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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에 달가듯이 2015. 1. 20. 22:40

육상과 수상교통발달사

 

 

 

 

1. 바퀴의 발명에서 자동 탈것까지 수메르인이 바퀴 달린 수레 처음 만들다

 

 

신석기시대 나무썰매를 만들어 짐을 운반하던 사람들은 보다 적은 힘으로 무거운 짐을 운반할 방법을 생각한 끝에 지면과 무거운 물건 사이에 넣는 굴대를 발명했다. 돌보다 강한 구리로 공구를 만들어 사용할 수 있게 된 청동기시대에 세 조각의 두꺼운 판자를 짜맞춰 연결대를 대고 구리못을 박아 만든 바퀴가 탄생했고, 이후 바퀴는 보다 가볍고 충격을 잘 흡수하면서 튼튼한 제품으로 발전되었다. 바퀴 달린 수레는 기원전 3천800년 경 수메르인들이 처음 만들었고, 이후 종교적인 의식이나 교역경제의 운송수단, 전쟁의 무기 등으로 사용되었다 전영선<한국자동차문화연구소장 kacime@kornet.net>

원시인들의 나무썰매(BC 7천년)

대형 석재를 굴대로 운반했다(BC 5천년)

BC 4천년에 바퀴를 발명했다

판자 조립형 바퀴(BC 3천500년)

스포크식 바퀴(BC 3천년)

수메르인이 쓰던 최초의 승용 수레(BC 3천500년)

수메르인이 쓰던 최초의 화물 운반용 수레

힉소스인이 쓰던 고대의 전차(BC 2천년)

4천년의 한국 역사 중 국토가 가장 광대했던 때는 기원전 2천년 경에 세운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서부터 삼국시대를 거처 발해국까지였다. 만주 전역을 포함한 광대한 나라를 이룩하고 번영을 누릴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고조선 중엽인 BC 1천년 경부터 수레와 배를 전쟁과 경제발전에 이용했기 때문이었다.

신라시대로 들어와서는 계급별로 수레를 구분해 다양하게 활용했고, 해상왕 장보고가 해양선을 만들어 삼면 바다와 멀리 동남아 바다까지 장악했을 만큼 우리나라의 수레와 배의 역사는 웅장했다. 이렇게 찬란했던 수레와 배의 문화가 쇠퇴한 것은 고려 중기부터 일어난 왕권과 권력쟁탈을 위한 잦은 내란, 몽고, 일본 등의 극심한 외침에 따른 폐쇄적인 정치 등의 이유로 교통을 외면했기 때문이라는 지적이다.

지금까지 나타난 역사적 기록과 유물에 의하면 우리 민족은 바퀴나 수레 또는 배를 직접 발명하지 못하고 그 제조기술과 사용법을 중국으로부터 이어받은 것으로 나타나 있다. 중국 역시 이들 육·수상 교통기구들을 인류문명의 발상지인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로부터 전해받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어 우리나라의 고대 교통사를 돌아보려면 이 나라들의 수레나 배의 발전과 전파과정을 빼놓을 수 없다.



수레의 시조 썰매, 바퀴의 원형 굴대

기원전 4천년 경 발명된 바퀴는 오늘날의 자동차를 탄생시킨 인간의 위대한 업적이다. 자동차에 대한 인류의 꿈은 바퀴를 발명하고 수레를 만들어 사용하면서부터 태동하기 시작했고, 바퀴는 세계를 가깝게 만들어 인류문명을 발전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러나 인간이 바퀴를 발명하기까지는 오랜 세월을 지나면서 여러 단계를 거쳐왔다. 시초에는 사람의 힘으로 물건을 운반했고, 다음으로 나무썰매를 만들어 이용하고, 가축을 길들여 사용하다가 좀더 지혜가 발달하면서 굴대(롤러)를 사용한 단계를 거쳐 바퀴가 발명되었다.

구석기시대의 인간들은 돌 무기나 나무토막으로 잡은 동물을 가족의 음식으로 이용하고, 그 가죽으로 옷을 만들기 위해 등에 지거나 끌고 집까지 운반했다. 또 물이 있고 따뜻하며 먹을 것이 많은 곳으로 이동할 때마다 필요한 모든 생활도구들을 인간이 힘으로 운반했다. 이 시대에도 개나 말, 소, 당나귀, 낙타 등 순한 동물들이 있었지만 훈련시켜 운반수단으로 사용할 만큼 지혜가 발달되지 못했다.

신석기시대로 넘어올 무렵에는 오랜 원시생활에서 얻은 경험으로 지혜가 발달되어 나무토막을 널판지처럼 엮거나 평평한 나무조각에 끈을 달아 그 뒤에 짐을 싣고 운반하는 썰매를 만들어 사용하기 시작했다. 기원전 7천년 경에 사용했던 썰매가 핀란드 북부의 단층 늪지대서 발견되어 구석기 말부터 인간이 썰매를 만들어 운반도구로 사용했음이 알려졌다. 이 썰매는 사람의 힘으로 운반하는 것보다는 쉬웠지만 무거운 짐을 싣고 멀리 가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인류가 동물을 사육하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5천년부터라고 한다. 처음에는 소, 양, 염소, 돼지를 기르다가 끈기 있고 힘이 강한 낙타, 노새, 말을 사육했다. 그 중에서 운반도구로 소와 말을 길들여 사용하면서 사람의 힘을 덜게 되었다. 동물들이 최초의 운송 동력으로 이용된 셈이다.

가축을 이용해 사람보다 많은 짐을 운반하고 사람이 타고 다닐 줄 알게 되었지만 더 많은 짐을 수송할 수 없게 되자 소나 말이 끄는 바퀴 없는 썰매를 발명해 사용했다. 이것은 평탄한 곳에서는 유용했지만 굴곡이 많은 험한 땅에서는 사용할 수 없고 멀리 갈 수도 없었다. 이러한 원시적인 썰매형 소달구지가 생긴 것이 기원전 6천년 경으로 신석기시대 초기였고, 유럽 북쪽 스칸디나비아 반도와 미국 북쪽 알래스카 지방에서 그 자취가 발견되었다.

어떻게 하면 이런 불편한 썰매보다 적은 힘으로 무거운 짐을 운반할 수 있을까 끊임없이 생각한 끝에 발명한 것이 굴대였다. 지면과 무거운 물건 사이에 둥근 통나무 굴대를 넣어 밀면 훨씬 적은 힘으로 짐을 운반할 수 있음을 알았다. 고고학자들은 이런 굴대를 기원전 5천년 경부터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 아시리아 사람들이 사용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집트나 아시리아 같은 고대왕국에서는 궁전이나 사원을 짓기 위해 거대한 돌이나 목재를 운반할 때 수많은 노예들로 하여금 커다란 바퀴 없는 수레를 끌게 했다. 그러나 인간의 지혜가 발달함에 따라 이 불편하고 힘든 썰매 밑에 둥근 굴대를 넣고 말과 소 또는 코끼리 같은 힘센 동물이 끌게 하면 쉽게 운반할 수 있음을 알았다.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인 신비의 피라밋을 만든 것도 굴대를 이용한 인간의 지혜였다.

BC 2천500년 경에 축조된 이집트의 피라밋은 1.5톤∼최대 20톤짜리 화강석 230만 개를 145m의 높이로 쌓아 올린 세계 최대의 석탑 무덤이다. 당시 사람들은 여러 개의 통나무 굴대 가운데에 구멍을 뚫고 긴 축을 끼운 다음 나무막대를 양쪽 통나무 굴대 축에 앞뒤로 연결해 굴대가 돌아가게 한 일종의 통나무 수레를 만들어 동물이 끌도록 함으로써 무거운 돌을 운반했다. 이때는 바퀴가 발명된 15년 후지만 당시의 원시적인 작은 바퀴로는 거대한 돌을 운반할 수레를 만들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굴대는 바퀴 발명 후에도 사용되었고, 무거운 돌을 쌓는 데는 지랫대도 이용되었다.

피라밋 축조를 위한 특수한 굴림대 말고 일반인들이 사용하던 굴대는 훨씬 손쉽게 무거운 물건들을 운반할 수 있었지만 지형이 험한 곳에서는 장애물 때문에 연속적으로 사용할 수 없었고 장거리 수송이 불가능해지자 좀더 편리한 굴대를 생각하게 됐다. 이것이 바퀴를 만들어낸 동기였다.



바퀴의 발명과 발전



공구의 발달은 생활도구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석기시대의 돌을 깎아 만든 공구는 날이 둔해 바퀴 같이 섬세한 것을 깎고 맞추기가 어려웠지만 기원전 4천500년 경부터 시작된 청동기시대는 인간의 문명을 크게 발전시켰다. 그 중 하나가 돌보다 강한 구리로 공구를 만들어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청동 도끼, 자귀, 칼, 끌 등 예리하고 단단한 공구는 나무로 필요한 생활도구를 훨씬 쉽고 정교하게 만들 수 있게 했다. 이러한 공구와 굴림대, 인간의 지혜가 바퀴를 발명토록 만들었다.

인류가 바퀴를 발명한 것은 청동기시대 초기로, 청동공구를 만들어 사용하던 시기다. 인류문명의 4대 발상지로 그 선두를 장식했던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이 만나는 삼각분지인 메소포타미아에 살던 수메르인들이 처음 바퀴를 발명했다고 한다.

최초의 바퀴는 커다란 둥근 통나무를 얇게 잘라 만든 것이 아니라 세 조각의 두꺼운 판자를 짜맞춰 연결대를 대고 구리못을 박아 만든 것이었다. 이런 바퀴는 BC 3천500년 메소포타미아의 우르(Ur)왕조 때 이미 사용되고 있었다. 이 나무바퀴는 두께 4.5cm, 무게 30∼70kg 정도로 오늘날의 소형차 타이어보다 훨씬 무거웠다. 톱을 만들 줄 몰랐던 청동기 초기라서 도끼, 자귀, 끌, 칼 등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크게 만들 수 없었다. 최근 이라크의 고대 수메르 지방에서 발견된 바퀴의 흔적은 BC 3천∼2천800년 경에 만든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수메르의 그림에도 판자조각 조립형 바퀴가 묘사되어 있다.

바퀴의 실용성이 인식되면서 원시적인 통나무바퀴의 결점을 보완하는 지혜가 발달했다. 충격을 해소하고 마모를 방지하기 위해 테두리에 두꺼운 동물가죽 띠를 둘렀고, BC 3천500년 경에는 견고한 바퀴를 만들기 위해 테두리에 청동못을 만들어 청동판을 입히는 기술로 발전했다.

이후 보다 가볍고 충격을 잘 흡수하면서 튼튼한 바퀴를 원한 결과 BC 3천년 경에는 스포크식 나무바퀴가 등장했다. 축대를 끼우는 허브인 중심의 바퀴통에 테두리 바퀴를 연결하고 지탱하는 2∼4개의 나무 스포크로 만든 바퀴다. 바깥쪽의 나무테는 몇 개로 나누었는데 둥글게 반달형으로 깎아 스포크 대에 끼어 조립한 다음 구리못으로 고정했다. 사용하다가 테두리가 마모되면 새 테두리로 바꾸어 바퀴의 수명을 연장했다. 이렇게 발전한 바퀴는 훨씬 가벼워진 데다가 충격을 잘 흡수하고 수명도 길었다.

