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의지혜/길따라 발길따라

구름에 달가듯이 2015. 4. 20. 15:01

 

중국 태항산 주마간산기(太行山走馬看山記)-그랜드캐년은물럿거라  

 

 

 

 

태항산 주변에는 아름다운 구련산과 왕망령이 마주보고 있으며 근대사엔 우리나라 광복군과 중국의 로군이 연합하여 일본국과 맞서 치열한 전투를 벌인곳이기도. 태항산 대협곡에는 국제 페러글라이딩 기지가 있는 석판암이 있으며 가뭄을 해결하는 홍기거가 . 주역의 발원지인 유리성과 2006 유네스코에 등제된 은허박물관이 .  

 

구련산은 9개의 연꽃이 피어 오르는 듯하여 구련산이라 불리게 되었. 태항산 남부에 위치하며  120m 천호폭포, 웅장한 하늘문과 같은 천문구,소박한 원주민들이 살고 있는서련촌천년의 사찰 서련사, 계곡을 따라 아름다운 폭포가 이어지는 선지협등 볼거리가 . 

 

구련담은 서련현 자연관광의 북단에 다. 천호폭포가 쏟아져 내리며 폭포 아래에 모여 늪을 형성한.담수는 널려진 돌중에서 줄줄 흐르며 서로 연결되어 9개의 늪을 형성한.구련노모는 민간의 질환을 치료하기 위하여 9편의 연꽃잎을 뿌려 구련담을 형성하였. 명나라 만력년에 황후가 이곳을 관광한후 구련담으로 제명하였으며 각각 9개의 늪을 이름 지었습니다. 현지의 전설에 의하면 구련담을 따라 돌면 백병이 제거 된다아는 습관이 있습니다.

왕망령은  중국의  국가  지리에  가장  아름다운  협곡의  하나로  지정된  왕망령은  하남성과  인접한  산서성  진성시능천현의  동쪽.

 

 

 

 

 

 

 

 

 

 

 

 

 

 

 

 

 

 

 

 

 

 

 

 

 

 

 

 

 

 

 

 

 

 

 

 

 

 

 

 

 

 

 

 

 

 

 

 

 

 

 

 

 

 

 

 

 

 

 

 

 

 

 

 

 

 

 

 

 

현대판 우공이산(愚公移山), 맨손으로 일군 태항산(太行山) 궈량동(郭亮洞)

 

'세계 9대 불가사의'라 일컬어지는 인공 터널 '궈량동(郭亮洞)'이 또한 유명하다. 예로부터 궈량춘에서 외부와 통하는 길은 오직 협곡과 절벽 위를 이어주는 '천제(天梯)' 뿐이었다.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오르내리는 것도 너무 위험했다.

 

 1971년 가을, 마을 서기였던 선밍신(申明信)의 제의로 선신푸(申新福), 왕휘이당(王懷堂), 선푸구이(申福貴) 등이 밧줄을 사용해 절벽의 높이와 거리를 측정했고 전통 방식으로 그림을 그려 상급기관의 전문가에게 터널 공사에 관한 자문을 구했다.

 

마을 사람들도 인공 터널 건설에 적극적이었다. 자발적으로 산양, 약초 등을 내다 팔아 해머, 정 등 돌 깨는 장비를 구입했다. 전기도 없고, 기계도 없는 최악의 조건이었지만 마을 사람들은 13명의 ‘동굴 굴착 돌격대’를 조직했다. 허리에 줄을 감고 절벽에 매달려 정으로 돌을 깨 홍암절벽 곳곳에 일렬로 발파구를 만들었다.

 

13명의 청년들은 궈량춘의 유일한 절벽 길인 '천제' 아래 모여 반드시 절벽을 뚫어 길을 내겠다고 다짐하고 1972년 3월9일 본격적인 터널 공사에 들어갔다.

 

 궈량춘은 해발 고도가 높고, 경작지가 적고, 농사가 가능한 서리 없는 날도 짧았다. 1년에 단 한번 농작물을 파종해 살아가는 가난한 곳이다. 이런 상황에서 '13인의 돌격대'도 0.12위안의 식비로 모두가 버텨야 했다. 강냉이로 만든 죽, 떡, 찜이 하루 세끼의 전부였다. 매일 한 사람에게 배당한 옥수수가 두근 밖에 되지 않았다.

 

 1975년 말, 공사는 가장 어려운 단계로 접어들었다. 마을 사람들에겐 더 이상 내다 팔 산양도, 나무도 없었다. 식량도 떨어졌다. 어느 곳을 찾아봐도 동전 한 닢 나올 곳이 없었다. 그러나 어려움에 처하자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모두 팔을 걷고 나섰다. 새벽 5시에 일어나 5km의 산길을 올라가 두더지처럼 구멍을 파고 또 팠다. 마을 서기에겐 도화선과 폭약 등 굴착 장비를 빨리 구해오라고 다그쳤다.

 

 궈량춘 절벽의 평균 높이는 약 105m. 절벽 중간에서 발파 작업을 하려면 밧줄이 필요했지만 이를 살 돈이 없었다. 달리 방법이 없자 집집마다 소의 고삐를 풀어와 하나 하나 이어서 밧줄을 만들었다.

 

 공사 인부로 나선 청년들은 목숨을 건 열정으로 절벽의 도랑을 길로 바꿔 놓았다.

 궈량춘 사람들은 기계를 사용하지 않고 5년 동안 거대한 절벽에서 2만6000㎥의 돌덩어리를 캐냈고, 정 12톤을 마모시켰고, 8파운드짜리 쇠추 4000개를 소모했다.

 

 70세의 노인부터 10대의 소녀까지 공사에 참여해 하다못해 돌가루를 실어 나를 정도였다. 커다란 돌덩어리는 손으로 들어서 옮기고, 작은 것은 광주리나 바구니에 담아 어깨나 머리에 걸쳐 운반했다. 손가락마다 피가 터지기 일쑤였다.

 

 가장 힘든 공정 때는 현 교육국의 전문가 100여명이 위엔융(原永) 국장과 함께 공사 현장에 합류, 빠른 진행에 힘이 돼 주었다.  

 

 마침내 1977년 5월1일 ‘절벽장랑(絶壁長廊)’이라 불리는 궈량 터널은 왕후이당 등 희생자들을 남기고 공식 개통됐다.

