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W START/내 삶의 흔적

애기 2016. 12. 25. 06:52

내 삶의 흔적을 찾아

                                               - 지은이 김용인-

 

인생 뭐 있는가.

바람 따라 구름 따라 세월을 거스르지 않고 어우러져 함께 가면 되는 게지.

사람은 세상 밖으로 나오면서부터 생존을 위한 수단과 방법에 안달하며 지내다 결국 자신도 모르게 긴장의 끈을 놓지 못하는 바쁜 일상의 쳇바퀴에서 벗어날 수 없는 영어의 몸이 되고 만다. 

보다 나은 삶을 꿈꾸며 살아가려 몸부림치지만 뜻한 바 풀리지 않고 희로애락이 번갈아 닥치며 감당할 수 없이 밀려오는 고난과 역경에 대처하지 못하고 긴장감 속에 쉼 없이 인생 열차는 달려간다.

기회와 폭은 있어도 언제 어느 것을 선택하느냐는 엄연히 자신의 몫이요, 한 번 가면 되돌아 나올 수 없는 쏜 살 같은 일방통행이기도 하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마음 조아리는 심란의 과정은 산 넘고 물을 건너 지금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인생이다.

구성원에는 과거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의 상당한 역사가 쌓이듯 자기 자신에게도 어머니의 배 속에서 잉태에서 출발해 현실에 살아오면서의 소소한 역경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창고 한 구석에 누더기 되어가는 인생의 실타래를 한 올 한 올 풀어가며 삶의 흔적을 찾아 추억여행을 떠나고 싶다.

 

 

-부러울 것 없었던 유년시절-

3대 독자로 귀여움을 독차지하며 성장한 가부장적 아버지와 자신에 앞서 남을 먼저 굽어살피는 인정 많은 현모양처인 어머니와의 사이에서 6남 1녀 중 막내둥이로 태어나 회갑을 훌쩍 지나 지금에 와 있다.

어린 시절 엄청 예뻐해 주셨던 형님 한 명이 청년기에 병으로 눈을 감았던 일을 포함해 재적부에는 모두 10남매로 등재되어 있고, 출생하자마자 숨을 거둔 또 한 명이 있었다고 하니 우리는 정말 대 가족이었다.

옛날에는 대부분 자녀들이 많았으며 의술이 낮아 병치레를 많이 해 죽고 사는 것은 오로지 당사자의 몫이었던 자연적인 일상이었다.

따라서 아이를 낳으면 출생신고를 하지 않고 몇 년 지나 하는 것이 다반사여서 호적 나이와 실제 나이가 다른 것을 많이 볼 수 있다. 

 

현재 정읍 공설운동장이 있는 상평동에서 큰오빠는 당시 정읍군청 공무원이었고 작은오빠는 정미소를 운영하며 부유한 생활을 하던 집안의 외동딸로 17살에 시집 온 어머니는 아버지보다 세 살 연상이었다.

따라서 어머니 댁호가 '상평댁'이었으며 쉽게 부르기 위해 '생평댁'이라 했다.

두 살 많은 형이 '막둥이'라 부르며 지내다 어쩌다 43살의 나이에 나를 세상 밖으로 내 보내 그 형은 결국 '큰 막둥이'라 바뀌었고 나는 '작은 막둥이'라 부름 받았다. 

어머니 배 속에 꿈틀거릴 무렵 유산을 시키기 위해 절구통에 몸을 부딪혀야 하는 처절한 아픔을 참아내야 했던 질긴 사연이 배어 있기도 하다.

 

출생한 곳은 가을이면 오색단풍의 전국 유명세로 관광객이 찾아오는 내장산으로 향하는 마을 즉, 정읍시와 정읍군이 합해져 지금은 전북 정읍시 송산동이라고 부르지만 그 당시는 정읍군 내장면 송산리 송학이라는 시골이다.

지금은 옛 호칭도 모두 사라지고 있는 추세지만 당시 나이 지긋한 분들은 이곳을 주로 '송용골'이라 일컫는 전형적인 농촌이다.

따라서 한국전쟁 당시 남부군 사령부였던 순창 회문산과 연계된 내장산을 따라 빨치산들이 정읍 시내까지의 접근성이 양호한 지형 루트라고 해 '모스크바'라 칭하기도 했다.

 

원래 우리 조상은 광산 김 씨들의 집성촌인 전남 장성 사거리에서 살다 증조할아버지 대부터 전북 정읍시 내장동 내장저수지 앞 현재 부여실 마을로 이주해 살았다고 한다.

증조할아버지는 조선시대 관직 중 문관 종9품 중에서 최하위 계급인 참봉이라는 벼슬을 가졌으니 엄격한 신분사회였던 당시로 따지면 괜찮은 집안이었다.

 

그 후 부여실에서 현재의 고향인 송산동으로 옮겼는데 동기는 명확하지는 않으나 1남 2녀의 자식 중 딸 한 명이 지주 갑부였던 송산동 송령마을 유 씨 집안으로 시집을 가 그 딸의 권유로 이사를 하게 되지 않았는지 추측해본다.

