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美洲史

구름에 달가듯이 2014. 12. 14. 21:15

트라팔가 해전

 

 

1. 'Close Action !'

 

지난편에서는 영국 함대가 Nelson Touch라는 넬슨 제독의 전술에 입각하여 2열 종대라는 매우 특이한 대형으로 빌뇌브의 연합 함대에 돌격해 들어가는 모습까지를 보셨습니다.  지난 편에서 소상히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이 Nelson Touch에는 많은 위험 요소가 담겨져 있었지요.  과연 넬슨 제독의 계산대로 영국 함대는 그 위험 요소들을 다 극복하고 성공적으로 연합 함대에 뛰어들 수 있었을까요 ?  아니면 과거 수많은 해전에서 증명된 것과 같이, 횡대로 전개한 적의 함대에 함수(bow)를 들이대고 종대로 돌격하는 것은 치명적인 결과를 낳을 뿐이었을까요 ?





(위쪽이 당시의 일반적인 전술이고, 아래쪽 그림이 Nelson touch에서 노렸던 돌파 전술을 묘사한 것입니다.  출처는 BBC에서 만든 트라팔가 해전을 동영상 지도로 보여주는 http://www.bbc.co.uk/history/interactive/animations/trafalgar/index_embed.shtml  입니다.)



빌뇌브와 프랑스-스페인 연합함대 함장들은 영국군의 이 기괴한 진형을 보고 넬슨이 노리는 바를 곧 깨달았습니다.  그들도 바보가 아니었으니까요.  하지만 이런 비정형 전술은 들어본 바가 없었으므로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도 몰랐고, 또 안다고 하더라도 자신들의 미숙한 항해술로는 이제 와서 대형을 바꾸는 것도 어려웠습니다.  무엇보다, 아무리 봐도 이 순간만큼은 자신들이 유리한 상황이었습니다.  적어도 10분~20분 정도는 연합 함대쪽이 응사받을 걱정 전혀 없이 마음껏 포격을 퍼부을 수 있었으니까요.

이렇게 접근해오던 영국 함대에서는, 전투 개시전, 선실에서 이런저런 편지를 다 쓰고 나온 넬슨이 그 유명한 ‘England expects that every man will do his duty’를 올립니다.  원래 넬슨은 expect라는 강압적인 단어 대신 confide라는 온순한 단어를 썼습니다. 

 

그러나 expect라는 단어는 원래 단축 깃발로 암호서(codebook)에 정해진 것이 있어서 한 조합의 깃발로 곧장 단어를 나타낼 수 있었으나, confide는 해군에서 자주 쓰이는 말이 아니라서 단축 깃발 조합이 정의된 것이 없었습니다.  이렇게 자주 쓰는 단어로 정의되지 않은 단어는 일일이 영어 스펠링을 하나하나 올려야 했기 때문에, 당시 신호 장교였던 파스코 (John Pasco)가 expect로 바꾸자고 한 것이 받아들여졌습니다. 

 

 사실은 duty라는 단어도 암호서에 미리 정의가 되어 있지는 않아서, 결국 하나하나 d-u-t-y로 스펠링을 해야 했습니다.  빅토리 호에서 신호 쪽으로는 가장 뛰어났다는 파스코의 머리 속에서도 duty를 좀더 쉽게 표현하기 위한 대체 단어가 떠오르지 않았나 봅니다.




(당시 신호 장교라는 사람들은 저 깃발 신호의 코드집을 사실상 거의 머리속에 다 외우고 있어야 했습니다.)



저는 넬슨 제독의 이 메시지를 무척 좋아합니다.  뭔가 비장함에 젖어 '이 일전으로 대영제국의 안위가 어쩌고' 하지 않고, 또 '목숨을 바쳐 조국을 위해 저쩌고' 하지도 않고, 그저 조용히 '너희 각자가 맡은 바 임무만 다 하면 우리는 이긴다'는 자신감과 함께, '너희는 맡은 임무만 수행해라 결과에 대한 책임은 내가 진다' 라는 뜻도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정작 이 신호를 받은 함장들은 내심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고 합니다.  '자기 임무를 다 하라니 ?  아니 그러면 우리가 언제는 자신의 의무를 다 하지 않았다는 이야기인가 ?' 라는 식으로 살짝 모욕을 느꼈다고들 하지요.  일설에는 원래 넬슨은 'Nelson confides that every man will do his duty’ 를 말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만, 아무튼 이 잉글랜드 부분도 문제였습니다. 

 

원래 영국 함대의 2/3는 잉글랜드 출신이 아닌 아일랜드나 스코틀랜드, 독일, 스웨덴, 기타 외국인들로 되어 있었고, 그 중에는 심지어 프랑스인들과 스페인인들까지도 있었거든요.  역시 저런 메시지는 저런 것을 전문으로 하는 문학가가 만들어야 하는 건데 말입니다.  물론 넬슨을 신처럼 떠받들고 있는 수병들은 장교들을 통해 전달받은 그 깃발 신호에 대해 우렁찬 환호로 대응했습니다. 




(넬슨 동상의 바닥에도 새겨진 저 문구는 두고두고 아일랜드 및 스코틀랜드, 웨일즈 사람들의 마음을 상하게 만들었습니다.)



파스코가 넬슨의 금과옥조같은 문장에 감히 손을 대어 수정한 것은 괜히 깃발을 더 오르락내리락하기 귀찮아 했기 때문은 아니었습니다.  파스코가 더 신속한 신호가 가능하도록 문장을 수정한 것은 넬슨이 파스코에게 이 메시지를 전달하면서, '빨리 하게, 전달할 메시지가 하나 더 있으니까 말일세' 라고 재촉을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실 중요했던 것은 바로 그 다음 신호였지요. 

 

 그 내용은 'Engage the enemy more closely', 즉 '지근거리에서 적과 교전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함포의 사정거리와 정확도를 생각하면, 또 위험천만하게도 포열이 즐비하게 늘어선 적의 측면을 향해 취약한 함수(bow)를 노출한 채 접근 중인 영국 함대의 위치를 생각하면 가장 절실한 부분이 바로 '신속한 접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부분에서 넬슨은 어려움을 겪습니다.




(1822년에 영국의 대가 Turner가 그린 트라팔가 해전 그림에서, 한창 전투 중인 빅토리 호가 휘날리고 있는 신호는 England expects...의 끝 3글자인 U-T-Y를 뜻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실제로 저 순간에는 'Close Action'을 뜻하는 신호를 휘날리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유명한 깃발 신호를 내건 것이 11시 45분, 그리고 'close action'을 강조하는 다음 깃발 신호를 내건 것이 12시 15분 경이었습니다.   그 사이가 너무 길다고요 ?  사실 그 사이에 두번의 신호가 더 있었습니다.  하나는 '마스트가 버틸 수 있는 한 돛을 더 펼쳐라'는 것이었고, 나머지 하나는 감히 빅토리 호를 추월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던 바로 뒤의 전열함 테메레르 (HMS Temeraire) 호에게 '빅토리 호 뒤에 붙으라'는 신호였습니다. 

 

이때 다가오는 두 줄의 영국 함대는 서로 약 1.6km 정도 떨어진 상태였습니다.  즉, 서로가 서로를 돕기에는 너무 먼 거리였지요.  여기서 1차로 영국 함대의 병력은 분산된 셈이었는데, 한술 더떠서 영국 함대의 오른쪽 전열, 그러니까 콜링우드 (Cuthbert Collingwood) 제독의 전열에서, 콜링우드 제독이 탄 기함인 로열 소브린 (HMS Royal Sovereign) 호가 다른 배들보다 월등한 속도로 치고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이건 일반적인 전투의 통제 측면에 있어서는 절대 피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날 넬슨 제독의 지시에 따르면 '일단 무조건 빨리 적에게 접근하여 교전'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었으니, 잘된 것이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도 결과적으로 별로 좋지 않았던 것은, 다른 전함들이 로열 소브린 호보다 훨씬 느렸다는 점에 있었습니다. 





사실 이 로열 소브린 호는 평소에 그다지 빠른 배가 아니었습니다.  1786년에 건조 비용 67,458 파운드 (현재 가치로는 약 136억원, 금의 가치로 환산하면 현재 가치로 약 227억원) 를 들여 진수된 100문 짜리 1급 전열함이었던 로열 소브린 호의 별명은 '서부 짐마차' (West Country Wagon) 였습니다.  워낙 느리고 항행성도 좋지 않았기 때문이었지요.  그런데도 이 로열 소브린 호가 가장 빨랐던 이유는 이 배가 가장 최근에 홀수선 아래에 새로 구리판을 깔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선박들은 홀수선 아래 부분에 얇은 구리판을 입히는 것이 상식이었습니다.  (요즘 선박들도 홀수선 아래는 흔히 빨갛게 칠하는데, 이때의 전통이 남아있는 것이라고 합니다.)  흔히 알려져 있기로는 이렇게 구리판을 입히는 이유가 따깨비나 해초 같은 해양 생물이 바닥에 달라붙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하지만, 실은 그래도 이런 것들이 달라 붙었습니다. 

 

구리판을 입히는 진짜 이유는 이렇게 달라붙은 해양 생물들이 홀수선 아래의 목판을 침식하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결국 구리판을 입히건 말건, 주기적으로 배를 항구 내에서 기울인 뒤, 달라붙은 해양 생물들을 떼어내는 보수작업을 해줘야 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배의 속도는 점점 느려지기 마련이었습니다.  바람이라도 잘 불어주면 이렇게 뱃바닥에 달라붙은 따깨비나 해초가 전체 속도에 미치는 영향이 그렇게까지 크지 않았을텐데, 이날 바람마저 무척 약하여, 이 뱃바닥의 해양 생물이 전체 속도에 미치는 영향이 컸던 것입니다.  그런데, 영국 함대는 모두 오랜 봉쇄 활동에 동원되어 있었으므로, 다들 뱃바닥에 해초와 따깨비들이 빽빽히 붙어있었던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로열 소브린이 이날 치고 나온 것은 이 배가 특별히 빨라서가 아니라, 다른 영국 전함들이 끔찍하게 느렸기 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이 뜻하는 바는 영국 함대가 넬슨의 계산보다 훨씬 더 오래 더 많은 포격을 견뎌야 했다는 것이었지요.




(당시 배의 바닥 부분이 빨간 것은 붉은 페인트칠을 해서가 아니라, 구리판을 입혔기 때문입니다.  이 구리판은 18세기 중반에 영국 해군에서 처음 테스트해보고, 효과가 좋아서 상업용 선박에도 퍼져나가게 되었습니다.  당연히 비용이 많이 들었기 때문에 오직 탄탄한 무역 회사만이 이렇게 구리판을 입힌 배를 띄울 수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copper-bottomed' (구리로 바닥을 입힌) 이라는 단어는 벤처 기업 등이 안전하고 성공 가능성이 높다는 뜻을 가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Duckie님 댓글 덕분에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요즘 배들의 홀수선 아래가 빨간 것은 원래 산화 구리가 주성분인 해양 생물 증식 방지용 페인트를 칠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마침내 12시 10분 경, 연합 함대에서 최초의 포격이 시작됩니다.  넬슨의 ‘England expects that every man will do his duty’ 신호가 게양된지 얼마되지 않아서였지요.  최초의 포격은 프랑스 전함인 푸구외(Fougueux, '불같은'이라는 뜻)가 가장 선두였던 로열 소브린 호에게 쏜 것이었습니다만, 최초 포격은 당연히 전혀 명중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 수록 포격을 가해오는 연합 함대 전열함들의 숫자가 들어나면서, 점점 명중탄이 늘어났고, 사상자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열 소브린의 사상자 수는 의외로 많지 않았습니다.  이유는 2가지였습니다.  하나는 로열 소브린의 속도가 그래도 빠른 편이라 집중 포격을 받은 시간이 고작 10분 정도에 불과했다는 것이었고, 두번째는 넬슨의 예측대로, 프랑스와 스페인 수병들의 포격 솜씨가 수준 미달이었다는 점이었습니다. 



(저런 무기들이 쏘라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닦고 조이고 기름칠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예쁘게 색칠 해놓으라고 있는 것은 우리나라 군대 뿐이 아닙니다.  전쟁 중이었음에도, 당시 프랑스-스페인 해군은 물론, 심지어 영국 해군 중에도 대포를 닦아만 봤지 실제로는 단 1발도 쏘아보지 못한 포병들이 의외로 많았다고 합니다.)



무거운 24파운드 또는 32파운드 포를 10여명의 수병이 굴리고 장전하는 것은 무척 힘들고, 또 까딱 잘못하면 부상자가 속출하게 되는 위험한 작업이었습니다.  늘상 바다에서 초계 활동을 벌였던 영국 해군도 이런 거포들을 자주 쏴볼 기회가 많지는 않았습니다.  

 

훈련용으로 소모되는 탄약 비용이 부담스러웠기 때문이었지요.  원래 영국 해군성의 규정에 따르면, 군함이 출항을 한 이후 첫 6개월 동안은 전체 포의 1/3에 해당하는 개수의 포탄만을 연습용으로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는 다시 그 절반인 전체 포의 1/6에 해당하는 포탄만을 사용하도록 규정되어 있었습니다.

 

계산해보면, 74문의 대포를 장착한 전열함이 2년간 바다에 나가 봉쇄 활동을 하면서 규정대로만 사격 훈련을 했다고 하면, 그 긴 2년 동안 불과 61발의 포탄만 쏘아볼 수 있었다는 뜻이 됩니다.  바다의 왕자라는 영국 해군조차도 이 모양이었는데, 긴 세월을 항구에서만 보낸 프랑스-스페인 연합 함대의 수병들 중 대다수는 대포라는 물건을 평생 처음 쏴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을 겁니다. 

 

이런 사람들이 조준이라는 것을 제대로 할 수 있을 리가 없었습니다.  이런 결과는 로열 소브린이 연합 함대의 포화를 뒤집어 쓰며 전진하는 동안 고스란히 드러났습니다.

영국 함대가 직각으로 접근하는 와중에 피해가 생각보다 적었던 이유 중에 대해 흔히 나오는 설명 중 하나로, 영국 해군은 포격을 조준할 때 적함의 함체를 쏘도록 훈련받았고, 프랑스-스페인 해군은 적함의 돛과 삭구를 쏘도록 훈련받았기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건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건 근접 거리에서의 이야기일 뿐, 로열 소브린 호처럼 아직 수백 미터 떨어진 표적에 대해서는 골라 쏘는 것은 고사하고 돛이든 닻이든 맞추기만 하면 다행이었습니다.   따지고보면 당시 범선들은 수면 위에 보이는 대부분의 면적이 돛이었으므로 프랑스군이건 영국군이건 원거리에서 쏠 경우, 운이 좋아 명중한다고 해도 대개는 돛에 맞는 것이 대부분이었고, 그럴 경우 뭔가 기분나쁜 소리와 함께 마치 마법처럼 하얀 돛에 갑자기 구멍이 뻥 뚫리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돛대라는 물건은 한개의 길고 굵은 통나무로 만든 물건이 아니라, 조립품입니다.)



(저렇게 돛대에 수도 없이 묶여있는 밧줄들은 단순히 선원들이 기어오를 수 있도록 매어 놓은 것이 아닙니다.  돛대라는 물건은 배의 용골에 못을 박아 고정한 물건이 아니라, 저 밧줄들에 의해 지탱되는 물건입니다.  따라서 대개의 경우 전투 중 돛대가 쓰러지는 것은 대포알에 돛대가 부러지는 경우보다는, 저 밧줄들이 끊겼기 때문인 경우가 많았습니다.)



왜 프랑스군이나 스페인군은 맞아도 별로 표시도 안나는 적의 돛을 향해 대포를 쏘았을까요 ?  그건 교리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영국 해군은 적 수병의 살상을 포격의 목표로 삼았습니다.  적의 함선을 탈취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적병을 많이 죽여야 했으므로, 당연히 적함의 몸통에 대고 대포를 쏘아야 했습니다.  그에 비해서 프랑스-스페인 해군은 일단 적함을 멈춰 세우는 것을 제1의 목표로 삼았습니다. 

 

당시 전열함들은 돛의 힘으로 움직이는 범선이었는데, 이 돛이라는 물건은 돛대나 활대 뿐만 아니라, 그것들을 지탱하는 밧줄들만 끊어놓아도 쉽게 쓰러지는 취약한 목표물이었거든요.  특히 구형탄(roundshot)이 아닌 연결탄(barshot, 두개의 반구 사이를 긴 쇠막대로 연결한 긴 포탄)이나 사슬탄(chainshot, 두개의 roundshot을 쇠사슬로 연결한 포탄)을 쏘면 돛대는 몰라도 각종 삭구들을 끊어버리는데 아주 효과적이었습니다. 

 

어쨌거나, 당시 범선은 복잡하고도 수많은 밧줄에 의해 지탱되는 연약한 물건이었으니까요.  이렇게 적의 돛이나 돛대를 제거하고나면, 적함은 전진은 커녕 좌우 선회도 못하는 앉은뱅이 신세가 될 수 밖에 없었고, 일단 그렇게 되면 적의 함수(bow)나 함미(stern)으로 다가가 종사(raking)를 퍼부을 수 있었습니다.  대개는 이런 상황이 되면 적함은 항복할 수 밖에 없었지요.





(Bar shot과 chain shot의 모습입니다.  이런 포탄이 운 좋게 적함의 갑판 1m 상공을 지나간다면 갑판 위의 수십명을 다 날려버릴 수도 있었겠지요.  하지만 그런 것을 기대할 수는 없고, 대개는 적의 돛대와 활대를 고정한 밧줄을 끊기 위해 사용되었습니다.  전함의 돛대는 워낙 튼튼하여 이 정도로는 별 타격을 입지 않았고, 구형탄에 직격되어도 1발 정도는 버틸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그건 이론에 불과했습니다.  태권도가 더 세냐 복싱이 더 세냐처럼 쓸데없는 논쟁이 없는 것처럼, 적함체를 쏘는 것이 더 효과적이냐 적돛대를 쏘는 것이 더 효과적이냐도 의미없는 비교입니다.  정답은 어느 쪽이든 더 빨리 더 정확하게 쏘는 쪽이 유리하다는 것이니까요.   그리고 바로 그 점에서 프랑스-스페인 연합함대는 낙제점을 받았습니다. 

 

연합 함대의 일방적인 포격을 10여분간 뒤집어 쓴 덕택에 사상자가 꽤 났고 각종 돛이 너덜너덜해진데다 맨 윗돛대 (topmast) 하나가 꺾여 볼품없이 대롱거리긴 했지만, 결국 로열 소브린 호는 연합 함대의 전열 속에 성공적으로 뛰어들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로열 소브린 호가 영국 전함들 중 최초로 적의 전열에 뛰어드는 순간, 콜링우드는 로열 소브린 호의 함장 로더람 (Edward Rotheram)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지금 이 자리에 서기 위해서라면 넬슨이 뭘 바칠까 ?"  (What would Nelson give to be here?)

콜링우드의 이 말과 동시에, 이제 거대한 스페인 전함 산타아나 (Santa Ana) 호와 프랑스 전함 푸구외(Fougueux) 호 사이에서 제대로 종사(raking) 위치를 점령한 로열 소브린 호는 산타아나 호의 함미에 대고 지근거리에서의 강력한 종사를 제대로 먹였습니다. 

 

이 단 한차례의 일제 사격에 의해 산타아나 호는 결정적인 피해를 입습니다.  넬슨이 그토록 강조하던, '좀더 근접하여 교전하라'는 지시는 바로 이 때문이었지요.  당시 대포의 사정거리나 위력을 고려하면, 출렁이는 전함의 대포로 먼 거리의 목표물을 향해 포를 난사하는 것은 힘만 뺄 뿐 효과가 크지 않았고, 오로지 코앞까지 다가가서 일제 사격을 먹여줄 때만 포성에 어울리는 전과를 올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아마 이 순간 콜링우드 제독의 머리 속에는 '고생 끝 행복 시작'이라는 단어가 떠올랐을 것입니다.




(트라팔가에서 적 함대의 진열을 관통하는 최초의 영국 전함이라는 명예를 득템 중인 로열 소브린 호의 위엄)



하지만 착각이었습니다.  로열 소브린 호의 진짜 고난은 이제부터 시작이었습니다.  이렇게 종사 위치를 점유했다고 하더라도, 서로 움직이는 전함들 사이에서 그 위치라는 것은 순간적인 것일 뿐이었습니다.  당연히 로열 소브린 호는 곧 방향을 틀어, 일격을 얻어맞고 비틀거리는 산타아나 호의 측면에 자신의 측면을 갖다대고 본격적인 포격전을 준비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되자 산타아나나 로열 소브린이나 이제는 같은 처지에서 툭탁거리는 입장이 되버렸습니다.  또한 로열 소브린 호도 100문의 대포에 3층 갑판을 갖춘 제1급 함이었지만, 산타아나는 더욱 커서 112문의 대포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적 함대의 도주를 막는답시고 너무 혼자 속력을 내어 뛰쳐 나온 것은 확실히 잘못된 선택이었습니다.  로열 소브린을 뒤따르던 두번째 영국 전함이었던 74문짜리 3급함 벨아일 (HMS Belleisle) 호는 최소 10분 이상 뒤에나 도착했던 것입니다. 

