시가전이었습니다.

 

  치열한 포격과 공중 폭격으로 스탈린그라드는 폐허가 되었고, 가을 내내 벌어진 격전 끝에 독일군은 시가 대부분을 점령하였지만 시의 중심부에 틀어박힌 소련군은 완강한 저항을 계속하였습니다.

 

자신의 이름을 딴 도시를 지켜내야 한다는 스탈린의 강력한 의지는 ‘후퇴불가’ 명령이 되어 볼가 강에 배수진을 친 소련군은 처절한 항전을 벌입니다.

 

건물의 한쪽은 독일군이, 반대편은 소련군이 차지하고 수류탄과 대검이 난무하는 혼전이 벌어집니다. 애써 점령한 건물도 밤을 틈타 하수도를 통해 스며든 소련군들로 하루에도 몇 번씩 주인이 바뀌기 일쑤였습니다.

 

평지에서는 놀라운 기동력을 발휘하던 독일군의 전차도 폐허가 된 도심에서는 별 위력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거대한 도시 전체에서 10여명 단위의 소부대 전투가 끊이지 않고 이어 집니다.

 

 

 

그렇게 10월이 가고 11월, 시간은 소련군의 편이었습니다. 무려 6개 군, 100만 여명에 달하는 소련의 대병력이 포위한 스탈린그라드에서 독일군은 이제 자신들이 폐허 속에서 저항해야 하는 처지가 되죠.

 

언 발에 오줌 누는 식의 공중 보급으로는 25만의 병력이 소비하는 식량과 전투물자를 대기에 턱도 없었습니다. 스탈린그라드 공항마저 소련군의 수중에 떨어지자 그나마 명목뿐인 보급도 힘들어졌죠.

 

스탈린그라드의 독일군은 혹한과 굶주림 속에서 절망적인 전투를 이어 갑니다. 독일군의 전선은 계속 줄어들었고, 잡아먹을 쥐조차 자취를 감춘 지 오래였습니다.

 

 

이듬해인 1943년 2월 2일, 최후의 독일군 병력이 항복할 때까지 스탈린그라드의 독일 제 6군 병력은 9만 명으로 줄어 있었고, 시베리아에서의 포로생활을 거쳐 살아서 독일 땅을 밟을 수 있었던 사람들은 6천명에 불과했습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독일군으로서는 너무나 뼈아픈 패배였습니다. 2차 대전의 분수령이 된 이 전투는 야전교리를 무모하게 시가전에 도입시킬 때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가져오는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독일군 포로의 행렬.

 

 

1943년 1월 31일 - 독일 제 6군, 스탈린그라드에서 항복

 

 

 

1943년 오늘, 스탈린그라드에서 독일 '제 6군' (6th Army) 사령관 ‘프리드리히 파울루스’ (Friedrich Paulus)원수가 소련군에게 항복합니다.

 

볼가 강을 따라 동서로 길게 뻗은 공업도시 스탈린그라드는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했을 뿐 만 아니라 그 이름이 지닌 상징성 때문에 독일과 소련 양국이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요충지였습니다.

 

1941년 6월, 불가침 조약을 파기하고 전격적으로 소련을 침공한 독일군은 막강한 기갑전력과 공군을 앞세워 파죽지세로 소련을 유린합니다.

 

이듬해 독일군은 카프카스 지방의 유전지대를 손에 넣기 위해 대대적인 여름 공세를 감행하죠. 만일 이곳의 석유와 광물 자원이 독일군에게 넘어간다면 소련이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은 요원한 일이 될 터였습니다. 공세는 독일군에게 유리하게 전개될 듯 보였습니다.

 

 

 

 하지만 독일군의 선봉 부대였던 제 14기갑군단이 스탈린그라드 북쪽에서 볼가 강에 도달할 때쯤 독일군의 공격 기세는 급격히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게다가 폐허가 된 시가지의 콘크리트 더미 속에는 소련군 2개 야전군이 온전히 전력을 보존한 채 독일군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죠.

 

1942년 8월21일부터 이듬해 1월말까지 6개월 동안 파울루스 장군 휘하의 독일군 50만 명과 추이코프 장군의 소련군 170만 명 등 2백 만 명이 넘는 군대가 그야말로 피비린내 나는 사투를 벌입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양국의 사활을 건 대전투였습니다 

 

 

겨울로 접어들면서 시가전에서 독일군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힌 소련군은 11월 19일을 기해 대대적인 반격을 시작하죠. 독일군의 방어선은 삽시간에 붕괴되었고 혹독한 추위에 보급선마저 단절된 채 독일군에는 아사자와 동사자가 속출합니다.

 

스탈린그라드에 포위당한 독일 군이 전력을 그나마 보존하기 위해선 후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독일군 사령관 파울루스가 예하 지휘관들과 부대의 탈출계획에 대해 논의할 무렵, 히틀러가 스탈린그라드에 고립된 독일군의 운명을 결정해 버리죠.

 

독일군 부대에 현 위치를 고수할 것을 지시하는 한편, 스탈린그라드 전선을 관할하는 독일 B집단군 사령관을 교체해 버린 것입니다. 

 

일분일초가 아까운 시간에 신임 사령관 ‘폰 만슈타인’(von Manstein)이 전선에 도착하는 데는 사흘이 걸렸고, 그동안 소련군의 포위망은 더욱 단단하게 조여오고 있었습니다. 제 아무리 ‘전략의 귀재’라는 평가를 받던 만슈타인 원수였지만, 식량도 탄환도 떨어진 채 스탈린그라드에 고립된 독일군을 구하는 것은 이미 불가능한 일이 되어버렸던 것이죠.

 

후퇴가 거부된 독일 제 6군은 두 달 반 동안 절망적인 싸움을 이어갑니다. 1943년 1월 30일, 히틀러는 파울루스 장군을 원수로 진급시킵니다. 독일군 역사상 원수가 적에게 항복한 전례가 없다는 것을 들어 사실상의 자살을 강요한 것이죠.

 

하지만 파울루스는 히틀러의 예상을 깨고 다음 날 소련군에게 항복하고 맙니다. 24명의 장군을 포함한 9만 1천명의 독일군이 포로가 되었죠.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패배를 전하는 베를린 방송에선 베토벤의 운명 교향곡이 하루 종일 흘러나왔습니다.

 

스탈린그라드에 투입되었던 독일군과 루마니아군 등 추축군 50여 만 명 중에 전쟁이 끝나고 살아서 고국으로 돌아간 귀환병의 숫자는 6천명에 불과 했습니다. 많은 역사가들은 스탈린그라드 전투가 2차 대전의 승패를 가르는 분수령이 되었다는데 동의하고 있습니다.

1943년 2월 2일 - 스탈린그라드 독일군 항복

 

 

1943년 2월 2일, 스탈린그라드(Stalingrad)에서 독일 육군 제 6군(6th Army)의 마지막 병력이 소련군에 항복합니다. 이로써 199일간 진행되어, 역사상 가장 길었던 단일 전투로 기록된 스탈린그라드 공방전이 끝나게 되죠. 이미 이틀 전, 6군 사령관 ‘프리드리히 파울루스’ 원수는 소련군에 투항한 뒤였습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1942년 여름, 독일군의 공격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공업의 중심지이자, 볼가강을 통해 카프카스 유전과 소비에트 연방의 중심부를 잇는 석유공급의 거점이었던 이 도시는 그 이름이 갖는 상징성 때문에서도 독일과 소련, 어느 쪽에서도 포기할 수 없는 요충지였습니다.

거침없이 쾌속 진군하던 독일군은 금방이라도 스탈린그라드를 장악할 것처럼 보였지만, 정작 본격적인 전투는 독일군이 스탈린그라드 시내에 발을 들여 놓을 때부터 시작되었죠.

 

 

독일 공군의 폭격으로 폐허가 된 건물들은 소련군의 좋은 근거지가 되었고, 거리와 거리, 건물과 건물에서 분대 단위의 소부대 전투가 끊임없이 이어졌습니다. 한 건물의 위층과 아래층을 각각 독일군과 소련군이 차지하고 전투를 벌일 정도였으니, 전투의 혼란과 치열함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더군다나 스탈린은 전사할지언정 후퇴나 항복을 절대 금지하는 특별명령을 내리고, 공격을 머뭇거리거나 도망자들을 현장에서 처형하는 극단적 조치를 시행하여 볼가강에 배수진을 친 소련군의 저항은 처절하게 이어졌습니다.

쌍방에서에 하루에도 수 천 명씩의 군인들이 전사하는 소모전이 계속되던 정황은, 가을에 들어 스탈린그라드 포위망을 만드는데 성공한 소련군에 유리하게 기울어지기 시작합니다.


포위망에 갇힌 독일군에 보급품을 공급하는 길은 항공기를 이용한 공중보급 밖에는 길이 없었죠. 하지만 공군사령관 ‘괴링’의 호언장담에도 불구하고 독일 공군의 수송능력은 빈약하여, 스탈린그라드의 독일군은 하루 500톤의 식량과 보급품을 필요로 했지만 작전 기간 중 실제 보급된 양은 하루 평균 80톤에 불과했습니다.

주먹구구식의 보급품 투하는 종종 웃지 못할 결과를 초래했는데, 어떤 날은 4톤의 후추만 도착했고 다음 날엔 수천 켤레의 오른쪽 군화, 어떤 날은 수만 갑의 콘돔만 투하되는 식이었죠. 굶주리다 못해 쥐를 잡아먹고, 부상자의 상처를 감아 줄 붕대조차 없는 독일군에게 이런 현실은 생지옥이었습니다.

 

가을이 깊어지면서 기온은 영하 30도까지 떨어졌고, 아사자와 동사자가 속출하여 사기까지 바닥에 떨어진 독일군은 소련군의 공격을 힘겹게 막아내고 있었습니다. 이미 철수할 길마저 막혀 오갈 곳 없게 된 독일 제 6군에게 히틀러는 최후의 한 사람까지 싸우다 죽으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종말이 눈앞에 다가온 1943년 1월 30일, 제 6군 사령관 파울루스 대장을 원수로 승진 시킨다는 전문을 보냅니다. 독일 육군의 원수가 항복한 전례가 없으니 원수에서부터 말단 병사에 이르는 모든 장병들이 옥쇄하라는 뜻이었습니다. 하지만 히틀러의 희망을 저버리고 ‘파울루스’ 원수는 그 다음 날 소련군에 투항합니다.

 

 

스탈린그라드에서의 독일군의 마지막 저항은 시내 북쪽의 공단지대에서 벌어졌는데, ‘붉은 바리카디 10월 혁명’ 공장과 ‘제르진스키’ 트랙터 공장에서 전투를 계속하던 독일군들은 살아남은 병사가 없을 정도로, 말 그대로 ‘전멸’해 버렸습니다.  독일군 21개 사단, 루마니아군 2개 사단, 6천명의 크로아티아 연대, 5천명의 소련인 부역자들로 이루어졌던 독일육군 제 6군의 종말이었습니다.

 

스탈린그라드의 혈전에서 쌍방 군대가 입은 피해는 엄청났습니다. 많은 연구자들은 스탈린그라드에서 추축국 군대의 병력 손실(전사자 및 부상자, 포로 포함)이 85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하고 있습니다.

 

소련 측의 손실은 더 심각해서 123만의 장병들이 전사하거나 부상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죠. 이 전투에서 살아남아 소련군의 포로가 된 12만 명의 독일군인들은 대부분 그 해를 넘기지 못하고 사망했고, 전쟁이 끝난 뒤에도 소련의 전후복구사업에 강제동원되다가, 1955년 독일 땅을 다시 밟을 수 있었던 사람들은 6천명에 불과했습니다. 

 

 

 

1943년 7월5일 쿠르스크 전투 시작되다

 

중앙 러시아 세임강 상류에 위치한 古都 쿠르스크, 11세기에 원래 모스크바를 방어하는 국경 요새로 건설되었던 이 도시는 13세기 중반 타타르인 들에게 점령된 이후 러시아의 역사에서 사라진 도시였습니다.  그러나 1943년 7월, 쿠르스크는 인류 역사상 가장 뜨거운 용광로로 변합니다.
 

제2차 세계대전의 거대한 흐름이 뒤바뀌고 있던 1943년,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실패로 수세에 몰린 독일군은 전략적인 결단을 내려야 했습니다. 애초에는 밀물같이 밀려오는 소련군의 거대한 흐름을 저지할 방어선을 후방에 구축하는 사이에 전선에서는 제한적인 공격으로 소련군의 전면 공세를 예방하겠다는 구상이었습니다.  그 후보지로 선택된 곳이 쿠르스크였지요.

 

 

전차에 올라타고 웃어 보이는 독일 친위대원들


 당시 동부전선의 상황을 보면 유일하게 이 지역만 소련군이 독일군 진영 안쪽으로 불쑥 들어와 있는 상태였는데, 독일군 총사령부는 35개 사단 53만의 병력을 동원, 이 돌출부의 남쪽과 북쪽에서 공세를 개시하여 돌출부를 잘라내고 전진하여 전방의 아군과 합류한다는 작전계획을 세웁니다.

 

돌출부 북쪽에서 모델 원수의 제 9군이, 남쪽에서 호트 대장의 제 4군과 캠프 대장의 캠프 전투단이 협동해 단시일 내에 이를 제거하고자 했습니다만 당초 의도와 달리 목표를 너무 거대하게 잡으면서 작전은 독일군의 바람과 다르게 진행 되었습니다.

 

 쿠르스크 전투 상황도

독일어로 “치타델레(Zitadelle, 성채)” 작전으로 이름 붙어진 이 공격은 당초 5월초 개시될 예정이었지만 병력과 장비 부족을 호소하는 전선 지휘관들의 요청으로 두 달이나 연기 되었습니다. 그리고 작전 개시일에 맞춰 독일군은 56만의 병력과 2700여대의 전차를 겨우 긁어모았지만, 소련군 역시 127만명의 병력과 3600여 대의 전차로 방어선을 굳히고 있었습니다.

 

 

 소련군의 T 34 전차, 쿠르스크 전투는 인류 역사상 가장 치열했던 전차전이었습니다.

 

마침내 7월 5일 새벽 쿠르스크 전투-치타델레 작전의 막이 오릅니다. 공격 첫날 독일군은 대부분 예정된 목표지점을 점령하지 못하고 곳곳에서 엄청나게 매설된 지뢰와 대전차포로 촘촘히 짜여진 소련군의 방어망에 막혀 고전 합니다.

 

북부에서의 공격은 일주일 동안 10km를 전진하고 고착되었고, 강력한 기갑군단들을 앞세운 남쪽에서는 소련군의 방어선을 돌파했으나 소련군이 대규모 기갑부대를 투입하면서 대격전이 벌어졌습니다. 7월12일 쿠르스크 남부 프로호롭카에서 독일 제4기갑군 소속 전차 1천대와 소련 제5근위전차군 소속 전차 1천대가 중세의 기병들처럼 맞붙었습니다.

 

좁은 곳에 워낙 많은 전차들이 몰려 부대끼며 싸우는 바람에 포탄이 아예 전차를 뚫고 나가버리거나, 부딪혀 휘어진 포신으로 쏘다 전차 자신이 폭발했다는 기록까지 있을 정도니 당시 전투의 치열함을 알 수 있습니다.

 

 

  포연을 뚫고 전진하는 소련군 전차와 보병들.

 

프로호롭카에서 독일군은 전술적인 승리를 거뒀음에도 불구하고 공세를 지속시킬 탄력을 잃어버렸습니다. 설상가상 병력과 장비에서 압도적으로 우위에 있던 소련군이 전면적인 역공에 돌입해 독일군을 혼란에 빠뜨렸습니다. 결국 다른 전선의 붕괴 위험 때문에 치타델레 작전은 취소됐고 독일군은 7월24일 공격을 개시했던 출발선으로 되돌아와야 했습니다.

 

 

  초췌하고 지친 모습의 독일군 병사들

 

쿠르스크 전투는 2차대전을 통틀어 가장 큰 규모였을 뿐 아니라, 독일군이 본격적으로 패퇴하기 시작한 전투입니다. 동부전선뿐만 아니라 2차 대전의 전세를 실질적으로 바꾼 전투라고 할 수 있죠.

전투에서 수세에 몰릴수록 전환점을 만들어야 한다는 욕심에 사로잡히기 쉽지만 그럴 때일수록 현실을 냉철하고 객관적으로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 물러서야 할 때 물러서는 것을 결단하는 것도 지휘관의 중요한 덕목임을 쿠르스크 전투는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1943년 9월 8일 - 이탈리아, 연합군에 항복 

 

백기를 들고 항복하는 이탈리아

 

1943년 오늘 독일, 일본과 함께 추축국의 일원을 이루었던 이탈리아가 연합군에 항복합니다. 북아프리카에서 연합군에 패전한 이래 수세에 몰렸던 이탈리아에서는 1943년 7월, 시실리 섬에 연합군이 상륙하자 ‘베니토 무솔리니’가 실각하는 일이 벌어집니다.

 

7월 24일, 이탈리아 원로원의 투표에 의해 해임된 무솔리니는 곧 체포되어 구금되었죠. 국왕 ‘빅토르 엠마누엘 3세’에 의해 수상에 임명된 ‘피에트로 바돌리오’ 원수는 이탈리아 국내 정치 상황과는 별개로 독일과 함께 전쟁을 수행해 나갈 것을 선언했지만, 물밑으로는 연합국들과 종전을 위한 협상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9월 3일, 이탈리아 정부는 휴전협정에 조인했고 닷새 뒤인 8일 ‘아이젠하워’ 연합군 사령관이 이탈리아의 항복을 공식 발표했습니다.

 

 

 

독일군 공수부대에 의해 무장해제되는 이탈리아군.

그런데, 문제는 이제부터였습니다. 이탈리아의 항복에 격분한 히틀러는 이 ‘배신자’들에게 보복할 것을 명령했고, 곧 독일군은 어제까지의 동맹국이었던 이탈리아로 밀려들어오죠. 그 때까지 이탈리아 군대는 정부로부터 명확한 지침을 받지 못하고 있었고, 곳곳에서 독일군에 의한 학살극이 벌어집니다.

 

독일군 입장에서는 이탈리아가 연합군 수중에 떨어지면 발칸 반도의 전황도 불리해질 테고, 이탈리아군의 장비와 군수품들도 결국 연합군의 전쟁 수행 능력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점이 뻔해보였습니다.

 

많은 이탈리아군 부대들은 스스로 해산하거나 붕괴되어 버렸지만, 무장해제를 거부한 이탈리아군들은 독일군에 의해 사살되었습니다. 특히 그리스의 ‘케팔리니아’ 섬에서는 이탈리아군이 무장해제를 놓고 독일군과 이탈리아군이 격렬한 총격전을 벌여 1천 6백 명의 이탈리아군이 사망하고, 포로가 된 5천 여 명이 사살되는 참극이 빚어집니다. (‘니콜라스 케이지’가 주연한 영화 ‘코넬리 대위의 만돌린’은 바로 이 사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광장에 거꾸로 매달린 무솔리니(좌)와 글라라(우)의 시신

 

이탈리아 본토에서는 이때부터 독일군과 연합군 간의 본격적인 전투가 벌어집니다. 한편 북 이탈리아 아펜니노 산맥 ‘그랑 삿소’의 한 호텔에 연금되어 있다가 독일군 공수부대에 의해 구출된 무솔리니는 9월 28일, 독일의 괴뢰정권인 ‘살로 공화국’을 출범시키죠.

 

로마에서 북쪽으로 50여 Km 떨어진 작은 마을 ‘살로’를 수도로 한 이 꼭두각시 정권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연합군이 로마를 점령한 후 몇 달 동안 도피 생활을 해온 무솔리니는 1945년 4월 28일, 독일군 철수 행렬을 따라 알프스를 넘어가려다 빨치산에 의해 체포, 그의 애인과 함께 처형됩니다.

 

무솔리니와 애인 클라라의 시신은 밀라노市의 ‘미잘로 로레토’ 광장에 거꾸로 매달리는 치욕을 당하게 되죠. 베를린의 방공호에서 권총을 이용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히틀러의 자살보다 사흘 전의 일이었습니다. 

 

 

1943년 9월 9일 - 독일 공군, 최초의 유도폭탄 사용  

 

세계 최초의 유도폭탄 '프리츠 - X'.

 

1943년 9월 9일 오후 3시 45분 이탈리아 보나파시오 해협, 독일 공군 Do-217K 폭격기에서 투하된 ‘프리츠 - X’ 유도 폭탄이 이탈리아 해군의 전함 ‘로마’에 적중합니다. 세계 최초의 유도폭탄이 그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었습니다.

5분 뒤 두 번째 폭탄이 전함 로마의 2번 주포탑에 명중했죠. 폭탄이 유발한 화재가 전방 탄약고로 번지며 불길과 연기가 1000m 상공까지 솟아오르는 대폭발이 일어났습니다. 결국 로마는 우측으로 기울다가 오후 4시경 두 명의 제독과 86명의 장교, 1264명의 수병과 함께 두 동강난 채 뒤집히며 침몰하고 말았죠. 

  루르슈탈사의 ‘막스 크라머’ 박사 주도로 개발이 진행된 프리츠 - X는 기본적인 원리는 폭탄에 전파송수신기와 작동날개를 장착해서 사람이 타고 있는 항공기에서 전파를 보내 폭탄의 진로를 수정하는 방식을 채택하고 있었습니다.

이 날 이탈리아 해군 전함을 공격하는데 사용된 것은 320Kg 대함용 철갑탄에 전파송수신기와 작동날개를 부착한 SD1400X (총중량 1,570kg)로, 투하한 뒤에는 폭격기에 탑승한 조작원이 불꽃 신호기로 유도 폭탄의 위치를 확인하면서 무선 원격 조정으로 낙하 궤도를 수정해 목표에 명중시킬 수 있는 것이 특징이었죠.  

독일 공군 '도르니에' 폭격기에 장착된 '프리츠 - X' 유도폭탄.

 

1942년 테스트를 성공적으로 거친 프리츠 - X는 이날 과거의 동맹국이던 이탈리아 해군의 전함 3척을 공격하는데 사용됩니다. 당시 이탈리아는 독일과의 동맹을 파기하고 비밀리에 연합군과 휴전을 한 상태였고, 만의 하나 있을지도 모를 독일군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 ‘라 스피차’항에 있던 배수량 4만5000톤의 비토리오 베네토급 전함 3척을 영국령 지브롤터를 향해 출항시켰던 참이었습니다.  

 

 

4만 5천톤급 전함 '로마', 단 두발의 유도폭탄에 의해 두 동강이 난채 격침되었습니다. 

이날 이탈리아 해군 승조원들이 목격한 독일 공군의 폭격은 다소 이상한 것이었습니다. 당시의 일반적인 폭탄과 달리 원거리에서 60도 각도로 투하된 폭탄이 전함에 적중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로 보였는데, 이 이상한 폭탄은 움직이는 전함을 쫓아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날 독일 공군이 투하한 3발의 유도폭탄은 전함 1척을 침몰시키고, 다른 1척을 항행불능으로 만들어 버렸죠. 

 

프리츠 X는 전쟁 중 모두 1,400발이 생산되어 이후에도 영국 전함 '워스파이트' (HMS Warspite)를 대파시켰고, 순양함 '스파르탄'(HMS Spartan)을 격침, 또 다른 순양함 사반나(HMS Savannah)와 우간다(HMS Uganda)에 큰 피해를 입혔습니다. 1943년 9월 9일은 전쟁사에 ‘정밀공중공격’이라는 새로운 장을 연 날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1944년 6월 6일 - 가장 길었던 하루, 노르망디 상륙작전

 

 

많은 사람들이 군인으로 여길 왔어. 많은 사람들이 이 길을 지날 거야.
많은 사람들이 시간을 잴거야. 가장 긴 하루를 살아내면서. 


많은 사람들이 지쳐 녹초가 되었어.
많은 사람들이 여기 머물고 있어.
많은 사람들이 석양을 보지 못하겠지. 가장 긴 하루가 끝날 즈음이면. 


가장 긴 하루, 가장 긴 하루.
오늘은 가장 긴 하루가 될거야.
희망으로 넘쳐나고 온통 눈물로 얼룩진. 피와 땀과 눈물로 얼룩진. 


많은 사람들, 수많은 강력한 군인들이, 많
은 사람들이 승리를 위해
전쟁터로 행군해 가고 있어. 역사상 가장 기나긴 날에. 

 

1944년 오늘, 2차 대전 중 연합군 승리의 전기를 마련한 ‘오버로드’(Over Lord, 절대군주)작전이 개시됩니다. 2차 대전 내내 전통적인 해양 강국인 영국은 유럽 대륙을 석권한 독일군의 빈틈을 노리고 있었습니다.

 

진주만 기습으로 전쟁에 참전한 미국도 태평양 지역에서 일본군과 싸우는 한편유럽 우선주의(Europe First) 정책을 채택하여 유럽 대륙 상륙 작전을 구상하고 있었죠. 하지만 대규모 병력과 장비를 바다 건너 유럽 대륙에 상륙시킨다는 것은 생각만큼 간단치 않은 일이었습니다.

 

영국은 지중해와 북아프리카에서 치열한 전투를 치르고 있었고, 미국은 상륙작전을 실행할 대규모 병력을 아직 가지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죠.

 

 

 연합원정군 사령부의 수뇌부들.

 

‘오버 로드’ 계획이 처음 윤곽을 드러낸 것은 1943년 5월의 일이었습니다. 연합군 사령부는 도버 해협을 건너 직접적인 침공을 선호하였지만, 그곳에는 이미 독일군이 17개 사단이나 주둔 하고 있었죠. 그래서 다음 상륙 예정지로 떠오른 것이 상대적으로 수비가 빈약한 바로 노르망디 해안 이었던 것입니다.

 

작전의 관건은 독일군의 증원 능력보다 얼마나 빨리, 얼마나 많은 병력을 해안에 상륙시키느냐에 있었죠. 상륙 초기에는 후속 병력과 장비를 내려놓을 항구를 탈취하는 것이 힘들다고 판단한 연합군은 ‘멀버리’ (Mulberry)라고 불리는 임시 정박 시설을 끌고 해협을 건넌 다음 상륙지역에 설치할 계획을 세워 놓았죠.

 

1943년 12월 상륙작전을 실행할 연합원정군 사령부 (SHAEF, Supreme Headquarters of Allied Expeditionary Forces)가 구성됩니다. 상륙작전을 지휘할 총사령관에는 ‘아이젠하워’ 장군이 임명되었고, 지상군은 ‘몽고메리’ 장군, 해군은 미국의 ‘램지’ 제독, 공군은 영국 ‘레이 멜러리’ 장군의 지휘를 받도록 했죠.

 

직책과 작전 범위를 놓고 미군과 영국군 간에 신경전이 있기도 했지만, 탁월한 조정자였던 ‘하이젠하워’는 원만한 타협을 이끌어 냅니다.

 

제 101 공수부대원들을 격려하고 있는 아이젠하워 장군, 그는 탁월한 조정자였습니다.

 

연합군은 1944년 봄부터 교량과 도로, 철도에 대한 대대적인 공중 폭격을 통해 독일군의 병력증강을 억제하는 작전을 펼칩니다. 또 상륙 목표를 숨기기 위한 기만작전을 병행하죠.

 

즉, 독일군으로 하여금 연합군의 상륙지점이 노르망디가 아니라 도버 해협 바로 건너편에 위치한 ‘파드칼레’ 지역이라고 믿게끔 공작을 실시한 겁니다.

 

 

글라이더로 투입되는 영국 제 6 공수사단 병사들,

 

멀리 주요 목표물 중 하나였던 '페가서스' 다리가 보입니다.

 

작전은 조수 및 시계가 가장 좋을 것으로 예상된 6월 5일에 실시될 예정이었지만, 태풍이 불어 하루 연기되었습니다. 마침내, 6월 6일 새벽 1시 30분, 미군과 영국군의 공수부대가 낙하하는 것으로 역사상 최대 규모의 상륙작전이 개시됩니다.

 

미 제 82, 제101 공수사단은 ‘카렝탕’에, 영국 제 6 공수사단은 ‘캉’ 부근에 낙하해 상륙지점의 양 측방을 엄호할 계획이었는데, 야간인데다 바람까지 심하게 불어 병력과 장비가 집중되지 못하고 광범위한 지역에 흩어져 버렸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어수선한 투입이 오히려 전화위복의 기회를 제공합니다. 즉, 뿔뿔이 분산된 공수부대의 투입이 독일군으로 하여금 연합군의 공격방향과 규모를 짐작할 수 없게끔 만든 것이죠. 독일군은 갈팡질팡하며, 노르망디로 예비병력을 보내지도, 반격을 가하지도 못합니다.

 

설상가상으로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을 예상했던 ‘롬멜’ 원수는 독일에 가있었고, 히틀러는 깊은 잠 속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의 부관은 히틀러가 화를 낼 것을 두려워해 그를 깨우지 않았다죠.)

