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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에 달가듯이 2014. 12. 10. 20:59

역사 속의 전쟁 이야기 1981년 ~ 1990년 

 

 

1981년 3월 17일 - 소련, 위성파괴실험 첫 성공

 

 

 1981년 오늘, 세계 최초로 구소련이 위성파괴실험에 성공합니다. 소련 측이 위성파괴 실험에 사용한 것은 괘도상에 쏘아 올려져 매복하고 있다가 유사시 상대방의 위성을 공격하는 이른바 ‘킬러’ 위성이었죠.

 

수 백 킬로미터 상공에서 정찰과 감시 임무를 수행하는 군사 위성은 상대방에게 커다란 위협이 됩니다. 이렇듯 위협이 되는 적의 인공위성을 무력화시키기 위한 연구는 냉전 기간 중 미국과 소련 양측에서 꾸준한 연구가 이루어졌죠.

상대방의 인공위성을 파괴하는데 사용되는 무기체계를 ‘인공위성 요격체계’ (ASAT, Antisatellite)라고 부릅니다.


1957년, 소련이 세계 최초의 인공위성인 스푸트니크 1호를 발사하는데 성공하고, 다음해에는 미국이 익스플로러 1호를 쏘아 올리는데 성공합니다. 그 뒤로 50여 년간 미소 양국은 모두 5천여기에 이르는 인공위성들을 경쟁적으로 쏘아 올렸고, 그 중 70% 정도가 군사적 용도의 위성이었습니다.

 

이들 군사 위성들을 목적별로 구분하면 크게 조기경보-정찰 기능을 가진 위성과 전투-공격용 위성, 그리고 기상관측 및 통신 등 지원 목적으로 사용되는 위성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먼저 조기경보-정찰 위성에는 적의 탄도미사일 발사와 핵폭발을 탐지하는 조기 경보 위성, 각종 군사시설과 부대 배치를 감시하는 사진 정찰 위성, 바다 위의 함정들을 감시하는 해양 감시 위성, 레이더 파를 비롯한 각종 전자 정보 등을 수집하는 전자정찰 위성 등이 있습니다.

 

전투-공격용 위성은 모두 구 소련이 개발한 무기 체계인데 지구를 도는 괘도 위에서 적국을 직접 핵으로 공격하는 ‘괘도핵폭격시스템’ (FOBS)과 적의 각종 군사 위성을 파괴하는데 목적이 있는 ‘킬러’ 위성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FOBS'는 1977년 미-소간에 체결된 ‘전략핵무기제한 협정’에 따라 개발과 배치가 금지 되어 더 이상 사용되고 있지 않습니다. ‘킬러’ 위성의 경우에는 1968년 이후 모두 15차례에 걸친 실험이 이루어졌죠. 상공의 일정한 괘도를 도는 인공위성은 그 위치를 비교적 쉽게 파악할 수 있고, 대단히 빠른 속도로 이동하기 때문에 위성의 진행경로 전방에 다수의 금속 파편을 뿌려 놓으면 충분한 파괴효과를 볼 수 있습니다.

 

‘킬러’ 위성은 목표로 설정된 적 위성을 향해 스스로 괘도를 변경해 접근, 자폭함으로써 다수의 금속 파편 세례를 퍼붓는 방식이었죠.

 


 미 공군 F-15 전투기에서 발사되는 'ASAT' 미사일.

 

1983년 8월 18일 소련 공산당 서기장 ‘안드로포프’가 “소련 이외의 나라가 ‘인공위성요격체계’를 배치할 때까지 이 무기의 개발을 위한 실험을 일방적으로 중단 한다”고 선언할 때까지 소련은 표적용 위성을 18기, 킬러 위성을 20여 기 발사한 것으로 전문가들은 추측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실용화된 위성공격 무기체계는 미국 공군이 실전 배치한 ‘전투기 발사형 위성요격무기’가 있습니다.  

 

 

 

1981년 6월 7일 - 이스라엘 공군기, 이라크 ‘오시라크’ 원자로 폭격

 

1981년 6월 7일 오후 2시 55분, 이스라엘이 점령하고 있었던 시나이 반도 ‘에치온’ 공군 기지에서 F-15A 2대와 F-16A 8대가 이라크를 향해 발진합니다. 1000Kg짜리 폭탄 2개씩을 장착한 전폭기들은 이륙 후 레이더 탐지를 피하기 위해 120m의 초 저공으로 요르단과 사우디아라비아 상공을 거쳐 1000Km를 날아갑니다.

이스라엘 공군의 목표는 바그다드 남동쪽 18Km 지점에 위치한 ‘알 투와이타’ 핵 연구센터, 이곳에는 40MW급 경수원자로 1기가 건설되어 있었습니다. 이 원자로를 설계한 프랑스인들은 이집트 신화 속에 등장하는 죽음의 신 ‘오시리스’(Osiris)와 ‘이라크’를 합쳐 ‘오시라크’ (Osiraq)라고 불렀죠.

 

원자로 건설에 기술적 지원을 한 프랑스는 고농축 우라늄 12.5Kg도 이라크에 팔았습니다. 이스라엘 정부는 갖은 방법을 동원하여 원자로가 완공되는 것을 먹으려 노력합니다.

 

1979년 이라크로 향하는 화물선에 선적을 기다리던 원자로 노심에 대한 파괴 시도가 있었고, 이듬해에는 프랑스 파리를 방문 중이던 이라크의 핵개발 책임자가 호텔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하죠.

 

이 사건의 유일한 목격자였던 프랑스인 매춘 여성은 경찰에 증언을 하기도 전에 의문의 교통사고로 사망합니다.

 

이밖에도 원자로 건설에 참여한 프랑스인 기술자에 대한 살인미수 사건 등 이라크 원자로를 둘러싼 수상한 사건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집니다. 이스라엘의 첩보기관 모사드 요원들의 소행이라는 심증만 있었을 뿐 범인이 잡히지는 않았죠.

 

이스라엘 정부는 외교적으로도 프랑스 정부가 이라크에 대한 핵기술을 제공하는 것을 막으려 백방의 노력을 다하지만 오시라크의 원자로는 차근차근 건설되어 갑니다. 마침내 이스라엘은 군사적 수단을 사용해 오시라크 원자로를 파괴할 계획을 세웁니다. 

 

 

이스라엘 공군기의 폭격 경로

 

 ‘바빌론’이란 작전명으로 진행된 원자로 폭격작전에 동원된 이스라엘 전폭기들은 저공비행으로 목표에 다가가다 오시라크 원자로 동쪽 20Km 지점에서 폭격 태세에 들어갑니다. 전폭기들은 비행고도를 2,000m까지 높인 뒤 시속 1천100㎞의 속도로 오시라크 원자로를 향해 급강하다가 폭탄을 투하합니다.

 

 5초 간격으로 터지도록 시한장치가 돼 있던 이들 폭탄 중 불발탄 2개를 제외한 14개가 폭발해 막 가동에 들어가려던 이라크 최초의 원전 시설은 완전한 폐허로 변하고 말죠. 이 공격으로 이라크 군인 10명과 프랑스인 원전기술자 1명이 사망합니다. 이스라엘 공군기의 손실은 단 한 대도 없었습니다.

 

군사적 성공과는 별개로 이스라엘 정부는 국제적인 비난여론에 직면합니다. 영국 수상 ‘마가렛 대처’는 “어떤 명분으로도 정당화 될 수 없으며, 국제사회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라고 비판했으며, 언제나 든든한 뒷배였던 미국의 UN 주재 대사도 이 공습을 소련의 아프간 침공에 빗댈 정도였으니까요.

 

 

 

또한 오시라크의 원자로가 실제 이스라엘에 위협이 되었는지에 대한 문제제기도 끊이질 않았습니다. 영국의 BBC 방송은 2006년 “당시 오시라크에서 일했던 이라크 과학자들은 오시라크 원자로가 매우 초보적이었다고 증언했다”고 보도했죠. 또 당시 이곳을 사찰했던 국제원자력기구(IAEA)는 어떠한 ‘비밀 프로그램’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이스라엘의 오시라크 공습은 이후 이라크의 핵개발 의지를 부추겼고,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란 등의 비밀 핵 프로그램 필요성을 자극시켰다고 BBC는 평가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공습으로 가동불능 상태에 있던 오시라크의 원자로는 1991년 걸프전쟁 당시 미 공군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고 맙니다

 

 

 

1981년 10월 27일, 소련 잠수함 'U-137' 스웨덴 영해에서 좌초

 

‘Whiskey on The Rocks’ 사건 발생

 

 

소련 해군의 위스키(Whiskey)급 잠수함. 

 

 곰PD는 양주를 마실 기회가 드물지만, 위스키를 마실 때는 글라스에 얼음 서너개를 띄우고 위스키를 부은 후에 마시는 ‘온더락스(on the rocks)’가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하더군요.

 

이렇게 하면 상온의 위스키를 그냥 마시는 것보다 위스키 고유의 맛과 향이 증가된 답니다. 오늘은 냉전의 막바지에 벌어진, 술 말고 또 다른 ‘위스키 온 더 락스’ 사건이 벌어진 날입니다.

 

 

냉전 기간 나토(NATO)군은 바르샤바 조약군의 항공기나 함정에 고유한 코드 네임을 붙였습니다. 이것은 실제 그 장비를 생산한(주로 소련이겠죠?) 국가의 공식적인 명칭과는 상관없는 것이었죠.