 

아무리 용감한 주인공이라고 해도, 영화 속이 아닌 다음에야 사실 두 주먹으로 4개의 주먹을 당해내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프랑스-스페인 전함들이 우글거리는 한복판에 그야말로 홀홀단신으로 뛰어 들었으니, 적함들은 아주 잘 걸렸다는 듯이 무더기로 로열 소브린에게 달려들었습니다. 

 

이 때문에, 최소 10분 이상, 로열 소브린은 과장이 아니라 정말 1대5의 처절한 싸움을 벌였습니다.  즉 산타아나 뿐만 아니라, 2척의 프랑스 전함(Fougueux, Indomptable)과 2척의 스페인 전함 (San-Leandro, San-Justo)과도 동시에 교전해야 했습니다. 




(로열 소브린과 격투 중인 산타아나 (중앙)의 모습입니다.)



다행히 뒤따르던 영국 전함들이 뒤늦게 도착하면서, 산타아나를 제외한 다른 적함들은 천천히 로열 소브린을 버려두고 다른 영국 전함들을 상대했습니다만, 이 짧은 시간 동안 로열 소브린은 그야말로 만신창이가 되었습니다.  그래도 산타아나와 거의 2시간 동안 지근거리에서 맹렬하게 포격을 주고받은 끝에, 결국 오후 2시 15분 경 로열 소브린은 산타아나의 항복을 받아냅니다. 

 

역시 시작하면서 제대로 먹여주었던 종사 포격이 유효했던 것이지요.  하지만 로열 소브린도 돛대와 삭구에 심각한 손상을 입어 항해 능력을 상실해버리는 바람에, 전투 내내 더 이상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표류하는 신세가 되고 맙니다.  어찌 생각하면 로열 소브린이 산타아나의 항복을 받아낸 것은 정말 '의지의 차이'일 수도 있습니다. 

 

산타아나는 로열 소브린의 수병들의 갈퀴를 뱃전에 걸고 백병전을 벌이기도 전에 항복했는데, 그때 양측의 사상자 비율을 보면, 로열 소브린은 전체 승무원 826명 중 17%를, 산타아나는 1189명 중 20%를 잃은 상태였습니다.  즉, 양측의 사상자 비율은 비슷한 상태였고, 항복 당시 아직 활동 가능한 수병의 숫자는 산타아나가 오히려 더 많은 상태였습니다. 

두번째, 세번째 전함인 벨아일과 마르스 (HMS Mars) 호도 로열 소브린 못지 않게, 아니 오히려 더 험난한 혈투를 벌여야 했습니다.  이미 로열 소브린이 난장판을 만들어놓은 적진 속에 뛰어든 벨아일은 떼를 지어 로열 소브린을 '담그고' 있던 적함들 중 엥동터블(Indomptable, '불굴의' 라는 뜻)과 푸구외(Fougueux)를 자신 쪽으로 돌려세운 것까지는 좋았습니다. 

 

이들과 한차례 교전을 하다가 난투극 속에서 이들도 멀어져 버렸으나, 이어서 프랑스 전함들인 아쉴르 (Achille, 아킬레스) 및 에글(Aigle, 독수리)이 연달아 벨아일을 후려갈겼습니다.  게다가 스페인 전함 산-후안-네포무세노 (San-Juan-Nepomuceno) 호는 아예 우현 쪽에 자리를 잡고 벨아일과 열띤 포격전을 전개했습니다. 

 

결국 벨아일도 로열 소브린과 같은 17%의 사상자율을 기록했고, 3개의 돛대가 모조리 부러져 더 이상 아무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되어 버렸습니다.  이렇게 무방비 상태로 홀로 표류하던 벨아일은 자욱한 포연 속에서 주변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파악하지도 못하고 두려움에 떨어야 했는데, 이때 포연을 헤치고 자기 쪽으로 접근해오는 전함을 보고 무척 긴장해야 했습니다. 

 

이것이 만약 프랑스나 스페인 전함이었다면 꼼짝도 못하고 피떡이 되어 항복할 때까지 반복되는 종사를 당하는 수 밖에 없었거든요.  그런데 다행히도, 이 전함은 영국 해군의 스위프트슈어 (HMS Swiftsure) 호였습니다.  이 때 벨아일 호 승무원들의 안도와 기쁨은 정말 대단했을 것입니다. 




(포연을 뚫고 나타난 배가 아군의 스위프트슈어인 것을 보고, 이미 만신창이가 되어있던 벨아일이 환호하는  장면입니다.)



마르스 호도 험한 꼴을 봐야 했습니다.  역시 적의 함대를 향해 직각으로 들어오는 것이 좋은 선택이 아니었는지, 적 진형 중 알맞은 틈을 찾아 비집고 들어오는 동안 4차례나 종사를 당한 것입니다.  이어서 프랑스 전함 플루통(Pluton, 그리스 신화의 플루톤)과 1대1 포격전을 벌였는데, 이 과정에서 (대포알은 계급을 따지지 않다보니) 더프 함장 (George Duff)까지 전사해버렸고, 98명 (16%)의 적지 않은 사상자를 냈습니다. 

 

상대방인 플루통은 더 심하게 당해 192명 (전체 인원의 25%)이라는 상당한 사상자를 내면서도 항복하지 않고 결국 도주하는데 성공합니다.  마르스 호에게는 그야말로 상처만 있었고, 영광은 없었던 셈이었지요.

그 다음으로 연합 함대의 진영에 뛰어든 영국 전함들도 힘든 싸움을 벌여야 했습니다.  특히 벨레로폰 (HMS Bellerophon) 호와 콜라서스 (HMS Colossus) 호의 피해가 심했습니다.  이들은 각각 전체 승무원의 30%와 35%를 잃어야 했는데, 이 정도면 사실상 그 전함의 괴멸에 가까운 피해로서, 보통 이 정도의 피해를 입기 전에 항복하는 것이 상식이었습니다.  




(영국 화가 Thomas Whitcombe이 그린 1798년 아부키르 해전 그림입니다.  중앙에 한창 불타고 있는 배가 나폴레옹의 기함이었던 오리앙 호이고, 그 바로 오른쪽에 돛대가 모두 꺾인 채로 표류 중인 영국 전함이 바로 역전의 용사 벨레로폰입니다.  벨레로폰은 아부키르에서나 트라팔가에서나 정말 험한 꼴을 보아야 했었던 것이지요.  하지만 1815년 결국 나폴레옹의 항복을 받아낸 것도 바로 이 벨레로폰 호였습니다.)



 

벨레로폰 은 (비록 한꺼번에는 아니지만) 5척의 적함과 교전하며 적함들의 수병들로부터 옮겨타기 공격 (boarding)을 당하기도 하는 등, 적의 대포보다는 적의 머스켓 소총과 수류탄 등 적의 소화기 공격에 많은 피해를 입었습니다.  이 와중에 역시 쿡 함장 (John Cooke)이 전사했습니다.  벨레로폰은 1798년의 아부키르 해전에서도 만신창이가 되어 돛대를 잃고 표류하는 신세가 되었었지요. 

 

넬슨 제독의 빛나는 승전에는 다 참여하는 영광을 누렸으나, 그 티켓 가격이 만만치 않았던 셈입니다.  콜라서스 호는 너무 느려서 오후 1시 경에나 연합 함대의 진형에 도달할 수가 있었는데, 역시 3척의 적함을 상대하다가 206명의 사상자를 냈고, 그 함장인 모리스 (James Nicoll Morris)도 무릎 약간 위쪽에 적의 대포알을 맞고 다리 하나를 잃어야 했습니다. 

 

그나마 이런 선두함들이 워낙 맹렬히 싸워준 덕분에, 그 뒤에 들어온 영국 전함들은 상대적으로 피해가 적어서, 대부분 5% 정도의 사상률을 냈고, 특히 전열의 맨 끝 부분에 위치한데다 끔찍하게 느려서 콜링우드보다 무려 2시간 뒤에야 전투에 돌입할 수 있었던 98문짜리 전함 프린스 (HMS Prince) 호는 부상자 하나 내지 않는 별로 영광스럽지 않은 영예를 누렸습니다.




(역시 Thomas Whitcombe이 그린 트라팔가 해전입니다.  오른쪽에서 3번째, 즉 흰바탕에 십자표시의 영국 깃발을 날리는 배가 바로 벨레로폰입니다.  물론 이 그림에서는 안 보이지만, 바로 이 장면에서 벨레로폰의 함장 쿡이 전사하게 됩니다.)



자, 콜링우드 전대의 사정은 이쯤에서 접고, 이 전투의 주인공인 넬슨의 사정을 보시지요.  콜링우드는 깨끗한 선저 구리판 덕분에 느린 바람에도 날 듯이 달려가 불과 10여분의 포격만 뒤집어 쓰고도 적함대를 관통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넬슨은 그렇게 운이 좋지 못했습니다.  넬슨의 빅토리 (HMS Victory) 호는 무려 40분 넘게 연합 함대의 포격 연습 대상이 되어야 했습니다. 

 

당연히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습니다.  넬슨은 당연히 빅토리 호의 최후미이자 갑판 중 가장 높은 위치였던 선미루 갑판(poop deck)에 서 있었는데, 여기에 배치되어 있던 해병 8명과 함께 넬슨의 비서인 스콧 (Scott)까지도 전사해버릴 정도였습니다. 

 

또 한번은 대포알이 넬슨과 빅토리 호의 함장 하디 (Thomas Masterman Hardy) 사이를 통과하기도 했었지요.  넬슨은 이렇게 오랫동안 포화를 뒤집어 써야 했던 것은 뱃바닥의 따깨비와 해초 탓도 있었으나, 넬슨이 지그재그 항로를 택했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즉, 최단 거리인 직선 항로로 달려가지 않고, 적 함대 중앙을 향해 달리다가 좌로 방향을 틀어 적의 선두 부분으로 돌격하다가 다시 적 함대 중앙을 노리는 우왕좌왕 항로로 전진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더 오래 포화를 뒤집어 쓸 수 밖에 없었는데도 이를 굳이 강행한 것은 연합 함대의 선두부를 전투에서 제외시키려는 전략 때문이었습니다. 

 

 즉, 넬슨이 연합 함대의 선두 부분을 노릴지 중앙 부분을 노릴지 적으로 하여금 알 수 없게 만들기 위함이었습니다.  만약 처음부터 연합 함대의 기함이자 총사령관 빌뇌브를 태운 프랑스 전함 뷔생토르 (Bucentaure)가 있는 중앙부를 노린다는 것이 밝혀진다면, 연합 함대의 선두 부분이 그에 대응하여 유턴을 하던가 속도를 늦추어 실제 전투에 참여할 준비 시간을 줄 가능성도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연합 함대 선두부를 이끌었던 뒤마누아르 (Pierre Dumanoir le Pelley) 제독이 그전의 알제시라스 만 (Algeciras Bay) 전투에서 보여준, 그리고 나중에 트라팔가 해전에서 결국 보여준 소극적인 태도를 보면, 애초에 곧장 중앙부로 직진했어도 상관없었을 것 같습니다.




(1801년의 알게시라스 전투는 지브랄타와 맞닿아 있는 스페인 항구 알게시라스에서 2차례에 걸쳐 벌어진 전투로서, 첫전투에서는 영국 함대가 크게 불리했으나, 2차에서 다시 영국 함대가 승리를 거둔 전투입니다.)



이 외에도, 콜링우드가 이끈 전대와 넬슨이 이끈 전대는 그 전술에 있어서 미묘한 차이를 드러냈습니다.  가령 콜링우드는 자신의 뒤를 따르는 전함들이 최종 접근 단계에서는 부채살처럼 퍼져서 각자 상대하기 적절하다고 판단되는 적함을 찾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넬슨은 휘하 전함들이 엄격히 자신의 뒤를 졸졸 따라오도록 했습니다. 

 

가령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바로 뒤를 따르던 테메레르가 빅토리를 추월하려고 옆으로 치고 나오자 '빅토리의 함미 위치로 돌아가라'고 신호를 보내어 그를 제지했습니다.  결국 넬슨의 뒤를 따르는 전함들은 빅토리가 휘저어 놓은 위치를 그대로 관통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좀 더 수월하게 전투를 치룰 수 있었습니다. 

 

가령 넬슨의 전열에서 7번째 전함이었던 74문짜리 3급 전함 에이잭스 (HMS Ajax) 호는 빠른 스피드를 이용하여 6번째 전함이자 크고 낡고 느렸던 100문짜리 1급함 브리타니아 (HMS Britannia) 호를 추월하여 빅토리호보다 불과 10분 뒤에 그 난장판 속에 끼어들 수 있었는데, 그 지점의 적함들은 모두 이미 아군 전함과 맞붙어 열띤 싸움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에이잭스는 당장 어느 특정 적함을 상대할 필요가 없었고 그저 이미 벌어진 난장판 속을 유유히 떠다니며 그 난장판 속의 적함들에게 마음껏 포격을 퍼부어댈 뿐이었지요.  덕택에 에이잭스 이후에 전투 현장에 돌입한 넬슨 전대의 전함들은 모두 2~4% 정도의 낮은 사상율을 냈습니다. 




(붉은 색이 영국 함대, 파란 색이 프랑스-스페인 함대입니다.  위쪽이 넬슨의 전대이고, 아래쪽이 콜링우드의 전대인데, 콜링우드의 전대는 부채살처럼 퍼져나가며 각자 사냥감을 찾고 있는 것에 비해, 넬슨의 전대는 지그재그로 움직이는 빅토리의 꽁무니를 충실히 쫓아다니는 것을 보실 수 있습니다.)



넬슨의 전대(전상자 512명, 총원 대비 8%)가 콜링우드 전대(전상자 1126명, 총원 대비 12%)에 비해 전체적인 사상자 수가 더 적었던 이유는 또 있었습니다.  넬슨과 콜링우드 모두 의도하던 바는 아니었습니다만, 적 함대에 접근하면서 가장 먹음직스러운 목표물, 그러니까 적 함대의 기함 뷔생토르나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136문 짜리 4층 갑판을 갖춘 초대형 스페인 전함 산티니스타 트리니다드 (Nuestra Señora de la Santísima Trinidad) 호, 그리고 역시 거대 전함이었던 112문짜리 산타아나 (Santa Ana) 등을 각자 노리다보니, 넬슨과 콜링우드 모두 적 함대의 중앙부에 돌입해버린 것입니다. 

 

원래 계획에 따르면 넬슨은 전 함대 전체 길이의 1/3 지점, 콜링우드는 2/3 지점에 돌입하게 되어 있었으나, 결과적으로는 두 전대가 각각 돌입한 두 지점 사이에는 불과 5척의 전함만 존재했습니다.  그래서 콜링우드 전대가 벌여놓은 난장판 속에 넬슨 전대의 전함들이 끼어들어 도와주는 경우도 생겨버렸습니다.  넬슨의 빅토리는 콜링우드의 로열 소브린보다 거의 30분 늦게 전투에 돌입했으므로, 아무래도 상대적으로 넬슨의 뒤를 따르던 전함들은 일이 더 적었던 것이지요.  




(뷔생토르 호의 모습입니다.  뷔생토르 Bucentaure 라는 이름은 특별한 뜻이 있는 것이 아니라 고유명사인데, 베니스의 군함에도 이런 이름이 있기는 했습니다만, 그 이름의 어원은 다소 아리송하다고 합니다.  다른 영국 전함이나 프랑스 전함들은 주로 '굴하지 않는' '지치지 않는' 등의 형용사를 쓰거나 '벨레로폰' 또는 '오라이언' 등의 고대 신화 속 이름을 많이 썼습니다.  그러나 그런 고대 신화 속 이름들은 일반 수병들에게는 낯설고 발음하기도 어려웠지요.  가령 벨레로폰의 경우, 실제 수병들은 정식 이름보다는 'Billy Ruffian' (악당 빌리) 라는 비슷한 발음의 별명을 더 애용했다고 합니다. )



하지만 그건 넬슨 전대의 후미 쪽 전함들 사정이고, 넬슨이 탑승한 빅토리 호의 사정은 달랐습니다.  뭐니뭐니 해도 적의 집중 포화를 40분간 혼자서 뒤집어 쓰고 돌격해야 했고, 이제 곧 보시겠습니다만 프랑스 함대 내에서 가장 유능한 함장이 이끄는 적함을 상대해야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빅토리가 처음에 노리고 접근했던 적함은 어디에서 봐도 눈에 띌 수 밖에 없는 당시 세계 최대의 전함 산티니스타 트리니다드 호였습니다.  그러나 당시 전례에 따라, 포격 시작 직전 연합 함대가 각자 깃발을 올리자 어느 배가 연합 함대의 기함인 뷔생토르 호인지 드러났던 것입니다. 

 

사실 뷔생토르는 2갑판을 갖춘 80문짜리 3급 전함이었으므로 1급함인 빅토리 호가 노리기에는 다소 작은 상대이긴 했지만, 적의 지휘 통제 능력을 빼앗기 위해서는 당연히 적의 기함을 먼저 쳐야 했습니다.  마침내 오후 1시가 넘어서 빅토리는 뷔생토르의 뒤쪽, 그리고 르두터블(Redoutable, '무시무시한' 이라는 뜻)의 앞쪽 사이를 비집고 들어서는데 성공했습니다. 




(이것이 종사, 즉 raking fire입니다.  이런 사격은 아무래도 근거리에서 먹여야 제대로 먹습니다.)



이 순간, 빅토리의 3개의 포갑판에서 일제 포격 (broadside)이 뷔생토르의 함미에 퍼부어졌습니다.  전혀 빗나갈리 없는 지근거리에서의 제대로 된 종사였지요.  이와 함께, 앞갑판에 장착된 영국 해군만의 독특한 단거리 포였던 68파운드짜리 대형 캐로네이드 (carronade)의 포격이 뷔생토르의 노출된 갑판에 퍼부어졌습니다.   여기에는 구형탄(roundshot)과 함께, 머스켓 총탄 500발이 든 나무통이 함께 장전되어 있었습니다. 

 

적 수병들과 장교들이 밀집된 후갑판 (quarterdeck)에 이 포격이 이루어졌으니 그 피해는 끔찍했습니다.  무려 282명 (그중 197명 사망)이 죽거나 다쳤고 이때 뷔생토르의 함장인 마장디(Magendie)까지 전사해버렸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마장디와 함께 서있던 빌뇌브 제독이 부상조차 입지 않고 무사했다는 것은 거의 기적이라고 할 수 있었지요.




(빅토리 호의 68파운드 캐로네이드 포입니다.  일반 대포 (cannon)과 달리 케로네이드는 일종의 저압포로서, 구경은 크지만 장약을 조금만 장전하는 단거리 포였습니다. 때문에 바퀴도 달려 있지 않고, 윤활유를 칠한 나무판 위를 미끄러지면서 발사 반동을 처리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40분간 꼼짝 못하고 일방적인 포격을 당하다 이를 한순간에 되갚아준 기쁨도 잠시, 아직 뷔생토르의 함미를 통과하는 중이었던 빅토리 호의 바로 앞 부분에 포문을 즐비하게 열어놓고 반대로 빅토리 호에게 종사를 퍼붓기 직전인 프랑스 전함이 넬슨의 눈에 들어왔습니다. 

 

원래 넬슨의 예상으로는 연합 함대는 일렬 종대를 이루고 있어야 했으므로, 뷔생토르의 함미 쪽으로 돌파를 하고 나면 탁 트인 바다 외에는 아무 것도 없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연합 함대의 서투른 항행 능력이 오히려 넬슨의 발목을 붙잡은 셈이 되었습니다. 

 

 많은 연합 함대의 전함들이 깔끔한 일렬 종대를 이루지 못하고, 군데군데에서 2줄 혹은 3줄의 엉성한 진형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그 때문에, 이제 막 뷔생토르를 '담그고' 신이 나서 치고나오는 빅토리의 취약한 함수 쪽에는 80문짜리 프랑스 전함 넵튠(Neptune)이 버티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다음 순간, 수십개의 오렌지색 불꽃과 함께 짙은 회색 포연 속에 그 프랑스 전함의 모습이 사라졌고, 넬슨의 귀에는 그 포탄들이 날아들어와 빅토리를 산산조각 내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이것이 넬슨의 최후였을까요 ?  역시 Nelson Touch는 무리한 전술이었던 것이었을까요 ?




(당시 군함들은 주로 노란색과 검은색을 많이 썼는데, 포문의 안쪽은 주로 빨간색으로 칠해져 있었습니다.  아마 그 빨간색 사각형 수십개가 바로 코 앞에서 보인다면 위압감이 대단했을 것 같습니다.)

 

 

 

2. Cannon vs. Musket

 

지난 편에서는 연합 함대의 전열을 관통하면서 빌뇌브의 기함 뷔생토르의 함미에 통쾌한 종사(rake)를 퍼붓고 치고 나오는 넬슨의 빅토리 앞에, 생각치도 않게 프랑스 해군의 넵튠(Neptune)이 기다리고 있다가 역으로 빅토리에게 종사를 퍼붓는 장면까지를 보셨습니다.  넬슨의 운명은 여기까지였을까요 ?