바퀴의 보강소재는 구리에서 쇠로 발전했다. BC 3천700년 경 코카사스 산맥을 넘어 소아시아로 들어와 BC 1천900년 경 핫치(Hatti)왕국을 세운 시리아민족의 일파인 힛타이트족(Hittites)이 구리보다 강한 철을 BC 2천700년 경 발견해 철기시대를 열었고, 왕국을 세울 때 이들은 이미 전차와 철제 무기를 사용했다.

철기시대는 인류의 문명을 빠르게 발전시켜 온갖 도구를 만들어 사용했다. 그 중 톱의 발명은 바퀴를 혁명시켰다. 이전의 두꺼운 바퀴테를 보다 얇게 하고, 여러 개의 바퀴살, 허브인 바퀴통, 축인 굴대로 나누어 보다 정교하게 만든 후 이들을 쇠못으로 고정해 조립하고 쇠테를 입혀 더욱 가볍고 튼튼하게 만들었다.

BC 2천500년 경에 와서는 바퀴 자체의 회전 마찰로 생기는 바퀴통의 마모를 줄이기 위해 롤러 베어링까지 사용한 바퀴로 발전했다. 바퀴살은 무게와 충격을 줄였지만 굴대에 끼워져 회전하는 바퀴통이 쉽게 달아 바퀴가 부서지자 바퀴통 중심 내부에 작은 반원의 홈을 여러 개 판 다음 여기에 둥근 떡갈나무를 끼워 넣어 롤러 역할을 하도록 만들었다. 바로 지금의 베어링인데, 이로써 바퀴는 굴대를 마모시키지 않고 훨씬 더 잘 돌아가게 되었다. BC 2천400년 경에는 바퀴테뿐만 아니라 바퀴통 겉에도 철판을 둘러 씌워 더욱 견고하게 만들었다. 이런 바퀴 제조기술은 곧 소아시아에서 중국으로 전파되었다.



수메르인들의 수레

바퀴의 발명은 필연적으로 수레를 탄생시켰다. 수메르인들은 발명한 바퀴를 곧 수레에 달았다. 기원전 3천800년 경, 긴 축을 썰매 밑바닥에 고정시킨 다음 축의 양 끝에 바퀴를 끼우고 빠지지 않도록 나무 쐐기를 박아 만든 최초의 원시형 수레가 등장했다. 이 수레는 그 후 조금씩 편리하게 발전해 BC 3천500년 경에는 수메르족 상류층에서 사용되었음이 여러 유적에서 나타나고 있다.

수레를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이를 끌어줄 동력이 필요했다. 최초에는 동물을 수레의 동력으로 이용할 줄을 몰라 사람이 끌었으므로 초기의 원시형 수레는 크지 않았다. 이라크의 고대 도시국가 지역에서 발견된 상현문자 벽화에서 BC 3천500년 경으로 추정되는 4륜 수레가 처음 발견되었는데, 이 수레는 최초의 판자 조립형 바퀴를 썰매에 달아 사람밖에는 끌 수 없도록 만들어졌다.

스케이트 날처럼 손잡이가 앞쪽에서 위로 휘어지고 위가 날카롭게 솟아오른 지붕이 달린 상자형 차체로 만들어졌으며, 사방이 휘장으로 둘러쳐진 것을 보면 귀족들이 타던 승용수레로 추정된다. 같은 시기에 수메르인들은 4륜 수레와 함께 물건을 운반하는 2륜 수레도 만들어 사용하기 시작했다. 메소포타미아 지방에서 발굴된 벽화에 판자조립형 바퀴 두 개를 단 수레에 물건을 싣고 네 필의 말이 끄는 그림이 새겨진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시대가 흐르면서 수레를 이용한 경제활동 범위가 넓어지자 더 많은 물건을 운반하기 위해 수레가 커졌으므로 인간이 끌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래서 인간 대신 수레를 끌 수 있는 보다 강력한 힘을 가축에서 찾았다. 그것은 바로 BC 5천년 경부터 식용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염소 양 돼지 소 말 낙타 등인데, 가장 적합한 것이 소와 말, 낙타였다. 수레를 끌기 위해 힘이 강하며 빠르고 순한 동물로는 소나 말이 적합했고, 길들이기 힘든 말보다 유순한 소가 훨씬 힘이 세고 인내력이 강해 처음에는 소가 수레를 끌었다.

수레를 본격적으로 사용한 것은 BC 2천500년 경 이라크 동남부 유프라테스강 유역의 수메르족이 세운 우르(Ur)왕조 때부터였다. 이 시대는 네 바퀴와 두 바퀴 수레가 사용되었는데, 이들 사이에는 계급이 구분되어 네 바퀴 수레는 왕이나 귀족용, 두 바퀴 수레는 화물운반용으로 사용되었다.

BC 2천년 경부터는 전투용 전차가 개발되어 전쟁의 중요한 무기로 사용되었다. 메소포타미아에서는 가벼운 스포크식 바퀴를 두 개 단 2륜 전차에 두 사람의 전사가 타고 전장을 달리면서 한 병사는 달리는 두 필의 말을 조종하고 나머지 한 병사는 적을 향해 활을 쏘는 장면이 조각된 벽화가 발견됐다. 말이 끄는 가볍고 빠른 2륜 수레는 평화시에는 수렵용으로도 사용했다. 전차를 많이 사용할수록 막강한 왕국을 세울 수 있었고 전차가 없으면 패망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고대 왕국에서는 전차의 위력이 대단했다.

BC 1천750년 경에는 유라시아(시리아) 초원에 살던 힉소스(Hyksos)족이 전차와 말로 이집트를 침입했을 때 이 전차를 본 이집트인들이 그 후 전차를 많이 만들어 BC 1천550년 경 힛타이트와 아시리아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일도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이집트에서 발견된 고대벽화에 그려진 전투 장면을 통해 알 수 있다.

속도가 필요한 승용 수레와 전차의 등장은 동력원 역시 소에서 빠른 말로 바꾸어 놓았다. 속도가 절대 필요한 전차나 수렵용 2륜마차 때문에 빠른 말의 사육법이 바퀴제조업과 같이 번성하기 시작했고, 고대국가들간의 전쟁이 끊임없이 일어나면서 전차와 군수품의 빠른 수송에 빠르고 힘센 말이 대거 이용되었다.

이륜 전차의 등장은 전투법과 군사조직법을 바꾸었을 뿐만 아니라 사회와 경제구조 변화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차체와 바퀴, 공구의 제조업이 번성했기 때문이다. 특히 바퀴와 전차 등 수레의 제조는 고대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에서는 하이테크 산업이었음을 생각할 수 있다.

자료를 종합해 보면 고대사회에서 수레는 몇 가지 용도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첫째는 종교적인 일이나 장례 같은 성스러운 의식에 사용된 듯하다. 고대 문명을 나타낸 조각이나 벽화 대부분이 신성을 띤 종교적 인물이나 왕의 장례식에 수레를 묘사하고 있고, 성서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유일한 신인 여호와의 법괴는 절대로 인간의 손으로 운반하지 못하도록 되어 있다. 즉 사람의 손이 아닌 바퀴 달린 수레에 실어 운반했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또 하나의 목적은 먹고 남은 잉여 농산물을 운반해 물물교환을 하는 데 사용했을 것이다. 비옥한 메소포타미아 삼각주에 살던 수메르인들은 풍부한 곡물을 수확할 수 있었다. 그들은 먹고 남은 곡물을 수레에 실어 다른 도시로 운반, 도시에서 생산되는 생활용품들과 교환했다. 교역경제가 발달함에 따라 운송수단으로써 수레의 필요성은 절대적이었다.

세 번째 목적은 전쟁을 효율적으로 치르기 위해서였다. 빠른 말이 끌고 달리는 전차는 속전속결의 중요한 무기로 그 가치를 인정받게 된 것이다. 보다 많은 전차를 가진 쪽이 우세한 군사력을 확보할 수 있었고 강력한 왕국을 세울 수 있었다. BC 1천550∼1천300년 사이에 아시리아와 이집트는 전차를 많이 소유한 덕분에 강대국으로 부상할 수 있었다.

 

 

 

 

2. 고대 도로의 쓰임새와 관리법 도로가 대 로마제국 건설의 밑바탕이 되었다

 

 

도로는 바퀴처럼 분명하게 그 기원을 밝힐 수는 없으나 수레의 등장과 함께 빠르게 발달했다. 수렵로가 발전해 길이 되고, 그 길이 다시 문명간 교역로 혹은 영토확장을 위한 전쟁용 도로로 다양하게 연장되었다. 고대 로마는 기원전 3세기에 전 세계를 연결하는 방대한 도로망을 구축한 덕분에 세계의 반을 점령할 수 있었다. 앞선 토목기술로 오늘날의 고속도로 공법과 닮은 직선과 격자형 설계를 갖추었던 로마의 도로는 오늘날 그 흔적만 곳곳에 남아 있다. 전영선<한국자동차문화연구소장 kacime@kornet.net>

 

 

인류 최초의 도로는 수렵을 하기 위한 길이었다

 

 

수레를 사용하기 위해 이전 길보다 넓은 도로가 등장했다

 

 

 

왕이나 귀족만 사용할 수 있던 도로. 허가 없이 통행하는 백성은 목을 베어 높은 말뚝에 걸어 놓았다

 

 

 

보석 호박을 운반하기 위한 도로

 

 

피라미드 축조용 석재를 운반하는 데 쓰던 도로

 

 

로마는 완벽한 도로망 덕분에 세계를 정복할 수 있었다

 

 

세계 최초의 군용도로인 로마의 아피아 가도

 

 

로마 도로의 휴게소 겸 여관이었던 맨션

 

수레가 등장함에 따라 필연적으로 도로가 필요하게 되었다. 도로는 수레가 나타나기 전부터 있었으므로 바퀴처럼 분명하게 그 기원을 밝힐 수는 없으나 수레의 등장으로 도로개발이 활발해진 것이다. 수레 이전의 도로는 당시의 사회환경에 따라 사람이나 가축이 다닐 수 있는 좁은 길이었다. 따라서 도로는 길에서부터 발전된 것이다.

길이 등장하게 된 것은 인류의 이동 때문이었다. 인간의 이동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고고학자들에 의하여 알려진 바로는 지금으로부터 50만년 전으로 추정하고 있다. 정착생활이 불가능했던 태고에 인간이 식량을 얻는 방법은 사냥과 과일 등 자연 열매를 찾는 것이었다. 그들은 이런 것들을 구하기 위해 먼 거리를 돌아 다녔다. 이런 길이 또한 동물의 이동로나 퇴로로 이용한 수렵로가 되었고, 이 수렵로가 발전한 것이 길이었다. 따라서 최초의 길은 인간과 동물의 통로가 다져진 것이다.

이렇게 생겨난 길은 BC 4천년 경부터 3천년 사이에 인류 문명이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인더스강 유역, 중국의 황화유역에서 차례로 생기면서 서로 부족하거나 구할 수 없는 생필품을 얻기 위한 문명간 교역로로 이용되었고, 교역이 활발해지면서 과거의 좁은 길보다 넓은 길, 즉 도로가 필요하게 되었다. 도로는 인류의 4대 문명발상지 중에서 선두인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중심으로 인간들이 가장 많이 모여 살던 기후가 온화한 지중해 연안으로 발달해 나가다가 수레가 발명된 뒤로는 더욱 빠르게 발전한 것이다.

