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대한사람

구름에 달가듯이 2015. 1. 23. 11:08

현해탄에 잠든 윤심덕과 김우진의 사랑

 

 

윤심덕(尹心悳)과 사의 찬미(死의 讚美 : 1926) 

  

루마니아의 작곡가 이바노비치(Ivanovici, Josif.1845년출생)의 도나우강의 잔물결(Donauwellen Walzer)이라는 곡에 윤심덕이 가사를 붙여 '사의 찬미'가 되었습니다. 

  

가사

 

1.

광막~~한~~~~ 광야에~~~~ 달리는~~~~ 인생아~~~~ 
너의~~~~ 가는 곳~~~~ 그 어데~~~~ 이냐~~~~
쓸쓸~~한 세상~~~~ 적막한~~~~ 고해에~~~~
너는~~~~ 무엇을~~~~ 찾으려~~~~ 하느냐~~~~
 
눈물~~로 된~~~~ 이 세상에~~~~ 나 죽으면~~~~ 고만일까~~~~~
행복~~찾는~~~~ 인생들아~~~~ 너 찾는 것~~ 허무~~~~
 

2.
웃는~~~~ 저 꽃과~~~~ 우는~~ 저 새들이~~~~~
그 운~~~~명이~~~~ 모두 다~~~~ 같구나~~~~~
삶에~~~~ 열중한~~~~ 가련한~~~~ 인생아~~~~
너는~~~~ 칼 위에~~~~ 춤추는~~~~ 자도다~~~~

 

눈물~~로 된~~~~ 이 세상이~~~~ 나 죽으면~~~~ 고만일까~~~~
행~~복~~찾는~~~~ 인생들아~~~~ 너 찾는 것~~~ 허무~~~~
 

3.
허영~~~~에~ 빠져~~~~ 날뛰는~~~~ 인생아~~~~
너 속~~~~였음을~~~~ 네가 아느느냐~~~~~
세상에~~~~ 것은~~~~ 너에게~~~~허무니~~~~
너 죽~~~~은 후는~~~~ 모두 다~~~~ 없도다~~~~
 
눈물~~로 된~~~~ 이 세상이~~~~ 나 죽으면~~~~ 고만일까~~~~
행~~복~~ 찾는~~~~~ 인생들아~~~~ 너~ 찾~는 것~~~~ 허무~~~~

 

 

 

 

음악 플레이어

Donauwellen Walzer(도나우강의 잔 물결) 704

Ivanovici Josif.요시프 이바노비치 작곡

 

 

[윤심덕] 死의 찬미 442

작곡 : Ivanovici Josif.요시프 이바노비치

작사 : 윤심덕.尹心悳

저작권 : 있을 턱이 있나.ㅎㅎㅎ

 

 

 

윤심덕의 이야기들...

 

1926년 윤심덕의 "사의 찬미"는 한국대중음악의 시초였다.  당시로는 보기 드문 일본유학까지 마친 음악엘리트였던 윤심덕이 이바노비치의 유명한 왈츠곡 "다뉴브 강의 잔 물결"에 허무와 염세로 가득한 노랫말을 붙여 취입한 것이다

 

윤심덕은 이 노래를 녹음한 직후 그의 애인이었던 극작가 김우진과 귀국 길의 관부연락선 상에서 이루지 못한 사랑을 비관하여 현해탄에 몸을 던져 동반 자살한 스캔들로 조선반도를 떠들썩하게 했다.


1926년, 일본 오사카에서 레코드 취입을 마치고 돌아오던 부관페리호 갑판에서 애인 김우진과 현해탄에 동반투신. 윤심덕과 김우진의 동반투신자살은 당시의 봉건적 사회분위기에선 충격적인 일이었다. 자유연애관을 공공연하게 피력했던 매력적인 신 여성, 그리고 이미 가정이 있는 와세다대학의 엘리트가 죽음으로 자신들의 사랑을 증명한 것, 그리고 그런 결단을 암시하는 듯한 <사의 찬미>의 비극적인 가사는 암울한 식민지의 대중들의 마음을 극적으로 달아오르게 했다.


루마니아의 작곡가 이바노비치 (Ivanovici, Josif.1845년출생)의 도나우강의 잔물결 (Donauwellen Walzer)이라는곡입니다. 이 곡에 윤심덕이 사랑한 김우진이 가사를 붙여 '사의 찬미'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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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기사


<관부연락선이 사일 오전 네시경에 대마도 옆을 지날 즈음에 양장을 한 여자 한 명과 중년신사 한 명이 서로
껴안고 갑판에서 돌연히 바다에 몸을 던져 자살하였는데 남자는 김우진(金祐鎭)이요, 여자는 윤심덕(尹心悳)이 었으며 연락선에서 조선 사람이 정사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더라>

 

 

관부연락선 도쿠주마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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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심덕은 우리나라 최초의 국비유학생이었고, 최초의 여류성악가였으며, 최초의 대중가수 당대 최다 음반판매량 보유가수, 방송국 사회자, 그 시대의 최신 패션모델이었다고 전해진다.  그 만큼 그녀는 대중의 관심속에 있었고 가장 성공적인 신여성 중의 한 명이였다

 

그런 윤심덕이 1926년에 서른 살의 나이로 자살한다. 정확하게 그녀가 왜 죽었는지를 기술하고 있는 자료는 없다. 윤심덕이 왜 자살을 했던지 간에 그리고 그녀가 정말 자살을 했던지 안했던지 간에 윤심덕의 좌절은 그 시대를 살면서 자기 정체성 확립에 실패했던 우리나라 신 여성의 한계를 보여주는 것 같다.

 

윤심덕은 1897년 1월 26일 평양에서 기독교 가정의 둘째 딸로 태어났다. 윤심덕 위로는 언니 윤심성이 있었고 아래로는 여동생 윤성덕, 남동생 윤기성이 있었다. 윤성덕은 나중에 소프라노로서 이화학당과 미국 노스웨스턴 대학교 음대에서 성악을 전공한 후 1932년부터 1937년까지 이화여전 음악과 교수로 재직하다가 미국에 귀화하여 1970년에 작고 하였다고 한다.

 

윤기성은 연전 문과를 나와 도쿄 음악학교와 미국 오하이오대 성악과에서 바리톤으로 공부한 후 해방 직후 미군정 체신부에서 근무하다가 1950년 6.25 발발 직후 중앙청에서 차를 타고 나오는 길에 인민군의 사격을 받고 즉사했다는 얘기가 전한다.

