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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에 달가듯이 2014. 12. 10. 21:01

역사 속의 전쟁 이야기 1991년 ~ 2010년 

 

 

 

1991년 1월 17일, '사막의 폭풍' 작전 개시 

 

 

1991년 1월 17일 오전 2시 40분, CNN TV가 이라크 “바그다드 상공 전체가 대공포화로 가득 찼으며 엄청난 섬광이 빛을 발하고 있다”고 긴급 보도 합니다. 미국 주도의 다국적군이 이라크에 의해 불법점령 된 쿠웨이트 해방을 명분으로 전쟁을 시작한 것입니다. 

 

한국 시간으로 오전 8시 40분, 미국 동부 표준시로 저녁 6시 40분 미국, 영국, 사우디아라비아를 비롯한 33개국의 다국적군은 1천  여 대의 전폭기와 크루즈 미사일을 동원해 바그다드와 주요 이라크군 시설에 대한 대대적 공습을 단행함으로써 작전명 ‘사막의 폭풍’이 개시됩니다.

 

걸프전의 시작이었죠.  1990년 8월 2일, 쿠웨이트를 전격 침공한 이라크에 대해 무조건적이고 즉각적인 철수를 요구한 UN 안전보장이사회의 철수시한인 1월 15일로부터 이틀이 지난 뒤였습니다. 

 

 

 

걸프전이 낳은 또 다른 스타 CNN.

 

개전 첫날, 2차례에 걸친 대규모 공습으로 바그다드, 쿠웨이트, 바스라 등의 이라크 공군 기지, 통신센터, 군 사령부, 정유시설 등이 큰 타격을 입었죠. 특히 700여대의 전투기를 보유하고 있던 이라크 공군은 궤멸상태에 빠졌고, 이라크 최정예 부대인 ‘공화국 수비대’는 첫날에만 6만 여명의 인명 피해를 냈습니다.  

 

 

불타오르는 유정 앞에 파괴된 이라크군 전차.

미국 주도의 다국적군이 이라크와의 전쟁을 시작한 명분은 쿠웨이트를 불법적으로 점령한 이라크군을 몰아낸다는 것이었으나, 본질적으로는 세계경제의 원동력이었던 석유 자원에 대한 통제권을 행사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따지고 보면 전쟁의 씨앗은 영국의 제국주의 통치기 부터 뿌려져 있었던 것이나 마찬가지였죠. 쿠웨이트는 원래 이라크 남부 ‘바스라’주에 속한 한 군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20세기 초 엄청난 양의 원유가 이 지역에 매장되어 있다는 것을 안 영국은 문화적, 역사적 배경을 무시하고 자의적으로 국경선을 그어 이라크와 쿠웨이트를 분할했습니다. 그 이후 여러 차례 이라크에 의한 쿠웨이트 병합 노력이 있었지만, 그 때마다 영국의 저지에 의해 실패하게 되죠.

 

 

작전 상황을 브리핑하는 다국적군 사령관 '노먼 슈워츠코프' 대장.

 

2차대전 이후 중동지역에 대한 미국의 영향력이 강화되면서 쿠웨이트는 대표적인 친미국가가 되었고, 이라크는 아랍 민족주의의 길을 걷게 됩니다. 두 나라간의 갈등은 이라크가 이란과의 전쟁을 막 끝낸 80년대 말부터 불거졌습니다.

 

이슬람 원리주의의 확산을 우려한 쿠웨이트는 전쟁기간 동안 이라크를 지원했지만, ‘루마일라’ 유전 개발 문제로 이라크를 자극합니다.

 

더욱이 원유를 팔아 전쟁 피해를 복구해야하는 이라크의 입장에선 OECD의 원유감산 정책에 반기를 들고 오히려 증산에 나선 쿠웨이트가 곱게 보일 리 없었죠. 
 

쿠웨이트가 자국의 원유를 도둑질하고, 원유시장에 물량을 과잉공급 하여 유가를 하락시킴으로써 이라크 경제를 파탄에 몰아넣었다고 비난한 이라크 ‘사담 후세인’ 대통령은, 1990년 8월 2일 쿠웨이트를 전격 침공, 점령하고 이라크의 19번째 주로 편입시켜 버립니다.

 

침공 직후 미국을 비롯한 서방 각국은 쿠웨이트 합병은 무효라고 선언하고, 12개에 이르는 대 이라크 유엔 결의안을 통과 시키는 등 이라크에 대한 강도 높은 압박을 가합니다.

 

 

대공포 부대를 순시중인 '사담 후세인' 이라크 대통령.

사담 후세인이 간과했던 것은 석유 문제에 관한한 미국이 사활을 걸만큼 중대한 사안으로 취급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쿠웨이트 합병문제를 그대로 넘겼다간 중동의 또 다른 친미 국가인 사우디아라비아까지 위험해진다는 판단을 미국은 하고 있었습니다.

 

사우디아라비아를 침략으로부터 방어한다는 명분으로 ‘사막의 방패’ 작전이 발동되어 20만 명이 넘는 미군 병력이 걸프 지역에 증강 배치되고, 이라크를 응징하기 위한 다국적군이 구성되어 중동 지역의 위기는 강도가 높아집니다.

 

(우리나라도 직접적인 전투에는 참가하지 않았지만 5억 달러의 전쟁비용을 분담하고, 5대의 공군 수송기와 200여명의 의료부대를 파병하여 다국적군을 지원합니다.)

 

 

미군의 패트리어트 미사일, 걸프전은 미국의 최첨단 하이테크 병기의 실험장이 되다시피 했다.

몇 차례 전쟁을 막기 위한 외교적 노력이 시도되었지만 모두 실패하고 칠흑 같은 1월 17일 밤, 마침내 전쟁이 터진 겁니다. 100만 명에 이르는 이라크 군대는 최첨단 무기로 무장한 미군 앞에 너무도 무력했습니다.

 

2월 28일 이라크가 항복하기까지 6주 동안 다국적군의 항공기는 10만 여 회의 폭격을 실시하여 이라크를 초토화 시켰습니다. 이라크 항복 직전인 2월 24일에야 본격적인 지상군이 투입되었지만, 이미 공습으로 만신창이가 된 이라크군은 곳곳에서 항복할 뿐이었죠.  

 

 

 

후퇴중이던 이라크군에 쏟아진 이른바 '강철의 비'의 흔적입니다.

 

전쟁의 결과 이라크 육군의 42개 사단 중 41개가 붕괴되었고, 이라크군은 사상자 40만, 포로 6만, 실종자 15만 명이라는 엄청난 피해를 입고 쿠웨이트에서 철수 합니다. 이에 비해 미국을 포함한 다국적군의 인명 피해는 작전 중 사망 148명, 부상 458명, 각종 사고사 121명이라는 아주 경미한 수준이었습니다. 

 

 

이라크군 포로의 행렬.

 

 

 

전쟁의 또 다른 희생자. 이른바 '걸프 증후군'으로 태어난 기형아, 미군이 사용한 열화 우라늄탄에 의한 후유증으로 의심되고 있습니다.

 

 

 

1991년 2월 28일 -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 걸프전 종전선언


1991년 오늘,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으로 야기된 걸프 전쟁이 이라크의 사실상 완전 항복으로 막을 내렸습니다. 이날,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은 이라크에 대한 전투 행위를 중단한다고 선언했고, 사담 후세인 이라크 대통령도 전쟁을 중지토록 이라크군에 명령했습니다.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으로부터 209일, 전쟁에 돌입한 날로부터는 43일만의 일이었습니다.

 

 

 

1991년 1월 17일 새벽, 미 해군 전함 '미주리' (USS, BB-63)에서 토마호크 미사일이 발사되고 있습니다.

걸프전은 상상을 초월하는 최첨단 정보기술이 총동원된 전자전인 동시에 철저한 과학전이었으며 서방측의 최신예 무기가 첫 선을 보인 화려한 무기 전시장이기도 했죠. 이 전쟁은 미래전의 양상을 잘 보여준 대사건이었습니다.

 

1991년 1월 17일 새벽 3시, 미국주도의 다국적군은 이라크에 대한 대규모 공습으로 전쟁을 시작합니다. 미군의 아파치 헬리콥터는 이라크의 레이더 기지를 파괴하여 공습 편대의 길을 터놓고, F-117 스텔스 폭격기를 비롯한 각종 항공기와 크루즈 미사일 들이 이라크군의 핵심 지휘 시설들을 파괴합니다.

 

공습을 막아야 할 이라크 공군기들은 뜨는 족족 적기도 보지 못하고 격추되고 말죠. 다국적군이 하루 평균 2천 번 출격에, 하루에만 5천 톤의 폭탄을 이라크에 쏟아 부으니 이미 이라크군은 만신창이가 되어 버립니다. 

F-117 스텔스 폭격기.

 

폭탄 자체의 정확도도 과거 전쟁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였죠. 2차 대전 당시에는 공습 목표물 한 곳을 파괴하기 위해 B-17 폭격기가 평균 4천 5백회 출격해서 9070개의 폭탄을 떨어뜨려야 했고, 베트남전에선 F-105 전폭기가 평균 95회 출격에 176발의 폭탄이 필요했습니다.

 

하지만 걸프전에서는 F-117 스텔스 폭격기의 1회 출격으로 오차 3m 이내의 폭탄 1발로 목표물을 파괴하는 정확성을 과시했죠. (엘빈 토플러, ‘전쟁과 반전쟁’) 물론 이 정밀한 폭격도 미국이 이야기하는 민간인들의 '부수적인 피해'를 막지는 못했습니다.  

 

2월 12일, 민간인들이 대피해 있던 '알 아마리야' 방공호에 미군의 스마트 탄 2발이 정확히 명중합니다. 후에 미군은 잘못된 정보로 이라크군의 지휘시설로 알았다고 발뺌했지만, 이 폭격으로 300 여 명의 여성과 100여 명의 아기들을 포함한 수백명의 이라크 민간인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다국적군은 5주 동안 10만 여 회에 달하는 폭격을 퍼부었으니, 이라크군은 지상전이 시작되기 전에 이미 패배한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1991년 2월 12일, '알 아마리야' 방공호에 떨어진 폭탄으로 수 백명의 민간인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 전쟁에서 미국과 영국의 특수부대들이 벌인 이라크의 ‘스커드’ 미사일 사냥도 빼놓을 수 없는 장면입니다. 후세인은 불리한 전쟁 국면을 돌려놓기 위해 사우디아라비아와 이스라엘에 여러 차례 스커드 미사일을 발사했죠. 스커드 미사일의 정확도는 450m~2km에 이르니 목표물에 정밀하게 떨어지지는 못하지만, 이 미사일의 탄두에는 화학무기를 탑재할 수 있으니 결코 무시할 수 있는 위협이 아니었습니다.

 

더군다나 공격을 당해 발끈한 이스라엘 정부는 보복을 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으니, 다급해진 것은 미국입니다. 자칫하면 전쟁 양상이 ‘아랍 국가’ 대 ‘이스라엘을 지원하는 서방국가’로 변해 버릴 수 있다는 위기감 때문이었죠. 당시 미국이 배치한  패트리어트 미사일로는 날아오는 스커드 미사일을 제대로 막을 수 없었죠. 미국의 델타포스, 네이비 씰, 영국의 SAS 등 최정예 특수작전 부대가 스커드 미사일 파괴 작전에 동원됩니다.

 

이들이 사막에 산재되어 있는 이동식 스커드 미사일 발사대를 발견하면 공군의 전폭기와 아파치 헬리콥터가 날아와 파괴하는 방식이었죠. 다국적군의 전체 전술기 중 약 30%가 ‘스커드’ 사냥에 동원되었습니다.          

이라크군의 '스커드' 미사일 발사차량.

 

2월 24일, 새벽 4시를 기해 다국적군의 지상 작전이 개시됩니다. 그러나 공습으로 이미 사람의 두뇌에 해당하는 지휘통제 체계를 잃어버린 이라크 지상군의 저항은 무기력했습니다. 수적으로는 우세했던 이라크 육군의 주력전차 T-72는 미군 M-1 전차의 상대가 되지 못했고, 곧 불타오르는 강철의 관으로 변해 버립니다.

 

이라크가 자랑하던 15만 명의 최정예 공화국 수비대도 맥을 못 춥니다. 쿠웨이트에서 황망하게 철수하던 이라크군 머리위로 ‘강철의 비’라고 이름 붙여진 집속탄 들이 쏟아지죠. 이미 전쟁은 일방적인 학살극으로 변해 버렸습니다.