 

 궈량동은 절벽을 횡으로 1.25km나 뚫어나가면서 높이 5m, 폭 4m로 만든 터널이다. 태항산 동쪽에 만든 '인공천하(人工天河)' '홍치쥐(紅旗渠)'와 함께 현대판 '우공이산(愚公移山)'의 실례이자 가난한 민초들이 일궈낸 '기적'으로 자리매김 했다.

 

궈량 터널에는 절벽 쪽으로 크고 작은 구멍 35개가 나있다. '천창(天窓)'이라 불리는 통풍구이고 채광창이자 전망대다. 공사 중에는 굴에서 캐낸 돌을 밖으로 내놓는 배출구 역할까지 했다.

 

 궈량춘에는 곽씨와 더불어 신씨들도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원말 명초, 신씨 일가는 난징에서 관직을 맡고 있는 권세가였다. 그러나 주원장이 권력을 잡자 도읍의 구세력을 몰아내기 위한 '인적 청산'을 단행했다. 신씨 가문은 서역의 칭하이(靑海)로 쫓겨 갈 상황이 되자 산시로 도주했다. 수백여명의 일가 친척의 식사를 한꺼번에 만들 수 있는 커다란 가마솥을 쪼개 집집이 나눠줬다. 동서로 흩어졌다 훗날 다시 만나면 원래대로 붙일 심산이었다. 그래서 '큰 가마솥 신(大鍋申)씨'라 불린다.

 

당시 궈량춘에 들어와 뿌리를 내린 신씨들은 지금도 이 곳에 살고 있고, 그  후손들이 바로 궈량동을 만드는데 앞장 선 사람들이다.  궈량춘에는 항일 전쟁 중에 팔로군 사령부가 있었고, 산 아래는 리샹양(李向陽)이 이끄는 ‘평원유격대’의 근거지였다.

 

 '중국의 그랜드캐년'이라 불리는 웅장하고 아름다운 태항산의 협곡을 끼고 온갖 풍파를 이겨낸 궈량춘은 '중국 제일의 드라마 촬영지'로 각광 받고 있다. 셰전(謝晉)이 연출한 '청량사의 종소리(淸凉寺的鐘聲)' 등 40여편의 드라마가 이곳에서 촬영됐다.

 

 태항산 일대에는 인간의 무한한 힘을 보여준 궈량 터널 외에도 5곳의 인공 터널이 더 있다. 쿤산(昆山) 터널, 시야(錫崖) 터널, 후이롱(回龍) 터널, 징디(井底) 터널, 전쟈위안(陳家園) 터널 등이다.

 

 

 

 

 

 

 

 

 

 

 

 

 

 

 

 

 

 

 

 

 

 

 

 

 

 

 

 

 

 

 

 

 

 

 

 

 

 

태항산 항일 군정학교를 찾아서 [오마이 뉴스]

태항산 남장촌에 달 뜨고 별 뜰 떄 조국 사랑, 고향 그리움은 뼈에 사무쳤네

 

태항산 남장촌의 조선의용군 군정학교 표지판. 1943년 4월부터 조선이 해방되던 1945년 8월까지 이 항일군정학교는 300여명의 조선의용군을 배출했다.

 

우리들은 태항산 남장촌으로 갔다. 태항산맥은 갈매빛으로 우리의 길과 더불어 아주 길고 장엄하게 뻗어있었다. 또 다른 조선의용군들의 장렬하게 산화한 전적지와 열사묘의 방문은 시간상 애석하게 생략하는 것이 못내 아쉬웠다. 태항산맥은 그 시절에 강력한 일본 제국주의 군대에 맞서던 조선의용군과 중국팔로군의 치열한 항일전투들의 현장이었다.

남장촌으로 가는 길은 팍팍하였다. 아주 먼길이었고 대단한 오지였다. 지금 중국의 대단한 개발붐 속에서도 이곳은 아직 변하지 않은 1950년대의 풍경 같았다. 전혀 포장이 되지 않은 먼지가 폴폴 나는 신작로 길을 우리의 버스는 흙먼지를 뚫고 갔다.

게다가 남장촌은 광산촌이라고도 하였다. 그래서 우리 강원도의 황막한 탄전지대의 음울한 분위기까지도 감지되는 듯하였다. 마치 나의 초기 시, 폐광촌의 풍경처럼 스산하였다.

멀고 가까이에 태항산록이 거대한 성채처럼 멀리 둘러 있는 이곳, 남장촌에 우리들의 조선의용군의 본부, 공식적으로는 화북조선청년연합회와 더불어 항일조선군정학교가 있었다.

지금도 가난이 느껴지는 마을이었다. 주민들은 멀리 외부로부터 온 우리를 호기심과 관심을 가지고 몰려와 지켜보았다. 시절이 좋아져서 얼마 전에 장준하선생 추모학생단이 역사상 최초로 이곳을 방문하였다는 말을 들었다.

겉모습으로는 초라하게도 느껴지는 남장촌, 이곳에서 중국대륙에서 몰려왔던 조선의 피끓는 남아들이 조선 독립을 위하여 항일전쟁을 위한 간부훈련을 받고 나서 전투에 임하였다. 깊은 암야의 등불과 같은 곳이었다.


조선독립과 해방은 북경과 연안을 돌아서

제국주의시대의 혁명은 고전적인 산업국가가 아니라 변방의 산업국가에서 먼저 가능하다는 것이 이른바 '파리는 북경을 돌아서…'라는 테제의 동방우회 전략이었다. 꼭 이 같은 관점과 테제에 동의하지 않는다 하여도 여기에서 한가지 분명하게 짚어 둘 일이 있다.

그것은 아직도 행여 우리가 냉전적인 사고와 그 잔재로 우리의 독립운동과 민족해방운동을 좌우 이분법으로 바라보는 것은 거의 죄악에 가까운 일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1945년 해방되기까지 우리 민족과 모든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 아프리카의 식민지 혹은, 반식민지 상태에 있던 소위 피압박민족들에 있어서의 가장 절박한 과제는 민족해방이었다. 따라서 그 질긴 모순과 고리를 끊어내기 위한 모든 이념과 투쟁은 가히 성스럽고 필연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 조선의용군 항일군정학교 교장을 지냈으며, 당시 일제의 간담을 서늘케한 무정 장군의 사택(전봇대 뒤).