 

가족 성원들이 줄줄이 이 땅에서 고종명하지는 못했으니 사연많은 집안이라고 아니 할 수 없겠다.
아뭏든, 윤심덕은 1907년에 진남포 사립여학교에 들어가서 서양식 학교교육을 시작 한 후 평양 사립 숭의 여학교, 평양 여자고등보통학교를 다녔고 나중에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로 전학해서 거기서 사범과를 우등으로 1918년에 졸업한다.

 

학교를 다니는 동안 그녀는 공부에만 능했던 것이 아니라 찬송가와 창가 독창자로 주변을 압도하였고 한편으로는 요리에도 능하고 편물과 자수 등에도 능한 다재다능함을 과시하였다고 한다. 또한 윤심덕은 키가 크고 목이 긴 매력적인 용모를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어느 잡지에 의하면 그녀는 "스타일은 그야말로 동양 여자로서는 구할 수 없는 맵시좋은 스타일의 소유자이다"라고 기술되고 있다미모와 다재다능함에 덧붙여 윤심덕은 성격마저도 쾌활하였던 모양인데 아마 그녀의 지나치게 적극적이며 강한 성격이 자신의 인생을 통해 약도 되고 독도 되지 않았나 싶다.

 

잡지 신여성 1923년 10월호는 윤심덕이 "누구를 만나도 존경어를 쓰는 일이 별로 드물다"고 전하고 있다. 또, 조선일보 1926년 12월 26일자에는 그녀의 성격을 짐작케하는 글이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언제인가 그야말로 육척이나 되어 보이는 몸에 옥색치마를 발 뒤축까지 끌고 평안도 수건을 맵시있게 눌러쓰고 평양 천지를 횡행하다가 종로 네거리에서 어떤 청년 남자를 만나서 평안도 사투리로 '야 오랍아 너 잘 있댔니'하고 손을 절레절레 흔드는 것을 보았다"

 

이런 그녀의 성격은 "흐믈거리고 껑충"댄다고 평가되기도 했고 "다만 넘쳐흐르는 젊음을 어찌하지 못하여 그것을 써버리지 않으면 배겨나지 못하고 과잉한 감정을 폭발시키지 않으면 참지 못한다"고 기록되기도 했다.  그래서 한마디로 그녀는 "왈패"라는 별명을 그 시대에 가지고 있었다.

 

1918년에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사범과를 졸업하고서 그녀는 강원도 원주로 발령이 났다가 석달 뒤에는 또 다시 횡성 벽지로 이동 발령을 받았는데 평양여자고보 동창회 모임 때 특별 내빈으로 참석한 조선총독부 학무국장에게 항의를 해서 춘천으로 다시 발령을 받았다는 말이 전하고 있으니 그녀의 당돌했던 성격을 짐작할 만 하다.

 

그녀는 한 때 연극배우로도 활약을 했었는데 연극계로 투신하는 방식도 당돌했다. 당시의 신문 기사에 의하면 어느날 극단 토월회 대표가 편지를 받았는데 그 편지에는 "나는 평소에 연극에 관심이 많았고 연극을 하고 싶으니 나를 만나서 판단해 보고 써주시오"라고 부탁하는 말이 쓰여 있었다고 한다.

 

극단 관계자가 약속장소로 가 보니 그 편지의 주인공은 뜻 밖에 당대의 음악스타 윤심덕이었다고 한다.  윤심덕은 극단에 들어가면서 세 가지 조건을 걸었었는데 그 중에는 무슨 일이든지 자기 마음에 맞춰줄 것을 요구하는 지금 우리 생각에는 기가 막히게 오만한 조건조차 포함되어 있었다.

 

그 시대에 여자가 그 정도의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으니 "사회 생활"이 그다지 순탄하지 못했을 것임은누구라도 가히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일본의 오사카 닛토 레코드 회사에서 윤심덕이 "사의 찬미"등 10여 곡의 노래를 취입하기로 되었을 때피아노 반주는 동생 성덕이 맡기로 하였다. 성덕은 언니 노래가 취입되면 곧 미국 유학의 길에 오르기로 되어 있었다. [이바노비치곡인 '다뉴브강의 물결'에 '사의 찬미' 가사를 붙여 레코드 취입]

 

<윤심덕의  사의 찬미  공연>.


오사카 오카하루 여관에 집을 푼 윤심덕과 성덕 자매는 닛토 레코드 회사 다우치와 교섭 끝에 10여 곡의 취입을 끝냈다. 7월의 무더위 속에서 윤심덕 자매는 그 길로 요코하마에 가서 이별을 가졌다.
미국으로 떠나는 동생 성덕은 윤심덕이 1921년 귀국했을 때 이화여전을 나왔고 뒷날 이전 끌리 클럽의 지휘자로 명성을 떨친 사람이었다.  동생을 미국으로 떠나보내고 윤심덕은 동경에 머물러 있는 김우진 곁으로 달려갔다.

 

죽음,,,


그들의 만남에서 죽음은 비롯되었고 사랑의 밀어에서 죽음은 구체화되었다. 그들 두 사람에게 있어서 사랑의 영원함이란 곧 죽음 그 자체였으므로 죽음을 피한 사랑이 영원이란 기대할 수조차 없는 것이었다.

 

사랑은 죽음에 이르는 길. 아, 그 길인가. 그 길이란 곧 신파조의 연극 대사만은 아니었다.
"풍덩!" 하고 현해탄 검은 바다가 두 사람을 안아 들였다.
김우진과 윤심덕의 나이 30세. 두 사람의 정사는 신극사 최대의 사건으로 기록되었다.  _펌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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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해탄에 가라앉은 사랑


우리나라 개화기(1920~30년대)를 주도했던 여성 예술가 세 명을 꼽자면 시인 김일엽(1896-1971), 화가 나혜석(1896-1948), 그리고 성악가 윤심덕(1897-1926)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은 모두 일본에 유학 가서 신문물을 접한 후 당시 여성들과는 다른 행보를 보였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승려이자 시인, 수필가인 일엽스님은 이화학당 졸업 후 일본 유학을 했으며 1920년에 잡지 <신여자>를 창간, 여성해방을 주창했다. 여성에게 족쇄처럼 채워진 유교의 굴레를 벗어나 자유연애를 주장했으나 결혼에 실패한 이후 환멸을 느껴 스님이 되었다.

 

한국 최초의 여성화가 화가 나혜석(1896-1941) 역시 일본에서 공부를 했다. 조선미술전람회에서 1회부터 5회까지 입상을 했으며 여성화가로서는 최초로 개인전도 열고 소설도 썼다. 나혜석은 현모양처보다는 자신의 예술을 추구하다가 1929년 이혼을 당했으며 이후 1933년 삼천리에 ‘이혼고백서’를 연재하는 등 기존관습에 항거했다.