이라크군 포로의 행렬.

 

지상전 개시 4일 만인 2월 28일,  무자비한 살육전이라는 국내외 여론을 의식한 부시 대통령은 이라크군의 궤멸을 눈앞에 둔 상태에서 공격중지 명령을 내립니다. 이라크 지상군은 총 42개 사단 중 41개가 붕괴되고 전사자 15만 명, 포로 10만 명이라는 엄청난 피해를 입습니다.

 

이에 비해 다국적군의 사망자는 전쟁 기간을 통틀어 125명에 불과했습니다. 저명한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의 말처럼 산업화 시대의 군대와 정보화 시대의 군대가 싸운 결과였습니다.

 

걸프전은 또한 최초의 미디어 전쟁이기도 했습니다.

 

인류 최초의 ‘스마트’(Smart) 전쟁이라고 평가되는 걸프전에 들어간 전쟁 비용 또한 엄청나서, 미국은 43일간 모두 600억 달러를 지출했습니다. 이 액수는 4년 동안 전 미국이 총력을 다해서 싸운 2차 대전의 전쟁 비용과 거의 비슷하고, 8년간에 걸친 베트남전 전쟁비용의 4배가 넘는 규모였습니다.

 

 또한 미국이 주도한 이 전쟁의 결과로 세계는 일초다강 (一超多强) 구도로 재편 됩니다. 미국이라는 유일 초강대국과 러시아, EU, 중국, 인도, 일본 등의 강대국들이 서로 협조하고 경쟁하며 세계질서를 유지해 가는 세상이 도래한 겁니다.

 

 

 

1992년 2월 14일 - 육군 7군단장 이현부 중장 헬기사고로 순직

 

사고 항공기와 동형의 UH 1H 헬리콥터

 

1992년 2월 14일 오전 9시 50분경 경북 선산군 장천면 상림리 산동산(해발 450m) 중턱에 육군 3183부대 204 항공대 소속 UH­1H 헬리콥터 1대가 추락하는 사고가 발생합니다. 사고 헬리콥터는 꼬리쪽 프로펠러가 떨어져 나가면서 산동산 8부 능선 250m 지점에 추락했죠.

 

이 헬리콥터에는 부대 순시를 위해 경기도의 군단사령부를 떠나 포항으로 향하던 육군 제 7군단장 이현부 중장과 군단참모들이 탑승하고 있었습니다.

 

이 사고로 이현부 (50) 중장을 비롯하여 작전참모 허정봉 (49) 대령, 군수참모 이원일 (39) 대령, 감찰참모 노영건 (40) 중령, 비서실장 한광진 (32) 소령, 부관 서상권 (25) 중위, 헬리콥터 승무원 조규성 (22) 상병 등 7명이 그 자리에서 숨지고, 조종사 이지성(35) 대위를 비롯한 3명이 중상을 입었습니다.

 

사고순간을 지켜본 목격자들은 “북쪽에서 날아오던 헬기가 비틀거리면서 방향감각을 잃고 5백m가량 비행하다가 산중턱에 추락했으나 불은 나지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군 당국은 사고원인을 기상불량에 의한 것으로 보인다고 발표했지만, 정비불량의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습니다.

 

순직한 이현부 중장은 1964년에 육사 20기로 임관, 졸업생중 학업성적과 리더쉽이 가장 뛰어난 생도에게 주는 ‘대표화랑’ 상을 받았고, 28년간의 군생활 동안 군의 기계화·기동화·화력화를 통한 전력증강과 전술개발에 몰두해온 전형적 야전 군인이라는 평가를 받아왔습니다.

 

특히 ‘수도기계화보병사단’ (맹호부대)에서 대대장, 연대장, 사단장을 역임하여 기동부대 전술 및 작전지휘에 정통했던 군인이었죠. 이 장군은 동기생들 중 최선두로 군단장으로 진급한지 두 달 만에 사고로 유명을 달리해 주변의 안타까움이 더했습니다.

 

순직한 7명의 군인들의 유해는 2월 16일, 3군 사령부장으로 장례를 치르고 동작동 국립묘지에 안장되었습니다.


 

 

 

1992년 10월 14일 - 한국 해군, 최초의 잠수함 ‘장보고’ 인수 

 

 

수상 항해중인 209급 1번함 '장보고' (ROKS SS-61 'JANGBOGO').

1992년 10월 14일, 한국 해군이 독일 킬(Kiel)의 ‘호발츠베르케 도이체 베르프트’ (HDW) 조선소에서 최초의 209급 잠수함 ‘장보고함’(SS-61)을 인수함으로써 대망의 잠수함 시대를 열었습니다.

 

그동안 한국 해군이 잠수함 도입을 위해 기울인 노력은 실로 눈물겨웠습니다. 당시 북한 해군은 이미 20여척에 달하는 잠수함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한국 해군은 이에 대응하는 수중전력을 갖추고 있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제인 연감에 따르면 북한은 이미 1973년에 2척, 1974년에 2척, 1975년에 3척 등 모두 7척의 ‘로미오’급 잠수함 (배수량 1,400톤급, 중국 Type 031급)을 중국에서 직도입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1976년에는 중국의 기술지원을 받아 동해안 신포의 마양도 조선소에서 1척의 로미오급을 자체 건조하는 등 북한은 잠수함대 건설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습니다.

 

잠수함을 들여올 예산이 없었던 한국 해군은 1983년 4월에 이르러서야 2차대전 당시 독일이 개발했던 배수량 100톤의 202급 잠수함을 개량한 130톤짜리 ‘돌고래급’ 잠수함을 갖게 됩니다.

 

하지만 이 돌고래급은 배수량이 작아 본격적인 수중작전에는 쓸 수 없어, 특수전용으로만 운용되었죠.

 

1987년 본격적인 잠수함 도입계획인 ‘장보고 1 계획’ (KSS-1)을 수립한 해군은 1987년 독일 HDW사와 209급 잠수함 건조 계획을 체결한지 5년 만에 1번함인 장보고함을 인수한 것이었습니다.

 

양차 세계대전을 통틀어 잠수함 강국이었던 독일의 HDW사는 1959년부터 201급과 205급 잠수함을 생산하여 독일 해군에 공급하고 있었죠. 기술적 측면과 함께 가격면에서도 HDW사의 209급은 다른 경쟁사들에 비해 우위에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209급 1번함 ‘장보고’의 도입에 이어 2번함부터는 독일의 설계와 부품을 들여와 국내에서 건조됩니다. 1992년 10월 ‘이천함’ (SS-62)이 대우 조선소에서 진수된데 이어 2001년 9번함 ‘이억기함’ (SS-71)까지 모두 9척의 도입이 완료되었죠.

 

또 해군은 209급 잠수함의 체계적 운용과 발전을 위해 1995년 10월 4일, 제 9 잠수함 전단을 창설하게 됩니다.

 

209급을 운용하면서 잠수함 작전의 노하우를 익힌 해군은 2000년 한 단계 높은 214급을 도입하는 ‘장보고 2 계획’ (KSS-2)를 수립하여 2006년 214급 1번함인 ‘손원일함’을 확보합니다. 배수량 1,800톤의 214급은 오는 2018년까지 모두 9척이 도입될 예정입니다.

 

 

 

배수량 1800톤의 214급 1번함 '손원일' (ROKS SS-72 'SONWONIL').

 

해군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2018년까지 3,500톤급 잠수함을 독자기술로 설계해 3척을 확보한다는 야심찬 계획을 세웠죠. 지난 참여 정부는 이 ‘장보고 3 계획’ (KSS-3)에 예산 2조 6000억원을 배정한 바 있습니다.

 

참여정부 시절 수립된 ‘국방개혁 2020’에선 3500톤급 잠수함의 생산과 함께 2013년 잠수함 전대를 잠수함 사령부로 승격시키는 계획도 포함되어 있었죠.

 

그런데 해군의 잠수함 전력 강화 계획은 이명박 정부 들어와 흔들리고 있습니다. 3500톤급 잠수함 건조 계획이 순연된데 이어 잠수함 사령부의 창설도 연기된 것이죠.

 

가장 큰 이유는 예산 문제였습니다. 참여정부가 수립한 국방개혁 2020에 따른 예산이 대폭 삭감되면서 감축 대상에 해군의 3500톤급 잠수함이 포함되었던 것이죠.

 

다수의 안보전문가들은 이명박 정부의 이런 정책이 국가의 미래 안보에 대한 고려가 없기 때문이라는 지적을 하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 해군의 잠수함 전력이야말로 대북억지력으로 작용할 뿐 아니라 일본과 중국 등 주변 해군 강국에 대한 중요한 견제 수단이기 때문이죠.

 

정부 당국자들은 ‘전작권 전환 이후 가장 공백이 우려되는 해군과 공군의 전력 확보 계획을 미루는 것은 미래를 생각지 않는 국방개혁’이라는 지적에 대해 한번쯤은 뼈아프게 생각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1993년 8월 7일, 최초의 국산 잠수함 최무선함 진수

 

 

 

 

1996년 한국해군 잠수함으로써는 처음으로 미국 괌 Apra Harbor을 방문한 SS-063 최무선함.

 

1993년 8월 7일, 경남 옥포 대우조선소에서 한국해군 잠수함 최무선 함이 진수했습니다. 최무선함은 독일이 개발한 209급 잠수함으로 우리 해군이 보유하고 있는 총 9척의 잠수함중 세 번째 함입니다.

 

최무선함의 진수가 의미 있는 것은 1번함 장보고함이 독일의 HDW 조선소에서 건조되어 직도입하였고, 2번함 이천함은 조립 패키지를 들여와서 대우 옥포 조선소에서 조립,건조한데 비해 순수 국내 기술진이 제작하였다는데 있습니다.

 

최무선함은 1100톤급으로 533㎜ 어뢰발사관 8문(어뢰 14발)과 ISUS 83 통합정보 전투시스템을 갖추고 있는데 동급의 잠수함중 가장 성능이 우수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최무선함은 진수 후 시험 운항을 거쳐 1995년 2월 실전 배치 됩니다. 
 

한국 해군의 잠수함 도입 사업은 미국의 방해로 난항을 거듭하다 1987년 전두환 정권시절 독일의 HDW와 세 척을 도입하기로 계약함으로써 시작되었습니다.

 

장보고급 잠수함은 디젤 잠수함으로 정숙성이 매우 뛰어나며 어뢰와 기뢰는 물론 일부 함에서는 하푼 대함 미사일의 발사가 가능합니다.

 

최대 50일 동안 보급을 받지 않고 작전할 수 있습니다만 배터리를 충전하기 위해서 3일에 한번 꼴로 해면부상을 해야 하기 때문에 적에게 노출될 가능성이 높아 은밀한 작전 수행에는 제약이 있습니다.

 

해군은 당초 장보고급 잠수함을 12척 건조하기로 하였으나 9번함인 이억기함을 마지막으로 사업을 종료하였으며, 2차 사업으로 1500톤급의 214형 잠수함 네임쉽인 ‘손원일함’을 작년 6월 건조, 실전배치를 앞두고 있습니다.

 

- 제원

전 장 : 56.0 m
엔 진 : 4 MTU Diesel, 1 Turbine, 1 Shaft
선 폭 : 5.5 m
잠 항 깊 이 : 250 m
엔 진 출 력 : 5,000 HP
만 재 배 수 량 : 1,285 t
최 대 속 도 : 21.5 knot
승 무 원 : 33 명(장교 6명)
항 속 거 리 : 7,500 mile (15 knot)

 

- 무장

S S M : UGM-84D Harpoon (SS-068 ~ 070)
대응 장비 : 아르고 ESM
어 뢰 : 21 inch 전방 어뢰 발사관 8문, STN 아틀라스 SUT 어뢰 14발

 

-대응 장비
아르고 ESM
 


- 전자장비 

레 이 더 : I Band
사격통제시스템 : STN 아틀라스 ISUS 83
소 나 : STN 아틀라스 CSU 82
 

 

 

 

1994년 12월 17일 - 미군 정찰 헬기, 북한지역에 불시착

 

 

2005년 북한방송이 보도한 현장 화면


 1994년 12월 17일 오전 10시 45분 경,  미 8군 제 17 항공여단 501 대대 소속 OH-58 정찰 헬리콥터가 강원도 원통 군사분계선 북방 5Km 지점(북한 측 행정구역으로는 강원도 금강군 이포리)에 불시착하는 사고가 발생합니다. 이 사고로 헬리콥터의 부조종사 ‘데이비드 하일먼’ 준위가 그 자리에서 사망하고 정조종사 ‘보비 홀’ 준위가 북한 당국에 억류됩니다. 
 