 

따라서 일제하에서 발 디딜 곳이 없던 국내가 아니라 무장투쟁이 그래도 가능하였던 해외에서 그것도 만주의 무장투쟁도 사실상 객관적인 어려움 속에서 중단되어버린 상태에서 무려 100만의 일본군과 대치한 중국 대륙에서의 연안이나 특별히 태항산 전투지구쪽에서의 조선의용군의 항일전쟁과 그 투쟁은 우리의 독립운동사에 있어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빛나는 역사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작가 김사량도 중국으로 망명하면서 연안행을 선택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김산도 자신이 그곳에서 처형당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면서 연안으로 가야만 했던 것이다.

 


태항산채의 조선의용군의 깃발과 무정장군

태항산 남장촌의 화북조선혁명군정학교는 1941년 9월에 화북조선청년학교가 설립되고 그 이듬해 1월에 수업이 시작되었다. 그곳은 김무정이 교장으로 있었다.

무정(武亭)장군으로 불리운 김무정(1905-51)은 함북 경성에서 출생하고 서울에서 성장하였다. 김산과 같은 연배이다. 그는 그의 나이 18세에 중앙고보 중퇴와 더불어 중국으로 망명하여 보정군관학교 포병과를 졸업한 후에 국민당군대에서 포병장교로 활동하다가 1925년 중공당 입당하였다.

그는 1927년 장개석의 구테타와 더불어 상해에 도피하면서 지하활동을 전개하였고, 1929년 상해폭동 당시 폭동책임자의 한사람으로 활동하다가 영국경찰에 체포, 복역 후 홍콩을 거쳐 중공 소비에트지역으로 가서 1934년 대장정에 참가한 인물이었다.

그는 연안의 홍군대학을 졸업한 후 1937년 노농홍군이 팔로군으로 개편될 때에 팔로군 작전과장으로 임명되고, 1938년 팔로군 최초의 포병연대 연대장을 거쳐서 1940년 유명한 백단대전에 참전하였다. 그러한 중공당과 중국 홍군에 있어서도 당당한 위상의 김무정이 그의 참 목적인 조선혁명을 위하여 1941년 1월에 화북청년연합회 회장이 되고 남장촌의 조선항일군정학교의 교장이 된 것이었다.

그는 그 이후에 연안에서 결성된 동방각민족반파시스트동맹 간부로 선임되고 이후에 조선의용군사령관 겸 독립동맹집행위원으로 활동하다가 해방된 해 12월에 개인자격으로 귀국하였으며 1950년 한국전쟁 제2군단장을 역임하고 9월 총퇴각 때에 수도(평양)방위사령관으로 있다가 별오리 회의에서 불법살인 명령불복종혐의로 숙청되었고, 그의 나이 불과 46세로 1951년 7월에 사망한다.

 

 


태항산채의 한글학자 혁명가, 백연 김두봉 선생

 

 

 

항일군정학교의 활동을 증언하고 있는 남장촌의 원로들. 이들의 증언에 따르면 조선의용군은 이 지역 중국인들에게 감자 심는 법을 가르쳐 흉년을 나게 했다고. 조선의용군은 이 집 마당에서 정치학습과 수류탄 투척훈련 등을 가졌다고 한다.

 

군사지도자로 주덕과 같은 역할을 무정이 수행하였다면 태행산과 그 이후 연안의 조선의용군의 정치적인 영수와 상징은 백연(白淵) 김두봉(1989-1961)이었다.

그는 김원봉과도 친족에 속하며 경남 동래에서 출생하여 배재학교를 중퇴한 후에 대동청년단 조선광문회와 민족종교 대종교에 가입하였으며, 주시경의 지도로 한글연구에 몰두 '말모아' 편찬에 참여하였다. 그는 보성,휘문. 중앙고보에서 강사를 역임하고 3.1운동 후에 중국에 망명하여 단재 신채호와 더불어 <신한민보>에 관여 편집하였다.

그는 1922년 상해에서 <깁더 조선말본>(정해조선어문전) 출간하고 상해교민단의 학무위원장에 선출되고 인성학교 교장직에 있었다. 1935년에는 조선혁명당에 1940년에는 민족혁명당 중앙위원겸 조선의용대 편집위원으로 있다가 1941년 여름 화북 팔로군 근거지로 이동하는 조선의용대 주력부대에 동참하고 1942년 태항산 반소탕전에 참여한 후에 7월 화북조선독립동맹 결성에서 주석으로 취임하였던 것이다. 해방 후의 그의 행적과 삶은 이제 남은 마지막 5회째 연안의 에필로그에서 다루기로 하자.

나는 백연 김두봉 선생이 상해에서 펴낸 빛바랜 초록빛 낡은 장정의 깁더말본을 1980년도에 우연히 접하면서 감격을 제어하지 못한 체험이 있다. 그 책을 출간하면서 그가 쓴 서문에는 대단히 절절한 민족에 대한 사랑과 민족의 언어와 글에 대한 탐구의 자세와 겸손이 함께 깃들어 있었다.

문자 그대로 풍찬노숙의 상해 시절, 불비한 조건 속에서 책을 성심으로 편찬하면서 백연 선생은 스스로 미흡함을 솔직하게 표현하며 그 모자람을 꼭 빠른 시일 내에 보충하겠다는 그런 내용이 나에게 민족을 사랑하는 학자로서의 단심과 함께 진솔하고 귀한 자세가 보여졌던 것이다.

 


조선여성들, 김명시와 허정숙


이 삭막한 화북과 남장촌에 조선의 여성들이 있었다. 김명시와 허정숙들이 있었다. 김명시는 조선공산주의 운동에서도 유명한 마산의 김형선의 동생이며 배화여고를 중퇴한 그녀는 일찍이 고려공청의 대표의 일인으로 모스크바의 동방노력자 대학에서 2년간 수학하고 상해와 만주에서 혁명활동에 종사하였다.

그녀는 1932년 국내에 잠입하여 활동 중에 그 이듬해에 그의 오빠와 더불어 체포, 소위 신의주 사건으로 6년간 복역 후에 1939년 중국으로 망명한 후에 화북조선독립동맹 화북책임자로 있던 여성이었다. 그녀는 해방 후에 귀국해서 여장군 김명시로도 불리워지기도 하였었다.