 

예를 들면 소련의 MIG-23, MIG-25 전투기에는 각각 Foxbat(폭스배트), Flogger(플로거)라는 이름을 붙이는 식입니다. 다만 아무 이름이나 붙이는 것은 아니고 나름대로의 규칙이 있어서 F로 시작되는 단어는 전투기(Fighter)를, ‘폭스배트’처럼 두 음절로 발음되는 단어는 제트엔진을 장착한 항공기를 의미했죠.

 

소련 해군의 잠수함에는 영문 알파벳의 폰에틱 코드(A는 알파, B는 브라보, C는 챨리...하는 식의)를 부여했습니다. 로미오(R)급, 쥴리엣(J)급, 양키(Y)급, 이렇게 말입니다.

 

그런데 소련의 잠수함 중에는 위스키(W)급이라고 분류되는 것들도 있었죠. 2차 대전이 끝난 뒤 독일의 U보트 설계도를 입수하여 건조한, 유럽 연안에서의 작전을 염두에 둔 비교적 작은 잠수함이었습니다.

 

냉전이 시작될 당시 소련의 해군력은 미국에 비해 훨씬 낙후되어 있었기 때문에, 소련의 잠수함 건조는 생산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추진되어 1949년부터 1958년까지 무려 236척의 ‘위스키’급 잠수함이 건조되었습니다. 이 잠수함들은 주로 소련의 해상 접근로 상의 방위에 투입되었죠.

 

이 당시, 소련에 인접한 스웨덴은 소련 잠수함들의 잦은 영해 침범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습니다. 그 때마다 항의를 했지만, 소련 정부는 모르쇠로 일관했습니다.

 

1981년 10월 27일, 스웨덴의 군사제한 구역인 카를스크로나 군도를 침범한 소련해군 북해함대 소속의 위스키급 잠수함 ‘U-137’이 좌초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출입이 엄격하게 통제된 해군 기지 근처까지 들어 온 소련 잠수함은 정보 수집을 위해 스웨덴 영해를 침범한 것으로 보였죠.

 

하지만 소련 당국은 자국의 잠수함이 스웨덴 영내로 깊숙이 들어 간 것은 단순한 ‘항법상의 실수’였으며, 단 한 사람의 스웨덴 군인이라도 소련 잠수함 내부로 들어간다면 전쟁을 선포하는 것으로 받아들이겠다는 으름장을 놓습니다.

 

하지만 영토 주권을 침해당한 스웨덴의 대응도 만만치 않아 소련 대사를 소환해서 강력히 항의 합니다. 문제는 오도 가도 못하는 잠수함을 어느 쪽에서 구조하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소련은 군함은 자국 영토의 연장으로 간주한다는 국제관례에 따라 자신들이 하겠다고 주장했죠. 하지만 불같은 국민의 분노를 무시할 수 없었던 스웨덴 정부는 소련측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스웨덴 공군기의 엄호하에 예인되는 U-137함.

 

결국, 스웨덴 예인선이 U-137함을 스웨덴 항으로 예인, 승조원들에 대한 심문과 함내 조사를 한 다음 소련 정부의 공식적인 사과를 받고서야 이 잠수함을 소련측에 인도했습니다. 그리고 이 사건은 냉전 기간 발생한 'Whiskey on the rocks' 사건으로 역사에 기록 됩니다

 

 

 

1982년 2월 26일 - 주한 미 공군, A-10 근접지원기 한국 배치 발표 

 

 

 

A-10 공격기 (이미지 출처 www.fas.org)

 

 

 1982년 오늘, 주한 미 공군이 근접항공지원기인 A-10기 10대를 한국에 배치한다고 발표합니다.

'탱크 킬러', '멧돼지'라는 별명을 갖고 있는 A-10 공격기는 '매버릭'(AGM-65, Maverick) 공대지 미사일과 기갑부대 파괴용 집속탄(CBU), 일반 목적탄 외에 전차 등 장갑차량을 관통할 수 있는 30mm 기관포 등을 갖추고 주로 지상군의 작전을 근접항공지원(Close Air Support, CAS)하는 임무를 수행합니다.

근접항공지원이란 아군 부대와 가까이 위치한 적의 부대나 목표에 대해 항공화력을 동원하여 공격하는 작전입니다. 때문에 적의 대공 미사일이나 대공포에 피격될 위험도 높은 편입니다.

 

 

 

A-10기는 쌍발 제트 엔진을 동체 위에 얹은 독특한 구조의 공격기 입니다

A-10기는 구 소련제 23mm '실카' 기관포 등 각종 대공 포화에도 견딜 수 있는 2중 장갑 구조를 채택하고 있어 피격 시에도 생존성이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죠. 주한 미군의 A-10기 배치는 북한군의 월등한 기갑전력을 견제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7톤이 넘는 무장을 매달고 저공을 저속으로 날며 적 전차와 장갑차량, 레이더 기지 등을 공격할 수 있는 A-10기는 1991년 걸프전에 144대가 투입되어 이라크군의 전차와 장갑차 1천 여 대, 각종 차량 2천 여 대를 파괴하는 전과를 거두기도 했죠. 당시 격추된 A-10기는 4대에 불과했습니다.


작년 연말 미군은 한국에 주둔 중이던 아파치 공격 헬기 대대를 철수시키는 대신 A-10기 1개 대대를 추가로 배치하겠다고 발표했지만, A-10기에 정비소요가 발생했다는 이유로 현재는 주일 미 공군의 F-16 전투기 1개 대대가 대체전력으로 주둔하고 있습니다.

 

 

 

1982년 4월 2일 - 포클랜드 전쟁 발발

 

 

1982년 4월 2일 이른 새벽, 아르헨티나 해병대가 남아메리카 남단 영국령 포클랜드(아르헨티나에서는 ‘말비나스’ 라 부릅니다.) 제도의 수도 ‘포트 스탠리’를 기습 침공함으로써 포클랜드 전쟁의 막이 오릅니다. 우리나라의 전라남도 면적과 비슷한 포클랜드 제도는 아르헨티나로부터 680Km, 영국으로부터는 무려 1만 3천Km나 떨어진 외진 곳으로 당시 인구는 1,800명에 불과했습니다.

오늘날에는 남극 대륙의 전진기지로, 주변에 상당한 양의 석유자원이 매장된 자원의 보고로 주목받고 있지만 당시만 해도 인구의 대부분이 목축업에 종사하는 황량한 섬이었습니다. 이 섬에 분쟁의 씨앗이 뿌려진 것은 제국주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18세기 중엽, 남아메리카 전역에 식민지를 가지고 있던 스페인은 이미 포클랜드에 거주하고 있던 프랑스·영국인들을 추방하고 이곳을 식민지로 지배했습니다. 1808년 스페인이 나폴레옹에 정복돼 막강했던 힘을 잃자 아르헨티나는 1816년 독립을 선포했고, 1820년 이곳에 대한 소유권도 공식 선언합니다.

하지만 1883년, 한창 전성기를 구가하던 대영제국은 막강한 해군력을 앞세워 이 섬에서 아르헨티나 수비대를 몰아내고 자국의 속령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아르헨티나는 그 후 포클랜드 전쟁이 터질 때까지 150여 년 동안 포클랜드 제도의 반환을 영국에 줄기차게 요구하지만, 이빨도 먹혀들지 않습니다.

20세기 들어 계속된 군부 통치가 이어진 아르헨티나의 정치, 경제 상황은 침체의 늪을 벗어나지 못하죠. 1981년 참모총장에서 대통령직에 오른 ‘갈티에리’는 극심한 인플레이션과 실업, 민심이반에 따른 반발을 외부로 표출하고자 포클랜드 침공이라는 초강수를 둔 것이죠.

 

  포클랜드를 침공한 아르헨티나군.

 

 

2천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포클랜드 제도를 침공하고, 1만8천명의 병력을 추가로 파견한 아르헨티나는 그러나 영국의 전쟁의지를 잘못 읽고 있었습니다.  더욱이 남성 우월주의에 사로잡힌 아르헨티나 군부 지도자들은 영국의 여성 총리 ‘마가렛 대처’가 전쟁이라는 모험을 택할 수 없을 것이라고 속단하고 있었죠.

하지만 영국 정부가 이 쓸모없고 황량한 섬에 군대를 보내지 않을 것이라는 아르헨티나의 낙관과는 달리 영국의 여론은 ‘침략자에 대해 응징을 해야 한다’는 쪽으로 기울었고, 침공 3일째 되는 4월 5일 항공모함 2척을 포함한 43척의 기동함대가 편성되어 포클랜드로 항진합니다.

‘철의 여인’ 마가렛 대처 수상이 이끄는 영국 정부는 미국과 UN을 통한 협상을 추진하는 한편 포클랜드 탈환을 위한 무력사용을 준비합니다. 난처해진 것은 미국 정부였습니다. 미국은 영국과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로, 아르헨티나와는 미주기구로 엮여 있어, 대놓고 한쪽 편을 들기가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국무장관 ‘알렉산더 헤이그’를 특사로 양국에 번갈아가며 파견했던 미국정부는 대처 수상의 결연한 전쟁의지와 아르헨티나의 완강한 태도 사이에 고민하다 결국 영국의 편을 들기로 결정하죠.