먼저 넵튠이 왜 이 자리에 있었는지를 보시지요.  넵튠의 원래 위치는 기함 뷔생토르의 바로 후방이었습니다.  넵튠은 80문짜리 3급 전함으로서, 프랑스 전함 중에서는 가장 탄탄한 전력을 갖춘 배였기 때문에, 일단 전투가 개시되면 적의 공격이 집중될 것이 뻔했던 기함 뷔생토르의 후방을 지키는 임무를 맡고 있었습니다.  물론 산타아나나 산티시마 트리니다드 같은 거함들이 있긴 했습니다만, 프랑스 총사령관의 함미를 못미더운 동맹인 스페인놈들에게 맡길 수는 없었으니까요.  그러나, 넵튠의 뒤를 지켜야 했던 스페인의 74문 전함 산 후스토 (San Justo)가 전투 시작 전에 자기 위치를 지키지 못하고 바람에 떠밀려 항로를 자꾸 전방 우측으로 이탈하면서 넵튠의 항로까지 방해하며 밀어냈습니다.  이는 항행성이 떨어지는 선박이나 조함 능력(seamship)이 미숙한 선원들에게서 흔히 나타나는 일로서, 이를 두고 바람에 떠밀린다 (drift to leeward)라고 표현합니다. 




(범선은 항상 바람을 뒤에 안고 갈 수만은 없고, 옆에서 불어오는 바람도 타고 앞으로 전진할 수 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와중에 바람 반대 방향으로 자꾸 밀려 가는 것은 범선으로서 최악의 성질이었습니다.  특히 바람이 해안이나 암초를 향해서 불어가는데 배가 자꾸 drift to leeward 한다면 선장으로서는 정말 등골이 오싹한 순간이 되겠지요.)



넵튠의 함장인 메스트랄(Esprit-Tranquille Maistral)은 산 후스토에게 제자리를 지키라고 신호했지만, 산 후스토의 함장 가르스통(Francisco Javier Garston)도 미치고 환장할 상황에 놓여있었습니다.  항해를 거의 해보지 못한 해군인 자신의 부하 수병들이 너무나 미숙했던 것입니다. 

 

아마 영국 해군 같았으면 함대 내의 다른 전함들에게 부끄러워서 접시물에 코를 박고 죽고 싶었을 상황이었지요.  하지만 뭐 괜찮았습니다.  연합 함대는 전체가 다 미숙했기 때문에, 그렇게까지 창피하지도 않았습니다.  아무튼 이런 소동 속에서 넵튠과 산 후스토, 거기에다 산 후스토를 뒤따르던 64문 짜리 스페인 전함 산 레안드로(San Leandro)까지 함께 바람에 떠밀려 원래 위치보다 약간 전방, 그리고 바람 반대 방향 쪽으로 떠밀려 전열을 이탈했습니다.

일이 이렇게 되자, 기함 뷔생토르의 후미가 텅 비게 되었습니다.  이는 함대 결전을 앞두고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요.  이 간격을 메꾸고자 원래 훨씬 후방에 위치해야 했던 르두터블(Redoubtable)이 서둘러 달려오게 되었습니다.  이 르두터블 호의 함장은 루카(Jean Jacques Etienne Lucas)로서, 아마도 전체 연합 함대 내에서 가장 유능한 함장이었던 것으로 평가되는 인물이었습니다.  나중에 보시겠습니다만, 결국 산 후스토 선원들의 미숙함이 나비 효과에 의해 결국 넬슨의 죽음을 불러왔다고도 할 수 있겠지요.




(빅토리가 빌뇌브 연합함대의 전열을 뚫고 나오는 순간의 각 전함들의 움직입니다.  붉은색의 영국 함대에도 넵튠이 있고, 파란색의 연합함대에도 넵튠이 있지요 ?  말도 마십시요.  저건 프랑스 넵튠인데, 스페인 함대에도 넵튠(Neptuno)이 또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때 영국 함대와 프랑스 함대 모두 각각 스위프트슈어(Swiftsure)가 있었습니다.  프랑스의 스위프트슈어는 아부키르 해전에 참전했던 바로 그 영국 해군의 스위프트슈어가 나중에 프랑스 해군에 나포된 것입니다.)


아무튼 이런 사정으로 인해 예상치 못하게 빅토리를 넵튠에게 종사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넬슨의 귀에는 분명히 우지끈 뚝딱 하고 빅토리가 부서져 내리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하지만 의외로, 빅토리의 피해는 비교적 적었습니다.   앞돛대(foremast)와 함수 사장(bowsprit) 및 사형범(spritsail, 스프릿슬) 활대에 큰 손상을 입었을 뿐, 정작 함체에는 명중탄이 거의 없었던 것입니다.  어떻게 된 일이었을까요 ?







(위의 그림이 함수사장 bowsprit 을 자세히 보여주는 그림이고, 아래 사진에서 함수사장에 걸린 가로 활대가 사형범 spritsail 입니다.  영국은 정말 해양 국가라서, 항해 용어가 언어 자체에 확고히 녹아있는 것에 비해, 우리 말에는 전혀 없는 용어들을 억지로 번역을 하자니 좀 부자연스러운 느낌이 드는 단어가 많습니다.  사형범이라니!!)



여기서 다시 함체를 쏘라고 훈련받은 영국 해군과, 돛대 및 삭구를 쏘라고 훈련받은 프랑스-스페인 해군의 차이가 나타납니다.  간단히 말해서 좀더 낮게 쏘느냐 높게 쏘느냐의 차이인데, 어느쪽이 더 옳은 교리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만, 그래도 종사 위치에서는 낮게 쏘는 것이 맞지 않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하긴 당시 넵튠의 장교들이나 수병들에게 대체 왜 그런 상황에서까지 돛대를 노렸느냐고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니, 왜 그렇게 허무하게 종사 기회를 날려먹었는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지요.

이때 넵튠의 삽질 포격에 대해서는 영국 해군과 프랑스-스페인 해군의 함포 격발 장치의 차이로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영국 해군에서는 1745년부터 함포의 격발 장치를 조금씩 부싯돌 방식, 그러니까 플린트락(flintlock) 방식으로 바꿔나가고 있었습니다.  기존에는 긴 막대끝에 천천히 타는 도화선 (slowmatch)를 붙여 놓은 화승막대 (linstock)을 직접 대포의 점화구에 갖다대는 방식을 썼었습니다.  트라팔가 해전 당시 프랑스-스페인 해군은 여전히 그 화승막대 방식을 쓰고 있었고, 영국 해군도 모두 플린트락 방식으로 교체해놓은 것은 아니었지요. 




(저 플린트락은 부착식입니다.  평소에는 대포의 점화구에서 떼어놓았다가, 전투 준비가 명령되면 비로소 부착되었습니다.)



플린트락 방식이 화승막대 방식보다 더 좋은 점이 있냐고요 ?  발사 속도나 신뢰성 면에서는 특별히 없었습니다.  화승막대, 즉 린스톡 방식은 대포의 점화구(touchhole)에 화약가루를 넣은 갈대 줄기를 꽂아놓고 있다가 (뇌관 역할을 한다고 보면 됩니다), 거기에 린스톡의 도화선으로 직접 불을 붙이면 점화구의 1차 폭발에서 발생한 화염이 대포 내부의 장약실로 번져나가 2차 폭발을 일으키는 방식이었습니다.  

 

그에 비해 부싯돌, 즉 플린트락 방식은 똑같은 점화구에 부싯돌 격발 장치를 덧댄 것에 불과했습니다.  먼저 부싯돌을 스프링의 힘으로 내리쳐 불꽃을 일으키고, 이 불꽃이 점화구의 뇌관 화약에 1차 폭발을, 그리고 그것이 다시 장약실에 2차 폭발을 일으키니까, 사실 똑같은 방식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도화선은 확실히 폭발을 일으키는 것에 비해 부싯돌은 항상 점화를 일으키지는 못했으니까, 신뢰성 부분에서 보면 린스톡 방식이 훨씬 좋았습니다.   통상 품질 좋은 부싯돌은 통상 30~50회 정도 격발이 가능했다고 하는군요.  그러니까 결정적인 순간에 격발을 했는데 부싯돌이 닳아서 포격을 못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고, 이때문에 플린트락이 갖춰진 함포 옆에도 언제든 플린트락을 떼어내고 전통적인 린스톡 방식으로 전환할 수 있도록 린스톡과 불붙은 화승을 준비해두었습니다.



 

(뭐하러 저렇게 거추장스럽고 비싼 플린트락을 쓰지요 ?  그냥 이렇게 화승막대 linstock을 쓰면 되는데 말이지요.)



하지만 영국 해군이 비싼 돈을 들여 대포 점화구에 플린트락을 설치한 것은 영란은행에 돈이 넘쳐나서가 결코 아니었습니다.  발사 속도나 신뢰성은 그렇다치고, 조준의 정확성에 있어서 플린트락이 엄청난 이점을 주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대포는 6~12명 정도가 한팀을 이루었는데, 각자 역할이 있었습니다만, 조준 및 격발은 대포 조장 (gun captain)이 직접 했습니다.  문제는 바로 발포 반동이었습니다. 

 

당시 대포는 아무런 스프링 장치가 없었으므로, 뉴튼의 작용 반작용 법칙에 의해 대포알이 적함에 날아가는 힘만큼, 대포도 뒤로 격렬하게 밀려나왔습니다.  물론 당시 전함에서 이런 대포들은 적정한 거리까지만 뒤로 밀려나도록 밧줄로 단단히 묶어놓기는 했습니다만, 이렇게 뒤로 밀려나오는 대포에 부딪히거나 발을 밟혀서 큰 부상을 입는 경우는 매우 흔했습니다. 

 

린스톡 방식의 가장 큰 문제는, 이 발포 반동 때문에 조준과 격발이 동시에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에 있었습니다.  사람의 신체 구조상, 눈으로 대포의 가늠자와 목표물을 조준한 상태에서 대포 반동이 미치지 않는 아주 먼 거리 뒤에 서서 긴 화승막대를 손에 들고 정확하게 도화선을 점화구에 닿게 할 수는 없습니다. 

 

눈으로 대포 가늠자와 목표물과 도화선의 끝부분과 점화구를 모두 동시에 볼 수도 없었고, 또 먼 안전거리 밖에 있는 점화구를 긴 화승막대로 닿게 하는 것도 꽤 힘든 일이었습니다.  따라서 대포 조장이 대포 뒤에서 조준을 하다가 손으로 신호를 보내면, 대포 옆에서 그 신호를 보고 있던 수병이 화승막대, 즉 린스톡을 점화구에 닿게 하는 방식을 썼습니다. 





(저렇게조준은 조준대로 해놓고 화승막대로 점화하는 것은조금 뒤에 다른 사람이 한다면 좌우로 요동치는 전함에서 제대로 명중탄을 내는것은 거의 불가능이라고 봐야 합니다.  그나저나 저 그림은 당시 수병들을 몹시 미화하고 있네요... 모두들 장교복을 입고 있어요 !)



이 방식은 지상전에서는 별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습니다.  대포는 움직이지 않으니까요.  그러나 바다에서는 이야기가 달랐습니다.  선박이 앞뒤로 요동치는 것을 pitch라고 하고, 좌우로 요동치는 것을 roll이라고 하는데, 당시 측면에 붙어있던 함포들은 이 roll, 즉 좌우 요동에 따라 조준한 것보다 위로 날아가기도 하고 밑으로 날아가기도 했습니다. 

 

당시 전함들이라고 해봐야 고작 2천~3천톤 급이었는데, 이런 배들은 대양에서는 끊임없는 좌우 요동(roll)에 시달렸습니다.  한마디로, 정확한 순간에 격발을 해야 좌우 요동에 따라 대포알이 하늘 위로 날아갈지 바다 물에 그냥 처박힐지가 결정되었는데, 린스톡 방식은 이 타이밍을 맞추기가 매우 어려웠습니다.  

 

이를 개선하기 위해 나온 것이 플린트락 방식이었습니다.  이 방식은 대포 조장이 안전거리 뒤에서 조준을 하다가 배의 좌우 요동이 딱 맞는 순간에 끈 (lanyard)를 잡아당기기만 하면 발포가 되었습니다.  조준과 격발이 비로소 일치화 될 수 있었던 것이지요. 




(Roll이란 저렇게 좌우로 흔들리는 것을 말합니다.  저럴 때 상부돛대의 망루 높은 곳에 올라가 있으면 정말 멀미작살이겠는데요 ?)



그 이유가 돛대를 노리라는 교리때문인지 플린트락이 없어서였는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넵튠의 회심의 종사 포격은 빅토리의 돛대들에 손상을 입힌 정도로 끝나버렸습니다.  넵튠은 빅토리로부터 보복 포격을 당할까 두려워 돛을 접고 후미로 빠져버렸습니다.  정말 도움이 안되는 배였지요.  이때 뷔생토르의 빌뇌브는 빅토리가 자신을 노리고 다가 오고 있으며, 곧 영국 수병들이 승선 백병전(boarding)을 해올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는 나폴레옹으로부터 하사받은 독수리 지휘봉을 손에 쥐고 이렇게 외쳤다고 합니다.   "적함이 옆에 닿으면 난 이걸 적함에 던져 넣을 것이다 !  너희들은 이걸 적함에서 되찾아와야 한다 !"  그러나 그건 빌뇌브의 오버였지요.  빅토리는 사실상 표류 상태에 들어간 뷔생토르를 내버려두고, 뷔생토르 앞 쪽의 거대 전함 산티시마 트리니다드를 노리고 좌회전을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나폴레옹의 독수리 깃봉입니다.  이건 제 105 전열 연대의 것입니다만, 나폴레옹은 육군말고 해군 함정에도 이런 것을 나눠준 모양입니다 ??  원래 해군에는 저런 전통이 없는데 말이지요.)



하지만 뷔생토르 뒤에는 프랑스 전함들 중 가장 뛰어난 함장인 루카를 태운 르두터블이 있었고, 르두터블은 맹렬한 속도로 빅토리를 노리고 다가왔습니다.  빅토리가 좌회전하는 동안, 르두터블은 빅토리의 우현에 다가와 붙었습니다.  빅토리는 우현으로 일제 사격을 날려 르두터블에게 크게 한방을 먹여주었고, 당연히 반격을 받을 것으로 예상했으나, 르두터블은 반격하지 않고 그대로 빅토리와 옆구리를 부딪히며 맞붙었습니다.  3층 포갑판을 갖춘 1급함인 빅토리는 르두터블 같은 2층 포갑판의 74문짜리 3급함과 툭탁거릴 생각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의도적으로 바디 체크를 구사하며 빅토리에게 도전하는 르두터블을 빅토리는 재빨리 털어내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쉽지가 않았습니다.




(왼쪽이 빅토리, 오른쪽이 르두터블입니다.  빅토리로서는 애초에 1대1로 붙기가 창피한 꼬맹이였지요.)



빅토리가 아무리 열심히 포격을 퍼부으며 들러붙은 르두터블을 떼어내려 해도, 희한하게도 르두터블은 포문조차 열지 않았습니다.  르두터블의 이상한 점은 그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돛대와 활대, 그리고 쉬라우드(shroud) 등의 삭구에 마치 거미줄에 거미들이 달라붙어 있듯 새카맣게 수병들이 달라 붙어 있었던 것입니다. 

 

넬슨, 그리고 빅토리의 함장인 하디 (Thomas Hardy)가 의아하게 르두터블의 돛대를 올려다보는 동안, 그 궁금증에 대한 해답이 그야말로 쏟아져 내렸습니다.  르두터블의 망루(fighting top)은 물론, 삭구와 활대에 매달려 있던 프랑스 수병들이 빅토리의 노출된 갑판에 머스켓 총탄을 우박처럼 퍼부어대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물론 르두터블의 갑판에서도 프랑스제 탄환이 빗발처럼 날아들었고, 덤으로 희미한 연기를 뿜는 수류탄들이 날아들어 폭발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건 빅토리의 후방 돛대 망루에서 내려다 본 전투 모습입니다.)



원래 1급함인 빅토리는 대포 수도 100문으로서 74문짜리 르두터블을 압도했으나, 더 중요한 것은 수병의 정원 숫자도 850명으로서, 정원이 550명 정도였던 르두터블이 상대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습니다.  당시 해전의 대부분은 시작은 포격전으로 시작해도, 해전의 로망인 권총과 커틀라스(cutlass, 해전용 군도)를 휘두르며 적함에 뛰어드는 육탄돌격 (boarding)으로 끝나는 것이 보통이었거든요. 

 

이런 육탄전에서는 뭐니뭐니해도 머리수자가 가장 중요했으므로, 3급함 한척이 1급함을 1대1로 상대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영국 전함들이 항상 그랬듯이, 빅토리호도 정원을 다 채우지 못한 채 출항했으므로 실제 탑승 수병은 821명이었던 것에 반해, 르두터블은 정원을 훨씬 초과하는 643명을 싣고 있었습니다. 

 

거의 100명 정도되는 초과 인원은 백병전 경험이 미숙한 선원들이 아니라, 100% 전투병인 머스켓 소총병들이었습니다.  기억하실런지 모르겠습니다만, 애초에 빌뇌브의 연합 함대가 출항한 목적은 2~3천명의 병력을 싣고 지중해의 나폴리로 향하는 것이었거든요.  그 지상군 병력들이 르두터블에도 나눠 타고 있었던 것이지요.




(이 양반이 루카 함장입니다.)



르두터블의 함장 루카는 유능한 현실주의자였습니다.  애초에 카디즈에서 하는 일 없이 갇혀 있을 때부터, 바다에 나가 영국 함대와 포격전을 벌일 경우, 대포 한방 제대로 쏘아본 적 없는 르두터블의 선원들은 앵글로 색슨들의 적수가 될 수 없다는 것을 현실로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상전에서도, 비록 머스켓 소총의 시대이긴 하지만 전투는 사격으로 시작하여 끝은 총검에 의해 결정되는 경우가 많았던 것처럼, 해전에서도 시작은 포격으로 하더라도 승부는 소총과 커틀라스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을 떠올렸습니다. 

 

그는 카디즈 항구에서부터, 쓸데없이 함포 훈련한답시고 차가운 빈 대포를 괜히 굴렸다 당겼다 하는 훈련은 때려치우고, 자신의 수병들에게 사격 훈련과 백병전 훈련을 열심히 시켰다고 합니다.  32파운드 짜리 캐논볼이든, 0.69인치짜리 머스켓 볼이든 사람을 죽이는 것은 마찬가지거든요.  그리고 이날 10월 21일, 현실주의자이자 혁신적인 사고 방식도 보유하고 있던 루카 함장의 눈에, 뷔생토르에게 종사를 퍼붓고나서 다음 타겟으로 산티시마 트리니다드를 노리고 좌회전하는 빅토리의 육중한 함체가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루카 함장은 자신이 해야 할 바를 정확히 깨닫습니다.






(해전이라고 꼭 대포로 싸우는 것은 아닙니다.  총과 칼로도 얼마든지 승리를 낚을 수 있습니다.)



그는 아예 상부 포갑판의 포문을 아예 닫아버리고, 원래 거기서 대포를 조작해야 하는 수병들을 모조리 갑판으로 불러모읍니다.  그들에게 머스켓 소총, 커틀라스, 파이크(해전용 창) 등을 주어 무장시킨 뒤, 특히 사격에 능한 병사들은 돛대 망루 (fightingtop)과 삭구, 활대에 올려보내 재주껏 몸을 고정시키게 합니다. 

 

이때문에, 빅토리의 옆구리에 르두터블이 와서 쿵하고 부딪혔을 때 르두터블의 삭구에는 마치 거미줄에 거미들이 잔뜩 붙어있는 것처럼 병사들이 빽빽히 붙어 있었던 것입니다.  이들은 20~30m의 근거리에 빅토리가 들어오자, 기다렸다는 듯이 맹렬한 총격을 퍼부어댔습니다.

이런 형태의 공격은 빅토리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바였습니다.  원래 큰 1급함과 작은 3급함의 전투에서는 1급함이 무조건 유리했습니다.  대포가 더 많다는 점 외에, 이렇게 머스켓 소총으로 소화기 총격전을 벌일 때도 1급함이 절대적으로 유리했습니다. 

 

일단 병력수가 더 많다는 점에서도 그랬지만, 특히 높이의 차이가 큰 역할을 했습니다.  즉, 1급함인 빅토리 호의 상갑판이 훨씬 높았으므로, 빅토리의 수병들은 두꺼운 뱃전과, 그리고 전투 준비의 일환으로서 뱃전 위에 묶어놓는 두꺼운 해먹뭉치(hammock net) 뒤에 몸을 숨긴 채로 3급함인 르두터블의 노출된 갑판을 내려다보며 사격할 수 있었습니다. 

 

마치 성벽 위의 수비군이 저 아래의 공격군을 내려다보며 쏠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였지요.  하지만 함포에서 병력을 모조리 철수시켜 상갑판과 돛대에 소화기로 무장한 병력을 올려보내니, 당장 총격전을 벌이는 병사의 수에 있어서는 르두터블이 빅토리를 압도했습니다. 