메소포타미아 분지는 땅이 비옥해 이곳에 살던 수메르인들은 농산물을 타 지역보다 풍부하게 생산했다. 이들이 먹고 남은 잉여 농산물을 식량이 부족한 타 지역에서 원하자 이를 수레로 운반해 물물교환을 하기 시작하면서 넓은 수레용 도로가 필요해졌다. 이런 물물교환 때문에 메소포타미아와 지중해 연안 일대는 교통의 요지로 변했고, 유럽과 아시아, 아프리카를 연결하는 교통 중심지가 되었기 때문에 다른 문명권보다 빨리 도로가 개발되었다.

육로뿐만 아니라 BC 4천500년 경부터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지중해 연안을 연결하는 해상교역이 시작되어 해상교역물을 내륙으로 수송하기 위한 도로도 필요했고, 이 지역을 중심으로 생겨난 고대 국가들이 영토확장을 목적으로 한 전쟁을 치르기 위해서도 도로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도로의 종류와 최초의 도로들

고고학자들은 초기 도로의 목적을 크게 두 가지로 분석하고 있다. 첫째는 `성스러운 행사`를 목적으로 도로를 만들었다는 주장이다. 고대 국가에서 성스러운 일이란 종교적인 행사나 통치자 즉 왕이 거처하는 왕궁이 있는 수도에서 벌이는 군대의 사열 그리고 왕이나 성인의 장례식 등이었다. 이런 목적을 위해 만들어진 길을 `행렬의 길(processional road)`이라 불렀다.

이려? 서부유럽 사람들은 의학적 가치와 자신의 신변보호를 위해 호박을 지니고 다니면 안전하다는 미신을 믿었다. 이태리 상인들은 이처럼 귀한 호박을 구하기 위해 호박 산지인 발틱반도를 찾아왔는데 이 행로가 점차 도로로 발전했다.

지금까지 알려진 가장 오래된 `호박의 도로`는 청동기 초기인 BC 3천800년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덴마크 동북해안에서 엘베계곡을 따라 함부르크를 지나 마르스덴을 거처 북부 보헤미아로, 또 한 길은 마르스덴에서 갈라져 체코의 프라하를 지나 모리비아로 이어진 도로다. 당시 호박의 대가로 지불했던 청동이나 금반지 등이 이 도로에서 발견되어 이를 증명하고 있다. BC 2천년경에 가장 활발히 거래되었던 호박이 덴마크 동부에서 프러시아 사이와 발틱반도 남부해안에 걸쳐 있는 유적지에서 많이 발굴된 것을 보면 여기서 생산되어 지중해 연안에 있는 여러 곳으로 운반되면서 호박수송을 위한 도로가 생겨난 것을 알 수 있다.

교역을 위한 고대 도로 중 가장 오래된 도로는 BC 2천500년경 축조된 엠버길(Ember Routes)로 고대로마 건설 이전의 이태리인인 에트루시안들과 고대 그리스 상인들의 교역로였다. 이 도로는 지중해의 일부인 엠버 해안(아드리아 해안)을 연결하는 것으로서 교역로였을 뿐만 아니라 당시 이 해안에 군집했던 여러 도시국가들의 영토를 표시해주는 국경으로서의 역할도 해 신성한 도로로 여겼다. 그 다음 오래된 도로로는 BC 450년경 페르시아의 수도 수사를 출발점으로 건설된 2천400km의 왕로(Royal Road), 중국의 황도(Imperiaal Road)와 실크로드 등이 있다. 그 중 왕로는 페르시아의 최전성기인 BC 600년경에 와서는 지중해로부터 페르시아만까지 연결시킨 도로였다. 헤로도투스의 기록에 의하면 이 왕로는 페르시아의 수도 수사로부터 아나톨리아(Anatolia)를 거쳐 에게애(Aegean) 항구까지 장장 2천500km나 되는 도로였다고 한다.


전쟁을 위한 도로 등장하다



전쟁을 위한 도로가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BC 8세기경부터다. 그 대표적인 도로가 기원전 4세기부터 건설된 로마의 도로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은 17세기 프랑스의 시인 라 퐁테느가 처음 사용해 유명해진 것인데, 그의 말과 같이 고대 로마는 기원전 3세기에 전 세계를 연결하는 방대한 도로망을 구축했다.

BC 753년 작은 도시국가로 세워진 로마는 BC 295년 이태리 전국을 완전히 장악하고 BC 220년경부터 본격적으로 지중해와 흑해 연안으로 영토를 넓히기 시작, AD 117년에는 영국을 포함한 유럽 전역과 카스파해의 소아시아, 이집트를 포함한 북부아프리카, 메소포타미아와 중동지역 등 최대의 영토를 소유했다. 로마제국은 계속 확장되는 방대한 식민지를 통치하고 영토확장을 위한 침략전쟁을 치르기 위해 신속한 군대의 이동과 통치력이 절대로 필요했다. 이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이 넓고 곧은 도로의 건설이었다.

로마는 이태리 반도를 통일하기 시작하던 때부터 도로를 건설하기 시작해 제국이 전성기를 누리던 AD 180년까지 도로를 만들었는데, 로마를 중심으로 총 8만5천km에 달하는 29개의 도로들이 방사형으로 뻗어 나갔다. 최고 전성기였던 AD 200년에는 대·소 도로 총 연장이 32만km에 달했고, 이렇게 방대한 도로를 만들기까지 600년의 세월이 걸린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현재까지 알려진 고대로마의 군용도로 중 가장 오래된 것은 BC 312년에 건설된 `아피아(Via Appia)` 도로인데, 로마에서 아드리아해 항구도시인 부린디시(blindisi)까지 총 연장거리가 500km에 달하고, 도로의 건설 책임자였던 장군 아피어스 클로디어스 카에크스의 이름이 붙여졌다. 전차 6대가 옆으로 나란히 서서 달릴 수 있을 정도로 넓고, 주변 간선도로도 폭 5∼6m에 포장두께가 0.9∼1.8m였다니 얼마나 넓고 튼튼한 도로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BC 220년경에 건설된 로마~아드리아해 연안의 프라미아 도로는 동부유럽의 여러 나라를 정복하기 위해 이태리 북동부를 횡단하도록 한 전략적 군사도로였다. 이어 BC 145년에는 아피아로를 연장해 아드리아해를 건너 북부 그리스와 연결했고, BC 130년에는 이 도로를 소아시아까지 연장해 폐허가 된 왕로를 재건하고 두 대로를 연결했다.

로마제국은 북아프리카 연안에도 도로를 건설했고 서유럽을 향한 도로망도 깔았다. BC 191년 북아프리카의 카르타고를 점령한 후 알렉산드리아를 거쳐 이집트까지 도로를 연결, 북부 아프리카 연안 일대에 도로망을 건설했다. BC 180년까지는 리옹을 기점으로 네 개의 도로를 라인강과 연결시켰고, 영국을 점령한 후에는 서유럽의 도로를 도버해협을 건너 런던을 거처 요크까지 연결시켰다.

도로는 리옹을 기점으로 이베리아 반도로 남하해 스페인의 톨레도(Toledo)를 거쳐 대서양까지 뻗어나갔다. AD 20년에는 그 유명한 알프스 통로를 뚫어 프랑스의 리옹까지 연결, 리옹을 서유럽 도로교통의 중심가로 만들었다. 또 로마제국의 세력확장에 최대의 공을 세운 트라야누스(Traianus, AD 53∼117) 황제는 AD 110년경 홍해 북부의 아콰하에서 아라비아의 보스타까지 역사 이래 최초로 중앙분리대가 있는 고속도로를 건설했다.


로마의 도로관리법



로마제국이 도로를 세력확장의 수단으로 얼마나 중요하게 여겼는지는 `도로건설단`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다. BC 220년경부터 노예와 전쟁포로로 조직해 병사들이 감독하는 도로건설단을 진격하는 로마군의 뒤를 따르게 하며 도로를 건설해 나갔다. 로마제국의 거대한 도로망은 거의 정복을 위한 군사목적으로 건설된 것이기 때문에 군사의 소통이 빨라 한때는 세계의 반을 점령할 수 있었다.

로마의 간선도로는 군대의 소통을 빠르게 하기 위해 직선과 격자형을 띠고 있다는 것이 설계상의 특징이다. 늪지를 메우고 뚝을 쌓고 굴을 뚫어 지형의 높낮이와 상관없이 직선과 수평을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오늘날의 고속도로 공법과 닮은 것으로 로마의 토목기술이 당시 어느 나라보다 발달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따라서 전차나 마차가 마음놓고 고속으로 달릴 수 있어 속전속결을 할 수 있었고 식민지의 통치와 경제교류를 신속히 달성할 수 있어 번영의 대 로마제국을 건설하는 밑바탕이 되었다.

튼튼하고 넓은 도로와 광대한 도로망 덕분에 로마의 도로를 달리는 전차와 마차의 속도는 점차 빨라졌다. BC 1세기 중엽 줄리어스 시저는 하루에 160km를, 이로부터 100년 후에 티베리우스 황제는 하루에 300km를, AD 68년 네로 황제가 죽었을 때 죽음을 알리려 스페인으로 달렸던 전령은 540km를 단 36시간만에 주파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렇게 빠른 도로를 로마는 사람 통행과 화물 수송으로 나누어 운용했다. 사람은 하루 120km, 화물수송은 하루에 24km 정도만 달리도록 하고 화물도 330kg을 넘지 못하도록 법으로 정해 놓았다. 수레를 끄는 말의 수도 제한했는데, 여름에는 8필, 겨울에는 10필의 말이 끌도록 했다.

로마의 도로는 주변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몰려오는 로마의 통로 역할도 했다. 도로를 가장 많이 이용한 사람들은 군인이었고 다음은 각 지역의 상인들이었다. 상인들은 중부유럽에서 금속제품, 소아시아에서 양털, 영국에서 가죽과 돼지, 스페인과 프랑스에서 술을 수레나 말에 실어와 거래했고, 거대한 식민지로부터 로마인들의 양식으로 쓰일 엄청난 곡식을 운반해왔다.

군인과 상인들이 이 도로들을 통해 타고 왕래한 수레들은 2륜 수레나 8∼10마리의 소나 말이 끄는 4륜 수레가 주류를 이루었다. 도로의 통행이 날로 번창하고 혼잡해지자 로마 정부는 세계에 산재한 식민지와의 신속하고 편리한 교통을 위해 20km마다 말을 바꾸어 타는 `역마 교환소`를, 40km마다 휴게소 겸 여관인 `맨션(Mansions)`을 설치했다. 맨션에는 역마 교환소는 물론 의사, 대장장이까지 있어 여행객들에게 편의를 제공했다. 그러나 한때 세계의 반을 지배했던 로마제국도 4세기 말부터 게르만 민족의 침입과 동·서로 분열되면서 이 거대한 도로망은 황폐해지기 시작했고 오늘날에는 그 흔적만 곳곳에 남아 있다.