이날 오전 10시 2분, 춘천의 캠프 ‘페이지’를 이륙한 헬리콥터는 사전에 계획된 항로에 따라 북동쪽의 검문소(체크 포인트) 84로 비행할 계획이었습니다. 헬리콥터는 10시 26분까지 한국군의 레이더망에 포착되었지만, 잠시 후 레이더에서 사라집니다.

 

10시 38분, 비행금지 구역에 있던 국군 병사가 헬리콥터를 목격하지만, 조명탄을 쏘아 경고하기도 전에 빠른 속도로 사라져 버리죠. 10시 40분, 휴전선을 감시하는 12사단 전방초소에서 미군 헬기가 휴전선을 넘어 북쪽으로 비행하는 것이 목격됩니다.

 

향로봉 북서쪽 10Km 지점이었습니다. 3분 뒤인 10시 43분, ‘홀’ 준위가 한국군 무선망으로 “체크포인트 84로 귀환했다”고 송신합니다. 하지만 교신 당시 실제 헬리콥터가 날고 있었던 지점은 휴전선을 6Km나 넘어간 북한 영공이었습니다.

 

북한 국가안전보위부 장교 출신 탈북자 이정연씨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헬리콥터는 자신들이 북한 영공을 침범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황급히 남쪽으로 기수를 돌렸으나, 인민군 제2사단 6연대 지역에서 화성포(휴대용 지대공 미사일)에 꼬리날개를 맞고 추락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사고 헬리콥터와 동종의 OH-58 '카이오와'


 북한의 평양, 중앙방송 등 2개 방송은 이날 오후 1시 5분 긴급보도를 통해 “오늘 오전 10시 45분경 적 직승기(헬리콥터)가 전선 동부 군사분계선을 넘어 강원도 금강군 이포리 상공 깊이 불법 침입했다”면서 “우리의 사회주의 조국의 영공을 경각성 있게 지키던 조선 인민군 고사포병들의 자위적 조치에 의해서 단발에 적 직승기는 우리측 지역에 격추됐다”고 주장했습니다.

 

느긋하게 토요일 오후를 즐기던 미군과 한국군에는 비상이 걸렸습니다. 한미연합사는 모든 정보 자산들을 총동원, 헬리콥터가 사라진 지점을 정밀탐색하면서 감시태세를 강화하죠. 
 

사고의 원인으로는 헬리콥터를 조종했던 두 조종사 모두 주한미군에 전입한지 겨우 한 달 밖에 되지 않아 한국지형에 어두운데다, 사고 당시 눈이 1m나 쌓여 있어서 군사분계선을 알아보지 못하고 월경한 것으로 추정되었습니다.

 

또 이 사건은 한국군과 미군의 방공체계에 커다란 허점이 있음을 드러냈습니다. 헬리콥터로부터 통신이 두절된 때로부터 한미양국군이 헬리콥터의 월경 사실을 파악할 때까지 30분이나 걸렸고(오산방공통제소에서 사고 헬리콥터의 항적에 이상이 있다는 사실을 감지했지만, 실제 헬리콥터의 착륙지점을 확인한 것은 오전 11시 9분 경이었죠), 헬리콥터의 비행계획이 사전에 비행지역의 일선부대에 통지되지 않았다는 점 등은 이와 같은 우발적 사고가 언제든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예고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게리 럭’ 주한미군 사령관이 북한 당국에 유감 표명을 한데이어, ‘허바드’ 미 국무부 부차관보가 대통령 특사로 평양을 방문하여 북한당국과 조종사의 석방교섭을 벌입니다.

 

북한 당국은 12월 22일, 사망한 하일먼 준위의 시신을 미군 측에 인도하고 30일에는 홀 준위도 판문점을 통해 송환했습니다. 윌리엄 페리 미 국방장관은 성명서를 발표, “홀 준위의 가족과 국방부 사람들에게 오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보인 인도주의적 행동만큼 멋진 새해 선물은 없을 것”이라며 홀 준위의 송환을 환영합니다.

 

 

 

1996년 9월 18일 - 북한 상어급 잠수함 안인진리에 좌초

 

 

1996년 9월 18일 강원도 강릉시 안인진리 앞바다에서 북한 잠수함이 기관고장으로 좌초된 채 발견됩니다. 당일 오전 1시 30분경, 근처를 지나던 택시 기사 이 아무개씨의 신고로 줄동한 군과 경찰은 이 잠수함이 북한이 비정규전에 활용하는 상어급 잠수함임을 확인, 즉각 경계태세에 들어가 달아난 북한 침투요원과 승조원들에 대한 수색에 들어갑니다.


군은 즉각 이 지역에 비정규전 대비태세인 “진돗개1” 상황을 발령하고 대 침투작전에 들어갔죠. 일차적으로 북한 무장요원들의 도주로와 예상 은거지역인 칠성산·망덕봉·괘방산 일대를 차단하고 본격적인 작전을 전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강원도 전 지역에 통합 방위태세 ‘을종’을 선포하고 예비군의 동원과 함께 통행금지도 실시했죠. 그날 오후 3시 45분쯤, 북한요원들의 예상 도주로에 대한 항공정찰을 실시하던 군 헬기에 의해 11구의 사체가 발견되었고, 그로부터 약 1시간쯤 뒤 수색과정에서 이광수씨가 생포됩니다.

 

(이 씨는 처음에는 잠수함 승조원이라고 주장했지만, 나중에 공작원을 해안에 침투시키는 안내조 요원으로 밝혀졌습니다.)

이 씨의 확인에 의해 11구의 사체들은 북한 잠수함에 탑승했던 해상처장 김동원 대좌를 비롯한 안내원과 승조원들인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정부 합동심문조의 분석 결과 공작조가 그들을 AK소총과 권총으로 살해한 것으로 추정되었죠.


침투한 무장 요원들은 북한 인민무력부 정찰국 해상처 제22전대의 공작요원과 안내원, 그리고 승조원들이며 전원 군관들인 것으로 확인됩니다.

 

이들이 이용한 상어급 잠수함은 길이 35m, 폭 3.8m의 300톤 규모로 특수 공작에 이용하기 위해 개조된 것이며, 이미 침투시킨 공작조의 복귀를 위해 해안으로 접근하다가 좌초된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군경의 대침투 작전은 11월 5일까지 무려 49일간에 걸쳐 실시된 소탕작전으로 1명을 생포하고, 13명을 사살합니다. 공작조에 의해 살해된 11명을 포함해서 총 26명의 침투요원 중 사살되거나 잡히지 않은 1명은 도주 중 사망했을 것이라고 군은 추정합니다.

하지만 아군의 피해도 만만치 않아 군인 12명, 예비군 1명, 경찰관 1명이 전사했으며 민간인 사망자도 4명이나 발생했습니다.

당시 미국이 사전에 침투사실을 알았다는 것이 국내에 알려져, '로버트 김 사건'의 발단이 되기도 했습니다. 이후 북한 침투요원들의 유골은 석달 뒤 북한 측에 인도됩니다.

 

 

 

1996년 9월 24일 - FBI, ‘로버트 김’ 간첩혐의로 체포

 

 

로버트 김

 

1996년 오늘, 미국의 수도 워싱턴 DC의 ‘포트 마이어’ 미 육군 장교 클럽에서는 주미 한국 대사관 무관부가 주최한 국군의 날 리셉션이 열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행사에 참석하고 있던 한국계 미국인 로버트 김(한국명 김채곤,1940년생)씨가 미 연방 수사국 (FBI) 요원들에게 체포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그에게 적용된 혐의는 간첩죄,  주미 한국대사관의 해군 무관인 백동일 대령에게 정보를 제공했다는 혐의였습니다. 

 

당시 김씨는 미 해군 정보국(ONI, Office of Naval Intelligence)에서 ‘합동해양정보체계’를 설계하고 유지하는 일을 하던 컴퓨터 전문가였죠. 그는 1995년 11월 워싱턴에서 열린 한미 해군 정보교류 회의에서 백 대령의 통역을 맡게 되면서 한국군의 열악한 첩보수집 여건을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자신이 도울 수 있는 한 도와주겠다’고 약속한 김씨는 그 후 비밀로 지정되지 않은 정보 중에서 한국군에게 도움이 될 것으로 판단되는 자료들을 골라 우편으로 보내주었습니다. 그 정보들은 북한군과 북한 주민의 동요 여부, 국제사회가 지원한 식량이 북한군에게 유입되었는지 여부, 휴전선 부근의 북한군 배치, 북한 해군의 동향 등이었습니다. 
 

김씨는 어떠한 물질적 대가도 바라지 않았고, 순수한 애국심에서 이러한 정보들을 제공한 것이었죠. (백 대령의 회고에 의하면 단 한번 김씨에게 갈비탕으로 식사를 대접한 적이 있었을 뿐이라는 군요.) 그는 그 어떤 기관보다 북한 정보에 목말라하는 한국군을 돕고 있다는 것에 만족감을 느끼고 있었다고 합니다. 
 

1995년 12월부터 우편으로 백 대령에게 전달된 정보는 50여건 정도 되었고, 백 대령은 이중 30여건을 번역해 한국으로 보냈습니다. 하지만 FBI는 이미 정보의 유출을 감지하고 김씨와 백 대령을 감시하고 있었습니다. 
 

사건의 직접적 발단이 되었던 것은 국군의 날 리셉션 행사 6일전 터진 북한 잠수함 침투였습니다. 당시 우리 국방부는 원산 송전 반도에 있는 북한 해군 기지에서 두 척의 상어급 잠수함이 출항했고 그 중 한 척이 원산항으로 되돌아 온 것을 확인하고, 나머지 한 척이 강릉으로 침투한 것으로 추정했지만 자세한 이동로를 알 수는 없었습니다.

 

 

 
1996년 9월 19일, 강원도 안인진리 해안에서 발견된 북한의 상어급 잠수함.

 

북한 잠수함은 디젤엔진을 가동해 배터리를 충전해야 잠수 항행이 가능한 재래식 잠수함의 특성상 2~3일에 한번 물위로 떠올라야 했지요. 이 때 수면 밖으로 나온 공기 흡입관에서는 방사열이 나오게 되는데 미국의 군사 위성은 이 열을 포착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포착된 정보들을 배열하면 북한 잠수함의 이동 경로를 알아낼 수 있는 것이죠. 


 

백 대령은 김씨에게 전화를 걸어 이러한 자료를 제공해 줄 것을 부탁합니다. 이 시점은 이미 FBI가 김씨로부터 로버트 김에게 보내지는 서신을 검열하고, CCTV로 백대령의 동태를 감시하고 있던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로버트 김씨를 체포한 것이죠. 
 

FBI로부터 김씨를 송치 받은 미 연방 검찰은 그를 간첩죄 등으로 기소했고, 이 사건은 한미 간의 외교 마찰을 불러왔습니다. 한국 정부는 “김씨가 적국이 아닌 동맹국인 한국을 위해 정보를 제공했는데 왜 간첩죄로 기소하느냐?”고 항변 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죠. 
 

연방법원에서 재판을 받게 된 김씨는 자신의 유죄를 인정하는 ‘플리 바게닝’을 선택하죠. (플리 바게닝은 피고인이 유죄를 인정하는 대신 형을 경감시켜주는 미국의 사법제도) 연방 검찰은 김씨에게 군사기밀유출죄를 적용하여 법정최고형인 징역 10년을 구형합니다.

 

그리고 1997년 7월 12일 버지니아주 알렉산드리아 연방지방법원의 브링크마 판사는 로버트 김에게 “미국 시민이 되기 위해 맹세한 충성서약을 위반했다”며 징역 9년에 보호감찰 3년형을 선고하죠.

 

펜실바니아주 앨런우드 연방 교도소에 수감되었던 로버트 김씨는 10년 징역과 보호감찰 생활을 마친 2004년 7월 27일 자유의 몸이 됩니다. 그리고 2005년 11월 6일, 한국을 방문 합니다.

 

10년간의 수감 생활 중 돌아가신 부모님의 임종도 못지켰지만, 당시 그는 “과도한 처벌을 한 미국과 구명에 소극적이었던 한국정부였지만 원망하는 마음은 없다."는 심경을 밝혔습니다. 또 그는 자신의 사건은 분단된 한반도의 현실과 한미관계의 특수성이 만들어낸 것이라는 말도 남겼습니다.  