 

게다가 높이에서도, 3급함인 르두터블이 1급함인 빅토리를 제압하는 상황이었습니다.  르두터블의 수병들이 높은 망루와 돛대에서 내려다보며 쏘아댔기 때문에, 빅토리의 영국 수병들은 숨을 곳도 없이 완전 노출된 채로 사격을 뒤집어 써야 했던 것입니다.




(저렇게 뱃전에 묶어놓은 하얀 뭉치들은 수병들이 밤에 자는 해먹들입니다.  전투시에는 뱃전에 걸어 방탄벽 역할을 합니다.)



그렇다면 빅토리도 망루나 삭구에 머스켓 소총병들을 배치하면 되지 않냐고요 ?  여기에는 또 약간 이해가 가지 않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전투가 벌어지기 전에, 넬슨 제독은 기묘한 지침을 내려 함장들, 특히 각 전함에 소속된 해병 대위 (marine captain)들의 기분을 팍 상하게 했었습니다.  망루에 소총병을 배치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유는 머스켓 소총의 화약마개 (wad)가 돛에 화재를 일으킬 위험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잠깐, 전에 설명드린 바 있습니다만, 화약마개, 즉 왜드(wad)라는 것이 뭔지 보시지요.  당시 머스켓의 탄약은 짧고 두툼한 담배 모양의 기름먹인 종이포에 화약을 넣고, 그 끝에 둥근 납탄이 함께 종이에 싸여 있는 모양이었습니다.  병사들은 장탄할 때 종이로 된 탄약포(cartridge) 끝에 달린 납탄(musket ball)을 앞니로 물어 뜯어내고, 뇌관용으로 부싯돌 발화장치(priming pan)에 넣을 약간의 화약을 손가락으로 집어낸 나머지 화약을 총구에 부어 넣은 후, 빈 종이 탄약포 껍질을 총구에 구겨 넣고, 이어서 입에 든 납탄을 총구에 뱉어 넣고, 장전봉으로 납탄과 탄약포 껍질을 약실 깊숙히 밀어넣었습니다. 





이때 종이로 된 빈 탄약포 껍질은 왜 총구 속에 함께 밀어넣었을까요 ?  당시의 기술적 한계, 그리고 전장식 소총이라는 특성 때문에, 머스켓 탄환은 머스켓 소총 구경보다 꽤 작아야 했습니다.  그래야 사람의 힘으로 쉽고 빠르게 밀어넣을 수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이렇게 탄환 직경과 총강 구경이 차이가 나면 (이를 유극 windage 라고 합니다) 발포할 때 당연히 그 틈으로 화약의 폭발 가스의 상당 부분이 새어나가 버려 납탄에 충분한 파괴력이 실리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그 유극을 매꾸기 위해 화약마개, 즉 왜드(wad)로서 빈 종이 탄약포 껍질을 밀어넣었던 것입니다.  비록 이 껍질은 종이로 된 것이긴 하지만, 화약이 폭발할 때도 순간적으로 다 타버리지 않고 그 폭발 가스에 떠밀려 나오며 탄환을 힘차게 밀어주는 역할을 했습니다.  당시 대포에도 이런 화약마개를 당연히 썼습니다.  물론 대포 장약은 너무 커서 종이 탄약포에 싸여 있지 않았으므로, 지푸라기나 삼베찌꺼기 같은 섬유질을 뭉쳐서 만든 두껍고 둥근 마개를 썼습니다.




(대포는 앞뒤로 wad를 넣나 봅니다 ?)



그런데 방아쇠를 당기면 이 화약마개는 어디로 가나요 ?  이건 종이로 된 물건이므로 무게가 가벼워 멀리 날아가지 못하고 쏜 병사의 전방 3~4m 정도에 떨어졌습니다.  불이 붙은 상태였을까요 ?  예, 당연히 불이 붙은 상태인 경우가 많긴 했습니다.  이것으로 인해 화재가 발생할 수도 있었을까요 ?  예, 가능했습니다.  실제로 당시 늦가을 마른 풀밭에 전투가 벌어지면, 이 불붙은 화약마개로 인해 작은 들불이 일어나는 경우가 적지 않게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육군에서야 뭐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지요.  문제는 해군인데, 당시 해군은 화재를 가장 두려워했습니다.  배 전체가 나무로 되어 있었으니 당연한 일이겠지요.  전투 준비 중 가장 먼저 하는 일이 취사실 난로의 불씨를 꺼버리는 것일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돛대 위 망루에서 머스켓 소총을 쏠 경우, 그 붙붙은 화약 마개가 돛에 화재를 일으킬 가능성이 많았을까요 ?  글쎄요, 잘 모르겠습니다 !!!  당연히 저보다야 넬슨 제독께서 더 잘 아시겠지요 !!!  당시 시대 사람들이 쓰던 일종의 라이터같은 장치로, 틴더박스(tinderbox, 부시깃 상자)라는 물건이 있었습니다. 

 

이 속에는 부싯돌 및 그것과 부딪힐 강철, 그리고 부시깃이 들어있었는데, 그 부시깃으로는 지푸라기같은 것도 쓰였지만 얇은 아마포, 즉 리넨 조각이 들어있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돛도 (두껍긴 하지만) 아마포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니 넬슨 제독께서, 망루에서 머스켓 소총을 쏘면 돛에 불이 붙을 수도 있겠다라고 생각하신 것도 무리가 아닙니다.




(Tinderbox의 모습과 내용물입니다.  물론 신사들의 물건이지요.  가난뱅이들은 그냥 주머니에다...)



하지만 당시 해전에서 망루에 소총병을 올려두는 것은 매우 상식적인 일이었습니다.  일단 그 명칭 자체가 fightingtop이거든요.  여기에 올라 앉아 적함의 갑판을 내려다 보며 쏘면 매우 효과적이었습니다.  이 망루 바닥은 두꺼운 나무로 되어 있었으므로, 적함 갑판의 병사들이 이쪽을 올려다보며 소총을 쏘아도, 머스켓 소총탄이 이 두꺼운 목재를 뚫지는 못했으므로 장갑판 역할도 해주었습니다.  심지어 여기에 작은 선회포 (swivelgun)을 장치해두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이것이 하부 망루, 또는 fightingtop이라고 불리는 발판대입니다.)




(이렇게 전투시에는 망루 위에 올라가서 싸우는 것이 상식이었습니다.)



(이것이 swivel gun입니다.  보통 뱃전에 장착했지요.)



여기서 산탄(canister)을 적 갑판에 쏘아대면 효과 만점이었지요.  그렇다면 실제로 이렇게 망루에서 떨어지는 붙붙은 화약마개 때문에 돛에 불이 붙은 경우가 있었을까요 ?  전혀 없었다고는 말씀드릴 수 없는데, 최소한 잘 알려진 사례는 없습니다.  생각해보면 그럴 만도 한 것이, 보통 전투가 벌어질 때의 기본적인 돛 구성은 하부 돛 (main sail)은 걷어서 묶어놓고, 중간 돛 (top sail)만, 혹은 거기에 상부 돛 (topgallant sail)만 펼치는 것이었습니다. 




(저 분홍색 하부돛 (mainsail)은 걷어들인 상태로 전투에 돌입하는 것이 상식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전투 중 망루 밑에는 원래 돛이 없는 것이 보통이었습니다.  간혹 중간 돛 위의 더 높은 망루에서도 사격을 할 수도 있었겠지요.  하지만 거센 바닷바람 속에 눅눅해진 돛에 그렇게 쉽게 불이 붙지 않았는지, 혹은 불이 붙어도 선원들이 황급히 돛을 잘라내어 던져 버렸는지, 아무튼 주요 전투 중 망루에서 떨어진 화약마개 때문에 화재가 발생했던 경우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1805년 10월 21일 당시,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누가 감히 넬슨 제독 앞에서 자기가 해전에 대해서 더 잘 안다고 주장할 수 있었겠습니까 ?  덕분에 빅토리를 비롯한 전체 영국 함대는 망루에 전혀 머스켓 소총수를 올려두지 않은 채 전투에 임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넬슨은 그 댓가를 치루게 되었습니다.




(이건 1304년 슬루이스 Sluys 전투의 모습입니다.  이때부터도 돛대 위의 망루에서 싸우는 것은 상식이었지요.)



빅토리는 3층의 포갑판에서 르두터블의 함체를 향해 절대 빗나갈리 없는 살인적인 지근거리 포격을 퍼부어댔습니다.  24 파운드 혹은 32 파운드 포탄이 무자비하게 르두터블의 측면을 뚫고 들어가 그 내부를 난장판으로 만들어놓았습니다.  이렇게 날아드는 포탄도 무서웠겠습니다만, 그보다 무서운 것은 단단한 떡갈나무가 포탄에 박살이 나면서 날카로운 목재 파편들이 빗발처럼 쏟아지는 것이었습니다. 

 

전함 포갑판의 좁은 공간을 이렇게 쇳덩이와 날카로운 목재 파편들이 휩쓸고 지나가면 당연히 끔찍한 비명소리가 들려와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소리는 들려오지 않았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르두터블의 함체 내에는 프랑스 수병들이 전혀 없었고, 모두 상갑판과 돛대, 삭구에 머스켓 소총과 커틀라스 등을 들고 모여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의 포성 소리에 귀가 먹먹했던 빅토리의 포병들은 그런 것을 깨닫지 못했고, 르두터블의 반격이 없는 것에 신이 나서 그저 대포만 죽어라 쏘아대고 있었습니다.




(이건 깔끔하고 쾌적하게 정리된 빅토리의 포갑판입니다.  하지만 전투가 시작되면 이런 모습은 금방 사라졌습니다.)



(전투시의 포갑판은 아군의 포성과 포연, 먼지와 열기 때문에 정말 아수라장이 되었습니다.   거기에다 적의 포탄이 날아들어와 동료들을 두동강내기도 하고, 날카로운 나무 파편의 폭풍이 수병들을 덮쳤기 때문에 비명소리와 피바다까지 겹쳤습니다.)



사단이 난 것은 바로 빅토리의 상갑판이었습니다.  빅토리는 약 500명이 넘는 수병들이 포갑판에서 우측면의 포 52문을 다루느라 빠쁜 상태였으므로, 상갑판과 돛대에는 전투원과 선원들이 약 3백명 이하만 나와 있었습니다.  이들에게는 프랑스군의 0.69인치의 샤를비유 (Charleville) 머스켓 탄환이 빗발처럼 날아들었고, 피할 곳이 없던 병사들은 수십명씩 무더기로 쓰러져야 했습니다. 

 

그때, 르두터블의 뒷돛대 망루 위에, 혹은 뒷돛대 쉬라우드(shroud) 밧줄에 매달려 이렇게 빅토리의 수병들을 차례차례 쏘아쓰러뜨리던 어느 프랑스 소총병의 눈에, 빅토리의 후갑판 (quarterdeck)을 침착하게 거닐고 있는 어느 장교의 모습이 들어왔습니다. 

 

어깨 위의 황금빛 견장은 물론 가슴과 모자에도 번쩍거리는 화려한 장식품을 붙인 것이, 누가 봐도 최고위급 제독임이 분명해 보였습니다.  빅토리에서 탑승한 최고위급 제독이라면 당연히 넬슨일 것이라고 생각한 이 프랑스 소총병은 침착하게 조준을 한 뒤, 르두터블이 파도 위에서 좌우도 출렁이는 요동의 박자에 맞춰, 부드럽게 방아쇠를 당겼습니다.  펑 하는 소음과 함께 잿빛 연기가 그의 시야를 가렸고, 그 연기가 바람에 걷히고 나자 그가 노렸던 제독이 빅토리의 갑판에 무릎을 꿇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함장이나 제독들이 전투시 정복을 입고 싸우는 것이 전통이기는 했습니다만, 넬슨은 이런저런 훈장과 장식품을 잔뜩 붙이고 전투에 임하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이는 적의 저격병에게 '나 넬슨이 여기 있소' 하고 광고를 하는 셈이었는데, 넬슨은 스타병이 좀 걸려 있어서, 항상 전투에서는 이런 복장을 하고 싸웠다고 하네요.)




(넬슨의 죽음을 그린 가장 대표적인 그림입니다.  이 그림을 보면 빅토리는 우현의 르두터블 말고도 왼쪽에서도 무엇인가와 교전 중인 것처럼 그려져 있습니다만, 그건 사실이 아닙니다.  게다가 넬슨을 비롯한 몇몇이 쓰러진 것을 제외하면 그렇게 전황이 나쁘지 않은 것처럼 보입니다만, 실제로는 상황이 매우 좋지 않았습니다.)



당시 빅토리의 후갑판에 있던 다른 장교들도, 처음에는 넬슨이 쓰러진 것을 전혀 몰랐습니다.  상황이 워낙 안좋았거든요.  사방에 픽픽 쓰러지는 수병들이 즐비했습니다.  그러다가 빅토리의 함장 하디가 문득 뒤를 돌아보니 넬슨이 무릎을 꿇은 채 갑판 위에 손을 대고 있다가, 서서히 옆으로 쓰러지고 있었습니다. 

 

넬슨은 즉각 선창 아래의 응급 치료실(cockpit)로 내려보내졌습니다만, 왼쪽 어깨를 뚫고 들어간 총알은 그의 척추를 부수고 오른쪽 어깨뼈에 박혀 있었습니다.  넬슨은 어깨 아래 부분을 움직이기는 커녕 아무 감각을 느낄 수 없었고, 그는 자신이 끝장났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나 상황은 하디 함장이 이 위대한 인물의 임종을 지키기 위해 선창에 내려와 있을 수 없을 정도로 나빴습니다. 




(갑판 위에 쓰러지는 넬슨의 다른 모습입니다.  매우 미화된 그림으로서, 당시 많은 사람들이 저렇게 넬슨 곁에 무릎을 꿇고 두손 모아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님을 대하듯 경건한 모습을 취할 여유 따위는 없었다고 합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놀랍게도 빅토리의 상갑판에 두발로 서있는 수병들의 숫자보다 쓰러져 있는 수병의 숫자가 훨씬 많아지게 되었습니다.  더군다나, 서로의 돛줄이 엉긴데다 이젠 프랑스군의 갈퀴줄로 르두터블과 단단히 얽혀버린 빅토리를 항해, 르두터블이 승선 백병전 (boarding)을 감행하려는 것이 분명했습니다. 

 

르두터블의 상갑판에는 머스켓 소총 뿐만 아니라 도끼와 커틀라스, 파이크 등으로 무장한 수병들이 잔뜩 집결해 있었거든요.  비록 빅토리의 포갑판에서는 여전히 신나게 르두터블을 산산조각 내고 있었고, 덕분에 용골까지 뻗어내려간 돛대의 뿌리까지 거듭된 포격에 손상을 입고 부러질 정도였으나, 그건 상갑판 아래의 이야기였을 뿐, 상갑판 위는 프랑스군이 절대 우위에 서 있었던 것입니다. 



 

(두 전함이 서로 옆구리를 맞대면, 더 유리하다고 생각하는 측이 이런 grappling hook이 달린 밧줄을 상대 전함의 뱃전에 던져 넣고 잡아당겨 묶었습니다.  반면에 끌려가는 측에서는 이런 밧줄을 도끼로 끊어버리려고 노력했지요.  가끔씩은 양측 모두 자신감이 넘쳐서, 서로가 서로에게 갈퀴를 집어 던졌다고 합니다.)

 

 



갑판 위와 갑판 아래 중 어디가 더 중요했을까요 ?  현대전에서는 갑판 아래가 더 중요할 겁니다.  엔진과 통제실이 다 거기에 있으니까요.  그러나 범선의 경우는 달랐습니다.  절대적으로 갑판 위가 더 중요했습니다.  엔진에 해당하는 돛은 물론이고, 통제실에 해당하는 타륜까지 모두 갑판 위에 있었거든요.  (빅토리의 경우, 연합 함대에 직각으로 돌진하는 과정에서 타륜이 포격에 맞아 날아가버렸기 때문에, 갑판 아래에서 키에 연결된 밧줄을 직접 당겨 조향을 해야 했습니다.) 

 

막말로, 갑판 위를 프랑스 수병 200명이 완전히 점령한다면, 갑판 아래에 영국 수병 500명이 멀쩡히 살아있다고 해도, 갑판 햇치에 빗장을 걸고 못을 박은 뒤, 그대로 배를 카디즈로 몰고간다고 해도 눈 뜨고 당하는 수 밖에 없었습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비로소 빅토리도 무의미한 포격을 중단하고 수병들에게 갑판 위로 뛰어나가게 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아직 무장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상황이었는데다, 빅토리의 갑판 위로 유리병으로 만든 수류탄이 휙휙 날아들어 폭발해대는 바람에, 이들은 선뜻 갑판 위로 뛰어나가지 못하고 머뭇거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저 프랑스 놈들을 못 막으면 우린 다 죽거나 포로가 된다 !!)



루카 함장과 르두터블로서는 정말 기발한 전술로 대어를 낚기 일보 직전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결정적인 순간에 루카 함장은 약간의 어려움을 겪고 있었지요.  바로 높이의 차이였습니다.  아무래도 1급함인 빅토리의 갑판이 르두터블보다 훨씬 높아서, 배는 서로 딱 붙어 있었으나 르두터블에서 빅토리로 기어오르는 것이 쉽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루카 함장은 재치있는 사나이였습니다.  아직 서있던 중앙 돛대의 아래돛활대를 지탱하고 있는 밧줄을 끊어, 활대를 갑판 위로 떨어뜨렸던 것입니다.  르두터블의 두툼한 아래돛이 감긴 두꺼운 활대는 빅토리와 르두터블의 뱃전을 가로질러 떨어졌고, 프랑스 수병들은 이 외나무다리를 타고 빅토리로 돌격하기 위해 그야말로 줄을 서고 있었습니다. 

 

빅토리로서는 이들을 막아낼 병력이 상갑판 위에 남아 있지 않았고, 그나마 아직 남아 있던 인원들도 여전히 날아드는 르두터블의 머스켓 사격으로 계속 쓰러지고 있었습니다.  이제 루카 함장이 죽어가는 넬슨 사이에는 아무런 장애물이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과연 루카 함장은 넬슨의 시체와 빅토리 호를 전리품으로 삼아 카디즈로 돌아갈 수 있었을까요 ?

 

3. 테메레르(Temeraire)들의 싸움

 

지난 편에서는 루카 함장의 기발한 전술이 뜻밖의 성과를 거두어, 프랑스 전함 르두터블이 넬슨의 기함 빅토리의 상갑판을 휩쓸어 버리는 장면까지를 보셨습니다.  승기를 잡은 루카 함장은 르두터블의 수병들을 이끌고 빅토리로 승선 공격을 하기 일보직전의 상황이었지요.  여기서 잠깐 우리는 빅토리의 냄새나는 선창에서 천천히 죽어가던 넬슨을 잠시 떠나서, 빅토리의 뒤를 따르던 테메레르 (HMS Temeraire) 호의 사정을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테메레르라는 이름은 누가 봐도 영어식이 아니라 프랑스식 이름입니다.  '무모한, 막무가내의' 라는 뜻이지요.  당시 영국 해군에는 이렇게 프랑스식 이름을 가진 군함이 몇척 있기는 했습니다.  가령 트라팔가 해전에서 콜링우드 제독의 전열에 있었던 영국 전함 벨아일(HMS Belleisle) 호가 그 중의 하나였지요.  영국인들이 프랑스어에 대한 로망이 있었기 때문에 이런 이름을 붙인 것은 아닙니다.  짐작하시겠지만 대부분 프랑스 해군 전함이었다가 영국 해군에 나포된 후, 그대로 예전 이름을 썼기 때문입니다. 




(하긴 벨 섬이 훨씬 크니까, 그롸 섬 대신 벨 섬으로 오인할 수도 있겠군요.)



사실 벨아일의 경우는 예전 이름이 벨아일(Belleisle, 아름다운 섬이라는 뜻)도 아니었고, 이것이 제대로 된 프랑스어도 아니었습니다.  아일(isle)이라는 단어는 영어로 섬이라는 뜻이지, 정작 프랑스어에는 isle이라는 단어가 없고, 섬이라는 뜻으로는 일(ile)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원래 이 프랑스 전함은 리옹 (Lion, 예, '사자'라는 뜻 맞습니다) 이라는 이름으로 진수되었으나, 혁명의 진행 방향에 따라 마라 (Marat, 목욕하다 여자에게 살해된 그 혁명가 맞습니다), 다음에는 포르미다블 (Formidable, 영어와 똑같이 '무서운'이라는 뜻이지요) 으로 이름이 자꾸 바뀌었습니다. 

 

그러다 1795년 그롸(Groix) 전투에서 영국 해군에게 나포되었습니다.  아마 영국 해군은 새로 영입한 이 전함 이름을 프랑스식으로 포르미다블이라고 읽어야 할지, 그냥 영어식으로 포미더블로 읽어야 할지 고민을 잠깐 했을 겁니다.  하지만 영국 해군에는 포미더블 (HMS Formidable) 호라는 이름을 가진 전함이 이미 있었습니다.  그래서 영국 해군은 이 프랑스 전함에게, 벨아일(Belleisle) 이라는 절반짜리 프랑스어 이름을 붙여줍니다. 