 

3. 수상교통의 주역인 배의 탄생과 역사 통나무에서 전투용 갤리선까지

 

 

선사시대에 인류는 통나무, 짐승가죽 주머니, 갈대 뗏목 등을 수상 이동수단으로 사용하다가 이집트의 단지배와 메소포타미아의 가죽배를 거쳐 기원전 3천년경 최초의 목재 구조선이 등장했다. 이후 해상무역에 선박을 활용한 페니키아인과 전함의 등장에 따라 조선기술이 크게 발달했고, 갤리선이 기원전 500년까지 지중해와 아라비아해를 장악했다. 갤리선시대는 화약을 사용한 불의 전쟁으로 변하면서 점차 사라졌고, 동력을 노잡이에서 바람의 힘으로 바꾼 범선 전함시대로 들어섰다 전영선<한국자동차문화연구소장 kacime@kornet.net>

 

 

 

선사시대의 통나무배

선사시대의 가죽주머니 공기배

 

 

BC 4천년경의 이집트 갈대배

 

방수용으로 겉에 가죽을 씌운 구조배


 

아테네인들이 탔던 항아리배

 

 

BC 3천500년경에 만든 이집트의 꽃병에 그려진 최초의 돛배

 

 

BC 2천년경 초기의 이집트 갤리선

 

 

AD 220년경 이집트의 대형 20단 갤리선

 

하세푸스트 여왕이 BC 1천500년경에 만든 대형 무역선

 

인류 최초의 수상교통수단 통나무와 갈대배
20세기 초 비행기가 발명되기 전까지의 교통영역은 육로와 수로뿐이었다. 육로교통수단은 1765년 제임스 와트의 증기엔진인 자동동력이 발명되기 전까지는 주로 수레와 가축이었고, 수로교통은 배에 의존했다. 수로교통 중 육지에 분포된 강과 하천을 통하는 수단으로는 소형배, 바다를 항해하는 교통수단으로는 범선이 이용되었다.

인류가 배를 처음 사용한 것은 하천, 강, 호수를 건너기 위해서였다. 기록에 의하면 4만 년 전인 선사시대부터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가장 오래된 유물로는 영국의 인류학자가 발굴한 BC 7천300년경의 노와 네덜란드에서 발견된 통나무 쪽배로 BC 6천300년경에 사용했던 것으로 판명되었다. 큰 통나무의 가운데를 파서 하천에서 사용한 것으로 구석기시대에 돌칼과 돌도끼를 가지고 만들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고고학자들의 분석에 의하면 인류가 제일 처음에 사용한 배는 통나무와 갈대배였다고 한다. 생나무보다 가벼운 마른 통나무가 물 위에 뜬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주로 호수나 좁은 강을 건너기 위해 한 팔로는 통나무를 안고 다른 팔로 물을 저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 구석기시대 중엽에 와서는 인간의 지혜가 발달하면서 가는 나무토막 여러 개나 갈대를 엮어 만든 작은 뗏목을 사용할 줄 알게 되어 강이나 호수에서 타고 다니기가 훨씬 편리했다.

구석기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돌로 만든 무기가 사용되어 식생활을 위한 사냥이 활발해졌는데, 이 시기에 고기를 먹고 남은 물소, 하마, 소, 말가죽을 빈틈없이 봉해 만든 일종의 가죽 주머니형 배가 탄생한다. 그 주머니에 바람을 불어넣으면 둥그렇게 부풀어올라 물에서 잘 뜨기 때문에 이것을 가슴에 안고 쉽게 강을 건널 수 있었고, 가벼워서 사용하기가 훨씬 편리했다.

갈대 뗏목배와 가죽주머니 공기배는 인류문명 발상지역의 하천 조건에 따라 사용지가 달랐다. 이집트의 나일강과 메소포타미아의 유프라테스강, 티그리스강 하류는 수심이 깊고 물의 흐름이 느려 뗏목배를 사용하기 좋았으나 메소포타미아의 두 강 상류는 물의 흐름이 빠른 데다가 바위가 많은 여울 투성이라 뗏목보다는 가죽주머니 배를 많이 사용한 것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통나무, 짐승가죽 주머니, 갈대 뗏목 등은 자연물체였기 때문에 배라기보다는 물 위에 뜨는 하나의 부표형 수상 이동수단에 불과했다. 그러다가 신석기시대에 가까워지면서 돌 공구의 제조기술이 더욱 발달하자 커다란 마른 통나무의 가운데를 파내 비로소 배다운 배인 통나무 쪽배를 만들 줄 알게 되었다. 이때는 훨씬 튼튼하고 예리한 돌도끼, 돌칼, 돌자귀, 돌끌까지 만들 줄 알게 되어 나무쪽배 만들기가 한층 쉬웠다. 배의 제조기술은 이처럼 공구의 발달과 같이 했다.

BC 4천년경 청동기시대가 시작되자 한층 튼튼하고 예리한 여러 가지 청동공구를 만들어 사용하면서 태평양해안 사람들이 비로소 두꺼운 판자목을 이어 붙여 조립한 다음 방수처리한 조각배와 노를 만들어 강과 해안 바다에서 타고 다녔다. 또 고대 수메르인들은 튼튼한 나무껍질로 만든 커다란 바구니에 물이 스며들지 않도록 겉을 동물의 가죽으로 포장한 배를 만들어 티그리스강에서 사용했다.


최초로 돛배를 만들어낸 나일강의 사람들


배(boat)와 선박(ship)은 그 용도가 근본적으로 달랐다. 배는 물고기를 잡거나 적이나 맹수가 공격해 오면 피해 달아나기 위해 강이나 깊은 하천 호수를 건너도록 만든 작은 배고, 선박은 교역이나 전쟁 또는 지구를 탐험하기 위해 바다를 건널 수 있도록 만든 큰 배를 뜻한다. 그러니까 고대 인류가 제일 먼저 사용한 것이 만들기 쉬운 배이고, 인간의 지혜와 제조기술이 필요한 선박은 배보다 훨씬 늦게 등장했다.

인간의 지혜가 발달함에 따라 보다 큰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많은 짐이나 사람을 태우고 바다를 건널 수 있도록 만든 돛 달린 큰 배는 작은 배로부터 발전한 것이다. 선박의 시조는 돛배였다. 지금까지 발견된 기록상으로 돛 달린 배가 처음 나타난 것은 BC 3천400년경 이집트에서였다. 이집트의 초대 왕인 메네스(Menes)는 파피루스 갈대로 엮은 큰 배를 만들어 역시 파피루스로 만든 돛을 달고 양쪽에서 노예가 노를 젓게 해 나일강에서 타고 다녔다고 한다. 갈대를 잇대 끈으로 엮고 앞뒤를 활처럼 휘어 오르게 만든 이 최초의 돛배는 메네스왕조 시대에 만든 것으로 알려진 꽃병에 그려져 있고, 그 꽃병은 현재 대영박물관에 소장중이다.

인류문명의 4대 발상지 중에서 제일 먼저 이집트인이 배를 만들어 탔던 이유는 배를 사용하기 좋은 조건을 가진 나일강과 피라미드 건축 때문이었다. 카이로 근방의 삼각주에서 제1폭포가 있는 아스완까지 장장 800km나 되는 나일강은 장애물 없이 넓고 탁 트인 천혜의 수상교통로였다. 여기다가 물의 흐름이 느리고 바람은 물의 흐름과 반대방향인 북쪽에서 분다. 따라서 나일강 상류로 갈 때는 물의 흐름을 타면 쉽고, 하류로 갈 때는 바람의 힘을 이용하면 힘들지 않겠다는 지혜에서 돛이 탄생한 것이다.

이 돛은 기원전 3천500년경부터 이집트 서민들이 갈대 쪽배에 넓고 큰 종려나무 잎가지를 세워 바람을 타고 나일강을 오르내렸던 것을 왕인 메네스가 보고 그의 배에 이용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는 나무가 귀한 대신 갈대가 많았다. 그래서 그들은 선사시대부터 갈대로 만든 배를 많이 이용했다.

기원전 3천200년경에는 이집트의 단지배와 메소포타미아의 가죽배가 등장했다. 단지배는 점토를 구워 만든 1인승 배로 바위가 없는 나일강 상류 늪지대에서 사용했고, 역시 1인승인 가죽배는 갈대배 표면에 방수용 가죽을 입혀 만든 것으로 수메르인들이 바위가 많고 물이 빠른 유프라테스와 티그리스강 상류에서 사용했다.
이런 1인승 배는 사람이 물에 젖지는 않지만 많은 짐이나 사람을 실어 나를 수는 없었다. 이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만들어낸 것이 대형 가죽 구조선이었다. 가늘고 질긴 섬유 밧줄이나 가죽끈으로 나뭇가지를 엮어 양편으로 뱃전을 만들어 올린 다음 물이 들어가지 않도록 겉에 가죽을 입힌 대형 가죽배를 만들어 무거운 건축용 돌이나 말들을 운반했다. 그러나 이런 가죽 구조선도 튼튼하지 못해 바위나 절벽에 충돌하면 잘 부서졌다.


항해용 선박을 처음 만든 이집트 왕


이런 과정을 거쳐 드디어 BC 3천년경 최초의 목재 구조선이 등장했다. 이집트 왕 스노푸루(Sneferu)는 삼나무로 만든 군선 두 척을 홍해 건너 레바논으로 보내 선박 제조용 삼나무를 싣고 왔다는 기록이 있다. 스노푸루의 군선은 바람이 없을 때는 노를 저어 가다가 바람이 일면 눕혔던 돛대를 세워 사각형의 돛을 달아 항해했다. 이것이 최초의 목조선에 전투용 선박이 아닌가 생각한다.

나무를 깎아 만든 널판지를 이어 붙인 구조선은 피라미드를 건축할 때 필요한 석재수송에도 사용했다. 기원전 2천800년경에는 여러 개의 긴 통나무에 널판지를 잇대어 질긴 가죽끈과 섬유줄로 꿰매어 만든 일종의 큰 바지선으로 나일강 상류에서 채석한 큰 돌들을 피라미드 건설현장인 `기자` 가까운 나일강변까지 운반했다.

오늘날의 조선법과는 반대로 만들어진 이 바지선을 만든 쿠푸왕은 `기자`에 가장 큰 피라미드를 세운 인물로 그가 생전에 탔던 배도 그의 무덤 옆에서 발견되어 고대 이집트 배의 모양과 크기를 알 수 있다. 쿠푸왕의 배는 목판들에 구멍을 뚫어 끈으로 이어 붙여 만든, 돛이 없는 목조 노 배로서 길이가 45m인데 당시로서는 엄청나게 큰 것이었다. 이 배는 이집트에서 목재를 구할 수 없어 레바논으로부터 수입한 삼나무를 사용했다.

BC 1천500년경 이집트의 하세푸스트(Hatshepust) 여왕은 역대 파라오 중 가장 큰 피라미드 석재 운반용 배를 만들었다. 700톤이나 나가는 두 개의 화강암을 싣기 위한, 길이 60m에 폭이 20m나 되는 대형선이었다. 이뿐만 아니라 하세푸스트 여왕은 거대한 항해용 무역 범선 두 척을 만들어 무역선단을 조직한 다음 홍해를 종단해 소말리아로 보내 원숭이, 상아, 흑단, 목재 등을 수입해 왔다. 이를 선두로 해양교역이 범선을 타고 활발히 발전했는데 BC 1천400년경부터는 크레테 상인들이 시실리, 크레테, 나일분지를 상선으로 오가며 술, 올리브유, 금속제품들을 수출했다.

하세푸스트 여왕의 무역범선은 꿰매기식 조선법인 가죽끈을 벗어난 것으로, 선체의 목판과 목판을 끈이 아닌 나무 쐐기로 이었다. 양 목판 가운데 구멍을 뚫고 나무못을 끼워 연결한 후 방수처리를 하는 이 시대의 조선기술은 기원 후 5세기까지 이용되었다.