 

한국 최초의 소프라노 윤심덕(1897-1926)은 앞의 두 여성 예술가와는 좀 다른 일로 일대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일본 동경음악학교에서 성악을 공부한 재원이었으나 유부남인 김우진과 동반자살을 해 세상을 들썩이게 한 것이다.


광막한 황야에 달리는 인생아

너의 가는 곳 그 어데냐

쓸쓸한 세상 험악한 고해(苦海)에

너는 무엇을 찾으러 가느냐


(후렴) 눈물로 된 이 세상에 나 죽으면 그만일까

행복 찾는 인생들아 너 찾는 것 설움 
윤심덕이 1926년 자살하기 직전 부른 대중가요 ‘사의 찬미’의 가사 일부다.

 

이 곡은 ‘다뉴브강의 잔물결’을 번안한 것으로 한국 대중가요의 효시로 보는 시각도 있으며 한국어 음반으로는 처음으로 일본에서 발매되었다. 이 노래는 윤심덕이 김우진과 현해탄에 몸을 던지면서 더욱 화제가 됐다.

 

1926년 8월 4일 새벽 부산과 일본 시모노세키를 오가던 부관연락선이 현해탄을 건너 부산으로 향하던 중 남녀 한 쌍이 물에 빠졌다. 즉시 배를 멈추고 부근을 수색했으나 종적을 찾지 못했다. 승객 명부에는 남자는 김수산, 여자는 윤수선이라 적혀있었고 유류품으로는 여자 지갑에 현금 140원과 몇점의 장신구, 남자 지갑에 20원과 금시계, 만년필로 쓴 유서 등이 있었다. 이들은 가명으로 탑승한 김우진과 윤심덕이었다.

 

8월 5일 각 신문에는 이 사건이 대서특필됐다.

‘현해탄 격랑중에 청춘남녀 정사. 극작가와 음악가가 한떨기 꽃이 되어 세상시비 던져두고 끝없는 물나라로’ ‘장안을 들썩이게 한 악단의 여왕과 백만장자의 정사극’ 등의 제목을 단 기사들이 앞다퉈 실렸으며 김우진과 윤심덕의 살아온 내력들이 소상하게 특집으로 다뤄졌다. 심지어 이 사건에 대해 독자들의 찬반투고까지 연일 실렸다. 실로 세상을 뒤흔든 일대 사건이었다.

 

센티멘탈리즘과 니힐리즘의 결정체라 할 동반자살을 감행한 두 남녀는 당시 최고 지식인으로 문학과 성악, 연극에서 특별한 존재감을 지니고 있었다. 나이도 30세 동갑이었다.

 

윤심덕은 1897년 평양에서 김우진은 같은 해 장성에서 태어났다. 윤심덕은 근근이 살아가는 가정의 4남매 중 둘째딸로 태어났으며 김우진은 벼슬을 한 만석꾼 집안의 장손으로 태어났다.

 

윤심덕은 큰 키에 노래 솜씨가 빼어나고 성격이 활달했다. 어려운 형편에도 평양사립숭의학교에 들어간 건 부모의 교육열 덕이었다. 윤심덕은 성악을 하겠다며 서울로 유학, 경성여고보(경기여고 전신) 사범과를 우등으로 졸업했다. 졸업 후 18세의 나이로 교사를 하다가 19세인 1915년 조선총독부 관비유학생으로 일본 동경음악학교로 유학을 가게 된다.

 

김우진이 일본 유학을 간 것도 1915년이었다. 김우진은 엄한 부친의 뜻을 따라 집안의 토지 관리를 위해 구마코토농업학교로 유학을 갔으나 적성에 맞지 않자 부친의 뜻을 어기고 와세다대학교 영문과로 전학을 했다.

 

두 사람이 만난 것은 1921년, 3.1운동 2년 후 일본 유학생들끼리 고국을 위해 무엇인가를 하자는 취지에서 극예술협회를 결성한 때였다. 이들은 고국에 가서 연극 순회공연을 하기로 뜻을 모았다.

 

윤심덕이 활달하고 적극적이어서 따르는 남자들이 많았던 반면 어려서 어머니를 여의고 여러 계모 손에서 자라난 김우진은 소극적이고 사색적이었다. 

 

윤심덕은 자신에게 대시하는 여러 남자 가운데 특히 홍난파와 가까운 사이였다. 작곡도 하고 바이올린도 켜는 호남아 홍난파와 윤심덕은 음악적 동지이자 친구이자 애인이었다. 김우진은 일찍 결혼해 고향에 아내와 딸을 두고 있던 처지였다. 성격과 환경이 판이하게 달랐던 두 사람은 별로 가까운 사이가 아니었다.

 

하지만 극예술협회에서 부산 공연을 하는 사이 두 사람은 예전에는 없던 호감을 서로에게 가지게 됐다. 여기에는 윤심덕의 적극적인 성격이 한몫을 한 것으로 보인다. 두 사람이 다시 일본으로 돌아간 후에는 연인 사이로 발전했다.

 

윤심덕은 1923년 동경음악학교를 졸업하고 한국 최초의 소프라노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귀국한다. 귀국 무대에서의 반응은 대단했으며 이후 각종 무대에 쉴새없이 초대받는 유명인사가 됐다. 동아일보는 윤심덕의 공연에 대해 ‘밤 지난 해당화의 붉은 화판이 아침이슬에 젖은 듯한 오렌지빛 작은 입술로 옥반에 흐르는 구슬소리와 같이 곱고도 청아한 멜로디를 울리어 한없는 총애를 한몸에 받고 있다’(1926. 8.6.)고 찬사를 보내기도 했다.

 

하지만 윤심덕에게는 부양해야 할 가족이 있었다. 그의 가족은 윤심덕이 귀국하자 모두 서울로 이사를 했으며 동생 두 명의 학비는 당연히 윤심덕의 몫이었다. 명성에 비해 그리 큰 수입을 올리지는 못한 윤심덕은 개인교수 등을 하며 뛰어다녔으나 생활고에 기진하고 좌절했다.

 

김우진은 윤심덕보다 1년 늦게 귀국했다. 하지만 엄한 부친 때문에 신문화에 대한 자신의 뜻을 펼치지 못한 채 목포에 머무르고 있었다. 윤심덕은 가끔 목포로 내려가 김우진을 만나곤 했다.  생활고에 시달리던 윤심덕은 남산 밑 부호 이용문과의 스캔들-이용문이 돈으로 윤심덕을 샀다는-이 터지자 북만주로 피신했다.