김명시가 어려운 환경의 출신이었다면 허정숙은 유명한 변호사 허헌의 딸로 태어나 배화고녀와 일본의 고베신학교를 졸업한 전형적인 상류출신의 신여성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1921년부터 사회주의운동에 가담하여 근우회 등의 여성활동에도 큰 역할을 하다가 투옥 및 출감 후에 1936년 최창익과 함께 중국으로 망명하여 조선민족혁명당 활동 후에 연안으로 갔었다. 그리고 그녀는 1940년 항일군정대학 정치군사과를 졸업하고 나서 1942년에는 화북조선돌립동맹 집행위원겸 항일군정학교 교원으로 지내다가 훗날에는 교육과장으로 근무하기도 했다.

 


최후의 분대장 김학철

 

이 태항산에는 호가장 전투에서 언급한 김학철이 있었다. 원산이 고향인 그는 보성고보를 다녔고 그의 나이 스물에 상해의 의열단에 가입하였고 중앙군관학교를 졸업하였다. 그는 일찍이 1938년 10월부터 조선의용대에 가담하여 호남성 북부일대에서 활동하였다. 그 후에 서안 일대와 낙양에서 항일활동을 하였으며 1941년 여름에 이곳 화북의 태항산 팔로군 지역에 들어왔던 것이다.

그는 조선의용군 화북지대의 제2대원으로 활동하다가 앞서 말한 호가장 전투에서 부상하여 나가사끼 감옥에서 다리를 절단한 채 4년 동안 투옥되어 있었다가 해방과 더불어 이북으로 들어갔던 것이다.

항일운동가들의 삶과 역사에서 재미있는 사실들 중에 눈에 띄는 것이 모두들 대체로 고보중퇴들이 많다. 그리고 학력에 있어서 대체로 온전한 졸업이 어려웠다는 것이다. 김산도, 그와 동년배였던 무정도 장군도 그리고, 김명시도 김학철도 마찬가지였다.

김산은 원래 의사가 되고 싶어하여 중산대학에 입학하였지만 그는 다른 혁명을 위한 공부들에 몰두하였고 또 조선의 독립과 혁명을 위한 활동을 우선적인 가치로 확실하게 생각하였다. 대부분 놀라운 지적 탐구욕과 지성적인 면모에도 불구하고 그와 우리의 수많은 김산들은 소위 상아탑에 한번도 자신을 묶어 놓지 않았던 것이다.

 


물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준 조선의용군

남장촌에서 우리들은 여러 가지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생생하게 들었다. 그것은 우리 조선의용군들이 펼친 자급자족의 생산활동 속에 이곳 주민들에게 최초의 물고기 잡아먹는 법도 가르쳤다는 사실이었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이기영의 작품 '고향'이 생각났다. 좌우지간에 우리 조선사람들이 부지런하고 재능이 많은 것은 사실인가 보다.

이기영의 작품에도 멀리 만주나 조선 중국 국경지대의 척박한 땅에 간척을 하는데 조선인들이 결국은 벼농사도 하지못한 지대에 공을 들이고 지혜롭게 해서 풍요한 작곡을 소출하는 모습이 나오던 것이 지금도 깊은 인상으로 나에게 남아있다. 어찌 그것이 태항산록의 조선의용군과 '고향'에 나오는 만주 국경의 농민들뿐이었겠는가?

연해주로 이주하였던 동북만주의 동포들은 후에 슬프게 일거에 스탈린의 강제이주정책으로 쫒겨갔던 중앙아시아에서도 그들은 가고 머무는 곳마다 맨손으로 결과적으로는 피땀을 흘려 일하였다. 말하자면 조선인들이 있는 곳에서 놀라운 풍요의 땅과 삶을 일군 것을 우리는 알고 있는 것이다. 맥시코의 애니깽 농장에서도 쿠바나 하와이의 농장에서도 조선독립의 꿈과 더불어 우리 동포들의 피땀어린 노동의 열매는 조국독립을 위하여 값지게 봉헌되었던 것이다.

싸우면서 일하는 자급자족의 군대가 조선의용군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무장선전의 활동으로 가는 곳마다 연극과 노래와 장기자랑으로 중국의 민중들에게 다가가 항일전쟁을 고무시키고, 다가올 승리를 구가하였다. 그리고 필요하면 전투에서 참으로 목숨을 아끼지 않고 산화하던 이들이 다름 아닌 조선의용군이었다.

 


'날아가는 까마귀야'와 눈물어린 조선기와

 

대학시절에 부르던 '날아가는 까마귀야'의 처절한 독립군 노래가 생각이 났다. 총에 맞아 죽고 추위에 얼어죽고 모진 감옥에 갇혀 죽기까지 싸웠던 조선 독립을 위한 선열들의 장한 삶과 역사가 있었기에 우리민족의 혼과 역사가 가능하지 않은가?

이곳 남장촌의 조선의용대 본대를 둘러보는 우리곁으로 마을의 촌장과 당시를 회상할 수 있는 촌노들이 많이 와서 우리와 담소를 나누며, 그날의 상황과 추억을 우리 일행에게 들려주었다. 공산당원인 땅땅한 촌장은 비교적 젊은 세대였다.

구 항일군정학교 바로 곁에 지금도 옛 모습을 조금은 가늠할 수 있는 매우 작고 초라한 집이 옛 무정장군이 살았던 집이라고 누군가가 말해주었다. 그 초라한 우거들은 연안에도 보편적인 삶의 행태였다. 이곳은 당시에 무서운 전투지구 현장이었고 이곳에 전체 팔로군의 본부도 태항산록에 있었다.

그리고, 조선의용군들은 팔로군들과 더불어 조선민족의 해방을 위하여 기를 쓰고 피를 흘리며 용맹정진하였다. 남장촌 그 어딘가에 휘날리던 조선의용군의 깃발과 노래가 선연히 보였고 들리는 듯하였다.

항일군정학교의 크지 않은 지붕은 조선기와 형태였다. 마치 재독 음악가 고 윤이상 선생이 그의 베를린의 자택 안에 우리의 국토모양의 연못을 조성하며 조국을 그리워하였다고 하는데 그 생각이 문득 스쳤다. 오죽 눈물겹게 우리의 조국 조선이 사무쳤으면 기와를 조선식으로 얹었을까?