크레테의 해양상인들이 완성한 돛선


해상무역으로 선박을 가장 넓게 활용하고 조선기술을 발달시킨 사람들은 페니키아인들이었다. BC 2천년경에 페니키아 지역(레바논의 지중해변)에 두로(Tyre)라는 작은 항구도시를 세우고 지중해를 무대로 해상교역활동을 시작한 그들은 항해술과 조선기술에 천부적인 재능을 갖고 있어 BC 1천년경에는 인류 역사상 최초로 지중해 해상무역을 장악했다. 이들은 AD 15세기에 희망봉을 발견한 포르투갈의 바스코다가마보다 2천200년 전인 BC 700년경에 대형 상선으로 아프리카대륙 해안을 따라 일주한 기록을 세웠다.

당시 이스라엘의 솔로몬왕은 이들이 지중해를 장악해 엄청난 부를 축적하는 것을 보고 경쟁자가 없는 홍해를 장악해 해상무역을 하기 위해 이스라엘 남단 엘랏에 홍해 진출의 항구를 건설하고 싶었다.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들은 조선기술과 항해기술에 대한 경험이 전혀 없었다. 이때 솔로몬은 두로의 히랍왕에게 도움을 청했고, 히랍왕은 기꺼이 솔로몬의 청을 받아들여 이스라엘로 조선공과 선원을 보내 엘랏을 건설하도록 도운 것을 보면 두로가 얼마나 조선기술이 발달했던가를 알 수 있다.

두로인들을 포함한 페니키아 상인들은 두 가지 형태의 선박을 만들었다. 갈로스(Gaulus)라 부르는 연안항해용 선박과 히포(hippo)라 부르는 해양항해용 선박이다. 갈로스는 주로 수십 개의 노를 저어 가는 갤리선으로 돛이 없어 강한 바람이 없던 지중해 연안의 항해용으로 좋았다. 심해 장거리 항해용인 히포는 폭풍과 높은 파도의 북극해를 항해할 수 있도록 튼튼한 나무로 만든 선체와 갑판, 선실과 갑판 사이를 오르내릴 수 있는 여러 개의 계단용 해치를 갖추고 있었다. 또 바람을 이용하는 대형 돛을 달아 바람이 없을 때는 노를 저어 가고, 바람이 불 때는 돛을 이용해 항해하도록 만들었다.

페니키아 상인들이 일찍부터 해상무역을 장악할 수 있었던 것은 뛰어난 조선술뿐만 아니라 거대한 범선을 움직일 수 있는 항해술, 일사불란한 선원의 조직체계 그리고 해도(海道)에 대한 풍부한 지식을 갖추었기 때문이다. BC 1천년경부터 페니키아의 두로인들이 사용한 히포를 최초의 순수한 원양선박으로 보고 있다. 따라서 BC 3천년경 이집트에서 만든 범선을 BC 1천년경 페니키아인들이 원양항해용 선박으로 발전시켰고, 이들의 조선기술과 항해기술이 홍해, 아라비아해, 인도양, 남지나해를 거친 동양과의 해상교역 개척을 통해 중국에까지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고 있다.


전쟁이 발달시킨 고대의 배


원시적인 배가 바다를 건너다닐 수 있도록 발전시킨 것은 전쟁이었다. 바로 전투용 배인 전함의 등장 덕이다. 기원전 2천년 말기부터 이집트 등 지중해 연안 여러 도시국가들 사이에는 영토확장 전쟁이 불붙었다. 이들 군대들은 육지로 원정하는 것보다 지중해와 아라비아해의 바다를 오가는 것이 빨랐다. 따라서 크고 튼튼하며 빠른 전투용 배가 필요했는데, 이것이 바로 갤리선(Galley Ship)이다.

갤리선이란 좁고 긴 유선형 형태로 양쪽에 일렬로 앉은 노잡이들이 전진시키는 빠른 배다. 처음에는 이집트에서 상선으로 사용했으나 도시국가들 사이에 전쟁이 시작되던 기원전 2천800년경부터 군함인 갤리선으로 둔갑시켜 사용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고 있다. 기록상으로 등장한 최초의 군함은 기원전 2천300년경 이집트의 장군 우니가 원정대를 끌고 지중해를 건너 지금의 이스라엘을 침공할 때 수백 척의 상선을 갤리선으로 바꾸어 사용한 것이었다.

초기의 갤리선은 두 종류가 있었다. 무역에 사용하는 갤리선은 화물을 많이 싣기 위해 넓고 육중하며 속력이 느렸다. 급하지 않기 때문에 속력보다는 튼튼하고 커야 했다. 반면 나라의 시급한 공문이나 사신들을 수송하는 데 사용한 갤리선은 속력이 빨라야 했기 때문에 가벼우며 좁고 긴 유선형이었다. 여기다가 상선보다 더 많은 노잡이를 고용했다. 이 배가 바로 군함의 시조인 셈이다.

기원전 2천년경부터 지중해 연안 국가들의 전장은 바다로 변했으므로 각 도시국가마다 해군을 강화했다. 따라서 전함의 우수성이 해전의 승패를 좌우했다. 바로 갤리선의 경쟁시대로 돌입한 것이다. 이후 해전의 주력무기로 등장한 각양각색의 갤리선은 기원전 500년까지 지중해와 아라비아해를 장악했다.

갑판이 없는 20∼30인의 노잡이 배로 시작된 갤리선은 전쟁이 치열해지면서 규모나 기술이 급속히 발달, 군사를 전투지역으로 수송하는 초기의 임무를 벗어나 적의 군함을 직접 쳐부수는 전투함으로 변했다. 바로 돌격 갤리선의 등장이다. 이 군함은 적선을 격파하기 위한 쇠로 만든 뾰족한 충각(衝角)을 뱃머리 아래쪽에 설치했다. 전투용 갤리선은 기원전 3세기에 와서 거대한 괴물선으로 변했고, 기원전 220년경 이집트 왕 프톨레마이오스 4세는 그때까지 나온 갤리선 중 최대규모인 길이 130m, 높이 40층에 노잡이를 무려 4천 명이나 고용한 갤리선을 만들었다. 이 맘모스 갤리선은 프톨레마이오스가 이집트의 위력을 적국들에게 과시하기 위해 만든 것으로 실제로 전투에 사용되지는 못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속도를 높이기 위해 계속 노잡이 수를 늘리다 보니 갤리선은 갈수록 대형화되었다. 그러나 험한 파도와 강풍에 견디려면 무한정 배를 크게 만들 수만은 없었으므로 실전에는 일정한 크기에서 많은 노잡이들을 효율적으로 배치할 수 있는 3층~5층 갑판형 갤리선이 사용되었다. 이런 갤리선은 각 층에 배치한 노잡이의 앉은 열을 한 단으로 하여 5단선, 10단선, 15단선, 20단선 등으로 만들었다. 갤리선시대는 서기 5세기경까지 이어지다가 이후 화약을 사용한 불의 전쟁으로 변하면서 점차 사라졌고, 동력을 노잡이에서 바람의 힘으로 바꾼 범선 전함시대로 들어섰다.

4. 중국으로 전파된 바퀴와 수레 진시황제의 수레 개혁으로 도시의 모양이 바뀌다

 

중국에서 수레는 BC 2700년 황제(黃帝)가 왕으로 즉위하기 전부터 사용했고, BC 1300년경에는 본격적으로 사용되었다. <고공기>를 보면 수레 만드는 조건부터 바퀴 제조기술, 끌채의 모양까지 상세히 규정하고 있다. 춘추전국을 하나로 통일한 진시황은 `수레 통일`이라는 획기적인 개혁을 통해 도로와 도시의 모양까지 변화시켰다. 또한 통치를 위한 가장 빠르고 효율적인 방법으로 넓고 평탄한 도로를 많이 만들었으므로 일찍부터 여관과 통신용 역참 등 도로 편의시설이 발달했다 전영선<한국자동차문화연구소장 kacime@kornet.net>

 

 

황제의 지남차

 

 

상나라 수레, 말 유물

 

 

진나라 1륜 화물수레

 

 

주나라 흉식견인 4두전차

 

 

주나라 구리 승용마차

 

 

주나라 여인 마차

 

 

전한 무제의 천마차

 

 

진시황제의 4두 동마

 

주나라 귀족용 견

수레 보급에 앞장섰던 황제(黃帝)


메소포타미아의 고대 수메르인들이 BC 3800년경 발명한 수레는 BC 2000년경 크레타섬과 이집트로, BC 1600년경 그리스, BC 1300년경 중국으로 전파되었다고 고고학자들이 추정했다. 그러나 중국의 고대문헌을 보면 BC 2700년 황제(黃帝)가 왕으로 즉위하기 전부터 수레를 만들어 사용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어, BC 1300년이라는 연대는 수레를
본격적으로 사용한 시기를 뜻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메소포타미아의 바퀴 만드는 기술은 이미 BC 3500년경 소아시아에서 동방으로 전해져 황하문명을 일으킨 은나라 시대의 고사에는 수레를 가르키는 글자가 많이 발견되고 있다. 하지만 중국 기록에 나타난 BC 3500년경의 수레설은 메소포타미아에서 전해진 것으로 보지 않는 견해도 있다.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같은 시기에 등장한 중국의 황하문명이 서로 교류했었다는 기록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중국 자체에서 수레를 발명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정도 나오고 있다. 과거 기록보다 훨씬 일찍 중국에 수레가 등장한 것은 사실인 듯 하다.

고대 중국의 전설적인 제왕 중 한 사람이었던 황제는 BC 2700년경 중국을 통일해 문자, 수레, 배 등을 만들었고 도량형, 역법, 음악, 잠업 등 많은 문물과 제도를 확립해 황하문명을 이룩하는 데 큰 공적을 남겼다. 중국의 고대문헌인 <고사고>(古史考)에는 황제가 수레를 발명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고, 중국의 명물을 고증한 <고금주>(古今注)에는 황제가 즉위하기 전 이미 수레를 만들어 사용한 것으로 나와 있다.

황제의 본 이름을 봐도 수레와 밀접한 관계임을 알 수 있다. 그의 본명은 헌원(軒轅)인데 헌은 수레, 원은 수레를 끌도록 앞 양쪽에 달린 긴 끌대를 뜻한다. <고금주>에 헌원이 들판에서 바람에 굴러가는 쑥을 보고 지남차를 발명했다고 되어 있는 것을 보면 황제가 중국을 통일할 수 있었던 위력 중 하나가 수레 이용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후 재주 있는 목수이자 청동기 기술자였던 소호라는 사람이 소가 끄는 수레(牛車)를 발명해 사용했고, 고대중국의 성제(聖帝)로 알려진 요임금이 백마가 끄는 마차를 만든 데 이어 BC 2010년경 하(夏)나라를 세워 대규모 치수공사와 지덕설화의 주인공으로 유명했던 우임금이 처음으로 인력거인 가인차(駕人車)를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BC 1500년경 은나라에 이르면 수레를 가리키는 차(車)자와 바퀴를 가리키는 륜(輪)자 등 수레에 관련된 글자가 많이 생겼고, 말이 끄는 전차까지 사용했다는 기록도 있다. BC 1122년 은나라를 멸망시킨 주나라에서는 수레를 더욱 발달시켜 용도에 따라 여러 모양으로 만들어 민간과 군에서 널리 사용했다. 이를 뒷받침하는 증거로는 BC 5세기경 주나라가 여러 제후국으로 갈라져 약육강식의 전쟁을 벌이던 춘추전국시대에 사용한 2륜 전차와 이를 끌던 말의 뼈가 중국 여러 곳에서 출토되고 있는 점이다. 주나라 초기인 BC 1000년경에 와서는 수레에 관련된 글자만 400여 자로 늘어난 것을 보아도 고대중국에서 수레를 얼마나 많이 사용했던가를 알 수 있다.