 

윤심덕이 6개월 만에 귀국했을 때 김우진은 서울에 머무르며 날카로운 필설을 날리고 있었다. 하지만 윤심덕은 이미 예전의 환호를 잃었다. 귀국해서 가진 무대는 철저히 외면당했다. 실망한 윤심덕에게 김우진은 연극을 해보라고 권했고 윤심덕은 그 말을 따라 극단 토월회에 입단한다.

 

윤심덕의 토월회 입단은 빅 뉴스였다. 신문들은 ‘악단의 여왕 배우 변신’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실었고 식구들 반대에 부딪힌 윤심덕은 여관방을 얻어 기거하며 연기 연습을 했다.

 

하지만 윤심덕의 연기는 딱딱했고 성악을 한 목소리는 오히려 대사 전달에 방해가 됐다. 더군다나 한국 최초의 소프라노라고 우러러보던 대중은 연극배우로 변신한 윤심덕에게 화류계 여자가 됐다는 식으로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윤심덕은 재기에 실패하자 좌절했고 김우진은 부친과의 갈등과 행동할 수 없는 지식인인 자기 모습에 좌절했다. 결국 김우진은 윤심덕에게 말도 없이 다시 일본으로 가버렸다.

 

김우진이 일본으로 가자 윤심덕은 일본 레코드회사에 취입 의사를 밝혔다. 일본 회사 측은 대환영이었다. 윤심덕은 김우진의 동경 주소를 알아낸 후 오사카로 향하는 배에 올랐다. 배웅 나온 친한 작가 이서구에게 선물로 무엇을 사다줄까 묻자 이서구는 넥타이나 하나 사 보내라고 말한다. 죽어도 사와요? 라고 농담조로 묻는 윤심덕에게 이서구 역시 농으로, 죽으려거든 넥타이나 부치고 죽으라고 한다.

 

일본 레코드회사에서 ‘사의 찬미’를 비롯해 26곡을 취입한 윤심덕은 레코드판과 함께 파란 실크 넥타이를 이서구에게 배편로 부친다. 이 넥타이는 윤심덕이 죽은 후 이서구 손에 닿았으며 이서구는 이 넥타이를 차마 맬 수 없어 47년 동안 고이 보관했다.

 

레코드 취입을 마친 윤심덕은 묵고 있던 오사카 여관에서 자신의 짐을 다 정리한 후 김우진에게 전보를 쳐 오사카로 와달라고, 오지 않으면 죽어버리겠다고 한다. 당시 김우진은 동경에서 독일 유학을 꿈꾸며 독일어 공부를 하고 있었다. 김우진은 함께 공부하던 친구 홍해성에게 윤심덕의 편지 내용 알리고 오사카행 열차를 탄다.

 

오사카에서 만난 윤심덕과 김우진은 며칠을 함께 보낸 후 귀국하는 배를 타고 현해탄에 빠져 동반자살을 한다. 그믐이 가까운 어두운 바다였다. 두 사람의 시신은 김우진 집안에서 현상금까지 내걸었으나 끝내 찾지 못했다.

 

이 충격적인 사건을 접한 일부 사람들은 윤심덕은 이미 자살을 결심했으며 김우진은 그런 윤심덕에 이끌려 돌발적인 죽음을 택했다고 추측했다. 하지만 일제 하 막막했던 시절 당시의 젊은이들, 특히 김우진처럼 충돌지점에 서있는 이에게는 깊은 좌절과 번뇌가 의식 속에 자리하고 있어 선택은 순간이었을지라도 결정은 잠재해 있었을 것이라 보여지기도 한다.

 

두 사람 사건이 거의 일주일 동안 대서특필 되는 가운데, 춘원 이광수는 ‘사회의 죄인’이라는 제하의 글에서 이 사건에 대해 언급해 눈길을 끌었다.

 

이광수는 ‘죽음 자체에는 시비를 걸 수 없으되 두 사람이 다같이 조선 땅에서 나고 자랐으며 해외에 나가 고등교육을 받게 된 학비도 조선사람이 부담한 덕택이니 그들은 조선사람들에게 책임과 의무를 이행해야할 채무가 있고 그 채무를 상환하기 전에 이슬로 사라졌으니 조선사회 조선인에 대한 죄인’이라 주장했다.

 

지식인의 책임론을 제기한 것이다. 이어 그는 사회의 무정함도 지적했는데 ‘조선사회에서는 분수 이상으로 찬양하다가도 한번 그르치자 정도 이상으로 혹독하게 대한다’며 윤심덕에 대한 사람들의 추앙과 멸시를 지적했다.

 

특집기사들이 시들해지자 루머가 돌았다. 두 사람이 죽은 것이 아니라 이탈리아 나폴리에서 함께 살고 있다는 것이었다. 악기점을 운영하는 한편으로 윤심덕은 음악공부를 김우진은 문학공부를 계속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가하면 한 음악평론가는 윤심덕의 모살설을 내세웠다. 레코드를 취입한 일본 레코드사 사장이 윤심덕이 취입을 끝내놓고 죽으면 그 레코드가 날개 돋힌 듯 팔려 나갈 거라는 계산에서 그리 했을 것이라는 억측을 한 것이다.

 

실제로 윤심덕의 자살로 덕을 톡톡히 본 것은 일본 레코드사였다. 한국은 물론 일본에서도 두 사람의 자살사건이 기폭제가 되어 십만장 넘게 판이 팔려나갔다. 이광수 지적대로라면 윤심덕은 조선인에게 진 빚을 갚는 대신 일본인을 벼락부자로 만든 아이러니를 남긴 셈이었다.

 

윤심덕의 파란만장한 삶은 1991년 <사의 찬미>로 영화화되기도 했다. 김호선 감독의 이 작품에는 장미희가 윤심덕, 임성민이 김우진, 이경영이 홍난파 역을 각각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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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심덕·김우진 ‘현해탄 정사(情死)’ 미스터리
 
 


윤심덕과 김우진의 생존설을 제기한 '삼천리' 1931년 1월호 '불생불사의 악단 여왕 윤심덕' 기사  [신동아]

 

 

1926년 8월3일 밤 11시 시모노세키 항. 관부연락선 도쿠주마루(德壽丸)가 요란한 기적을 울리며 부산항을 향해 출발했다. 그믐을 사흘 앞둔 여름밤은 칠흑같이 어두웠다. 한 시간이 지나 날이 바뀌자 아스라이 보이던 항구의 불빛마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한증막 같은 객실에서 사람에 부대끼며 비지땀을 흘리던 삼등실 승객들도 피로에 지쳐 차례로 골아 떨어졌다.