 

 

새벽 6시 30분, 서서히 동쪽 하늘이 밝아 올 무렵 해상에서 대기하던 연합군 함대의 함포 사격이 시작됩니다. 6천 여 척의 각종 선박에는 28만 7천명의 병력과 각종 전투 장비가 가득 실려 있었고, 하늘에는 1만 2천대의 전투기와 폭격기들이 폭음을 울리며 날고 있었습니다.

 

상륙해안은 차례대로 유타, 오마하, 골드, 주노, 소드 등 미리 5개 지역으로 구분되어 있었는데, 유타와 오마하는 미군이, 나머지는 영국군이 담당하기로 되어 있었죠. 포격과 공습이 끝난 직후, 상륙이 개시됩니다. 5개 해안 중에 4개는 독일군의 저항이 비교적 경미해 상륙부대는 교두보를 확보하는데 성공하죠.

 

하지만 미 제 1보병사단과 제 29 보병사단, 제 2 레인저 대대가 상륙한 오마하 해변에선 피비린내 나는 격전이 벌어집니다. 가장 강력한 방어시설이 거의 피해를 입지 않고 남아있었던 데다, 그곳에서 훈련 중이던 독일제 352 사단의 반격을 받아서였죠.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무대가 된 것도 바로 이 오마하 해변이었습니다. 독일군의 포격과 기관총 사격 앞에 엄청난 사상자가 발생합니다. 작전 첫날 투입된 15만 6천 명의 연합군 병력 중에 1만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는데, 그 대부분이 오마하 해변에서 목숨을 잃었죠.

 

오마하 해변에 바로 잇닿은 ‘포인트 두 호크’(Pointe du Hoc) 절벽의 독일군 포대와 탄약고를 폭파하는 데는 미군 레인저 부대원 225명이 투입되었는데, 작전이 끝난 후 생존자는 90명에 불과했습니다.

 

 

악전고투 끝에 연합군은 노르망디 해안에 교두보를 구축하는데 성공했고, 상륙을 개시한 후 일주일 만에 32만 7천 명의 후속 병력과 5만 4천대의 차량, 1만 4천 톤의 보급품을 양륙시켰죠.

 

6월 27일에는 ‘셰르부르’, 7월 18일에는 ‘생로’, 7월 24일에는 ‘캉’이 연합군 수중에 떨어집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연합군은 작전 두 달 만인 1944년 8월 25일 파리를 되찾은 데 이어 독일 본토로 진격해 들어갈 수 있었죠.

 

상륙 후 76일 동안 벌어진 노르망디 전투에서 연합군의 인명 피해는 21만 명에 이르렀고, 이 중 3만 7천명이 전사했습니다.

 

 

 

1944년 10월 15일 - 사막의 여우 ‘에르빈 롬멜’ 원수 자살


 

 

'에르빈 롬멜' (Erwin Johannes Eugen Rommel, 1891.11.15~1944.10.15)

10월 15일 정오, 짙은 녹색의 승용차 한 대가 롬멜 원수의 집 앞에 멈추었습니다. 당시 그는 노르망디 전역에서 부상을 당해 독일 본토로 후송되어 있었죠. 차에서 내린 사람은 베르크돌프 장군과 마이셀 장군이었습니다.

 

그들은 롬멜에게 히틀러 암살미수 사건에 연루된 혐의로 재판에 회부되든가, 아니면 명예롭게 자결하는 것을 선택하라고 말합니다. 10여 분 후 부인과 아들과 작별인사를 마친 롬멜은 두 장군을 따라 승용차에 오릅니다. 평소에 그가 가장 자랑스러워했던 독일 아프리카 군단의 제복차림이었죠.  

 

관에 누운 롬멜 원수

 

그의 최후를 지켜 본 운전병 ‘하인리히 도우즈’는 훗날 롬멜의 최후에 대해 이렇게 진술했습니다. “저는 차를 멈추라는 명령을 받았고, 마이셀 장군이 저를 데리고 차를 떠났습니다. 한 5분이나 10분쯤 뒤 베르크돌프 장군이 마이셀 장군과 저를 다시 차로 불렸죠. 그 때 롬멜 원수가 뒷좌석에서 죽어 가고 있는 것을 봤습니다. 그는 혼수상태였고, 앞으로 쓰러져서 흐느끼고 있었습니다. 신음하는 것도, 숨이 넘어가는 소리도 아닌 흐느낌이었습니다. 그의 군모와 지휘봉은 좌석 밑에 있었습니다. 저는 그를 바로 앉히고 그의 군모를 다시 씌워 주었습니다.” 이렇게 역사상 가장 위대한 야전 사령관중의 하나로 꼽히던 롬멜은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그는 1891년 11월 15일, 독일 남부에서 교사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1차대전 당시 이탈리아 전선에서 단 3백 명의 병력으로 8천명에 이르는 이탈리아 군을 포로로 잡는 등 일찍이 군인으로서의 재능을 보였던 롬멜이었지만, 그는 당시 독일군 장교단의 핵심을 이루었던 프로이센 귀족 출신의 군 엘리트들에 속하지는 않았습니다.

 전쟁 후 군사학교에서 교관으로 재직하던, 군인으로서는 별 볼일 없는 한직을 전전하던 그를 기용한 것은 바로 히틀러였습니다. 히틀러 역시도 독일군 참모본부의 귀족출신 장교들에게는 경원과 질시의 대상이었죠.

히틀러의 경호 부대장을 거쳐 42년 6월 50세의 나이로 육군 원수의 직위에 오르기까지, 롬멜은 초고속 승진을 거듭했습니다. 특히 프랑스 침공 당시 그가 보여주었던 눈부신 진격 속도는 같은 독일군 조차 놀랄 정도였습니다.

“공격, 아니면 맹공격”이라는 그의 신조가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는 보병 출신이었지만, 현대전에서 전차의 역할이 결정적이라는 것을 일찍이 체득한 선각자였습니다.

  진흙속에 빠진 차를 부하들과 함께 밀어내는 롬멜,그는 부하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던 지휘관이었다

 

후일 그를 상징하는 별명이 된 ‘사막의 여우’라는 말은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어설픈 동맹국 이탈리아가 영국을 잘못 건드려 패전에 패전을 거듭하자 이를 진화하기 위한 소방수로 파견된 것이 바로 롬멜이었죠.

비록 유럽 대륙을 휩쓸었던 독일군이긴 했지만, 북아프리카 전선에서는 내내 열악한 보급과 부족한 장비 문제가 그를 따라 다닐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전쟁에 규칙은 필요 없다. 필요한 것은 반드시 이기는 것을 찾아내 실행하는 일뿐이다” 그의 말처럼 그는 불리한 상황 속에서도 유연한 사고와 임기응변으로 승리를 이끌어 내곤 했습니다.

롬멜의 전술은 적보다 한발 먼저 유리한 기회를 포착하는 ‘선제 공격’, 적의 강력함은 피하는 ‘강점 회피’, 그리고 적의 핵심을 공격하는 ‘중심 타격’으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또 부하들과 생사고락을 같이하는 야전형 군인이었던 롬멜은 부하들로부터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존경을 받고 있었죠. 하지만 제공권과 재해권까지 빼앗긴 독일은 롬멜의 아프리카 군단에 필요한 군수지원을 할 수가 없었고, 독일군은 마침내 북아프리카에서 물러나게 됩니다. 


서부 유럽의 이른바 ‘대서양 방벽’을 수비하는 임무를 맡은 롬멜은 고뇌합니다. 동부전선에서는 소련군이 승기를 잡고 있었고, 이탈리아 반도에 상륙한 연합군은 독일을 향해 북상하고 있었으며, 1944년 6월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성공하자 독일은 막바지에 내몰리는 상황이었습니다.

 “히틀러는 조국이 폐허가 될 때까지 싸울 것인가?”, 롬멜은 동서 양방향에서 두 진영의 적을 상대로 싸우는 전쟁은 승산이 없다고 판단하고 있었죠. 마침내 그는 최고지휘관 회의에서 ‘서방측과 강화를 맺어 승산없는 전쟁은 그만두고, 볼세비키의 유럽 침입을 막아야 한다’고 히틀러를 설득하려 하지만, 오히려 히틀러의 노여움을 사게 됩니다.

그리고 7월 20일 일단의 청년 장교들이 주동한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이 발생하죠. 롬멜이 이 음모에 가담했다는 증거는 확실치 않았지만, 그를 존경하던 일단의 장교들은 그를 히틀러 이후의 대안으로 생각하고 있었고 결국 이것이 화근이 되었습니다. 

  롬멜과 히틀러

 

최근 연구에 의하면 롬멜에 대한 이미지들은 어느 정도는 후대의 필요에 의해 미화되었다는 혐의가 있습니다.

‘유태인들에 대한 학살을 일삼던 나치 광신자들로 이루어진 친위대의 전쟁 범죄행위와는 거리를 둔, 전투에 있어서는 프로페셔널하면서도 신사적인 군인’, 이런 이미지는 전후에 소련이라는 거대한 적을 상대로 하게 된 서방세계가 독일군을 재무장 시키기 위한 필요에서 조장 내지는 방조했다는 것이죠.

롬멜처럼 대중적인 인기가 많았던, 또 히틀러에 의해 강제로 자결로까지 내몰렸던 롬멜의 순교자적 이미지와 독일군 전체의 그것과 동일시함으로써 패전한 독일군이 면죄부를 받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실제 독일에서는 1990년대 초반 좌파 군사사학자들에 의해 롬멜과 2차대전 중 독일 국방군에 대한 역사 재평가 작업으로 독일군 병영에 걸려있던 롬멜의 기념물들이 철거되는 일이 있었습니다. 

 

 

히틀러에 의해 발탁되고 중용되었으면서도 나치당에 입당하지 않았던 롬멜, 그는 분명 나치는 아니었습니다. 유태인 학살 소식을 듣고 “국가의 기본 토대는 정의이며 학살행위는 크나큰 범죄행위”라고 괴로운 심경을 토로했던 그는, 하지만 끝까지 히틀러에 대한 경외감에서 벗어나지 못한 모순적 인물이었습니다.

따지고 보면 그는 당시 대다수 독일국민들의 전형이었는지도 모르겠네요. 열렬한 나치도 아니었지만 나치에 대한 저항도 선택하지 못했던, 그저 ‘자신의 임무에 충실했던 군인’, 그에 대한 요란한 수사들을 떼어내고 남게 되는 단어입니다.

 

 

 

1944년 7월 20일,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
 

1944년 7월 20일 낮 12시 42분, 지금은 폴란드 땅이 된 동 프러시아 라스텐부르크의 독일 육군 작전 지휘본부 볼프산체(Wolfsschanze, 늑대굴)에서 폭탄이 폭발 합니다.

 

독일군의 최고 수뇌부가 모인 가운데 작전 회의가 열리던 회의실에서 터진 이 폭발로 지휘소 지붕에는 거대한 구멍이 났고 창문은 모두 깨져버렸습니다.

 

방안에 있던 사람들 중 4명이 현장에서 사망했지만, 정작 이 폭탄이 노렸던 당사자 히틀러는 고막이 파열되고 다리에 화상을 당하고도 불구덩이 속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납니다.

 

 

 폭발 직후 볼프산체 회의실 모습.


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 육군은 히틀러의 동반자이자 하수인이었지만, 독일 육군 장교단 전체가 히틀러에게 고분고분 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17세기 프로이센의 성립 후 전통적으로 지방 귀족을 통칭하는 융커계급의 자제들로 구성되었던 보수적이고 완고한 독일 장교단의 존재는 이 오스트리아 하사관 출신의 히틀러에게 결코 녹록치 않은 존재였습니다. 히틀러 스스로도 측근들에게 육군 장교들을 일컬어 “길들이기 어려운 싸움 개들”이라고 일컬었을 정도니까요.

게다가 독일의 점령지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인종 학살과 명분 없는 살인 행위는 양심적인 독일군 장교들의 공분을 사고 있었습니다. 당시 전황도 1944년 6월 노르망디에 연합군이 상륙한 이래 독일군이 후퇴를 거듭하는 불리한 상황이었죠. 사실 히틀러를 제거 하려는 시도는 전쟁기간 내내 여러 차례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음모에는 전 독일군 합참의장 루드비히 벡크 대장을 비롯한 전,현직 고위 장교들이 연루되어 있었습니다.

 

폴란드를 정령한 독일군이 저지른 대학살을 보고 “나는 독일인인 것을 부끄럽게 여긴다”고 외쳤던 헬무트 슈티프 육군 총사령부 조직부장, 병참부장 프리츠 린데만, 국방군 통신국장 에리히 펠기벨, 예비군 부사령관 프리드리히 울브리히트 등이 그들이었습니다. 

당시 독일 육군은 국내에서 반란사태가 일어날 경우 예비군 병력을 동원해 이를 진압한다는 작전계획을 입안했는데, 일명 발키리 계획이 바로 그것 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들 반나찌 장교들은 이 작전을 이용하여 히틀러를 제거하기로 마음먹습니다. 그리고 7월 15일 쿠데타를 실행하려고 했지만, 날짜를 연기해 7월 20일을 기해 거사에 들어갑니다.    
 

아침 10시, 예비군 부사령관 프리드리히 울브리히트 장군은 벡크 대장에게 “오늘은 기분이 어떠십니까?”라고 전화를 합니다. 쿠데타의 시작을 알리는 암호였죠. 
 

폭탄을 나르는 임무를 맡은 것은 예비군 참모장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 대령이었습니다. 독일군 정보부장 칼 카나리스 제독( 그 역시 반 히틀러 인사였습니다)이 구해준 영국제 플라스틱 폭탄에는 작은 유리 캡슐이 들어 있었는데, 이 캡슐을 부수면 산성액이 나와 용수철을 누르고 있는 와이어를 부식시켜 뇌관을 격발 시키는 다소 복잡한 구조였습니다. 

 

권총은 물론 반지까지 빼놓고 들어 가야할 정도로 볼프산체의 경계가 워낙 철통같아서 도저히 금속제 폭탄을 사용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죠.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왼쪽 눈과 오른 팔을 잃고 왼손에는 세 손가락밖에 남아 있지 않은 슈타우펜베르크는 이 거사를 위해 세 손가락으로 캡슐을 부수는 연습을 여러 차례 해야 했습니다.

 

 

 사건 몇일전 찍힌 히틀러의 사진, 맨 왼쪽 기립 자세로 서있는 사람이 슈타우펜베르크 대령이다.

 

운명의 그 날, 세 군데의 검문소를 통과하여 회의실로 들어 간 슈타우펜베르크 대령은 폭탄이 들어 있는 서류 가방을 히틀러가 앉아 있는 테이블 발치에 놓고 방을 빠져 나왔습니다. 이제 폭발까지는 5분이 남았습니다. 그런데 갑작스런 일이 일어납니다. 히틀러의 부관이 지도를 보기위해 몸을 일으키다가 테이블 기둥 옆에 놓인 서류가방을 발로 건드렸습니다. 히틀러가 이 가방 때문에 거추장스러워할 것을 걱정한 부관은 폭탄을 테이블 바깥쪽으로 옮겨 놓습니다. 
 

12시 42분 폭탄은 폭발했고 회의장은 아수라장이 되었습니다. 폭발 현장은 마치 포탄의 직격을 받은 것과 같았습니다. 그리고 슈타우펜베르크 대령은 히틀러가 확실히 죽었다고 판단했죠.  그러나 히틀러는 살아 있었습니다. 폭탄이 폭발하는 순간 히틀러는 지도를 보기 위해 테이블 위로 몸을 내밀고 있었고, 테이블의 두꺼운 판자가 방패 역할을 했던 것이었죠.

오후 4시 베를린에서 일단의 쿠데타군이 행동을 개시 합니다. 친위대 사령부를 봉쇄하고 일부 나치 인사들을 체포한 가운데 예비군 사령관 프롬 장군에게 발키리 작전을 발동할 것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프롬 장군(그는 미리 쿠데타 계획을 알고 있었고 대의를 위해 협력하라는 요구를 받고 있었지만, 양다리를 걸치고 있었습니다.)은 히틀러가 죽었다는 확증을 요구했습니다.

 

프롬 장군을 감금한 쿠데타군은 이제 조직망 전체를 움직여 발키리 작전을 가동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움직입니다. 그 날 저녁, 퇴역 장군 루드비히 벡크 대장은 국방부에 도착하여 독일의 새 국가원수로 취임할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밤 9시 베를린의 라디오는 아돌프 히틀러의 중대 발표가 있다고 방송합니다. 반나절간의 쿠데타는 이제 종말을 고합니다.

 

히틀러가 죽었다고 믿고 거사에 가담하려던 몇몇 장교들이 이제는 거꾸로 쿠데타를 일으킨 주모자들을 체포 합니다.

다음 날 새벽 1시 라디오에 나온 히틀러는 흥분한 목소리로 자신에 대한 극악무도한 범죄행위가 있었고 반드시 배신자들을 색출하여 응징하겠다는 방송을 합니다.

 

 

  자신의 두 아이를 안고 있는 슈타우펜베르크 대령, 1907~1944

그 날 밤 슈타우펜베르크 대령과 예비군 부사령관 울브리히트 장군 등은 국방부 앞뜰로 끌려나와 자동차 헤드라이트 불빛을 받으며 총살대 앞에 섰습니다. 슈타우펜베르크 대령은 최후 순간 "우리들의 신성한 조국 독일 만세"를 외치며 최후를 맞이합니다.

 

벡크 대장은 자살을 허락 받고 권총으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이제 한바탕 광기에 찬 히틀러의 피바람이 몰아쳤습니다. 히틀러는 배신자들을 남김 없이 죽여 버릴 것을 명령했고 쿠데타에 연루되었던 모든 사람들이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을 당합니다.

 

약 7,000명이 체포되었고, 이 중 5,000여 명이 나찌 판사들이 주도한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 받고 처형됩니다. "신속하고 혹독하게" 반란의 댓가를 치르게 하라는 히틀러의 명령에 의해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형 판결 후 2시간 이내에 처형 됩니다.

 

특히 8월 8일 오후 베를린의 플뢰첸제 감옥에서 처형된 반란 주모자들은 도살장 갈고리에 매달려 숨이 끊어졌고 히틀러는 이 모든 광경을 필름에 담아 독일군 내부에서 상영하게 합니다.  반란에 연루되어 목숨을 잃은 사람중에는 사막의 여우라고 불리던 에르빈 롬멜 원수, 저명한 신학자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 폭탄을 제공했던 정보국 국장 카나리스 제독 등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역사에 가정이란 부질 없는 일이지만 만약 이 쿠데타가 성공했더라면, 이듬해
1945년 5월 전쟁이 끝날 때까지 9개월간 사망한 독일군과 시민 400만명,소련군 150만명, 미국과 영국의 연합군 10만명 등 모두 560만명의 목숨을 구했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2차대전이 끝난 뒤 수십년 동안 독일에서 이 사건을 보는 시각은 냉담했습니다. 공산정권이 들어선 동독에서는 암살 주도세력이 독일 제국군으로 복귀를 꿈꿨다는 점에서 `제국주의 내에서의 반동적 움직임'에 불과하다며 폄하했고, 서독에서는 이들을 `지도자에 대한 배신자'로 보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습니다. 

그러나 70년대 이후, 이 실패한 쿠데타가 '양심적 장교들이 독재에 항거한 영웅적인 의거'라는 평가가 나오면서 독일인들이 이 사건을 보는 시각이 달라졌고, 이에 따라 폰 슈타우펜베르크 대령의 이름을 딴 거리명이 독일 전역에 3백 여 곳이나 생겨났습니다.  그리고 오늘의 역사는 히틀러 암살을 시도했던 그들의 행위를 독일과 독일인을 위한 용기있는 행동이었다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슈타우펜베르크 대령 등이 총살당한 자리에 붙은 기념 동판 

"지금은 무엇인가 행해져야 할 시기다. 지금 우리의 행동은 미래의 독일역사에서 반역으로 기록될 수 있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지금 아무 행동도 취하지 않는 것은 우리의 양심에 반하는 것이다." (클라우스 그라프 폰 슈타우펜베르크 대령)

 

 

1944년 8월 1일, 바르샤바 봉기 

이봐 친구들 총검으로 무장하자  

이봐 친구들 총검으로 무장하자

길고 먼 길로

뜨거운 가슴에, 손엔 카빈소총을 들고.

총검을 들고 포탄 속으로 가자 
 

여명이 밝아온다. 바람이 불어온다.

폐가 펌프질하고 피가 뜨거워진다.

노래가 우리사이로 퍼져나간다.

앞으로 전진 하는 행군 속에. 하나, 둘, 셋. 
 

(머리 위로) 어두운 밤하늘에 별이 반짝인다.

흰 견장은 먼지 길 위에 있다, 긴 밤과 낮 동안.

새로운 폴란드의 승리가 우리에게 달려있다. 
 

앞으로 전진하는 행군속에. 하나, 둘, 셋.

친구들....

 

1944년 여름부터 독일군은 모든 전선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습니다. 6월 4일에는 로마가 함락되었고, 이틀 뒤에는 노르망디에 연합군이 상륙했습니다. 동부 전선에서도 승기를 잡은 소련군이 공격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습니다.

 

7월 18일 폴란드 국경을 돌파한 소련군은 보름 뒤엔 폴란드 수도 바르샤바에서 불과 70여 Km 남짓한 곳까지 진출했고, 이제 바르샤바가 해방되는 것은 시간문제같이 보였습니다.   

 

도열한 봉기군, 이들은 런던의 폴란드 망명정부의 지휘를 받고 있었습니다.

 

이미 바르샤바의 시민들은 소련군의 포성을 또렷하게 들을 수 있었고, 몇일 못가 독일군은 쫓겨나리라고 누구나 예상할 수 있었죠.

바르샤바를 폴란드인 스스로의 힘으로 해방시킨다면  막강한 소련의 영향력에서도 제 목소리를 낼 수도 있을 것이라는  기대도 가져볼만 했습니다.

사실 1939년의 어이없는 패배에도 불구하고 폴란드 망명정부군은 대독전쟁에 당당히 연합군의 일원으로 참전하고 있었고, 38만 여명에 이르는 폴란드 국내군(레지스탕스)은 바르샤바에만 4만 여명의 조직원을 거느리고 있었습니다. 

8월1일 오후 5시, 볼 코모로프스키 장군의 지휘를 받는 폴란드 국내군은 일제히 행동을 개시합니다. 바르샤바 거리의 모든 창문에서 독일군을 향해 총탄이 쏟아졌고, 독일군 차량에는 화염병이 날아들었습니다.

거리마다 바리게이트가 만들어졌고 독일군은 시내 곳곳에 분산 고립되었습니다. 봉기 세시간만에 바르샤바 시내 대부분이 봉기군의 수중에 떨어졌고, 나찌의 깃발대신 적색과 백색의 폴란드 국기가 내걸렸습니다.

 

적백의 폴란드기가 내걸린 거리를 순찰하는 봉기군

 

성공적이고 감격적으로 시작된 봉기였지만 사태를 낙관하기엔 무리가 있었습니다. 비록 바르샤바 시내 곳곳에 포위되어 있는 독일군이지만 요충지만큼은 제대로 방어해내고 있었고, 빈약한 무장의 봉기군이 장악했어야 할 대부분의 무기고가 독일군 수중에 있었습니다. 

 

쌍방 간에 밀고 밀리는 치열한 시가전이 벌어집니다. 봉기 시점부터 봉기군과 일반 시민의 구별은 무의미해졌고, 여성과 아이들까지 전투에 가세했습니다.    

 

봉기군에는 여성과 소년들도 있었습니다.

 

8월 2일, 소련군이 바르샤바에서 20여 Km 떨어진 파라가에 도달했지만, 웬일인지 더 이상 진격을 하지 않고 멈춰 섰습니다. 소련 공군 또한 바르샤바에서의 활동을 하지 않고 있었죠. 
 

8월 5일 독일군의 1차 반격이 시작됩니다. 반격작전에 동원된 무장친위대 디를레방거 여단과 카민스키 여단은 병력 대부분이 소련군 포로와 범죄자들로 이루어진 부대로 전투보다는 살인과 약탈, 강간에 더 능력을 보였습니다.

 

이들 부대가 바르샤바로 투입된 첫날에만 38,000여 명의 무고한 시민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볼라 지구의 세인트 라차루스 병원에선 1,360 명 이상의 환자와 병원 직원들이 처형당했습니다.

 

 

바리게이트를 공격하는 독일군 자주포.

 

8월12일, 기갑부대까지 동원한 독일군의 대대적인 반격이 시작됩니다. 소총도 충분치 않았던 봉기군의 머리 위로 수백문의 야포와 박격포, 구경이 600mm에 달하는 거대한 자주포에서 발사된 포탄이 작렬했고, 독일군의 폭격기가 매일 바르샤바에 폭격을 쏟아 부었지만 대공화기가 없는 봉기군은 이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바르샤바의 봉기군은 필사적인 사투를 벌였지만, 압도적인 독일군의 화력 앞에 저항선은 차례차례 무너져 갔습니다. 심지어 독일군은 아이들과 여자들을 자신들의 전차 앞에 묶고 저항군을 공격했습니다.

 

저항군이 총을 쏘지 못하게 하려고 인간방패로 이용한 것이죠. 8월의 뜨거운 날씨에 방치된 시체들은 썩어갔고, 수도와 전기가 끊긴 바르샤바에는 전염병까지 돌았습니다. 

 

구경이 600mm나 되는 카알 자주포

 

9월 2일, 바르샤바 구시가지가 다시 독일군의 수중에 떨어졌습니다. 이제 바르샤바가 살아날 길은 단 하나, 소련군이 바르샤바로 진격해 독일군을 쫓아내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러나 로코소프스키 대장이 지휘하는 소련군은 바르샤바 서쪽의 비스툴라 강가에서 진격을 멈추고 바르샤바에서 벌어지는 이 참극을 '강 건너 불 보듯'하고 있었죠.(사실 소련군의 이 이해할 수 없는 행동에 대해서 스탈린이 폴란드내의 반공세력을 말살하기 위해 일부러 사태를 방치했다는 것이 그동안의 정설이었는데, 당시 소련군이 장시간 공세를 지속해온 탓에 전력이 약해졌다고 보는 의견도 있습니다.) 
 

밀려오는 독일군을 피하기 위해 봉기군은 미로처럼 얽힌 바르샤바의 하수도로 숨어 들어가 저항을 계속했습니다. 이제 하수도 안에서도 수류탄이 터지고 독일군의 화염방사기가 불길을 내뿜었습니다. 
 

9월말 모든 희망이 사라졌습니다. 굶주린 시민들이 잡아먹을 쥐조차 남지 않았고, 봉기군은 무기와 탄약이 떨어졌습니다. 항복 아니면 죽음, 뜻밖에도 구원은 독일군으로부터 왔습니다.

 

친위대 장군으로서는 드물게 이성을 가지고 있던 폰 뎀 바흐 장군은 봉기군이 항복한다면 가능한 한 좀 무리한 요구를 들어주더라도 사태를 매듭지을 생각이었죠.

 

독일군도 이미 26,000여명의 사상자를 내고 있어서 소련군과의 일전을 앞두고 바르샤바에서 전투를 계속한다는 게 아무런 실익이 없는 일이라는 판단도 작용했을 겁니다.  

  폐허가 된 바르샤바, 시내 건물의 80%가 전파되었습니다.

 

봉기군과 독일군간의 항복 교섭이 시작되고, 폰 뎀 바흐 장군은 봉기군의 요구를 사실상 수용합니다. 항복한 봉기군을 전쟁포로로 대우하고 친위대가 아닌 독일육군이 관리할 것, 비전투원 시민들의 안전을 보장할 것 등의 조건이었습니다. 
 

10월 2일, 최후까지 살아남은 봉기군 1만 5천명은 포로수용소로 행진합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이들의 모습은 의연했습니다. 애초에 통일된 군복이나 장비가 없었던 봉기군은 평상복이나 독일군의 군복을 빼앗아 입고 있었던 터라, 총을 내던지고 일반시민들 속으로 숨어들 수도 있었지만 그들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여성과 아이들까지 독일군의 포로가 되는 길을 택했습니다.

 

바르샤바 봉기 60주년 기념식에서 경례하는 노병

 

거의 20만 명에 달하는 바르샤바 시민들의 목숨을 앗아간 두 달간의 봉기는 이렇게 막을 내렸습니다. 봉기군이 애타게 기다렸던 소련군이 바르샤바를 함락시킨 것은 석 달 후인 1945년 1월의 일이었습니다.


바르샤바 봉기 60주년 기념식에 참석한 독일의 슈뢰더 총리

( 이 글은 이대영 선생의 알기 쉬운 2차대전사를 참고로 썼습니다.)