수레 제조법규까지 만들다


중국에서 출토된 가장 오래된 수레의 유물은 청해에 있던 도란(都蘭)의 `낙목홍탑리타리하`라는 고분에서 나온 것으로, 탄소측정에 의하면 BC 1800년 이전의 황제시대 수레로 바퀴살이 16개인 우차(牛車)였다. 이것으로 황제시대 중국에서는 상당히 발전된 수레를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황제시대 초기에 사용했던 수레는 사람이 끌었으나 BC 2500년경에 와서는 소가 대신했고, 하나라 때는 보다 빠른 말로 바꾸어 사냥이나 전투용 수레로 이용했다. 이런 마차는 은나라 시대의 여러 묘에서 발견되었고, 수레의 구조 또한 상당히 정밀하게 발전해 주나라 초기에는 2두마차에서 4두마차로 발전했다.

말이 끄는 방법도 상당히 과학적으로 진보된 흉식계가법(胸式系駕法)으로 발전했다. 수레를 끄는 줄을 말의 목에 걸어 호흡을 곤란하게 만드는 것을 막기 위해 말의 가슴에 걸어 끌게 하는 견인방법으로 서양보다 1천 년 정도 앞선 방법이다.

수레의 종류는 끄는 짐승이나 용도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 소가 끄는 우차는 평화시나 전시에 짐을 운바하는 데 적합한 구조로 되어 있고, 말이 끄는 마차는 소식을 신속하게 전달하거나 사냥 또는 전투용 전차로 빨리 달릴 수 있도록 가볍게 만들어졌다. 우차는 백성들과 군사들의 생필품 수송용으로 넓게 사용되어 마차보다 수가 많았던 반면 마차는 귀족들의 사냥과 오락·전쟁용으로 사용이 한정되어 서민들은 사용할 수 없었다. 따라서 마차는 귀족의 계급이나 신분을 상징하는 보물로 취급해 `죽어서도 사용한다`는 뜻으로 묘에 같이 묻었다. 후세에 고분에서 마차가 많이 출토되는 것이 바로 그런 이유다.

중국 사기인 <고공기>(考工記)를 보면 목제품 제조기술자 7공(七工) 중 륜(輪), 거(車), 여(與), 주( )의 네 기술자만이 수레를 만들었다. <고공기>에는 수레 만드는 조건도 기록되어 있는데, 견고하고 부서져서는 안되고, 가볍고 정교하게 만들어 무거운 짐을 실어야 하며, 속도가 빨라야 하고, 전복하지 않도록 평형을 유지해야 하며, 오래 타도 편하고 길에 적합해 막힘 없이 달릴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수레에서 중요한 바퀴 제조기술도 상세히 규정하고 있다. 바퀴는 모든 표면이 지면에 닿도록 정원(正圓)을 유지해야 하고, 바퀴통의 구멍은 동그랗게 만들 것이며, 차축의 양 끝은 바퀴통을 관통한 나머지는 짧아야 하고, 바퀴를 차축에서 빠져나오지 않도록 고정시키는 쐐기도 작게 만들 것이며, 차축과 바퀴통이 만나는 부위에는 기름을 칠 것이며, 바퀴살은 두께와 폭이 가늘어 진흙이 엉겨붙지 않도록 만들고, 수레를 끄는 채는 굽게 만들어 말이 빨리 달릴 수 있어야 한다고 규정했다.

말이 편하게 수레를 끌면서 속도를 높일 수 있게 돕는 것은 끌채의 모양이다. <고공기>에는 끌채의 구부러짐 깊이에 대한 규정도 상세히 적고 있다. 전차용 말의 끌채는 깊이가 4척 7촌, 사냥용 말은 4척, 일반수레용 말은 3척 3촌이라 했다. 은나라 사람들은 수레제조에 역학과 말의 운동관계를 합리적으로 배려한 것이다. 당시의 마차는 대개 높고 컸다. 땅에서 차체까지의 높이가 70~80cm 정도라서 단번에 쉽게 올라타기가 힘들었다. 이러한 불편을 덜기 위해 밟고 올라타는 디딤돌인 승석(乘石)까지 만들어 사용했다. 승석은 안양(중국)의 은나라 귀족묘에서 출토되었는데, 가운데에 구멍을 뚫어 끈을 꿸 수 있도록 만들어 수레에 달고 다니며 사용했다.


진시황제(秦始皇帝)의 수레 개혁


중국 최초의 문자인 갑골문(甲骨文)은 BC 1400년경 상나라에서 만든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 문자는 거북 껍질이나 소의 뼈에 새겨 놓은 조형문자로, 상나라(은나라의 초기 이름)시대 유적에서 발견된 갑골문에는 사람이 매고 가는 가마를 뜻하는 여(與)자나 련(輦)자를 볼 수 있어 고대중국에서는 수레와 함께 가마도 많이 탔음을 알 수 있다. 사람이 어깨에 매고 가는 견여(肩輿) 또는 두 사람이 밀고 가는 바퀴 달린 가마인 보련(步輦)이라는 가마는 고대중국 초기의 국가인 하나라 폭군 걸(桀)왕이 BC 1600년경 발명했다지만, 이보다 휠씬 앞선 황제시대부터 귀족들이 가마를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는데, 동주시대(BC 771∼256)에 와서 상류층에서는 이미 가마 사용이 보편화되었다는 기록도 있다.

승용마차는 속도가 빨라 전투나 사냥용으로는 적당하지만 왕, 부녀자, 노약자 또는 귀족들이 일반용으로 타기에는 편안한 교통수단이 아니었다. 재산이 많고 지위가 높은 귀족들이나 한 나라를 통치하는 왕은 편하게 다니고 싶었다. 이래서 평화시에는 사람이 둘러매는 가마를 타고 권세를 부렸다. 진서(晉書)의 <여복지>(輿服志)를 보면 후한(AD 950)에 이르러서 우마차는 왕에서부터 서민에 이르기까지 넓게 사용하는 교통수단으로 변해 권세를 상징하는 탈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상류계급들만이 편히 탈 수 있는 교통수단으로 승여(乘輿)가 등장하게 된다.

고대중국의 수레가 주나라 시대인 춘추전국시대에 와서 가장 발달해 널리 사용된 것은 우선 300년이나 계속된 전쟁 때문에 병기와 군수품 수송용 수레, 전투용 전차의 수요가 크게 늘어났기 때문이다. 또 청동기시대에서 철기시대로 넘어와 문명이 발달하기 시작하던 때라 수레에 철제품을 많이 사용해 청동기시대의 것보다 더욱 튼튼했다.

BC 265년 진시황의 침략을 받아 피난을 가던 연나라의 전단이라는 족장은 그의 일족에게 튀어나온 마차 축의 양쪽 끝을 잘라버리고 대신 그곳에 쇠덮개를 씌우도록 지시했다. 대 혼란의 피난길에서 수레와 수레가 부닥치면 밖으로 튀어나온 차축 끝부분이 서로 엉켜 달릴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부서지기 쉬웠기 때문이다. 전단의 지시대로 개조한 일족의 수레들은 엉킴없이 무사히 피난할 수 있었고, 이때부터 차축 양 끝부분이 짧게 변했다.

주나라 말인 BC 3세기부터는 바퀴 표면에 쇠태를 씌우기 시작했다. 쇠태를 불에 달구어 바퀴에 씌운 다음 즉시 찬물에 담그면 쇠가 줄어들어 옥죄는 원리를 이용, 바퀴를 튼튼하게 만들어 수명을 연장시켰다.

BC 256년 진시황은 춘추전국을 하나로 통일시킨 다음 각 분야를 개혁했다. 특히 수레의 통일은 획기적인 개혁이었다. 그는 수레와 전차의 폭을 8척(2.4m)으로 통일, `동궤`라 했다. 이 폭에 맞춰 수레를 만들지 않으면 벌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길까지 이 동궤에 맞도록 닦아 실제로 다니기에 매우 불편했다. 반드시 앞 수레가 지나간 바퀴자국 즉, 철(轍)을 따라 수레를 몰아야 제대로 달릴 수 있었으니, 여기서 `전철(前轍)을 밟는다`는 말이 생겨났다고 한다. 다른 나라 군대가 침입해도 수레와 전차의 폭이 맞지 않아 쉽게 달리지 못했기 때문에 적을 막는 효과도 있었다.

후에는 도시 내 모든 도로의 궤적(바퀴자국)을 따라 단단한 벽돌을 깔아 수레들이 더 빨리 쉽게 다닐 수 있도록 만들었다. 바퀴자국의 폭보다 약간 넓게 도로에 두 줄의 홈을 파고 그 밑바닥에 벽돌을 깔아 매끄럽게 달릴 수 있도록 하면서 수레의 두 바퀴가 홈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도록 한 궤적차도였다.

20세기 들어 지하의 진시황 능에서 발굴된 수많은 유물들 중에는 당시 진시황이 사용했던 수레와 전차들의 모형물이 여러 종류 나왔다. 진시황의 승용마차인 동마차는 네 마리의 건장하고 날센 말이 끄는 2륜 1인승 마차로 우산 모양의 지붕이 달려 있는 개방식이다. 출토된 유물은 동으로 만들어졌지만, 동은 튼튼한 반면 무거워 속도가 나지 않고 승차충격이 커서 속력이 필요한 승용 마차로는 적합하지 않으므로 실물은 차체의 골조나 바퀴살 정도만 동으로 만들었을 것으로 보인다.

색이 화려하고 모양이 섬세해 진시황의 비나 궁녀들이 탔을 것으로 추정되는 2륜 황동마차 역시 4필의 말이 끄는데, 왕의 마차와는 달리 지붕이 있는 수레방이 설치되고 맨 앞에는 마부가 앉아 말을 모는 꽤나 큰 마차다. 무겁고 크기 때문에 실제로는 가볍게 하기 위해 동보다 목재를 많이 사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진시왕릉에서 출토된 4가지 목전차를 보면 전차도 계급에 따라 크기나 치장에 차이가 있었던 것 같다. 지휘용 전차는 장식이 화려하고 검은 옻칠을 했으며 뒷부분에는 정교한 무늬가 그려져 있고, 종과 북이 달려 있다. 부전차(보좌용 전차)는 모양은 지휘 전차와 비슷하지만 일산·종· 북이 없다. 4두마 전차 역시 지휘전차와 모양이 비슷하고 일산이 달려 있지만 종과 북이 없어 돌격용 전차로 추정된다. 일반전차는 2륜 수레와 비슷하지만 3인의 병사가 옆으로 나란히 탈 수 있도록 폭이 넓어 전투용 전차로 보인다.

그 후 서기 220년부터 60년간 계속된 이(魏), 오(吳), 촉(蜀)의 삼국시대에 와서 촉나라의 전략가였던 제갈양이 군용 수레를 개발했다. 목우와 유마가 제갈양의 발명품인데 톱니바퀴, 도로레, 밧줄 등을 이용해 만든 일종의 동력기계장치로 바퀴를 회전시켜 험한 산길도 잘 달려가는 수레였다. 소를 닮은 목우(木牛)는 앞쪽에 긴 손잡이가 달린 네바퀴 수레고, 말을 닮은 유마(流馬)는 수레 머리 부분에 전진과 후진장치가 있는 네바퀴였다.