 

 

 

태항산에서의 조선의용군 -조선의용군 화북지대는 태항산근거지에서 어떻게 싸웠는가?

 

 

조선의용대 사진


1941년 7월에 태항산근거지에 도착한 조선의용대는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로 개편된후 첫 1년동안에 40여차의 전투에 참가하였다.

1941년 12월, 조선의용대 화북지대 제2대의 29명 무장선전대는 대장 김세광의 인솔밑에 하북성 형태부근의 원시현호가장에서 선전사업을 벌렸다. 300여명이나 되는 일본군이 밤의 어둠을 타서 무장선전대를 포위하였다. 동틀무렵부터 시작된 포위돌파전투에서 의용대의 전사들은 적과 치렬한 육박전을 벌렸다.

 

28세에 난 전사 손일봉은 탄알이 떨어져 몸에는 수류탄으로 옆에 있는 바위를 쳤다. 《쾅》하는 폭음과 함께 손일봉은 일본군 8명과 함께 쓰러졌다. 26세에 난 전사 박철동은 일본군 두놈과 육박전을 벌려 적 두놈을 쓸어눕혔다. 열 몇곳이나 부상을 입은 그는 전신이 피투정이로 되었으나 맨주먹으로 총창을 꼬나든 일본놈과 싸우다가 영용히 희생되었다.

1942년 5월 19일, 일제침략군은 수만명의 병력으로 태항산근거지에 대한 《5월소탕》을 시작하였다. 팔로군 129사 389려와 지방부대 및 민병들은 전선으로 나가고 후방의 팔로군 총부기관 및 그 가족과 화북조선청년련합회의 비전투인원 도합 4,000여명이 6월 2일에 마전의 하청구에서 일본군에게 포위되었다. 당시 싸울수 있는 전투력은 오직 경위패와 조선의용대 화북지대 100여명뿐이었다.

 

화북지대는 지대장 박효삼의 지휘밑에 우박처럼 쏟아지는일본군의 총탄을 무릅쓰고 남산을 점령한후 적과 치렬한 싸움을 벌렸다. 전투는 온종일 계속되었다. 이리하여 끝내 기관간부와 가족들의 안전한 이동을 엄호하였다. 전투에서 10여명 조선족용사들이 귀중한 생명을 바쳤다. 화북조선청년련합회와 조선의용대 화북지대의지도자의 한사람인 진광화(陳光華)는 중상을 입고 적에게 생포되지 않기 위해 높은 적벽에서 뛰여내려 장령히 희생되었다. 조선의용대 화북지대의 지도자의 한사람인 석정(石鼎)도 중상을 입고 42세를 일기로 희생되었다.

1942년 8월, 팔로군 총부와 태항구당위원회에서는 희생된 조선족동지들의 철저한 혁명정신과 고상한 품성을 따라배울 것을 호소하는 결정을 내렸다. 같은 해 10월 10일에 팔로군 총부, 중공중앙 화북국, 팔로군 129사, 태항군구, 진기로예변구정부에서는 련합으로 섭현에서 추도대회를 열고 팔로군 부총참모장 좌권과 조선의용군지도자들인 진광화, 석정 등을 추모하였다. 추도대회장에는 주덕총사령과 엽검영총참모장이 족자에 쓴 조사가 정연히 걸려있었고 류백승 라서경 등 지도자들이 대회에 참석하였다. 그리고 좌권의 분묘량켠에 진광화의 석정의 묘지를 앉혔다.

 

 

 

조선의용군은 어떻게 창건되었는가?

조선의용군은 조선의용대, 조선의용군, 화북지대, 조선의용군 등 몇 개 단계를 거치면서 광활한 관내의 항일싸움터에서 용맹히 싸웠다.

1937년 《7.7》사변후 국공합작을 토대로 한 항일민족통일전선이 결성되기는 하였지만 전쟁정세는 매우 준엄하였다. 일제는 화북지구를 강점한후 1938년 7월에는 25만 대군으로 무한을 포위공격하였다. 이런 준엄한 정세하에서 무한에 있던 《조선민족전선련맹》은 무한에 모인 조선족청년들로 항일부대를 조직하여 항일통일전선에 참가하기로 하였다.

 

 

 

1938年 10月 10日 中日戰爭時 中國漢口에서   創立된  朝鮮義勇隊 記念寫真

 

 

1938년 10월10일 조선의용대 창립장소인 무한기독청년회관

 

 

 

1938년 10월14일자 조선의용대창립기사 (신화일보)

 

 

이리하여 1938년 10월 10일에 《조선의용대》창건대회가 한구에서 열렸다. 원 의렬단 단장이며 조선민족전선련맹 리사장인 김약산을 대장으로 한 조선의용대는 초시기에는 80여명으로 조직되었다가 1년후에는 150여명으로 확대되었다. 이들은 거의 모두가 황포군관학교 등 군관학교나 대학교를 졸업한 지식인들이었다.

 

무한보위전에 참가한 조선의용대는 《전선으로!》라는 구호 밑에 6개 전구(戰區)의 정면싸움터에 나가 싸웠으며 13개 성을 누비며 악북회전으로부터 대서남회전까지 참가하며 남정북전하였다. 그들은 또 각 전구사령부를 도와 6만여명의 대적사업일군들을 훈련시켰고 진지선전대와 유격선전대를 조직하여 일본군와해사업에서 큰 성과를 올렸다.

1940년 11월 4일에 조선의용대 제1차간부확대회의가 중경에서 열렸다. 이 회의에서는 항일에 소극적이고 공산당반대에 적극적인 국민당과 그 군대를 떠나기로 결의하고 《적후에로!》라는 구호를 내놓았다.

조선의용대 3개 지대는 호남, 강서 등지에서 출발하여 갖은 간난신고를 겪으며 북으로 전진하여 1941년 7월에 선후하여 팔로군총부소재지인 태항산항일근거지에 도착하였다. 팔로군 부총사령 팽덕회장군은 조선의용대를 열렬히 맞아주었다.