마을에서 손가락 안에 꼽을 정도로 농토가 많아 머슴을 부려야 했고 어렸을 적 큰 형님과 작은 형님을 돌봐 줄 유모까지 두었을 정도로 꽤 부유했다고 한다.

또한 작은 형님이 초등학교 5학년에 다닐 때까지 증조할아버지께서 장수하셨다고 한다.

 

증조할아버지는 독자였던 터라 가문의 번성을 위해 할아버지를 일찍 장가들게 했지만 결국 1남 1녀의 자녀만 낳아 아버지 또한 3대 독자가 되고 말았다.

할머니는 젊은 나이에 어린 남매의 남겨두고 할아버지보다 먼저 돌아가셨다.

증조할아버지는 어린 손주들을 보살피고 대성 집안을 꾸려나가기 위해 할머니를 새로 얻어 할아버지와 재혼하게 했고 아버지 또한 15살 되던 해 어머니와 조기 결혼을 시켰다.

 

그런데 새 할머니는 어머니가 시집을 오면서부터 참기 힘든 시집살이를 시켜 이를 지켜보던 증조할아버지께서 안 되겠다 싶어 할아버지와 새 할머니에게 재산을 나눠주고 따로 나가 살 수 있도록 분가를 해줬다고 한다.

할아버지와 새 할머니 사이에 남매를 두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할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새 할머니는 재산과 자식들을 데리고 정읍에 거주하는 중국 화교한테 시집을 가버렸다.

가세는 이때부터 기울어지기 시작했는데 당시 증조할아버지는 고령으로 농사를 지을 수 없었고 아버지 또한 귀엽게 커 왔던 터라 생활 능력이 부족해 하나 둘 농토를 처분하기 시작해 지금에 이르렀다고 한다. 

  

예로부터 내 고향 송학마을 뒷산 소나무에 학이 많이 날아와 이름 붙여졌다 할 정도로 뒤로는 매봉이라는 300 여 미터의 산이 병풍처럼 마을을 감싸고 있고, 앞으로는 내장천 맑은 물이 사시사철 흘러 배산임수의 전형적인 명당 지세다.

지금도 정식 수영 자세는 못하지만 어렸을 때 친구들과 냇가에 나가 즐겼던 개구리 헤엄이나 송장 헤엄은 물론  깊은 물 위에서의 부양 실력을 지금도 유지하고 있는 것은 그 영향이 컸기 때문이다.

특히 마을은 정읍 시내로부터 십리도 떨어져 있지 않아 내장산으로 통하는 넓은 신작로를 이용하지 않고 현재 정읍사공원이 위치해 있는 애터라 불리던 아양동 방향의 마을길을 걸어 빨리 시장에 접할 수 있었다.

 

오히려 신작로를 이용하면 멀리 돌아가야 하기 때문에 시간이 더 걸리던 것을 내장산을 오가는 완행버스가 운행되기 시작하며 조금씩 이용하다 지금은 마을까지 들어오는 시내버스까지 생겨 편리함이 많아지는 추세로 변모하고 있다.

따라서 그 시절 중.고등학교를 다닐 때도 늘 같은 길을 왕복해 걸어 다녔으며 무더운 여름철이면 마을 어귀마다 거대한 정자나무가 수호신처럼 서 있어 그늘 아래는 땀을 훔칠 수 있는 쉼터 역할을 톡톡히 했다.

 

어머니께서 늦은 나이에 낳았기에 허약한 나는 가족들이 '대추씨'라 부를 정도로 왜소했으며 더 늙기 전 학교에 보내야 한다고 집 나이 일곱 살에 지금의 내장초등학교에 입학시켰다.

다른 친구들은 한 살 위인 여덟 살이거나 형 나이와 같아 키 차이는 물론 몸집마저 작아 맨 앞줄에 서는 것은 졸업하는 그날까지 계속되었으며 '애기'라는 별명의 꼬리표까지 붙이고 다녔다.

태어난 날이 추석 사흘 뒤인 음력 8월이었으니 만 여섯 살도 채 되지 않았다.

친구들이 '애기'라 부르는 것이 싫어 학교에 가기 싫을 때가 많았으며 학교에 다니면서도 늘 어머니의 젖가슴을 놀이게 삼아 살았다.

 

지금도 형제들이 모일 때면 그 시절을 떠올리며 막둥이가 학교에 가기 싫다고 해 어머니는 십리 밖 학교까지 업고 가시거나 형들이 업어줬다는 말을 하곤 한다.

혹한의 겨울철이면 집에서 기르고 있던 토끼의 털가죽을 접어 꿰맨 귀마개를 하며 등굣길에 나섰다 신발 속에 눈이 들어와 발이 시리다는 핑계로 가지 않으려 하면 형 친구들까지 동원해 눈을 치웠다는 이야기에 웃음바다가 된다.

지금도 보관하고 있는 학교 통신표를 보면 결석 일수가 많아 선생님께서도 지적을 하신 기록이 있을 정도다. 