여관과 통신용 역참 설치한 고대 도로


중국은 청동기 중엽인 BC 2400년경에 이르러 문명이 발전하면서 인구도 늘어나 성, 읍이나 촌락을 만들어 모여 살게 된다. 또 촌락과 도읍 사이에 사람과 물건의 왕래를 편리하게 하기 위해 길이 생겨났다. 갑골문자에는 4거리를 표시하는 행(行, ╋)자가 많이 나타나는데, 이것은 계획적으로 만든 도로를 의미한다. 이런 표시의 갑골문자가 새겨진 유물이 은나라와 여러 인접국의 유적지에서 많이 발견된 것을 보면 은나라와 인접 토후국들간에 사람의 내왕이 빈번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왕성한 교통이 도로를 많이 만들게 했던 것이다.

또한 이 시대에 수레가 널리 사용되고 빠른 마차가 생겨나자 이들 수레들이 빠르고 안전하게 달리도록 평탄하고 넓은 도로를 닦아 나갔다. 전쟁을 치르기 위해서도 도로건설은 필수적이었다. <시경>(詩經) `대동편(大東篇)`에 `주나라의 길은 숫돌처럼 반듯하고, 화살같이 곧게 뻗어 있다`고 기록한 것을 보면 도로가 상당히 발달했었음을 알 수 있다.

갑골문에서는 도로와 관련된 률(律)이나 건(建)자도 발견되는데, 률자는 수레가 다니는 도로를 계획적으로 설계한다는 뜻이고, 건자는 이 설계에 따라 일정한 규격으로 건설한다는 뜻이다. 주나라(은나라의 후기 이름)의 길은 숫돌처럼 반듯하다 했는데, 은나라 사람들은 궁전과 성벽을 흙으로 다져 건축했던 방법을 그대로 도로에 이용해 평탄하고 튼튼한 교통로를 만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흙다짐 공법(앙축법)은 공사도 거대할 뿐만 아니라 돈이 많이 들어 도시 내 중요한 도로인 대도(大道)에만 사용했다.

중국을 통일한 진나라(BC 221∼201)는 전국을 중앙집권식으로 통치하기 위한 가장 빠르고 효율적인 방법으로 넓고 평탄한 도로를 많이 만들었다. 진에 대한 기록인 <가산전>(價山傳)을 보면 `도로가 동으로는 연·제(燕·齊)나라의 끝까지 도달하고, 남으로는 오·월(吳·越)나라 구석까지 연결되었으니 강호(江湖)에서 해변까지 모두 다 구경할 수 있다. 도로는 폭이 50보(약 10m)이며 3장(三丈)마다 푸른 소나무를 심고 쇠추를 박아 두텁게 다져 그 기반을 튼튼히 하였다`고 기록했다.

중국 전국을 연결하는 도로가 계속 건설되면서 서로간의 왕래가 빈번해지자 여행객을 위한 편의시설도 이미 은나라 시대에 등장했다. 은나라 왕조와 주변 제후국 사람들, 상인들과 병사들 그리고 사신들의 여행을 편하게 해주기 위해 쉬거나 숙식을 해결하는 시설로 여관격인 여사(旅舍)를 도로변에 설치했다.

행객들은 하루에 보통 걸음으로 평균 30리를 갈 수 있어 도로에는 30리마다 객사를 설치했다. 객사에는 노실(路室 여관)이 있고 노실에는 위(委)라는 표시를 했다. 50리마다 시(市)가 있고 시에는 후관(候館:노실보다 큰 여관)이 설치되었는데, 후관에는 적(積)이라는 표시를 했다. 각 객사는 음식과 휴식처를 제공할 뿐만 아니라 긴급한 국가의 사무로 길을 가는 관리들에게 마차와 말, 마부도 제공했다.

중국은 고대부터 나라의 긴급사항을 각지와 왕도에 전달하는 통신제도까지 만들어 이용했다. 통신제도는 은나라 초기부터 등장했던 것으로, 초기에는 보행으로 전달했으나 빠른 마차가 실용화되자 이를 통신수단으로 이용했다. 또 춘추시대에는 중국 전역에 역참을 만들어 소식을 전하고 전령들을 접대했다.

 

 


5.고대 중국의 수상교통 앞선 조선기술에 나침판,해도도 갖춰

 

 

운하를 세계에서 제일 먼저 만든 중국은 조선기술과 항해술도 발달해 전국시대에는 이미 2층 구조의 누선을 건조할 정도가 되었다. 당시 대형 전투함은 90명의 전투병이 탈 수 있었고, 대형배는 폭 8m, 길이 20~30m에 25~30톤을 운반할 수 있었다. 베로 만든 돛이 사용되었고, 나침반과 해도가 항해에 이용되기도 했다. 별의 지도인 ‘성도‘가 나타난 것을 보면 어두운 밤에 별과 달의 위치를 보고 항로를 잡는 관측성 항해술도 전국시대부터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전영선<한국자동차문화연구소장 kacime@kornet.net>

 

 

 

전국시대 2층 누선 군함

 

 

 

한나라의 고층 누선 전함

 

 

 

중국 고대 돛 군선

 

 

 

진나라의 일반 강선들

 

 

 

현재도 사용하는 고대 운하인 영거

 

 

 

중국 고대 배의 전통인 돛 자유조절 정크선

 

 

 

고대 중국의 항해용 나침반

배 발명에 대한 고대 중국의 기록들


중국 전한시대 양자강 이북 지역에 있던 회남의 왕이면서 학자였던 유안이 지은 철학서인 <회남자> 중 `설산편‘에 보면 구멍난 마른나무가 물에 뜨는 것을 보고 배를 만들었다 하였고, `세본` 중의 ‘작편‘에는 낙엽이 떨어져 물 위에서 흘러가는 것을 보고 배를 만들 줄 알게 됐다고 기록하고 있다. 중국인들은 제일 처음으로 배를 발명한 사람을 고대 중국의 전설적인 제왕으로 성군이었다는 복희씨 혹은 역시 고대중국의 전설적인 황제로서 문자, 수레, 배 등을 발명하였고 기원전 2700년경에 중국을 통일했다는 황제라고 하지만 이들은 이미 황하문명을 이룩한 사람들이 만들어 사용한 원시적인 배를 개량해 널리 실용화시킨 것으로 보고 있다.

선사시대의 중국인들이 처음으로 사용한 배는 물에 뜨는 통나무였다. 그러나 이것은 가지고 다니기에 무거워 가볍고 간편한 것을 찾던 중 잘 건조한 바가지를 사용하게 됐다. 부력이 좋고 가지고 다니기가 편리했으나 작은 바가지 안에 탈 수 없어 뜨는 바가지에 매달려 헤엄을 쳐 건넜다. 그 증거로는 <역경> 중의 ‘구이효사‘에 보면 ‘바가지를 안고 강을 건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나무토막이나 바가지를 안고 물을 건너자면 몸이 물에 빠져 불편하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만들어낸 것이 나무토막을 엮어 만든 뗏목배였다. 그러나 이것은 물의 흐름에 따라갈 뿐 방향을 틀거나 물을 거슬러 올라갈 수 없다. 이러한 뗏목의 불편을 덜어주기 위해 강바닥을 짚어 나가게 하는 상앗대를 만들어 뗏목을 훨씬 쉽게 자유자재로 타고 다닐 수 있었다. 기원전 2000년대의 유적으로 추정되는 절강성의 여요시 근방 하모도의 유적인 제4문화층에서 나무 상앗대가 발견된 것을 보면 이를 증명할 수 있다.

기원전 3500년경부터 시작된 중국의 신석기시대에는 석재 도구가 발달해 배가 한층 진보했다. 뗏목의 불편함을 해결하기 위해 큰 마른나무 토막의 가운데를 한 사람이 앉을 수 있도록 파내고 뒤집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배의 앞뒤 부분을 칼날처럼 좁게 깎아 만든 카누형의 독목주가 등장했고, 이를 저어 갈 노까지 만들어냈다.

중국 고사에 의하면 이 독목주를 제일 먼저 사용한 곳이 호수와 강, 늪이 많은 강남 사람들이었다고 한다. 강남의 중국인들이 이렇게 태고시대부터 배를 탔던 이유는 지형적인 조건 때문이었다. 강남지역은 호수, 강 또는 늪지가 많이 분포된 땅이어서 고기잡이와 사냥 등으로 생활하기 위해서는 배가 필요했다. 따라서 중국에서 배를 제일 먼저 만들어 탔고 배를 발전시킨 곳이 이 지역 사람들이었다.

독목주에서 발전한, 나무판자를 이어 조립한 구조선이 나타난 것은 신석기시대였다. 절강성의 유적지인 하모도에서 기원전 2000년경에 만든 나무판자 이음 배의 조각이 발견되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이것은 나무판자의 양끝을 요철(凹凸)형으로 파낸 다음 다른 판자와 조립해 틈새가 나지 않도록 만든 배다. 또 널빤지를 조립해 만든 배의 이음 사이에 생기는 틈새를 봉하는 기술까지 등장했다. 이를 증명하는 것으로 이 시대의 문자인 갑골문자에는 배를 뜻하는 짐(朕)자가 있는데 <고공기>의 ‘함인편‘에서는 틈을 봉한다는 뜻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이렇게 고대 중국인들은 기원전 3000년경에 목판의 조립과 누수방지를 하는 조선기술을 개발했던 것이다.

우리 한민족의 뿌리인 동이인들이 기원전 3000년경에 만들었다는 중국의 갑골문자가 가장 성숙했던 기원전 14세기경의 상나라 갑골문자에 여러 조각의 나무판자를 이어 만든 배를 표시하는 주(舟)자가 있는 것을 보아도 상나라 시대에 들어와서 구조선은 이미 보편화된 것 같다. 이 단순한 구조선에서 발전해 갑판과 객실 겸 전망대인 누각이 설치된 누선은 기원전 5세기경 전국시대부터 사용하였으며, 누선 건조기술도 상당히 발달했던 것 같다.

고대 중국에서 문화와 경제발달의 중심지였던 남중국의 강남 내륙에는 양자강, 희수, 한수, 전당강, 민강, 번양호, 동정호 등 수많은 강과 호수들이 자리잡고 있다. 고대 중국인들은 대부분 이 강들과 호수 주변에 모여 살면서 험한 육로보다 강을 통해 배를 이용하여 경제를 발달시키고 전쟁을 벌여 내륙 수로교통을 발달시켰다.

서로 먹고 먹히는 춘추전국시대의 중국 내 여러 나라들은 강을 통해 전쟁하는 것이 빠르고 쉽기 때문에 군선 건조기술이 아울러 발달했다. 그러나 이 시대의 군선은 주로 강에서 싸울 수 있도록 노를 저어 전진하는 대형 강선들이었다. 전국시대 위나라 정치가였던 장의는 진왕에게 서쪽의 촉나라를 치기 위해 육상으로 하루에 60리를 진군하는 것보다는 병사들을 배에 태우고 강으로 진군하면 하루에 300리를 갈 수 있다고 간언했다고 <전국책> 중 ‘초책‘에 기록된 것을 보면 전쟁 때문에 일찍부터 강의 교통이 발달하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

하나라의 시조인 우임금은 각지에서 거둔 조공물을 배에 싣고 강을 통해 왕도로 빨리 운송했다고 <상서> 중 ‘우공편‘에 기록하고 있어 군사적으로는 물론 경제적으로도 강을 적극 이용했음을 알 수 있다. 이밖에도 하남성의 위현과 사천성의 성도지역에서 발굴된 전국시대의 유물인 구리거울에 누선과 북 치고 노 젓는 병사들의 그림이 새겨진 것을 보아도 춘추시대부터 강을 내륙 교통로로 활발히 이용했음을 알 수 있다.