 

새벽 4시 도쿠주마루가 쓰시마섬 앞바다를 통과할 때, 갑판을 순찰하던 급사가 일등실 객실문 하나가 열려 있는 것을 발견했다. 손전등으로 안을 비춰보니 승객은 오간 데 없고 짐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꼭두새벽에 문을 열어놓고 도대체 어디 간 거지?'

 

주위를 둘러보니 갑판 위에는 개미 새끼 하나 보이지 않았다. 급사는 불길한 예감이 들어 객실 안으로 들어가 불을 켰다. 여행가방 위에 ‘보이에게’로 시작되는 메모지 한 장과 팁 5원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미안하지만 짐을 집으로 보내주시오. 목포부 북교동 김수산. 경성부 서대문정 윤수선.' 급사는 메모지를 움켜쥐고 황급히 조타실을 향해 내달렸다. 얼마 후 밤새도록 승객들의 숙면을 방해하던 둔탁한 엔진 소음이 멈췄고, 도쿠주마루의 모든 객실에는 불이 들어왔다. 사라진 일등실 승객 두 명을 찾기 위해 승조원들과 승객들은 배 안 구석구석을 뒤졌고, 선장은 뱃머리를 돌려 항로 주변을 수색했다.

 

도쿠주마루는 예정시간보다 반나절이나 늦게 부산항에 입항했다. 부산항에서 하선한 승객은 시모노세키 항에서 탑승한 승객보다 두 명이 적었다.

 

의문의 情死

 

이튿날 '동아일보' '조선일보' '매일신보'는 물론 '도쿄아사히심분'까지 현해탄에 몸을 던져 정사한 청춘 남녀의 소식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기사는 김우진과 윤심덕이 '서로 껴안고' 현해탄에 몸을 던졌다고 전했지만, 실제로 두 사람이 자살하는 장면을 직접 목격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승객 모두가 잠든 새벽 4시에 두 사람이 사라진 것을 발견했으므로 그들이 언제 어느 지점에서 투신했는지, 과연 투신한 것이 맞는지조차 확실하지 않았다. 윤심덕의 유류품에는 현금 140원과 장신구, 김우진의 유류품에는 현금 20원과 금시계가 있을 뿐 유서는 발견되지 않았다.

 

윤심덕은 최고의 소프라노로 대중의 인기를 한몸에 받던 음악가였고, 김우진은 목포 백만장자 김성규의 장남으로 와세다대학 영문과를 졸업한 전도유망한 극작가였다. 목격자도 없고 유서도 남기지 않아 두 사람이 무엇 때문에 어떻게 동반 자살했는지 정확히 알 길이 없었지만, 언론은 정사라 단정하고 앞 다투어 추측기사를 쏟아냈다.

 


윤심덕(왼쪽)과 동생 윤성덕. 

 

사고 발생 사흘 후인 8월7일 밤, 김우진의 동생 김철진은 목포 자택으로 찾아온 기자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김우진의 가족은 현상금 500원을 걸면서까지 시신을 찾기 위해 노력했지만, 두 사람의 시신은 끝내 발견되지 않았다. 유서도 없고 시신도 없는 의문의 정사였다.

 

사고 발생 이틀 후, 윤심덕이 사고 직전 오사카 닛토(日東)레코드에서 27곡을 녹음한 사실이 알려졌다. 원래 계약은 26곡을 녹음하는 것이었지만, 윤심덕은 이바노비치의 왈츠곡 ‘다뉴브 강의 잔물결’에 자신이 가사를 붙인 노래 한 곡을 더 녹음하자고 제안했다. 윤심덕이 노래하고 동생 윤성덕이 피아노로 반주한 그 노래가 바로 ‘사(死)의 찬미’다.

 

'사의 찬미'가 포함된 윤심덕의 유고 음반은 사고 발생 일주일 후부터 오사카를 시작으로 일본과 조선 전역에서 대대적으로 발매됐다. '사의 찬미'는 일본에서 발매된 최초의 조선어 노래였다. 정사 사건에 관한 사회적 관심에 힘입어 '사의 찬미'는 전대미문의 판매고를 올렸다.

 

윤심덕이 살아 있다고?

 

"얼마나 기쁘십니까?" 

1930년 12월, 매일신보 김을한 기자가 이화여전 음악과 윤성덕 교수를 찾아가 대뜸 축하인사를 건넸다. 윤성덕은 윤심덕과 오사카에서 함께 지내다 윤심덕이 현해탄에 투신하기 불과 몇 시간 전 요코하마에서 미국 유학길에 올랐기 때문에 미국에 도착한 후에야 언니의 자살 소식을 들었다. 노스웨스턴대학 음악과를 졸업한 윤성덕은 1928년 귀국해 모교인 이화여전에서 후학을 가르쳤다. 김을한의 뜬금없는 질문에 윤성덕이 되물었다.

 

한 시간 남짓 이어진 인터뷰가 끝나갈 때 윤성덕은 언니에 대한 세상 사람들의 지나친 관심에 불만을 표시했다. 그 녀가 “남이야 살았든지 죽었든지 무슨 걱정이냐, 죽었으면 죽었고 살았으면 살았지. 도대체 조선사회는 왜 이렇게 남을 칭찬하기도 잘하고 욕하기도 잘하는지 모르겠다”고 되묻자, 김을한 기자는 인터뷰에 응해주어 고맙다는 말로 자리를 물러나야 했다. 윤심덕이 살아 있다는 윤성덕의 확신만 확인했을 뿐 뚜렷한 증거를 얻지 못한 채였다.

 

윤심덕과 김우진의 생존설은 두 사람이 정사한 직후부터 지속적으로 제기됐다. 두 사람 모두 유서도 시체도 발견되지 않았으니 가족들이 그렇게 믿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정작 두 사람의 생존설을 확대 재 생산한 것은 호사가들과 언론이었다. 두 사람의 정사 덕분에 엉뚱한 사람이 돈방석에 앉았으니 호사가들이 입방아를 찧을 만도 했다.  

 

 

 

 김우진과 윤심덕의 현해탄 동반자살을 보도한 조선일보 1926년 8월 5일자  기사.

 


윤심덕의 삶과 애정사를 전하는 ‘삼천리’ 1938년 11월호 '다한한 윤심덕' 기사. 

 
동반자살한 이후의 상황도 의문이었지만, 자살 동기나 두 사람 사이의 관계는 더 큰 의문이었다. 윤심덕과 김우진은 제각기 아픔과 고민은 있었지만 함께 정사해야 할 뚜렷한 이유는 없었다. 윤심덕에게 김우진은 여러 남자 가운데 하나였을 뿐이고, 김우진 역시 함께 죽어야 할 만큼 윤심덕을 사랑하지는 않았다.