현재 로버트 김씨는 가족과 함께 미국 버지니아주에 살고 있습니다.

 

  

 

1998년 4월 1일 - 특전사 천리행군 중 6명 사망·1명 실종

 

   혹한기 전술 훈련에 참가한 특전대원들의 모습 (이미지=photo.naver.com)

 

1998년 오늘, 천리행군을 하던 육군 특수전사령부 흑룡부대원들이 산악에서 갑자기 몰아친 추위 속에 탈진해 6명이 숨지고 1명이 실종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사고는 나흘 전 충남 청양 칠갑산을 출발해 계룡산과 속리산을 거쳐 대마산에 이르는 9박 10일간의 대대 전술종합훈련에 나선 특전부대원들이 해발 1249m의 민주지산을 넘을 때 일어났습니다.

 

사고 부대는 1일 오후1시 전북 무주를 출발, 20㎞를 3시간 동안 강행군한 끝에 민주지산 정상부근에 도착해 야영에 들어갔죠. 그러나 밤이 되자 야영지에는 기후가 급변하면서 영하 10도 이하의 추위가 닥치고 낮부터 내리던 비는 폭설로 변했습니다.

 

사고당시 현장은 이미 30㎝가량의 폭설이 내린데다 초속 40㎞의 강풍으로 체감기온이 영하 10도 이하로 급강하해 사실상 훈련이 불가능한 기상상태였죠.

 

출발 때부터 계속 쏟아지는 빗속의 강행군으로 체력이 급격히 소모된 데다 갑작스런 강추위로 탈진증상을 호소하는 장병들이 늘어나기 시작했고, 헬리콥터조차 뜰 수 없는 악천후로 구조작업이 늦어지면서 결국 대위 1명을 포함해 6명이 사망하고 1명 실종, 6명이 부상하는 불상사가 발생했던 것입니다.

조사에 착수한 육군은 “16일부터 계속된 훈련으로 대원들의 피로가 누적된데다 지옥훈련과정인 천리행군도중 악천후로 체력이 급격히 저하되면서 저체온증을 유발, 사고로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며 “직접 사인은 탈진으로 인해 피부와 근육이 갈라지는 열상과 간기능저하”였다고 밝혔습니다. 

 

하지만 방한복과 야영장비, 응급의약품 등 산지야영에 대비한 충분한 대비 없이 무리하게 훈련을 강행했던 지휘관의 과실도 드러났습니다. 기상악화로 첫 사상자가 발생했는데도 산악훈련을 중단하지 않고 예정된 집결지로 모이도록 하는 훈련을 강행해 추가 사상자가 발생했다는 사실도 밝혀졌죠.

 

국방부는 사고의 지휘책임을 대대장을 보직해임한 데 이어 여단장과 여단 정보참모에 대해 훈련감독 부실 책임을 물어 징계위원회에 회부했습니다. 순직한 특전사대원 6명의 합동영결식은 3일 특수전사령부장으로 거행되었고, 유해는 대전 국립현충원에 안장되었습니다. 사고 현장 아래 물한리 계곡에는 안타깝게 숨져간 젊은 군인들의 영혼을 위로하는 위령비가 서있습니다.

 

 

 

1999년 6월 15일 - 제 1차 연평 해전 발발, 해군 북한 함정 격침 

 

 

그 날 연평도 해상은 얇은 연무가 깔린 가운데 청명한 날씨로 꽃게잡이에는 더없이 좋은 날이었습니다. 오전 7시 15분 북한 어선 5척이 NLL을 넘어옵니다.

 

10분 뒤에는 어선 8척이 추가로 월선, 남방 2.5Km까지 남하해 조업을 하죠. 7시 55분경 80톤급 북한 경비정 2척이 NLL을 넘었고 이어 420톤급 2척이 어뢰정 3척의 호위를 받으며 속속 NLL을 넘어 남하합니다.


NLL이남 10㎞ 해상에서 대기하고 있던 해군 함정에 일순 긴장감이 돌았죠. 당시 우리 해군은 영주함과 천안함(1,200톤급) 등 초계함 2척과 2함대사령부 소속 참수리 고속정(170톤급) 12척을 전진 배치한 채 북한 경비정의 남하를 예의 주시하고 있었습니다.

 

7일부터 시작된 북한 해군의 NLL 침범은 일주일동안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죠. 전날인 14일 밤, 군 수뇌부는 남하한 북한 경비정에 대한 ‘충돌식 밀어내기’ 대응으로는 사태가 장기화되리라고 판단하고 저지선을 북쪽으로 올려 북한 경비정의 남하를 초입에서 막는다는 ‘원천봉쇄작전’을 결정했죠. 

 

북한 해군 P-6급 어뢰정.

 

이윽고 “NLL남방 3Km 이상으로는 밀리지 말 것”이라는 군 수뇌부의 지시를 받고 있던 우리 해군 참수리 고속정들과 1,200톤급 초계함 2척이 전속력으로 물살을 가르며 북한 경비정들을 향해 달려갑니다.

 

참수리 고속정들은 초계함과 함께 2개의 편대를 구성해 정면에서는 충돌작전을 펴고, 다른 한쪽에서는 북한 경비정을 압박해 들어가는 양동작전을 구사했죠. 이것은 전날 조성태 국방장관으로부터 NLL인근해역에서 적극적인 봉쇄작전 명령을 하달받은 데다 북한 경비정이 13일부터 우리측의 ‘차단기동’에 대해 ‘박치기식’ 공격으로 저항한데 따른 것이었습니다. 

오전 9시7분. ‘전속 질주’ 명령이 떨어지자 참수리 고속정 1척이 편대에서 빠져나와 해상시위를 벌이던 420급 북한경비정을 향해 쏜살같이 돌진, 충돌합니다.

 

불시에 함미를 들이받힌 북한경비정은 우리 고속정에 박치기식 공격으로 역습하기 위해 덤벼들어 남북의 함정 두 척은 서로의 꼬리를 잡기위해 쫓고 쫓기는 해상질주를 벌입니다.

 

한국 해군의 참수리급 고속정 편대.

이어 오전 9시20분. 기회를 엿보고 있던 다른 참수리 고속정이 80톤짜리 북한경비정을 정면으로 들이받았죠. 또 우리 고속정은 북한 경비정을 호위하고 있는 북한 어뢰정을 향해 다시 돌진, 저지작전을 벌입니다. 공격을 받은 북한 어뢰정이 뒤로 주춤 물러납니다.

 

북한 경비정들도 초긴장, 어뢰정 근처로 몰려들었죠. 사정거리 3㎞의 어뢰 2발을 장착한 북한 어뢰정은 우리 측의 초계함 동원에 대응해 북한경비정을 호위하는 임무를 받고 있었습니다. 북한 경비정들로선 어뢰정이 공격을 받으면 자신들이 보호받을 수 없는 상황이었죠. 

 

‘타타타탕’. 오전 9시25분, 참수리 고속정이 북한 어뢰정을 막 들이받는 순간, 근처에 있던 북한경비정에서 맹렬한 총성이 울립니다. 북한경비정 갑판으로 일제히 올라온 수병 10여명이 조준사격 자세를 취하고 25㎜ 기관포로 우리 고속정 1척과 천안함을 향해 선제사격을 가해 온 것이죠.

 

기관포 공격을 받는 것과 동시에 우리 측 해군함정의 함포들도 불을 뿜기 시작합니다. 컴퓨터로 북한경비정을 자동 추적하던 참수리 고속정의 40㎜함포가 북한경비정에 작렬하는 한편, 초계함에서도 76㎜ 포탄이 쉴 새 없이 날아갑니다.

 

대치하던 양측 함정들이 일제히 상대방을 향해 시뻘건 불을 뿜어내는 함포사격은 이후 5분여간 치열하게 계속됩니다. 우리 측의 집중공격으로 불리해진 북한 어뢰정이 초계함을 향해 어뢰를 발사하려는 듯 방향을 틉니다. 바로 그 순간 초계함에서 발사된 76㎜ 포탄이 어뢰정 선체에 그대로 명중하죠.

  한국 해군 동해급(1200톤) 초계함, 사진은 PCC-769 안동함.

 

선체 정중앙에 포탄을 맞은 북한 어뢰정은 굉음과 함께 요동칩니다. 하늘에는 시뻘건 불기둥과 검은 연기가 높이 솟았고, 북한 어뢰정은 선체가 기웃하면서 바다 속으로 가라앉기 시작하죠. 참수리 고속정의 집중사격을 받은 다른 소형 경비정 1척도 추진력을 잃고 30도 정도 기운채로 표류합니다.

 

우리 초계함과 고속정에서는 남은 북한경비정을 향해 일제히 십자포화를 퍼부었죠. 북한 경비정중 420톤급 1척이 대파되어 화염에 휩싸이고 나머지 북한 경비정 3척도 선체 곳곳이 파손된 채 북쪽으로 퇴각하기 시작합니다. 시커먼 연기를 내뿜던 북한 경비정 1척은 침몰을 면하고 겨우 북쪽으로 예인되었죠.

 

9시30분, 조성태 국방장관은 전군에 경계태세 강화 지시를 내립니다. 국방장관의 지시는 합참의장과 육해공군 참모총장을 통해 전군에 전파됐고 전군은 ‘준전시 상태’에 돌입하죠. 같은 시간 공군의 주요 전투비행단들도 비상대기상태에 들어갑니다. 공중 초계활동 전투기도 2배 이상 늘어납니다. 


오전 10시. 서해5도 인근 해군부대와 해병여단, 해군 2함대 사령부 등에 ‘데프콘―3’에 준하는 전투준비태세가 내려지고, 오전 11시에는 전군에 ‘워치콘―2’가 발령됩니다.

 

육해공군 전군에 즉각적인 비상발령과 ‘서해안 상황’이 신속하게 전파되었고, 야외 훈련 또는 교육 중이던 모든 부대가 즉각 복귀해 장비와 인원을 점검합니다. 경찰청도 낮 12시를 기해 인천 강화경찰서 등 인천과 경기 강원지역 12개 경찰서에 ‘작전비상 을호’를 발령하죠.

  이날 합동참모본부는 “북한 경비정의 선제공격에 대해 우리 해군이 즉각 응사, 북한 어뢰정 1척을 침몰시키고 420t급 경비정 1척을 대파시켰으며 나머지 북한 경비정 4척도 선체 등이 파손된 채 퇴각했다”고 밝혔습니다.

 

교전에서 참수리 고속정 정장 허욱 대위 등 해군 장병 7명이 부상, UH-60 헬리콥터로 수도 통합병원으로 긴급 후송되죠. 북한 해군의 인명피해는 침몰한 어뢰정 승조원 전원(17명)과 경비정에 탑승했던 수병 등 20여 명이 사망하고 30여명이 부상을 입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북한의 중앙통신은 이날 서해상 남북한 교전상황에 대한 첫 공식반응을 통해 “남한측의 엄중한 무장도발행위”라고 비난하며 “즉시 사죄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1999년 9월2일 북한은 ‘조선 서해해상 군사분계선’을 선포하고 NLL은 무효라고 주장하며 이 수역에 대해 자위권 행사를 하겠다고 밝힙니다.

 

이어 2000년 3월23일에는 ‘서해 5개섬 통항질서’를 공포하며, 서해 5개섬을 입·출항하는 2개 수로를 지정, 남측의 모든 함정과 민간선박은 제1, 2 수로를 이용하도록 발표하기도 했죠.

 

이후 노무현 정부 당시 북한은 남북공동어로수역 및 평화수역 설정 논의를 통해 NLL 수역의 일정한 양보를 얻어내려고 시도했지만 남측의 ‘NLL 사수’ 여론에 밀려 더 이상 진전되지 못했습니다.

 

2001년 4월 1일 - 미 해군 정찰기, 중국 하이난 섬 비상 착륙  

 

미 해군 EP-3 '에어리스' 정찰기.

 

7년 전 오늘, 24명의 승무원을 태운 미 해군 EP-3 에어리스(Aries) 정찰기가 남중국해 공해 상공에서 첩보활동을 벌이다 이를 요격하기 위해 출동한 중국 F-8 전투기와 공중 충돌한 후 중국 하이난다오(海南島)  링수이 기지에 비상착륙하는 일이 벌어집니다.

 

이날 사고는 미국의 대 대만 무기 판매 계획 등을 둘러싸고 미-중 관계가 미묘한 시점에서 발생했습니다. 미국 태평양 사령부는 성명을 통해 “미 해군 정찰기가 남중국해 상공에서 통상적인 정찰활동을 벌이다 중국 전투기 2대의 제지를 받는 과정에서 이 중 한 대와 충돌하면서 기체가 손상되어 긴급구조 신호를 보낸 후 하이난다오에 비상착륙했다”고 발표했습니다.