 

이 전함을 나포한 곳이 프랑스 섬인 벨 일 (Belle Ile, 아름다운 섬) 근처였기 때문이었지요.  하지만 일(Ile)이라는 프랑스어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정작 섬에 해당하는 단어는 그냥 영어인 아일(Isle)을 붙였습니다.  더 웃긴 것은 정작 이 전함을 나포한 곳은 그 벨 일이라는 섬 근처도 아니었다는 것이지요.  족보에도 없는 반쪽짜리 프랑스 이름을 가진 이 전함은 지지난 편에서 보셨듯이, 트라팔가 해전에서 나름 맹렬히 싸우다 돛대 3개가 모조리 부러지는 봉변을 겪었습니다.




(트라팔가 해전 당시 오후 4시 15분 경의 벨아일의 모습입니다.  이름과는 달리 별로 아름답지는 못한 모습이지요.)



우습게도, 제대로 된 프랑스 이름을 가졌던 테메레르는 정작 프랑스가 아닌 영국 조선소에서 만들어진, 순수 영국 전함이었습니다.  물론 여기에도 얽힌 역사가 있습니다.  원래 당연히 테메레르라는 프랑스 전함이 있기는 했습니다.  1748년에 진수된 74문짜리 전함인 테메레르 호가 바로 그것이었지요. 

 

그러나 이 배도 1759년의 라고스 (Lagos) 해전에서 영국 해군에게 나포되어, 그만 그 이름 그대로 영국 해군의 테메레르 (HMS Temeraire) 호가 되어버렸습니다.  이 테메레르는 1784년에 퇴역할 때까지 영국 해군에서 활약했는데, 당시 프랑스에서 건조되었다가 영국 해군에 편입된 다른 전함들처럼, 성능면에서 꽤 만족스러웠나 봅니다.  아마도 그 덕분인지, 1798년에 진수된 98문짜리 2급 전함도 테메레르 호로 명명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순수 영국 해군 전함에 프랑스식인 테메레르라는 이름이 붙게 된 연유입니다. 




(영국 해군의 제1대 테메레르 호가 탄생하는 순간입니다.  즉, 라고스 해전 장면이지요.)



하지만 프랑스 해군도 테메레르라는 이름을 계속 사용했습니다.  1782년에 진수된 테메레르 호가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프랑스제 테메레르는 유지보수에 문제가 있었는지 1801년에 수리 불가 판정을 받고 해체되어 버립니다.  이로 인해, 트라팔가 해전 당시 프랑스 해군에 테메레르라는 이름의 전함이 있어서 영국제 테메레르와 자웅을 겨루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테메레르급 전함은 계속 만들어졌습니다.  트라팔가 해전 끝무렵에 폭발한 프랑스 전함 아쉴르(Achille)도 그렇고, 빅토리를 궁지로 밀어넣고 넬슨을 사살한 르두터블도 바로 테메레르와 같은 설계 구조를 가진 테메레르급 전함들이었습니다.





(이것은 테메레르급 전함 중 아쉴르(Achille) 호의 모형입니다.  제가 보기엔 뭐가 테메레르급의 특징인지 전혀 모르겠군요.)



이렇게 영국 해군만 프랑스식 이름을 가진 전함들을 보유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프랑스 해군도 영국식 이름을 가진, 영국제 전함을 나포해서 가진 것이 있었습니다.  트라팔가 해전만 하더라도, 프랑스 해군의 스위프트슈어 (Swiftsure) 호가 있었습니다.  이는 아부키르 해전에서 할로웰(Benjamin Hallowell) 함장이 지휘했던 74문짜리 3급함 스위프트슈어 호가 1801년에 프랑스 해군에게 나포되어 그대로 프랑스 해군의 스위프트슈어 호가 되었기 때문에 벌어진 일입니다. 

 

그러나 영국 해군도 나름 자존심이 있어, 그 나포 사건 조금 뒤인 1804년에 새로 74문짜리 3급함을 진수시키면서 그 손실을 만회하고자 스위피트슈어라는 이름을 그대로 붙였습니다.  가장 큰 비극은 하필 이 전함이 트라팔가 해전에 참전하는 바람에, 같은 스위프트슈어가 영국과 프랑스 측에서 각각 싸우게 되었다는 점이었지요. 

 

다행인지 불행인지 같은 해전에 참전했던 이 두 스위프트슈어는 서로 직접 대포알을 주고 받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트라팔가 해전의 결과로, 프랑스 스위프트슈어는 영국 해군에게 다시 나포되었는데, 하지만 영국 해군에는 이미 그 이름을 가진 전함이 있었으므로, 기존의 스위프트슈어는 그 이름 대신 이리지스터블 (HMS Irresistible) 호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스위프트슈어가 프랑스 해군에게 나포되는 모습입니다.  뭐 로열네이비라고 별 거 있나요 ?  두 주먹이 네 주먹을 못 당하는 법이지요.)



테메레르의 이름 설명은 이쯤 하고, 그를 지휘하던 함장 하비 (Eliab Harvey)에 대해서 잠깐 보시지요.  이 양반은 1758년 생으로서, 넬슨과 동갑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출신이 서민이라서 승진이 늦었느냐 하면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사실 넬슨이 비정상적으로 승진이 빨랐던 것이지요. 

 

이 양반은 하원 의원이자 상당한 부자였던 아버지 덕분에 13살의 나이에 (서류상으로만) 군함에서 미드쉽맨 생활을 시작했고, 16세의 나이에 실제로 군함에 탄지 5년 만에 정식 사관(lieutenant)로 승진한 뒤, 불과 3년만에 준함장 (commander)를 거쳐, 1년도 안되어 24세에 정식 함장 (post captain)이 되었습니다. 

 

아버지와 형이 일찍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젊은 나이에 큰 유산을 물려받은 하비 함장은 주색잡기와 도박으로 곧 가산을 흥청망청 날리기 시작했습니다.  한번은 한판의 주사위 놀음에 무려 10만 파운드 (현재 가치로 대략 300억원)를 걸고 도박을 하기도 하는 등 그야말로 개차반의 나날을 보냈지요. 

 

(이 놀음에 이겼는지 졌는지 궁금하십니까 ?  졌습니다 !  그러나 이렇게 되면 하비가 파산할 거라는 것을 잘 알던 상대방이 아량을 배풀어 한판 더 하자고 했고, 다행히 다음판에서는 이겨서 결국 본전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 아량있는 상대방을 둔 것도 복이라면 복이지요.)




(하비 함장입니다.  이 양반에 대한 후일담은 다음 편에 조금 더...)



하비 함장이 이런 방탕한 생활로 온 집안을 다 말아먹지 않은 것은 어쩌면 해군 덕분이었습니다.  군함 생활을 해야 하니까 당연히 도박장과 유흥가에서 멀어졌던 것이지요.  그러나 하비 함장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하원 의원도 겸직하고 있었으므로 (당시 영국의 의회 및 선거 제도는 오늘날의 민주주의와는 매우 거리가 있었습니다) 자주 휴가를 내고 육지 생활을 했고, 동료 해군 장교들과의 사이가 썩 좋은 편은 아니었습니다.  그래도 하비에겐 정치적, 금전적인 배경이 있었으므로, 남들은 그토록 얻고자 애썼던 현역 함장 자리를 내킬 때마다 쉽게 손에 넣을 수 있었습니다. 

아미엥 평화 조약이 1년만에 깨지자, 그에게 주어진 배는 무려 1만7천 파운드(약 50억원)를 들여 새로 수리한 테메레르 호였습니다.   그는 테메레르를 이끌고 엄격한 콘월리스 제독 휘하에서 숨막히는 브레스트(Brest) 봉쇄 작전에 투입되었었고, 그 후 거친 브레스트 앞바다 때문에 손상된 선체를 다시 큰 돈을 들여 수리한 뒤 칼더 제독이 지휘한 피니스테라 해전 (모든 것은 의지의 문제 - 피니스테라 (Finisterre) 해전 http://blog.daum.net/nasica/6862521 참조) 에도 참전했었습니다. 

 

테메레르는 막강한 98문의 화력을 자랑하는 대형 2급함이면서도 지속적인 대규모 수리를 받은 덕분에 매우 뛰어난 기동성을 가진 정예함이었습니다.  때문에 넬슨이 카디즈 앞바다에 도착하여 콜링우드와 어느 전함을 누가 지휘할 것인지를 나눌 때, 특별히 자신의 전대에 두기를 원했던 전함 중의 하나가 바로 테메레르였습니다.  특히 넬슨은 테메레르를 바로 자신의 빅토리 뒤에 배치함으로써, 테메레르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보냈습니다.   유사시 빅토리가 위기에 빠지면, 재빨리 접근하여 빅토리를 구해낼 임무가 암묵적으로 주어진 것이지요.

트라팔가 해전 당일날, 프랑스-스페인 연합 함대에게 넬슨과 콜링우드의 전대가 수직의 일렬종대로 들이닥칠 때, 주로 신호 중계기 역할을 했던 프리깃함 유리알러스 (HMS Euryalus) 호의 함장이자 넬슨의 오랜 친구였던 블랙우드 경 (Sir Henry Blackwood) 은 총사령관인 넬슨이 가장 위험한 선두에 선다는 것이 몹시 불안하여, 차라리 빅토리 말고 자신의 유리알러스 호로 기함을 옮길 것을 권했습니다.  이는 매우 합리적인 제안이었습니다. 

 

실제로 전체 함대를 관찰하고 잘 지휘하기 위해서는 함대 속에 있는 것보다는 함대 진형에서 한발짝 떨어진 프리깃함에서 보는 것이 더 좋았고, 또 어차피 각 전함들의 함장은 빅토리 호가 아닌, 빅토리 호의 신호를 중계해주는 유리알러스 호의 깃발 신호를 쳐다 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또한, 대 함대 결전에 임하는 총사령관이 시시한 프리깃함에 승선하여 전체 전투를 지휘한다는 것은 전례에 없는 일이었고 또한 매우 체면이 깎이는 일이었던 것도 사실이었습니다.  특히 당시 해전 관례상, 전함들끼리 전투를 벌일 때 전함들은 작은 프리깃함들에게는 (설령 완벽한 포격 기회가 생기더라도) 포격을 하지 않는 것이 상식이었거든요.  그러니 더더욱 '위험을 무릅쓰기 싫어했다'는 비아냥을 듣기 딱 좋은 위치였습니다.  엠마와의 결혼을 위해서라도 세상이 깜짝 놀랄만한 대승리가 필요했던 넬슨에게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제안이었지요.




(넬슨보다 12살이나 어렸고 지위도 훨씬 낮았던 블랙우드 함장이 넬슨의 '친구'가 된 것은 1800년, 지중해에서 프랑스의 80문짜리 전열함 기욤 텔을 나포할 때 당시 불과 36문짜리 프리깃함 페넬로피 호의 함장이던 블랙우드가 보여준 맹활약에 넬슨이 매료되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팔레르모에서 엠마와 연애 중이던 넬슨은 블랙우드에게 편지를 써서 '한번도 만나보지 못한 인물과 친구가 될 수 있다면, 당신과 친구 먹고 싶다' 라고 극찬을 했다고 합니다.)



넬슨이 그를 거절하자, 블랙우드는 '하다 못해 테메레르가 더 빠르기도 하니, 테메레르가 빅토리를 추월하도록 허용하라'고 권고했습니다.  그러나 넬슨은 이마저도 거절했고, 실제로 빅토리를 앞지르려고 빅토리의 후측면으로 바싹 접근했던 테메레르의 하비 함장에게는 넬슨이 특별히 확성기를 통해 '하비 함장, 자네의 제대로 된 위치인 빅토리의 후미를 지켜준다면 고맙겠네' 하고 직접 말을 하기도 했습니다. 

 

여기에는 이설도 있습니다.  즉, 원래 넬슨도 테메레르에게 추월을 허용하려고 했는데, 콜링우드 전대를 보니 콜링우드가 양보는 커녕 제2번 함을 훨씬 뒤에 남겨두고 전속력으로 온갖 위험을 혼자 무릅쓰고 달려가는 것을 보고는, 마음을 바꿔 테메레르에게 '뒤로 빠져라'고 명령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아무튼 이렇게 넬슨은 선두에 섰고, 그에 따르는 위험과 피해를 보면서도 뷔생토르에게 종사를 퍼부으며 연합 함대의 전열을 관통해 들어갔습니다.  테메레르의 하비 함장은 그 뒤를 따라 들어갔는데, 그는 더 앞 쪽에 있던 세계 최대의 거함 산티시마 트리니다드를 노렸고, 이 거함과 무려 20분간 교전했습니다.  하지만 이 거함에게 전력을 쏟아붓는 동안 프랑스 전함들인 넵튠과 르두터블에게 두들겨 맞아야 했지요. 

 

마치 17대1의 패싸움에서, '난 내가 얼마나 두들겨 맞든 아무튼 한놈만 팰거야' 하는 식이었지요.  이때 테메레르는 상부 돛대 2개가 부러지는 심각한 손상을 입습니다.   그러나 마치 멧돼지의 뒷다리를 물고 늘어진 사냥개처럼 집요하게 산티시마 트리니다드를 두들겨 패던 하비 함장의 눈에, 자신에 종사를 퍼부었던 르두터블의 움직임이 들어왔습니다. 

 

르두터블은 어느덧 빅토리와 딱 붙어있었는데, 불길하게도, 아직 르두터블의 돛대에 프랑스의 삼색기가 휘날리는데도 빅토리가 포격을 멈추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건 좋지 않은 신호였습니다.  그는 즉각 배를 돌려 빅토리와 르두터블을 향했습니다.  이제 영국의 테메레르가 프랑스의 테메레르급 전함인 르두터블과 혈투를 벌일 차례였습니다. 




(주로 육군이 쓰던 canister탄은 머스켓 탄환이나 돌조각/쇳조각이 들어있어 두꺼운 목재 및 해먹 방호벽을 뚫어야 했던 해군용으로는 그다지 적합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해군에서는 훨씬 굵은 알(?)을 쓰는 grapeshot을 썼지요.)



테메레르는 빅토리에게 정신이 팔려 있는 르두터블의 함미 쪽을 가로질러 접근했습니다.  테메레르가 막 르두터블의 비어있는 우현에 접근하여 보니, 무너진 가로 활대를 다리 삼아 막 프랑스 수병들 몇몇이 빅토리로 뛰어들고 있었습니다.  테메레르는 좌현의 빅토리에 정신이 팔려 방심하고 있던 르두터블에게 구형탄(roundshot)과 포도탄(grapeshot)으로 이중 장전된 일제 사격을 퍼부었습니다. 

 

특히 영국 해군의 신무기 캐로네이드(carronade) 포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높은 테메레르의 후갑판(quarterdeck) 위에 장착된 캐로네이드 포는 사실 이럴 때 쓰라고 있던 물건이었거든요.   이 캐로네이드에는 구형탄(roundshot) 위에 머스켓 탄환이 가득 든 캐니스터탄이 이중으로 장전되어 있었으므로, 수병들이 빽빽히 모여 있던 르두터블의 상갑판을 내려다보면서 발사된 이 일격은 그야말로 처참한 결과를 낳았습니다. 

 

승리를 낚아채기 일보 직전이었던 르두터블의 함장 루카도 이때 부상을 입고 쓰러졌습니다.  영국군에게 생포되었던 루카 함장의 기록에 따르면, 이때의 테메레르가 퍼부은 일격만으로 자신의 부하들 약 200명이 쓰러졌다고 합니다.




(무게가 일반 cannon의 1/3~1/4에 불과했던 저압포인 carronade 포는 스코틀랜드의 Carron 사에서 개발/제작했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었습니다.  이 단거리 포는 특히 전함의 후갑판에 장착되어 적의 수병이 밀집된 갑판에 대해 엄청난 파괴력을 가졌습니다.  18세기 후반 내내 프랑스 조병창에서는 이에 해당하는 무기를 만들지 못했기 때문에, 근접전에서 영국 해군이 우세를 유지하는데 큰 도움을 준 무기였습니다.  그러나 이 캐로네이드 포는 단거리 저압포라는 한계가 있었으므로, 전함의 포문수를 셀 때 그 숫자에 넣지 않는 것이 보통이었습니다.)



테메레르는 거기서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테메레르는 피범벅 난장판이 된 르두터블 옆에, 마치 르두터블이 빅토리에게 했던 그대로 쿵 하고 옆구리를 부딪히며 밀착한 뒤, 재빨리 갈퀴줄을 던지고 서로의 활대 끝을 묶어 르두터블과 엉겨붙었습니다.  테메레르가 이런 결정을 내린 것은 사실 이유가 있었습니다. 

 

어차피 그 전에 르두터블과 넵튠에게 종사를 당하다 보니, 돛대와 삭구에 큰 손상을 입은 상태였기 때문에, 이미 기동성을 거의 잃은 상태였고, 그나마 르두터블 옆으로 다가온 것이 마지막 힘을 다한 것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테메레르는 이렇게 몸을 르두터블에게 묶어 고정시키고 계속적으로 포격을 가해 르두터블을 그야말로 벌집으로 만들겠다는 의지를 보였습니다. 

 

빅토리도 상황이 이렇게 되자 다시 포격을 시작하여, 키큰 떡대 2명이 (3-decker 2척)이 덩치가 작은 1명 (2-deck 1척)을 사이에 끼우고 글자 그대로 '배때지에 연장질'을 해대는 보기 흉한 모습을 연출했습니다.  이때의 포격은 너무 치열하여, 빅토리에서 쏜 포탄이 르두터블의 함체를 관통한 뒤 테메레르의 측면을 강타하기도 하고, 반대로 테메레르의 포탄이 빅토리를 때리기도 할 정도였습니다.  그 사이에 낀 르두터블은 도저히 대포로 반격할 처지가 아니었습니다.  이때 르두터블의 포갑판은 그야말로 쇳덩어리와 날카로운 나무 파편으로 이루어진 양방향 폭풍이 휩쓸고 있었거든요.




(맨 왼쪽이 빅토리, 가운데가 르두터블, 오른쪽이 테메레르입니다.  이런 비겁한 영국놈들 !)



아마도 이런 '비열한 쓰리섬 쌈박질'에 열이 받았는지, 정의감에 넘치는 112문 짜리 스페인 전함 산타아나 (Santa Ana)가 지나가며 테메레르에게 종사를 먹였고, 또 또다른 74문짜리 테메레르급 프랑스 전함 푸구외 (Fougueux)가 같은 테메레르급의 자매함인 르두터블을 구출하기 위해 테메레르의 비어있는 우현에 맹렬한 일제 사격을 퍼부으며 접근했습니다.  이제 쓰리섬 쌈박질이 포섬으로 바뀌는 순간이었습니다.  그것도, 빅토리를 제외한 3척의 전함은 모두 테메레르였습니다.  그야말로 테메레르들의 싸움이었지요.

테메레르는 우측에 새롭게 나타난 위협에 대해서 침착하게 대응했습니다.  하비 함장은 포수들을 좌현에서 우현으로 급히 이동시켰으나, 서둘러 포격하지 않고 푸구외가 약 100m 안쪽으로 들어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일제 사격을 날렸습니다. 

 

이 포격으로 푸구에의 삭구와 활대들이 우수수 떨어져내렸고 (이런 것을 보면 프랑스군은 돛대를 쏘고, 영국군은 함체를 쐈다는 말이 꼭 100% 들어맞는 것도 아닌 듯 합니다) 이로 인해 기동력을 잃은 푸구외는 관성의 힘으로 테메레르의 뱃전에 밀려와 쿵 하고 맞붙었습니다.  테메레르의 수병들을 재빨리 푸구에도 테메레르의 뱃전에 묶어버렸습니다.  이제 테메레르도 르두터블과 푸구외의 2척 사이에 낀 신세가 되었습니다.




(이제 다들 어느 배가 빅토리인지는 알아보실 겁니다.  빅토리 바로 왼쪽이 르두터블이고, 그 왼쪽이 테메레르인데, 테메레르는 이제 막 푸구외에게 일제 사격을 퍼붓고 있기 때문에 흰 포연을 뿜고 있습니다.  Clarkson Frederick Stanfield 의 그림입니다.)



르두터블은 테메레르와 빅토리의 협공을 받으며 크게 기세가 꺾었으나, 루카 함장의 기본 전술은 테메레르에 대해서도 위력을 발휘했습니다.  루카 함장은 부상을 입은 상태에서도 갑판 위를 떠나지 않고 (사실 갑판 밑으로 내려가는 것이 더 위험했을 겁니다) 전투를 지휘했는데, 이제 빅토리보다는 새로 도착해 기세가 등등한 테메레르에게 머스켓 사격과 수류탄 투척을 집중했습니다. 

 

테메레르의 수병들도 르두터블의 희한한 전술에 고전을 하며 픽픽 쓰러졌는데, 특히 수류탄 한발이 테메레르의 3층 포갑판까지 굴러떨어지며 폭발, 후방 화약고 근처에 화재가 발생하는 아찔한 순간도 있었습니다.  또한 테메레르의 전방 돛과 우현 삭구에 화재가 발생하여, 그것을 끄느라 전투가 잠시 중단되기도 했습니다. 