 

 

 

 

포클랜드 탈환 작전에 동원된 영국군 병력은 모두 9천 여 명으로, 본토로부터 가까워 군수지원이 유리한데다 병력 수에서도 우위에 있는 아르헨티나 군에 비해 열세인 듯 보였지만 전문 직업군으로 이루어진 영국군은 전투원 개개인의 기량이나 지휘관의 능력 면에서 훨씬 앞서 있었습니다.

영국군은 본토를 출발한 뒤 상륙작전이 개시될 때까지 46일 동안 해상에서 실전을 방불케 하는 훈련을 통해 전투에 대비합니다. 또 매서운 추위가 몰아치는(남반구인 포클랜드 제도는 4,5월이 초겨울입니다. -곰PD주) 포클랜드의 기후에 대비해 동계적응 훈련을 병행한 결과 아르헨티나 군에 비해 훨씬 잘 싸울 수 있는 태세를 갖춥니다.

 

 

 

영국 잠수함이 발사한 어뢰에 맞아 침몰하는 아르헨티나 해군 순양함 '제네럴 벨그라노'.

5월이 되자 본격적인 지상전을 앞두고 포클랜드 제도 인근 해상은 첨단 병기들의 경연장이 됩니다. 영국군은 멀리 떨어진 기지에서 공중급유를 받아가며 장거리 폭격기를 동원하고, 항공모함에서는 수직이착륙 전투기 ‘해리어’를 출격시켜 섬에 주둔한 아르헨티나군을 공격합니다.

이에 맞서 아르헨티나군은 영국 기동함대에 대한 공습을 시도하니 양국 전투기간에 격렬한 공중전이 전개되죠. 5월 3일 아르헨티나 해군 순양함 ‘제네럴 벨그라노’가 영국 잠수함 ‘콩커러’의 어뢰에 의해 격침되는가하면, 이튿날에는 영국 구축함 ‘쉐필드’가 아르헨티나 전투기가 발사한 ‘엑조세’ 미사일에 의해 격침되는 일이 발생 합니다. 

 

  '슈페르 에땅다르' 전투기에서 발사되는 '엑조세' 미사일.

 

 

'엑조세' 미사일에 피격당해 불타고 있는 영국 방공 구축함 '쉐필드'.

포클랜드를 탈환하기 위한 상륙장소로 영국군은 수도 포트 스탠리 대신에 섬 반대편 50마일 지점의 산 카를로스항을 택합니다.  물론 최종적인 목표는 포트 스탠리이지만, 그곳에 대한 직접 공격은 수비군의 강력한 저항에 막혀 실패할 가능성이 높았고 아르헨티나군이 미처 예상치 못한 곳에 상륙하여 지상을 통해 포트 스탠리로 진격한다는 계획이었죠.

 5월 21일 새벽 4시, 함포사격과 함께 영국군이 상륙을 개시합니다. 허를 찔린 아르헨티나군은 조직적인 저항을 포기한 채 철수하기에 급급하죠. 5월 27일까지 해안에 교두보를 확보한 영국군은 포트 스탠리를 향해 진격을 개시합니다. 매서운 겨울바람이 몰아치는 50마일의 험준한 산길을 가로질러 진격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더욱이 해안에서 도망친 아르헨티나군은 산 카를로스에서 포트 스탠리에 이르는 산악지형 곳곳에 방어 진지를 구축해 놓고 있었죠. 주요 전투는 5월 28일 ‘다윈’과 ‘구스그린’ 지역에서 벌어집니다. 강한 돌풍과 짙은 구름으로 함포 및 항공기의 지원을 받지 못한 영국군은 아르헨티나군의 기관총 진지 앞에서 수많은 사상자를 냈지만, 대대장이 선두에서 진두지휘하다가 전사하는 등 악전고투 끝에 아르헨티나군을 물리칩니다.

 

6월 12일 야간부터는 포트 스탠리 코앞까지 진출한 영국군과 아르헨티나군 간에 격렬한 전투가 벌어지죠. 포트 스탠리 방어에 동원된 아르헨티나 군은 약 2개 여단 병력으로 2개월간에 걸쳐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있었지만, 그들에게는 전쟁에서 이겨야 한다는 동기가 없었습니다.

결사적으로 공격해 들어오는 영국군 앞에 아르헨티나 군인들 사이에 심리적 동요가 일어나고 한순간에 방어진지는 무너져 내립니다. 소총을 내팽겨 치고 도망하는 아르헨티나군은 이미 군대가 아니라 무질서한 군중에 불과했습니다.

영국군은 패주하는 아르헨티나군을 포위망에 가두고 함포사격과 공중폭격을 통해 압박을 가해 6월 14일, 아르헨티나군의 완전항복을 받아 냅니다. 아르헨티나의 기습침공으로부터 74일만의 일이었죠. 작은 섬을 놓고 치열한 전투를 벌인 결과 쌍방이 입은 피해는 막심했습니다. 영국군은 전사 256명, 부상 2,600명, 아르헨티나군의 인명피해는 전사 670, 부상 994, 포로 10,951명에 달했습니다. 

 

 

패주의 흔적, 버려진 아르헨티나군의 철모들이 뒹굴고 있습니다.

 

 

 아르헨티나군의 패인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군사정권에 의해 정치적으로 졸속 진행된 원정에다 병사 개개인들에게 왜 싸워야한다는 동기를 부여하지 못했던 것이 가장 큰 원인으로 꼽을 수 있겠습니다.  영국의 공수부대, 해병대, 구르카 부대들로 이루어진 정예 직업군대의 전투 기량과 정신력에 미치지 못했다는 것이죠.       

 

 

 

포트 스탠리를 탈환한 영국 해병대원들

 

 

1982년 5월 4일 - 포클랜드 근해서 영국 구축함 '쉐필드',  엑조세 미사일에 격침

 

 미사일에 피격되어 화염을 내뿜는 '쉐필드' (이미지= www.ausairpower.net)

 

포클랜드 전쟁이 한창 불붙던 1982년 오늘, 영국 해군의 최신예 방공 구축함 ‘쉐필드’(HMS Sheffield)가 아르헨티나 해군기가 발사한 엑조세 미사일에 피격되어 침몰합니다. 


 피격 당시 쉐필드는 영국 항공모함 ‘인빈서블’의 15마일 외곽에서 대공방어를 담당하고 있었습니다. 이날 영국 함대를 공격하기 위해 초저공으로 침투한 아르헨티나 해군의 ‘슈페르 에땅다르’ (Super Etendards) 공격기 2대는 영국 군함을 약 25마일 앞두고 표적식별을 위해 고도를 높였습니다.

곧 레이더에 포착된 영국 함대를 확인한 아르헨티나 조종사들은 엑조세 미사일 2발을 발사합니다. 미사일 발사 직후  인빈서블은 레이더로 이를 포착하고 구축함 쉐필드에 정보를 제공했지만, 쉐필드가 해면에 스칠 듯 음속으로 날아오는 엑조세에 대응하기에는 속수무책이었습니다. 결국 쉐필드 선체 중앙부에 한발의 미사일이 적중합니다. 

 

 

 

아르헨티나 해군 항공대 '슈페르 에땅다르'기에 탑재된 엑조세 미사일.

 

엑조세 미사일의 탄두는 폭발하지 않았지만, 피격에 의한 충격과 로켓 추진 연료의 화염으로 쉐필드의 소방시설과 발전시설이 먼저 파괴되고 화재는 삽시간에 배 전체로 번져 갑니다.  특히 상부구조물이 알루미늄으로 만들어져 화재에 취약했던 쉐필드는 고온의 불길 속에 그야말로 녹아내려 갑니다.

 

결국 피격 4시간 만에 길이 125m·폭 14.3m에 최고 30노트의 속도를 낼 수 있었던, 배수량 4,820톤의 최신예 방공 구축함 쉐필드는 침몰하고 맙니다.  영국 해군으로선 사망자만 30명에 달하는 등, 포클랜드전 개전 이래 가장 뼈아픈 손실이었습니다.

 

20여 일 후인 5월 25일에는 영국군 수송선 ‘애틀랜틱 컨베이어’가 엑조세 미사일에 피격되어 닷새 만에 침몰하고 ‘글래모건’은 치명적인 손상을 입었습니다. 이 사건은 전 세계 군사관계자들에게 가히 ‘엑조세 쇼크’라고 불릴만한 충격을 주었고, 현대 해전의 양상은 변화합니다.

 

해군의 주요 전투함들은 공격수단으로 대함 미사일을 경쟁적으로 도입하는 한편, 이에 대한 대응책 마련에 고심하게 되죠.  항공기와 수상함에서 발사하는 대함 미사일의 위협으로 대형 함정이 생존하기 위해선 대함미사일에 대한 방어 능력을 갖추는 것이 필수적인 시대가 도래한 것입니다.

 

 

1982년 11월 18일 - 한국 해군, 한국형 초계함 동해함 진수

 

 

 

1982년 오늘, 우리 해군이 연안 초계를 주목적으로 하는 동해함을 진수 시킵니다. Patrol Combat Corvettes (PCC)로 분류되는 동해함은 국산기술로 만들어진 최초의 초계함이었습니다.

해군은 이듬해인 1983년까지 시범함적인 성격이 강한 동해급(1,100톤급)을 당시 4대 조선조(대우, 현대, 코리아 타코마, 대한조선공사)에서 각 1척씩 생산케 하여 모두 4척을 확보하고, 이함을 확대 개량한 포항급(1,300톤급)을 대량 생산, 1993년까지 23척을 진수 시킵니다.