세계에서 가장 긴 운하를 만든 중국인들


인공으로 만든 강인 운하를 세계에서 제일 먼저 만든 나라가 중국이다. 중국 최초의 운하는 주나라가 기원 전 6세기에 판 홍구라는 운하다. 그후 기원전 486년 춘추전국시대 양자강 어구에 있던 오나라가 전쟁을 하기 위해 양자강과 희수 사이에 운하를 파서 두 강을 연결하면서 만리장성에 버금가는 남북종단의 대운하를 건설하는 시발점이 됐다.

대운하 건설의 본격적인 도화선이 된 것은 기원전 3세기에 만든 세계 최초의 등고운하인 영거운하였다. 등고운하란 평평한 평지를 파서 만든 운하가 아니라 두 개의 산봉우리 사이 움푹 들어간 산골짜기를 파서 만든 운하를 말한다. `마법의 운하`로 부르는 길이 32km의 영거를 만들게 된 동기는 전쟁 때문이었다.

기원전 219년 중국을 통일한 진나라 시황제는 장군 조타와 도휴를 시켜 병사들을 누선에 태우고 바다로 나가 남방으로 진군하여 월나라를 정복했다. 그런데 진나라 수도인 항주에서 월나라로 군용물자를 수송하는 데는 육로보다 강을 이용하는 것이 빠르고 쉽지만 양자강 어구인 황해 연안까지 직통으로 연결되는 강이 없었다. 항주와 양자강을 연결하는 두 개의 강인 상강과 이강이 흐르지만 항주 쪽의 이강을 타면 양자강으로 들어가기에는 너무나 멀리 우회하기 때문에 시간이 많이 걸렸다. 그런데 상강과 얼마간의 사이를 두고 나란히 흘러가다가 서로 반대쪽으로 헤어지는 이강은 양자강과 바로 연결되어 있어 빨리 황해로 나갈 수 있었다.

시황제는 이 두 강 사이를 연결하는 물길을 만들면 빠르게 황해로 나가 월나라로 물자를 쉽게 보급할 수 있다는 점을 포착하고 대신인 사록을 시켜 두 산봉우리 사이 움푹 들어간 산마루를 파 32km의 운하를 만든 것이 영거다. 사마천은 그의 저서인 <사기>에 `영거는 항주 근방에서 서로 반대 방향으로 흐르는 상강과 이강 사이에 있는 두 봉우리 사이 산마루를 파서 수로를 만들어 두 강의 물줄기를 합치게 만든 운하`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영거 때문에 고대 중국서 강남 일대는 어느 지역보다 경제가 먼저 발달하였고 여러 작은 나라들의 통합이 빨랐다. 그후 서기 564년 수나라의 왕 양제가 이 운하를 북으로 연장하는 대 역사를 벌여 양자강 아래 절강성의 항주에서 북쪽 하북성의 천진까지 장장 1천800km의 대운하를 1327년에 완성, 중국 동해안 내륙의 남북을 물길로 연결하는 위업을 이룩했다. 깊이 10~30척에 폭이 100척인 영거는 물론 이 대운하의 대부분을 현재도 사용하고 있으며 고대로부터 중국의 경제와 군사를 발전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해상교통의 개척


중국이 일찍부터 바다로 진출할 수 있었던 것은 우리 한민족의 뿌리인 동이인들의 영향이 컸다. 한족이 중국을 세우기 이전인 선사시대부터 중국의 황해연안 지역에는 동이인이라는 이민족이 널리 퍼져 살았다. 남만, 북적, 서융 등의 이민족들을 고대 중국사람들이 통틀어 동이인라고 불렀는데 바로 이 민족이 한국, 만주, 일본민족들의 조상인 셈이다.

이들 동이인들은 황하유역에서 양자강 하구에 걸친 바다를 생활터전으로 살면서 해양문화를 발달시켰다. 중국 한자의 뿌리인 갑골문자도 기원전 3000년경 동이인들이 만들었고 중국 초기의 나라들인 하, 은, 주시대를 지나 춘추전국시대까지 중국의 해양활동을 주도해 해상교통과 항해술, 배, 돛, 노를 개발시켰다.

그러다가 기원전 247년 시황제가 진나라를 세우고 기원전 221년에 중국을 통일하면서 동이족의 일부는 중국의 한족으로 동화하고 나머지는 발해만으로 올라가 만주와 한반도 황해연안에 퍼져 살다가 예맥족으로 변했다. 이들은 후에 기자, 위만, 고조선을 건국했고 선조들이 고대중국에서 배우고 경험했던 조선술, 항해술, 수레제조술, 도로건설 기술 등을 고조선에 전달했던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고대 중국인들은 청동기시대부터 바다로 나가기 시작해 춘추전국시대로 들어와서는 배를 만드는 기술이 상당히 발전, 해양활동이 더욱 활발해졌다. 중국 사기인 <해내북경>에 보면 주나라는 바다를 건너 베트남 북부 등 남방의 여러 나라들과 해상교역을 했으며, 연나라는 일본까지 진출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 하나 중국이 일찍부터 바다로 진출하게 만든 것은 전쟁이다. 중국 고사에는 `남선북마‘라는 말이 있다. 북쪽은 바다가 없는 초원과 산악지역이라 교통수단으로 말을 많이 사용했고, 남쪽은 바다, 강, 호수가 많은 땅이라 배를 주로 사용했다는 뜻이다. 따라서 남쪽에 자리잡고 있던 오, 연, 월, 제나라 등은 해상활동에 능숙했다. 춘추시대까지 이런 나라들은 해양선을 만들 수 있는 조선기술과 항해술이 미숙해 주로 내륙의 강을 이용한 수군전투를 했으나 전국시대로 들어오면서 해양기술이 발달해 황해바다를 통한 해양전투시대를 열었다. 따라서 이들 강남의 해양국들은 군대를 주로 큰 강들의 황해연안 어구에 주둔시켰다.

중국 사기인 <좌전>에는 기원전 548, 524, 503년에 오나라 왕인 부차가 바닷길로 북상해 진, 제, 노나라를 공격했으며, 월나라와의 해상전투에서 부차는 월의 왕인 구천을 무찔렀다는 기록도 있다.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제는 기원전 221년 해상교역으로 엄청난 돈을 벌어들일 수 있는데 큰 관심을 갖고 해상무역을 장악하기 위해 대규모의 수군을 남해로 진군시켜 남방지역 여러 곳에 무역거점을 확보하는가 하면 북방 해상도 장악하기 위해 직접 산동반도까지 3차례나 배를 타고 순해했다는 것이다.

진시황제의 불로초는 유명한 고사다. 불로초를 먹으면 영원히 늙지 않는다는 얘기를 들은 황제는 이를 구하기 위해 심복대신인 서복을 시켜 소년, 소녀 3천 명을 태운 대규모의 선단을 동해로 보냈으나 돌아오지 않았다고 한다. 아마도 큰 풍랑을 만나 전부 익사한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시황제가 얼마나 해양진출을 원했던가를 짐작케 한다.

기원전 112년 한나라의 황제인 무제는 수군 장수인 양복을 시켜 수군 10만 명으로 바다에 나가 광동, 광서, 베트남 북부인 남월을 정복하고 여기에 수군기지 겸 무역거점 9곳을 설치했다. 이어 기원전 109년 무제는 역시 장군 양복을 시켜 수군 7천 명을 태운 누선단을 이끌고 황해로 북상해 위만조선을 멸망시키는 등 고대중국은 해양진출에 적극적이었다.


조선기술 발달과 돛배의 사용


중국의 조선기술은 전국시대에 이르러서는 이미 2층 구조의 누선을 건조할 정도가 되었다. <석명>의 ‘석선편‘을 보면 전투용 배의 경우 ‘선등‘은 앞서 가는 선두배요, 좁고 긴 모양의 ‘봉동‘은 적의 배들을 충돌하는 배이며, ‘적마‘는 빠르고 민첩한 공격선이고, ‘함‘은 적의 투창을 막을 수 있도록 사방에 방패막이를 설치하고 2층의 누각이 있는 주력 전투함이라 기록되어 있다.

당시 대형 전투함은 넓이 1.5m에 길이 30m로 90명의 전투병이 탈 수 있었다고 한다. 최근 발견된 기원전 250년경의 진한시대 조선소 유적에 의하면 이 시대에 건조된 대형배는 폭 8m, 길이 20~30m에 25~30톤을 운반할 수 있었던 것으로 화물을 많이 싣기 위해 군선보다 크게 만들어졌다. 배의 폭이 넓으면 속력을 낼 수 없으므로 속력을 위주로 하는 군선은 상선보다 폭을 좁게 만든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이 조선소에서 건조한 배는 주로 해안 항해용 상선으로 분석된다.

기원전 2세기 한나라의 무제가 남방의 여러 나라를 정복할 때 보낸 군선들은 당시 세계 최고 수준급의 철갑선으로서 4~5층의 누각인 전망대를 설치한 대형 누선이 주력함이었고, 이 누선을 보조하는 수많은 공격선과 정찰선으로 조직된 선단이었다는 기록을 보아도 중국은 일찍부터 조선술이 발달했음을 알 수 있다.

중국이 돛을 처음 사용한 것은 기원전 1600년경 상나라 시대부터였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갑골문자가 가장 성숙했던 상나라 시대에 돛을 뜻하는 범(凡)자가 나타난다. 凡은 후에 나타난 범(帆)자의 원형으로 돛을 그린 것이다. 초기의 돛은 강에서 운행하는 강선에 달아 강을 거슬러 올라갈 때 풍력을 이용한 것인데, 베가 아니라 질기고 튼튼한 넓은 풀잎으로 엮어 만든 것이었으나 전국시대에 들어 베를 만들기 시작하면서 베로 바꾸어 돛을 만든 것으로 보고 있다. 따라서 凡자는 베로 바뀐 돛이라 하여 베수건을 뜻하는 건(巾)자가 하나 더 붙어 범(帆)자로 변했다고 한다.

중국은 기원전 4세기부터 나침반과 해도를 만들어 항해에 이용했다. 전국시대 책사이며 철학가였던 소진이 쓴 <귀곡자> 중 ‘모편‘에 보면 정인(鄭人)들은 옥을 찾으러 갈 때 반드시 지남기를 가지고 간다고 했다. 따라서 항해에도 사용했을 가능성이 크다. 태양이 없는 구름이나 비가 오는 낮, 달과 별이 없는 밤에는 방향을 알 수 없어 지리항법으로 항해하기가 어렵다. 나침반을 발명한 중국인답게 남쪽을 가리키는 자석의 성질을 이용해 만든 나침반의 원시형인 사남(司南) 또는 지남기를 사용하는 항해술로 발달했던 것 같다.

어두운 밤에는 별과 달의 위치를 보고 항로를 잡는 관측성 항해술도 전국시대부터 사용했다. 이를 증명하는 것이 바로 이 시대에 등장한 별의 지도인 성도다. <한서>에 수록된 전국시대 관련 천문사기 중에는 ‘해중‘이라는 문구가 여러 번 나타난다. `해중성점험(海中星占驗)`, `해중오성순역(海中五星順逆)`, `해중28숙국분(海中二十八宿國分)` 등인데, 이들은 전부 천문항법지침서로서 항해에 사용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