 

중국 당국도 이날 충돌 사고에 대해 ‘미군 정찰기와 충돌한 중국 전투기가 추락, 조종사가 실종됐다’고 밝혔습니다. 또 ‘충돌사고를 일으킨 미군기가 중국 영공을 침범, 1일 오전 9시 33분께 착륙허가도 받지 않고 링수이 기지에 내렸다’고 발표했죠. 
 

사고 원인에 대한 양국의 설명은 달랐습니다. 미군에 따르면 ‘1일 오전 일본 오키나와(沖繩)의 가데나 기지를 이륙한 정찰기가 하이난다오 남동쪽 70마일(112㎞) 해상 상공에서 '통상적인 정찰활동'을 하고 있었는데, 오전 9시15분께 중국 F-8 전투기 2대가 빠른 속도로 접근해서 그 중 한 대가 왼쪽 날개를 들이 받았다.’는 것이었죠.

 

사고가 일어난 상공은 분명히 중국 영공 바깥이었다는 것이 미국 측의 주장이었습니다. 중국 외교부의 설명은 이와 달랐습니다.

 

‘이날 오전 9시 7분께 미국 정찰기가 중국 영공을 침범해 전투기 2대를 출격시켜 요격하게 했는데, EP-3기가 갑자기 기수를 바꾸면서 기체 머리 부분과 왼쪽 날개 부분으로 중국 전투기 1대를 들이받아 기체는 추락하고, 조종사는 실종되었다.’는 겁니다. 

 

 

정찰기와 충돌한 후 추락한 중국군 F-8 전투기와 실종 조종사 '왕웨이'.

 

사고 다음날,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은 중국이 미국 정찰기에 대해 손상을 입히거나 함부로 다뤄서는 절대 안 된다며 즉각적인 반환을 촉구하는 성명을 발표합니다.

 

미국 당국은 사건이 일어난 직후부터 중국이 정찰기를 조사했는지의 여부에 대해 대단히 민감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중국이 정찰기를 조사할 경우, 미국의 정찰능력, 정보수집대상, 감청내용 등이 모두 드러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죠.

 

 

EP-3 정찰기의 내부.


  사고 이후 10 여 일간 미국과 중국은 승무원과 기체 송환문제와 사과의 수위에 대해 협상을 벌였고, 마침내 부시 대통령이 실종된 중국 전투기와 조종사에 대해 “진심으로 유감스럽고” (sincere regret), 하이난다오에 비상착륙한 것에 대해서는 “대단히 미안” (very sorry)하게 생각한다는 유감표명을 하죠.

 

중국이 이를 받아들여 4월 12일, 승무원 24명은 미국으로 송환됩니다. 정찰기의 기체는 중국 당국이 샅샅이 조사한 후 분해해서 미국에 반환하는 것으로 사건은 일단락됩니다.  

 

4월 12일, 미국으로 송환되는 정찰기 승무원들.

 

하지만 이 사건 이후, 부시 행정부는 새롭게 부상한 중국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이른바 ‘헤지 전략’ (Hedge Strategy)으로 이름 붙여진 대 중국 전략을 세웁니다.

 

이 전략의 핵심은 아시아지역의 군사력을 집중 증강함으로써 중국이 적대세력으로 성장하는 것을 사전에 차단하고, 분쟁이 일어났을 경우엔 군사력을 동원해 신속히 중국을 패퇴시키는 것이죠.

 

이를 위해 이 전략은 중국 인근 지역의 전투태세 항공모함을 현재의 2척에서 4척으로 늘리고, 괌 기지의 전략폭격기 배치와 관련 시설을 확충하는 등의 내용을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분해된 후 미군 수송기에 실리는 EP-3 정찰기

 

 

 

 2001년 5월 1일 - 부시, 미사일 방어 체제 공식 천명

  

2001년 오늘,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취임 100일을 맞아 워싱턴의 국방대학에서 가진 특별연설을 통해 미사일 방어 체제의 구축을 공식 천명 합니다. 그는 연설에서 이른바 ‘불량국가’들의 미사일 및 핵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세계가 직면한 상이한 위협에 대처할 수 있도록 미사일방어체제를 구축해야 할 새로운 틀이 필요하다”며 “미국을 포함한 우방과 동맹국들의 안보를 강화하기 위한 미사일방어망 배치를 추진할 것”이라고 선언했습니다.

 

미사일 방어 체제의 건설은 그의 대선공약이기도 했는데, 달라진 것이 있다면 기존의 ‘국가미사일방어’(NMD, National Missile Defence))라는 용어에서 ‘국가’라는 말을 떼어 내고 ‘미사일방어’(MD, Missile Defence)라는 용어를 사용, 이 체제가 미국뿐 아니라 우방과 동맹국들의 안보와 안전을 지키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강조한 것이었죠.

 

또 부시 대통령은 “체결된 지 30년이 지난 탄도탄요격미사일(ABM) 협정은 현 상황을 제대로 인식하지 않고 있을 뿐 아니라 미래의 방향도 제시해 주지 않고 있다”며 ABM 협정에 구애받지 않을 것이라는 입장도 분명히 밝혔습니다.

 

미국이 추진하는 미사일방어체제는 발사, 중간, 최종 요격 등 3단계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980년대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가 소련의 대량 핵공격으로부터 미국 본토를 보호하기 한다는 명분으로 구상한 ‘스타워즈’계획에서 발전한 미사일 방어 체제는 시대의 변화에 따라 그 개념과 명칭도 바뀌어 왔는데, 소련이 해체되고 탈냉전기에 들어선 이후에는 ‘전역미사일방어체제' (TMD), '국가미사일방어체제’ (NMD) 등으로 변화했죠.

 

‘스타워즈’로 불리던 레이건 행정부의 ‘전략방위구상’ (SDI)이 지구 괘도를 도는 위성 방패망 을 이용, 지구 주위의 미사일을 방어한다는 구상이었다면 ‘미사일방어체제’ (MD) 구상은 지상과 해상, 항공기에서 운용되는 요격미사일망을 구축한다는데 그 핵심이 있습니다. 적국이 발사한 탄도 미사일을 공중에서 요격하기 위한 미사일 방어체제는 발사·중간·최종 요격 등 3단계로 구성됩니다.

 

발사단계 요격시스템의 대표적 무기로는 이지스 구축함 등에 탑재되는 ‘SM - 3’ 미사일이, 중간단계 요격무기로는 ‘지상기지 요격 미사일’ (GBI)가 이미 실전 배치된 상태고, 최종단계 요격 시스템을 구성하는 ‘패트리어트 PAC-3’는 실전배치, ‘종말고고도방공미사일’ (THAAD)이 개발 중에 있습니다.   

 

 

부시의 미사일 방어망?

 

부시 대통령의 미사일방어체제 추진에 대해 세계 각국의 반응은 싸늘했습니다. 냉전이 끝난 마당에 새로운 군비경쟁을 불러올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었죠.  특히 미사일방어체제가 바로 자신들을 겨냥한 것이라는 중국과 러시아의 반발이 거셌습니다. 

 

코피 아난 당시 유엔 사무총장도 성명을 통해, ‘군비경쟁을 막고 우주를 무기 없는 곳으로 내버려둘 필요가 있다’면서 반대 입장을 나타냈습니다. 하지만 부시 행정부는 엄청난 비용과 계속되는 기술적 실패에도 불구하고 한걸음씩 미사일방어체제를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미사일 방어체제는 성공할 수 있을까요? 많은 전문가들의 견해는 회의적입니다. 이미 러시아는 미사일 방어 시스템을 무력화 시킬 수 있는 ‘불라바’ 미사일 개발에 성공했다고 밝히고 있고, 미국이 지칭하는 소위 ‘불량국가’들이나 테러단체들이 선박이나 항공기에 싣고 들어오는 소형 핵폭탄이나 생화학 무기를 막기에는 미사일방어체제가 무용지물이라는 것이죠.

 

차라리 그들이 말하는 ‘불량국가’들과 적극적 대화와 협상을 통해 미사일 위협을 없애나가는 것이 훨씬 합리적이고 설득력 있는 방안일 듯합니다.

 

 

 

2001년 11월 9일 - 일본자위대 전후 첫 전투수역 파병

2001년 11월 9일, 일본 해상자위대가 전후 최초로 전투수역에 함대를 파견합니다. 이 날 사세보 항에서 5천 톤급 호위함(일본 해상 자위대는 구축함, 호위함 등의 구별을 하지 않고 천톤 이상의 군함에는 통상적으로 호위함이라는 명칭을 붙이고 있습니다.)  구라마(JMSDF DDH-144), 기리사메(DD-104), 8천톤급 보급함 하마나(AOE-424)가 아프가니스탄에서 벌어진 미국의 ‘항구적 자유(Enduring Freedom) 작전’을 지원하기 위해 인도양을 향해 출항했죠. 9.11 테러 이후 일본 의회는 ‘테러대책 특별 조치법’을 통과 시켰는데, 이 법은 전투지역에 대한 자위대 파병의 근거를 제공했습니다.


 



 

일본 해상자위대의 인도양 파견이 주목을 받았던 이유는 당시 일본정부가 추진하던 이른바 ‘유사법제’(有事法制) 제정과 깊은 관련이 있었습니다. 2차 세계대전의 전범국이었던 일본은 헌법으로 군대의 보유와 국가의 교전권을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아시아의 수많은 민중들을 고통 속에 몰아넣었던 과거 역사가 반복되지 않기 위한 제도적 장치인 셈이죠. 따라서 현행 평화헌법 체제 아래서 자위대의 활동에는 많은 제약이 따랐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유사법제라고 불리는 '무력공격사태법안, 자위대법 개정안, 안전보장회의 설치법 개정안' 등 3개 법안은 일본으로 하여금 재무장의 길을 열어 놓고 있다는 점에서 주변국들의 우려를 낳고 있었습니다. 물론 유사법제 이전에도 미-일 안전보장조약은 전쟁 수행중인 미군의 후방에서 자위대가 물자지원 등을 할 수 있도록 ‘주변사태법’ 등의 조항을 마련해 놓고 있기는 했습니다. 그러나 어디까지 이것은 ‘미군 지원’이라는 제한선이 있었죠. 유사법제가 만들어지면 일본이 직접적인 침공을 받았을 때뿐만 아니라 받을 가능성이 있는 경우에도 전시체제로 돌입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것이죠.

지난 4월 일본 총리로서는 최초로 인도양에 파견된 자위대 함대를 시찰하는 아베 신조 당시 총리.

 


 

또 일본이 직접적인 공격을 받기 전에는 집단적 자위권(자위대가 미군과 같이 전투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는 현행 평화헌법도 사실상 무력화되고 맙니다. 미국이 전쟁을 벌이고 있을 때 일본 정부가 위기 상황이라고 규정하면 자위대가 미군과 함께 전투를 할 수 있는 겁니다. 그리고 전시를 뜻하는 ‘유사’(有事)를 규정하는 상황도 얼마든지 자의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 여지를 두고 있습니다.



 

이를 바라보는 주변국들의 우려뿐만 아니라, 일본 시민사회의 반발도 커서 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80%에 가까운 사람들이 ‘유사법제’에 부정적인 의견을 갖고 있었습니다. 일본 시민들의 반응은 ‘유사법제는 태평양전쟁 당시의 전시동원령 같다. 냉전도 끝난 마당에 왜 일본이 굳이 나서서 '전쟁준비법'을 만드느냐’는 것이었죠. 하지만 일본 의회는 2003년 유사법제와 이라크 파견 특별법을 통과시킵니다.   

2004년 이라크에 파병된
일본 육상 자위대.


 

 


 

그리고 해상자위대는 지난 2001년 11월부터 지금껏 모두 59척의 함정과 1만 1천명을 인도양에 파견해서, 아프가니스탄 대테러작전에 참가한 미국·영국 등 동맹군 함선에 대해 급유·급수 지원을 해오다 6년만인 지난 11월 1일 철수합니다. 자위대의 인도양 파견에 근거를 제공했던 ‘테러대책 특별조치법’의 시한이 만료되었기 때문이죠. 물론 ‘후쿠다 야스오’ 총리를 비롯한 자민당 정권은 ‘보급지원 특별법’이라는 법안까지 발의하며 자위대의 활동기간을 연장하려 시도했지만, 야당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쳐 무산되었습니다.