 

1944년 10월 25일, 최초의 카미카제 공격대 출격

 

불타는 미 해군 항모 세인트 로, 카미카제 특공대의 공격으로 침몰된 최초의 함정입니다.


1944년 오늘, 패망으로 치닫던 일본이 최초로 자살공격대 ‘카미카제’를 출격시켰습니다. 세키 유키오 대위가 지휘하는 5대의 제로 전투기가 필리핀 레이테만을 항진하던 미 해군 함대를 공격, 호위항모 ‘세인트 로’(USS St. Lo, CVE-63)의 비행갑판에 충돌하여 격침시킵니다. ‘세인트 로’는 카미카제로 침몰된 최초의 연합국 함정으로 기록됩니다.

 

최초의 카미카제 특공기 지휘관 세키 유키오 대위


미드웨이 해전 이후 수세에 몰린 일본은 항공기의 성능과 숫자에서 미국에 밀리기 시작했으며, 특히 1944년 6월의 ‘마리아나 해전’에서는 일본해군 항모기동부대가 괴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게 됩니다.

 

7월에는 사이판을 미군에 함락 당하고, 10월 17일 ‘레이테 해전’이 시작되자 일본군 지휘부는 통상적인 방법으로는 전세를 뒤집을 수 없다고 판단하게 되죠.

 

필리핀에 주둔 중이던 일본 해군 1함대 사령관 ‘오오니시 지로’ 중장은 휘하의 비행장교들에게 압도적인 미군의 항공 전력을 묶어두려면 “제로기에 250kg 폭탄을 매달고 미군항모에 돌격하는 방법밖에 없다”고 발언하여 최초의 자살 공격대가 조직됩니다.

 

카미카제 공격 이전에도 간간히 일본군에 의한 자살 공격이 있긴 했지만, 조직적이고 대규모로 이루어진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죠.  


  미 해군 전함 '미조리'에 돌입하기 직전의 특공기. 특공대의 교범에는 '목표에 명중될 확률이 낮아질 수 있기 때문에 최후 순간까지 조종사는 눈을 감지 말고, 필살!이라고 외치며 돌입하라'고 지시하고 있었습니다.

 

단 이틀 사이에 55대 이상의 카미카제 특공기가 잇달아 자살공격을 시도하여 7척의 항공모함을 포함한 40여척의 미국 함정에 손상을 입힙니다(5척 침몰, 23척 대파, 12척 파손).

 

참혹한 비극의 시작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일시적인 전황 타개책으로 시도되었지만, 이 무모한 자살 공격이 성과가 있다고 판단한 일본 해군과 육군은 ‘카미카제’공격을 전면적으로 확대하여, 불과 몇 개월 사이에 2,000여 회 이상의 자살공격이 시도됩니다.  그 대가는 6천명이 넘는 젊은 조종사들의 목숨이었습니다.

 

  특공대원의 마지막 기념 사진.

 

종전으로 치닫을수록 일본군부의 광기도 더해갔습니다. 초기에는 ‘특공작전에 참가하는 것은 명령에 의해 강제되어서는 안 되고 자발적이어야 한다’는 합의라도 있었지만, 전쟁 말기로 가서는 반 강제적으로 지원하지 않으면 안 될 상황이 되어갔죠.

 

심지어는 부대 자체가 특공공격을 위해 편성되는 것도 일상적인 일이 되었습니다. 일본의 어용언론들은 이들의 죽음을 미화하고 선동했습니다.

 

당시의 선전 영화는 일왕의 하사주를 마시고 머리띠를 두른 비장한 모습의 조종사들이 출격하는 장면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특공대원들 속에는 조선인 청년들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1944년 12월 9일자 매일신보에 실린 미당 서정주의 “마쓰이 오장 송가”는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아아 레이테만은 어데런가
언덕도 산도
뵈이지 않는
구름만이 둥둥둥 떠서 다니는
몇천길의 바다런가
아아 레이테만은
여기서 몇만리련가...

 

(중략)

마쓰이 히데오!
그대는 우리의 오장 우리의 자랑.
그대는 조선 경기도 개성 사람.
인씨(印氏)의 둘째 아들 스물한 살 먹은 사내

 

마쓰이 히데오!
그대는 가미가제 특별공격대원
 

(중략)

 

우리의 땅과 목숨을 뺏으러 온
원수 영미(英美)의 항공모함을
그대 몸뚱이로 내려져서 깨었는가?
깨뜨리며 깨뜨리며 자네도 깨졌는가!
장하도다 우리의 육군 항공 오장(伍長) 마쓰이 히데오여!
너로하여 향기로운 삼천리의 산천이여
한결 더 짙푸르른 우리의 하늘이여
아아 레이테만은 어데런가
몇천 길의 바다런가
귀 기울이면
여기서도, 역력히 들려오는
아득한 파도소리...
레이테만의 파도소리...

 

조선총독부는 천황과 일본제국에 대한 충성의 표상으로 마쓰이 오장의 죽음을 대대적으로 선전합니다.

 

그러나 얼마 안 있어 일본 정부는 국제적십자사로부터 마쓰이 히데오를 포함한 일본군 포로 명단을 통보 받지만 포로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고 가족들에게도 알리지 않은채 무시 합니다.

 (사쿠라처럼 장렬하게 산화해갔다고 칭송하던 마쓰이 오장이 사실은 포로가 되었다고 밝힐 수도 없었겠죠) 

 

결국 카미카제의 조선출신 영웅으로 미화되었던 마쓰이 히데오, 인재웅은 전쟁이 끝난 후, 1946년 1월 10일 미군의 군함으로 인천항으로 돌아와 가족들과 재회하죠. 그러나 카미카제 특공대로 선발된 조선 청년들 대부분은 다시는 돌아오지 못 할 길을 가야만 했습니다.    

  조선인 특공대원 박동훈, 전사 당시 그의 나이 18세였습니다.


그리고 많은 연구자들의 노력으로 카미카제 특공대의 진실이 드러납니다. 아무 두려움 없이 천황이라는 고결한 가치를 위해 초개같이 목숨을 내던졌다던 특공대원들이 실상은 죽음 앞에,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영원한 이별 앞에서 두려움에 몸부림치는 평범한 젊은이들이었다는 거죠. 다음은 카미카제 특공대원들의 출격 전야를 기록한 글입니다.

 

기러기룸에 이별을 위한 주연석(酒宴席)이 마련됨. 내일 출격하는 젊은 사관들은 데우지 않은 찬 술을 단숨에 들이키거나 벌컥벌컥 마시며 술자리는 무르익어간다.

 

끝내는 아수라장 되어 누군가는 검은 막사에 매달린 전등을 칼로 내리쳐 떨어뜨리고 누군가는 양손으로 걸상을 들어 올려 차례로 유리창을 와장창 부순다.

 

새하얀 테이블보도 찢겨나가고 군가도 누군가를 저주하는 목소리처럼 뒤얽혀 등화관제하의 군대에서 여기 기러기룸의 술자리는 ‘별세계’ 같다.

 

어떤 사람은 부아가 치밀어 소리를 지르고 어떤 사람은 큰소리로 운다. 오늘 밤으로 끝나는 생명...부모, 형제, 자매의 얼굴과 모습. 그리고 연인의 미소 띤 얼굴, 약혼자와의 슬픈 이별, 주마등처럼 다가왔다가 스쳐 지나가는 상념은 끝이 없다.
 

내일은 마침내 출격, 일본제국을 위해, 천황 폐하를 위해, 젊디젊은 고귀한 청춘의 생명을 바칠 각오를 다짐하고 있건만, 뒤죽박죽된 테이블 위에는 엎드린 사람, 유서를 쓰는 사람, 팔짱을 낀 채 명상에 잠긴 사람, 엉망이 된 환송회장을 떠나는 사람, 언제까지고 묵묵히 뭔가를 쓰는 사람, 미친 듯이 춤을 추면서 꽃병을 부수는 사람. 이 참담한 출격전야의 어찌 할 바 모르는 학도병의 심경은 너무나도 알려져 있지 않다. (오누키 에미코 著-죽으라면 죽으리라 P.39)

 

사실 전쟁 말기로 갈수록 자살공격에 대비하여 함대 외곽에 레이더를 장비한 초계함을 운용하는 등 연합군의 전술이 향상되었고, 오로지 적함을 들이 받는 기본적인 비행훈련만 받은 미숙한 조종사들이 특공작전에 투입되어 공격 성공률은 7퍼센트에 불과하게 되죠.

 

타격을 입는 연합국 선박도 대부분이 구축함이나 소형 함정 등 전술적 가치가 낮은 것들이었습니다. 13세기, 두 차례에 걸쳐 일본정벌을 위해 침공해온 몽고군을 바닷물에 수장시킨 ‘신이 보낸 바람(神風, 카미카제)’ 처럼 일본을 구하기에는 이미 전세가 기울었습니다. 강요된 죽음 앞에서 몸부림쳤던 젊은이들의 절규만이 남았을 뿐이죠.

 

 

 출격전 강아지를 안고 미소 짓는 앳된 얼굴의 소년병도 몇 시간 후 불귀의 객이 되었습니다.

카미카제 특공대원의 출신성분을 분석한 자료를 보면(오누키 에미코 著-사쿠라가 지다, 젊음도 지다) 특공대원중에 일본의 황족과 귀족 출신, 유력한 집안의 자제들은 눈을 씻고 찾아 봐도 없고, 엘리트로 평가되는 해군병학교(우리의 해군사관학교) 출신 조종사들도 극히 드물었다고 합니다.

 

특공대원들의 대부분은 평범한 서민 가정의 10대와 20대의 하사관이나 학병출신 젊은이들이었다는 이야기죠.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된 수많은 카미카제 특공대원들의 유서가 아직도 공개되지 않는 이유는 이들의 죽음이 자발적이고 황군정신에 충만한 행위가 아니었다는 것을 증명하기 때문이라는 게 에미코 여사의 결론입니다. 

 

요미우리 신문의 편집장 와타나베 츠네오씨도 “그들이 기쁨과 용기로 충만해서 "텐노 헤이카 반자이"를 외치며 죽어갔다는 것은 거짓이다. 그들은 도살장에 끌려가는 양처럼 억지로 끌려갔고 모두들 고개를 떨구고 있으며 어떤 이들은 걸을 수도 없어서 억지로 조종석에 처넣어야 했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갈데까지 간' 특공기,

이 것은 비행기가 아니라 사람이 타고 목표까지 유도하는 '유인폭탄, 사쿠라바나'입니다.

일본 군국주의의 광기를 적나라하게 보여준 ‘카미카제 특공’은 인류사적인 죄악에 다름 아니었습니다. 작가 한수산 선생은 장편소설 ‘까마귀’에서 카미카제 특공대에 관해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인간이 스스로 선택하는 죽음에는 자살과 순교가 있다. 자살이 자신의 의지로, 의지라는 숭고함에 가장 배치되는 삶의 포기를 선택하는 것이라면, 순교는 자신의 의지로 이 땅에서의 왜곡된 진실에 항거하는 가장 힘찬 저항이다.

 

이들 자살 특공대의 선택은 자살도 순교도 아니다. 자신의 목숨과 삶을 다른 삶을 살해하는데 사용했을 뿐이다. 그들은 광기어린 살의 속에서, 왜곡된 지휘부에 저항조차 못하는 소모품이 되어 있었을 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가미카제 특공대의 자살 공격은,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나 살아가는 숭고한 의미와 가치, 목숨의 원형질 그 고아한 정신에 대한 더 할 수 없는 모욕이 된다.


 

 

1944년 11월 24일, 미군 B-29 폭격기 도쿄 첫 공습  

 

1944년 11월 24일, 미군의 B-29 폭격기가 일본 제국의 심장 도쿄를 폭격합니다. 1942년에 있었던 둘리틀 특공대의 공습 이후 최초의 일이었습니다.

 

이날 미 육군 항공대 제 73 폭격비행단장 에메트 오도넬 장군이 직접 조종하는 ‘돈틀리스 도티’기를 따라 도쿄를 공습한 ‘하늘의 요새’ B-29의 숫자는 모두 110대, 마리아나 제도에 건설된 비행장에서 이륙한 폭격기들이었습니다.

 

이 보다 넉 달 전, 마리아나 제도를 침공한 미군은 일본에 대한 전략 폭격기의 발진 기지를 사이판, 티니안, 괌 등지에 만들기 시작했고,  이 날의 폭격은 일본이 우려하던 일이 마침내 현실로 나타난 것이었습니다.

 

 

마리아나 제도 티니안섬에 건설된 비행장, B-29 폭격기의 발진기지로 사용 됩니다.

 

도쿄를 공습한 B-29 폭격기들은 일본군의 맹렬한 고사포 사격과 40여 기의 전투기로부터 저항을 받았습니다. 8대의 폭격기가 손상을 입었고, 그 중 한대는 일본 전투기에 들이 받치는 자살 공격으로 추락했습니다.

 

1만 미터 고공에서 행해진 첫 도쿄 공습은 미군의 기대와는 달리 일본에 큰 피해를 주지는 못했습니다. 대류권과 성층권의 경계를 나는 이 폭격기들이 시속 240km로 불어오는 맹렬한 바람에 흔들려, 목표를 확인하고 정밀하게 폭탄을 투하할 여유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1,000여발의 폭탄이 투하되었지만, 애초 목표인 무사시노 공업지대에 떨어진 폭탄은 겨우 48발로 군사적 목적을 달성하기에는 초라한 성과였죠. 하지만 일본의 심장부를 직접 폭격하고 돌아 갈 수 있는 마리아나 제도에 비행장을 확보한 미군은 꾸준한 폭격으로 일본의 명줄을 죄어 갑니다.

 

이 날 워싱턴에서 ‘헨리 아놀드’ 미 육군 항공대 사령관은 “일본 제국의 그 어떤 곳도 이제 우리의 손이 미치지 못하는 곳이 없게 되었다.”고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보고합니다. “일본은 바람의 씨를 뿌렸었다. 이제 그들은 회오리 바람을 거두어 들여야 할 것이다.” 아놀드 장군의 이 발언은 곧 무서운 현실이 됩니다.  

 

1945년에 들어서 미 육군은 두꺼운 구름과 고공의 강한 바람 때문에 도쿄에 대한 정확한 폭격이 불가능하다고 보고 전술을 변경하는데, 그것은 바로 민간인 거주구역에 대한 무차별 소이탄 공격이었습니다. 지진이 잦은 일본의 특성상 나무로 지어진 목조 주택이 대부분인 도쿄의 주택 지대에 불벼락을 내리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1945년 3월 9일 밤, 최악의 사태가 발생 합니다. 자정 직전, 250대 이상의 B-29 폭격기들이 도쿄 스미다구 상공에서 기름과 네이팜탄을 떨어뜨리기 시작했고, 때마침 불어온 강풍으로 도쿄는 불바다가 되죠.

 

목조 가옥이 밀집한 거주구역에 떨어진 소이탄은 엄청난 화염을 내뿜으며 번져갔고, 수동식 펌프와 물에 적신 다다미, 모래를 담은 통을 든 소방대원들이 불길을 잡기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불의 열기가 너무 높았고 연기가 자욱했기 때문에 이 뜨거운 연기를 들이 마신 사람들은 그 자리에 픽픽 쓰러졌고 고통으로 온몸을 비틀면서 숨져갔습니다.

 

소이탄에 들어 있는 젤리와 같은 인화물질은 강 위에서도 불타올랐고, 행길과 길목에는 검게 탄 시체들이 쌓였습니다. 이 날 단 하루의 소이탄 폭격으로 사망한 사람들의 숫자는 10만 명에 이르렀습니다.    

 

 

 1945년 2월 19일 - 미 해병대 이오지마 상륙

 


1945년 2월 19일 오전 6시 40분, 일본 도쿄에서 서남방으로 1,200Km 떨어진 화산섬 이오지마에 전함 ‘노스캐롤라이나’와 중순양함 ‘샌프란시스코’를 비롯한 미 해군 함대가 포격을 개시합니다. 전함 5척, 중순양함4척, 경순양함 3척, 구축함 10척의 일제 사격으로 모두 8천발이 넘는 포탄이 이 작은 섬에 떨어집니다.

 

섬은 온통 포화로 뒤덮였으며, 그 엄청난 포탄 세례에서 살아남은 생명체는 없을 듯 보였죠. 오전 8시, 미 해병대의 제 1진 1만 5천명이 5백대의 상륙용 주정을 타고 해안에 도착했으며, 이 후 일곱 차례에 걸쳐 모두 3만 명의 해병이 섬에 상륙합니다. 2차 대전 중 미 해병대가 가장 큰 손실을 입은 ‘이오지마 전투’의 시작이었습니다. 


한자로는 유황도(硫黃島)로 불리는 이오지마는 면적이 20제곱Km밖에 되지 않는 화산섬으로 물도 없고 풀 한포기 자라기 힘든 황무지나 다름없는 볼 품 없는 섬이었습니다. 이오지마가 치열한 격전지가 된 것은 이 섬이 자리 잡고 있는 위치 때문이었죠.

사이판과 일본 본토를 잇는 선의 중간쯤에 있는 이오지마는 사이판에서 출격한 미군의 B-29 폭격기가 도쿄를 폭격하러 가는 항로상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미군으로선 이 섬의 존재가 여간 성가신 게 아니었습니다.

이오지마에서 출격한 일본군 전투기가 달려드는가 하면, 미군의 공습을 미리 본토에 알리는 전초 기지로 활용되었기  때문이죠. 또 이 섬을 손에 넣게 된다면 일본 공습에서 손상을 입고 사이판으로 돌아가는 폭격기들의 비상 착륙지로도 활용할 수 있다는 계산이었습니다.

 

이오지마에 건설된 활주로.

B-29 폭격기의 비상착륙장으로, 폭격기를 일본 본토까지 호위하는 전투기의 발진기지로 사용되었다.

상륙군은 ‘홀랜드 스미스’ 해병 중장이 지휘하는 미 해병 제 3, 4, 5 해병사단 병력으로, 상륙 첫 날 미군은 3만 명의 해병과 2백대를 전차를 양륙하고, 너비 4Km의 교두보를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미군의 시련은 그 때부터 시작이었습니다.

이오지마에는 ‘구리바야시’ 중장이 지휘하는 일본 육군 제 109사단 1만 5천 병력과 일본해군 27 항공전대 7천 5백 명이 배치되어 있었는데, 수비대 사령관 ‘구리바야시’는 20m 이상의 지하에 종횡으로 터널을 파고 견고한 요새를 구축해 놓고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그는 이전까지 일본군이 고수하던 상륙군이 해안에 닫자마자 격퇴하고, 대규모 야습을 통해 적을 무력화한다는 전술을 과감히 포기합니다. 또한 무의미한 ‘반자이’ 돌격을 금지하고, 단계적으로 퇴각하며 미군에게 최대한 피해를 입히겠다는 계획을 세워 놓고 있었죠.

“우리는 적 10명을 쓰러뜨리기 전에는 절대로 죽을 수 없으며 마지막 한 사람까지 기습에 참가해 적을 교란 시켜야 한다.” ‘구리바야시’가 휘하 장병들에게 내린 ‘후퇴배비 6훈’의 한 구절에는 일본군이 얼마나 결사적인 태도로 이 전투에 임했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일본 수비대 사령관 '구리바야시' 중장

 

 

상륙군 사령관 '홀랜드 스미스' 장군 


무사히 상륙하는가 싶던 미 해병대에 교묘히 숨어 있는 일본군의 포화가 쏟아집니다. 해변은 곧 미 해병들의 사체와 파괴된 주정들로 뒤덮이죠. 특히 일본군의 방어선 전면에 상륙한 미 해병 25연대 3대대는 총 9백명의 대대원 중에서 불과 150명만이 간신히 살 수 있었습니다.

상륙 첫날에만 미 해병의 전사자가 2천3백 명을 넘어섭니다. 상륙 둘째 날 부터, 이 섬의 가장 높은 고지인 해발169m ‘스리바치’ 산에 대한 공격에 나선 미 해병대는 함포와 항공기의 지원 아래 전차와 화염 방사기, 폭약을 든 공병대를 앞세워 전진합니다.

포병대의 105mm 포와 박격포탄으로는 일본군이 견고하게 만든 동굴 진지를 파괴하지 못했기 때문이죠.  미 해병대는 화염 방사기로 일본군 토치카를 불태우고, 발견되는 터널마다 폭약을 넣어 폭파 시키는 이른바 ‘마개 뽑기 전술’(Corkscrew tactics)을 수행하면서 산 정상을 향해 나아갑니다.

수 백 개나 되는 일본군의 저항 거점을 하나하나 점령할 때 마다 미군의 사상자도 늘어가니, 21일 저녁까지 공격의 선봉에 섰던 미 해병 5사단 28연대의 생존자는 25%에 불과합니다.  

 

 

악전고투 끝에 23일 오전 10시 37분, ‘스리바치’ 산 정상에 성조기가 계양됩니다. 이 순간을 찍은 종군 사진가 ‘제임스 로젠탈’은 퓰리처상을 받게 되죠. (이 사진에 대한 뒷이야기는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감독한 영화 ‘아버지의 깃발’에 잘 나와 있습니다.)

하지만 ‘스리바치’ 산에 성조기가 펄럭인 이후에도 31일간 전투가 계속되었고, 이오지마가 미군의 손에 완전히 장악된 것은 3월 26일의 일이었습니다.  당초 5일이면 충분할 것이라던 미군의 작전은 한 달이 넘게 걸렸고 전사자 6,821명, 부상자 21,855명이 발생해 미국이 공세로 전환한 이래 가장 큰 피해를 기록했죠.

 이 섬에 상륙한 해병 대대장 24명중 19명이 죽거나 부상을 당했을 정도였으니, 얼마나 치열한 격전이 벌어졌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섬을 수비하던 일본군 2만2천명은 포로 212명을 제외하곤 말 그대로 전멸해 버렸습니다.    

 

이오지마 전투를 계기로 일본 제국주의는 완전한 패망의 길로 접어들게 되지만, 미군은 안일한 낙관에 대해 뼈아픈 대가를 지불해야 했죠. 이 전투를 계기로 미군은 지상군 작전에 함포 사격과 근접항공지원을 유기적으로 결합시킨 ‘화력지원 협조본부’(FSCG, Fire Support Coordinatin Center)를 설치해서 운용하는 등 미군 작전 교리도 변화하게 됩니다.

 

 

오늘날의 이오지마, 이 작은 섬에서 3만명의 젊은 병사들이 죽어갔습니다.

 

1945년 3월 10일 - 미군, 도쿄 대공습

 

1945년 3월 10일 갓 자정을 넘긴 0시 8분, 미군의 B-29 폭격기 344기가 도쿄에 대규모 공습을 감행 합니다. 2시간 동안 떨어진 폭탄만 2천 2백 톤, 그것도 가솔린과 글리세린 등을 혼합하여 엄청난 열을 내도록 설계된 소이탄이었습니다.  

 

폭격은 도쿄 남동쪽의 고토(江東區)와 주오(中央)區 등에 집중되었죠. 도쿄 시내의 건물 대부분은 목재 건축물이었기 때문에 피해는 엄청났습니다. 소이탄의 화염은 엄청난 속도로 사람과 건물을 닥치는 대로 태우며 바람을 타고 번져나갔고, 엄청난 불기둥은 순식간에 도쿄를 잿더미로 만들었습니다.

 

주택과 건물 42만 채를 집어 삼킨 소이탄의 불은 물을 뿌려도 꺼지지 않았으며, 사람의 피부에 달라붙은 불길은 탈 물질이 없어질 때까지 계속 타들어 갔습니다. 불길을 피해 강물로 뛰어든 사람들도 강물위에서 타오르는 소이탄의 불길에 끔찍한 고통을 겪으며 죽어 갔죠.

 

폭탄을 투하하고 돌아가는 B-29 승무원들이 시체 타는 냄새를 맡을 정도였으니 폭격의 참상이 얼마나 끔찍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일본의 한 역사 교과서는 “동서 5 km, 남북 6 km에 걸쳐 소이탄을 투하해 화벽(火壁) 으로 사람들의 퇴로를 차단한 뒤 융단 폭격으로 약 10 만 명을 살해했다 ” 고 적고 있습니다. 

 

 당시 폭격 피해를 조사했던 도쿄 경시청의 공식기록에는 “9일 밤 자정 무렵부터 10일 오전 2시 30분까지 2시간 반 동안 폭격에 의한 사망자 8만 8천 753명, 부상자 4만 918명, 합계 12만 9천 711명”이라는 사상자 숫자가 적혀있었습니다. 시신 중 70%는 남녀 구분조차 불가능했고, 거의 대부분의 사망자는 끝내 신원이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안타까운 일은 폭격 피해자 중에는 일본인뿐만 아니라 강제 동원되어 한반도에서 끌려온 수많은 조선인들이 포함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소이탄의 불길에 휩싸인 고토區와 주오區는 군함을 만들고 수리하던 조선소와 군수기지가 밀집해 있던 곳으로 일본에 징용돼 온 조선인들이 집중적으로 거주하던 곳이었죠.

 

조선인 강제연행 진상조사단의 자료에 의하면 당시 폭격으로 사망한 조선인은 많게는 1만 명에서 적게 잡아도 3천 명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식적인 조선인 희생자 수는 불과 수십 명 수준입니다.

 

신원을 파악하지 못한 희생자가 대부분이었고, 그나마 신원이 파악되었다 해도 창씨개명으로 조선인임을 확인하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이죠.

 

 

이 날의 폭격은 주도면밀하게 이루어졌습니다. 미 육군(당시에는 미 공군이 독립된 조직이 아니었습니다) 항공대는 도쿄의 풍향을 면밀히 분석해 피해를 극대화할 수 있는 남동풍이 불어오는 시기를 노렸고, 일반 폭탄 대신 소이탄을 사용했습니다.

 

이 작전을 입안한 ‘커티스 르메이’ 장군은 도쿄 폭격 이후 “우리가 전쟁에서 승리하지 못한다면 전쟁범죄자로 기소되어 처형될 것”이라고 말했다는군요.

 

 

 도쿄 폭격을 지휘한 '커티스 E. 르메이' 장군,

후일 전략공군 사령부 사령관을 역임하고 1968년에는 무소속 부통령 후보로 출마하기도 했습니다.

 

매년 3월 10일이면 도쿄 대공습 피해자들의 넋을 위로하는 추모행사가 열립니다. ‘요미우리’같은 우익 성향의 신문들은 “처음부터 일반 시민을 목표로 삼은 대량 학살 작전으로 명백한 국제법 위반 ”이라고 목소리를 높입니다.

 

전쟁을 일으킨데 대한 반성은 없고 피해자로서의 일본의 입장만 강조되는 것이죠. 하지만 왜 그런 일이 벌어졌는지에 대해서는 애써 외면하는 것이 일본의 분위기입니다

 

 

 

1945년 7월 16일, 인류 최초의 핵실험 성공  

 

 

1945년 7월 16일 오전 5시 29분, 미국 뉴멕시코주 알라모고르도(Alamogordo) 인근 사막에서 거대한 버섯구름이 하늘로 솟았습니다. 이 폭발로 인한 불꽃은 200KM 밖에서도 보일 정도였습니다. 인류 최초의 핵폭발 실험이 성공하는 순간이었습니다.  

 

1939년 여름 미국 뉴욕주 롱아일랜드에서 휴가를 즐기고 있던 아인슈타인 박사를 찾아 온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레오 질라드, 헝가리 출신의 독일 물리학자인 그는 나치의 박해를 피해 뉴욕에 머물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그는 아인슈타인에게 미국 대통령에게 핵폭탄을 개발해줄 것을 청원하는 편지를 써달라고 부탁합니다. 독일이 먼저 원자폭탄을 개발할지도 모른다는 걱정과 함께, 만일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유럽의 운명은 끝장이라고 그는 믿고 있었죠. 질라드의 부탁을 받은 아인슈타인은 망설입니다.  그는 전쟁을 혐오했고, 더구나 자신이 휘말리는 것은 더욱 싫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질라드의 집요한 설득으로 아인슈타인은 1939년 8월 2일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히틀러보다 미국이 먼저 핵폭탄을 개발해야 한다고. 그리고 그 해 9월 1일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함으로써 2차 세계대전의 불길은 타올랐습니다.
 

미국의 핵폭탄 개발인 맨해튼 프로젝트(당시 핵분열에 관한 연구가 주로 뉴욕 맨해튼에서 이뤄졌기 때문에 붙여졌습니다. 주:곰PD)는 1941년 12월에 접어들어서야 시작되었습니다.  천문학적인 비용이 소요되는데다 자칫 실패라도 하는 날엔 정치적 생명까지 위협받을 수 있다는 루즈벨트 대통령의 걱정 때문이었죠. 맨해튼 프로젝트의 책임자로는 37세의 캘리포니아공과대학 교수 오펜하이머가 지명되었습다. 
 