1941년 7월, 조선의용대는 그해 1월에 무정장군을 회장으로 하여 세워진 화북조선청년련합회의 지도밑에 박효삼을 지대장으로 하는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로 재편성되었다. 그들은 북경, 상해, 중경 등 전국각지에 지하공작원을 파견하여 조선족에 대한 단결, 쟁취사업을 하고 무정을 교장으로 한 조선의용대간부학교를 꾸렸으며 팔로군에 배합하여 전선에 나가 일제침략자들과 싸웠다.

1942년 7월에 화북조선청년련합회 제2차대표대회가 태항산근거지에서 열렸다. 팽덕회가 중공중앙과 팔로군총부를 대표하여 축사를 드렸다. 회의에서는 화북조선청년련합회를 화북조선독립동맹으로,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를 조선의용군 화북지대로 고쳤다.

1944년초에 태항산근거지의 《동맹》본부와 《화북지대》본부는 연안으로 이동하였다. 이때로부터 화북조선독립동맹을 조선독립동맹으로, 조선의용군 화북지대를 조선의용군으로 고쳐불렀다. 그들은 연안에서 대생산운동과 정풍학습에 뛰여들어 새로운 승리를 맞이할 준비사업들을 하였다. 이때의 독립동맹의 주석은 김두봉, 부주석으로는 최창익과 한빈이였으며 조선의용군 총사령은 무정, 부사령은 박효삼과 박일우였다.

1945년 9월초, 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의 간부와 장병들은 선후하여 연안을 떠나 동북으로 진출하였다.

 

 

 

 

남과 북서 버림받은 광복군 태항산 전투

 

 

김원봉

 

1938년 10월 중국과 일본의 무한전투가 한창일 무렵 김원봉은 조선의용대를 창설했다. 조선의용대 결성식에는 조선인들뿐 아니라 중국의 군,정 관계요원들이 많이 참석했다. 이날 군관학교 졸업생 중심이 된 100여명의 대원들은 배지 하나씩을 받았는데 거기에는 한문으로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라는 다섯글자와 영문으로“korean Volunteer¨라는 글자 한줄이 새겨져 있었다. 부대는 총대와 2개 지대로 편성되었는데 배지 수여에 이어 김원봉 총대장이 제1지대와 제2지대장에게 각각 군기 하나씩을 수여하자 대원들은 그 군기 밑에 서서 왜적을 섬멸하겠다고 기세도 더 높이 선서함으로써 민족의 사업에 충성을 다할 것을 다짐했다.
  
  76명의 민족혁명당원으로 구성된 제1지대는 약산과 황포군관학교 4기 동기생이며 중국군 현역 대좌인 박효삼이 지대장을 맡고 왕통이 정치지도원을 맡아 중국군 제4전구(광서성 방면)와 제9전구(호남성을 중심으로 호북성의 양자강 이남과 강서성 서북부를 관할)에 들어가 활동하기로 했고, 73명의 전위동맹 소속원들로 구성된 제2지대는 성자군관학교 소대장이었던 이익성이 맡고 임평이 정치지도원을 맡아 중국군 제1전구(하남성 전역,안휘성 북부 일부지역)와 제5전구(호북성 북부,하남성 남부,안휘성 서부지역)에서 활동하도록 임무가 주어졌다.
  
  총대부(HQ)의 지도원으로는 이춘암, 김성숙, 유자명, 최창익이 추대됐고 부대장에 신악, 정치조장에 김학무, 학무조장에 이집중, 훈련소 주임은 김원봉이 겸임했다. 그 외 부녀봉사단 단장에는 김원봉의 부인 박차정이, 3.1소년단 단장은 당시 17세였던 최동선(박차정의 사망이 후 김원봉의 후처가 된 사람)이, 의무실 주임은 한금원이 맡았고 편집위원에는 이두산이 임명돼 월간 잡지 ‘조선의용대’, 격주 발행 잡지 ‘조선의용대 통신’발행을 맡았다. 이렇게 진용을 갖추므로 해서 오랜 항일투쟁으로 국내외에서 이름이 높았던 김원봉은 조선인 항일부대의 최고 지도자가 된 것이다. 
   
   
  조선의용대 창설 중국 돕는 비정규군 역할

 

그러나 조선의용대는 중국군을 돕는 비정규군이었는데 전선지구에 나가 대적 심리전에 종사하거나, 일본군 포로 심문, 일본군 문서 번역 그리고 일본군 점령지역에 파견되어 첩보, 유인, 암살, 시설 파괴 등의 일을 했다. 통계적으로 살펴보면 책자 5만권 제작, 배포, 표어 40여만 장, 적의 통행증 1만장 위조, 일본군 122명 심문, 일본군 문건 95만자를 번역했다고 한다.
  
  조선의용대가 창설되던 바로 그 시기에 일본군 25개 사단 약100만 명의 병력이 중국 내륙의 거점 도시인 무한, 한양, 한구 등 소위 무한삼진지구를 향하여 물밀듯이 쳐 들어왔다. 이에 조선의용대는 창설 즉시 중국군과 함께 무한방어전에 참여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 됐다.
  
  10여 일 동안 참전한 무한방어전에서 의용대원들은 자기가 덮고 자던 흰 이불속을 뜯어 만화 표어 등을 써서 선전사업을 펼쳤고, 먹을 것이 없으면 의복을 팔아서라도 하루에 한 끼 정도 겨우 배를 채우면서 거리에서, 극장에서, 역전에서, 선전고무사업을 하여 무한 시민들에게 항일투쟁에 일어서라고 호소하는 활동을 계속했다. 그러나 전세가 악화되자 국민정부의 당, 정, 군, 요인들마저 모두 무한을 빠져나가 버리고 말았다. 무한이 함락되기 3일전인 1938년 10월 22일 조선의용대도 무한을 떠나야만 했다.
  
  박효삼의 제1지대는 제9전구인 장사지역으로, 이익성의 제2지대는 제1전구인 낙양지역으로 철수하고 약산은 민족전선 및 총대부를 이끌고 제4전구인 광서성 계림으로 철수하여 1938년 12월 3일부터 계림시 동령가 1호(현 칠성공원 자리)에 조선의용대 본부가 자리 잡게 되었다.
  