해상 급유중인 일본 해상 자위대.

 


 

하지만 자위대의 해외 파견의 가능성은 언제든지 열려 있습니다. 얼마 전 후쿠다 총리는 “인도양에서 일본까지의 해상 교통로는 일본의 생명선으로 테러단체가 암약할 경우 안심하고 항해할 수 없다. 또 항해상의 안전 보장은 한 국가의 힘으로는 이룰 수 없는 사안이기 때문에 타국과의 협력이 필요하다”며 해상자위대의 인도양 파견이 해상 안보 유지를 위해 불가결한 사안임을 거듭 강조하고 있습니다. 군대를 보유한 ‘보통국가’를 향한 일본의 안간힘이 예사로워 보이지 않는 이유는 일본의 재무장이 동북아의 평화를 위협할 불씨가 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입니다. 

 

 

2002년 1월 3일 - 한국군 최초 여성 장군 탄생


진급 신고 후 김대중 대통령으로부터 삼정도를 수여 받는 양승숙 장군

2002년 1월 3일, 국군 창설 53년 만에 첫 여성 장군이 탄생합니다. 육군 간호병과장 양승숙 대령이 그 주인공이었죠. 73년 소위(간호후보 29기)로 임관한 이래 국군수도병원 간호부장, 국군의무사령부 의료관리담당관, 국군간호 사관학교장을 지낸 양 대령은 IMF직후 간호사관학교 폐지론이 제기될 때 여성계에 군의 간호업무에 대한 중요성을 호소해 학교를 존치 시키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주역이었습니다.

 

양 대령은 “이번 장군 승진은 그동안 묵묵히 맡은 바 소임을 다해 온 여군 전체의 영광으로서, 단지 내가 대표로 영예를 안은 것”이라며 “병과를 떠나 최초의 대한민국 여성 장군으로서 국가와 군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소감을 밝혔습니다.

양 대령의 장군 진급은 자신의 임기 중 여성장군을 탄생시키겠다는 김대중 대통령의 마지막 공약사항이기도 했습니다. ‘최초’라는 상징성을 생각할 때 전투병과 출신 여성 대령이 별을 다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군내 여론 때문에 첫 여성장군의 물망에 올랐던 유력한 후보는 엄옥순(여군사관 24기) 전 여군학교장과 민경자(여군사관 24기) 대령 등 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동안 남성 중심의 군 조직에서 역할과 지위를 제한 받았던 여성군인들이었기에 장군 진급 물망에 올랐던 전투병과 출신 여군 대령들은 탈락하는 고배를 마셔야 했죠. 장군 진급을 위해서는 연대장 등의 지휘관 경력이 필수적이었지만 주로 비전투 분야 보직을 맡아야했던 여군 장교들의 진급점수가 모자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현재 한국군의 여성 비율은 2.7%(장교 2400명, 부사관 2000명)로 이스라엘의 30%, 미국의 15%, 캐나다의 11%와 비교해볼 때 대단히 낮은 수준입니다. 특히 상위직으로 갈수록 여군 비율은 매우 낮아 여군 장교 전체에서 차지하는 여군 영관 장교의 비율은 남녀 장교 모두를 포함한 전체 대비 3분의 1에 불과하죠. 여군 상사·원사 역시 전체 대비 7분의 1 수준에 머물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미 세계 여러 나라에서 전통적으로 남성들에게만 부여해왔던 군의 핵심기능들을 여성들에게도 대폭 개방하고 있는 것이 대세인데, 한국군도 교육훈련, 보직, 인사관리를 통해 여성 군인에게 동등한 기회를 주는 것이 새로운 세기에 부응하는 모습이 아닐까 생각하게 됩니다.

 

 

2002년 6월 29일 - 제 2연평해전 발발  

  북한 경비정의 공격으로 침몰한 참수리 357정 인양 장면 ⓒ 해군


2002년 6월29일 오전, 서해 북방 한계선(NLL)을 침범한 북한 경비정 2척이 우리 해군의 참수리 357호 고속정에 기습 공격을 가해 정장 윤영하 소령 등 6명이 전사, 19명이 부상하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오전 9시54분. 북한 경비정이 연평도 서쪽 7마일 해상에서 NLL을 넘어 남하하자 참수리 357, 358로 이뤄진 우리 고속정 253편대가 긴급 출동하여 대응기동과 경고방송을 하며 접근했지만 북한 경비정은 남하를 멈추지 않았죠.

 

교전은 오전 10시25분. 북한 경비정이 근접 거리에서 차단기동을 하던 참수리 357호정을 향해 85mm포를 발사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북한 해군에게 선제공격을 당한 참수리 357호는 함교가 파괴되면서 정장 윤영하 대위가 전사하고 통신실 등 주요 지휘체계에 손상을 입었습니다.

 

곧이어 우리측 고속정과 초계함 등이 교전에 가담해 북한 경비정을 향해 대응사격을 가하면서 교전이 격화됩니다. 선제공격을 당해 지휘관이 전사한 상황에서도 우리 해군 장병들이 보여준 투혼은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함포 방아쇠를 당겼던 고 조천형, 황도현 중사. M 60 사수로 자신의 몸을 은폐하기도 힘든 갑판에서 대응사격 중 전사한 고 서후원 중사. 조타장으로 고 한상국 중사. 부상당한 전우를 위해 동분서주 하던 중 피격을 당하여 3개월여의 투병생활 끝에 꽃다운 청춘을 접은 의무병 고 박동혁 병장. 다리를 절단해야 할 만큼 심각한 부상을 당했으면서도 쓰러진 정장을 대신해 교전이 끝날 때까지 부하들을 독려하며 끝까지 지휘했던 이희완 중위.

 

10여 분간의 교전은 오전 10시 43분, 우리 해군의 집중포격을 받은 북한 경비정이 퇴각하면서 끝이 났죠. 우리 해군의 인명 피해는 전사 6명, 19명 부상이었습니다.

 

그날은 마침 ‘2002 월드컵’ 한국과 터키간의 3,4위전 경기가 있던 날이었죠. 몇 일전 고 윤영하 소령를 비롯한 참수리 대원들이 월드컵 경기를 응원하던 모습이 한 방송사의 카메라에 찍혀 있었던 터라 국민들의 안타까움은 더 클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중에 우리 군 정보당국이 분석한 바에 따르면 북한 해군의 인명피해도 적지 않아 사망 13명, 부상 25명으로 최종 확인되었습니다.1999년과 2002년, 남북한 해군간의 두 차례 교전이 일어났던 서해 NLL은 2009년 지금 이 시점에도 긴장의 바다가 되어 있습니다.

 

 

2002년 11월 25일 - 미 국토안보부 출범

 

 

2002년 오늘,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이 ‘국토안보부’ (Department of Homeland Security) 신설 법안에 서명함으로써 17만 명의 인원과 년 400억 달러의 예산을 취급하는 공룡부서가 출범합니다. 국토안보부의 초대 장관에는 ‘톰 리지’ 백악관 국토안보국장이, 부 장관에는 ‘고든 잉글랜드’ 해군 장관이 임명되었습니다.


국토안보부는 9.11 테러 사건이후 미 행정부 내의 각 부서에 분산된 대테러기능을 통합할 목적으로 설립되었으며, 2차 세계대전 이후 전쟁부와 해군부를 통합하여 국방부를 만든 이후 가장 큰 규모의 정부 조직 개편이었죠.

 

세관, 이민국, 국경경비대, 비밀검찰국, 연방비상계획처 등 기존 조직 이외에 국토안보센터, 교통안전부, 사이버 대테러 센터 등 신설된 조직도 산하 기관으로 하는 국토안보부는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테러에 대비하는 초거대 조직입니다. 여기서 벗어난 기관은 CIA(중앙정보부)와 FBI(연방수사국), 그리고 실제 무력을 보유하고 있는 군대 정도였습니다.
국토안보부의 등장은 기구의 거대화뿐만 아니라 필연적으로 권력의 집중화도 불러왔죠. 특히 재무부 산하의 비밀 검찰국(Secret Service)이 국토안보부 산하로 이관된 것은 이런 변화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원래 위조지폐 수사를 위해 만들어진 이 조직은 후일 대통령 경호 업무도 맡게 되었는데, 독립된 경호기구는 권력의 집단화를 부를 수 있고, 군대에게 경호 임무를 맡길 경우에는 쿠데타의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쿠데타를 방지하고 권력 집중의 우려를 불식시키기 위한 미국 정치의 전통은 이런 우려가 비교적 적은 재무부 비밀 검찰국에 대통령 경호 임무를 맡겨 왔던 것인데, 국토안보부의 등장은 이런 전통을 깨버렸던 것이죠.

이보다 더 심각한 것은 테러 대응이라는 명분으로 최첨단 전자 감시 장비들을 이용한 인권침해와 사생활 감시에 대한 우려입니다. 국토안보부는 공항 보안과 해안 경비는 물론이고 사이버 공간상의 대화 내용을 무작위로 감시하고 사용자의 실제 위치까지 파악할 수 있는 권한까지 부여 받고 있습니다.

 

실생활과 사회기반시설이 모두 촘촘한 전자통신 네트워크로 엮여 있는 미국 사회에서 모든 사람들의 데이터를 수집하여 감시할 수 있는 능력은 ‘조지 오웰’이 이야기한 ‘빅 브라더’ 체제를 연상 시키게 하죠.

 

911 테러가 미국인들에게 남긴 유산은 한 마디로 ‘자유 보다는 안전’이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을 듯 합니다. 세계 최강의 군사력을 보유한 유일 초강대국 미국, 그 미국이 요새화 되어갈수록 시민의 자유는 움츠러들 수 밖 에 없으며 미국인들은 스스로 만든 감옥에 갇혀 살고 있는 셈입니다.

 

 

2003년 3월 20일 - 미국, 이라크 침공

 

 

5년 전 오늘, 전 세계인들의 반전시위에도 불구하고 미군과 영국군이 9.11 테러에 대한 응징과 후세인 정권 제거를 명분으로 이라크를 선제공격합니다.

 

이름하여 ‘이라크 자유’ 작전. 미국은 이라크에서 그들의 새로운 안보 개념인 ‘일방주의적 선제 저지전략’을 실행하기 위해, 이른바 ‘충격과 공포’라는 군사전략을 구사합니다. 전쟁 초기에 첨단 과학무기와 압도적인 공군 전력, 정보전, 심리전 등을 바탕으로 이라크군의 전쟁의지를 꺾어 붕괴를 유도함으로써 전쟁을 조기에 끝내겠다는 계획이었죠.

 

 

효과중심작전 개념도.

 

당시 국방장관의 이름을 따서 ‘럼스펠트 독트린’이라고도 불린 이 전략은 위성과 고성능 항공기 등의 최첨단 정찰 자산을 이용하고 정밀 유도 무기를 활용하여, 기동성을 극대화한 비교적 소규모(이라크전 당시의 미-영 지상군은 걸프전에 비해 1/3 규모였습니다.) 지상군 병력을 동원한다는 개념이었습니다.

 

‘효과중심작전’ (EBO:Effects Based Operations)으로 표현되는 이 신 개념은 빠르고 정밀한 공중폭격으로 핵심목표물을 파괴하여 이라크군의 결집과 저항 능력을 분쇄하고, 지상군은 덜 중요한 지역이나 목표를 우회하면서 전략적이고 결정적인 목표를 향해 신속히 기동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개전직후 미국은 대규모 정밀 공습과 동시에 지상군 공격을 개시했습니다. 또 전쟁이 터지기 전 미리 이라크 국내에 침투해 있던 중앙정보부(CIA) 특수작전그룹(SOG)팀은 인간방패 등으로 위장해 이라크의 전략 시설에 폭격을 유도했고, 사담 후세인 정부의 고위 관리들과 장성들에게 신변보장과 금품제공 등을 미끼로 회유하는 심리 공작을 펼쳤습니다.

 

2003년 5월 1일, 미 해군 항모 '에이브러험 링컨'함상에서 부시 대통령은 '전쟁종료'를 선언합니다.

 

이미 1991년 걸프전에서 큰 타격을 입은 이라크군은 미군의 공격에 무력하게 무너져 갔고, 전쟁 시작 3주일 만인 4월 9일, 미 제3 보병사단이 바그다드에 입성함으로써 이라크군의 조직적인 저항은 끝이 났습니다.