수적인 면에서 10년이라는 비교적 짧은 기간 동안 확보한 동해급과 포항급 초계함 27척은 한때 우리 해군의 주 전력을 이루었습니다. 
 동해급과 포항급은 변변한 대형 함정을 보유하지 못한 북한 해군에 대해서는 전쟁 억지력을 발휘할 수 있었지만, 3천 톤급 이상의 대형 전투함들로 이루어진 주변국 해군과는 비교대상 조차 될 수 없었죠.

작은 함정은 장기간 항해가 불가능하고, 또 해상상태에도 영향을 많이 받을 수밖에 없어 한때 우리 해군은 ‘바다가 조금이라도 거칠어지면 영해 주권을 포기한다’는 비아냥까지 들어야 했습니다.

 

 

동해급을 확대개량한 포항급 초계함, 사진은 충주함.


현재 해군은 당초 계획보다 축소되긴 했지만 KDX-1, KDX-2, KDX-3 등 신예 구축함들을 속속 진수시켜 실전배치하고 있습니다. 또한 동해급, 포항급 초계함과 울산급 호위함 세력을 대체할 한국형 프리깃 사업(FFK)을 추진하고 있죠.

만재배수량 2천8백 톤급의 한국형 프리깃함에는 SSM-700K ‘해성’ 함대함 미사일과 링스 대잠 헬리콥터가 탑재될 예정입니다.   

 

 

 

1983년 2월 25일 - 북한 공군 이웅평 대위 망명   

 

 

이웅평 대위가 몰고 온 미그-19 '파머'.

 

“여기는 민방위본부입니다. 지금 서울 인천 경기지역에 공습 경계경보를 발령합니다. 국민 여러분 이것은 실제 상황입니다. 지금 북한기들이 인천을 폭격하고 있습니다.” 1983년 2월 25일 오전 10시 58분, 때 아닌 공습 사이렌이 울려 시민들을 깜짝 놀라게 합니다.

 

5분가량 울려 퍼진 공습 사이렌과 다급한 아나운서의 목소리는 전쟁의 악몽을 다시 떠올리게 하기 충분했고, 동네 수퍼에서는 라면, 우유, 밀가루 등의 사재기가 벌어집니다. 이 날의 소동은 스물아홉 살의 북한 공군 이웅평 대위가 MiG-19기를 몰고 서해의 북방한계선을 넘어 오면서 시작되었습니다.


갑작스런 대공경계경보 사이렌이 울리자 시민들은 깜짝 놀라 일손을 멈추고 어리둥절했다. 신문사, 방송국에는 “제트기 폭음이 들린 것 같은데 무슨 일이냐”는 등의 문의전화가 잇따랐고 일부 기업체에서는 민방위 훈련 때의 경계태세를 취하기도 했다.

 

낮 12시쯤 뒤따라 나온 신문호외와 방송뉴스로 미그기 귀순사실을 알게된 시민들은 한때의 놀라움을 말끔히 잊고 미그기 귀순에 온통 화제를 모았다. 서울 동대문 시장의 한 상인은 오랜만에 듣는 낭보에 신문호외를 든 채 “대한민국 만세”를 불러 행인들의 박수를 받기도 했다. (1983.2.26일자 서울신문 11면)


이날 오전 10시 30분쯤, 로켓탄 발사 훈련을 위해 평안남도 개천 비행장을 이륙한 이 대위는 곧 편대를 이탈하여 기수를 남으로 돌렸고, 추적하는 북한기 들을 따돌리기 위해 고도 100미터 이하의 초저공을 전속력으로 남하합니다.

 

빠른 속도로 남하하는 항공기를 포착한 한국 공군은 곧 ‘전투 공중 초계’(CAP, Combat Air Patrol)중이던 F-5 전투기 편대를 출동시켜, 서해 연평도 상공에서 이 대위의 미그기를 발견합니다.

당시 한국군은 미군과 함께 ‘팀 스피릿 83’ (Team Spirit 83) 훈련을 실시하고 있었고, 이에 맞서 북한도 전역에 준전시태세를 선포해 놓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북한 조종사의 망명 소식은 국민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죠.

 

3월 4일, 기자회견에서 이웅평 대위는 자신의 망명동기를 이렇게 밝힙니다. “가끔 비행기 수신기로 남한 방송을 듣고 자유로운 한국생활을 동경하면서, 북한과는 전혀 다른 세계가 있구나하는 생각에 귀순을 결심하게 되었다”라고 말이죠.

 

쿠데타로 집권한 정통성 없는 군부세력들에게 이만큼 좋은 선전재료는 없었습니다. 4월 14일, 여의도 광장에서는 시민환영대회가 열립니다.

 

굵은 빗줄기가 쏟아지는 가운데 2백만의 인파가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습니다. 이 대위에게 꽃다발과 함께 ‘용감한 청년상’이 주어집니다. 만감이 교차하는 듯 눈물을 떨구던 이 대위는 곧 대형 태극기를 들고 흔들며 “대한민국 만세를 외칩니다.

 

 

 한 달 뒤, 한국공군 소령으로 임관한 이웅평 씨는 이듬해 결혼도 하는 등 남한에서의 새로운 생활에 잘 적응해가는 듯 보였습니다. 90년까지는 정보부서에서, 그 이후는 공군대학 교수로 재직하며, 96년에는 대령으로 진급합니다.

 

그러나 2남5녀 중 맏아들이었던 자신의 망명으로 고통을 당했을 북한의 가족들에 대한 죄책감과 그리움은 언제나 그를 짓눌렀습니다. 1997년 11월, 갑작스러운 간경화로 쓰러진 그는 사경을 헤메게 되죠. 투병 1년 만에 95Kg이던 체중이 50Kg까지 줄어듭니다.

 

이듬해 이웅평 씨는 뇌사상태에 빠진 한 여성의 간을 이식 받아 한 때 건강을 되찾는 듯 보였습니다. 통원치료를 받아 오던 이 씨가 간 이식 거부반응으로 쓰러진 것은 지난 2002년 3월의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끝내 다시 일어나지 못하고 2002년 5월 4일, ‘간기능부전’으로 세상을 떠납니다. 그의 나이 48세, 남한으로 망명한지 19년만의 일이었습니다.

 

 

 

생전에 이웅평 씨는 남한에서 1남1녀를 두었습니다.

 

그는 생전에 인터뷰에서 자신의 망명 동기에 대해 이렇게 밝혔습니다. “난 군인으로서 명예로운 사람입니다. 그런 만큼 군인의 도리나 자세도 너무나 잘 알고 있죠. 군인 입장에서 보면 두 군복을 입었다는 건 바로 ‘변절’로 합리화할 수 없는 죄일 겁니다. 하지만 북한이 준전시상태로 진입, 비상경계를 내린 상황에서 전쟁의 위험을 경고하고자 비행기 기수를 남으로 돌린 제 ‘고집’도 옹색한 변명 같지만 전쟁을 막아야 하는 군인 입장에선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고 봅니다. 이 생각엔 평생 변함이 없을 것입니다.

 

이처럼 군인 본연의 의무에 충실하기 위해 기수를 남으로 돌렸던 이웅평 대령이었지만, 꿈에도 잊지 못할 부모형제와 생이별을 선택한 ‘귀순자’로서의 한을 품고 살아야만 했고, 어쩌면 이것이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갔을지도 모릅니다.

 

25년 전 오늘, 제2의 한국전쟁이 일어나지 않을까 걱정했던 그 사건은 한 바탕 해프닝으로 끝났지만, 이웅평 씨의 삶과 죽음은 분단국가의 아픔을 말없이 증언하고 있습니다

 

 

1983년 4월 18일 - 베이루트 주재 미 대사관 폭탄 테러

 

1983년 4월 19일 오후 1시 15분, 레바논 베이루트 주재 미국 대사관에서 강력한 폭발이 일어납니다. 폭발음과 함께 조각난 시체들이 수백m를 날아갔고, 파괴된 차량들이 불붙은 채 공중으로 튀어 올랐습니다. 미국인 17명을 포함하여 모두 63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날의 폭탄 테러는 폭발물 230kg을 실은 트럭 한 대가 대사관 현관으로 돌진해 부딪치면서 발생했고, 7층짜리 대사관 건물의 일부는 각층이 차례로 내려앉으며 포개져 버렸습니다.

사고 직후 베이루트에 주둔하고 있던 프랑스군이 도착해 콘크리트 더미를 헤치며 구조작업에 나섰습니다. 폭발이 일어나던 시각, 자신의 사무실에서 조깅 준비를 하고 있던 ‘로버트 딜런’ 대사는 간신히 목숨을 건졌습니다.

딜런 대사는 사건 4시간 만에 연 기자회견에서 “사무실이 갑자기 무너져 내릴 당시 한손에 수화기를 들고 다른 손에는 조깅 T셔츠를 들고 있었다.”“대사관 직원들이 나를 덮친 건물 파편을 제거하고 난 후에야 부서진 창문을 통해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고 밝혔습니다. 

 

 

 

폭탄테러로 사망한 미국인들의 관을 돌아보는 레이건 당시 미국 대통령.

 

이날 폭탄 테러는 후세인 요르단 국왕이 대 이스라엘 평화협상 참여를 거부하고, 이스라엘군의 레바논 철군이 진전이 없는 가운데 일어났습니다.