 

'왈녀'라 불리던 여인

 

윤심덕은 1897년 평양 순영리에서 부친 윤석호와 모친 김씨 사이의 1남 3녀 중 둘째딸로 태어났다. 윤심덕이 태어난 직후 그의 가족은 진남포로 이주했다. 부모는 모두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 윤석호는 나물장사를 하고 김씨는 병원에서 허드렛일을 하면서 힘겹게 살았지만 네 자녀를 모두 훌륭히 교육시켰다.

 

맏딸 윤심성은 이화학당을 졸업하고 경상북도 안동으로 출가했고, 막내딸 윤성덕은 이화학당을 졸업한 후 모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 윤심덕의 하나뿐인 남동생 윤기정은 연희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하고 도쿄음악학교와 오하이오대학에서 성악을 공부했다.

 

모친 김씨가 윤심덕을 임신했을 때 쌍둥이를 임신한 듯 보일 정도로 배가 불렀다. 윤심덕은 ‘6척(180cm) 장신’이라 불릴 만큼 키가 컸고, 어려서부터 성격이 사내아이같이 활달해 ‘왈녀’라 불렸다. 둘째였지만 4남매의 리더 노릇을 했고 동생을 위해서라면 어떠한 희생도 감수할 만큼 우애가 남달랐다. 여기까지가학계에 공인된 윤심덕의 가정환경이다. 하지만 이와는 다른 기록도 전해진다.

 

윤심덕의 집안이 ‘큰 부잣집’이 아니라는 점에서 신빙성이 떨어지는 기록이다. 하지만 서른에 이르도록 윤심덕의 혼사가 번번이 깨어졌고 윤심덕이 가까운 친구들에게 가족들이 자신을 차별한다고 털어놓았음을 미루어볼 때, 윤심덕이 정상적인 딸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윤심덕은 열한 살에 진남포 삼숭학교에 입학해 박인덕, 김일엽과 단짝 친구로 지냈다. 공교롭게도 훗날 세 여인 모두 남자 때문에 비극적 삶을 살아야 했다. 박인덕은 청년 부호 김운호와 결혼했다가 남편이 사업에 실패하자 조선 최초로 남편에게 위자료를 주고 이혼했고, 김일엽은 네 차례 결혼에 실패한 뒤 수덕사에 들어가 머리를 깎고 여승이 되었다.

 

열네 살 되던 해에 집안이 진남포에서 평양으로 이사하자 윤심덕은 평양 숭의여학교로 전학했다. 평양에 이주한 이후 모친 김씨는 미국인 여의사 홀 부인이 운영하는 광혜여의원에서 일했다. 그러한 인연으로 홀 부인은 윤심덕의 후견인이 되었다. 의사가 되는 게 어떻겠느냐는 홀 부인의 권고에 따라 윤심덕은 숭의여학교를 졸업한 후 평양여자고등보통학교에 편입했다.

 

숭의여학교는 총독부에서 정식으로 인가를 받은 학교가 아니어서 상급학교에 진학하려면 인가받은 학교에서 2년간 더 공부해야 했다. 평양여고보에서 공부하면서 윤심덕은 의사가 자신의 적성에 맞지 않음을 깨닫고, 졸업 후 서울에 올라와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사범과에 편입했다.

 

1915년 윤심덕은 총독부 관비유학생에 선발돼 교사생활을 1년 만에 청산하고 도쿄 유학을 떠났다. 아오야마가쿠인(靑山學院)을 거쳐 도쿄음악학교 성악과에 입학했다. 도쿄음악학교는 우에노(上野)공원에 위치해 우에노음악학교라고도 불렸다. 윤심덕은 도쿄음악학교에 입학한 최초의 조선인이었다.

 

김우진과의 만남

 

도쿄에서 윤심덕은 유학생들과 폭넓게 교유했다. 윤심덕은 왈녀라는 별명처럼 성격이 남성적이고 쾌활해서 남학생에게도 내외하는 법 없이 몇 번 만나면 서슴없이 말을 놓았다. 홍난파, 채동선, 김우진 등 숱한 남학생과 염문을 뿌렸지만, 자기가 싫으면 아무리 구애해도 받아주지 않았다.

 

니혼(日本)대학 문과에 다니던 박정식은 윤심덕에게 반해 약혼하자고 하루에도 몇 번씩 연애편지를 보냈다. 꽃다발과 사랑의 시를 전하면서 전력을 다해 구애했지만, 윤심덕은 냉정하게 뿌리쳤다.

 

박정식은 실연의 충격으로 정신이상이 생겨 학업을 중도에 포기하고 귀국해 몇 년 동안 총독부병원 8호실에 입원해 치료를 받았다. 박정식의 친구들이 윤심덕에게 찾아와 “사람이 그 지경까지 되었는데 사랑을 받아줄 수 없느냐?”고 부탁하자 윤심덕은 짜증을 내며 퉁명스럽게 답했다. 

 


부유한 집안 때문에 불행했던 극작가 김우진.
윤심덕의 애인 가운데 한 사람이긴 했지만, 같이 정사를 결행할 만한 상황은 아니었던 듯하다.

 
"그것이 왜 내 탓이냐. 아무리 내게 반해 실성했기로 내가 싫은데 어떻게 사랑을 받아주느냐?"

윤심덕은 싫은 사람에게는 한없이 쌀쌀맞게 대했지만,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주위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서슴없이 애정을 표시했다.

 

1921년 윤심덕은 여름방학을 이용해 김우진, 홍난파, 조명희 등 30명의 청년들과 함께 일본에 거주하는 조선인 노동자 단체 동우회의 운영비 모금을 위한 고국 순회공연에 나섰다. 이때 윤심덕은 김우진과 처음 만났다. 그때만 해도 김우진은 목포에 아내와 딸이 있었던 데다 도쿄에서 일본인 간호사와 사랑에 빠져 있었기 때문에 선머슴 같은 윤심덕에게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윤심덕도 동우회 순회공연단에 참여한 다른 청년과 친밀한 관계여서 김우진에게 관심을 가질 겨를이 없었다.

 

김우진은 1897년 목포의 대지주 김성규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윤심덕과 동갑이었지만 성격이나 가정환경은 판이했다. 가난한 집 둘째딸로 자란 윤심덕이 쾌활하고 대범했음에 반해 부잣집 맏아들로 자란 김우진은 예민하고 신중했다. 김우진은 어려서부터 문학에 뜻을 두었지만 완고한 부친은 장남인 그가 가업을 잇기를 바랐다.

 

김우진은 목포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목포심상고등소학교를 다니다가, 1915년 부친의 뜻에 따라 일본 구마모토농업학교로 유학을 떠났다. 하지만 문학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졸업 후 와세다대 영문과에 입학했다.