 

5월 1일, 미국으로 귀항하는 항모 ‘에이브러험 링컨’함에 착륙한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전쟁종료’를 선언했죠. 미-영 동맹군의 침공으로부터 43일만의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이라크에서는 전쟁이 벌어지고 있고, 미국이 전쟁의 명분으로 내걸었던 대량살상 무기는 이라크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후세인’ 정권과 ‘알카에다’와의 연관성도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한 마디로 미국이 침공 명분이 거짓이었다는 겁니다. ‘테러와의 전쟁’은 증오로 이어졌고, 증오는 또 다른 테러를 불렀습니다.

 

 

 

바그다드 시내의 자살테러 현장.

 

이미 전쟁에서 사망한 이라크 민간인들의 숫자는 15만 명을 넘어섰고, 미군의 피해도 사망자 4천명 돌파를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5년간의 전쟁비용도 엄청나게 증가해 3조 달러, 우리 돈으로 3천조 원에 달하고 있죠. ‘이라크 전쟁은 잘못된 결정’이었다는 미국인이 54%에 이르고 있다는 보도도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미국은 왜 전쟁을 시작했을까요? ‘석유를 노린 전쟁’, ‘미국의 군수산업을 떠받치기 위한 전쟁’이라는 것이 이라크 전을 바라보는 세계인들의 공감대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2003년 3월 31일, 유럽연합 사상 첫 군사작전 개시  

 

 

'콘코르디아' 작전은 비교적 소규모의 치안유지 임무였지만, EU 사상 최초의 독자적 군사작전이었다.


2003년 오늘, 유럽연합(EU)가 구 유고연방에서 독립한 마케도니아 평화유지 임무를 북대서양조약기구 (NATO)로부터 인수해 사상 첫 군사작전을 수행하게 됩니다.

 

작전명 ‘콘코디아’ (Concordia)로 이름 붙여진 마케도니아 평화유지 임무는 350명 병력이 참여하는 비교적 작은 규모였지만, 미국의 영향력에서 벗어난 유럽의 독자적 군사행동이라는데 큰 의미가 있었습니다. 이 작전에는 프랑스군을 주축으로 모두 27개 EU회원국에서 파견한 다국적군이 참가하였습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의 방위는 거의 전적으로 미국이 주도하는 북대서양조약기구(North Atlantic Treaty Organization, NATO)에 의해 전담되었고, 유럽 자체의 방위를 위한 논의는 금기시 되다시피 했습니다. 냉전이 끝나고 유럽 방위의 가장 커다란 위협요소였던 구 소련이 해체되자 유럽연합은 차츰 자신만의 독자적인 국제정치적 의제를 모색하고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군사적 역량을 확보하려는 노력을 시도합니다.

 

특히 1990년대 들어 불거진 구 유고연방 국가들의 내전에 유럽의 국가들이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되자, 유럽연합 내부에서는 회원국 간의 군사공조를 강화해야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게 됩니다.

  '메르켈' 독일 총리와 '자크 시라크' 전 프랑스 대통령의 사열을 받는 프랑스-독일 여단.

 

9.11 테러 이후 미국 부시행정부는 테러 및 핵확산에 대한 선제공격 교리에 입각한 국가안보전략 (NSS)를 새롭게 채택하고, UN 상임위에서의 결의안 통과 절차를 생략한 채 2003년  이라크에 대한 전면 공격을 개시합니다.

 

이에 대한 찬반 여부를 둘러싸고 유럽사회는 극심한 분열 상황을 겪게 되죠. 영국을 중심으로 미국과의 동맹관계를 중시하는 ‘대서양주의’ 국가들과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주의’ 국가들 간의 갈등이었습니다.

 

유럽연합 회원국들 사이의 갈등이 증폭되자 위기를 극복하고 분열을 치유하기 위한 노력이 EU 지도자들을 중심으로 시도됩니다. ‘토니 블레어’ 영국 수상을 중심으로 이라크 전쟁에 참전한 국가들의 정치지도자들은 대내외적인 비판여론에 떠밀려 이전보다 훨씬 전향적인 태도를 보였고, 프랑스와 독일을 비롯한 반전 국가들 또한 ‘유럽주의’적 입장표명을 자제한 채 공조를 회복하기 위한 노력을 경주합니다.

 

그 결과 역설적으로 ‘유럽안보방위정책’은 탄력을 받게 되어 ‘콘코디아’ 작전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20여 곳에 달하는 분쟁지역에서 폭넓은 군사임무를 수행해 오고 있습니다.

 

 

 

 

2003년 4월 11일 - KD-2급 한국형 구축함 ‘문무대왕’함 진수 

 

 
2003년 오늘, 울산 현대중공업 부두에서 2단계(KD-II) 한국형 구축함사업의 두 번째 함인 ‘문무대왕’함(DDH-976)이 진수됩니다. 4,500톤급 구축함인 문무대왕함 진수식에는 노무현 대통령과 조영길 국방부장관·문정일 해군참모총장·현대중공업(주) 관계자 등이 참석했습니다.

 

진수식에서 문정일 해군참모총장은 “KDX-II 2번함의 함명을 문무대왕함으로 명명한다”고 선포했으며, 전통적인 해군 의식에 따라 대통령 부인 권양숙 여사가 손도끼로 진수를 위한 테이프를 절단했죠.

 

문무대왕함은 가스 터빈·디젤 엔진 각 2대로 최고 시속 29노트를 낼 수 있으며, SM-II·RAM 등 대공 미사일·하푼 대함 미사일·5인치 주포·30㎜ 기관포·어뢰 8기를 장비하고 슈퍼링스헬기 2대도 탑재할 수 있습니다.


문무대왕은 신라 제30대(재위 661~681년) 왕으로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국토를 통일한 업적을 남겼으며, 해군은 “죽어서도 바다로부터 쳐들어오는 적을 물리치기 위해 동해에 묻히겠다”는 유언을 남긴 대왕의 호국의지를 계승하기 위해 함명을 정했다고 밝혔습니다.


해군은 1980년대부터 제해권 확보를 통한 국가이익 보장을 위해 원해작전 수행능력을 갖춘 대양해군 건설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한국형구축함사업과 차세대 잠수함사업 등 전력증강사업에 심혈을 기울여왔습니다.

 

이에 따라 한국형구축함사업은 1990년대 초부터 3단계로 나눠 추진해왔으며 그 첫단계(KD-Ⅰ)로 3000t급 구축함 광개토대왕함(1996년 10월27일 진수)과 을지문덕함, 양만춘함 등 3척을 잇달아 취역시켰죠.


이들 함정은 우리 해군이 보유하게 된 최초의 현대식 구축함이라는 의미가 있었고, 자함 방어용 단거리 함대공 미사일 시-스패로를 탑재하는 등 전투전대의 주력 전투함으로 자체 대공방어능력을 확보하고 있지만 본격 구축함으로서는 그 규모가 떨어지는 데다 대공·대잠전투용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해군은 1000해리 해역을 방어할 수 있는 본격적인 구축함이 절실했으며, 이러한 요구에 따라 4500t급 2단계 한국형구축함사업(KD-II)이 추진된 것입니다. KD-II급의 1번함인 `충무공이순신'함이 2002년 5월22일 대우조선 해양 옥포조선소에서 진수된데 이어 2번함 문무대왕함이 진수된 것이죠.


KD-II급 구축함들은 전투전대의 지휘통제함 역할을 수행할 능력을 지니고 있으며, 탑재수량과 사정거리를 증대한 중거리 함대공미사일 SM -Ⅱ과 RAM을 탑재함으로써 해군의 대공방어 개념을 구역방어 개념으로 전환했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KD-I급 구축함들이 적대적인 항공 위협으로부터 스스로의 방어만 가능했다면 KD-II급에서는 자함을 포함하여 일정구역에 대한 대공방어 능력을 보유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소말리아를 향해 항해하는 문무대왕함 (이미지=해군본부)

 

이후로도 해군은 KD-II급 구축함을 속속 건조하여 현재는 1번함인 충무공이순신함을 비롯해 문무대왕함, 대조영함, 왕건함, 강감찬함, 최영함 등 모두 6척을 운용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KD-I급과 KD-II급의 건조 경험과 운용 능력을 축척하여 마침내 2007년 5월 7,600톤급 이지스 구축함 ‘세종대왕’함을 진수함으로써 세계에서 다섯 번째로 이지스함 보유 국가가 됩니다.

 

이로써 2차대전 중 미군이 쓰던 구식 구축함을 공여 받아 ‘물새는 구축함’이라는 비아냥을 들으며 영해를 지키던 해군은 대양해군의 기틀을 마련하게 되죠. 현재 문무대왕함은 해적들이 들끓는 소말리아 인근 해상으로 파견되어 우리 국적 상선들의 안전 운항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2004년 6월 22일 오전 10시 20분경 (현지 시간) 이라크 바그다드에서 팔루자쪽으로 35Km 떨어진 도로변에서, 이라크 무장단체 조직원들에게 납치되었던 가나무역 직원 고 김선일씨의 참혹한 시신이 발견됩니다. 이라크 주둔 연합군 대변인 ‘마크 키미트 준장’은 “김씨의 시신이 바그다드 서쪽 35㎞ 지점의 도로변에 자동차에서 내던져진 것 같은 모습으로 발견됐다”고 밝혔습니다.

 

김씨의 시신에는 부비트랩까지 설치되어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죠. 23일 오전 우리 정부는 김씨의 살해 사실을 공식적으로 확인합니다. 고 김선일씨는 이라크 주둔 미군에 물자를 공급하는 군납업체 가나무역의 직원으로 5월 31일 오후 이라크 현지직원 1명과 함께 물건을 배달하기 위해 바드다드에서 200㎞가량 떨 어진 ‘캠프 리브지’(RIBGEE)를 떠난 후 소식이 두절되었습니다.

 

악명 높은 국제적 테러리스트 ‘아부 무사브 알 자르카위’가 이끄는 ‘알 타우히드 왈 지하드’(유일신과 성전) 조직원들에게 납치당한 것이었죠. 김씨의 납치 사실이 세상에 밝혀진 것은 6월 20일 무장단체가 한국군 파병철회를 요구하며 김씨를 위협하는 장면을 ‘알 자지라’ 방송이 보도한 후였습니다.

 

나중에 밝혀진 사실이었지만 가나무역의 김천호 사장이 납치 사실을 한국대사관에도 알리지 않고 변호사를 통해 납치 단체와 비밀리에 석방 교섭을 해왔기 때문이었죠.  


무장단체는 김씨 석방 조건으로 20일 새벽부터 ‘24시간’의 시한을 주며 "한국군이 떠나지 않으면 참수하겠다"고 했지만, 우리 정부는 곧바로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상임위원회를 통해 ‘파병원칙을 고수한다’고 발표했습니다.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정부는 미국과 일본은 물론 중동 각국 외교장관 등에게 협조를 요청했고, 반기문 당시 외무장관과 주카타르 대사는 알 자지라 방송에 출연해 김씨의 석방을 호소하기도 했지만 이런 노력이 결국 물거품이 되었습니다.
김씨의 시신이 발견되던 날, 알 자지라 TV는 무장단체가 보내 온 비디오테이프의 내용을 방송했는데, 이 화면에는 김선일씨가 복면을 한 5명의 무장 조직원 앞에서 두 눈이 가려진 채 무릎을 꿇고 울먹이는 장면이 담겨 있었죠.

 

가운데 서 있던 남자 한명이 “이것은 당신들이 자초한 일이다. 거짓말과 속임수는 집어 치워라. 당신의 군대는 이라크가 아닌 저주받은 미국을 위해 이곳에 왔다”는 내용의 성명을 낭독하고 오른팔을 흔들었습니다. 바로 전달 참수된 미국인 ‘니컬러스 버그’의 마지막 장면과 비슷했습니다.
고 김선일씨가 살해되고 난 뒤 한국에서는 이라크 추가 파병을 반대하는 시위가 잇따랐고, 석방 교섭 과정에서 한국 정부의 대응력에 문제점이 있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전반적인 외교력 부재라는 비난이 쏟아지는 등 전 국민의 공분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그리고 2006년 6월 7일 김선일씨와 미국인 니컬라스 버그 등 수 십 건의 외국인 납치 살해를 비롯해 최소 85명이 사망한 2003년 8월의 나자프 차량폭탄테러, 2004년 3월의 바그다드·카르빌라 동시 폭탄테러, 4월의 요르단 독가스 테러, 2005년 125명이 사망한 힐라시에서의 자살차량 돌진사건 등을 주도했던 알 자르카위 역시 미군의 폭격으로 사망합니다.