당시 16주째 접어들고 있던 레바논 철군 협상은 이스라엘측의 완강한 고집으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었고, 1982년 9월 레이건 미국 대통령이 제안한 팔레스타인 문제해결을 위한 중동 평화안도 PLO와 요르단측의 거부로 사실상 사문화된 상태였습니다.

당시 레바논의 내전 상황은 복잡하기 그지없어서 레바논 주재 UN 평화유지군에 대한 공격이 레바논의 좌, 우익 민병대와 팔레스타인, 이스라엘, 이란, 시리아 등 분쟁에 얽힌 여러 국가들의 지원을 받는 무장 세력들에 의해 자행되고 있었죠. 레바논은 인구 300만 명의 충청북도만한 작은 나라지만, 기독교와 이슬람 등 17개 종류의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 섞여 살고 있는 ‘종교 박물관’이라고 불립니다.

1943년 프랑스로부터 독립한 이래 평온했던 것은 독립직후의 5년 동안에 불과했습니다. 기독교 세력은 레바논주의(Lebanism)를 주창하면서 완전한 독립국가로서의 레바논을 건설하려 하였고, 이슬람 세력은 아랍주의(Arabism)를 주창하면서 레바논을 아랍세계의 일부로 편입시키려고 하였습니다. 

 

 

 

 레바논의 사회적 불안정은 고향땅에서 쫓겨난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유입해 들어와 베이루트와 레바논 남부지역에 난민캠프를 설치하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됩니다.

레바논의 기독교 집권세력에게 팔레스타인 게릴라들의 존재는 눈엣 가시로 보일 수밖에 없었고, 1976년 4월 기독교 민병대들이 팔레스타인 게릴라들이 탄 버스를 기습하여 27명을 사살하는 사건이 일어나면서 레바논은 전면적인 내전 상황을 맞게 된 것이었죠.

거기다 시리아군이 레바논 국경을 넘어 들어와 내전에 개입하게 되고, 이스라엘군도 팔레스타인 게릴라들을 소탕한다는 명분으로 레바논으로 진입하니, ‘종교 박물관’은 다양한 무장 세력들의 각축장이 됩니다.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되자 UN안전보장이사회는 프랑스와 스웨덴 등 11개국 6천 여 명의 평화유지군을 파견하죠. 거기다 미국은 이스라엘과 기독교 민병대를, 구소련은 시리아와 이슬람 세력을 지원하니 레바논 내전의 강대국의 대리전 성격도 띄게 됩니다.  

 

 

 

1983년 10월 23일, 베이루트 주둔 미 해병대 기지에 자살폭탄 테러가 발생합니다.

 

폭탄 테러를 주도한 세력은 시리아의 지원을 받는 무장단체 ‘헤즈볼라’로 밝혀집니다. ‘헤즈볼라’는 미국 대사관 폭발사건이 일어난 지 반 년만인 1983년 10월 23일, 베이루트 주둔 미 해병대 기지에도 자살 폭탄 공격을 가해 미 해병대과 프랑스군 등 모두 350명이 목숨을 잃죠.

미국 정부는 사건의 주모자로 헤즈볼라의 비밀 군사작전 총책 ‘이마드 무그니’ (Imad Mugniyah)를 지목하고 2천 5백만 달러의 현상금을 내걸었습니다. 현상금만으로 볼 때 ‘이마드 무그니’를 능가하는 '테러리스트'는 9.11 사건 주모자로 알려진 오사마 빈라덴 (현상금 5000만 달러) 정도에 불과합니다.    

 

 

 헤즈볼라의 비밀작전 책임자 '이마드 무그니',2008년 2월15일 다마스커스에서 폭탄테러로 사망한다.

 

올 2월 15일, 시라아의 수도 다마스커스에서는 중심부의 주택아에서 한 건의 차량폭탄 테러가 일어났습니다. 희생자는 바로 헤즈볼라의 실력자 ‘이마드 무그니’였죠.

헤즈볼라는 이스라엘 정부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을 이스라엘 정보부의 소행으로 단정하고 보복을 다짐하고 있습니다. 이래저래 중동에서 총성이 멎는 날은 멀게만 보입니다

 

 

1983년 9월 1일, KAL 007기 격추사건 발생

 

 

 

1983년 9월1일 오전 3시26분(한국 시간) 대한항공 007편 747 점보여객기가 사할린 부근 모네론섬 상공에서 소련 방공군 전투기의 미사일 공격을 받고 추락, 승무원 29명과 승객 2백40명 등 탑승자 2백69명 전원이 사망하는 참사가 일어납니다.

 

사고기는 전날 뉴욕을 출발, 앵커리지를 경유하여 서울 김포공항으로 비행 중 항로를 이탈, 소련 영공으로 들어갔다가 격추된 것입니다.

 

 

소련 전투기의 미사일 공격으로 격추된 KAL 007편.

 

당시 소련 요격기 수호이 15 조종사 겐나디 오시포비치 중령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관제소로부터 소련 영공을 침범한 KAL 007기를 국제관례에 따라 유도 착륙 시키라는 명령을 받고 여객기에 접근하여 여러 차례 경고등을 깜빡거렸고, 예광탄을 4차례나 발사했는데도 KAL기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고 오히려 고도를 높여 달아나려하자 관제소로부터 격추명령을 받았다고 말했습니다.

 

새벽 3시 25분 그는 “곧바로  두 발의 미사일을 발사했고, 첫 번째는 엔진부분에 두 번째 미사일은 여객기 꼬리 부분에 정확히 명중했다"면서 "비행기가 불길에 휩싸여 나선형으로 추락했다”“격추사실을 관제소에 보고했다”고 설명했습니다.  

 

 

 

 KAL 007기를 격추시킨 수호이 15 전투기.

 

차디 찬 사할린의 바다로 곤두박질 추락해 가던 KAL기는 필사적인 교신을 시도 합니다. “도쿄 관제탑 나와라. 도쿄...” 007기 천병인 기장의 절박한 목소리였습니다.

 

KAL기의 항적을 추적하던 일본 자위대의 레이더 스크린에서 사고기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오전 3시 38분이었습니다.

 

 

사고기의 천병인 기장.

 

사고 후 소련은 자신들이 격추시킨 비행기가 민간 여객기인지 몰랐으며, 미국이 소련의 반응을 알아보기 위한 고의적인 도발을 했다고 발표했습니다.

 

이 사건은 많은 사람들의 분노를 불러 일으켰고, 미국·일본·캐나다·영국·프랑스 등 서방국가들은 강경한 자세로 소련의 만행을 규탄합니다. 서방측은 소련 여객기의 운항을 전면 규제하고, 미국은 소련과의 문화교류를 단절할 것을 발표하였습니다.

 

일본도 소련과의 외무장관회담·무역회담의 중지를 고려하는 등 일·소관계도 극도로 악화됩니다. 특히 미국의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은 이 사건을 전 세계적인 반소 캠페인의 좋은 소재로 이용 합니다.

 

소련을 ‘악의 제국’으로 규정하고 스타워즈(Star Wars)계획, 즉 전략방위구상(Strategic Defense Initiative·SDI)을 밀고 나간 것이 좋은 예입니다.

24년 전 발생한 이 비극적인 참사에 대한 각양각색의 가정과 추측들은 헐리우드의 영화나 X-파일 드라마가 무색할 정도의 사실 같은 픽션물 들을 등장 시켰습니다.

 

마이클 브런이 저술한 'Incident at Sakhalin: The true Mission of KAL Flight 007'에는 왜 많은 사람들이 공식적으로 이미 종결된 사건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가에 대한 몇 가지 이유들을 들고 있습니다.

 

그는 또한 미국의 첩보기 코브라 볼(RC-135)이 KAL기와 함께 겹쳐서 첩보수집 비행을 했다는 점을 지적하고 미국의 첩보위성이 사고지역 상공에 상주했기 때문에 항로 이탈에 관한 정보는 조기에 발견되고 여객기에 통보된다는 점을 주목하고 당시의 참사는 고의적이었다는 음모이론을 전개 하였습니다.

 

 

 미 공군 정찰기 RC 135 코브라 볼.

 

 

인터넷에 올라와 있는 대표적인 의혹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 앵커리지 공항 관제소의 관제사는 그날 밤 다른 항공기 위치는 다 기록했으면서, 왜 규정을 어기고 KAL 007이 최초 경로 참조점에서 부터 이미 6.6마일 항로 이탈한 위치를 기록하지 않았을까요?

 

- 왜 KAL 007 조종사들은 항법 보조 장치들(관성항법시스템, VORTAC, 수평위치지시계)을 보고도 점점 더 항로에서 멀어지고 있음을 알아차리지 못했을까요?

 

 

 점선이 정상항로, 실선이 실제 007기가 비행한 항적입니다.

 

 - 캄차카 반도 연안 바로 근처에 있었던 미 공군 RC-135 정찰기는 긴급 주파수 송신으로 교신할 수 있었는데도 왜 KAL 007에게 경고하지 않았을까요?

 

- 미 공군 레이더 기지 담당자들은 KAL이 정상적인 항로에서 벗어나고 있었음을 알고 있었으면서 규정과 달리 왜 앵커리지 항공 관제소나 다른 관제소에 KAL 007의 항로 이탈을 경고하지 않았을까요?

 

풀리지 않은 의문은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멀더 요원의 넋두리처럼 항상 진실은 저 너머에 있는 걸까요 ?