  중국군에 배속되었던 각지의 조선의용대원들은 진지에서나 적후에 들어가거나를 막론하고 포로를 교양하고 적을 와해시키는 사업에 참가했으며 또한 군과 민을 고무하여 항일투쟁 정서를 높이는 사업에도 전력을 기울였다. 특히 포로교양 사업에 있어서 그 성적이 뛰어났는데 교양을 거친 많은 일본인 포로들은 의용대를 떠나지 않고 그림을 그리거나 표어를 쓰거나 참호에서 고함지르는 연습(喊話)을 하는 등 일본군을 와해시키는 사업에 큰 기여를 했다.
  
  조선의용대가 창설이후 2년이 되는 1940년 하반기까지의 사업실적을 보면 진지상 대적 공작으로 적진의 200~300m, 심지어는 50~60m까지 접근해서 “염전반전정서(厭戰反戰情緖:전쟁을 싫어하고 전쟁을 반대하는 감정을 갖도록 하는)공작”을 벌이고 반전가극을 공연했으며, 직접 전투에 참가하여 유격전 반소탕전, 통신 및 철도 파괴공작에 참가했다. 
   
   
  포로 교양이나 염전반전정서 고취 적 와해 공작 
   
  그런가 하면 적의 포로 50여명을 교육하여 의용대에 편입시키고 75명을 훈련시켰으며 122명을 심문했고 적의 문건 95만자를 번역했으며 6만여명의 대적 선전요원을 교육시키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1939년 말에는 제1지대 일부 인원과 일본군 귀순자를 포함한 신입대원을 합쳐 조선의용대 제3지대를 창립시켰는데, 총대부 98명, 제1지대 78명(지대장:박효삼), 제2지대 75명(지대장:이익성), 제3지대 63명(지대장:김세왈) 등 도합 314명의 대원을 확보함으로써 창립당시 보다 약 3배가량 인원수가 불어났다.
  
  조선의용대를 창설 할 때부터 약산이 의도했던 바는 독자 무력으로 성장하여 우리의 군대로 일제를 섬멸하겠다는 것 이었는데, 창설된 이후 2년 동안 많은 공적을 쌓았음에도 불구하고 의용대가 중국의 각 전구에 분산 배치되어 있어 독자적 무력으로 발전하는데 한계가 있었다.
  
  또한 활동지역이 주로 국민정부군의 작전지역 내의 일선 진지로 국한되다 보니 적후 공작이 초보적 수준에 머물러 그 성과가 미미할 뿐만 아니라 국민당의 소극적 항일이 대원들의 불만을 초래했으며, 조선혁명군의 기강을 확립하기 위해서는 무장 대오를 증대시키는 일이 절실한 문제인데도 조선인들이 별로 없는 화중지방과 화남지방에서 활동함으로써 무장 대오를 늘릴 수 가 없는 것이 불만이자 문제점이었으므로 이러한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면 조선인들이 많이 살고 있는 화북지방이나 만주로 진출할 필요가 있게 됐던 것이다.
  
  보수 민족주의자들이 1940년 3월에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 한국국민당 등 3당을 합당하여 한국독립당을 만들고, 9월에는 임시정부 산하에 광복군을 설치하여 의용대의 우수한 청년들을 끌어들이려는 의용대 분열공작을 취하는 것과 소속원 속에 있는 사회주의자들이 의용대 내부에서 분파투쟁을 일으키는 것에 맞서려면 역시 의용대 무력을 화북으로 집결시켜 적 후방 유격투쟁을 전개함으로써 의용대도 단결시키고 지도력도 확고해 질 것으로 판단하고 1940년 11월 4일 중경에서 개최된 조선의용대 확대간부회의에서 의용대를 화북으로 북상시킬 것을 결정하게 되었다.
  
  지대장을 박효삼이 맡고 정치위원에 윤세주, 두 부지대장을 이춘암과 김세광이 맡은 조선의용대 1.3 혼성지대가 화북을 향하여 민생호 기선을 타고 중경을 출발한 것은 1941년 1월 1일이였다. 전선에 있던 제2지대도 지대장 이익성이 인솔하여 낙양 방향으로 이동함으로서 총대부를 제외한 전 의용대원이 북상을 시작하게 됐다.
  
  중경을 출발하여 만현, 노하구, 낙양, 맹진, 임현, 섭현을 거쳐 팔로군 관할 지역인 태항산 지역에 7월에 도착(선발대로 최채와 이근이 5월에 먼저 들어옴)한 조선의용대 1.3 혼성지대와 제2지대는 하북성 요현(현,좌권현) 동욕진 상무촌에 있는 홍복사터에 주둔하며 “조선의용군 화북지대(지대장: 박효삼, 정치위원: 윤세주)”로 명칭을 변경하고 마전에 있던 팔로군 제18집단군전방총사령부(사령관: 주덕)의 보호아래 들어가게 됐다. 
   
   
  
중국군 대일항전 돕는 보조에 불만 좌우장이 반기    
   
  그러나 이러한 일들은 황하강 이남 중국 국민당 지구에서 전개한 일로써 일정한 한계를 나타내기도 했다. 즉 독자적인 조선독립군이 아니고 무장군대도 아닌, 이름 그대로 중국군의 대일항전을 돕는 보조군의 위치에 있었던 것이다. 이에 불만을 품은 김원봉의 좌장격인 윤세주와 우장격인 박효삼이 군대를 이끌고 화북으로 건너가 그 세력이 약해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이 김원봉이 화북지역의 무장 세력과 연합을 모색하려 한 것으로 해석하는 사람도 있다. 윤세주 등이 화북으로 건너가고 김원봉이 관내에 남은 것은 갈등의 표출이 아니라 관내에 김원봉이 남아서 국민당 정부의 지원을 계속 받으려는 의도였다는 것이다. 김원봉이 윤세주가 태항산 전투에서 사망한 이후 석정동지약사(석정은 윤세주의 호)를 기술한 점은 김원봉과 윤세주의 우애를 증명하는 것이라 하겠다.
  
  조선의용대가 태항산 전투에서 일본에게 패배했으나 그 자존심은 굽히지 않고 계속 싸워 전사한 이들과 ‘마지막 분대장’이라 불리는 김학철이란 이에 의해 더 높여졌다.
  
  김학철은 본명이 홍성걸로 1916년 함경남도 원산(元山)에서 태어났다. 서울 보성고등보통학교 재학 중 항일 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중국 상해로 건너가 중국육군군관학교를 졸업한 뒤, 김원봉(金元鳳)이 1938년 한구에서 조직한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에 가담해 분대장으로 활약했다.
  