 

 

2004년 6월 22일 - 이라크 팔루자에서 김선일씨 피살

 

 2004년 6월 22일 오전 10시 20분경 (현지 시간) 이라크 바그다드에서 팔루자쪽으로 35Km 떨어진 도로변에서, 이라크 무장단체 조직원들에게 납치되었던 가나무역 직원 고 김선일씨의 참혹한 시신이 발견됩니다. 이라크 주둔 연합군 대변인 ‘마크 키미트 준장’은 “김씨의 시신이 바그다드 서쪽 35㎞ 지점의 도로변에 자동차에서 내던져진 것 같은 모습으로 발견됐다”고 밝혔습니다. 김씨의 시신에는 부비트랩까지 설치되어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죠. 23일 오전 우리 정부는 김씨의 살해 사실을 공식적으로 확인합니다.


고 김선일씨는 이라크 주둔 미군에 물자를 공급하는 군납업체 가나무역의 직원으로 5월 31일 오후 이라크 현지직원 1명과 함께 물건을 배달하기 위해 바드다드에서 200㎞가량 떨 어진 ‘캠프 리브지’(RIBGEE)를 떠난 후 소식이 두절되었습니다. 악명 높은 국제적 테러리스트 ‘아부 무사브 알 자르카위’가 이끄는 ‘알 타우히드 왈 지하드’(유일신과 성전) 조직원들에게 납치당한 것이었죠.


김씨의 납치 사실이 세상에 밝혀진 것은 6월 20일 무장단체가 한국군 파병철회를 요구하며 김씨를 위협하는 장면을 ‘알 자지라’ 방송이 보도한 후였습니다. 나중에 밝혀진 사실이었지만 가나무역의 김천호 사장이 납치 사실을 한국대사관에도 알리지 않고 변호사를 통해 납치 단체와 비밀리에 석방 교섭을 해왔기 때문이었죠.


무장단체는 김씨 석방 조건으로 20일 새벽부터 ‘24시간’의 시한을 주며 "한국군이 떠나지 않으면 참수하겠다"고 했지만, 우리 정부는 곧바로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상임위원회를 통해 ‘파병원칙을 고수한다’고 발표했습니다.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정부는 미국과 일본은 물론 중동 각국 외교장관 등에게 협조를 요청했고, 반기문 당시 외무장관과 주카타르 대사는 알 자지라 방송에 출연해 김씨의 석방을 호소하기도 했지만 이런 노력이 결국 물거품이 되었습니다.


김씨의 시신이 발견되던 날, 알 자지라 TV는 무장단체가 보내 온 비디오테이프의 내용을 방송했는데, 이 화면에는 김선일씨가 복면을 한 5명의 무장 조직원 앞에서 두 눈이 가려진 채 무릎을 꿇고 울먹이는 장면이 담겨 있었죠. 가운데 서 있던 남자 한명이 “이것은 당신들이 자초한 일이다. 거짓말과 속임수는 집어 치워라. 당신의 군대는 이라크가 아닌 저주받은 미국을 위해 이곳에 왔다”는 내용의 성명을 낭독하고 오른팔을 흔들었습니다. 바로 전달 참수된 미국인 ‘니컬러스 버그’의 마지막 장면과 비슷했습니다.


고 김선일씨가 살해되고 난 뒤 한국에서는 이라크 추가 파병을 반대하는 시위가 잇따랐고, 석방 교섭 과정에서 한국 정부의 대응력에 문제점이 있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전반적인 외교력 부재라는 비난이 쏟아지는 등 전 국민의 공분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그리고 2006년 6월 7일 김선일씨와 미국인 니컬라스 버그 등 수 십 건의 외국인 납치 살해를 비롯해 최소 85명이 사망한 2003년 8월의 나자프 차량폭탄테러, 2004년 3월의 바그다드·카르빌라 동시 폭탄테러, 4월의 요르단 독가스 테러, 2005년 125명이 사망한 힐라시에서의 자살차량 돌진사건 등을 주도했던 알 자르카위 역시 미군의 폭격으로 사망합니다.

 

 

2005년 6월 19일 - 육군 최전방 GP에서 총기난사사건 발생 

 

 

2005년 6월 19일 새벽 2시 36분, 수류탄 폭발음에 이어 40여발의 요란한 총성이 경기도 연천군 중면 중산리 비무장지대 내 최전방 530 소초 (GP, Guard Post)를 뒤흔들었습니다.

 

육군 28사단 81연대 수색중대 1소대 김동민 일병이 내무반에 잠들어 있던 동료들을 향해 수류탄을 던지고 소총을 난사해 8명의 장병이 숨지고 4명이 중상을 입는 대참극이 벌어진 것입니다.


앞서 이날 자정부터 김 일병을 포함한 4명의 병사는 단층 콘크리트 건물인 GP 건물 옥상에 설치된 초소 2개에서 2명씩 경계근무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들 병사들은 오전 2시 45분까지 경계근무를 선 뒤 다음 근무자들과 교대할 예정이었죠.

 

2시 15분, 김 일병이 함께 근무를 서던 이 모 상병에게 “교대 근무자를 깨우겠다”며 자신의 K2 소총을 초소에 두고 내무반으로 내려갑니다. 당시 내무반에는 25명의 병사들이 깊은 잠에 빠져 있었습니다.

 

내무반에 들어선 김 일병은 관물대에 있던 다른 병사의 K1 소총을 집어 들고 나와 화장실로 갑니다. 그 곳에서 김 일병은 자신이 가지고 있던 수류탄의 제1 안전핀을 뽑고, 훔친 K1 소총에 자신의 탄창을 장전하여 내무반으로 돌아가죠. 내무반에 들어선 김 일병은 수류탄의 제2 안전핀을 뽑은 후 침상에 던진 후 내무반을 빠져 나옵니다.


수류탄이 폭발한 후, 복도 끝에 있는 상황실로 향하던 김 일병은 체력단련실에서 폭음을 듣고 놀라 뛰어 나오던 소초장 김종명 중위(26)를 향해 소총을 발사, 살해합니다.

 

당시 체력단련실에는 보름 뒤 전역하는 소초장 김 중위에게 업무를 인계 받기 위해 근무 중이던 후임 소초장 이모 중위와 몇 명의 병사들이 있었고 김 일병이 방아쇠를 당겼지만, 이 중위가 재빠르게 문을 닫아 위기를 모면합니다. 이어 취사장에서 나오던 조정웅 상병이 김 일병의 총탄에 목숨을 잃습니다.

 

 

수류탄이 폭발한 내무반 안은 아수라장이었죠. 파편을 맞은 부상자들은 피를 흘리며 신음하고 있었고, 몇몇 병사들은 부상자들에 대한 응급처치를 하는 한편 사태 파악을 위해 정신이 없었습니다. 수류탄이 터지고 2분 후, 김 일병이 내무반의 문을 열고 소총을 난사하기 시작합니다.

 

문 바로 앞에 있던 차유철 상병이 머리와 가슴 등에 3발의 총상을 입고 쓰러졌고, 내무반 복도로 내려서던 이태련 상병의 몸에도 세 발의 총탄이 관통합니다. 이건욱, 전영철, 김인창, 박의원 상병 등도 총상을 입고 쓰러지죠.


김 일병은 계단으로 연결된 옥상 초소로 돌아와 자신의 초소 전방에서 경계근무 중이던 2명의 근무자들을 향해 사격을 시도했지만 탄창에 장전됐던 25발의 실탄이 이미 다 소진된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김 일병이 자신들에게 사격을 시도한 사실을 알아채지 못한 전방 초소 선임병이 “적이 침투한 것 같으니 장전하고 전방을 겨누라”고 지시를 했고, 김 일병은 지시대로 자신의 초소로 돌아가 태연히 근무를 섭니다.

 

사고 발생 10여 분 후 후임 소초장인 이 중위가 전 부대원들을 GP 건물 옥상에 집결시킵니다. 이 중위는 어둠 속에서 자신에게 총격을 가했던 범인이 군복을 입고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군복차림이던 김 일병 등 다섯 명의 병사들을 GP내 관측장교 방에 감금합니다.

 

이곳에서 다른 선임병들에게 사건 전후 총기가 바뀐 경위를 추궁당한 김 일병은 결국 자신의 범행을 시인합니다. 현장에서 포박된 김 일병의 주머니에서는 수류탄의 안전핀과 한 발의 실탄이 발견 됩니다.


군 수사기관의 조사결과 김 일병의 범행 동기는 ‘내성적인 김 일병이 평소 선임병의 욕설과 질책을 견디지 못하고 적대감을 가지고 있던 중에, 근무교대자를 깨우기 위해 내무반에 들어선 그가 자고 있던 선임병 얼굴을 보는 순간 충동적으로 범행한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보통ㆍ고등 군사법원에서 사형이 선고된 김 일병은 현재 경기도 용인시의 군사법원 구치소에 수감 중입니다.

 

사방이 지뢰밭으로 둘러싸인 고립된 GP에서, 3개월을 교대로 근무하는 20대 초반의 앳된 병사들이 겪는 스트레스는 엄청났을 겁니다. 이 끔찍한 사건은 스트레스에 상처 받거나 집단에 적응하지 못하는 소외된 개인의 분노가 때로는 엄청난 재앙을 가져올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었습니다.

 

 

 

 

 

 

 

2007년 1월 9일 - 일본, 방위청을 방위성으로 승격

 

 

2007년 오늘, 일본 ‘방위청’(防衛廳)이 ‘방위성’(防衛省, Ministry of Defence)으로 승격됩니다. 1954년 방위청 발족 이후 52년 만의 일이었습니다. 정식 각료인 초대  방위상(防衛相)에는 ‘규마 후미오’ 방위청 장관이 임명됩니다.

 

‘아베 신조’ 총리대신은 방위성의 출범에 대해 “일본이 전후체제에서 탈피해 21세기 새로운 국가를 만드는 첫걸음”이라고 평가합니다. 이로써 일본의 보수 우익 세력이 줄기차게 부르짖어왔던 숙원 중의 하나가 이루어진 것이죠.

일본 전체 공무원 급여의 40%를 사용하는 방위성의 위상은 내각의 외청(外廳)인 방위청으로 존속할 때에 비해 엄청나게 높아졌습니다. 재무성에 독자적인 예산을 요구할 수 있게 되었고, 총리를 거치지 않고도 방위상이 직접 중요 안건을 각료 회의에 제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또 ‘성 승격’ 법안과 함께 통과된 자위대법 개정안은 자위대의 해외활동과 미군의 군사작전에 대한 후방지원 등을 종전의 ‘부수적 임무’에서 ‘본연적 임무’로 격상시켰습니다. 이것은 전후 일본의 방위정책이었던 ‘전수방위’ (상대로부터 공격을 받았을 때만 방위력을 사용하고, 행사하는 방위력도 자위를 위한 최소한의 것에 한정한다)원칙에 대한 공식적 폐기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방위성의 위상 변화와 발맞추어 자위대의 편제도 개편됩니다. 육상자위대에는 ‘중앙즉응집단’(Central Readiness Force)이 신설되고, 예하에 700명 규모의 ‘중앙즉응연대’를 두어 상설 해외파견 대기부대로 운용합니다.

 

우리 군의 특전사와 유사한 ‘제 1 공정단’에 일본 국내에서의 테러와 비정규전에 대비하는 임무를 부여하고, 생화학무기 테러에 대비해서는 ‘대특수무기위생대’와 ‘중앙특수무기방호대’가 신설되죠. 중앙즉응집단은 한 마디로 해외파견을 염두에 둔 신속대응군의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자위대의 역할 확대는 일본의 군사적 역할 확대를 끊임없이 독려해온 미국의 세계전략과도 부합하고 있습니다. 군사적 부담을 함께 질 것을 요구하는 미국에게 그동안 걸림돌이 된 것이 바로 일본의 이른바 ‘평화헌법’이었죠.

 

일본 헌법 제 9조는 ‘전쟁의 포기, 전력보유 금지’를 천명하고 있고, 역시 ‘집단적 자위권’의 행사(동맹국이 공격을 받으면 자국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하는)를 부정하고 있습니다.

 

방위성 승격을 계기로 탄력 받은 일본의 보수 세력은 이참에 헌법개정을 통한 군사력 증강을 기도하고 있죠. 전범국가 일본이 전후의 평화 이미지를 벗고 경제력에 걸맞는 군사력을 보유한 보통국가로 나아가는 것을 바라보는 아시아인들의 가슴이 서늘한 것은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보고 놀라기’때문만은 아닐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