 

 

 

 

1984년 3월 24일 - 팀스피리트 훈련 중 미군 헬기 추락, 탑승자 전원 사망

 

 

 

 
사고기와 동형의 CH-53D 헬리콥터 (이미지=www.tacomaworld.com)

 

1984년 3월 24일 오전 4시 38분 경, ‘팀 스피리트 84’ 훈련에 참가 중이던 미 해병대 소속 CH-53D '시 스탤리언‘ 헬리콥터가 경북 영덕 시루봉 부근에서 추락, 탑승 장병 29명 전원이 사망합니다. 사고 헬리콥터에는 한국 해병대 11명과 미 해병 18명이 탐승하고 있었죠.

 

이 헬리콥터는 다른 헬리콥터 5대, OV-10 관측기 2대 등과 함께 야간을 틈타 적진 후방에 병력을 투입하는 한-미 연합 야간강습훈련을 마치고 되돌아오다 악천후로 시계가 가려 야산에 충돌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추락 직후 주한 미군 사령부는 사고 현장을 중심으로 수색작업을 벌여 몇 구의 시신을 발견했으며, 사망자의 시신 수습을 위해 부근 해상에 상륙함 ‘벨로우드’함을 대기시키기도 했습니다.

 

CH-53D 헬리콥터는 ‘시 스탤리언’ (바다의 종마)란 애칭으로 불리는 대형 헬리콥터로 미국 ‘스코르스키’社가 개발, 1969년 3월에 30대가 처음으로 미 해병대에 배치되었습니다.

 

승무원 3명을 포함 최대 탑승인원은 55명이며 병력과 화물 등을 쉽게 실고 내릴 수 있도록 설계되었습니다. 최대속도는 시속 315km, 순항속도 278km, 항속거리는 413km로 알려져 있습니다.

 

1989년 9월 해병대 사령부는 포항시 송라면 독석리에 충혼탑을 건립하여 젊음을 채 피우지 못하고 순직한 젊은 해병대원들의 넋을 위로하고 있죠. 2006년 4월에는 사고 헬리콥터의 조종사 ‘존 휴스턴’ 대위의 어머니가 한국 해병대의 초청으로 방한해 추락현장과 충혼탑을 돌아보기도 했습니다.

 

 

1985년 1월 8일 - 한국 화물선, 이라크 미사일에 피격

 

 

1985년 오늘, 페르시아만을 항해 중이던 한국 한림해운소속 1만 1천 톤급 화물선 ‘한림 마리너’호가 이라크 공군기가 발사한 엑조세 미사일에 피격 됩니다. 이 사고로 마리너 호의 2등 항해사 1명이 숨지고 1명이 중상을 입었습니다. 마리너 호는 1984년 12월 4일 비료 1만 5천 톤을 싣고 여수를 출발, 이란의 ‘부다르부사’에 입항할 예정이었죠.

1980년 9월 22일, ‘샤트 알 아랍’ 수로의 단독영유권을 주장하면서 이라크가 이란을 침공하면서 시작된 두 나라간의 전쟁은 초기에는 국경선 주변에서 치열한 지상전이 전개되었습니다. 하지만 전쟁이 점차 장기적인 소모전 양상을 띠게 되면서 양국은 서로 상대방의 도시와 석유시설에 대한 산발적 공격을 벌입니다.

산유국이었던 이란과 이라크 모두 전쟁비용의 대부분을 원유 수출에서 얻고 있었기 때문에 상대방의 수입원을 막기 위해 민간 선박에 대한 공격이 빈번하게 일어나게 됩니다. 이란은 쿠웨이트와 페르시아 만 연안국들의 유조선들을 공격하고, 이라크는 이란으로 드나드는 선박들에 미사일을 날립니다.  

 

 

 

이라크 공군기에서 발사되는 '엑조세' 미사일

한국 선박들의 피해도 이어져 1983년 3월 27일, 현대건설소속 ‘해양1호’작업선이 사우디아라비아 ‘주베일’ 항 근처에서 미사일에 피격되어 사망 1명, 실종 4명의 인명피해를 입고 침몰된 것을 시작으로, 같은 해 7월 1일에는 중앙상선 소속 화물선 원진호가 이라크 공군기의 공격으로 대파되었으며, 9월 16일에는 유조선 ‘로열 콜롬보’호가 피격되었습니다.

중동지역에서 생산되는 원유에 대한 의존도가 높았던 한국으로선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진 격이었습니다. 장장 8년 동안의 전쟁기간 중 100만 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던 이란-이라크 전쟁은 결국 석유공급을 위협 받은 강대국들의 개입으로 1988년 8월 20일, 양국 간에 정전협정이 체결되는 것으로 끝납니다.

이른바 '유조선 전쟁'으로 불렸던 제 3국 민간 선박들에 대한 무차별 공격은 승자는 없고 패자만 있었던 무모한 전쟁의 한 단면이었습니다

 

 

 

 

1988년 8월 20일, 이란-이라크 전쟁 종전

 

 

 

1988년 오늘, 8년간 벌어졌던 이란-이라크 전쟁의 포성이 멈춥니다. 양측의 사망자는 이라크 측이 30만명, 이란측이 70만명에 이르렀습니다.

 

두 나라 사이에는 역사적으로 오랫동안 누적된 민족적, 종교적 갈등이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이라크 국민이 아랍인인 반면 이란 국민은 페르시아 민족이었고, 두 나라 모두 이슬람국가였지만 이라크가 수니파를 신봉하는 데 반하여 이란은 시아파를 신봉하고 있다는 종교적 갈등, 이란 내의 아랍족과 이라크 내의 쿠르드족과 같은 소수민족문제 등이 엇갈려 있었던 거죠.

 

게다가 비슷한 시기에 등장한 양국의 지도자들의 성향은 크게 달랐지만, 중동의 맹주를 꿈꾼다는 점에서 그들의 욕망은 충돌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1979년 대통령에 당선된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은 미국-이스라엘 동맹에 맞서 아랍의 결속을 주도하고자 했고, 같은 해 2월 이슬람 혁명으로 팔레비 왕조를 무너뜨린 이란의 호메이니는 주변 국가들에 이슬람 혁명을 수출하여 세속주의적 지배체제를 몰아내고 이슬람 혁명 정권을 세우겠다는 꿈을 꾸고 있었습니다.

전쟁의 도화선이 된 것은 양국의 국경 사이를 흐르는 ‘샤트 알 아랍’ 수로의 영유권 문제였습니다.  1980년 9월 22일, 이라크의 선제공격으로 시작된 양국간의 전쟁은 초반에는 이라크에 유리한 듯 했지만, 점차 이란의 반격으로 상호공방이 교차되면서 장기전으로 돌입하게 됩니다. 

 

특히 이란의 경우 혁명 직후의 불안정한 정치체제를 전쟁상황을 이용해 타개하려고 했죠. 즉 대중의 관심 대상을 국외에서 찾음으로써 국내적 불만이나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려 하였고, 혁명에 대한 개인적 의지에 관계없이 모든 이란인을 전쟁에 참여시키는 민족적 동원을 실시하였습니다.

 

 

 

숨진 이란 소년병.

 

전쟁의 후반부로 가면서 전쟁은 상대방 도시의 민간인 거주 구역에 대한 미사일 공격, 양국의 영해를 통과하는 유조선에 대해 무차별 공습을 가하는 양상을 보였습니다.

 

미국을 비롯한 강대국들은 자국의 석유 수급에 위협을 받게 되자 전쟁을 끝내라는 압력을 가했고, 마침내 1988년 8월 20일, 이란과 이라크는 정전 협정을 체결하게 됩니다.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하다 이라크 전투기의 공격으로 불타는 유조선.


이란의 최고 지도자 호메이니는 종전 이듬해인 1989년 사망하고, 사담 후세인 대통령은 1990년 쿠웨이트를 침공하여 걸프전의 빌미를 주었다가 미국에 의해 몰락의 길을 걷게 됩니다.

 

8년간의 이란-이라크 전쟁은 승자도 패자도 없는, 양국 지도자의 무모한 야망이 국가와 국민을 파멸로 이끌고 간 소모전으로 역사에 기록 됩니다. 

 

1989년 2월 15일 - 아프가니스탄 주둔 소련군 완전 철군

 

 

 

 

내 뒤에는 단 한명의 소련 병사도 남아 있지 않다.” 1989년 2월 15일, 구 소련의 우즈베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을 가로지르는 ‘아무다리아’강에 걸린 다리를 건너며 아프간 주둔 소련군 사령관 ‘보리스 그로모프’ 중장이 한 말입니다. 이로써 1979년 소련군의 기습침공으로 시작된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무력개입은 종말을 고합니다.

 

유라시아 대륙의 심장부, 실크로드의 요충지에 위치한 아프가니스탄은 그 지정학적 위치 때문에 고대로부터 많은 이민족들의 침입을 받아 왔습니다.

 

페르시아와 알렉산더 대왕이 이끄는 마케도니아, 몽골과 무굴 제국 등을 비롯하여 해가지지 않는다는 대영제국의 침략까지, 역사는 한 번도 힌두쿠시 산맥의 이 척박한 땅을 그냥 내버려 두지 않았죠. 하지만 강인하고 악착같은 아프가니스탄인들은 한 번도 이민족의 지배를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사실 아프가니스탄에 발을 들여 놓았다가 피를 흘라며 물러나야 했던 나라는 소련이 첫 번째는 아니었습니다. ‘침략군의 무덤’이라는 단어가 상징하듯, 외세에 대한 아프간인 들의 강한 거부감과 험준한 아프가니스탄의 지형은 끈질긴 저항의 근거지가 되었습니다.