 

테메레르의 돛에 불이 붙은 것은 아마도 르두터블의 망루에서 쏘아대는 머스켓 소총에서 튀어나온 붙붙은 화약 마개 (wad)가 일으킨 것이 아닐까 하는데, 넬슨의 선견지명이 옳았다고 해야 할까요 ?  아니면 돛에 불이 붙긴 했으나 불이 붙은 것은 쏜 측인 르두터블의 돛이 아니라 맞은 측인 테메레르의 돛이었으므로 넬슨의 명령이 잘못된 것이라고 해야 했을까요 ? 

 

아무튼 이렇게 르두터블의 수병들이 강력한 저항을 펼쳐서인지, 르두터블이 이미 입은 피해 정도면, 왠만하면 빅토리나 테메레르에서 승선 공격조 (boarding party)를 보내어 백병전을 시도할 만도 했는데, 빅토리도 테메레르도 그럴 생각을 하지 않고 계속 죽어라 포격질만 해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미 르두터블의 승무원은 절반 이상이 죽거나 부상으로 쓰러진 상태였습니다.  아직도 돛대의 망루에서 열심히 머스켓 소총을 쏘아대기는 했으나, 워낙 포격이 거세다보니 주돛대까지 꺾여 테메레르의 선미루 갑판 (poopdeck)에 쓰러져 버렸습니다. 

 

주돛대의 망루와 삭구에 매달려 있던 머스켓 소총수들이 비참한 추락사를 당해야 했던 것은 물론이었지요.  약 20분간 이렇게 집중 포격을 받고 나자, 르두터블 수병들의 투지는 모르겠으나, 르두터블의 함체가 견디지를 못했습니다.  보통 이렇게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는 도중에도, 최소한 한두명의 수병은 계속 선창에 물이 얼마나 새어들어오는지를 계속 점검하고 있어야 했는데, 그로부터 루카 함장에게 전해진 소식은 절망적인 것이었습니다. 

 

르두터블이 곧 침몰할 것 같다는 보고였지요.  결국 루카 함장은 깃발을 내리고 테메레르에게 항복하겠다는 의사를 밝힙니다.  하비 함장은 비로소 나포조 (prize party)를 테메레르로 파견하여 항복을 접수했습니다.  이때 르두터블의 사상자는 총원 643명 중 사망 300에 부상 222명, 무려 81%의 사상률이었습니다.  정말 처절한 싸움이었지요.




(저 포문을 통해 수병들이 돌격해 나갈 수 있을까요 ?  약간 좁기는 하지만 대포를 뒤로 끌어내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항구에 정박할 때 어떤 경우에는 저 포문 위를 그물로 덮어놓기도 했습니다.  포문을 열고 수병들이 탈영하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였습니다.)



하지만 테메레르의 좌현에서는 싸움이 끝났을지 몰라도, 우현은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테메레르는 더 높은 3층 포갑판이라는 높이의 이점을 적극 활용하여 푸구에의 승선 공격 (boarding)을 효과적으로 막아내고 있었습니다.  즉, 이번에도 푸구에의 수병들이 승선 공격을 하려 상갑판 위에 잔뜩 모여들었으나, 역시 훨씬 높은 테메레르의 갑판 위로 쉽게 기어오르지 못해 머뭇거리고 있는 동안 해먹 뭉치 (hammock net) 뒤에 숨어 쏘아대는 테메레르 수병들의 머스켓 사격에 애꿎게 사상자 숫자만 늘이고 있었습니다. 

그러는 사이, 좌현의 르두터블의 항복을 받아낸 테메레르의 하비 함장은 푸구외에게 역습을 가합니다.  즉, 푸구외의 갑판보다 조금 높은 위치에 있던 테메레르의 포문들을 통해 승선 공격을 시작한 것입니다.  의표를 찔린 푸구외의 수병들이 사력을 다해 막으려 했습니다만,  그 전의 포격전에서 테메레르의 전과가 더 좋았던 지라, 결국 병력에서 밀려 점차 밀려나기 시작했습니다. 

 

백병전이 시작되기 전에 이미 푸구외의 함장인 보도앙(Louis Alexis Baudoin)은 치명적 부상을 입고 넬슨처럼 죽어가고 있었고, 다른 장교들도 백병전 과정에서 대부분 죽거나 부상당한 상황이 되자, 결국 남아있던 준함장 계급의 장교 바젱 (Francois Bazin)은 테메레르의 선임 사관이자 승선조 지휘관이었던 케네디 (Thomas Fortescue Kennedy)에게 항복하고 맙니다.  총 사상자 수는 135명, 총원 755명의 18%에 달하는 사상률이었습니다.

하지만 테메레르도 피해는 심각했습니다.  총원 718명 중 47명 전사에 76명 부상, 빅토리와 거의 맞먹는 17%의 사상률을 기록했고, 특히 가로 활대는 물론이고 상부 돛대 3개가 모조리 부러져 하부 돛대만 덜렁 남아있는 흉물스러운 모습이 되어 버렸지요.  대포를 잃은 군함은 아직 싸울 수 있지만 돛대를 잃은 군함은 사실상 더 이상 할 수 있는 것이 없었습니다.  테메레르의 트라팔가는 사실상 여기까지였습니다. 

그리고 빅토리와 테메레르를 제외한 나머지 영국 전함들은 상대적으로 매우 쉬운 전투를 치루었습니다.  그 어떤 전함에서도 7% 이상의 사상률을 내지 않았거든요.  역시 군대는 줄이라고, 맨 앞 줄에 선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를 보여주는 통계치입니다.  나머지 프랑스-스페인 전함들은 여기저기서 종사를 당하고 전투 능력을 잃거나 돛대가 부러져 항행 능력을 잃어서, 결국 차례로 영국 해군에게 항복을 해야 했습니다. 




(싸움은 덩치로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 산티시마 트리니다드 호입니다.)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거함이었던 산티시마 트리니다드는 빅토리와 테메레르에 이어, 영국 함대의 넵튠(Neptune)에게 종사를 당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특히 넵튠과는 장시간 포격전을 벌인 끝에, 결국 돛대를 모두 잃고 표류하는 신세가 되어 버렸습니다.  물론 대포와 수병들도 많이 잃었지요.  그러나 워낙 덩치가 큰 거함이다보니, 넵튠도 섯불리 어쩌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다, 거의 2시간 만에야 선회를 마치고 되돌아온 연합 함대의 선두그룹, 즉 뒤마누아르 (Pierre Dumanoir le Pelley) 제독의 분대를 상대하느라 넵툰은 이 자리를 뜨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산티시마 트리니다드에 아직 온전한 대포와 수병들이 많이 있다고 해도, 또 전함이 아무리 덩치가 크다고 해도, 돛대가 모두 부러진 다음에는 대체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었습니다.  




(당시 산티시마 트리니다드 호에 탑승한 최고위자였던 시스네로 (Baltasar Hidalgo de Cisneros) 제독입니다.  당시 이 양반은 떨어지는 삭구에 머리를 다쳐 뇌진탕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아프리카에게 항복을 거부한 것이 이 양반이었는지는 불분명합니다.  이 양반은 이때의 부상이 일부 영구히 남아, 그 후에도 평생 한쪽 귀가 들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결국 이 스페인 전함은 항복하기로 결심했으나, 넵튠이 자리를 비우고 대신 들어온 것이 고작 64문짜리 아프리카 (HMS Africa) 호였습니다.  돛대가 모두 부러져 깃발을 휘날리지 않고 있는 모습을 본 아프리카의 함장 딕비 (Henry Digby)는 보트를 보내 이 거함의 항복을 받아내려 했습니다.  그리고 산티시마 트리니다드에서도 이렇게 노를 저어 오는 아프리카의 보트에게 아무런 공격을 해오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산티시마 트리니다드의 후갑판까지 올라가 스페인 함장과 대면한 아프리카의 선임장교 스미스 (John Smith)는 아프리카에게는 항복하지 않겠다는 스페인 측의 답변에 깜짝 놀라야 했습니다.   생각해보면, 돛대가 부러져 깃발을 올리지 못하더라도 그것이 꼭 항복 의사 표시라고는 할 수 없는 것이었거든요.  까딱하면 스미스를 포함한 아프리카의 나포조 (prize crew)가 오히려 포로가 될 판국이었습니다.  

 

 그러나 체면을 중시하는 스페인 장교들은 스미스를 '잘 타일러 돌려보내는' 아량을 베풉니다.  사실 산티시마 트리니다드는 체면상 아프리카처럼 조그만 전함에게는 항복하기 싫었던 것입니다.  결국 이 스페인 전함은 무려 1시간 30분 동안 아무 하는 일 없이 표류하다가, 간신히 어느 정도 체면이 서는 규모의 상대, 즉 98문짜리 2급 전함 프린스 (HMS Prince) 호에게 항복할 수 있었습니다. 

 

이 프린스 호는 지난편에 보셨듯이, 원래 콜링우드 제독의 전대의 맨 후미에 위치한 배로서, 너무 속력이 느려 전투에 늦게 참전하는 바람에 부상자 1명조차 내지 않은 전함이었습니다.  아마 항복하는 측에서나 항복받는 측에서나 서로 상당히 쑥쓰러운 상황이었을 겁니다.



(훗날 제독이 된 딕비 함장의 모습입니다.  이 분은 이날 비록 타고 있는 배가 작다는 이유로 산티시마 트리니다드로부터 항복을 거절당하는 굴욕을 받아야 했지만, 그 이후에도 뒤마누아르 제독의 분대를 막아내는데 결정적인 활약을 했습니다.)



결국 뒤마누아르 제독도 이미 상황이 거의 끝나버린 것을 보고 몇번 포격전을 벌인 뒤 도망쳐 버렸습니다.  10척 (프랑스 6척, 스페인 4척)으로 구성되었던 뒤마누아르 제독의 분대 중에서 정말 투지를 가지고 동료들을 도우려 했던 전함은 오직 한척 프랑스 전함 엥뜨레피드(Intrepide, '용기있는, 대담한' 이라는 뜻) 뿐이었습니다. 

 

결국 이름값을 발휘한 이 전함은 1대5의 싸움을 벌이다 32%의 사상자를 내고 오후 5시 쯤 항복했고, 이때 즈음해서는 아직 움직일 수 있는 연합 함대의 다른 전함들도 모두 재주껏 현장을 빠져 나와 도주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영국 전함들은 그 뒤를 끝까지 추격할 수가 없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상대의 돛대와 삭구를 노린다'는 프랑스-스페인 함대의 전술 교리가 여기서 효과를 발휘했다고 볼 수 있겠지요.  영국 함대 중 빠른 전함들은 대개 돛대가 부러져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이었고, 피해가 적은 전함들은 너무 느려서 (사실 그래서 피해가 적었지요) 도주하는 적함들을 추격할 처지가 못되었거든요.  결국 오후 5시 45분 경, 프린스 (예, 부상자 한명 없는 그 프린스 맞습니다) 의 포격으로 화재가 발생했던 프랑스 전함 아쉴르(Achille)가 결국 화약고 유폭으로 폭발하면서, 트라팔가 해전은 사실상 종료됩니다. 

에필로그

 

지난 편에서는 넬슨의 치명적인 부상에도 불구하고, 영국 함대가 프랑스-스페인 연합 함대를 그야말로 완력으로 제압하는 모습까지를 보셨습니다.  이렇게 완승을 거둔 영국 함대는 승리의 환호에 젖어 럼에 물을 탄 그록(grog)이라도 돌리며 축배를 들었을까요 ? 

 

아니면 넬슨의 죽음에 대한 비통함으로 장엄한 슬픔에 빠져 있었을까요 ?  좀더 현실적인 이들은 자신의 몫으로 떨어질 나포 포상금(prize money)가 얼마쯤 될런지 남몰래 계산을 해보고 있었을지도 모르지요.  과연 현실은 어떠했을까요 ?  수병들에게 넬슨의 전사 소식이 전해지자 이들은 물론 잠시 큰 충격과 슬픔에 빠졌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냉혹했지요.  그들에게는 그렇게 넬슨의 죽음을, 그리고 많은 동료들의 죽음을 슬퍼할 겨를이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영국 함대의 많은 전함들이 돛대를 한두개씩, 혹은 모조리 잃었고, 또 홀수선 아래에 대포알을 얻어맞고 물이 콸콸 새들어오는 배들도 많았습니다.  10월 21일 하루 종일 식사도 못하고 치열하게 싸우느라 지치고, 동료들을 잃어서 슬프다고 해서 이렇게 부러진 돛대와 찢어진 돛을 누가 대신 고쳐줄 수도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바로 그 지친 수병들이 주린 배를 딱딱한 건빵으로 대충 채우고 대규모 수리 작업을 벌여야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청소까지 해야 했습니다.   프린스 호와는 달리, 대부분의 전함에서는 수십명~백여명의 사상자가 있었고, 인간이 대포알이나 머스켓 총탄에 맞을 때는 많은 양의 피와 오물을 그 자리에 흩뿌리게 되어 있습니다.  오크 목판에 이렇게 뿌려진 피와 오물은 영국 해군의 기준상 용납되지 않았습니다.  다 닦아내야 했지요.  그나마 자신들이 탄 전함을 수리하고 청소해야 했던 수병들은 복받은 편이었습니다.





(19세기나 20세기나 해군의 아침 일과는 거의 비슷합니다.  청소 청소 청소지요.  수병들이 갑판에 문지르고 있는 것은 성마석, 즉 holystone으로서, 두툼하고 네모난 모양이 성서와 비슷하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었습니다.)



적함을 나포하게 되면, 그 나포선으로 옮겨타서 긴급 수리를 하고 그 배를 가까운 아군항으로 몰고가는 선원들을 나포조(prize crew)라고 합니다.  이들은 본함보다 훨씬 더 적은 인원으로 더 많은 일을 해야 했습니다.  대개 전함의 승무원의 500~700명이라면, 그 1/10 정도, 즉 50~70명을 나포조로 파견했습니다.  

 

너무 많이 파견하면 모함의 임무 수행에 큰 지장이 생길 테니까요.  하지만 이들이 해야 하는 일은 모함에 남은 수병들보다 훨씬 과중했습니다.   모함이나 나포함이나 부서진 것들을 수리해야 하는 것은 마찬가지였으나, 일반적으로는 모함보다 나포함의 파손 정도가 훨씬 심한 편이었습니다.  (당연히 그랬겠지요.  그러니까 항복했을테니까요.)  훨씬 적은 인원으로 훨씬 더 많은 파손 부위를 수리해야 했으니 나포조로 파견되는 선원들은 일단 죽었다고 봐야 했습니다. 



(우리 배가 다 부서졌을 때, 누가 이걸 고쳐주지 ?  바로 여러분 !)



이날 나포된 프랑스 및 스페인 전함들은 하나같이 손상 정도가 매우 심했습니다.  특히 불굴의 르두터블 같은 전함은 그야말로 온전히 남아 있는 물건이 거의 없을 정도였고, 과연 이 배가 지브랄타까지 무사히 갈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거침없이 물이 콸콸 새어들어오고 있었습니다.  낮 동안에 자신들의 대포로 신나게 부숴 놓은 이런 배들을 수리해야 했던 영국 수병들은 '낮 동안에 좀 살살할 걸' 하고 후회도 했을 겁니다. 

 

 게다가 이들은 자신들보다 훨씬 많은, 보통 7~8배 되는 적 수병들을 갑판 밑에 가둬두고 감시하는 역할까지 동시에 수행해야 했습니다.  그래도 나포조로 나가는 것은 보통 즐거운 일이었습니다.  이유가 뭐냐고요 ?  이들은 긴급 수리만 마치고 나면, 곧장 그 배를 몰고 모항으로 돌아갈 수 있었거든요. 

 

그에 비해 모함은 그 해역에 계속 남아서 하던 초계 임무를 계속 해야 하는 경우가 많았지요.  하지만 트라팔가 해전에서의 나포조 수병들은 별로 즐거운 결말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런 정도의 고난으로는 성이 차지 않았던지, 운명은 이들에게 더욱 가혹한 시련을 보내왔거든요.  그것도 전투 종료 불과 5~6시간 후인 바로 그날밤에요. 




(바다가 위험한 것은 프랑스 해군 때문이 아닙니다.  오브리 시리즈의 주인공이자 뛰어난 뱃사람인 잭 오브리 함장조차도 전체 시리즈에서 여러차례에 걸쳐 배를 좌초시키거나 폭풍에 휘말려 침몰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혼블로워(Hornblower)나 오브리-머투어린(Aubrey-Maturin) 시리즈와 같은 해양 소설에는 기본적으로 3가지의 투쟁이 모두 들어있다는 평이 있지요.  그 3가지 투쟁이란 이렇습니다.  외부와 고립된 환경에서의 자기 자신과의 투쟁, 동료 선원들이나 적과 같은 인간과의 투쟁, 그리고 바로 바다라는 자연과의 투쟁입니다.  

 

넬슨은 고립된 함대 내에서는 그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절대 권력자이지만, 반면에 그 모든 판단과 책임을 혼자서 지고 가야 했다는 점에서 그 누구보다도 내면의 투쟁에 시달린 사람입니다.  엠마와의 축복된 관계를 인정받기 위한 노력, 그러기 위해 빌뇌브를 유인하여 잡아내야 한다는 압박감, 빌뇌브를 놓쳤을 때의 자책감 등등 친한 부하들과도 나눌 수 없어 혼자서 삭여야 했던 갈등이 많았지요. 

 

 약 6시간 동안 진행된 트라팔가 해전은 인간과 인간 사이의 투쟁을 정말 잔혹하게 폭발시킨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인간과의 투쟁' 부분만을 주목하고 기억합니다.  하지만, 고된 싸움을 끝내고 동료와 넬슨의 죽음을 슬퍼하던 영국 함대는 물론이고, 영국 해군에게 항복하여 풀이 죽어 있던 프랑스-스페인 연합 함대조차도 아직 한번 더, 훨씬 더 무자비하고 위험한 상대와의 싸움을 치루어야 했습니다.   바로 바다와의 싸움이었습니다.

바다에서 배를 지휘하는 함장들은 항상 배나 선원들의 상태 못지 않게 날씨의 향방에 많은 신경을 쓸 수 밖에 없습니다.  트라팔가 해전과 같은 거사를 앞둔 상태에서도, 넬슨 역시 날씨 변화의 향방을 계속 신경쓰고 있었습니다.  당시 함장들에게는 위성사진에 의한 제대로 된 일기예보 같은 것은 없었습니다만, 간단한 액체 기압계를 선실에 두고 기초적인 날씨 변화를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덕분에 넬슨은 트라팔가 해전이 시작되던 당일 아침, 저녁 무렵이면 폭풍이 불어닥칠 것이라고 예상했고, 전투가 종료되면 전 함대에게 닻을 내리라고 명령을 해둔 바가 있었습니다.  또, 치명적인 부상을 입고 죽어가면서 남긴 많은 말 중에는, '꼭 닻을 내리라고 전해라'는 말도 있었습니다.




(이건 복원된 빅토리 호의 닻입니다만, 당시 빅토리 호의 경우는 프랑스 넵튠에게 포격을 받을 때 이걸 날려 먹었습니다.)



전투를 겪지 않아 돛과 닻, 그리고 수병들이 모두 온전한 전함조차도, 거센 폭풍이 불어오면 파선당하지 않기 위해서 온갖 고생을 다 해야 했습니다.  평상시에는 수병들은 2교대로 돌아가며 쉴 수 있었으나, 이런 폭풍 상황에서는 쉰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었습니다.  함장조차 차가운 바람과 파도에 그대로 노출된 채 흠뻑 젖은 옷차림으로 24시간 이상을 갑판에서 보내는 경우도 많았으니까요.  

 

 난파를 막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파도의 방향과 크기 등을 살피면서 그런 파도들을 뱃머리로 타고 넘도록 돛과 키를 잘 조정해야 했는데, 이것도 대단한 기술과 숙련도를 요구하는 일이었습니다.  까딱 잘못하여 이런 파도를 배 옆면으로 받았다가는 배가 뒤집히거나 용골이 부러지면서 한순간에 난파 (foundering) 당하는 것도 가능했습니다.  그런데, 트라팔가 해전에서 살아남은 전함들은 이런 폭풍을 부러진 돛대와 잘려나간 삭구들, 그리고 전투로 인해 대폭 줄어든 선원들만으로 이겨내야 했습니다. 

이럴 때 가장 좋은 대책은 닻을 내리는 것이었습니다.  닻이 바닥에 고정될 수 있는 비교적 낮은 수심에 전함이 위치해 있었다면요.  특히 영국 함대에게는 닻을 내려야 할 이유가 있었습니다.  폭풍의 방향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불어오는 것이었는데, 당시 영국 함대의 동쪽에는 적국인 스페인 땅이 살짝 불편할 정도로 가까이 있었거든요.  사실 동쪽이 스페인 땅이 아니라 고국인 영국 땅이라고 해도 위험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폭풍이 전함들을 가볍게 동쪽으로 몰아붙여 해안가에 좌초시킬 수 있었으니까요.  그래서 넬슨은 전투 종료 직후에는 닻을 내리라고 지시했던 것입니다.