미국이 맨해튼계획을 추진하는 동안 독일, 일본, 소련에서도 핵폭탄 개발계획이 수립되었습니다. 사실 독일은 미국보다 핵폭탄을 개발하는데 훨씬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고 있었습니다.  령지인 노르웨이 중수공장에서 만든 4백 L의 중수를 손아귀에 넣었고, 벨기에로부터는 1천2백t의 우라늄을 빼앗았으며, 우라늄 235를 쉽게 분리하는 방법까지 개발했던 것입니다.

 

다만 히틀러가 핵폭탄에 대해 무지했다는 점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습니다. 일본은 1941년부터 육군 항공대와 해군이 각각 핵폭탄 개발에 착수했고, 소련은 1939년 핵물리학자인 이고르 쿠르차토프의 제안으로 핵무기 개발에 박차를 가했습니다.

 

존 로버트 오펜하이머, 1904~1967

 

1945년 5월 독일은 연합군에 항복했고 오펜하이머, 페르미, 로렌스, 콤프턴 등 4명의 과학자는 일본에 핵폭탄을 투여할 것인지를 결정하기 위해 한자리에 모였습니다. 이 자리에서 오펜하이머는 ‘핵폭탄은 죽음의 무기지만, 역으로 전쟁을 끝내고 인류의 평화를 가져올 수 있다’고 역설했죠. 결국 미국 정부는 일본의 인구밀집지역에 핵폭탄을 투하할 것을 결정하게 됩니다.
 

1945년 7월 16일의 핵실험을 거쳐 8월 6일 히로시마, 8월 9일 나가사키에 핵폭탄이 투하 됩니다. 히로시마에서는 14만 명, 나가사키에서는 7만 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일본에 핵폭탄을 떨어뜨릴 것을 주장했던 오펜하이머도 평생 죄책감에서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트루먼 대통령을 만나는 자리에서 그는 대통령에게 “내 손에는 피가 묻어 있다”고 했을 정도니까요.

 

핵폭발이 일어난 곳에 건립된 트리니티 사이트 그라운드 제로 기념비.


  선사시대의 인류가 불을 발견하면서 문명시대로 들어섰다면, 1945년 7월 16일은 인류가 핵시대로 들어선 날이었습니다. 그리고 인류 최초의 핵폭발 실험장의 이름은 성부ㆍ성자ㆍ성령의 3위 일체를 뜻하는 '트리니티 사이트' (Trinity Site)였습니다.

 

 

 

1945년 7월 26일, 연합국 수뇌 포츠담 선언 발표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기 직전인 1945년 오늘 독일 포츠담에서 미국·영국·소련 등 세나라 연합국 수뇌가 공동선언을 발표합니다. 선언의 주된 내용은 일본에 대해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고, 항복조건으로 제국주의적 지도세력을 없앨 것과 전쟁범죄자의 처벌, 일본영토를 한정하는 것 등이었습니다.

 

일본이 이를 묵살하자 미국은 8월 6일 히로시마와 9일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각각 투하하였고 소련은 이 날 대일전에 참전하여 만주에서 일본군에 대한 총공격을 개시하였습니다. 이 선언으로 우리 나라는 해방과 독립을 약속 받았습니다.

 

 

 

1945년 7월 28일 -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에 B-25 폭격기 충돌, 14명 사망

 

 

 

충돌사고 직후 찍은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의 사진.


1945년 7월 28일 토요일 아침, 짙은 안개로 항로를 이탈한 미 육군 항공대 B-25 ‘미첼’ 폭격기가 뉴욕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과 충돌, 14명의 사망자와 30여명의 부상자가 발생합니다.

 

그날 아침 매사추세추州 ‘베드포드’를 이륙한 사고기는 뉴저지州 ‘뉴워크’ 공항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비행기의 조종은 ‘윌리엄 F. 스미스’ 중령이 맡았고 ‘크리스토퍼 도미트로비치’ 상사와 집에 가기 위해 비행기를 얻어 탄 젊은 해군 수병이 동승하고 있었죠.

 

당시 기상상태의 악화로 가시거리가 4Km 남짓 밖에 되지 않았기에 사고기가 뉴욕 ‘라가디아’ 공항 상공에 당도했을 때 스미스 중령은 관제탑으로부터 착륙권고를 받습니다. 하지만 그는 뉴워크 공항을 향해 계속 비행하기로 결심하고 ‘맨하튼’ 섬을 가로질러 날아갑니다.

 

 

 

사고기와 동형의 B-25 '미첼' 폭격기.

 

몇 분 뒤, 사고기는 뉴욕 한복판을 서쪽으로 가로질러 5번가 상공에서 남쪽으로 방향을 틀기 시작하죠. 목격자들은 당시 사고기가 착륙을 위해 랜딩 기어를 내린 상태였다고 증언합니다. 아마도 시계가 전혀 확보되지 않은 상태에서 스미스 중령은 공항을 항하고 있다고 착각했던 것이겠죠.

오전 9시 55분, 총 중량 12톤인 사고기는 지상 293m 높이에 있는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78층을 정면으로 들이받습니다. 충돌 직후 폭발과 함께 짙은 연기와 불길이 하늘로 치솟았고, 비행기의 잔해와 건물의 파편들이 아래로 쏟아져 내립니다.

당시 건물의 79층과 80층에는 미국 가톨릭 복지협회 (National Catholic Welfare Council)가 입주해 있었는데, 사고기에 타고 있던 3명의 군인을 제외한 11명의 사망자가 모두 이 사무실에서 발생했습니다. 한 사망자의 몸은 유리창 밖으로 튕겨져 나와 71층 선반에 걸려 있었죠. 불붙은 엔진 하나는 엘리베이터 통로로 뚫고 들어가 지하층까지 떨어졌고, 800 갤런의 불붙은 항공유는 계단을 따라 75층까지 쏟아져 내려습니다.

사고 당시 빌딩에는 전망대에 40여 명을 포함한 1,500명이 있었지만, 희생자가 더 나오지 않았던 것은 천만다행이었죠. 사고기의 기체가 비교적 작았고 가솔린이 적게 남아 있었던 것이 더 이상의 참사가 벌어지지 않았던 이유였습니다.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이 입은 손해액은 5억 달러로 추산되었고 군은 인명 피해에 대한 손해배상을 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 일이 남의 나라 이야기로만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 공군 기지 접근로에 초대형 빌딩의 건축 허가를 내주는 간 큰 대통령이 다스리는 대한민국이기 때문일 겁니다.

당시 엠파이어 빌딩에 항공기가 충돌할 가능성은 ‘10,000분의 1’로 추정되었다고 하죠. 하지만 “일어날 가능성이 있는 사건은 언젠가는 일어나기 마련이다”란 금언을 생각해 보면 맘 편히 발 뻗고 잠을 잘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 같습니다.


  1945년 8월 6일, 일본 히로시마에 원폭 투하

 

에놀라 게이 후미에서 촬영한 히로시마의 버섯구름.

 

1945년 8월6일 월요일 아침. 시민들이 출근 준비로 분주한 가운데 맑게 개인 히로시마 하늘위로 미 공군 제 509 혼성비행대대 소속의 B-29 폭격기 세 대가 나타났습니다.

 

이 중 기장 폴 티비츠 대령이 자신의 어머니 이름을 따 ‘에놀라 게이’로 이름 붙인 폭격기에는 길이 3m, 지름 71cm, 무게 4.3톤의 원자 ‘꼬마’ (Little boy)가 실려 있었습니다.
 

아침 8시 15분 15초, 열린 폭탄창을 통해 ‘꼬마’가 떨어져 나가자 폭격기는 순식간에 수십미터 위로 솟구쳐 올랐습니다.  60 각도로 선회한 기체는 거의 날개 끝으로 물구나무를 선 모양이었고, 창밖으로는 저 아래 히로시마의 풍경이 격렬하게 쓸려 지나갔습니다. 이윽고 오전 8시 15분 59초. 리틀 보이는 히로시마 상공 570m 지점에서 폭발했습니다.

 

미국의 최초 실전 원자폭탄 MK-I, Little Boy.

 

폭심지의 온도는 10억분의 1초 동안 6천만도로 상승했고, 이는 폭심지 1km 내의 모든 것들을 일순간에 녹여 버렸습니다. 이후 시속 320km의 폭풍이 사방을 찢어발겨 건물과 사람을 남김없이 날려버렸고, 열선과 폭풍만으로 폭발 수 초 이내에 8만 명이 즉사했습니다. 
 

곧 폭발 당시의 엄청난 열에 의매 만들어진 진공에 의해 후폭풍이 시작 되었습니다. 이 폭풍은 폭심지로 빨려 들어가며 시내 곳곳에서 피어오르고 있던 화염을 동반했고, 운 좋게 남아 있던 많은 생명과 건물들을 태웠습니다.

 

엄청난 에너지를 지니고 있던 폭발의 충격파는 곧 히로시마 상공에 비구름을 만들었고, 이 구름에서는 끈적하고 지저분한 색의 비가 내렸습니다.

 

나중에 ‘검은 비’라고 불린 이 비에는 폭발 충격파에 휩쓸린 각종 먼지와 잔해들에 더해 치명적인 방사능을 포함하고 있었고, 비를 맞은 많은 사람들은 방사능 후유증으로 고통 속에 사망에 이르렀습니다.

 

 

임무를 완수하고 돌아가는 에놀라 게이 안에서 누군가 “전쟁은 끝났다”고 소리쳤죠. 부조종사 로버트 루이스는 “오 주여,우리가 무슨 짓을 한 겁니까”라고 기도했습니다. 13㎞ 높이까지 치솟은 버섯구름은 에놀라 게이가 피폭지점에서 560㎞를 벗어날 때까지 관측이 가능했습니다.

 

일본측 집계에 따르면 이 날 하루, 11만8661명이 현장에서 목숨을 잃었고, 방사능 낙진으로 그해 연말까지 4만5000여명이 더 죽었습니다. 일제에 의해 징집된 군인, 징용 노무자 등 조선인 2만 명도 목숨을 잃었습니다.

 

 

  원폭투하 한달 후 상공에서 찍은 히로시마 시가지.


단 한 번의 공습에 의한 피해로는 사상 최고의 기록이었습니다. 그런데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떨어뜨린 ‘에놀라 게이’에 탑승했던 승무원은 기장 폴 티베츠를 포함해 모두 12명, 이 사람들은 이 날 이후 어떤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갔을까요? 아무리 군인으로서 명령을 수행했다 하더라도 엄청난 인명을 살상하고 죄책감에 시달리지는 않았을까요? 

 

한 때 폴 티베츠 대령을 포함한 몇 명의 승무원이 정신적 고통을 이기지 못해 정신이상이 되었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소문들은 심리학에서 도시전설이라고 부르는데, 이 전설은 사람들의 기대감을 반영하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람들은 원자폭탄을 투하해서 수많은 인명을 살상한 에놀라 게이의 승무원들이 온전할 리 없었을 것이라고 믿고 싶어 했던 것이겠죠.

 

 

 출격 직전의 에놀라 게이의 승무원들.

윗줄 왼쪽부터 지상정비장교 존 포터 중령(미탑승), 항법사 시어도어 J. 밴 커크 대위, 폭격수 토마스 W. 페러비 소령, 기장 폴 티베츠 대령, 부조종사 로버트 A. 루이스 대위, 레이더 담당장교 제이콥 베서 중위. 아랫줄 왼쪽부터 레이더 관제사 조셉 스티보릭 병장, 후미총좌사수 조지 R. 캐런 하사, 무전병 리처드 H. 넬슨 일병, 부기술병 로버트 H. 슈머드 병장, 기술병 와이어트 두전베리 하사.

 

사실 이 소문의 주인공은 폴 티베츠 대령이 아니라 히로시마에 원폭을 투하할 때 기상정찰 임무를 맡고 같이 비행에 나섰던 ‘스트레이트 플러쉬’의 기장 클로드 이덜리 소령이었습니다.

 

그는 히로시마 상공의 기상상태를 정찰하여 원자폭탄 투하 여부를 결정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죠. 그가 'No'라고 한다면 원폭투하는 취소하고 철수하도록 계획되어 있었습니다. 
 

원폭투하 후 이덜리 소령은 엄청난 죄책감에 시달렸습니다. 자기의 결정이 무고한 사람들을 죽였다는 죄책감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는 밤에 잠에서 깨어 끔찍한 비명을 지르곤 했습니다. “폭탄을 투하한다고? 폭탄을 투하한다고? 멈춰! 아이들이 불에 타고 있어!” 이덜리는 여러 차례 술에 취해 행패를 부리다 체포되었고, 심지어 강도 행위로 체포되는 등 결국 가족도 친구도 직업도 모두 잃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에놀라 게이의 승무원들은 어땠을까요? 12명의 승무원들 가운데 현재 생존해 있는 사람들은 기장 폴 티베츠, 항법사 시어도어 J. 밴 커크,  부 무장관 모리스 R. 젭슨 등 3명입니다.

 

이들은 2005년 히로시마 원폭투하 60주년을 맞아 기자들에게 배포한 성명서에서 “원폭의 사용은 반드시 필요했으며, 우리는 아무런 죄책감을 느끼고 있지 않다”고 밝혔습니다.

 

폴 티베츠는 작년 요미우리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폭투하는 전쟁을 끝내기 위해 필요한 조치였다”“나는 일본 시민과 싸운 것이 아니라 사무라이(일본군)과 싸웠다”고 밝혔습니다.

 

그는 또 “나에게 똑같은 상황이 주어진다면, 나는 똑같은 일을 할 것이다”라고 밝혀서 죄책감은 커녕 자신이 했던 일에 대한 자부심까지 느끼고 있다는 인상을 주었습니다. 
 

승무원들은 이러한 입장을 지난 60년 동안 견지해 오고 있었습니다. 유일한 예외는 부조종사 로버트 루이스였는데, 그는 1978년 1년간 심리치료를 받았습니다.

 

원폭투하로 전쟁을 빨리 끝내 수많은 미군을 구할 수 있었다는 자긍심과 무고한 히로시마 시민들을 엄청나게 죽였다는 죄책감에서 고뇌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루이스의 심리치료를 담당했던 월러비 박사는 루이스의 치료 후 다른 승무원들은 어떠한 심리상태로 살아가고 있는가를 면접조사 했습니다. 

  8월 6일 오전 2시 27분, 이륙중인 에놀라 게이에서 인사를 하는 티베츠 대령.

 

기장 폴 티베츠 : 원폭 투하를 결정한 건 내가 아니다. 나는 명령에 따랐을 뿐이다. 전쟁에서 개인을 생각해 본 적도 없다. 원폭투하는 일어날 수 밖에 없었던 전쟁행위의 하나일 뿐이다.
 

폭격수 토마스 W. 페러비 : (에놀라 게이에는 초보적인 컴퓨터가 장착되어 있서 그것을 조작했기 때문에) 내가 원폭을 투하했는지, 컴퓨터가 했는지 잘 모르겠다.
 

레이더 담당 장교 제이콥 베서 : 지나간 일은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후회하지 않을 뿐 아니라, 양심의 가책도 없다.
 

항법사 시어도어 J. 밴 커크 : 전쟁행위는 정당화 시킬 수밖에 없다. 누구나 싸울 때는 이기기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은 다 하는 것이다.

 

인터뷰가 이루어지던 당시 그들은 모두 성공적인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기장 폴 티베츠는 장군으로 전역해서 항공회사의 사장이었고, 레이더 담당 장교 베서는 웨스팅하우스의 사장 자리를 맡고 있었죠. 항법사 벤 커크는 듀퐁의 판매부장, 폭격수 페레비는 부동산 중개업을 하다 은퇴한 상태였습니다. 
 

미국인들은 원폭으로 희생된 숫자를 원폭 투하가 없었을 경우 발생할 수 있는 인명 손실과 비교해 원폭 투하를 정당화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또 침략자 일본은 마땅히 그 대가를 치러야 했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인류의 과학기술은 인간 스스로 그 파괴력을 통제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핵전쟁에는 영광도 긍지도 없습니다.

 

참담한 파괴만 있을 뿐이죠. 핵 사일로의 발사 요원들이나 전략 원잠의 승조원들을 보면 군인이라기 보다는 실험실의 차가운 과학자들 같은 느낌을 받기도 합니다.

 에놀라 게이 승무원들의 무감각을 보면 인류를 한 순간에 파멸로 몰아갈 무기를 관리하는 것도 결국은 인간이라는 사실에 가슴 한 구석이 서늘해 집니다.

(에놀라 게이 승무원들의 심리자료는 사회심리학 유멘시아 Umentia.com 블로그에서 참조했습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 쿠데타 미수와 이른바 '종전조서'

 

 

  이른바 천황의 '종전조서' 방송을 듣고 울음을 터트리는 일본인들.

8월 10일 새벽, 일본 천황과 최고전쟁지도 회의 구성원 등이 참여한 어전회의가 2시간의 격론 끝에 연합국의 포츠담 선언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합니다. 아침 7시, “천황의 대권에 변경을 가하는 식의 요구는 포함하지 않는다는 양해 아래“ 포츠담 선언을  수락한다는 메시지가 중립국의 스위스와 스웨덴 주재 일본공사에게 전해집니다. 
 

그런데 일본군 일부에서 항복파 인사들을 제거하고 연합국과의 전쟁을 계속하기 위한 쿠데타 계획이 세워집니다. 도쿄의 경비책임을 받고 있는 동부군과 근위사단 병력을 동원해 천황이 기거하는 궁성을 차단하고 계엄령을 발동해 국가보전(천황제의 존속)에 대한 연합국의 확증을 받을 때까지 항복하지 않고 항전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8월 13일, 연합국 정부로부터 일본정부가 문의한 ‘국체보장 문제에 대한’ 정식 회답이 도착합니다. 회답내용 중에 ‘subject to'라는 문구를 놓고 각료회의에서 의견이 분분합니다. 이 문구는 일본은 ’연합국의 관리하에 들어간다‘고 해석할 수 있는데, 이것은 일본제국의 해체와 천황제의 폐지를 뜻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죠. 
 

8월 14일 오후 8시30분, 항복 선언문인 이른바 종전조서가 완성 됩니다.  그리고 내일 오전에 중대발표가 있을 것이니, 국민들은 모두 경청하라는 예고 방송이 나갑니다. 자정 직전, 히로히토 천황이 “짐은 곰곰이 세계의 대세와 제국의 현재 상황을 감안하여...”로 시작되는 종전조서 녹음을 합니다.

 

같은 시각 소장파 장교들이 육군대신을 찾아가 쿠데타에 동조를 요구하다가 거부당하고, 모리 다케시 근위사단장을 찾아가 병력동원을 강요하다가 사단장이 거부하자 일본도로 그를 참살합니다.

 

그리고 사단 명령서를 위조, 근위사단 병력을 동원하여 황궁을 포위하고 궁성에 난입, 천황의 항복 선언이 담긴 녹음테이프를 찾기 시작합니다. 아나미 육군대신은 ‘불충을 통감하며’ 자살하고 항복파 인사들은 급히 몸을 피합니다.
 

일본 해군 아쓰기 302 항공대도 사령관 고조노 대좌가 장교들을 모아 놓고 정부의 무조건 항복을 무시하고 철저항전을 다짐합니다. 이들은 ‘황군의 사전에 항복이란 절대 있을 수 없으며, 전쟁은 강인한 정신력으로 수행하는 것’이라고 믿는 인간들이었죠. 촌극의 하이라이트는 요코하마 경비대장 사사키 대위가 이끄는 병사들과 요코하마 공고 학생들로 구성된 소위 ‘국민신풍대(國民神風隊)’ 40여명의 도쿄 진입 미수 사건입니다. 이들은  각료회의장을 습격하여 스즈키 수상을 암살하고 본토결전이라는 허황된 계획을 실천에 옮기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근위사단 장교들의 쿠데타 시도는 동부군 사령관 다나까 대장의 등장으로 어이없이 끝나 버립니다. "너희들은 누구의 군대인가!" 라는 한 마디 호통으로 소장파 장교들은 거짓말처럼 풀이 죽어버렸고, 8월 15일 오전 근위사단 병력은 궁성에서 철수 합니다.
 

우여곡절 끝에 8월 15일 정오 , 일본 천황 히로히토의 항복 선언문이 4분37초 동안 라디오를 통해 일본과 당시 일본 식민지 전역에 방송되었습니다.

 

그러나 소위 천황의 ‘옥음(玉音)방송’이라고 부르는 항복 선언문의 공식 명칭은  ‘패전조서’ 가 아닌 ‘종전조서’ 이며, 그 어디에도 ‘항복’이나 ‘패배’라는 표현은 없었습니다.

 

전쟁에 패하여 작성된 것이 아니라 전쟁을 끝내며 작성한 것으로 되어 있는 이 문서는 사실 제목부터가 기만적입니다. 

 

 객관적으로 사태를 명료하게 규정하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으면 남을 기만할 뿐만 아니라 스스로도 그 기만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됩니다.  말로 최면을 건다고 해서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닌거죠.


 

일본 천황 히로히토

 

조서는 오히려 국가의 안위와 국민들의 고통을 덜기 위해 종전이라는 성단(聖斷)을 내렸다는 태도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더욱 어처구니 없는 것은 원폭 등을 거론하며 스스로가 피해자임을 주장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종전조서는  "너희 신민"은 일본의 "불멸을 믿고" 천황제라는 "국체를 수호"하는 가운데 신일본 건설에 매진할 것을 명하는 일본 천황의 메시지를 담고 있을 뿐이네요.  국가의 정체성을 의미하는 '국체'라는 의미도 우익들에겐 '천황제'와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진정한 국가 정체성인 국민은 그들의 안중에는 없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군대의 보유와 (자위대를 군대가 아니라고 믿는 사람은 없겠지만) 교전권을 회복한 ‘보통 국가’를 만들기 위한 일본 보수우익의 목소리와 60여년 전의 쿠데타 미수세력은 근복적으로 맥이 닿아 있습니다.

 

 

 

1945년 9월 2일 - 일본, 미주리 함상에서 항복문서 조인

 

 

 

1945년 9월 2일 아침, 동경만(灣)에 정박한 미 해군 전함 미주리(U.S.S ‘Missouri’, BB-63) 함상에는 92년 전 일본을 무력으로 개항 시킨 페리 제독의 기함에 걸렸던 바로 그 성조기가 바람에 나부끼고 있었습니다연합군 최고 사령관 맥아더 원수의 짤막한 연설을 시작으로 일본의 항복문서 조인식이 열립니다. “연합군 최고사령관인 저는, 제가 대표하는 국가의 관례에 따라, 항복 조항이 완전히, 즉각적으로, 충실하게 이행되도록 모든 조치를 취하면서, 정의와 관용으로 책임을 수행해 나갈 것임을 확실히 밝혀둡니다.” 맥아더가 연설을 마치고 고개짓으로 신호를 하자 일본정부를 대표한 ‘시게미쓰’ 외무대신이 보좌관과 함께 앞으로 나와 모자를 벗어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장갑을 벗었습니다.

테이블 위에는 연합군 측에서 미리 준비한 두 개의 항복문서가 놓여 있었고, 시게미쓰는 첫 번째 문서에 서명한 뒤 두 번째 문서에 서명하기 앞서 잠시 머뭇거립니다. ‘조지프 스틸웰’ 장군이 다가가서 손가락으로 어디에 서명해야 하는지 가리켰고, 맥아더는 잠시 경멸의 눈초리로 시게미쓰를 바라보았습니다. 

 

일본의 항복 문서.

시게미쓰가 떨리는 손으로 서명한 항복문서에는

첫째, 일본군과 일본의 지배하에 있는 모든 무장 세력은 즉각 무조건 항복할 것.

둘째, 연합군 최고 사령관의 명령에 따를 것.

셋째, 일왕과 일본 정부는 포츠담 선언의 조항을 성실하게 이행할 것.

넷째, 일왕과 일본 정부의 권한은 연합국 최고사령관의 통제 아래에 둘 것

등의 내용이 명시되어 있었죠.

시게미쓰와 일본군을 대표한 육군 참모총장 ‘우메즈 요시지로’가 서명한 항복문서에 연합군 총사령관 자격으로 맥아더 원수가 서명한 뒤, 미국, 중국, 영국, 소련, 호주, 캐나다, 프랑스 등 승전국 대표들이 차례로 서명합니다.

이로써 2차 세계 대전은 공식적으로 끝나게 되죠. 인류역사상 전례가 없던 대참화가 막을 내리는 순간치고는 너무 싱거웠습니다. 맥아더의 연설로부터 연합국 대표들의 서명이 끝날 때까지의 시간은 단 10분 남짓에 불과했으니까요. 하지만 각국 대표들이 항복문서에 서명한 만년필의 잉크 한 방울, 한 방울은 수 백, 수 천 만 인류의 피로 이루어진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이 자리에 한국 대표는 없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세계 그 어느 민족보다도 일본 제국주의의 가혹한 수탈과 착취에 시달리면서도, 끈질긴 무장 투쟁을 이어왔던 한국 대표가 제외되었다는 사실은 이후 한반도에서 벌어질 비극을 예고하는 것과 같았습니다.

프랑스가 대전 초기에 독일에 항복하면서 실제 전쟁에 기여한 바가 보잘 것 없었지만 승전국의 지위를 차지한 것과는 달리 한국인들에겐 아예 그럴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대표 몇 명이 일본의 패망 직후 여의도에 미군 군용기로 도착했다가 일본군들에게 쫓겨 다시 상해로 돌아갔다는 기록은 당시 임정의 지위가 국제적으로 얼마나 보잘 것 없었는지를 잘 말해 줍니다.  

 

 

  연미복에 지팡이를 짚고 있는 사람이 시게미쓰 일본 외무대신.

하지만, 일본의 항복 조인식장은 한국인들의 독립에 대한 피어린 투쟁의 흔적을 말없이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일본 대표 시게미쓰 외무대신은 지팡이 없이는 걸을 수 없는 심한 장애를 가지고 있었는데, 1932년 4월 29일, 상해 홍구 공원에서 있었던 윤봉길 의사의 의거에 의한 것이었죠.

상해 주재 일본 총영사였던 시게미쓰는 바로 이날 윤 의사의 폭탄 공격으로 한 쪽 다리를 잃었던 것이었습니다. 전 세계인들이 지켜보는 항복 조인식장에서 시게마쓰의 절뚝거리는 걸음걸이는 한민족이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 통치에 항거하고 독립을 위해서 투쟁했었다는 사실을 똑똑히 증명하는 것 이었습니다

 

 

 

 

 
매헌 윤봉길 (1908.6.21~1932.12.19)

 

 

 

1945년 9월 8일, 미 육군 7사단 인천 상륙

 

서울 시내로 진입하는 미 7사단 32연대 병사들.

 

\945년 오늘, 하지 중장이 지휘하는 미 제 24군단 예하 제 7 보병 사단이 인천에 상륙합니다. 당시까지도 치안을 장악하고 있던 일본 경찰은 미군을 환영하러 부두에 나왔던 노조 지도자 권병권과 평화 운동가 이석구 등 2명을 사살합니다. 

 

광복 이후 한반도에서의 첫번째 정치적 희생자가 발생한 곳은 인천 부두였습니다.

다음 날 오후, 서울의 조선 총독부 건물에서 미 육군 남조선 주둔 사령관 하지 중장과 조선 총독 아베 사이에 항복 문서 조인식이 열립니다. 조선 총독부에 게양되었던 일장기가 내려가고 그 자리에 성조기가 올라갔죠.

 

미군의 한반도 진주는 38도선 이남에서의 일본군 무장해제 등의 전후 처리가 목적이었지만, 이후 3년간의 미군정은 38선 이북의 소련 군정과 함께 한반도의 영구분단이라는 비극의 씨앗이 됩니다.

 

군정장관직을 겸임하게 된 하지 중장은 전형적인 야전 지휘관이었고, 무뚝뚝하고 직선적 접근방식을 통해 문제를 풀어나가는 것으로 유명했죠. 그래서일까요? 다음은 한반도 진주 다음 날인 9월 9일 맥아더 극동군 총사령관 명의로 발표된 군정 포고문입니다.

 

 

구 조선 총독부에 게양된 성조기.


- 태평양방면 미군 육군부대 총사령부 포고 제1호 - 조선인민에게 고함

태평양방면 미군 육군부대 총사령관으로서 나는 이에 다음과 같이 포고함.

 

일본국 정부의 연합국에 대한 무조건 항복은 우 제국(諸國) 군대 간에 오랫동안 속행되어온 무력 조인한 항복 문서 내용에 의하여 나의 지휘 하에 있는 승리에 빛나는 군대는 금일 북위 38도 이남의 영토를 점령한다.