 

김우진이 윤심덕을 처음 만난 것은 와세다대 2학년 때였다. 졸업을 한 해 앞둔 1923년, 김우진과 사귀던 일본인 간호사가 백혈병으로 사망했다. 그해 여름방학 김우진은 목포 본가에서 지내며 죽음이 앗아간 실연의 아픔을 달랬다.

 

김우진은 도쿄음악학교를 졸업하고 평양으로 돌아온 윤심덕에게 동생들과 함께 목포로 놀러 오라며 편지와 차표 석 장을 보냈다. 윤심덕은 윤성덕, 윤기성을 데리고 목포로 내려와 김우진의 집에서 조촐한 가족음악회를 열었다. 윤성덕의 피아노 반주에 맞춰 소프라노 윤심덕과 바리톤 윤기성이 노래를 불렀다. 김우진은 아내와 함께 윤심덕 남매를 극진히 대접했다.

 

1924년 도쿄 유학을 마치고 금의환향한 윤심덕은 성악가로서 전성기를 구가했다. 윤심덕이 독창자로 나서지 않는 음악회가 없을 정도로 출연요청이 쇄도했다. 하지만 독창자로 나선다고 수입이 생기는 것은 아니었다. 더욱이 관비유학생이 귀국하면 관립학교 교사로 임용되는 것이 관례였지만, 몇 달을 기다려도 교사 발령이 나지 않았다. 윤심덕은 조선 최고의 성악가로 이름을 날리면서도 정작 생계를 걱정해야 할 만큼 어려운 지경에 내몰렸다.

 

이용문 스캔들

 

윤심덕의 나이도 어느덧 스물여덟이었다. 혼기가 꽉 차다 못해 넘긴 상태였다. 도쿄 유학 시절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많은 남성이 윤심덕에게 구애했지만 혼처가 마땅치 않았다. 재산이 있는 남성은 죄다 기혼자였고, 그에게 구애하는 미혼자는 재산이 없었다. 한때 함경남도 대부호의 아들 김홍기와 혼담이 상당히 진전됐지만, 신랑 집안에서 뚜렷한 이후 없이 혼담을 파기했다. 비슷한 시기 윤심덕은 엄청난 스캔들에 휩싸였다.

 

이용문은 대한제국 내장원경과 대한천일은행 은행장을 지낸 이봉래의 아들이었다. 이용문 자신도 대한제국 정삼품 장례원 전례를 지냈다. 을지로 일대 3만여 평의 토지를 소유한 대지주였고, 소문난 호색한이었다. 이용문과 부적절한 관계가 세상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자 윤심덕은 더 이상 조선에서는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어 하얼빈으로 도피했다.

 

하얼빈으로 도피한 윤심덕은 반 년 동안 배형식 목사 집에서 은거했다. 1925년 6월 윤심덕은 형부의 사망 소식을 듣고 젊은 나이에 남편을 잃은 언니를 위로한다는 명분으로 귀국했다.

 


'삼천리' 1932년 5월호 '이태리 총영사가 조사한 윤심덕씨 생사'

 


윤심덕이 이용문과 스캔들을 일으켰을 때 김우진은 와세다대를 졸업하고 목포로 돌아왔다. 귀국 이후 김우진은 문학과 연극 운동을 하고 싶었지만 부친의 강요로 상성합명회사 사장에 취임했다. 상성합명회사는 김우진 집안이 소유한 막대한 토지를 관리하는 회사였다. 원하지 않는 일을 억지로 떠맡은 김우진은 우울한 나날을 보냈다.

 

낮에는 회사 일을 돌보고 밤 시간을 이용해 작품을 읽고 썼다. 부친에게 자신을 풀어달라고 간청했지만 번번이 거절당했다. 스캔들에 휩싸여 절망적인 상황에 처한 윤심덕보다 나을 것이 없는 처지였다. 김우진과 윤심덕은 편지를 주고받으며 서로의 처지를 위로했다.

  

배우가 된 성악가

 

1926년 김우진은 윤심덕에게 광무대에서 상설 공연을 하는 토월회에 입단할 것을 권했다. 조만간 집을 나온 후 극장을 차려 윤심덕과 함께 운영할 생각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조선사회는 여배우를 기생처럼 여겼다. 여배우가 되는 것은 신세를 망치는 일처럼 인식됐기에 극단들은 여배우를 구하지 못해 어려움을 겪었다.

 

그런 시절, 한때 악단의 여왕으로 명성을 떨치던 윤심덕이 여배우가 되겠다고 자원해서 나서자 토월회는 쌍수를 들고 환영했다. 윤심덕은 집안의 만류를 피하기 위해 대구 일갓집에 간다는 핑계를 대고 집을 나와 여관에서 기거했다

 

. 윤심덕이 공연에 출연한다는 광고가 나가자 이용문과 염문을 뿌려 하얼빈까지 달아난 뻔뻔스러운 여자 얼굴이나 보자고 관객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일갓집에 간다고 집을 나간 윤심덕이 여배우가 됐다는 소식을 듣고 그의 모친은 열흘 동안 매일같이 광무대를 찾아와 그를 무대에서 끌어내리려 했다. 모친이 찾아왔다는 연락을 받으면 윤심덕은 손수건으로 얼굴을 가리고 뒷문으로 도망치듯 광무대를 빠져나왔다.

 

윤심덕은 여배우로 성공하지 못했다. 그의 몸짓은 둔하고 부자연스러웠고, 발음이 부정확해서 대사가 객석까지 전달되지 않았다. 가끔 오쿠다 사진관 2층에 마련한 자신의 거처에서 상경한 김우진과 만나는 것이 유일한 낙이었다.

 

1926년 6월 김우진은 2년 동안의 목포 생활을 청산하고 집을 나왔다. 가업을 더 이상 돌보지 않고 예술에 전념하겠다고 선언하자 부친은 잘 가라는 말조차 하지 않고 맏아들을 내쫓았지만, 모친은 생활비에 보태 쓰라고 3000원을 마련해주었다. 집을 나온 김우진은 윤심덕에게 알리지도 않고 도쿄로 건너갔다.

 

김우진이 도쿄로 떠난 지 한 달 후 윤심덕은 음반 취입과 미국 유학을 떠나는 동생 배웅을 위해 오사카로 건너갔다. 닛토레코드에서 27곡을 취입한 후 도쿄에 있는 김우진에게 전보를 쳤다.

'당장 달려오지 않으면 죽어버리겠소.'