(육지에 가까운 곳에서 폭풍을 만났을 때는 차라리 저렇게 이물쪽에 닻을 넉넉한 길이로 던져 놓고 파도에 배를 맡기는 것이 가장 안전한 방법일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사리에 맞고, 더군다나 하늘과도 같은 넬슨의 유언인데, 과연 영국 함대는 전투 종료 후에 닻을 내렸을까요 ?  안 내렸습니다 !  하긴 넬슨의 유언 중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던 '내 여자 엠마에게 충분한 연금을 보장해다오'라는 말조차 '마치 아무도 그런 말 들은 적 없다'는 듯이 가볍게 개무시되어 버리는 마당인데, 그런 사소한 항해 실무 판단은 이제 넬슨의 사후 전체 지휘권을 넘겨 받은 콜링우드가 내리는 것이 맞았겠지요.  그리고 콜링우드는 넬슨의 유언에도 불구하고 닻을 내리지 않기로 결정했던 것입니다. 

콜링우드가 닻을 내리지 않은 것도 다 사정이 있어서였습니다.  많은 함선들이 치열한 포격전 속에서 닻을 잃었던 것입니다.  또 닻이 남아 있던 전함들도 차라리 파도를 타며 폭풍을 이겨 내기 위해서는 배를 움직일 공간이 넓은 편이 낫겠다고 판단했습니다.  아무튼 영국 함대는 정말 놀라운 투지와 기술을 발휘하여, 단 한 척의 배도 잃지 않고 무려 1주일이나 계속된 이 거센 폭풍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인력면에서나 함체의 상태면에서나 최악의 상황이었던 나포 전함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가장 심한 손상을 입었던 전함인 르두터블과 뷔생토르는 결국 침몰하고야 말았습니다.  이때 많은 프랑스 포로들이 영국 수병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희생되어야 했던 것은 물론이었지요.  스페인 전함 알게시라스 (Algesiras) 호의 경우는 그나마 좀 해피 엔딩에 속했습니다. 

 

거센 폭풍 속에서 제한된 인원으로 도저히 배의 조종이 어렵게 되자, 나포조로 승선했던 수십명의 영국 수병들은 결국 갑판 밑에 가둬두었던 스페인 선원들을 석방할 수 밖에 없었고, 이들은 당연히 영국 수병들을 제압하고 배를 몰아 카디즈 항구로 무사히 도주했습니다.  하지만 훈훈하게도, 스페인 당국은 이렇게 감시병의 입장에서 포로로 전락해버린 영국 수병들을 폭풍이 끝난 뒤 영국 함대에게로 석방해주는 아량을 베풀어주었습니다. 




(트라팔가 해전 이후 불어온 폭풍을 그린 그림입니다만, 저렇게 전함들이 오밀조밀 붙어 있는 상태에서 폭풍이 밀어닥친다면 전함들끼리 부딪혀서 계란처럼 깨질 것이 뻔했습니다.  실제로는 각 전함들은 바람이 거세지면 서로 멀찍이 떨어져 공간을 확보합니다.)



알고보면 스페인은 영국과의 감정이 그렇게까지 나쁜 편은 아니었습니다.  어디까지나 스페인은 나폴레옹에게 코가 꿰여 괜히 원치 않는 전쟁에 말려든 것이니까요.  믿을 만한 이야기인지는 모르겠으나 이런 이야기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뒤마누아르 제독이 지휘하는 프랑스 함대 선두 분대가 2시간 만에 선회하여, 영국 함대에게 포격을 퍼부었는데, 그때 이미 항복한 스페인 전함에게도 포격을 가했다고 합니다. 

 

그것을 보고 격노한 스페인 수병들이, 자신들을 포로로 잡은 영국 해군 나포조에게 '자신들에게 대포를 맡겨달라, 저 프랑스 놈들에게 포격을 하고 싶다' 라고 간청을 했다는 것입니다.  

 

또 나폴레옹이 '빌뇌브 대신 이 사람이 프랑스 제독이었다면' 하고 칭찬했다는 그라니바(Gravina) 제독은 이 트라팔가 해전에서 간신히 포로가 되는 것을 면하기는 했지만, 그 전투에서 얻은 부상이 악화되어 결국 다음 해 3월에 49세의 나이로 죽었는데, 그때의 유언이 '나는 죽지만 행복하게 죽는다... 바라고 믿건대 나는 이제 세계 최고의 영웅 넬슨과 만나러 가기 때문이지' 뭐 그런 식의 약간 닭살 돋는 대사였다고 합니다.  자신에게, 그리고 자신의 조국에게 이토록 치욕적인 대패를 안겨준 적장에 대한 감정치고는 상당히... 좀 그렇습니다.




(이분이 바로 그라비나 제독입니다.  미국 독립 전쟁에도 참여했었던 경험많고 능력있는 해군 장교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영국 함대가 싸워야 했던 것은 폭풍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이런 폭풍 속에서라면 영국 해군도 혼이 반쯤 나간 상태일 것이라고 판단한 연합 함대의 잔존 세력이 반격을 해온 것입니다.  원래 33척의 전함 중 탈출하여 카디즈로 입항한 것은 11척에 불과했는데, 그나마 항구에서 조사를 해보니 다시 바다로 나갈만 한 상태라고 판정을 받은 것은 5척에 불과했습니다. 

 

포로로 잡힌 빌뇌브를 제외하고 가장 높은 계급이었던 그라비나 제독은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치명적인 부상을 입은 상태였으므로, 연합 함대의 지휘권은 치열한 전투를 벌인 뒤에도 무사히 탈출 작전을 성공시킨 전함 플루통 (Pluton)의 함장인 코마오 (Julien Cosmao)에게 넘어갔습니다. 

 

코마오 함장은 전투 2일 뒤인 10월 23일, 과감하게 이 전함 5척 전부와 프리깃함 5척을 다 이끌고 출격, 영국 함대에게 그야말로 폭풍 속에 도전을 했습니다.   하지만 거센 폭풍 속에서는 도전한 측이나 이를 막아선 측이나 정상적인 포격전을 벌일 형편이 전혀 아니었습니다. 

 

양측이 폭풍 속에서 어쩔 줄을 모르고 우왕좌왕할 때, 작은 프랑스 프리깃함들이 성과를 올렸습니다.  이들이 나포되었던 스페인 전함 2척, 즉 산타아나와 넵튜노에 승선하여 스페인 포로들을 석방하고 배를 다시 되찾은 것이었습니다. 




(프랑스 프리깃함 Themis 호가 되찾은 스페인 전함 산타아나 호를 밧줄로 묶어 견인하고 있는 장면입니다.  산타아나는 돛대가 다 부러졌거든요.)



하지만 역시 이런 거친 폭풍 속에 미숙한 수병들을 데리고 출격을 한 것은 그다지 현명한 선택은 아니었습니다.  천신만고 끝에 되찾은 넵튜노는 그만 난파되어 침몰해버렸고, 카디즈에서 재출격한 5척의 전함 중 하나였던 엥동터블(Indomptable)까지 그만 폭풍 속에 침몰해버렸던 것입니다.  이때 엥동터블에 승선했던 1,200명의 수병 중 겨우 100명 정도만 구조되었고, 나머지는 하릴없이 물고기 밥이 되고 말았습니다. 

 

 또 산 프란시스코 드 아이스(San Francisco de Asis)는 해안가에 좌초되어 버렸고, 라요(Rayo)는 폭풍 속에서 돛대를 잃고 닻을 내렸다가, 결국 지브랄타에서 돌아오던 영국 전함 도네갈 (HMS Donegal) 호에게 나포되었다가 결국 좌초하고 말았습니다. 

 

게다가, 폭풍과 코마오의 도전 속에서 잠깐 탈출했던 에글(Aigle)과 베르윅(Berwick)도 결국 침몰해버렸습니다.  결국 연합 함대의 재도전은 본전을 못찾은 적자 장사에 그치고 말았습니다.  이런 사건들 속에서 프랑스-스페인 수병은 물론이고, 이런 나포 전함들에 승선했던 영국 해군 나포조 수병들도 많이 희생되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생각지 못한 성과도 있긴 했습니다.  연합 함대가 재도전해오면 결국 나포전함들을 더 빼앗길 것이라고 염려한 콜링우드 제독이 산티시마 트리니다드를 비롯하여 손상 정도가 심했던 나포 전함들을 그냥 자침시켜버렸던 것입니다.  이로 인해, 나포된 전함들 21척 중에서 끝까지 살아남아 영국으로 갈 수 있었던 것은 고작 4척에 불과했습니다.




(바다는 무서운 것이어서, 바로 육지 옆에서 좌초를 한다고 해도 대부분의 선원들은 목숨을 잃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렇게 최종적으로 나포된 전함 숫자가 겨우 4척이라는 사실은, 자연스럽게 우리를 나포 포상금 문제로 끌고 갑니다.  전에 넬슨이 거뒀던 대승인 아부키르 해전에서의 나포 포상금이 얼마나 후했는지 보셨지요.  ( 아부키르 해전 - 에필로그  참조)  아부키르 해전보다 훨씬 더 큰 승리였던 트라팔가 해전의 결과로는 훨씬 더 큰 포상금이 내려졌을까요 ?  신기하게도, 트라팔가 해전의 나포 포상금에 대해서는 정보가 별로 많지 않습니다. 

 

예상보다는 훨씬 박한 포상금이 주어졌다는 이야기지요.  아마 그럴 법도 한 것이, 이 승전보와 함께 대륙에서 나폴레옹이 거둔 눈부신 승리들이 연달아 들어왔기 때문에, 영국 의회도 장교들과 수병들에게 옛다 기분이다 하면서 돈을 펑펑 쓸 처지가 아니었을 겁니다.  이제부터 대륙에서의 전쟁에 쓸 돈이 엄청나게 늘어날 상황이었을테니까요.

트라팔가 해전 이후 약 1년 반이 지난 시점인 1807년 3월 28일자 런던 가제트 (London Gazette) 지에 공고 하나가 난 것이 기록으로 남아 있는데, 이 공고에서는 트라팔가 해전에 참여했던 하급 간부(Petty Officers, 포술장, 부항해사 등등)들과 일반 수병에 대한 나포 포상금이 적혀 있습니다.  하급 간부들의 1인당 몫은 10파운드 14실링, 수병들은 1파운드 17실링 6펜스입니다.  이로부터 전체 나포 포상금이 얼마였는지를 대충 알 수 있습니다. 



(당시의 런던 가제트 지의 공고입니다. 맨 마지막 줄에 있는 크리스토퍼 쿡이라는 양반은 정부를 대행하여 그런 지불 업무를 맡았던 prize agent 의 이름입니다.  영국에서 금융이 발달한 것도 다 이유가 있습니다.  많은 업무를 민간에 위탁했거든요.)



하 급 간부들과 수병들은 각각 전체 포상금의 2/8 씩을 나누어 갖게 되어 있었고, 총 27척의 전열함과 6척의 프리깃, 슬룹 함에 탔던 수병 수가 17,346명이었습니다.  여기서 하급 간부들의 1인당 몫인 10.7파운드와 수병들의 1인당 몫인 1.875 파운드가 바로 이들의 머리수 비율을 말해 줍니다.  하급 간부들, 그러니까 보조 목공장, 군의관 조수, 해병 하사관 등은 전체 포상금의 1/8을, 그리고 수병들은 전체 포상금의 1/4을 나눠 갖게 되어 있었거든요. 

 

하급 간부 대 수병들의 머리수 비율은 10.7*2/1.875 = 11.4배 정도로 수병들이 많았던 것이지요.  이를 토대로 대충 전체 인원의 8%가 하급 간부이고 91%가 수병이라고 계산하면, 즉 전체 인원의 1%가 상급 간부라고 계산한다면, 전체 포상금은 약 120,000 파운드가 됩니다. 

 

 나포된 총 적함의 수가 4척이니까, 1척당 30,000 파운드를 쳐준 것입니다.  이는 당시 기준으로 볼 때 그저 표준적인 포상금이었습니다.   그러나 나포되어 최종적으로 영국 해군성에 인도된 전함의 수가 고작 4척이다 보니, 상대적으로 아부키르 해전 때에 비하면 너무 초라한 편이었습니다.  아부키르 해전 때는 다 부서져서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던 나포함조차도 척당 2만 파운드씩 포상금을 지불했던 것에 비하면 정말 짠돌이 포상금인 셈이지요.



(목숨을 건 댓가는 의외로 저렴했습니다.  대부분의 트라팔가의 영웅들에게 주어진 것은 저 1쉴링 짜리 은화 37.5개였지요.  1787년에 주조된 조지 3세의 1실링짜리 은화입니다.)



씁쓸한 이야기는 그 뿐만이 아닙니다.  이 공고에서 밝히는 바는, 이 포상금을 Clements Inn 이라는 여관에서 3일간 지불할 예정이니 받아가라는 것과 함께, 이때 못받아가더라도 3개월간은 유예 기간을 두겠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3개월이라니요 ?  아마 트라팔가에서 살아남은 대부분의 수병들은 당시 또 군함을 타고 어느 먼 바다에서 복역... 아니 복무 중이었을텐데, 3개월 동안에 받아가라는 것이 말이 됩니까 ? 

 

이때 3개월 안에 못 받아가는 수병들의 몫은 전상자들을 치료해주는 그리니치 (Greenwich) 병원의 운영비로 몰수되게 되어 있었습니다.  물론 이런 행정 업무에 밝은 수병들이야 3개월 후에라도 그 돈의 환불을 청구할 수도 있었겠습니다만, 아마 그 사이에 거친 군함 생활 속에서 사고나 질병, 전투로 사망하는 사람도 많았을 것이고, 또 무식 때문에 (당시 대부분의 수병들은 문맹이었지요) 그렇게 자신의 몫을 복잡한 행정 절차를 거쳐 찾아가는 사람이 몇이나 되었을까 의심스럽습니다.

함장들의 경우는 어땠을까요 ?  이런 식으로 계산이 되면 함장들도 1인당 고작 900 파운드 정도 밖에 못 받았습니다.  하지만 함장들이야 이미 지배계급에 있는 사람들이다보니, 의회에서 이런저런 특별 포상 같은 것을 해줬나 봅니다. 

 

가령 산티시마 트리니다드의 항복을 받아내려다가 고작 64문짜리 작은 전함이라는 이유로 쫓겨나는 굴욕을 당했던 HMS Africa의 함장 딕비 (Henry Digby)는 트라팔가 포상금 973 파운드에 (제 계산대로라면 900 파운드인데, 어딘가 계산에 구멍이 있었나봐요) 특별 정부 포상금 2389 파운드 7실링 6펜스를 따로 더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금의 가격을 기준으로 현재 가치를 대충 환산해보면, 딕비 함장의 경우 혼자서 약 10억원을, 수병들은 1인당 약 55만8천원을 받은 셈입니다.  아무튼 있는 놈들은 있는 놈들끼리 해먹는 법입니다.  좀 씁쓸한 이야기지요.




(아프리카의 함장이었던 딕비는 트라팔가 해전 이전에도 나포 포상금 측면에서는 상당히 운이 좋은 편이어서, 많은 돈을 벌었습니다.  그는 적함을 나포할 경우, 그것이 처분되어 정식으로 포상금이 나오기를 기다리지 않고, 장교들과 선원들에게 자기 돈으로 미리 포상금을 지불하는 하는 배포와 재력이 있었다고 합니다.  아마도 하늘은 이렇게 아량있는 사람에게 더 큰 복을 내리는지 1799년 스페인 프리깃함 Santa Brigida 호를 나포하는 행운을 내렸습니다.  여기에는 무려 스페인 달러 은화가 140만개나 실려 있었기 때문에, 선체 가격을 빼고서라도 그 개인의 몫만도 무려 4만 파운드에 달했다고 합니다.)




(이것이 Santa Brigida 호에 잔뜩 실려 있었다는 piece of eight, 스페인어로는 real de a ocho, 즉 스페인 달러 은화입니다.)



하지만 이런 불행 중 가장 큰 불행은 바로 넬슨의 연인이자, 어떻게 보면 이 트라팔가 해전이 벌어지게 된 간접적인 원인이 된 여인, 엠마 해밀턴에게 떨어졌습니다.  바로 넬슨의 죽음이었지요.  뿐만 아니었습니다.  넬슨은 그 유명한 '잉글랜드는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의무를...' 깃발을 올리기 전에, 빅토리 선실에서 여러 친우들과 상관들에게 마지막 편지를 쓰고 있었는데, 거기서도 다소 치졸하다 싶을 정도로 집요하게 '내가 혹시 죽더라도 엠마가 사회적 신분을 유지할 정도의 연금을 계속 지급해주기를 부탁한다' 라고 반복해서 썼다고 합니다. 

 

심지어 냄새나는 빅토리의 선창에서 죽어가면서 남긴 유언 중에도 그 엠마에 대한 풍족한 연금 이야기를 할 정도였습니다.  넬슨도 자신이 죽으면 엠마는 가식적이고 고리타분한 영국 상류 사회에서 배척받을 것이 뻔하니, 하다못해 돈이라도 충분히 있어야 고생 안하고 여생을 보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결과는 어땠을까요 ?




(트라팔가 해전 직전, 선실에서 편지를 쓰다 고뇌에 잠긴 넬슨... 그의 마음 속은 조국과 명예 외에도 엠마가 상당부분 차지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마치 넬슨의 그 간절하고도 반복된 부탁이 전혀 없었다는 듯이 모두들 행동했습니다.  넬슨의 공적에 대한 찬사가 끊임없이 쏟아졌고, 아무 한 일도 없는 넬슨의 형인 윌리엄 넬슨이 백작으로 봉작을 받고 곧이어 브론테 (Bronte) 공작령까지 상속받았습니다.  하지만 엠마는 마치 투명 인간 취급을 했습니다.  엠마는 순식간에 알거지로 전락해버렸습니다. 

 

원래 엠마는 예쁜 여자들이 흔히 그러듯이 (흔히 입니다... 다 그렇다는 것이 아닙니다) 허영심이 강하여 사치스러운 편이었고 결정적으로 도박을 즐겼습니다.  넬슨의 죽음과 함께 넬슨이 받던 봉급과 아부키르 해전의 공로로 주어진던 엄청난 액수의 연금도 매정하게 끊었졌는데도, 기존의 라이프 스타일을 그대로 유지했으니 거지가 되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지요. 

 

엠마는 손가락질보다도 더 무섭다는 무관심 속에서 신용불량자가 되어 빚 때문에 투옥되기도 했으며, 궁핍 속에 딸 호레이시아(Horatia)와 함께 살다가 1815년 전쟁이 끝나기 전 프랑스 칼레(Calais)에서 병사하고 맙니다.  호레이시아는 엠마가 죽은 이후, 영국으로 되돌아 왔는데, 넬슨의 누나들이 이 아이를 지극히 이뻐하며 잘 키워주었다고 합니다.




(호레이시아 넬슨입니다. )



한편, 이 해전의 주인공이었던 넬슨의 장례식 이야기를 안할 수 없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넬슨의 시체를 어떻게 영국까지 운구했는가에 대한 부분이지요.  원래 해전에서 발생한 전사자의 시체는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즉시 바다에 던져 버리는 것이 상식이었습니다. 

 

이유는 당장의 전투에 걸리적거리기 때문이었지요.  하지만 즉사한 것이 아니라서 일단 선창의 응급실로 내려갔다가 거기서 죽은 부상자들은 나중에 선장의 입회 하에, 수장을 시키는 것이 또한 전통이었습니다. 

 

이때는 모두 원래 돛을 만들기 위해 보관되었던 캔버스 천으로 시신을 감싸고, 발에 포탄 같은 무거운 것을 묶은 뒤 간단한 예배와 함께 바다에 던져 넣었습니다.  어찌 되었건, 함장이건 말단 수병이건, 모두 고향 땅에 묻히기는 어려웠습니다.  고향으로 돌아오는 몇개월 동안 시신이 부패하니까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요.  하지만 넬슨의 경우는 물론 특별했지요.




(바다에서는 이것이 정상입니다.)


 

(하지만 넬슨을 이렇게 보낼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습니까 ?)



흔히 알려져 있기로는 넬슨의 시체를 럼주에 담아왔는데, 그 시체 담은 술통의 럼을 수병들이 몰래 뽑아 마셨다고들 하지요.  그러나 이건 물론 사실이 아닙니다.  일단 넬슨의 시신은 럼이 아니라 브랜디(brandy)에 담아서 보관되었고, 그 브랜디에는 몰약(myrrh)과 장뇌(camphor)를 넣었기 때문에, 사람이 마실만 한 물건이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넬슨의 시신을 담은 통은 빅토리 호의 돛대에 묶여 있었고, 또 그 앞에는 해병대원이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리 영국 수병들이 술 앞에서는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고 해도 거기서 술을 뽑아 마신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일단 넬슨의 시체를 선창에 잔뜩 보관된 흔한 럼으로 보존하지 않고, 브랜디로 했다는 것에서부터, 부하 장교들이 넬슨에 대해 어느 정도의 존경심을 보인 것인지 알 수 있습니다. 

 

사탕수수 찌꺼기로 만드는 값싼 술인 럼에 비해, 브랜디는 포도주를 증류하여 만드는 것이라서 비싼 술이었거든요.  당연히 브랜디는 배급품이 아니라 장교들이 개인 돈으로 장만한 개인 물품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영국 함대의 장교들은 제독님을 싸구려 럼주에 모실 수는 없으니 자신들 개인 소유의 브랜디라도 내놓는 성의를 보여야 한다고 느꼈던 모양입니다. 