 

조선 인민의 오랫동안의 노예상태와 적당한 시기에 조선을 해방 독립시키리라는 연합국의 결심을 명심하고 조선인민은 점령목적이 항복문서를 이행하고 자기들의 인간적 종교적 권리를 보호함에 있다는 것을 새로이 확신하여야 한다.

 

태평양방면 미군 육군부대 총사령관인 나에게 부여된 권한에 의하여 나는 이에 북위 38도 이남의 조선과 조선 주민에 대하여 군사적 관리를 하고자 다음과 같은 점령 조건을 발표한다.

 

제1조 북위 38도 이남의 조선 영토와 조선 인민에 대한 통치의 전권한은 나의 권한 하에서 실시한다.

제2조 정부의 전 공공(公共) 및 명예직원과 사용인 및 공공복지와 공공위생을 포함한 전 공공사업기관

      의 유급 혹은 무급 직원 및 사용 중인 중요한 사업에 종사하는 기타의 모든 사람은 새로운 명령

      있을 때까지 그의 정당한 기능과 의무를 실행하고 모든 기록과 재산을 보존 보호하여야 한다.  
제3조 모든 사람은 급속히 나의 모든 명령과 나의 권한 하에 발한 명령에 복종하여야 한다. 점령부대

      에 대한 모든 반항행위 혹은 공공안녕을 문란케 하는 모든 행위에 대하여는 엄중한 처벌이 있을

      것이다.
제4조 제군(諸君)의 재산소유 권리는 존중하겠다. 제군은 내가 명령할 때까지 제군의 적당한 직업에

       종사하라.
제5조 군사적 관리를 하는 동안에는 모든 목적을 위하여서 영어가 공식 언어이다. 영어 원문과 조선어

       혹은 일본어 원문 간에 해석 혹은 정의에 관하여 어떤 애매한 점이 있거나 부동(不同)한 점이 있

        을 때에는 영어 원문이 적용된다.  
제6조 새로운 포고, 포고규정 공고 지령 및 법령은 나 혹은 나의 권한 하에서 발출될 것으로 제군에 대

       하여 요구하는 바를 지정할 것이다.

-1945년 9월 9일 태평양방면 미군 육군부대 총사령관 더글라스 맥아더

(원문을 오늘날의 한글 맞춤법에 맞게  고쳐 썼습니다.)


당시 일본군이 쓰던 용산 병영에는 미 7사단 1만5천명의 병력이 주둔했고, 미군정 종식 후 잠시 한국을 떠났던 미군은 한국전쟁 때 다시 돌아와 오늘의 용산 기지를 이루고 있습니다. 

 

 

 

1945년 9월 9일 - 아베 조선 총독, 항복문서에 서명

 

 

1945년 9월 9일 오후 4시, 조선 총독부 제1회의실에서 아베 노부유키(阿部信行) 총독이 미 제24군단의 ‘존 하지’ 중장과 제7함대 사령관 ‘킨케이드’ 제독 등 미군 장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항복문서에 서명을 합니다.

 

이미 1주일 전 동경만에 정박한 미주리 함상에서 공식적인 항복 조인식이 있었지만, 이날 항복문서의 효력은 38선 이남에만 적용된다는 것이 달랐습니다.  오키나와에 주둔하고 있던 미군은 바로 전날인 9월 8일 인천을 통해 한반도에 상륙했던 터였습니다.

잠시 후, 총독부 앞뜰에서는 8월 15일 일왕의 항복 선언 뒤에도 23일간이나 게양되어 있던 일장기가 내려지고 성조기가 올라갑니다. 한반도의 통치권이 일본 제국주의의 총독부에서 미군정으로 넘어가는 순간이었습니다.   

 

 

1945년 9월 9일 오후 4시 35분, 총독부 앞뜰 국기 게양대에 성조기가 올라가고 있습니다.

하루 전, ‘더글러스 맥아더’ 미 태평양 방면 육군 총사령관은 “북위 38도선 이남의 조선 영토를 점령한다. 북위 38도 이남의 조선인민에게 대하여 군사적 권리를 확립하고 조선인민에 대한 통치의 전권한은 당분간 본관의 권한 하에 시행된다.”는 내용의 포고문 제 1호를 발표합니다.

북위 38도선은 미소 양국이 한반도를 점령하고 있는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위해 ‘얄타’ 비밀 협정에서 군사적 편의상 설정한 것이었지만, 결과적으로 한반도의 분단을 가져왔죠.  

 

 

 

조선 주둔 일본군 병력이 철수를 위해 이동하고 있습니다.

총독부의 항복 이틀 뒤인 9월 11일, 하지 중장은 미군정의 시정방침을 밝히는 기자회견을 열었습니다. 그는 치안수습 대책에 대한 한 기자의 질문에 “일제 경찰이 악질적이었던 것은 나도 잘 알고 있고 그 대책을 강구하고 있다. 이에 일반의 협력이 있기를 바란다. 각자가 신중하고 한국의 장래를 생각하는 태도로 단속하고 사회질서를 유지한다면 경찰은 그리 필요한 것이 아니다. 압제와 악정의 표본이었던 기왕의 경찰은 곧 개편하려 한다.”고 밝혔습니다.

그러나 하지 중장의 말과는 다르게 미군정은 조선총독부를 인정하고 그 기관들을 남한 통치에 활용하는 어리석음을 범했습니다.

남한에서 장차 있을지도 모르는 좌익 폭동을 막으려면 기존의 총독부 조직을 이용하는 것이 효율적이라고 생각했던 것이죠. 죄 값을 치르지 않은 수많은 친일파가 친미파로 변신하는 기회를 제공했던 것입니다. 


 

 

1945년 11월 11일 - 한국해군 모체 해방병단 창설

바다로 가자 (작사 :손원일 / 작곡:홍은혜)

 

1. 우리들은 이 바다 위에 이 몸과 마음을 다 바쳤나니 바다의 용사들아 돛 달고 나가자 오대양 저 끝까지. 나가자 푸른 바다로 우리의 사명은 여길세. 지키자 이 바다 생명을 다하여.

 

2. 우리들은 나라위하여 충성을 다하는 대한의 해군 험한 저 파도몰려 천지진동해도 지키자, 우리바다. 나가자 푸른 바다로 우리의 사명은 여길세. 지키자 이 바다 생명을 다하여.

 

3. 석양의 아름다운 저 바다 신비론 지상의 낙원일세. 사나이 한평생 바쳐 후회없는 영원한 맘의 고향. 나가자 푸른 바다로 우리의 사명은 여길세. 지키자 이 바다 생명을 다하여.

 

1945년 11월 11일, 오전 11시 정각 서울 종로구 관훈동 옛 충훈부 건물에서 한국 해군의 전신인 해방병단(海防兵團)이 창설됩니다.

당시 남한을 통치하던 미군정청 운수부장 칼스텐 소령의 요청으로 해안 및 도서 순찰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70명의 인원으로 출범한 해방병단은, 장차 한국이 독립하면 정식 해군으로 개편한다는 전제아래 출범한 준군사 조직이었죠.

 고 손원일 제독 (1908~1980).


해방단의 창설에는 초대 해군참모총장을 지낸 고 손원일 제독의 역할이 절대적이었습니다. 손 제독은 임시정부 의정원장을 지낸 독립투사 손정도 목사의 장남으로 상하이 중앙대학교 항해과 출신의 국제 항해사였습니다.

 

중국과 독일 상선의 항해사와 부선장 등으로 일하면서 바다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절감한 그는 광복 직후 귀국해 해사대(海事隊)를 결성, 장차 신생 조국의 바다를 지키는 해군으로 발전시키겠다는 꿈을 꾸고 있던 터였습니다.  

 

초창기 해군의 훈련 모습, 옛 일본군이 남기고간 제복과 무기로 훈련을 받았습니다.

 

해방병단의 창설일이 11월 11일이었던 것에는 특별한 의미가 있는데요, 아라비아 숫자 11을 한자로 내려 쓰면(十一) 선비 사(士)자가 되는데 이것은 손 제독이 외국 상선을 타면서 영국·독일 등의 선진 해군에게서 느낀 감명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특히 그는 자신의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 속에서도 약자를 먼저 구하고 자신은 희생하는 영국 해군의 신사도 정신에 매료되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 경위로 그는 해방병단에 무용(武勇)·성실·명예·신의·약자 보호라는 신사도 덕목을 강조 하였습니다.

 

해방병단은 후일 조선해안경비대로 발전했다가 1948년 정부수립 후 탄생한 대한민국 해군의 모체가 됩니다.

 

처음에는 바다를 지키기는커녕 바다에 나갈 배를 구할 수 없어서 해군 장병들이 박봉을 털고, 해군 부인회의 바느질 품삯까지 모아 미국으로부터 450톤급 중고 초계함을 구입하는 등 눈물겨운 역사를 겪고 성장한 우리 해군은 이제 자체 건조한 최신예 잠수함·구축함·호위함·상륙함을 갖춘 정예 해군으로 거듭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해방병단이 탄생한 11월 11을 우리 해군의 창설일로 기념하고 있습니다

 

2006년 6월 9일 진수한 1800톤급 잠수함 손원일함.

 

 

 

1945년 11월 20일 - 뉘른베르크 전범재판 시작

 

 

“인류 사상 최초로 세계 평화를 위협한 범죄를 재판에 붙이게 된 데 엄중한 책임을 느낀다." 독일의 전쟁 지도자들에게 전쟁의 책임을 묻기 위한 사상 최초의 군사 재판이 1945년 오늘, 독일 뉘른베르크에서 개정되었습니다.

 

재판의 수석 검사를 맡은 ‘로버트 잭슨’ 미국 대법원 판사의 목소리는 카랑카랑했습니다. 뉘른베르크는 나치 집권기 전당대회의 중심지였습니다.

 

1935년에는 유대인 말살을 위한 인종법 '뉘른베르크 법령'이 이곳에서 공표되었고, 많은 유태인과 반나치 정치범이 처형당한 곳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곳에서 열린 재판은 나치의 반인륜적 범죄를 단죄한다는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었지요.  

 

 

재판을 받고 있는 한스 프랑크 전 폴란드 점령지 총독.

 

2차 대전 승전국인 미국, 영국, 소련, 프랑스 4개 연합국이 주관한 재판에서는 나치 독일의 부총통 ‘루돌프 헤스’, 외무장관 ‘요하킴 폰 리벤트로프’, 공군 원수 ‘헤르만 괴링’을 비롯한 24명의 나치 고위 관료와 독일군 장성들이 반 평화 범죄(공격적 전쟁 유발), 반 인류 범죄(인종 혐오), 전쟁 범죄, 전쟁발발 음모죄 등 4가지 죄목으로 기소되었습니다.

 

종전 후 만들어진 ‘국제군사재판 조례’에 의해 소집된 이 재판은 “범죄 행위 이전에 범죄와 형벌을 미리 법률로 규정해야한다”는 ‘죄형 법정주의’에 어긋난다는 피고 측의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죠. 재판소는 미국, 영국, 소련, 프랑스 등 4개국이 각각 1명씩 임명한 재판관으로 구성되었고, 재판장에는 영국의 ‘제프리 로렌스’ 경(卿)이 임명되었습니다.

 

또 각국이 1명씩 임명한 주임검찰관 4명으로 소추위원회를 구성하였고, 피고 측  변호사들은 전원이 독일인이었습니다. 

 

 

제프리 로렌스 재판장.

사상 최대의 인명 피해와 유태인 대학살이란 금세기 최악의 범죄를 단죄하는 역사적 재판은 11개월간 계속되었으며, 모두 403회의 공판이 열렸습니다.

 

1946년 9월. 행방불명으로 궐석 재판을 받은 ‘마르틴 보르만’(히틀러의 비서)을 포함, ‘헤르만 괴링’ 등 모두 12명에게 사형이 선고됩니다. ‘루돌프 헤스’를 포함한 3명은 종신형, 3명은 무죄 석방되고, 나머지는 10~20년형을 받습니다.  

 

전범들이 갇혀 있던 뉘른베르크 형무소.

 

10월 16일 새벽, ‘요하킴 폰 리벤트로프’ 전 외무부 장관을 시작으로 사형이 집행되었습니다. 교수대 계단을 오르며 그는 “세계평화를 빈다”는 짤막한 유언을 남깁니다.

 

유태인 대학살의 이론적 배경을 제공했던 ‘알프레드 로젠베르크’ 전 동부점령지 관할 장관은 아무 말도 없이 교수대에 올랐고, ‘빌헬름 프릭’ 전 내무부 장관은 교수대에 오르지 않으려고 몸부림쳤습니다.

 

빌헬름 카이텔 독일 육군 원수는 “2백 만명 넘는 젊은이가 조국을 위해 죽었다. 나도 이제 내 아들들을 따라 간다”라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사형 언도를 받은 전범 중 단 한 사람, ‘헤르만 괴링’만이 교수대에 오르지 않았습니다. 사형집행 직전 몰래 감방에 반입한 청산가리로 음독자살했기 때문입니다.  

 

처형 직전 음독자살한 헤르만 괴링 전 공군 원수.


1946년 12월부터 1949년 3월까지 열린 2차 전범재판에서는 유태인 학살에 관여한  의사, 법률가, 관료 등 185명이 기소되어, 그 중 25명에게 사형, 20명에게 무기징역이 선고되었습니다. 


 

 

1945년 12월 5일 - 군사영어학교 개교

 

 

조선 국방경비대의 행진 모습

 

1945년 오늘, 미 군정청에 의해 '군사영어학교' (Military Language School)가 설치됩니다. 개교식에는 미군정장관 '하지' 중장과 군정청 경무부장 '조병옥'이 참석하여 축사를 했습니다.  서울시 서대문구 냉천동 감리교신학대학의 건물을 빌려 설립된 군사영어학교는 애초에 '기초적인 군사영어 해독이 가능한 미군 지휘관의 통역관'을 양성하기 위한 교육시설이었습니다.

학생들은 영어실력에 따라 A,B,C,D 등 4개반으로 나누어 군사 영어 이외에 국사, 참모학, 소총 분해, 자동차 운전 등의 교육을 받았죠. 하지만 군사영어학교의 설립에는 이런 실용적인 목적 이외에 해방이후 난립했던 좌, 우익 사설(私設) 군사 단체들을 정리하겠다는 미 군정의 의도도 있었죠. 국군의 역사에서 군사영어학교가 특별한 의미를 갖는 것은 바로 이 학교에서 건군의 주역들이 배출되었기 때문입니다.


당초 미 군정은 군사영어학교의 정원을 60명으로 예정하여 광복군 출신 20명, 일본군 출신 20명, 만주군 출신 20명으로 할당하여 학생을 모집할 계획이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중국에 있던 광복군은 자신들이 개선하여 건군의 핵심을 이루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여 군사영어학교에 참가하는 것에 미온적인 태도를 보였고, 이 때문에 군사영어학교 학생의 대부분은 일본군이나 만주군 출신들이었습니다.

 

 

 

초창기 조선 국방 경비대 장교(좌)와 병사(우)의 복장

 

실제 군사영어학교를 통해 임관한 장교 110명의 이전 경력을 살펴보면 일본군 출신이 압도적으로 많아 일본육사 출신이 12명, 학병(학도특별지원병, 명칭과는 달리 대부분이 강제 징집이었던) 출신이 72명, 지원병 출신이 6명이었고, 만주군 출신이 18명, 중국군 출신이 2명이었습니다.

 마땅히 건군의 주역이 되어야 했을 광복군 계열이 불참했던 것은 두고두고 아쉬운 대목이었습니다. 또 미소의 신탁통치에 대한 찬,반 논란으로 군사영어학교 학생들도 양분되어 서로 상대방에 대한 폭력을 행사하는 일도 비일비재했죠. (실제 이 학교 출신 임관자 중 상당수가 이른바 '숙군' 과정에서 희생되었습니다)  

 

1946년 5월 1일 개교한 조선 경비사관학교 정문


군사영어학교는 이듬 해인 1946년 1월, 국군의 전신인 '남조선 국방 경비대'가 창설되면서 지금의 육군사관학교가 자리한 태릉으로 이전하여 4월말 폐교(5월 1일 조선 경비 사관학교 개교)할 때까지 모두 110명의 장교를 배출하였습니다.

 

군사영어학교 출신들은 이전 군경력에 따라 대령에서 소위까지 계급을 받아 임관하였고, 전국 각지에서 새롭게 창설된 국방 경비대의 기간요원으로 활약하게 되죠.  군사영어학교 출신 임관자 110명 중 한국군의 별을 단 사람은 모두 68명에 이릅니다.

 

 

1945년 12월 21일, 조지 패튼 장군 사망 
 

 조지 스미스 패튼 장군(George Smith Patton Jr. 1885.11.11~1945.12.21).

 

2차 대전 당시 미 제 3군(Third Army)을 지휘하여 추축국 군대를 격파한 미국의 맹장 조지 패튼 (George Smith Patton Jr.)장군이 1945년 12월 21일 새벽, 독일 하이델베르크의 군병원에서 사망합니다. 향년 60세, 사인은 교통사고로 인한 색전증(embolism, 塞栓症)이었습니다.

 

1885년 캘리포니아에서 태어난 패튼의 조상은 남부 버지니아로 이주한 스코틀랜드 계였으며, 남북전쟁 당시 윈체스터에서 벌어진 전투(Battle of Opequon)에서 전사한 ‘조지 스미스 패튼’ 대령이 그의 할아버지였습니다.

패튼의 큰아버지도 ‘게티즈버그’(Battle of Gettysburg) 전투에서 입은 부상으로 사망합니다. 패튼의 어머니는 집안에 항상 남북전쟁 당시의 남군 총사령관이었던 ‘로버트 리’ 장군과 ‘스톤월 잭슨’ 장군의 초상화를 걸어두었고, 어린 패튼에게 이들은 거의 성부와 성자로 여겨졌을 정도였습니다.

이런 가풍 탓에 어렸을 때부터 그는 역사에 전쟁에 대한 방대한 책들을 접할 수 있었고, 장래 희망 또한 군인이었죠.


웨스트포인트 생도 시절의 패튼.

버지니아 군사 학교에서 1년을 수학한 그는 미 육군 사관학교 ‘웨스트포인트’로 진학해서 군인의 꿈을 키워갑니다. 패튼은 난독증이 있는데다 수학성적이 좋지 않아 유급을 당한 적도 있지만, 1909년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기병 소위로 임관합니다.

기병 장교로서 탁월한 능력을 지녔던 그는 1912년 스톡홀름 올림픽 ‘근대 5종’ 경기에 미국 국가대표 선수로 참가해 5위의 성적을 거두기도 했죠.


기병 장교였던 패튼이 장차 전장의 주역으로 떠오르게 될 전차의 가능성에 주목하게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1차 대전당시 유럽 원정군 사령관 ‘퍼싱’ 장군의 부관으로 프랑스 전선에 종군한 그는 교착상태의 참호전을 타개하기 위해선 장갑차량이 주축이 되어 전선을 돌파해야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죠.

1917년 11월, 미 육군 최초의 기갑부대가 편성이 되고 패튼은 이 부대의 지휘를 맡게 됩니다. 이듬해 9월 세인트 미히엘 지역에서 첫 기갑전투를 치른 패튼은 이후 벌어진 전투에서 부상을 입고 뛰어난 용맹성을 평가 받아 공로훈장과 십자무공훈장을 받고 대령으로 승진합니다.


 1차대전 프랑스 전선에서의 패튼 소령.

 

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귀국한 패튼은 20여 년간 여러 보직을 거치면서 장차 벌어질 전쟁에서 기갑전의 중요성과 기갑부대의 창설을 일관되게 주창했지만 전후 축소된 군사예산과 대공황의 여파로 전차의 개발과 기갑전술 발전은 벽에 가로 막혀 있었죠.

1939년 2차 대전이 터지고, 폴란드와 프랑스가 독일 육군이 펼친 전격전으로 어이 없이 무너지자 미국은 황급히 기갑전력을 확충하기 시작합니다. 패튼은 1940년 제 1기갑여단의 지휘를 맡았고 이 부대는 이듬해 제 1기갑사단으로 확대개편 됩니다.

진주만 기습으로 미국이 2차 대전에 참전하게 되자 전차 훈련소 교장으로 부임한 패튼은 미군의 기갑전 교리를 확립하고 본격적으로 기갑부대를 양성하죠.


 패튼 장군은 1941년 라이프지의 모델이 되기도 했습니다.하지만, 북아프리카로 파병된 미 지상군이 벌인 최초의 작전은 참담할 정도였습니다. 1943년 캐서린 패스 전투(Battle of the Kasserine Pass)에서 롬멜 장군의 독일 아프리카 군단에게 대패한 미군은 1943년 3월 6일, 패튼을 중장으로 진급시켜 제 2군단의 지휘를 맡깁니다.

 

군단장에 부임한 패튼은 무기력과 패배의식에 젖어 있던 장병들을 다그칩니다. 역대 미군 장성중에 가장 거칠고 극단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던 그는 부하들에게 직설적이고 때론 품위 없는 욕설을 가차 없이 쏟아냅니다.

 

“어떤 놈이건 간에 전쟁에서 죽고 난 뒤에 조국을 위해 죽었노라고 하는 놈은 필요 없다. 적을 죽이고 그놈에게 조국을 위해 죽었노라고 말하게 해라.”

 

 

튀니지아의 사막을 질주하는 미군의 M3 중전차.

 

규율만큼 군인을 단련시키는 것이 없다고 확신한 그는 휘하의 부하 전체, 심지어는 군의관과 취사병에게까지 철모를 쓰게 하였고 넥타이를 착용하도록 했습니다. 모든 장병들은 매일 면도를 해야 했으며, 규정대로 단정하게 군복을 착용해야 했죠. 예외는 없었습니다.

이런 방침 때문에 패튼의 인기는 사라져갔지만, 잃어버렸던 군인의 자존심은 되살아났습니다. 오랫동안 패튼 장군의 별명이 된 ‘피투성이 고집불통 늙은이’(Old Blood and Guts)는 이 시기에 붙여진 것이죠.

그는 고함만 지른 것이 아니라 병사들과 뒤엉키며 솔선수범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죠. 진흙탕에 빠진 트럭을 병사들과 함께 밀어 올렸고, 고장난 탱크를 고치려고 전차병들과 함께 전차 밑으로 기어들어가 진흙투성이, 기름투성이가 되기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변화의 결과는 곧 나타났습니다. 1943년 3월 중순 미군은 반격을 감행하여 독일군을 격퇴시켰고, 미군과 몽고메리 장군의 영국군 사이에 끼어 압박을 받던 독일 아프리카군단은 철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북아프리카에서의 성공으로 패튼 장군은 제 7군의 지휘를 맡아 1943년 7월 시실리 침공에 나섭니다. 천성적으로 지기 싫어하는 그의 성격 탓에 시실리 작전 내내 영국군의 몽고메리 장군과 경쟁이라도 벌이듯 군대를 몰아댑니다. 미군들 사이에 그의 인기는 대단했지만, 다른 연합군들 사이에는 악감정이 싹텄죠.

 영국군의 몽고메리 원수와 악수하는 패튼, 둘 다 서로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상승일로에 있던 그의 경력에 최대의 오점을 남긴 것도 시실리에서였습니다. 야전병원을 방문 중이던 패튼이 전투피로증(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Post-Traumatic Stress Disorder)에 걸려 입원하고 있던 2명의 병사를 겁쟁이라며 구타하는 일이 벌어졌고, 이 구타사건이 발단이 되어 지휘권까지 박탈당합니다.

1944년 1월 영국으로 파견된 패튼은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위장하기 위해 서류상으로만 존재하는 유령부대의 지휘를 맡습니다. 싸움꾼 패튼이 다시 지휘봉을 휘두를 수 있었던 것은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성공한 후, 제 3군 사령관을 맡으면서 부터였습니다.

1944년 8월1일 그는 아브랑셰에서 교두보를 돌파, 보름 만에 팔레즈-아르장탕 갭 지역에서 10만 명의 독일군을 포위했고, 동쪽으로 진군, 8월 말에는 사르 강에 도달했죠. 가장 탁월한 야전군 지휘관이라는 명성을 얻은 것도 이 무렵의 일입니다.


 "전차들은 연료가 있는 한 앞으로 달려가기만 하면 돼. 가솔린이 떨어지면 전차에서 내려서 뛰어가!" 패튼 장군의 전술은 기갑부대의 기동력과 충격적 기습 공격전에 초점을 집중하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전차들은 독일군이 새로운 방위선을 형성하지 못하도록 가능한 한 재빨리 공격을 퍼부었고, 그의 전진속도는 때때로 독일군의 보급선이 새로 형성된 전선에 적응하는 것보다 더 빨랐을 정도였죠.

그는 필요하다고 생각되면 때때로 상부의 명령도 무시하고 공격을 밀어 붙였고 그가 가진 모든 자원을 전투에 쏟아 부었습니다. 사람들은 가끔 그의 이런 저돌적인 면모를 지나칠 정도로 신중했던 몽고메리 장군과 비교하곤 합니다.

 

  2차대전 당시 유럽에 주둔한 미군 고위 장성들,

앞줄 좌측에서 두 번째가 패튼, 네 번째가 아이젠하워 총사령관.

 

종전을 반년 앞둔 1944년 12월, 독일군 최후의 대공세가 벨기에와 룩셈부르크 지역에 가해지죠. 벌지 전투(Battle of the Bulge)로도 알려져 있는 이 아르덴 대공세에는 독일군 25만 병력이 투입되어 곧 전쟁을 끝내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꿈을 꾸고 있던 연합군 장병들의 허를 찌릅니다.

연합군의 취약부를 돌파한 독일군은 뮤즈(Meuse) 강 방면으로 깊숙이 진군하고 바스토뉴(Bastogne)에 고립된 미 101공수사단은 전멸할 위기에 처합니다. 전례 없는 혹한에다 날씨도 좋지 않아 절대 우세를 자랑하던 연합국 공군도 속수무책이었죠. 폭설로 발이 묶인 것은 패튼의 전차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패튼 장군은 군종목사를 호출하여 24시간만이라도 맑은 날씨를 주실 것을 하느님께 기도드려달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이 기도가 효험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곧 날씨는 맑아졌고, 패튼의 제 3군은 대대적인 반격에 나섭니다.

패튼 지휘하의 전차와 병사들은 폭설로 눈이 쌓인 길을 하루 7~80킬로미터씩 돌파해 나갔고, 이것은 패튼에 의해 평소 끊임없이 단련된 군대였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입니다. 고립된 101 공수사단을 구출해 낸 패튼은 퇴각하는 독일군을 쫓아 독일 본토로 진입했고, 제 3군이 라인 강을 건넌 것은 1945년 3월 22일의 일이었습니다.

 

  번쩍이게 광을 낸 헬멧과 상아 손잡이가 달린 쌍권총,

승마바지에 굽이 높은 기병 장화는 패튼의 트레이드 마크였습니다.

정치적인 감각이 있었던 맥아더 장군 같은 부류와는 다르게 패튼의 직설적이고 사려 깊지 못한 발언들은 종종 심각한 상황을 만들었습니다. 다른 인종에 대한 패튼의 인식이 그 당시 기준에 비추어 보면 특별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문제는 그 표현이 과격하다는데 있었습니다.

독일과의 전쟁이 끝나가자 그는 같은 연합국인 소련에 대해 험한 말들을 쏟아 내었죠.  "러시아인들을 이해하기 어려운 이유는 그들이 유럽인이 아닌 아시아 계통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일본인이나 중국인들과 같이 러시아인들을 더 이해할 수는 없으며, 나 또한 굳이 그들을 이해하고 싶은 생각은 없고, 단지 그들을 죽이기 위해 얼마만큼의 화약과 철이 소비되는지에만 관심이 있을 뿐이다. 러시아인들을 인간처럼 대해줄 필요는 없다. 그들은 개자식들이고 야만족이며 고질적인 술주정뱅이들일 뿐이다."  
 

독일에 진주한 소련군 장성과 함께 부대의 사열을 받는 패튼 장군,

종종 직설적인 발언으로 연합군 수뇌부를 곤란하게 만들었습니다.

2차 대전이 끝나자 패튼 장군은 독일 바바리아州 군정장관이 되었고, 그는 평소 생각대로 히틀러보다 더한 ‘동방에서 온 훈족 야만인들’(소련인)이 유럽을 지배하기 전에 이들을 몰아내야 한다는 발언을 되풀이해 미군 수뇌부를 곤혹스럽게 만들었습니다.

 마침내 아이젠하워 연합군 총사령관은 패튼을 본국으로 돌려보내기로 결정하죠. 1945년 12월 9일, 귀국을 하루 앞두고 동료 장군들과 만하임(Mannheim) 교외로 꿩 사냥을 나갔던 패튼을 태운 캐딜락 승용차는 트럭과 충돌하는 사고를 일으켰고, 패튼은 목뼈가 부러지는 중상을 입고 의식을 잃습니다.