  1941년 만주 태항산전투에서 다리에 총상을 입고 일본군에 붙잡힌 뒤, 나가사키(長崎)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8·15광복으로 출옥해 귀국했다. 이어 서울에서 사회주의 활동을 하다 1946년 월북, 노동신문기자로 일하다가 다시 김일성(金日成) 정권에 환멸을 느끼고 1950년 중국으로 망명했다. 
   
   
  
김학철 ‘마지막 분대장’ 죽기 전 2001년 서울 방문    
   
  이후 작품 창작에 전념하던 중 1966년부터 시작된 중국의 문화대혁명을 가리켜 "인민이 굶어 죽는데 웬 우상숭배냐"고 비판했다가 필화사건에 연루돼 반동분자로 숙청, 10년간 옥고를 치렀고, 24년간 강제노역에 시달렸다.
  
  가장 오래까지 살아남은 조선의용대 분대장으로서, 일명 '조선의용대 마지막 분대장'으로 불렸다. 2001년 9월 25일 세상을 떠나기 며칠 전, "일절 부고를 내지 말고 화장해서 가루를 두만강 하류에 뿌려달라"는 말을 남기고 곡기를 끊었고, 유언에 따라 유해는 '원산 앞바다행-김학철의 고향'이라는 주소가 적힌 상자에 넣어져 두만강을 따라 흘러갔다.

 

주요 작품에는 장편소설 『격정시대』『20세기의 신화』『해란강아 말하라』, 자서전 『최후의 분대장』과 2001년 서울 방문 때 출간한 수필집 『우렁이 속 같은 세상』이 있다.
  
  어쨌든 주력부대가 화북의 조선독립동맹 조선의용군으로 건너가 태항산 전투 등 치열한 전투를 치루고 있을 때 김원봉은 남은 세력들과 함께 중경 임시정부에 가담하여 광복군 부사령으로 취임했다.(총사령 이청천) 또한 1944년 4월에는 임시정부 국무위원 및 군무부장에 취임했다.
  
  해방 후 귀국한 김원봉은 임시정부 특별정치위원회 중앙위원으로 좌익 쪽과 협상을 하다가 좌우익의 대립이 첨예해 지자 임시정부를 나와 좌익 쪽의 민주주의 민족전선의 공동의장에 선출돼 활약했다.
  
  1946년 봄 수십 년 만에 찾은 밀양 고향을 찾은 김원봉은 열렬한 주민들의 환영을 받았다. 김원봉이 오는 길에는 광목으로 카페트가 깔렸으며, 밀양국민학교에서 열린 환영대회는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조선의용대의 활약상을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가 읍내 극장에서 상영돼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우익측과 결별한 김원봉은 계속되는 시련을 겪어야 했다. 1947년 3월 남로당이 주동하여 총파업이 발생하자 김원봉이 연루되어 체포됐는데 김원봉을 체포한 사람이 악명 높은 친일경찰 출신인 노덕술이었다. 
   


  김원봉, 친일파 노덕술에 체포,여론 압력 풀려나 남북협상 월북 
   
  결국 김원봉 체포는 애국지사에 대한 모독이라는 여론이 크게 형성돼 풀려나기는 하였지만 친일파나 우익들의 표적이 되어있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김원봉은 5개의 거처를 마련하고 테러를 피해 항상 옮겨 다니며 잠을 잤다고 한다.
  
  1948년 김원봉은 이승만의 남한단정에 반대하고 4월 남북협상회의에 참가했다. 그러나 다시 월남하지 않고 그 곳에 남아 북한정부 수립에 참여해 초대 국가검열상이 됐다. 이후 1954년 노동상, 1957년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 까지 승진하고 이듬해 그의 탄생 60주년을 기념하여 노동훈장을 수여하기도 했으나 이후 모든 공식석상에서 모습을 감췄다.
  
  당시 김원봉 계열과 납북된 김구계열이 모두 숙청됐는데 아마 김원봉도 함께 숙청된 듯싶다. 한때 자살했다는 설과 강등돼 시골에서 생활했다는 설이 있기도 했으나 확실치 않다. 북한에는 빨치산 투쟁가들을 위한 혁명열사릉과 독립운동에 투신했던 자들을 위한 애국열사릉이 있는데 숙청이 됐어도 열사릉에 안장돼 있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김원봉의 무덤은 애국열사릉에서 찾아볼 수 없다고 한다.
  
  김원봉은 필요하다면 중국 국민당 정부와도, 공산주의와도 손을 잡았고 또 아나키즘에 심취되기도 했다. 이는 그가 사상적으로 혼란을 겪었다기 보다 그 어떤 사상과 이념보다 조선의 독립을 중요시 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의 가족은 남한에서 친동생 4명과 사촌동생 등 모두 5명이 죽음을 당했으며 그 역시 북한에서 장개석의 스파이라는 명목으로 숙청되었다. 남한과 북한 모두에게서 버림받은 그는 분단이 낳은 수많은 비극 중에 한 사람으로 남게 됐다.
  
  기차를 타고 북경까지 가는 예정 소요시간은 9시간이었다. 그러나 폭설로 인해 기차가 멈춰서고 느리게 가면서 9시간 만에 중간기점인 정주에 도착했다. 정주에서 간식거리를 사와 각 호차에 있는 단원들에게 돌아갔다.
  
  많은 독립운동사를 기차 안에서 들으면서 생각했다. 치열하게 지켜낸 이 나라가 지금 그들이 원하는 아름다운 나라일까? 독립군에 대해 전혀 모르는 이들이 자신의 이득을 위해 이익 집단을 만들고 그것을 자기 명분으로 삼는 이들이 난무하고 부정부패가 판 치고 남성들의 여성 성희롱이 습관화 되고 있는 이런 상황이 과연 그들이 원한 나라일까?
  
  그들이 원한 민족주의. 독립운동을 하던 그 시절 그들은 높고 낮음이 없는 계몽을 하겠다고 나서면서 스스로 잘난 자라고 자처하는 이가 없는 함께 어울려 나가며 사는 그런 민족국가를 원했다.
  
  그들은 그것을 위해 목숨을 걸었고 치열하게 일본군과 싸웠다. 그들이 원하는 아름다운 국가를 위해 이젠 남아있는 우리가 노력해야 할 차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