 

아마도 넬슨의 시체를 담을 정도의 큰 통을 가득 채우려면, 빅토리 호의 장교들 뿐만 아니라 전체 함대 장교들의 브랜디를 모두 모아야 했을 것입니다.  넬슨의 시신은 빅토리에 실려 일단 가까운 지브랄타로 옮겨졌고, 거기서 속을 납으로 입힌 관에 옮긴 후, 역시 와인 증류주 (그라빠 같은 비숙성 브랜디)를 채워 영국으로 보내졌습니다. 




(정작 '넬슨의 피'라는 칵테일은 럼도 브랜디도 아닌, 포트 와인과 샴페인으로 만듭니다.  아무래도 피 색깔을 내려면...)



빅토리에 이렇게 실려온 넬슨은 복잡한 과정을 거친 뒤, 결국 성 바울 대성당 (St. Paul's Cathedral)에서 정말 장엄한 장례식을 치루었습니다.  이곳에는 나중에 동료였던 콜링우드 제독이나 웰링턴 공작, 그리고 윈스턴 처칠까지도 묻히는 곳이지요.  아마도 넬슨 본인은 그런 장례식보다는 엠마에게 연금을 주기를 더 바랬을 것 같습니다. 

 

하긴, 장례식이라는 것이 원래 죽은 사람보다는 그 장례식을 치르는 살아있는 사람들의 체면을 위한 것이긴 하지요.  넬슨은 평소 원하던 것처럼, 아부키르 해전에서 건져낸 나폴레옹의 기함 오리앙 호의 돛대로 만든 관에 안치되었습니다.  그의 장례식에는 32명의 제독과 100명 이상의 함장들, 그리고 1만명의 병사 및 수병들이 참석했습니다. 

 

 장례식에서 그의 관을 덮었던 국기는 원래 그의 무덤에 함께 넣어져야 했으나, 그 일을 맡은 수병들이 조각조각 내어 기념품으로 나누어 가졌다고 합니다.  삼국지연의에도 관우의 갑옷은 오나라의 군졸들이 다들 한조각이라도 가지고 싶어하는 바람에 산산조각 났다고 하던데, 동양이나 서양이나 그런 점에서는 비슷한가 봅니다.




(원래 영웅은 살아서보다 죽어서 더 빛나는 법이지요.)



이제 좀 행복하고 훈훈한 이야기를 해볼까요 ?  당시 장교들에게는 포상금도 중요했지만 그보다 더 간절했던 것이 바로 승진이있습니다.  이런 대승이 있었으니 당연히 줄줄이 승진이 있었습니다 !  보통 이런 승전이 있을 경우 가장 큰 혜택을 보는 사람은 함장이 아닌 선임 사관(the 1st lieutenant)이었습니다. 

 

가문의 연줄이 없을 경우 많은 사관(lieutenant)들은 그냥 평생 늙은 사관으로 지내다가 군대 생활 종치는 것이 보통이었거든요.  나이가 차면 찰 수록 3rd lieutenant가 2nd가 되고, 결국 1st lieutenant가 되는 것은 어렵지 않았으나, 사관급 계급에서 함장급(commander 또는 post captain)으로 넘어가는 것은 정말 가문의 연줄이 대단하든가, 아니면 빛나는 전공을 세우던가 해야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영국 해군의 우세가 너무 강하다보니, 해전 자체가 별로 안 벌어졌고 전공을 세울 기회도 별로 없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간만에 벌어진 대해전과, 그리고 이토록 철저한 승리는 정말 가뭄 끝에 내리는 단비 같은 것이었습니다.

더군다나, 이번 승전을 치하하기 위해 해군성은 모든 배의 선임 사관들을 평상시처럼 준함장(commander)으로 승진시킨 것이 아니라, 아예 정식 함장 (post captain)으로 사실상 2계급 승진을 시켜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 유명한 넬슨의 '잉글랜드는 모든...' 깃발을 올렸던 신호 장교 파스코 (John Pasco)는 침울함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원래 그는 빅토리의 선임 사관이었으나, 넬슨은 보통 전투 직전에 그 군함의 선임 사관을 신호 장교로 임시 보직 전환하는 버릇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는 기함이라는 특성상 기인한 일이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개 그 선임 사관들은 별 불만이 없었습니다. 

 

넬슨은 그로 인해 신호 장교 노릇을 한 선임 사관이 정당한 자기 몫의 승진에서 누락되지 않도록 자신의 영향력을 발휘하여 챙겨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 넬슨이 죽어버리고 나니, 파스코의 신세도 엠마와 하등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챙겨줄 제독이 없으니, 그는 이 천금같은 기회에 정식 함장으로의 승진을 하지 못했던 것이지요.  물론 그도 나중에 결국 제독까지 승진하기는 했습니다만, 이때 잃어버린 수년간의 선임 호봉은 영영 찾을 수 없었지요.




(이 사람이 존 파스코이고, 바로 트라팔가 해전 당시인 1805년의 모습입니다.  그래도 이 양반은 당시 얻은 부상으로 인해 250 파운드의 연금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넬슨의 장례식에서 넬슨의 관을 운구하는 팀의 일원으로 뽑히는 영광도 누렸고, (늦기는 했지만) 결국 제독의 계급까지 오릅니다.)



대개의 경우 함장에게 돌아오는 몫은 포상금과 명예 외에는 별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습니다.  아부키르 해전 때처럼 포상금을 펑펑 나눠주지 못하다보니, 대신 본보기로 함장들 두어 명을 파격적으로 제독으로 승진시켜 주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좀 말썽이 생깁니다.

여러분들께서는 트라팔가 해전에서 여러 전함의 함장들 중 누구의 공로가 가장 크다고 생각하십니까 ?  빅토리의 함장 하디 (Thomas Masterman Hardy) ?  로열 소브린 호의 함장 로더람 (Edward Rotheram) ?  이제 넬슨이 죽었으니 전체 함대의 전투 보고서를 쓸 사람은 바로 콜링우드 제독이었고, 보통 이런 경우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가장 가깝게 지냈던 자신의 기함의 함장이 가장 돋보이도록 보고서를 써주는 것이 상식이었습니다. 

 

그러나 콜링우드는 그 훨씬 전부터, 자신의 기함의 함장인 로더람을 '고집만 센 멍청이' 정도로 생각했고 사이도 좋지 않았습니다.  콜링우드가 집어낸 이 해전의 제1 영웅은 바로 테메레르의 함장 엘리압 하비(Eliab Harvey)였습니다. 




(말이 쉬워서 그렇지 한번에 2척의 적함을 나포한다는 것은 정말 실력 뿐만 아니라 운도 받쳐줘야 할 수 있는 위업입니다.  그것을 해낸 트라팔가의 용자 엘리아 하비 함장입니다.)



사실 제가 보더라도, 하비 함장의 공로가 제일 커보이기는 합니다.  빅토리와 로열 소브린 이 두 척의 초기 활약이 돋보이기는 했으나, 로더람은 멍청이라니까 그렇다치고, 빅토리는 결국 어느 한척의 군함도 나포하지 못했고 더구나 불과 74문짜리 르두터블에게 거의 '질 뻔한' 꼴불견을 보였지요.  그에 비해 빅토리를 구해내고 게다가 혼자서 2척이나 나포해낸 테메레르의 하비 함장이 돋보인 것은 무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넬슨의 부하 함장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나 봅니다.  이유는 아무래도 하비 함장은 넬슨의 밑에 들어온지 얼마 안되는 '굴러들어온 돌'이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게다가 그는 젊은 나이에 아버지와 형의 유산과 하원의원직을 물려 받아 매우 부자인데다 연줄도 많았고, 게다가 방탕한 생활을 하느라 동료 함장들과는 그다지 친밀한 관계를 맺지 못했던, 아니 안 맺었던 것입니다. 

 

원래 학교에 새로 전학생이 왔는데, 얼굴도 잘 생겼고 집안도 좋은 부자집 애이지만 성격에 모가 나서 건방지고 재수없게 굴었는데, 중간 고사를 보고 나니 전교 1등까지 해먹더라 하면 주위의 질시를 받을 수 밖에 없지 않습니까 ?  군인은 전공으로 말한다고, 하비 함장의 빛나는 전공에 대해서는 다른 함장들도 할말이 별로 없었지만, 그렇다고 넬슨 밑에 복무한지 얼마되지도 않은 하비가 넬슨의 장례식에서 넬슨의 관을 운구하는 몇 안되는 사람으로 뽑혔을 때는 정말 원성이 자자했다고 합니다. 




(하비 가문에서 설립한 Harvey Grammar School의 문장입니다.  저 Temeraire 와 Redoutable et Fougueux 라는 글자가 보이세요 ?  진짜 재수없지 않습니까 ?)



이렇게 하비가 욕을 처먹은 것은 그의 됨됨이가 정말 재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는 트라팔가에서의 자신의 용맹과 활약에 대해서 전혀 겸손하지 않게 마구 떠벌이고 다녔고, 자기 가문의 모토를 재수없게도 'Redoubtable et Fougueux' (용맹하고 불같이)로 불어로 새로 정했습니다.  바로 자기가 좌현과 우현에서 한꺼번에 나포한 프랑스 전함들의 이름이었지요.  자기 PR이 중요하다고는 하지만 하비는 그것이 좀 심했나 봅니다. 

 

하지만 그런 PR이 해군성에는 통했는지, 그는 그해 11월, 정말 각별하게도 일개 함장에서 제독으로 특진하게 됩니다.  당시 제독이라는 계급은 전과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연공 서열에 의해서만 진급할 수 있는 것이었거든요.  그래서 아무리 무능하다고 찍힌 함장이라도 명줄만 질기다면 결국 (물론 명칭 뿐이라서 실제 보직은 못받는다고 하더라도) 제독의 지위에 올라갈 수는 있었습니다. 

 

심지어 넬슨조차도 39세라는 젊은 나이에 1797년에 제독으로 진급할 수 있었던 것은 세인트 빈센트 (St. Vincent) 해전에서의 공적 때문이 아니라, 그저 연공서열의 순서상 된 것이었습니다.   넬슨은 해군 함장이었던 삼촌의 빽에 힘입어 1777년에 19살의 나이로 일찍 정식 임관을 할 수 있었거든요.  그런 점에서 하비의 출세는 정말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와 함께 제독으로 승진한 것은, 트라팔가 해전의 영광을 같이 했던 다른 함장이 아니라, 트라팔가에서 도망치던 뒤마누아르 (Dumanoir le Pelley) 제독의 4척의 전열함을 오르테가 (Ortega) 해전에서 모조리 사로잡은 임시 제독 (Commodore) 스트레이챈(Sir Richard Strachan)이었습니다. 

 

원래 스트레이챈은 원래 남작 가문이었고, 또 그 연줄로 이미 해병 대령 (colonel of marines)이 되어 있던 유복한 사람이었습니다.  전에도 설명한 바 있습니다만, 이 해병 대령이라는 계급은 실제로 해병들을 지휘하는 직위가 아니라 일종의 명예직으로서 아무 하는 일 없이 1년에 무려 2,000파운드의 연금만 받아 챙기는 꿀보직이었거든요.  다만 이 해병 대령이라는 보직은 제독으로 승진하면 내놓아야 하는 것었습니다. 

 

 그러나 그에 대한 보상인지, 영국 하원에서는 스트레이챈 제독에게 특별히 오트테가 해전의 공로에 대해 1년에 1,000 파운드의 연금을 별도 지급하기로 결의까지 해주었습니다.  정말 있는 놈들끼리 나랏돈을 나눠먹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인 모양입니다.




(스트레이챈 제독에게 연 1천 파운드의 연금을 안겨다 준 오르테가 해전입니다.)



아무튼 하비 함장, 아니 하비 제독의 끝은 뭐 그다지 영광스럽지는 못했습니다.  워낙 잘난체 하고 모난 성격이어서, 결국 상관과 말썽을 일으켰거든요.  불과 4년도 되지 않아서 벌어진 바스크 해역 해전 (Battle of the Basque Roads)에서 자기 대신 더 젊은 코크레인(Thomas Cochrane)이 투입된 것에 반발하여 상관인 갬비어 (James Gambier) 제독에게 심하게 대들었다가 결국 해군에서 전역해버리는 사태까지 겪었습니다.  1년 뒤 복직하기는 했습니다만, 그 후로는 전혀 현역으로는 뛰지 못했지요.

영국 쪽 이야기는 그렇다치고, 프랑스 측 인사들의 후일담은 어땠을까요 ?  아시다시피 연합 함대의 최고 지휘관인 빌뇌브(Pierre-Charles Villeneuve)는 별다른 부상도 입지 않은 채 무사히 (?) 영국 해군의 포로가 되어, 부상을 입고 항복한 르두터블의 루카 함장 등과 함께 영국으로 후송되었습니다. 

 

여기서 빌뇌브는 뭐 그리 나쁘지 않은 대접을 받았습니다.  감옥에 가두지도 않고, 일종의 가석방 상태로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었거든요.  그는 넬슨 제독의 장례식에도 손님으로 참석할 정도였습니다.  이 정도의 자유가 주어진 것은 다른 함장들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가령 오르테가 해전에서 포로가 된 뒤마누아르 제독은 티버튼(Tiverton)에 머물렀는데, 여름에는 저녁 8시, 겨울에는 오후 4시 전까지 성문 안으로 돌아오라는 제약 조건 외에는 아무런 감시도 붙지 않는 행동의 자유를 누렸습니다.  심지어 뒤마누아르는 트라팔가 해전에서의 자신의 행동 (선회하여 돌아오라는 빌뇌브의 명령을 한참동안이나 무시했고, 또 2시간만에 돌아와서는 별 전투도 하지 않고 그대로 도주한 행동)에 대해 비호의적으로 기사를 낸 타임즈 (The Times) 지에게 항의 서한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빌뇌브는 포로가 된지 2개월도 되기 전인 1805년 말에 프랑스로 석방될 수 있었습니다.  적 총사령관에 대한 일종의 예우였지요.  빌뇌브는 그렇게 돌아오는 길 어느 여관에서, 스스로에 대한 자책감으로 자살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이는 좀 말이 안되는 이야기입니다. 

 

그렇게 자책감에 자살할 인물이었다면 영국에서 자살했겠지요.  더군다나 넬슨의 장례식에 얼굴을 내밀지도 않았을 겁니다.  게다가 그는 프랑스로 돌아온 뒤 4개월이 훨씬 넘은 뒤에야 죽었습니다.  그는 돌아오자마자 다시 해군에 복직하려 할 정도로 약간 뻔뻔스러운 인물이었습니다. 

 

그런 사람이 자살을 한다 ?  그건 아니지요.  그는 렌느(Rennes) 지방의 어느 호텔, 정확하게는 Hotel de la Patrie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는데, 발견 당시 그의 왼쪽 폐에 무려 6번의 자상, 그리고 심장에 1번의 자상을 입은 채였습니다.  자살치고는 매우 이상한 상처였습니다만, 아무튼 프랑스에서는 그의 자살이 공식 보도되었고, 영국 신문들은 나폴레옹의 비밀 경찰이 그를 암살한 것이 틀림없다는 식으로 비아냥거리는 기사를 냈다고 합니다.

뒤마누아르 제독의 경우는 석방이 좀 늦어서 1809년에야 귀국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한건도 아니고 2건의 군법회의였습니다.  하나는 트라팔가 해전에서의 그의 행동, 나머지 하나는 오르테가 해전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은 해군 장관 드크레(Decres)에게 뒤마누아르에게 유죄 판결을 내리라고 압력을 넣었습니다만, 결국 같은 조직 내에서의 제 식구 감싸기는 요즘 우리나라나 19세기 프랑스 해군성이나 마찬가지였는지, 결국 뒤마누아르는 무죄 판결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 뒤에 뒤마누아르는 현역 보직을 받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왕정 복고 이후에도 살아남아 1819년 해군 중장 계급까지 올라가는 기염(?)을 토했습니다.




(당시 해군성 장관이던 드니 드크레(Denis Decres)입니다.  그는 나폴레옹의 이집트 침공 때 프리깃함들의 지휘를 맡았고, 말타 포위전 때 결국 영국 해군에 항복했습니다.  그러나 항복 전에 3척의 영국 전함을 상대로 무척 영웅적인 저항전을 보여주었으므로, 포로 교환 때 돌아와서 나폴레옹의 신임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다만, 그는 항상 부적합한 인물을 중용하는 선택을 했는데, 일설에 따르면 이는 그의 질투심 때문에 다른 사람이 큰 공을 세우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루카 함장이 중용되지 못한 것을 보면 그럴 듯한 이야기지요.)



프랑스 측에도 영웅이 있었습니다.  바로 르두터블의 함장 루카(Jean Jacques Etienne Lucas)였지요.  그는 영국에서 석방되어 돌아온 뒤, 나폴레옹에 의해 레종 도뇌르 훈장을 받는 등 패전 속의 영웅 대접을 톡톡히 받았습니다.  그러나 아무래도 패장으로 포로가 되었다가 돌아온 함장을 제독으로 승진시킬 수는 없었나 봅니다.  그는 위에서 언급된 1809년의 바스크 해역 해전 (Battle of the Basque Roads)에서도 전함 레굴루(Regulus)의 함장으로 있었습니다. 

 

이 전투에서 항구에 정박한 프랑스 전함들을 화공선(fireship)으로 공격해오는 영국 해군에 저항하여, 루카 함장은 다시 한번 영웅적인 저항을 보여 줍니다.  만약 이 전투에 코크레인 대신 정말 하비가 투입되었다면 하비와 루카는 2번째로 맞부딪히는 셈이 되었을 것입니다. 

 

아무튼 여기서 루카는 좌초된 레굴루 호를 지휘하여 결국 영국 해군의 4차례에 걸친 공격을 격퇴시켰고, 결국 레굴루 호를 다시 바다에 띄우는데 성공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카가 제독이 되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아마 전투에서는 용감했어도, 군대 생활은 그다지 원활하게 해내지 못했나 봅니다.  

 

그는 1815년 나폴레옹이 백일천하를 일으켰을 때, 나폴레옹 편에 붙었다가 결국 최종적인 왕정복고와 함께 해군에서 강제 퇴역해야 했고, 불과 4년 뒤인 1819년에 55세라는 비교적 젊은 나이에 사망했습니다.




(크게 기울어진 배가 바로 루카 함장의 레굴루 호입니다.  이렇게 배가 좌초되어 포구가 높은 곳을 향하는 바람에 접근하는 영국 해군 보트를 향해 포격을 할 수 없게 되자, 루카 함장은 함체에 새로 구멍을 뚫어 대포를 쏘는 기지를 발휘했습니다.  정말 대단한 사람 같아요.)



제가 간추린 이야기도 그렇습니다만, 이런 역사, 특히 전쟁사 이야기는 필연적으로 영웅들의 이야기로 그려지기 쉽상입니다.  하지만 제 이야기를 읽으시면서 느끼셨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역사는 한두명의 영웅들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가령 1805년 10월 21일 당시, 빌뇌브가 영국 함대의 지휘관이었고 넬슨이 연합 함대의 지휘관이었다고 해서, 당일 전투의 승패가 바뀌지는 않았을 겁니다. 

 

기본적으로, 트라팔가 해전 승리의 주역은 무식하고, 욕지꺼리를 입에 달고 살고, 입대 이유는 애국심이 아니라 강제로 끌려온 (press된) 것 뿐인, 그렇고 그런 평범한 영국 수병들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에게 주어진 보상이 고작 1인당 55만 8천원이라는 점, 그나마 대부분 주는 흉내만 냈을 뿐이라는 점도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결국 역사의 주역인 민중들은 이렇게 항상 푸대접 받는 법이라는 것이지요.  물론 넬슨의 업적을 비하해서는 안됩니다. 

 

 만약 빌뇌브가 영국 함대의 지휘관이었다면, 아마 이 날 해전의 결과는 그다지 결정적이지 않았을 가능성이 큽니다.  이는 피니스테라 해전에서 칼더 제독이 입증(?)을 해보인 바가 있지요.  넬슨의 업적은 영국 해군의 잠재력이 제대로 폭발하도록 이끌어냈다는 점이고, 사실 모든 지휘관이 그렇게 할 줄 아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넬슨이 정말 위대한 지휘관이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사실 이 해전은 19세기 전체의 역사를 좌우할 정도의 영향을 가집니다.  이 해전은 너무나도 결정적인 전과를 내놓았기 때문에, 이 이후로 근 100년간, 영국 해군의 제해권은 그 어느 누구도 부정할 수 없었으니까요.  하나의 해전에서 이토록 큰 규모에서 이토록 철저한 승리를 거두어 역사의 향방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은, 이후 100년도 넘게 흐른 뒤인 제2차 세계대전의 미드웨이 해전이 벌어질 때까지 없었습니다.  (러일 전쟁 당시 도고 제독의 대한해협 해전이 있긴 했습니다만 그건 일본 이야기인데다 지역 분쟁에 불과하므로 무시.  그냥 패스.)




(꼭 일본군이 망해서가 아니라, 미드웨이 해전은 정말 극적이지요.  그래서 찰턴 헤스턴 주연의 영화로도 나왔습니다.)

세세하고 유익한 설명 감사합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봤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