사고 직후 군병원으로 옮겨졌다가 12일 만에 숨을 거둔 패튼의 시신은 룩셈부르크의 미군 묘지에 안장됩니다.

 

 

룸셈부르크 미군묘지에 안장된 패튼 장군의 묘비.

 

흔히 장군들을 평가할 때 지장, 용장, 덕장, 맹장 등 여러 가지 표현을 씁니다만 그 중 어떤 자질을 가진 장군이 가장 훌륭한가라는 질문은 부질없는 것이겠죠.

하지만 분명한 것은 미군 역사를 통틀어 패튼만큼 저돌적이고 직선적이며 타협할 줄 모르는 장군은 없었다는 것입니다. 전쟁에서 용맹하고 부하들로부터 존경을 받는다면 군인으로서는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지 않을까요?

 

 


 

 

 

1946년 3월 5일 - 윈스턴 처칠 ‘철의 장막’ 연설

 

 

1946년 오늘,  수상직 에서 물러나 미국을 방문 중이던 윈스턴 처칠이 미주리州 풀턴市의 웨스트민스터 대학에서 ‘평화의 원동력’ (Sinews of Peace)라는 제목의 연설문을 읽어내려 갑니다. “오늘날 발트 해의 수데텐란트 (폴란드 북부)에서부터 아드리아 해의 트리에스테까지 대륙을 가로지르는 ‘철의 장막’이 내려져 있습니다.” 사실 ‘철의 장막’ (Iron Curtain)이라는 말은 처칠이 처음 사용한 단어는 아니었습니다.

이 표현은 1819년 ‘뚫을 수 없는 장벽’이라는 뜻으로 처음 쓰였고, 1920년대에는 소비에트 연방의 영향권을 나타내는 뜻으로 쓰였죠. 점증하는 소련 사회주의의 영향력을 은유하는 표현으로 사용한 것도 처칠보다 2차 대전 당시 나치 독일의 선전장관 ‘요제프 괴벨스’가 빨랐습니다. 

하지만 2차 대전 막바지인 1945년 2월에 있었던 괴벨스의 연설은 별 주목을 받지 못했고, 처칠의 연설은 곧 세계인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윈스턴 처칠' (Winston Leonard Spencer Churchill), 1874.11.30~1965.1.24

“‘철의 장막’ 뒤에는 중앙 유럽과 동유럽의 옛 나라의 수도가 놓여 있다. 바르샤바, 베를린, 프라하, 빈, 부다페스트, 베오그라드, 부쿠레슈티, 소피아 - 이 유명한 도시와 이곳의 주민들이 이른바 소비에트 연방의 세력권에 있으며, 그들 모두는 어떤 식으로든 소련의 영향뿐만 아니라 커져가는 모스크바의 통제에 묶여 있다.”

전 인류에게 전쟁의 참화를 안겨 주었던 2차 대전이 연합국의 승리로 끝난 지 채 1년이 안된 시점이었고, 세계는 전쟁이 없는 평화에 대한 부푼 꿈을 꾸고 있을 때였습니다. 소련과 사회주의의 팽창을 경고하는 처칠의 이 연설은 종전 후 새로운 세계질서를 냉전구도로 ‘획정’하는 시발점이 되었죠.

 

 

체코슬로바키아와 오스트리아 사이에 놓였던 철책, '철의 장막'은 지리적 분단선일 뿐만 아니라 이념적, 심리적 분단선이기도 했습니다.

 

'철의 장막'이라는 단어는 정말 소련을 '철의 장막' 안으로 밀어 넣었습니다.

 

2차 대전에서 연합국의 승리를 이끌어 내는데 일조를 한 윈스턴 처칠은 또한 노벨 문학상을 받은 최초의 정치인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전쟁 당시를 회고한 ‘제 2차 세계대전’으로 노벨상을 받았죠. 때때로 말은 단순한 의사 전달의 수단을 넘어 역사를 창조하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윈스턴 처칠의 ‘철의 장막’ 발언은 정말 소련을 철의 장막 너머로 밀어 넣고 말았죠. 그리고 이 단어는 ‘베를린 장벽’과 함께 냉전이 종식될 때까지 유럽 대륙을 상징적으로, 또 사상적, 물리적으로 나누던 경계를 부르던 단어로 사용되었습니다.

 

1980년대 중반 이후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이끌던 소련의 변화는 현실 사회주의의 몰락과 독일의 통일을 가져왔죠. 1992년 5월, 보수 세력의 불발 쿠데타로 권좌에서 물러난 ‘고르바초프’ 서기장은 반세기 전 처칠이 연설했던 바로 그 장소(웨스트민스터 대학)에서 냉전시대의 종식을 고하는 연설을 했으니, 때론 현실이 그 어떤 영화 보다 드라마틱하게 느껴집니다

 

'미하일 고르바초프' (Mikhail Sergeevich Gorbachev)는 1992년 5월, 반세기전 처칠이 '철의 장막' 연설을 했던 바로 그곳에서 '냉전의 종식'을 선언 합니다.

 

 

 

1946년 5월 3일 - 극동군사재판 개정

 

 

1946년 오늘, 연합군 총사령부는 일본의 전쟁범죄자들을 심판하기 위한 ‘극동군사재판’(Military Tribunal for Far East)을 개정합니다.

연합군 총사령부는 전쟁범죄자를 3가지로 분류해 기소했습니다. 가장 죄질이 나쁜 A급 전범은 “침략전쟁의 계획, 준비, 실행, 공동 모의함으로써  ‘평화에 대한 죄’를 지은 자”들이었고, B급과 C급 전범은 각각 “통상적 전쟁범죄를 저지른 자”, “인도(人道)에 대한 죄를 저지른 자”로 나뉘어졌습니다.

국제검사단에 의해 A급 전범으로 기소된 사람은 모두 28명이었죠. 19명은 직업군인이었고 나머지 9명이 민간인이었습니다. 이들 중에는 ‘도조 히데키’와 ‘히로다 코키’를 비롯한 4명의 전직 수상, 3명의 외상, 4명의 육군상, 2명의 해군상, 6명의 대사, 3명의 재계인사, 1명의 황족이 포함되어 있었죠.

 

법정에 선 '도조 히데끼' 전 수상,

그는 내무대신과 육군 대신, 육군 참모 총장 등을 겸임하면서 일본을 미국과의 전면전으로 끌고갔습니다2년 6개월에 걸쳐 진행된 재판기간 중 법정에 출두해 증언한 증인만도 419명이었고, 검사측과 변호인 측에서 각기 제시한 증거는 무려 4,336건에 달했습니다. 30만 이상의 중국인이 살해된 ‘난징 대학살’과 100여 곳에서 자행되었던 대규모 학살과 고문, 생체 실험 등의 증거가 제출되었음에도 일본은 끝까지 무죄를 주장하였습니다\30개월에 걸친 심리가 끝나고 1948년 11월 12일 전범들에 대한 판결이 내려집니다. 재판과정 중에 사망한 2명과 정신이상으로 판명된 1명을 제외한 25명 전원에게 유죄가 선고됩니다.

7명에게는 사형이 언도되었고 나머지 18명의 전범은 종신형, 금고 7년 또는 20년 등의 형을 받았는데, 이중 5명이 옥사하고, 나머지 13명은 연합국의 일본 점령이 끝난 1952년 4월 이후 단계적으로 전부 석방되었습니다.

극동군사재판은 많은 역사학자들로부터 ‘반쪽짜리 재판’, ‘미일의 합작품’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데, 전쟁범죄자들에 대한 철저한 단죄보다 미국의 전후 일본 통치를 위해 열렸다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죠. 무엇보다도 침략전쟁의 정점에 있었던 ‘쇼와 천황’에 대해서는 기소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비슷한 무렵에 나치 독일의 전범들을 단죄하기 위해 열렸던 ‘뉴른베르크 재판’에 주요 연합국이 피해국가로서 참여했던데 비해, 극동군사재판에는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엄청난 피해를 입었던 아시아 국가들이 중국, 필리핀, 인도를 제외하고는 참여하지 못했습니다.

이들 아시아 국가들이 일본의 침략전쟁에서 겪었던 피해는 결코 나치의 유대인 학살에  못지 않은 것이었음에도, 재판의 주요과정은 연합군 포로들에 대한 학대와 연합국들이 상실한 자산상의 피해와 민간인 피해 등에 집중되었습니다.

또 재판의 대상이 된 시기도 ‘만주침략 이후의 범죄’에만 국한되어 그 이전의 한반도 등에서의 이권 쟁탈을 비롯해 러-일, 중-일 전쟁 또는 식민지침략, 그리고 그 과정에서의 비인도적 행위 등은 모두 제외되었죠.

또 뉴른베르크 재판이 나치당과 게슈타포, 친위대 등을 범죄적 집단으로 못 박아 이후에도  이들 구성원에 대한 처벌의 법적 근거를 두었는데 반해, 극동군사재판은 단지 기소된 개인의 형사책임만을 묻는데 그쳤다는 한계도 있었죠.

 ‘쇼와 천황’과 악명 높은 731부대 관련자 등은 기소조차 하지 않았던 극동군사재판은 결과적으로 일본인들 스스로 전쟁 범죄에 대해 자성하고 참회할 기회도 주지 않은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1946년 11월 3일 - 일본, ‘평화헌법’ 공포

 


'신'이 아닌 '인간'의 모습으로 일본인들 앞에 나선 일왕 '히로히토' 부부.

 

1946년 오늘, 평화헌법이라고 불리는 ‘일본국 헌법’이 공포됩니다. 새롭게 만들어진 일본 헌법의 가장 큰 핵심은 그 전문과 제 9조에 담겨 있습니다.

9조 1항은 ‘일본 국민은 정의와 질서를 기초로 하는 국제 평화를 성실히 희구하고, 국권의 발동에 의거한 전쟁 및 무력에 의한 위협 또는 무력의 행사는 국제분쟁을 해결하는 수단으로서 영구히 이를 포기한다’, 9조 2항은 ‘이러한 목적을 성취하기 위하여 육해공군 및 그 이외의 어떠한 전력도 보유하지 않는다. 국가의 교전권(交戰權) 역시 인정치 않는다’고 명확하게 규정하고 있습니다.

전쟁 포기, 전력(戰力) 보유 금지, 교전권 부인을 골자로 하는 제9조의 내용으로 일본 헌법이 이른바 ‘평화헌법’이라고 불리고 있는 것입니다. 침략 전쟁을 일으켜 수많은 아시아 민중들을 괴롭힌 전범 국가였던 일본은 새롭게 만들어진 그들의 헌법을 통해 국제사회에 복귀했던 것이죠.

하지만 한국전쟁을 계기로 일본을 통치하고 있던 미 점령군의 명령에 의해 일본국내 치안유지를 주 임무로 하는 ‘경찰예비대’가 조직되었고, 2년 뒤 경찰예비대는 ‘보안대’로 개편됩니다. 이 보안대가 1954년 창설된 ‘자위대’(自衛隊, Self Defence Force)의 직접적인 모체가 된 것이죠.

자위대는 사실상의 군대이지만 전력의 보유를 금지하고 있는 평화헌법의 조항 때문에 자위대라는 어정쩡한 이름을 가지게 되었죠. (내각 총리대신이 최고 지휘권을 가진 자위대는 명목상으로는 군대가 아니기 때문에 자위대원이 범죄를 저질렀을 때는 군사재판이 아닌 일반재판에 회부됩니다)  

 

 

일본 육상자위대의 자위관들

 한국전쟁 당시 미군의 병참기지화 했던 일본은 재빠르게 경제부흥의 기틀을 마련할 수 있었고, 한반도에서 엄청난 희생자를 낸 미국은 ‘아시아의 안보는 아시아인’들이 맡아야한다는 논리로 일본의 재무장을 부추겼습니다.

창설 이후 점차 몸집을 불려온 자위대는 1990년대  부터는 국제사회 기여를 명분으로 한 해외파병을 해오고 있으며, 일본 내 보수 세력은 ‘집단 자위권 행사’를 명분으로 끊임없이 헌법 개정 요구를 해오고 있습니다. 

하지만 일본 헌법 9조가 개정이 된다면, 이미 아시아 최강의 군사력을 자랑할 정도의 막강한 전력을 가지고 있는 자위대는 정규군화 할 것이고, 이들의 해외진출은 한반도와 동아시아의 정세를 불안하게 만드는 요인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큽니다.

역사적으로 언제나 팽창하는 일본의 첫 번째 희생자가 되었던 한반도에 살고 있는 우리가 일본의 헌법개정 문제를 예의주시해야 할 이유입니다.  

 

 

1946년 12월 16일 - 맥아더, 미 극동군 사령관에 취임

 

 

 

1946년 오늘, 더글라스 맥아더 원수가 미 극동 사령관에 취임합니다. 도쿄에 사령부를 둔 미 극동 사령부(FEC, Far East Command)는 예하에 미 8군 사령부, 극동해군 사령부, 극동공군 사령부를 두고 한반도와 일본 열도를 포함한 동아시아 일대의 미군을 관할하게 되었습니다. 

 

2차대전 당시 태평양 전선에서 싸우던 미군은 두 개의 통합군 사령부로 일본을 상대로 전쟁을 수행했습니다. 바로 맥아더 원수가 지휘한 남서태평양사령부와 니미츠 제독의 태평양군 사령부가 그 것이었죠.

자연히 남서태평양 사령부는 육군 중심이었고, 태평양군 사령부는 해군과 해병대가 주축이 되었습니다. 태평양이라는 단일 전구(戰區)에 2개의 사령부를 두고 싸우는 것은, 그 지역의 광대함을 감안하더라도 다소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니미츠' (Chester William Nimitz) 제독

 

하와이에 본부를 둔 니미츠 제독의 태평양 사령부는 일본 연합함대를 미드웨이에서 격파함으로써 태평양 전쟁의 전세를 역전시켰고, 호주를 근거지로 한 남서태평양사령부는 주로 호주와 필리핀을 잇는 수많은 섬들을 탈환하는 작전을 펼쳤죠.

니미츠 제독이 일본 본토를 향해 나가는 동안, 맥아더는 공격의 칼끝을 필리핀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맥아더가 1945년 7월 1일 필리핀을 해방시켰을 때, 니미츠 제독은 일본 본토의 바로 아래인 오키나와를 점령했죠.

필리핀과 오키나와를 점령한 미군이 일본 본토에 대한 상륙작전을 준비하고 있을 때 원자폭탄을 연달아 얻어맞은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죠.

일본을 점령해 군정(軍政)을 실시해야 하는 미국으로선 난감한 문제에 봉착합니다. 니미츠와 맥아더, 태평양군 사령부와 남서태평양사령부 중 어느 쪽을 일본에 들여 보내느냐하는 문제였죠. 트루먼 대통령이 손을 들어 준 것은 맥아더 쪽이었습니다.

니미츠 제독의 태평양군 사령부는 원래 있던 하와이로 물러나게 되었고, 호주에 있던 남서태평양사령부가 도쿄(정확하게는 근교의 자마)로 이동하면서 극동사령부로 개편하게 된 것입니다. 소련과의 합의에 따라 38도선 이남을 점령하게 된 미 제 24군단도 극동군사령부의 지휘를 받게 됩니다.

 

 

 

 

1945년 9월 2일, 전함 '미조리' 함상에서 연합군 사령관 자격으로 항복문서를 접수하는 맥아더 원수

 

19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한반도에 주둔하던 미 제 24군단은 미국으로 철수하여 해체되지만, 일본에서는 미 제 8군이 예하에 제 1 기병사단, 제 7 사단, 제 24 사단, 제 25 사단 등을 거느리고 1952년까지 예정된 군정 통치를 하고 있었죠.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미국 정부는 한반도를 관할하는 극동사령부에 북한군을 저지하라는 명령을 내리게 되고(6월 30일), 유엔군 창설을 결의한 유엔으로부터 유엔군을 지휘할 권한(7월 7일)까지 위임 받은 맥아더는 한국전을 주도하게 되죠.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한국군에 대한 작전권을 유엔군에 이양한다’라는 내용의 서신을 받은 것도 비슷한 시기(7월 14일)로, 이로써 맥아더는 미군과 한국군, (미국을 제외한) 15개국에서 파병된 유엔군을 총지휘하는 권한을 행사하게 됩니다.

역사에 가정이란 무의미한 일이라지만 철저한 반공주의자이자 정치 군인이었던 맥아더가 한국과 일본의 현대사에 끼친 영향을 생각하면, 62년 전 오늘, 맥아더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그 자리에 앉게 되었다면 우리의 역사가 다른 방향으로 흐를 수 있었을까하는 생각을 그야말로 부질없이 해보게 됩니다. 

미 극동사령부는 1957년 해체되고, 그 관할 구역을 태평양통합군사령부(PACOM, United States Pacific Command)으로 이관하게 됩니다.         

 

 

 

1946년 12월 19일,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발발

 

1946년 오늘 베트남 독립동맹군이 일제 봉기, 프랑스군과의 전면전이 벌어지면서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시작됩니다. 온 베트남의 산하를 휩쓴 30년 전쟁의 시작이었습니다.

19세기 중반 이후 프랑스 지배아래 있던 베트남은, 2차 세계대전 중 독일에 항복한 프랑스의 비시정부 아래서 식민정권을 유지하다 일본군의 진주로 친일세력을 등에 업은 바오다이 황제가 명목상의 국가원수로 군림하고 있었습니다.

1941년, 인도차이나 공산당을 창설한 ‘호치민’(胡志明)은 30년간의 해외 망명생활을 청산하고 귀국합니다. 그는 곧 ‘베트남 독립동맹’(베트민, Viet Mihn)을 결성하고 유격대를 조직, 일본과 프랑스를 동시에 공격합니다.

베트민 군은 훈련도 제대로 받지 못했고 변변한 개인화기조차 갖추지 못했지만 식민지 조국을 당당한 독립국가로 만들겠다는 일념으로 똘똘 뭉친 용사들이었습니다. 2차대전 종전 무렵엔 일본이라는 공동의 적을 상대로 싸우고 있던 미국의 정보기관(OSS, CIA의 전신)의 지원을 받기도 했죠.  

'호치민' 주석, 평생을 베트남 독립에 몸바친 사회주의자였습니다


1945년 8월 일본이 패망하자 연합국은 북위 16도선을 경계로 베트남을 분할, 북쪽은 장개석 정부의 중국군이 그리고 남쪽은 영국군이 주둔하도록 합의합니다.

사실상 베트남 전역을 장악할 힘이 없었던 프랑스를 대신해서 일본군을 무장해제 시키고 질서를 회복한 다음 베트남을 프랑스에 돌려주려는 심산이었죠.

중국군이 진주하기 전 베트남 독립동맹은 일본의 괴뢰(傀儡)였던 안남(安南)의 완조(阮朝) 정부를 전복시키고, 북부의 하노이에서 남부의 사이공까지 통치권을 행사합니다.

이것이 베트남 역사의 ‘8월 혁명’(cach mang thang tam) 이죠. 이후 1945년 9월 2일, 호치민은 하노이에서 독립을 선언하고 베트남 민주공화국을 수립합니다.

베트남 민주공화국은 충분한 자치 준비를 갖추고 있었지만, 강대국들은 그들 상호간에 식민지 영유권을 지지하는 쌍무협정을 맺고 있었고 베트남의 독립은 물거품이 될 위기에 처합니다. 북쪽에 진주한 중국군은 약탈과 강간을 일삼았고, 남쪽의 영국군은 병력 보강을 명분으로 일본군을 재무장 시킵니다.

식민지 체제의 복고를 꿈꾸는 프랑스 육군 5만 명은 ‘르 끌레르’(Le clerc) 장군의 지휘 아래 남부에 상륙해서 북부로 진군합니다. 호치민은 중국군을 몰아내기 위해 프랑스 정부와 협상을 시작하죠. 베트남의 좌,우익 모두 반대하는 힘겨운 협상이었습니다.    

베트남에 투입되는 프랑스 외인부대원들.

 

지난한 협상 끝에 호치민은 프랑스로 하여금 베트남을 자유국가로 승인하게 하는데 성공하지만, 베트남은 ‘프랑스 연방’ 안에 머물러야 한다는 조건이었죠.

1946년 1월 베트남 전역에서 실시된 국민투표 결과 호치민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지만, 프랑스는 국민투표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더군다나 2만 명을 상한선으로 못 박았던 합의를 무시하고 베트남 주둔 프랑스군 병력을 15만 명으로 대폭 확충합니다.

팽팽한 긴장 관계 속에서 베트민 군과 프랑스 식민지군 사이에 소규모 충돌이 계속됩니다. 그해 11월 23일, 북부의 항구 하이퐁 만(灣)에 입항하는 선박에 부과하는 관세에 관한 법적권리를 둘러싸고 베트남과 프랑스 사이의 협상이 결렬되자 프랑스군은 하이퐁에 폭격을 가해 수백 명의 민간인이 사망하는 참사가 발생하죠.

 더군다나 12월 19일 대통령 관저를 포위한 프랑스군이 베트남 민중에 의해 합법적으로 선출된 ‘호치민’ 대통령과 ‘보 구엔 지압’ 장군을 체포하려하니, 마침내 베트민 군이 일제히 봉기해 프랑스 군대를 공격합니다.

 

베트민군을 사열하는 '보 구엔 지압' 장군.

전쟁의 초반은 현대식 장비를 갖춘 프랑스군의 우세로 시작되었죠. 거의 맨손이나 다름없었던 베트민은 도시지역에서 쫓겨나 게릴라전을 벌입니다. 1947년 2월 위에가 함락되고 이어 하노이에서 철수한 베트민군은 프랑스의 무조건 항복 요구를 거부하고 산악지대로 근거지를 옮겨 철저한 항전을 이어 갑니다.

1947년 가을 베트바크 지역에서 프랑스군의 진격을 저지시킨 베트민 군은 이듬 해 부터는 반격으로 전환합니다. 점차 식민지배에 반감을 가진 시민들과 농민들의 지지를 등에 업은 베트민은 전차와 전투기로 무장한 프랑스군을 격파하기 시작했죠.

수세에 몰리기 시작한 프랑스는 미국에 지원을 요청했고, 인도차이나 전쟁을 공산주의 팽창에 대한 견제라고 파악한 미국은 프랑스군에 대한 군사원조를 단행합니다.  

 

1954년 디엔비엔푸에 낙하산으로 투입되는 프랑스 공수부대원들.

이 사이에 프랑스는 베트민에 의해 퇴위당해 국외 망명 중이던 바오다이 왕을 복위시켜 1949년 6월, 남부 사이공에 친 프랑스 정부를 수립하죠. 하지만 베트민 군은 프랑스군과 바오다이 정부군을 연이어 격파하고 마침내 1954년 디엔비엔푸(Dien Bien Phu)에서 프랑스군 주력을 섬멸, 항복을 이끌어 냅니다.

디엔비엔푸에서의 승리는 프랑스의 베트남 지배를 종식 시켰지만, 프랑스 정부는 휴전 협정을 제대로 지키지 않고 군대만 철수함으로써 베트남 전국에서 실시하기로 한 총선거는 물거품이 되어 버리죠.

이후 반공을 명분으로 남베트남에 개입한 미국은 1955년 부정선거를 통해 친미정권을 탄생 시켰고, 북위 17도선을 경계로 분단된 베트남이 다시 통일 되는 데는 이후 20년의 시간과 수백만 명의 목숨이 희생되어야 했습니다.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포로가 된 프랑스 군인들.

 

 

 

1947년 10월 14일 - ‘척 예거’, 인류 최초로 음속돌파

 

 

1947년 10월 14일 오전 10시 29분, 인간이 처음으로 소리의 속도를 넘는데 성공합니다. 이 날 24세의 미 공군 조종사 ‘척 예거’ (Charles Elwood "Chuck" Yeager)는  Bell사가 제작한 X-1기를 타고 모하브 사막의 에드워드 공군기지를 출발, 마하(MACH) 1.05 (음속의 1.05배)를 기록했죠.

B-29 폭격기에 매달려 이륙한 X-1은 지상 약 3.7Km 상공에서 모기에서 분리, 14.7km 상공까지 상승하여 이 기록을 달성합니다. 음속은 말 그대로 소리의 속도를 말하죠. 또 물체가 소리의 속도보다 몇 배나 더 빠른가를 마하(MACH) 수라고 하는데 마하 1은 표준대기인 15℃에서 약 초속 340m의 속도입니다.

즉 소리의 속도와 같은 속도를 마하 1이라고 하는데, 이 마하 1보다 더 큰 속도영역을 초음속이라고 부르죠.

 

1903년 12월, 라이트 형제의 최초 비행이후 비행기 제작 기술이 발달하면서 항공기의 속도도 점차 빨라졌습니다. 하지만, 2차 대전 당시 제트엔진이 개발되고 음속에 가까워질수록 공기의 저항도 커져서 비행기가 폭발하는 경우도 있었죠.

때문에 사람들은 비행기가 음속을 돌파하는 순간, 그 충격파에 의해 기체가 산산조각 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이차대전 중에 만들어진 일부 전투기는 성능상 이미 음속돌파가 가능했지만(실제로도 1945년 4월 9일, 독일 공군의 ‘한스 무크테’(Mutke, Hans Guido)가 자신이 조종하는 Me-262A로 음속의 벽을 돌파했다고 주장했지요), 음속돌파는 불가능한 일이라는 인식이 과학자들과 조종사들에게는 상식처럼 받아들여지고 있었습니다. 고정관념 자체가 하나의 벽이 되고 있었던 셈입니다.

 

 

2차대전 말기에 등장한 독일의 Me-262 전투

 

1943년 미 육군과 해군은 NACA(The National Advisory Committee for Aeronautics:미국항공자문위원회)를 구성하고, 초음속기 개발에 착수합니다. 이듬해 미국 정부가 이 계획을 승인했고, 1945년 3월 Bell社와 계약을 체결하죠.

1945년 12월 27일, X-1(Experimental Supersonic-1) 1호기가 완성되는데, 알루미늄 합금으로 제작된 이 항공기는 4개의 로켓엔진을 장착하고 액체 산소와 에탄올을 연료로 사용하였습니다.

일 년 뒤인 1946년 12월 첫 번째 동력비행에 성공한 X-1 1호기는 두 번째로 만들어진 2호기와 함께 1947년 5월, 미 공군에 인도됩니다.

 

 

X-1앞에 선 '예거', 그는 이 비행기에 아내의 이름을 따 '글래머러스 글레니스'라는 이름을 붙였다

 

X-1을 타고 미답의 영역으로 들어설 조종사로는 ‘찰스 엘우드 예거’ 대위가 선발되었습니다. 이 패기만만한 젊은 조종사는 2차 대전에 참전해 유럽전선에서 12기의 격추기록을 가진 에이스였죠. 그가 조종한 X-1은 최초로 음속을 돌파한 비행기로 역사에 기록되었고, 척 예거는 ‘초음속 돌파는 불가능하다’는 당시의 인식도 함께 불식시켰습니다.

 

 

1948년 5월 14일 - 이스라엘 건국, 제 1차 중동전 발발

 

 

1948년 오늘, 텔아비브 미술관에서 유대 국가건국위원회 의장 ‘벤 구리온’이 이스라엘 건국을 선언합니다. 위임통치를 위해 팔레스타인 지역에 주둔하던 영국군의 마지막 부대가 철수한 직후의 일이었죠. “이스라엘 땅은 유대인의 탄생지다.

여기서 최초로 국가를 만들었고 책 중의 책(성경)을 세계에 전했다...우리는 이곳에 이스라엘 이라는 유대인 국가의 설립을 선언한다.” 2천년의 유랑 끝에 유태인들은 자신들의 국가를 세웠지만, 졸지에 삶의 터전을 잃게 된 팔레스타인 주민들에겐 이날이 ‘재앙의 날’(알 나크바)이었습니다.

독립선언 직후 ‘이르군’(Irgun, 히브리어로 '민족군사조직'을 의미)과 ‘하가나’(Haganah, 히브리어로 '방어'를 의미)를 비롯한 유태 무장 조직들이 행동을 개시합니다. 이틀 뒤인 5월 16일에는 이집트를 비롯한 요르단, 시리아 등 아랍 연합군 2만 명이 이스라엘의 독립을 저지하기 위해 팔레스타인에 진입함으로써 제 1차 중동전이 발발하죠.

 

 

 

팔레스타인 민병대가 전선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원래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거주하던 이 땅에 유태인들이 들어와 살기 시작한 것은 BC 11세기경. 모세가 이집트에서 히브리인들을 이끌고 나와서 가나안에 정착하면서 부터였습니다. 그 이후 이스라엘과 유다

왕국으로 분열되었던 유태인들의 국가는 BC 8세기와 BC 6세기, 각각 ‘아시리아’와 ‘신바빌로니아’에 의해 멸망했죠. 이후 유태인들은 세계 각지를 떠돌며 2천 여 년 간 나라 없는 민족의 서러움을 톡톡히 겪어야만 했습니다.