 

18세기, ‘팍스 브리태니카’를 구가하던 영국은 아프가니스탄을 놓고 제정 러시아와 이른바 ‘그레이트 게임’(The Great Game)이라 불리는 치열한 세력 쟁탈전을 벌이고 있었죠. 이 과정에서 영국은 세 차례에 걸쳐 아프가니스탄과 전쟁을 치룹니다. 1838년, 당시 세계최강의 군대였던 영국 육군은 러시아의 남하를 막기 위해 아프간에 2만 명의 병력을 파병합니다.

 

처음에는 침략이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 보였죠. 아프간 왕국의 수도 카불을 점령하고 왕이었던 ‘도스트 무하마드’를 몰아낸 영국 정부는 곧 자신들의 꼭두각시 정권을 세웁니다. 하지만 이때부터 영국의 재앙은 시작되죠. 원래 여러 부족들로 이루어진 아프간 사회는 각 종족간의 독립성이 강하고, ‘파슈툰왈리’로 상징되는 엄격한 전통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자신들이 부당한 대우를 받거나 모욕을 당했다고 생각하면 반드시 복수를 했으며, 자신이 못 다한 복수의 의무는 대를 이어서라도 지켜졌습니다. 곧 아프가니스탄 전 국토에서 영국의 관리들과 군인들이 살해 됩니다. 아프간인들의 끈질긴 저항에 부딪친 영국 정부는 결국 1842년 1월, 아프가니스탄을 포기하고 인도로 철수를 개시합니다.

 

하지만 침략군의 퇴로는 피비린내 나는 보복의 연속이었죠. 험준한 산악의 고개마다 매복한 아프간인들의 기습으로 철수 길에 오른 영국군인 4천명과 민간인 1만 명 중 살아서 목적지인 ‘잘랄라바드’에 도착한 사람은 단 40여 명에 불과했습니다.

 

치욕스럽게 쫓겨난 영국은 1878년 다시 아프간을 굴복시키려 했지만, 40년 전의 전철을 그대로 밟아야 했습니다. 간신히 아프가니스탄의 외교권만 장악한 채 철수한 영국에 대해 아프간인들은 1918년 전쟁을 벌여 그들의 빼앗긴 권리를 되찾는데 성공합니다.

 

 

 

 
19세기 두 차례에 걸쳐 아프가니스탄을 침략한 영국군은 그 대가를 톡톡히 치룹니다.

 

그 후 60여 년간 아프가니스탄은 세계인의 관심에서 잊혀진 나라가 되었죠. 1907년 영국과 러시아가 맺은 조약으로 아프가니스탄은 두 강대국 사이의 완충지대로 남겨졌고, 결과적으로 이것은 아프가니스탄이 근대 국가로 발전할 기회를 앗아갔습니다.

 

이 두 나라는 서로의 영향력이 충돌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아프가니스탄에서 양국의 군대를 철수시키고, 이 땅에 대한 불간섭을 약속한 것인데, 이 덕분에 아프가니스탄에는 철도나 도로망 등의 사회 기반 시설이 들어서지 못했죠.

 

가난하지만 조용했던 아프가니스탄의 평화가 깨지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 들어서면서 부터였습니다. 1973년 ‘모하메드 자히르 샤’ (Mohammed Zahir Shah) 국왕의 사촌인 ‘다우드 칸’ (Mohammed Daoud Khan) 수상이 쿠테타를 일으켜 국왕을 축출하고 공화정을 수립 합니다.

 

낙후된 아프가니스탄을 근대화하는 개혁정책을 추진하던 ‘다우드 칸’ 정부는 그러나, 1978년 4월, 일단의 군 장교들이 주도한 쿠테타로 전복되죠. 쿠테타를 주도한 군 장교들은 소련에서 교육을 받은 엘리트 장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아프간 민주 공화국(DPA)을 선포하고 급진적인 사회주의 개혁을 시도하죠. 그러나 이 시도는 곧 전 국민적인 저항에 직면합니다. 토지개혁, 여성정책, 이슬람에 대한 사회주의적인 접근은 이슬람 지도자들과 부족원로들을 비롯한 전통적 지도층들의 분노를 샀고, 이들에 의해 곧 ‘지하드’(성전)가 선포 됩니다.

 

아프간의 정국이 혼란 속으로 빠져들어 갑니다. 아프가니스탄 공산당은 둘로 나뉘었고, 정부군도 양분되어 서로의 지도자에 대한 암살과 보복이 이어지죠.  1979년 3월에는 아프간 육군 17사단이 반란을 일으켜 사단에 배치되었던 소련군 고문단 장교들과 그 가족들 40여명이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결과적으로 이 사건이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소련의 무력개입의 빌미가 되죠. 1979년 11월 말, 마침내 소련 지도부는 침공 결정을 내립니다.

 

 

 

 소련군의 'Hind' 헬리콥터. 소련은 1979년 12월 27일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합니다.

 

12월 첫 2주 동안 소련 공수부대 1천 5백 명이 훈련 명목으로 바그람 공군기지에 도착한 이래, 크리스마스 전야부터 단 이틀 동안 1만 명의 소련군대가 공수됩니다.  기계화 사단 2개는 북부 국경선을 넘어 남하하니, 12월 27일까지 모두 7만의 소련군 병력이 아프간에 들어오게 됩니다.

 

소련은 유사시 있을지도 모를 아프간 군의 저항을 막기 위해 재고 조사를 명목으로 아프간군의 전차 배터리와 포탄들을 빼놓게 하니, 아프간군은 쉽게 무장해제 됩니다.  12월 27일 저녁 7시, 경전차를 앞세운 소련군 특수부대 ‘스페츠나츠’ 병력이 대통령 집무실이 있는 다루만 궁을 포위하고 공격을 개시합니다.

 

 ‘하피줄라 아민’ (Hafizullah Amin) 아프간 대통령까지 직접 총을 들고 저항하다 살해당하는 것으로 소련의 아프간 점령은 쉽게 마무리 되는 듯 했죠.  소련 지도자들의 계획대로라면 아프가니스탄에 자신들의 말에 고분고분한 꼭두각시 정권을 세우고 치안을 확보한 다음, 소련군은 3년 안에 철수할 수 있다고 예상했습니다.

 

 

 

소련군의 침공에 저항하다 살해된 '하피줄라 아민' 대통령.

 

하지만 한 세기 전 영국 침략자들이 그랬듯이 진짜 싸움은 그 때부터 시작됩니다. 주요 도시들을 제외한 모든 촌락과 골짜기마다 아프간인들의 거센 저항이 이어지고, 소련군은 도시와 그들의 보급선을 지키기에도 급급합니다. 빠른 기동력을 자랑하는 소련군의 기계화 부대도 좁은 산길이 구불구불 이어지는 아프간의 산악 지형에서는 제대로 힘을 발휘할 수 없었죠.

 

그런데도 자신들의 힘을 과신한 소련군은 초토화 작전으로 아프간 저항세력을 고사 시킬 수 있다고 믿고 강경 정책을 고수합니다. 저항 세력의 근거지와 이동 통로가 되는 마을, 목초지, 관계수로 등에 무차별 폭격이 가해지고, 지뢰가 흩뿌려 집니다.

 

게릴라가 발견된 마을에는 화학무기까지 살포하고 피신한 주민들로 가득 찬 동굴에는 기화폭탄을 떨어 뜨려 생지옥을 연출하죠. 소련군의 초토화 정책으로 1백 30만 명의 아프간 주민들이 희생되었고, 전체 인구의 1/3에 달하는 5백 50만 명이 난민이 되어 이란과 파키스탄 등지로 밀려들었습니다.

 

 

그러나 종교적 열정과 복수심에 불타는 ‘무자헤딘’(이슬람 자유 전사)을 자처하는 게릴라들을 굴복 시킬 수는 없었습니다.  원래 부족 단위, 마을 공동체 단위로 조직 되었던 무장 세력은 소련군의 탄압이 강해질수록 가족 단위, 혈연 단위의 소규모 전투 조직을 만들어 가며 끈질긴 저항을 이어 갔습니다.

 

피해가 커지자 당황은 소련군은 회유책을 쓰면서 아프간 주민들의 지지를 얻으려 했지만 상황은 호전되지 않았습니다.  외세에 저항해 이슬람 가치를 수호한다는 뚜렷한 명분으로 전투의지와 사기가 충천한 10만의 ‘무자헤딘’들은 미국과 중국, 파키스탄의 지원을 받으며 소련군과 꼭두각시 정부군을 괴롭혔습니다.

 

 

 1980년대 소련의 포스터에서는 '무자헤딘' 게릴라들이 미국의 달러에 매수되어 싸우고 있는 것으로 표현했지만, 이것은 사태를 한참 잘못보고 있던 결과였습니다.

 

한때 소련은 13만 5천명까지 주둔군을 증강했고, 여기에 3만의 아프간 정부군까지 가세했지만 침공 9년 4개월 만에 만신창이가 되어 그들의 나라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이 기간 동안 1만 5천명의 소련 군인이 사망했고, 4만 명이 불구가 되었죠. 그리고 아프가니스탄에서 국력을 소진한 소련은 곧 체제 해체의 길을 걷게 됩니다.