 

1926년 8월3일, 윤성덕이 미국행 배를 타기 위해 요코하마로 떠나자, 윤심덕은 도쿄에서 황급히 달려온 김우진과 함께 시모노세키로 가서 관부연락선 도쿠주마루에 탑승했다. 그 후 아무도 윤심덕과 김우진을 보지 못했다. 

 

윤심덕 생존설의 진상

 

1930년 12월 김우진의 동생 김철진과 김익진은 총독부에 수색원을 제출함으로써 한동안 잠복했던 윤심덕·김우진 생존설은 또다시 수면으로 떠올랐다. 생존설은 ‘윤심덕과 김우진이 관부연락선 도쿠주마루에서 현해탄에 몸을 던져 정사했다는 것은 한낱 연극일 뿐이고, 실상은 도쿠주마루 일등선실 급사를 매수해 정사한 것처럼 위장한 후 나가사키를 거쳐 상하이로 가서 중국인 명의로 다시 이태리로 건너간 후 로마에서 악기점을 경영하면서 단란한 가정을 꾸몄다’고 설명한다.

 

1930년 제기된 윤심덕 생존설이 놓치고 있는 한 가지 의문은 두 사람이 과연 정사할 만큼 사랑하는 사이였는가 하는 점이다.

 

윤심덕은 김우진만 사랑한 순간이 단 하루도 없었다. 언제나 동시에 여러 사람과 사랑을 나눴다. 김우진은 유부남이었고, 일본인 간호사를 사랑했다는 기록은 남아 있어도 윤심덕을 진심으로 사랑했다는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두 사람이 살림을 차린다고 손가락질하거나 뜯어 말릴 사람도 없었다. 1920년대 조선사회에는 ‘제2부인’이라는 용어가 있을 정도로, 유부남과 처녀가 살림을 차리는 것이 바람직하지는 않지만 드문 일도 아니었다.

두 사람이 정사할 이유가 없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죽음을 가장해 로마에서 신분까지 속이고 함께 살 이유도 없었던 것이다.

 

1931년 11월, 이탈리아 주재 일본영사관은 김우진의 유족에게 “로마에는 김우진과 윤심덕이라는 이름을 가진 조선인이 살지 않으며, 동양인이 경영하는 악기점도 없다”고 공식적으로 통보했다. 하지만 두 사람의 생존설에서 제기한 것과 같이 중국 여권으로 신분을 가장하고 살 경우에 대해서는 확인하지 못했다.

 

여러 가지 정황으로 미루어 볼 때, 윤심덕과 김우진이 1926년 8월4일 현해탄에서 동반자살한 것은 사실인 듯하다. 그렇다 하더라도 두 사람의 동반자살이 정사라는 믿음은 언론이 만들어낸 신화에 지나지 않는다.

 [출처] : 전봉관 한국과학기술원(KAIST) 교수·국문학

 

[그때 오늘] 김우진·윤심덕 현해탄 투신 … 노래 ‘사의 찬미’ 공전의 히트

 

 

김우진과 윤심덕. 김우진은 대한제국기 무안감리를 지낸 목포 부호 김성규의 맏아들로 와세다대 영문과를 졸업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극작가로 평가받는 그이지만 가정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자살할 이유는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윤심덕 역시 유부남을 사랑한 것 말고도 숱한 고민을 안고 산 신여성이었다. 그러나 둘 모두 죽을 핑계보다는 살 이유가 훨씬 많은 사람들이었다.

 

1927년 8월 4일 오전 4시, 부산행 관부연락선 도쿠주마루(德壽丸)는 쓰시마섬 앞을 지나고 있었다. 그때 배 안을 순찰하던 급사가 허겁지겁 선장에게 달려와 일등객실 손님 두 명이 사라졌다고 보고했다. 배 안을 샅샅이 뒤지고 항로를 거슬러 가며 수색했지만 사라진 사람은 찾지 못했다. 객실 안에서 “미안하지만 짐을 집으로 보내 주시오”라는 글이 적힌 메모지만 나왔을 뿐이다.

실종된 두 사람은 극작가 김우진(당시 30세)과 배우 출신 소프라노 윤심덕(당시 30세)이었다. 조선 내 모든 신문은 두 사람의 선상 실종을 ‘조선 최초의 선상(船上) 정사(情死)’로 단정했다. 유부남이긴 했지만 부잣집 아들에 배운 것도 많으며 인물도 빼어난 당대의 ‘엄친아’와 조선 최고의 소프라노였던 당대의 ‘스타’가 함께 죽을 특별한 이유를 찾지 못한 것은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더구나 윤심덕이 실종된 직후 그녀가 마지막으로 취입한 노래가 유성기에 실려 곳곳에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광막한 황야에 달리는 인생아/너의 가는 곳 그 어데냐/쓸쓸한 세상 험악한 고해(苦海)에/너는 무엇을 찾으러 가느냐/눈물로 된 이 세상에 나 죽으면 그만일까/행복 찾는 인생들아 너 찾는 것 설움’. 헝가리의 민족 작곡가 이오시프 이바노비치의 ‘다뉴브강의 잔물결’에 가사를 붙인 노래 ‘사(死)의 찬미’는 당시 조선인들이 두 사람의 죽음에서 받은 연상(聯想)과 결합해 공전의 히트를 쳤다. 중혼(重婚)이 드물지 않던 시절임에도 두 사람이 정말 이뤄질 수 없는 관계였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둘이 정말 그토록 사랑하는 사이였는지도 돌아볼 겨를이 없었다. 의문은 오히려 엉뚱한 방향으로 향했다. 둘이 죽음을 가장하고 이탈리아로 사랑의 도피 행각을 벌였다는 소문은 1931년 11월 이탈리아 주재 일본영사관의 조사 결과가 도착할 때까지 수그러들지 않았다.

1920년대는 자살의 유혹이 거세던 시대였다. 일본 경제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전후 공황’, 1923년 관동대지진 이후의 ‘진재(震災) 공황’ 등으로 불황의 늪에서 허우적대고 있었다. 고등교육을 받고도 취직하지 못한 젊은이들이 널려 있었고, 낭만주의니 허무주의니 하는 사조도 횡행했다. 둘의 죽음에 대한 유별난 관심은 당대의 식민지 젊은이들이 자신의 절망을 투사(投射)했기 때문이다.

한국인의 자살률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최고라고 한다. 유명 연예인의 자살이 잇따르고 단지 같이 죽기 위해 만나는 사람들까지 나오고 있다. 자살을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시대의 문제로 고민해야 할 때다.

전우용 서울대병원 병원역사문화센터 연구교수

 

 

잘 읽었습니다. 출처도 탄탄하고 잘 정리하셨네요. 관부연락선을 조사하다가 여기까지 왔네요. 잘 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