19세기 말 유럽에서 반(反) 유태주의가 기승을 부리자, 유태인들 사이에는 팔레스타인으로 돌아가 유태국가를 세워야 한다는 ‘시오니즘’ (유태인 조국재건 운동)이 호응을 얻게 됩니다.

또 1차 대전을 치르던 영국이 미국내 유태인들의 지지를 끌어내기 위해 외무장관 ‘아서 벨푸어’의 이름으로 ‘팔레스타인에서 유태인들의 국가 수립을 지지’한다는 이른바 ‘벨푸어 선언’을 하면서 팔레스타인으로 돌아오는 유태인들의 숫자가 늘어나기 시작했죠.

 2차 대전이 끝난 뒤에는 나치 독일에 의해 자행된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이 대거 팔레스타인으로 유입되었습니다. 팔레스타인으로 돌아오는 유태인들의 숫자가 늘어나면서 '이르군'과 '하가나' 등 유태 무장 조직들의 테러 활동도 거세졌죠.

이들은 팔레스타인의 치안을 책임지고 있던 영국군이건 아랍인이건, 심지어는 동족인 유태인들이건 가리지 않고  무차별 테러를 벌였습니다.

특히  1948년 4월 9일, 예루살렘 서쪽 5km 지점에 위치한 '데이르 야신' 마을을 공격한 '이르군'은 254명의 마을 주민들을 남여노소 가리지 않고 살해하는 만행을 저질렀죠. (당시 '이르군'의 작전을 총지휘했던 '메니헴 베긴'은 나중에 이스라엘의 수상이 되어, 1982년 레바논 침공을 명령합니다.)    

 

 

유태 국가 건설을 위해 테러도 불사한다는 극렬 유태민족주의 무장조직 '이르군'은 1946년 7월 22일, 예루살렘의 '킹 데이비드 호텔'을 폭파해 91명의 사망자를 발생시켰습니다.

 

1947년 11월29일, UN은 영국의 위임통치를 받고 있던 팔레스타인 땅의 약 56%를 유대인들의 국가에 주는 팔레스타인 분할을 결의합니다. 2천년 동안 이 땅에 뿌리 내리고 살아오던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는 날벼락 같은 일이었죠.

UN의 결의안은 아랍세계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쳤고, 반 년 뒤 이스라엘이 국가를 선포하자마자 팔레스타인 지역은 본격적인 전쟁에 휩싸였습니다.

이듬 해 2월 휴전이 성립될 때까지 계속된 치열한 전투에서 이스라엘은 당시 인구의 1%에 해당하는 6천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아랍측 에서는 그 이상의 인명피해를 입었습니다.  휴전의 결과 해안 평야 지대인 갈릴리와 네게브 지역은 이스라엘의 영토가 되었으며, 유다와 사마리아 지역은 요르단이 통치하게 되었고, 가자 지구는 이집트의 행정권 아래 편입되었습니다.

예루살렘은 양분되어 요르단이 구시가지가 포함된 동부를 관할하게 되었고, 이스라엘이 서부를 관할하게 되었죠. 전쟁의 가장 큰 피해자는 바로 팔레스타인인들이었습니다. 100만 명에 달하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대대로 살아오던 삶의 근거지에서 쫓겨나 난민이 되어야 했던 것이죠.

그 이후에도 이스라엘과 아랍세계 사이에서는 세 차례의 전면전이 더 일어났고, 오늘날까지 불안한 휴전 상태를 지속해 오고 있습니다.

 

 

이스라엘군에 맞서 돌을 던지고 있는 팔레스타인 청년들.


“유럽 국가들은 유대인을 탄압했다는 죄책감 때문에 이스라엘을 지지하고 있지만 유대인을 억압한 것은 그들인데 왜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대가를 치러야 하느냐. 2차 대전 중 유대인 학살에 책임을 느낀다면 이스라엘인을 그들(유럽) 땅으로 이주시켜 살도록 해야 한다.”  '마흐무드 아마디네자드' 이란 대통령의 말은 팔레스타인 문제의 해법이 녹록치 않음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1949년 4월 15일 - 한국 해병대 창설

 

 

 60년 전 오늘 한국 해병대가 창설 됩니다. 1949년 4월 15일 진해 덕산 비행장에서 해군에서 편입된 장교·하사관 80명과 병사 300명 등 380명으로 창설된 해병대는 처음에는 상륙작전부대가 아닌 해군기지 경비를 목적으로 한 군사조직으로 승인되었죠.

창설 당시의 화력은 소총(구 일본군의 99식·38식, 미군의 카빈), 경기관총 6정, 중기관총 3정, 60㎜ 박격포 4문, 81㎜ 박격포 2문뿐인 열악한 상태였습니다.

 

해병대의 임무가 상륙작전으로 조정된 것은 한국전쟁 중이던 1952년 8월 16일 대통령령 제 672호 해병대령 개정에 따라서였습니다. 하지만 그 이전부터 이미 해병대는 통영상륙작전에서 크게 활약, ‘귀신 잡는 해병대’의 애칭을 얻고 있었습니다.

당시 종군 기자로 활동했던 미국 AP통신의 ‘마가렛 히킨스’ 기자가 통영에서의 상륙전을 보도하는 자신의 8월 17일자 기사에서 "그들은 귀신도 잡을 수 있을 것(They might capture even the Devil)"이라고 인용한 것이 바로 그 유래였죠. 해병대는 인천 상륙작전에도 참가했고, 서울 탈환 작전에서 중앙청에 태극기를 계양했던 것도 해병대원들이었습니다.

 

 

남북 대치 상황 속에서 대부분의 한국군 지상 전력이 방어적 성격인데 반해, 공격성이 강한 해병대의 존재는 매우 특별한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군사 전문가들은 한국 해병대의 존재가 최소한 북한군 8개 사단을 해안 방어에 묶어두고 있다고 분석하고 있습니다.

이른바 ‘국가전략 기동부대’의 역할인데, 이것은 통일이후 한반도 주변 국가들에 대한 ‘공세적 방어 전력’의 성격도 가지고 있습니다. 해병대의 상륙작전은 적의 허를 찔러 고착된 전선의 상황을 단번에 타개할 수 있는 위력이 있으니까요.

 

 

해병대 창설 60주년 기념 우표, 해병대의 상징인 8각모 형태로 만들어졌군요.

 

한국 해병대는 현재 2개 사단과 1개 여단, 2만7천여 명 규모로 세계 5위 규모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해병대의 장기이자 존재 목적인 상륙작전을 실행할 수 있는 독자적 능력이 없다는데 있습니다. 해병대를 싣고 목표 해안으로 이동할 해군의 상륙함정이 몇 척 없어서 미 해군의 지원 없이는 대규모 상륙작전을 벌일 수 없죠.

물론 신예 상륙수송함인 ‘독도’함이 있긴 하지만, 단 한 척에 불과하고 해군은 이 배를 상륙수송함 용도가 아닌 기동함대의 기함으로 사용할 계획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요약하자면 우리 해병대가 아무리 강력한 전투력을 지니고 있어도 정작 타고 이동할 수송수단을 갖고 있지 못한 형편이죠.

해병 ‘공지(空地)기동부대’란 용어가 말해주듯 현대전에서 상륙작전은 항공기를 사용해 필요한 곳 어디든 병력을 도달 시킬 수 있는 개념으로까지 발전하고 있습니다.

자체 전투기까지 보유한 강력한 항공단을 보유한 미 해병대 수준은 아니더라도 해병대에게 해병대다울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 주는 것이 시급한 일이라고 하겠습니다.

또 김포와 강화 지역에 배치되어 있는 해병 2사단의 경우에는 육군의 철책사단 임무를 맡길 것이 아니라 본연의 ‘전략기동부대’에 합당한 임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1949년 6월 15일 - 최초의 군용담배 ‘화랑’ 생산


이미지 출처 (네이버 밀리터리, 군사무기 카페 cafe.naver.com/nuke928)


‘우거진 수풀을 헤치면서 앞으로 앞으로. 추풍령아 잘 있거라. 우리는 돌진한다. 달빛 어린 고개에서 마지막 나누어 먹던, 화랑담배 연기 속에 사라진 전우야.’

유호 작사, 박시춘 작곡의 ‘전우여 잘자라’는 한국전쟁 시기에 만들어진 군가 중 가장 유명한 노래입니다. 군대 경험을 한 사람치고 담배 한 대에 얽힌 추억쯤 없는 사람은 드물 테지만, 이 노래 가사처럼 비장미 물씬 풍기는 담배 한 대는 아마 없을 듯 합니다. 

60년 전 오늘, 최초의 군용담배 ‘화랑’이 생산됩니다. 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각 군이 속속 창설된 것을 계기로 국군 장병 보급용 담배인 화랑이 시판된 것이죠. 군 당국은 연초비 명복으로 흡연 장병에게는 이틀에 한 갑의 화랑담배를, 비 흡연 병사에겐 사탕 한 봉지를 지급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처음 나온 화랑 담배는 필터도 없는데다 포장기술까지 뒤처져 고된 훈련이라도 받을라치면 포장지에 땀이 스며들어 뭉개지기가 일쑤였다고 합니다. 그래도 한국전의 포연 속에서 장병들이 내뿜던 화랑담배 연기는 병사의 작은 안식이자, 민족의 깊은 한숨이기도 했을 겁니다. 화랑 담배는 그 뒤에도 32년 동안이나 생산되어 국내 최장수 담배의 타이틀을 가지고 있지요.

개인적으로 이 시절, 화랑 담배에 대한 추억을 가지고 있습니다. 당시 초등학교에서는 연말이 가까워지면 국군장병들에게 보내는 위문편지와 더불어 위문대라는 것을 만들곤 했습니다. 사탕이나 과자 같은 기호품들을 가져와 위문편지와 함께 전방 부대로 보내는 것이었는데, 담배 역시 빼놓을 수 없는 품목이었죠.

당시 하루에 담배 두 갑을 피우셨던 곰PD 아버지께선 군 시절이 생각난다며 선뜻 비교적 고급 담배였던 한산도 서너 갑을 사주셨던 기억이 납니다. 근데 다음날 한 친구가 학교에 가지고 온 담배가 화랑담배 몇 갑이었죠.

이 친구 아버님께서 직업 군인이셨는지, 아니면 군에 간 형님이 알뜰하게 모아서 보낸 건지는 모르겠지만, 담임 선생님께서 참 난감해 하셨던 모습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네요.

군인에게만 지급하는 특수 담배였던 화랑은 1981년 말 장병 처우 개선 차원에서 시판용 일반담배인 ‘한산도’와 ‘은하수’를 배급하기 시작하면서 생산이 중지됩니다.

그 이후 군용 면세 담배는 90년 2월까지는 ‘백자’, 94년 11월까지는 ‘솔’, 2000년 12월까지는 ‘88 라이트’, 그 이후부터는 ‘디스’가 지급되다가 올해 초부터는 공급이 완전 중단됩니다.

국방부에 설명에 따르면 군에 보급되는 값싼 면세담배가 병사들의 흡연을 조장한다는 국민적 여론과 담배규제를 위한 국제협약(FCTC) 비준 국가의 위상을 감안하여 면세담배 판매 제도를 전면 중지했다는 것이죠.

국방부의 면세담배 폐지 방침은 지난 2005년 보건복지부, 환경부, 노동부 등 사회·문화 관계부처 장관들이 국민건강 증진차원에서 흡연인구를 줄이기 위해서는 군 면세담배를 폐지해야 한다는 의견을 모아 국방부에 전달한 것도 영향을 미쳤다는 후문입니다.

재 국방부는 금연에 따른 인센티브(외출·외박) 부여, 군 금연지도자 양성, 금연 클리닉 및 군 병원의 5일 금연학교 운영 등을 통해서 병사들의 금연을 적극적으로 유도하고 있습니다만, 고된 훈련 뒤 ‘담배 일발 장전’이라는 말의 아련한 추억이 떠올라 ‘담배 없는 군대’는 아무래도 상상이 되지 않는군요.

 

1950년 1월 12일, 미 국무장관 '애치슨 라인' 선언.

 

미국 국무장관 '딘 G. 애치슨'.

 

1950년 1월 12일, 미국 국무장관 ‘딘 G. 애치슨’(Dean Gooderham Acheson)이 워싱톤의 ‘내셔널 프레스 클럽’에서 행한 연설에서 극동에서의 방위선 구축을 내용으로 하는 이른바 ‘애치슨 라인’(Acheson Line)을 언급합니다.

발언의 골자는 소련과 중국의 영토적 야심을 저지하기 위한 미국의 태평양 방어선은 “알류산 열도에서 일본으로, 그리고 오키나와를 거쳐 필리핀으로 이어 진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애치슨에 의하면 이 방위선 바깥에 위치한 남한, 타이완, 인도차이나 반도 등은 국제연합(UN)의 보호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죠.

 

이른바 '애치슨 라인'.

 

사실 이 발언은 새로울 것이 없었습니다. 이미 한 해전, 미 극동군 사령관 ‘맥아더’ 원수가 똑같은 취지의 이야기를 한바 있고, 이는 미 국방부의 방어선 개념과도 일치하고 있었습니다. 애치슨은 당시 트루먼 정부가 가지고 있던 기본적인 전략개념에 대해 이야기한 것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애치슨 라인’도 ‘중국 몰락후의 태평양에서의 미국의 전략’에 관한 연설 중에서 잠시 언급된 것에 지나지 않았고, 그 자신도 연설의 세부사항을 잊어버릴 정도여서 대중의 관심도 끌지 못했습니다. (최근 미 시카고 대학 ‘브루스 커밍스 교수’의 연구에 의하면 오히려 ‘뉴욕타임즈’가 주말판에 에치슨의 연설내용을 소개하면서 ‘한국이 극동방위선에 포함 된다’는 오보를 냈었고, 당시 북한의 노동 신문도 이를 그대로 번역해 실었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당시 미국의 입장에서 극동의 중요성이란 유럽과 중동에 훨씬 미치지 못하는, 일본의 방위만을 위해 필요한 존재라는 의식이 강했습니다. 핵무기로 무장한 미군은 지상군과 해군을 축소하는 대신 공군의 전략폭격기로 힘의 공백을 메운다는 전략을 추진하고 있었죠.

 2차대전 이후 감축된 군대를 가지고 2차대전 당시보다 훨씬 넓은 지역에서 사회주의 국가들과 대립 하게 된 미국으로선 불가피한 선택이었다는 측면도 있습니다. 특히 40년대 말 미국 국방장관 ‘루이지 존슨’에 의해 실행되던 군비축소 정책은 극단적으로 말하면, 핵폭탄으로 무장한 B-36 폭격기만 있으면 해군의 항공모함도 지상군도 무용하다는 것이었죠. 이 때문에 미국 내에서도 군부와 정치권의 갈등도 심화되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한국전의 원인에 대해서는 많은 학자들의 연구결과가 있지만, 당시 미국의 한반도 정책이 일관성을 잃고 있었고 이른바 ‘애치슨 라인’ 언급은 미국은 남한이 위험에 빠지더라도 개입하지 않으리란 인상을 주기에 충분했습니다.

한국전쟁과 관련해서 애치슨의 발언이 가장 주요하게 언급되고 있는 것이 바로 이 부분이죠. 연구자들 사이에서 주류의 시각은 애치슨의 연설이 미국의 극동방어선에서 한국을 배제시켰음을 공식적으로 선언한 것이었으며, 북한으로 하여금 이를 남침의 신호탄으로 생각하게끔 하는 실책을 저질렀다는 것입니다.

반면 진보적 학자들 사이에서는 애치슨의 연설이 남침을 유도하기 위한 고도의 술책이었다고 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곰PD가 보기에는 두 주장 모두 일면만을 과도하게 해석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미국의 입장에서 한반도의 안정은 일본의 안보를 지키기 위해 불가피한 것이었고, 북한의 침공을 소련에 의한 대리전으로 판단한 미국은 UN군의 이름으로 즉시 전쟁에 개입 합니다. “병주고 약 준다”는 말이 서러운 건 그 말속엔 자신의 운명조차 결정하지 못하는 약자의 슬픔이 배어있기 때문일 테지요.

또 지나간 역사가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의미가 있는 것은, 과거와 현재의 대화를 통해 현재의 의미를 바르게 알고 미래를 대비할 수 있기 때문일 겁니다.

 

지난 세기 미국은 필리핀을 얻기 위해 가츠라-태프트 밀약을 맺어서 일본이 한반도를 집어 삼키는데 동의했습니다. 해방과 함께 분단된 한국은 미-소 냉전의 틈새에 끼어 전쟁터가 되기도 했습니다.

미국이 태평양에서 영향력을 유지하려면 일본의 존재가 절대로 필요하고, 일본은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 미국이 필요합니다. 한국인들이 생각하는 한-미 동맹의 중요성은 객관적으로 볼 때, 미-일 동맹이 갖는 공고함에는 비할 바 못됩니다.

언제든 상황이 바뀌면 가츠라-태프트 밀약, 애치슨 선언이 재현될 수 있는 것이죠. 한반도를 둘러싼 주변 강대국 중에 진실로 통일한국의 존재를 반기는 나라가 있을까 생각하면 등골이 오싹해지기까지 합니다.

 

1950년 6월 28일 - 한강 인도교 폭파 
 

 

1950년 6월 28일 새벽 2시 30분
,
국군이 한강인도교를 폭파시켜 다리를 건너던 수 백 명의 민간인과 군인이 사망하는 참극이 발생합니다.

 

북한군의 남침 사흘째인 27일 새벽 위태롭게 서울을 지탱하고 있던 창동 방어선이 무너지자 이승만 대통령은 대전으로 피신을 합니다.

 

신성모 국방장관도 그날 오후 2시, 채병덕 육군 총참모장은 28일 새벽 2시에 서울을 빠져나간 뒤였죠. 하지만 그때까지도 라디오 방송은 이미 대전으로 피신을 한 이승만 대통령의 ‘정부와 국군은 서울을 사수한다’는 녹음방송을 되풀이해서 내보내고 있었습니다.

당초 국군은 북한군 전차의 서울 시내 진입 2시간 후 한강 인도교와 경부선·경인선 철교를 동시 폭파한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고 이 시간은 대략 28일 오후 4시쯤으로 예측됐습니다.

 

하지만 창동 방어선을 돌파하여 28일 새벽 돈암동까지 진출한 전차 2대가 화근이었죠. 이 2대의 전차는 정찰목적으로 들어온 것이었지만 무능한 군 수뇌부는 오판을 하고 말죠.

오전 1시 45분 시내에 북한군 전차가 진입했다는 보고를 받은 채병덕 총참모장은 한강 인도교 폭파를 책임지고 있던 육군본부 공병감 최창식 대령에게 명령을 내립니다. “탱크가 시내에 들어왔다. 즉시 한강교를 폭파하라.”

하지만 한강교는 정부의 서울 사수 방송만 믿고 있다가 뒤늦게 피란길에 오른 민간인들의 행렬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최 대령은 “지금 사람이 많이 오는데요”라며 주저했지만 채 총참모장은 “즉시 시행하라”고 명령했죠.

45분 뒤 엄청난 폭음과 함께 6개의 교각 중 두 번째와 세 번째 교각이 폭파되면서 다리가 사람들과 함께 한강으로 무너져 내립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는지 정확치는 않자만 대략 600명에서 800명에 이르는 민간인과 군인들이 목숨을 잃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군사적인 측면에서 보아도 한강 인도교 폭파는 무책임하고 어이없는 결정이었습니다. 그때까지도 압도적인 북한군의 남하를 저지하면서 분전하고 있던 국군의 주력부대가 퇴로를 잃고 말았던 것이죠.

 

4만 명의 국군 병력이 한강 이북에서 고립되어 뿔뿔이 흩어졌고, 그때까지 국군이 보유하고 있던 대부분의 중장비도 고스란히 북한군의 손에 넘어갔습니다.

국민들의 분노가 거세지자 군 당국은 폭파의 실무 책임자 최창식 대령을 희생양으로 삼았습니다. 최 대령은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언도받고 그 해 9월 21일 총살형에 처해졌습니다.

한강 인도교 폭파는 150만 명의 서울시민들에게 엄청난 희생을 강요했습니다. 하지만 예고 없는 한강교 폭파로 시민들의 피란길까지 끊어 놓았던 정부는 서울 수복 후 ‘부역자 색출’ 등 정치적 보복에 앞장섰습니다. 이른바 ‘도강파’와 ‘잔류파’의 대립과 갈등도 깊어졌죠.

한국전쟁 발발 나흘 만에 발생한 한강인도교 폭파 사건은 이승만 정권의 무책임과 군 수뇌부의 무능이 불러온 참극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1950년 7월 5일 - 죽미령 고개에서 미군, 인민군과 첫 교전

 

 

1950년 7월 2일, 대전역에 도착하는 '스미스 기동부대'.

 

1950년 7월 5일, 오산 죽미령 고개에서 ‘찰스 B. 스미스’ 중령이 이끄는 미 제 24사단 21연대 1대대 병력이 인민군과 교전 합니다. 한국전 발발 이후 미 지상군이 벌인 최초의 전투였습니다. 북한군 병력은 전차 1개 연대로 증강된 인민군 제 4사단 소속의 제 16, 18의 2개 연대 병력이었습니다.

한강 방어선이 무너지고, 주요 장비와 군수품의 대부분을 한강 이북에 유기하고 후퇴한 국군은 남하하는 인민군을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6월 30일 트루먼 미국 대통령은 미 지상군의 한국 투입을 승인하였고, 곧 일본에 주둔하고 있던 미 육군 제 24사단에 출동 명령이 내려집니다.

24사단장 ‘딘’소장은 한국에 파견할 선발대로 사단 예하 21연대 1대대를 차출하였고, 이 부대는 대대장 ‘스미스’ 중령의 이름을 따 ‘스미스 기동 부대’라고 이름 붙여집니다.

완편(完編) 정수에 모자란 2개 소총 중대, 본부 중대 일부와 통신 소대로 이루어진 스미스 부대는 7월 1일 항공기편으로 부산에 도착, 다음날 대전을 거쳐 오산 북방 3마일 지점 죽미령 고개에 방어선을 구축합니다.

 

 

  

죽미령 전투 상황도 (클릭하시면 크게 보입니다)

 

죽미령 방어선에는 스미스 부대 말고도 ‘밀러 O. 페리’ 중령이 지휘하는 미 제 52 야전 포병대대 일부 병력도 투입되었습니다. 스미스 부대와 포병대의 병력을 합쳐서 540명의 미군 병력이 인민군과 조우한 것은 7월 5일 오전 7시경의 일이었습니다.

인민군 보병과 전차 대열이 종대대형으로 접근하는 것을 목격한 미군은 8시 15분 경, 105mm 포대의 포병사격으로 인민군을 공격하였지만, 별 성과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75mm 무반동총과 2.36인치 바주카포도 인민군의 전차대열을 완전히 저지시키기에는 역부족이었죠.

 22발의 바주카포탄을 얻어맞은 인민군 전차가 끄떡도 하지 않고 기동했다는 전투 기록이 남아있는 것을 보면 인민군의 남진을 저지할 수 있으리라는 미군의 낙관적인 기대가 얼마나 터무니없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스미스 부대원들은 미군이 전선에 나타난 것을 알면 인민군이 겁을 먹고 달아날 것이라는 맥아더 원수의 말을 별 의심 없이 받아들이고 있었던 것이죠.

6시간 여 의 치열한 교전 끝에 스미스 부대는 170여 명의 전사자 및 실종자가 발생하는 큰 피해를 입고 후퇴합니다. 인민군 쪽도 T-34 전차 4대와 42명의 인명피해를 입었습니다. 

인민군과의 첫 지상 전투에서 큰 손실을 입은 미군은 커다란 충격을 받았으며, 북한군의 전투 능력에 대해 처음으로 인식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또 스미스 부대의 최초교전은 북한으로 하여금 미군의 한국전 참전 사실을 확인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한국전에서 최초의 지상전을 벌였던 ‘찰스 B. 스미스’ 중령은 그 해 11월 말 전출명령을 받고 한국을 떠났고, 1967년 육군 준장으로 예편해서 아리조나州 피닉스市에서 살다가 지난 2004년 5월, 심장마비로 사망합니다.

 

 

1950년 7월 14일 - 국군 작전지휘권 유엔군에 이양  

 

 

이승만 대통령과 맥아더 원수

 (사진은 48년 일본 도쿄로 맥아더 사령관을 방문한 이승만 대통령)

1950년 오늘, 이승만 대통령이 한국군에 대한 ‘작전지휘권’(Operational Command)을 더글러스 맥아더 유엔군사령관에게 이양합니다. 맥아더 사령관에게 보낸 서신에서 이 대통령은 “현재의 적대행위가 계속되는 동안(during the period of the continuation of the present state of hostilities) 한국 육·해·공군에 대한 작전지휘권을 유엔군사령관에게 위임한다”고 밝혔죠.

이로써 한국 육군은 미8군사령관, 해군은 미 극동해군사령관, 공군은 미 극동공군사령관의 작전통제를 받으며 전쟁을 수행하게 됩니다. 한국이 작전지휘권을 유엔군사령부에 이양한 것은 미국의 완전한 개입에 의해 안보를 유지할 수 밖에 없는 현실 그 자체였습니다.

이렇게 이양된 작전지휘권은 정전협정 체결 후인 1954년 한미 상호방위조약과 그 후 개정된 한미 합의의사록에서 ‘작전통제권’이라는 용어로 대체되어 계속 유엔군사령관이 행사하게 됩니다. 1968년 북한에 의한 1.21 사태와 미국 정보함 푸에블로호 나포를 계기로 박정희 정권은 미국에 작전통제권 환수를 요구합니다.

 미국이 북한에 대해 강경한 조치를 취하지 않자 박 정권이 차제에 작전통제권을 돌려달라고 요구한 것이지만 무위에 그쳤죠. 이 때문에 일부 연구자들은 미국이 1ㆍ21사태, 버마 랭군 폭탄 테러, 대한항공기 폭파로 이어지는 북한의 도발에 대한 한국의 무력보복을 막는데 작전통제권이 유효했다고 보기도 합니다.


1978년 7월 한미연합사령부가 창설되면서 한국군에 대한 작전통제권은 유엔사령부에서 한미연합사령부로 이관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1980년대 후반부터는 탈냉전 이후의 변화된 안보환경과 한국의 국력신장을 바탕으로 ‘한국방위의 한국화’를 기치로 평시 작전통제권 환수에 대한 논의가 활발히 진행되기 시작했습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의 대선후보 시절 공액 중의 하나가 ‘작전통제권 환수’였을 정도니까요. 미국이 1990년대 초 ‘넌-워너 보고서’에서 “점진적으로 미군의 역할을 주도적 역할에서 지원역할로 전환해 나가겠다”고 밝힌 것도 작전통제권환수 논의에 한몫 했습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전작권 환수와 관련해 노태우 정부는 1995년까지, 김영삼 정부는 2000년을 환수 목표로 설정하기도 했죠.


이런 노력에 힘입어 1994년 12월1일 작전통제권 가운데 전시를 제외한 평시 작전통제권이 한국군 합참의장에게로 넘어왔습니다. 당시 김영삼 전 대통령은 이를 두고 “제2의 창군”이라고 지칭하며 “12월1일은 제2의 창군의 날이라는 생각으로 새로운 각오와 결심을 해야 한다”고 의미를 부여하기도 했습니다.

이후 참여정부에서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 2003년 광복절 경축사에서 자주국방을 강조하며 “(우리 군은) 아직 독자적인 작전 수행의 능력과 권한을 갖지 못하고 있다”고 밝힌 이후 전작권 단독행사의 필요성과 의지가 지속적으로 천명되었습니다.


노 전 대통령은 이후에도 “우리 군이 전작권 행사를 통해 명실상부한 자주군대로 거듭날 것”(2005년 10월1일 국군의 날 행사), “전작권 환수는 나라의 주권을 세우는 일이자 국군통수권에 관한 헌법정신에도 맞지 않는 상태를 바로 잡는 일”(2006년 8.15경축사)이라며 발언의 수위를 높여가면서 전작권 단독행사에 대한 확고한 의지를 거듭 나타냈습니다.

이런 결과 2006년 제 38차 한미 안보협의회(SCM)에서 양국 정부는 ‘2009년 10월 15일 이후, 2012년 3월15일 이전’에 전작권을 이양한다는 것에 합의하죠. 그리고 2007년 2월 24일 김장수 국방부 장관과 로버트 게이츠 미 국방장관은 ‘2012년 4월17일을 기해 전작권을 전환하고 한미연합사를 해체키로’ 전격 합의합니다.