 

 영국과 소련이 쉽게 걸어 들어갔지만, 쉽게 나오지 못한 아프가니스탄. 그곳은 이제 탈레반과 미국의 격전장이 되었고, 미국 역시 실패의 전철(前轍)을 밟고 있는 듯 보입니다.

 

 

 

아프가니스탄에서 작전 중인 미군.

 

 

 

1989.8.10 콜린 파월, 미국 사상 첫 흑인 합참의장에 임명

 
 

 

콜린 파월, 1937~

 

1989년 오늘, 콜린 파월(Colin Luther Powell)이 미군 사상 첫 흑인 합참의장에 임명됩니다. 자메이카 출신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난 파월은 1958년 뉴욕시립대 ROTC 장교로 임관하여, 국가안보보좌관을 거쳐 합참의장에 임명돼 91년 걸프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면서 국민적 인기를 얻게 됩니다. 그는 또 2001년 조지 W 부시 정부에서는 흑인 최초로 국무장관에 임명되기도 했죠.

 

미군내에서 흑인들의 지위가 향상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입니다. 남북전쟁 당시 몇 개의 흑인 부대가 만들어 지기도 했고, 양차 세계 대전에서 흑인 병사들의 희생이 적지 않았음에도 군대 내에서 차별의 벽이 사라진 건 베트남전을 치르면서 부터였습니다.

 

(하기야 징병제가 유지되던 베트남전에선 미국 인구의 5%에 불과한 흑인이 군대에선 25%에 달했으니까요. 이런 현상은 말단 전투부대로 내려갈수록 심해져서 이들 흑인 병사 대부분은 ‘돈 있고 빽 있는’ 백인 중산층 자녀들을 대신해서 끌려온 거나 마찬가지 였습니다.) 

 

미 육군 사관학교 웨스트포인트에서 매년 졸업생들에게 주는 상중에 헨리 플리퍼 상이라는게 있습니다. 헨리 플리퍼(Henry Flipper,1856~1940)는 최초로 웨스트포인트를 졸업한 흑인이었죠. 그는 남부 조지아주에서 노예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남북전쟁에서 북군이 승리한 후 노예의 신분에서 벗어나 웨스트포인트에 입학할 자격을 얻었습니다. 그 말고도 몇 명의 흑인 생도가 있긴 했지만, 그들은 차별의 벽을 넘지 못하고 중도에 포기 했지요

 

 

생도 시절의 헨리 플리퍼, 1856~1940.

 

플리퍼는 사관학교에서 철저히 외톨이였습니다. 불과 40여 년 전까지도 백인과 유색인종이 쓰는 화장실이 따로 있었고, 버스의 좌석이 흑백으로 분리되어 있었던 미국이었으니까요.

 

백인 생도들은 그에게 말 한마디 건네지 않았고, 온갖 편견과 멸시로 모욕당하는 일상이었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1877년 6월, 마침내 플리퍼는 웨스트포인트를 졸업하교 미 육군 장교로서 군 생활을 시작 합니다. 그의 첫 배속부대는 몬타나의 제 10 기병대, 흑인들만으로 구성된 부대였습니다.

 

플리퍼는 성실했고, 또 군인으로서의 능력도 뛰어났지만 차별의 벽은 높기만 했죠. 진급에서도 번번이 밀리기 일쑤였습니다.

 

1881년, 그는 자금 횡령 혐의로 군법회의에 회부 됩니다. 회계장부에 기록된 금액에 이상이 있다는 걸 우연히 알게 되었지만, 이를 빌미로 공격당할까 봐 잠자코 있었던 게 죄라면 죄였습니다.

 

그는 횡령혐의를 벗었지만, 장교로서 처신이 부적절했다는 판결을 받고, 이듬 해 불명예 제대를 해야만 했습니다. 

 

군에서 쫓겨난 후 광산 기술자가 된 플리퍼는 1940년 84세로 세상을 뜰 때까지 상원 외교위원회, 내무장관 특별보좌역 등으로 활동하는 등 비교적 성공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불명예 제대의 멍에는 죽을 때까지 그를 억눌렀죠.

 

 


미 육군은 그가 숨진 뒤 36년이 지난 1976년 명예 제대증을 발급하고, 웨스트포인트에 그의 흉상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1999년 빌 클린턴 대통령은 플리퍼의 유족들을 백악관으로 초청, 헨리 플리퍼의 완전 사면을 선언했습니다. 그가 군에서 쫓겨난 지 117년만의 일이었습니다.

 

1989년 12월 20일 - 미군, 파나마 침공

 

 

 
1989년 12월 20일, 2만 6천명의 미군이 민주헌정을 회복시키고 국제 마약거래 혐의자인 노리에가 대통령을 미국법정에 세우겠다는 구실로 파나마를 전격 침공합니다. 작전명 ‘정당한 명분’(Operation Just Cause).

 

 

파나마 시티.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이 집권했던 1980년대는 미국의 힘에 의한 세계전략이 기승을 부리던 시기였습니다. 1979년 니카라과의 독재자 소모사가 산디니스타 혁명으로 쫓겨나자, 미국 정부는 비밀리에 사우디의 무기상인 ‘카쇼기’를 통해 이란에 무기를 팔고 그 판매대금을 니카라과 반군에게 지원합니다. 니카라과 반군의 또 다른 자금 출처는 마약거래였습니다.  그리고 이 과정에 깊숙이 개입한 인물이 파나마의 독재자 ‘마누엘 노리에가’(Manuel Noriega)였죠.

 

  마누엘 노리에가 (1938~ ).

1970년대 파나마 토리헤스 정권의 정보기관 책임자였던 노리에가는 당시 CIA 책임자였던 조지 부시 전 대통령과 밀착관계를 형성하고, 미국의 자금지원을 받으면서 니카라과 산디니스타 정권에 대한 정보를 미국에 제공합니다.

노리에가는 CIA의 동업자이자 하수인이었던 셈입니다. 레이건 대통령 집권 직후인 1981년 토리헤스 대통령이 의문의 비행기 사고(CIA의 공작이었다는 설이 있습니다)로 사망하자 파나마의 실권을 장악한 노리에가는 레이건 정권의 산디니스타 정권 전복계획에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합니다. 

 

 

조지 부시 전 대통령은 1976~77년 CIA국장을 지냈습니다.

밀월관계를 유지하던 미국-노리에가 정부의 관계에 금이 가기 시작한 것은 냉전이 끝나가던 1980년대 후반부터였습니다. 노리에가의 독재에 파나마 국민들의 반발이 심해지고, 그가 마약밀매에 깊숙이 관련되어 있다는 비판이 미국 내에서 퍼지기 시작하면서 부터였죠.

미국은 친미적인 개혁세력을 내세워 파나마에 문민정부를 세우려는 공작을 시도하지만, 이를 눈치 챈 노리에가의 강한 반발을 불러오죠. 결국 1989년 12월 15일, 미국에 대해 전쟁상태를 선포한 파나마군에 의해 미군 장교 1명이 살해당하는 일이 발생하자 이를 빌미로 미군이 전격적으로 침공한 것입니다.

 

 

파나마 방위군(코만단시아) 사령부를 공격하는 미군 레인저 대원들.

20일 오전 1시, 제 75 레인저 연대의 1개 중대 병력이 낙하산으로 투입되어 오마르 토리조스 국제공항과 토큐먼 활주로를 장악했고, 같은 시간 레인저의 다른 병력은 리오하토 공항과 노리에가의 해변 관저를 급습하는 것으로 침공이 시작됩니다.

 불과 2~3천명 수준의 파나마 방위군은 미군의 상대가 될 수 없었습니다. 단 하루만에 27개의 공격목표를 성공적으로 접수한 미군은 파나마 주재 교황청 대사관으로 피신한 노리에가를 포위합니다.

미군의 심리전 부대는 대사관 건물에 틀어 박혀 나오지 않는 노리에가를 압박하기 위해 대형 확성기를 동원, 24시간 내내 시끄러운 록음악을 틀어대죠. 이러한 대치상황은 1990년 1월 3일, 노리에가가 투항함으로써 종결됩니다.

F-117 스텔스 전투기 등 각종 최첨단 무기를 동원한 미군에 의해 공식적으로 459명(파나마 시민단체 주장은 3천 5백명)의 민간인들이 목숨을 잃었고, 1만 5천명의 파나마 시민이 집을 잃어야 했습니다.

 

 

노획한 파나마 국기를 펼쳐 보이는 미군.
 

 

노리에가가 피신한 교황청 대사관 앞을 지키는 미 육군 델타 대원들.

1992년 아카데미 장편 다큐멘터리 부문 수상작인 ‘바바라 트렌트’ 감독의 ‘파나마 사기극’은 다른 측면에서 미국 침공의 이면을 폭로하고 있습니다. 1977년 미국과 파나마 간에 맺어진 조약에 따라 파나마 운하는 2000년에 파나마로 반환되도록 되어있었죠.

미국의 입장에서 이런 반환의 결과는 다름 아닌 미군기지의 폐쇄였고, 이것은 곧 라틴 아메리카의 진보운동을 억압하는 주요 교두보의 상실을 의미했기 때문에 미국으로선 파나마를 침공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2007년 9월 9일, 미국에서 15년 형기를 마친 노리에가는 마약자금 세탁 혐의로 재판을 받기 위해 프랑스 사법당국에 신병이 인도될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