이날이 전작권 전환일로 정해진 것은 국군의 작전지휘권이 처음으로 이양된 ‘7월14일’의 숫자를 거꾸로 조합한 것이 ‘4월17일’이라는 정부당국자의 배경 설명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정부 들어 전작권 환수를 놓고 보수단체들의 강한 반발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재향군인회와 성우회, 자유시민연대 등은 ‘북핵폐기와 한미연합사 해체 반대 1000만명 서명보고대회’를 열고 한미연합사 전작권 전환 연기를 촉구하고 있죠.

보수단체들은 예정대로 한국이 전작권을 단독 행사할 경우 한미연합사가 해체돼 한미동맹이 흔들리고 안보 불안이 가중될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지난 5월말 이상희 국방부 장관은 로버트 게이츠 미 국방장관에게 이런 보수 쪽 우려를 전달하는 방식으로 전작권 전환 시기 연기를 간접적으로 타진하기도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죠. 물론 미국은 기존 일정에 변화가 없을 것임을 재확인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작전통제권을 무시하고 12.12 군사 반란을 일으켰던 당사자들이 거리에 나와 작전통제권을 걱정하는 모습은 차라리 희극에 가깝습니다. 더욱이 그분들이 우리 공군 조종사들의 안전을 크게 위협할 제 2롯데월드 허가문제에 대해서는 입을 닫고 침묵하고 계셨던 걸 보자면 더더욱 할 말을 잃게 됩니다.

 

 

1950년 7월 25일, 노근리 양민 학살 사건 발생

 

 

한국전 초기이던 지난 1950년 7월 25일부터 29일 사이 북한군 공격에 밀려 후퇴하던 미군이 충북 영동군 노근리에서 피난민 대열에 항공기 공중공격과 기관총 공격 등을 가해 2백여명 이상의 사상자를 낸 사건으로 지난 1999년 9월29일 AP통신의 보도로 세간에 알려지게 됐다.

 

당시 영동군 황간면 주곡리와 임계리 주민 5백여명은 50년 7월25일 밤 미군의 인솔에 따라 국도를 따라 대구방면으로 피난가던 중이었으며, 첫날 황간면 하가리에서 노숙을 하다 의사소통 미숙 등으로 1-4명이 사살되는 것으로 사건은 시작됐다.

 

이어 미군은 7월25일 정오께부터 29일 새벽 5시까지 노근리 부근 수로와 쌍굴다리 등지에 흩어져 있던 피난민들에게 항공기 기총소사와 포격, 기관총 사격 등을 가했다고 당시 목격자와 피해주민들은 증언하고 있다.

 

당시 투입된 미군은 미1기병사단 7연대 2대대 H중대로, 피난민을 통제하기 위해 무력사용이 불가피했다고 주장했다.

 

현재 영동군청에 접수된 피해 신고자는 사망 177명, 부상 51명, 행방불명 20명등 248명에 달하고 있으며, 피해주민들의 자체 집계만도 사망 124명, 부상 45명, 기타 2명 등 모두 171명에 이른다.
(서울/연합뉴스)  2001.01.12

1950년 7월 27일 - 채병덕 육군 총참모장 전사

 

 

1948년 10월 제주도를 방문한 채병덕 육군 총참모장. (뒷줄 오른쪽에서 6번째 정모 차림)


1950년 7월 27일, 제2대와 4대 육군 총참모장을 지낸 채병덕 소장이 경남 하동에서 전사합니다. 평양 태생으로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일본군 소좌로 해방을 맞이했던 채 소장은 건군에 참여해 남조선 국방경비대 1연대장과 4여단장, 그리고 오늘날의 합참의장에 해당하는 국군참모총장과 육군총참모장을 역임합니다.

1949년 10월 남북한 간의 물자교역과정에서 발생한 남북교역사건과 일본군 선배였던 김석원 장군과의 불화로 해임, 예편되었다가 두 달 후 국방부 병기 행정 본부장으로 복귀하였고 1950년 4월 말에 제 4대 육군총참모장 겸 육해공군총사령관으로 취임합니다.

야전 경험이 없는 병기 장교 출신이었던 채 소장은 거듭 올라오는 북한의 공격 정보에 적절히 대처하지 못하고 무방비 상태로 전쟁을 맞이하죠. 전사 연구자들은 그의 대표적 작전 실패 사례로 한강 이북에 국군 5개 사단을 방치한 채 단행한 한강교 폭파 지시와 육사생도들의 전선 투입, 무리한 의정부 반격 등을 꼽습니다.

특히 서울 사수라는 명분으로 26일과 27일, 후퇴하는 병력을 긁어모아 의정부 전선에 축차 투입한 사례는 전쟁 초기 패인의 하나로 지적되고 있습니다. 일단 방어선이 무너진 상황에서 한강 등의 천연 장애물을 이용해 새로운 방어선을 구축했어야 했는데도 이를 무시했다는 것이죠.

당시까지도 전황 파악도 제대로 못하고 “명령만 있으면 나흘 안에 평양을 점령할 수 있다”고 호언장담했던 채 소장이었으니 당연한 결과이기도 했습니다.

결국 그는 패전의 책임을 뒤집어쓰고 1950년 6월 30일 육군총참모장직에서 해임되어 실체도 없는 ‘경남 지구 편성군 사령관’이란 직책으로 좌천되었죠. 7월 23일, 국방부장관 신성모는 채병덕에게 편지 한 통을 보냅니다.

“귀하는 서울을 잃고 중대한 패전을 당했다. 책임은 중하고 크다. 그런데 지금 적은 전남에서 경남으로 지향하고 있다. 이 적을 막지 않으면 전 전선이 붕괴될 것이다. 귀하는 패주 중인 소재 부대를 지휘해서 적을 격퇴하라. 귀하는 선두에 서서 독전할 필요가 있다.” 당시 방호산 소장이 지휘하는 인민군 제 6사단은 이미 호남을 점령하고 경남을 향하고 있었죠.

온창일 육군사관학교 전 교수는 채병덕 소장의 최후에 대해 이렇게 서술하고 있습니다.

하동에 도착한 채병덕 소장은 진주의 미19연대장에게 하동의 중요성을 설명한 다음 보좌관을 대동하고 7월 26일 하동으로 향했다. 하동 확보를 위해서 출동한 29연대 3대대장(Harold W. Mott 중령)과 하동으로 향하던 채병덕 소장은 7월 27일 이른 아침에 아군의 전방 중대장(L중대장 George F. Sharra 대위)이 북한군 첨병을 공격하면서 확보하고 있던 하동 동쪽 2㎞ 지점인 ‘쇠고개’ 마루로 단숨에 올라가 하동 탈환작전을 논의했다.

이때 병사들의 개인호 구축을 독려하던 L 중대장은 1개 대대 규모의 병사들이 접근해 오는 것을 목격했으나, 이들이 한국군 복장을 입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확인하고자 지근거리에 올 때까지 사격을 하지 않고 있었다.

이들의 선두가 40m까지 근접했을 때 채병덕 소장은 “너희들은 적이냐? 아군이냐?”라고 크게 소리쳤다. 그러나 이들의 대답은 소총사격이었다. 이로써 채병덕 소장은 그 자리에서 전사하고, 미29연대 3대대장과 참모들은 사방으로 흩어졌다.

채 총장 밑에서 작전국장을 지낸 강문봉 장군은 “그의 군사전문지식 결여와 작전지휘관으로서의 전술 능력 부족이 그를 패장으로 이끌었다”고 평했습니다.

1950년 8월 25일 - ‘윌리엄 딘’ 소장, 북한군의 포로가 되다

 

 

대전 갑천변에 방어선을 구축한 미 24사단 19연대 병사들.

한국전쟁 초기, 전황은 한국군과 UN군에게 극히 불리하게 전개되고 있었습니다. 개전 3일 만에 서울을 내준 한국군은 육군본부를 대전으로 옮겼고, 한국 파병을 결정한 트루먼 대통령은 극동군 사령관 맥아더 원수에게 일본에 주둔 중이던 미 지상군을 한국전선으로 파견할 것을 명령합니다. 당시 한국에 가장 먼저 도착한 부대가 바로 스미스 기동부대로 알려진 미 제 24사단의 1개 대대였습니다. 일본 큐슈에 주둔하고 있던 미 24보병사단의 사단장은 ‘윌리엄 딘’ (William F. Dean) 소장이었죠. 그는 해방 후 남한의 정부수립 직전까지 약 10개월간 미 군정장관을 지내기도 했던 인물이었습니다.

 

 

'윌리엄 F. 딘' 소장.

24사단의 선발 부대로 파견되었던 스미스 부대가 7월 5일, 오산 죽미령 전투에서 인민군에게 전멸에 가까운 참패를 당한 후, 미 24사단은 대전을 중심으로 방어선을 펼쳤습니다. 24사단에게 부여된 것은 북한군의 남하 속도를 늦추는 지연작전 임무였습니다.

죽미령에서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당시 미군 지휘부는 인민군의 전투 능력을 상당히 과소평가하고 있었죠. 딘 소장도 인민군을 ‘농민군’으로 부를 정도로 얕잡아 보고 있었습니다. 우세한 제공권을 바탕으로 약간의 지상군 병력이면 북한군을 격퇴할 수 있으리라 믿었던 미군은 그 대가를 톡톡히 치러야 했습니다.

 

 7월 19일, 인민군 제 3사단은 대전 공격을 개시합니다. 대전 비행장에 진지를 구축하고 있던 미군 포병대에 인민군의 포탄이 떨어지는 것을 시작으로 대전 공방전이 벌어지죠. 이날 밤, 인민군이 대전-금산간 도로와 대전-대구를 연결하는 도로를 차단하는 한편, 대전 서쪽으로도 진출하자 미 24사단은 시내에서 포위되어 버렸습니다.

 

1950년 7월 초, 대전으로 이동하기 전에 '워커' 미 8군 사령관(좌)와 이야기 나누는 '딘' 장군

7월 20일, 인민군의 보병과 전차가 대전 시내로 돌입하자 곳곳에 고립된 채 분산되어 있던 미군은 붕괴되기 시작합니다. 사단장 딘 소장이 직접 로켓포를 잡고 전차를 공격했지만 이미 전세는 북한군 쪽으로 기운 후였습니다.

같은 날 오후 6시 미군은 조직적 저항을 포기하고 퇴각을 시작했지만 대부분의 미군 부대가 북한군의 포위망을 뚫지 못하고 괴멸되었습니다.

대전 전투에 투입된 미 24사단 병력 3,933명중 전사하거나 인민군에 포로로 잡힌 사람이 1,150여 명이었고, 간신히 목숨을 부지한 병사들도 대부분의 장비를 잃고 맨몸으로 도망쳐 나와야 했습니다.

미 24사단은 충북 영동으로 진출해 있던 미 제 1기병사단의 구원으로 간신히 전멸을 면할 수 있었습니다.

 

딘 소장도 소수의 부하들과 함께 도보로 후퇴 길에 올랐습니다. 그러나 옥천-금산 분기점에서, 길을 잘못 든 것이 그에게는 운명이 갈림길이 되고 말았죠. 옥천 쪽으로 가야했지만, 금산으로 잘못 가고 만 것이었습니다.

더군다나 산속을 헤메다가 낭떠러지에서 굴러 의식을 잃었던 딘 소장은 부하들과도 헤어지고 말았죠. 그를 찾지 못한 부관이 사단장의 실종 사실을 상부에 보고한 것이 7월 22일의 일이었습니다.

홀홀단신으로 적진에 남게 된 딘 소장은 풀뿌리와 산짐승을 잡아 연명해가며 36일간을 산중에 숨어 남하하다가, 8월 25일 전북 진안 부근에서 인민군에게 체포되었습니다. 86Kg까지 나가던 체중도 도피생활 중에 30Kg 가까이 줄어 있었죠.

1953년 9월 4일, 첫 번째 미군 포로로 송환될 때까지 만 3년 동안 포로 생활을 해야 했던 딘 소장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그 시간들을 ‘주검으로서의 3년’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적의 포로가 되는 것이 군인으로서 최대의 불명예라고 생각했던 사람이었기에 그 고통이 더 컸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한국에 도착했을 때 1만 6천명의 병력과 5천 여 대의 차량을 보유하고 있던 미 24사단은 7월 5일 죽미령 전투를 시작으로 7월 21일 옥천 전투를 치를 때까지, 17일간의 전투기간 중 모두 7천 여 명의 병력과 주요 장비의 60%를 상실했죠. 전투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고 적을 얕잡아본 오만의 대가였습니다

 

1950년 10월1일, 육군 제3사단 23연대 38선 넘어 북진 개시

 


1950년 10월 1일, 한국전쟁이 터진 후 최초로 육군 제 3사단 23연대 3대대가  38선을 넘어 북진을 시작합니다. 인천 상륙작전에 성공한 국군과 UN군은 9월28일 서울을 수복하고 모든 전선에서 공세로 전환합니다.

 

당초에 UN군 사령부에서는  북한에 대한 반격을 38도선 이남으로만 한정하고, 모든 작전부대의 진격을 38선에서 멈추라는 지시를 내렸지만 이승만 대통령은 국군 단독으로 38선을 넘어 북진할 것을 명령합니다.

이에 따라 국군 총 참모장 정일권 중장이 3사단 23연대 전선을 시찰하면서 작전명령을 하달, 38선 남쪽 2km 지점인 강원도 양양군 현남면 인구리에 주둔하고 있던 3대대병력이 전군 최초로 38선을 넘어 북진을 시작합니다.

 

 

다음은 신동아 2006년 6월호에 실린 기사를 부분 발췌한 것입니다.

 

수도 환도식이 열린 다음날(9월30일) 예하 두개 사단(수도-3)을 38선에 도달시킨 그는 정일권 총참모장에게 전화를 걸어 쩌렁쩌렁하게 외쳤다."38선에 도달했다. 각하께서 북진명령만 내 리시면 당장에 38선을 걷어차고 밀고 올라가겠다!"

 

9월29일 환도식에서 이대통령은 맥아더에게 "38선 돌파"를 설파했다. 이에 대해 맥아더는 "우리 목표는 인민군 기본 전력의 섬멸이다. 38선 이북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다. 군사상의 추적권은 승자의 당연한 권리다"라고 박자를 맞췄다.

 

그러나 "이틀 여유를 달라. 10월1일 김일성에게 항복을 권유하겠다. 김일성은 당연히 버틸 테니까, 그것을 빌미로 북진하도록 하겠다. 이는 워싱턴과도 합의한 사안이다"라고 설명했다. 이때 이대통령이 한 대꾸가 걸작이다. "알겠다. 그런데 사기충천한 현지 부대가 무슨 실수를 저질러도 양해해 주기 바란다."

(중략)

 

다음날 두 사람이 주문진의 3사단 사령부로 가자 이종찬 준장이 "23연대장 김종순(金淙舜) 대령이 한 시간이 멀다 하고 돌파명령을 재촉한다. 잠시 후 두 사람은 인구리의 23연대를 찾았다. 연대장 김 대령은 "병사들이 38선 팻말을 걷어차고 밟아 뭉개고 있다.군화가 다 닳을 지경이다. 38선이 뭐냐며 총질을 해대는 병사도 있다. 이러다간 큰 사고가 날 수도 있다"며 자랑 반 위협 반의 보고를 했다. 이때 김대령 앞으로 "수도사단 1연대가 38선에 도달했다"는 무전이 날아왔다.

 

그 즉시 김대령은 '총참모장 각하. 수도사단 1연대가 먼저 38선을 돌파하면 저는 연대원 앞에서 배를 갈라야 합니다. 맥아더의 명령이라 해서 선봉을 빼앗겼다는 원망을 듣고 싶지 않습니다. 그리고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하더니 그 즉시 무전병을 불러 예하 대대를 호출했다."금강산, 금강산. 여기는 백두산이다. 대대장 바꿔라!"

 

잠시 후 김대령은 "여기 총참모장 각하가 와 계시니 지금 어디에 있는지 직접 보고 드려라!"하고 말했다. 이어 그는 정 총참모장에게 수화기를 건네며 "3대대장 허형순(許亨淳)소령입니다. 직접보고를 받으시지요"고 말했다.

 

수화기를 타고 오는 허소령의 목소리는 아주 당당했다."저희는 38선 북쪽 12km인 양양 뒷산에 있습니다. 병력은 1개 중대입니다." 정총참모장은 속으로 '잘했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자중하라."는 말로 통화를 끝냈다.

 

이때가 10월1일 오전 11시30분부로 38선을 돌파해, 북진을 개시하라"고 명령했다. 그러자 김백일 군단장이 김종순 대령에게, "23연대는 현위치에서 38선을 걷어차고 북진을 개시하라. 제3사단장을 대신하여 제1군단장 김백일!"이라고 소리쳤다.

이로써 3사단은 최초로 38선을 돌파한 부대가 되었다. 1950년 12월 3사단은 국군으로서는 가장 북쪽인 혜산진까지 진격한 예하 26연대를 수도사단으로 보내고 수도사단에 속해 있던 18연대(일명 백골부대)를 배속받는다.

 

1962년 정우주 사단장(준장) 때 3사단은 ' 부대 별칭' 공모를 했는데, 부대원들은 압도적인 다수로 18연대의 별명인 '백골'을 추천했다. 이에 따라 3사단은 '백골사단'이 되고, 18연대 는 진짜 백골이라 하여 '진(眞)백골', 서북청년단 출신이 절대 다수였던 18연대 1대대는 '진진백골' 부대가 되었다.

 

동해안 7번 국도를 따라 하조대 해수욕장 가는 길에 38선 휴게소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 휴게소 근처에는 광정천이라는 조그만 하천이 있습니다. 인구리와 기사문리의 경계가 되는 이 조그만 하천에는 ‘돌파교’라는 다리가 걸려 있는데, 바로 육군 3사단의 북진을 기념하기 위해서 이름붙였다고 하는군요. 휴전 후 정부는 대통령령 제 1173호(1956년 9월 21일)에 의거, 10월1일을 국군의 날로 제정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1950년 11월 8일 - 세계 첫 제트전투기 교전

 


 
한국전이 한창이던 1950년 오늘, 압록강변 신의주 상공에서 역사상 최초로 제트 전투기 끼리의 전투가 벌어집니다. 인천 상륙작전에 성공한 UN군과 국군은 파죽지세로 북진했지만, 11월 초 중국군의 개입으로 큰 곤경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중국군의 개입과 비슷한 시기에 등장한 공산군의 후퇴익 제트전투기는 이때까지 압도적인 전력으로 공중우세를 지켜오던 UN군에게 큰 위협이 되기 시작했죠.  

 

사실 전쟁 발발 3일째인 6월 27일 미 공군의 F-82전투기가 김포 상공에서 소련제 야크(Yak) 전투기를 격추 시킨 이래 한반도의 제공권은 미군이 쥐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나타난 소련제 미그(MIG)-15 전투기의 출현은 가히 ‘미그 쇼크’(MIG SHOCK)라고 불릴만한 충격적인 사건이었죠.

 

최초의 제트 전투기간 공중전은 미군의 승리로 돌아갔습니다.

이 날, 미 공군은 폭격에 나선 B-29 폭격기 엄호를 위해 4대의 F-80기를 출격 시켰고, 이를 막기 위해 6대의 미그 15기가 요격에 나섰던 것입니다. 세계 최초로 벌어진 제트 전투기끼리의 대결이었고, 미-소 양 강대국이 자랑하는 최신 병기간의 격돌이었습니다.

 

역사적인 첫 번째 대결의 승리는 미 공군에게 돌아갔습니다. 러셀 브라운 중위가 조종하는 F-80기가 미그기 한 대를 격추 시킨 것입니다. 나머지 5대의 미그기들은 도주하고 말았죠.

 

 

 

홀연히 등장한 Mig-15는 미 공군에게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 승리는 F-80기의 성능이 우수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대부분이 신참이었던 중국 조종사들과 2차 대전에 참전한 베테랑들로 구성된 미군 파일럿들 간의 기량 차이 때문이었습니다.

 

항공 기술자들의 분석에 의하면 제트기 성능 자체로는 미그-15기의 성능이 한 수 위였죠. 영국제 롤스로이스 엔진을 카피한 우수한 엔진에다 37밀리 기관포 1문, 23밀리 기관포 2문 등 강력한 무장까지 갖춘 미그-15는 당시 미 공군과 해군의 주력 전투기인 F-80과 F9F의 성능을 상회하고 있었습니다.

 

 

한국전 당시 미그-15기의 조종은 중국군과 비밀리에 참전한 소련군, 그리고 소수의 북한군 파일럿들이 맡고 있었습니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중국군 조종사들의 능력이 향상되고 노련한 소련군 조종사들이 비밀리에 참전해 미그기를 몰게 되자 미 공군의 손실도 커져갔습니다.

 

1951년 4월 12일은 미 공군 역사에서 ‘암흑의 날’로 기록될 만합니다. 압록강 철교를 폭격하기 위해 미군은 72대에 달하는 B-29 폭격기와 호위 임무를 맡은 F-80 전투기 32대를 출격시켰고, 소련 공군도 이에 맞서 60대의 전투기를 발진시켰습니다.

 

이 날 공중전에서 소련 공군은 단 한 대의 손실도 없이 20여대의 미군기를 격추하는 전과를 올립니다.

 

미국은 '미그 쇼크'를 상쇄하기 위해 당시 최신예기였던 F-86 세이버 전투기를 긴급 배치 합니다.

 

다급해진 미군은 본토로부터 최신예 F-86 세이버 전투기를 급히 들여와 미그기와의 대결에 투입했죠. 또 미군으로서는 다행스럽게도 중국군은 이 우수한 전투기를 중국 국경지역에서만 작전에 투입했고, 그 보다 남쪽으로는 진출시키지 않았습니다.

 

후일 미군은 미그기가 자주 출몰하는 압록강 바로 남쪽 지역을 ‘미그기 통로’(MIG Alley, 미그 앨리)라고 불렀습니다.

 

미 공군은 공식적으로 한국전쟁 기간 중 미군과 중국군간의 교환비율(아군의 항공기 1대가 떨어질 때 적 항공기와의 결과 비율)을 1:10이라고 밝혔습니다. 

 

 

 

'미그기 통로'(미그 앨리), 출처='폭스마우스'님의 홈페이지 '불타는 하늘'

 

 

그런데 최근 밝혀진 중국 측의 자료를 보면 이런 미군 측의 자료는 상당히 과장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작년 6월, 중국 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사에서 발행되는 환구시보(環球時報)의 보도에 따르면 한국 전쟁 당시 격추된 미군기는 모두 1106대로 소련 공군의 손실 335대에 비해 3배 이상 많았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한국전에 참전했던 소련 조종사의 회고록을 인용한 이 보도를 보면, 소련 공군이 한국전에 처음 모습을 드러낸 것은 1950년 11월 8일로 최초의 제트 전투기끼리의 교전이 있었던 날이었습니다.

 

당시 소련은 미국과 전면전으로 비화할 경우 제3차 세계대전이 발발할 것을 우려, 자국 조종사들에게 중국 군복을 입혀 위장을 시키고 조종사간 교신도 중국어와 한국어로만 하도록 지시했습니다.

 

작전 범위도 압록강과 청천강 사이로 엄격히 제한했다고 환구시보는 전하고 있습니다.

 

 

F-86기의 건카메라에 잡힌 미그기의 피격 순간.

또 이 신문은 미그-15기가 한국전쟁 기간 동안 모두 651대의 B-29폭격기를 격추 시켰으며, 이 때문에 미 극동 공군의 전략 폭격 능력은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고 밝혔습니다. “이 때문에 미국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소련, 중국, 북한 등에 원폭을 투하하겠다는 구상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 이 신문의 결론입니다. 

 

밀리터리 마니아들 사이에 흔히 회자되는 경구 하나가 있습니다. “전투기 조종사는 영화를 만들고, 폭격기 조종사는 역사를 만든다.”는 말인데요, 한국전에서 새로운 역사를 써내려 간 것은 바로 이 미그기 조종사들이 아니었나 생각되는군요.  


 

1950년 12월 12일 - 흥남철수 작전 개시

 

 

"그날 아침의 배는 여섯 시 십오 분에 닿았다. 눈바람을 무릅쓰고 얼음판 위에서 밤을 새운 군중들은 배가 부두에 와 닿는 것을 보자 갑자기 이성을 잃은 것처럼 와- 하고 소리를 지르며 곤두박질을 하듯 부두 위로 쏟아져 나갔다.

물론 대부분의 군인가족 관계와 기독교 관계에 등록된 사람들이었으나 간혹 일반 등록자와 무등록자도 섞여 있었다. 부두 위는 삽시간에 수라장이 됐다.

공포가 발사되고 호각이 깨어지고 동아줄이 쳐지고 해, 일단 혼란이 멎었으나 그와 동시, 이번에는 또 그 속에 아이를 잃어버린 어머니, 쌀자루를 떨어뜨린 남편, 옷보퉁이가 바뀐 딸아이들의 울음소리와 서로 부르고, 찾고, 꾸짖는 소리로 부두가 떠내려 가려는 듯했다. 그들은 모두 이 배를 타지 못하면 그대로 죽는 것으로 생각하는 듯했다.” (김동리 단편소설 흥남철수 中에서)

 

1950년 오늘, 한국전의 비극적인 한 장면으로 각인된 흥남철수 작전이 시작됩니다. 인천상륙 작전 이후 쾌속으로 북진했던 국군과 UN군은 연내에 전쟁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는 낙관을 하고 있었습니다.

국군 6사단 7연대가 수통에 압록강 물을 담아 이승만 대통령에게 전달하는 이벤트를 벌인데 이어, 11월 21일에는 미 육군 7사단이 백두산 아래 혜산진을 점령합니다. 동부전선에서도 미 해병 1사단이 장진호 지역으로, 국군 1사단과 수도 사단이 청진 바로 아래 성진까지 북상해 있었죠.


하지만 중국군의 개입으로 전세는 순식간에 변하기 시작합니다. 당초 맥아더 장군은 북진을 시작할 때, 미 8군을 주력으로 하는 서부군과 미 10군단을 주력으로 하는 동부군 으로 병력을 나누었는데, 평양-신의주-압록강을 향해 진군하던 서부군과 원산에 상륙해 동해안을 따라 북상하던 동부군 사이에는 거의 80km에 달하는 간극이 벌어져 있었습니다.

험준한 산악지대였던 이 지역에 대한 정찰과 경계를 게을리 한 결과, 맥아더는 뼈아픈 대가를 치르게 됩니다. 바로 이 산악지대를 통해 30만에 달하는 중국군의 대군이 스며들어와 서부군과 동부군의 측면을 강타한 것이죠.

 

개마고원의 강추위속에 후퇴하는 미 해병대

 

중국군의 기습 공격으로 국군과 UN군은 심각한 타격을 입었습니다. 국군 2군단은 해체되었고, 국군의 3개 사단과 미 제 2 보병 사단이 전투력을 상실하고 재편성에 들어가야 했습니다.

특히 서부전선의 미 제 8군이 중국군의 2차공세로 12월 6일 평양을 내어주고 임진강까지 철수하게 되자, 흥남 일대의 미 제 10군단은 측방이 그대로 노출되어 버렸습니다.

육로철수가 사실상 어렵다고 판단한 미 제 10군단은 국군 제 1군단과 함께 함흥-원산 일대에 해안 교두보를 확보하고 방어전을 치를 것을 검토하였지만, 12월 8일 맥아더 원수는 ‘해상을 통한 철수’를 지시 합니다.


 철수작전에 동원된 함정은 LST(Landing Ship Tank, 전차 양륙함) 81척, LSD(Landing Ship Dock, 도크형 상륙함) 11척, MSTS(해상 수송부대) 함선 76척을 비롯해 모두 200척이 넘었습니다.

10여 일간의 흥남철수작전 기간 중 유엔군과 한국 해군 함정, 그리고 민간 선박을 이용해 철수한 인원과 장비는 미군과 한국군이 모두 10만5천명, 차량 17만5천대, 화물 35만 톤에 이르렀고, 피난민이 9만 1천명에 달했습니다.

피난민들의 숫자에는 부모의 품에 안긴 영유아나 어린이들은 포함되지 않았으니, 어선 등 민간 선박을 타고 넘어온 피난민들 숫자를 감안하면 10만 명이 훨씬 넘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특히 7천6백 톤급 미국 상선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1만 4천명의 피난민을 빽빽이 싣고 철수하는데 성공해 기네스북에 기록될 정도였습니다.

당시 뉴스위크는 흥남철수 작전(미군은 ‘철수’가 아니라 ‘병력재배치’를 뜻하는 ‘Redeployment’란 단어를 쓰고 있습니다만)을 일컬어 ‘진주만 이래 최대의 패배’라고 표현하기도 했지만, 한편에선 2차대전 초기의 던커크(Dunkirk) 철수작전에 비견되는 성공적인 작전이었다는 평가도 있죠.

하지만 칼바람 불어 오던 부두에서 피붙이들과 생이별을 해야했던 수많은 한국인들에게는 끔찍한 고통의 기억일 뿐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