이러다 고등학교에 들어서면서 훌쩍 커 초등학교 동창회를 하면서 십수 년 만에 만난 친구들은 그 당시의 기억만 떠올렸다 깜짝 놀라기도 했다.

 

두 살 터울로 형들이 있어 마을에서든 학교에서든 남들로부터 괴롭힘을 당하거나 맞지 않고 자라 형이 없는 친구들로부터 늘 부러움을 샀다.

맘에 들지 않으면 오히려 나이 많은 사람에게 든든한 형들의 힘을 믿고 먼저 공격하는 일도 있었다.

하지만 법보다 주먹이 앞선다는 말이 있듯 형들이 없을 때 건너편에 사는 친구 형이 돌을 쥐어 머리를 찍는 바람에 지금도 왼쪽 가르마에 기다란 흉터가 남아 있기도 하다.  

늘 이렇듯 연약한 화초처럼 어리광을 부리거나 떼를 쓰며 남 부럽지 않은 유년시절을 보내며 바깥세상으로의 우화를 위해 성장해갔다.

 

직장에 들어갈 때까지 살았던 송학마을은 30여 호수가 미처 되지 않은 작은 농촌으로 우리 집은 본 마을로부터 200m 떨어져 있어 '건너뜸'이라 부르는 네 체의 집 중에 맨 앞쪽에 있었다.

일가친척이라 해봤자 300여 미터 떨어져 있는 정자나무 옆 당숙모 댁과 안길 맨 끝에 아버지의 여동생인 고모 댁이 있었으며 대부분 고흥 유 씨 집성촌이었다.

따라서 집성 유씨 주민과 사소한 다툼이 있으면 자 잘못을 따지기에 앞서 일방적으로 당해야 하는 수모가 많아 나머지 성씨들과 친하게 지내는 계기가 되기도 했지만 친구끼리는 서로 좋아 싸운 적이 없다. 

 

그 당시 초등학교로 가는 길은 내장천을 건너 포플러 나무들로 가득한 신작로에 접근하고서야 큰길을 걸을 수 있었으며 그 길은 졸업할 때까지도 비포장 자갈길이었다.

냇물을 건너는 다리가 없어 마을에서 울력을 통해 가마니에 돌을 넣어 징검다리를 만들어 통학을 도왔으나 여름철 큰 홍수로 떠내려가기 일쑤였다.

여럿이 손을 잡고 냇물을 건너거나 형들이 업어 건너 주기도 하였으며 정읍 시내에서 자전거를 타고 통근하는 선생님들이 위험천만한 광경을 지켜보고 그냥 집으로 돌아가라고 하셨다.

수업을 마치고 냇물이 불어 도저히 건너지 못할 경우에는 정읍 시내까지 걸어 유일했던 대흥교 다리를 지나 아양동 마을을 통해 30리 길을 걸어 집으로 와야 했다.

 

특히 가을철이면 내장산을 찾는 많은 관광 차량이 지나가며 일으키는 수북한 먼지로 온 몸을 뒤집어쓰거나 아예 바람 반대 방향으로 잠시 대피해야 했다.

또 꽃길을 조성하기 위해 여름이면 수업을 중단하고 전교생들이 신작로에 나가 코스모스를 옮겨 심어 꽂길을 가꾸거나 버스에 손 흔들기 운동을 펼치며 환영해주기도 했다.

마을 주변의 산들도 당시에는 벌거숭이 민둥산이 많아 산림녹화 사업의 일환으로 여름방학이 되면 나라의 사방공사용 아카시아 씨앗과 잔디 씨를 수집해 숙제로 가져갔다.

또한 퇴비 증산의 일환으로 퇴비 한 아름을 어깨에 메고 학교에 제출해야 했다.

 

지금은 경지정리며 수리시설이 잘 되어 있지만 다랑이 천수답이 대부분이어서 오로지 하늘만 바라보고 농사를 지어야 했던 빈곤의 시대였다.

한국전쟁이 막 끝난 어려운 시기에 접어들며 배곯음을 방지하기 위해 미국에서 무상 원조하는 분유는 물론 옥수수 가루를 학교 급식으로 만들어 먹었던 기억이 새롭다.

포대자루에는 악수하는 그림이 상표처럼 그려져 있었던 것이 지금도 기억에 새롭다.

몇몇 친구들은 찢어지게 가난해 도시락을 가져오지 못하거나 고구마를 대신 가져온 친구도 있었으니 참 암울한 시기였음에 틀림없다.

 

 

-한겨울이면 어렸을 적 생각이 더욱 떠올라- 

막둥이로 태어난 특권(?)때문에 초등학교에 다니기 훨씬 전부터 다른 형들에 비해 아버지와 어머니 두 분만이 잠자리를 하는 큰방에서 잘 수 있는 또 다른 권리까지 누릴 수 있었다.

 

그때는 왜 그리 겁이 많았던지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호롱불 생활을 해야 했던 시골이었으니 어둠이 내리면 마을 전체가 적막감이 감돌았다.

언제나 방문 앞쪽은 무서워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 끼어 잠을 잤으니 부부사랑마저 훼방을 놓았지 않았나 어른이 되서야 생각했다.

긴긴 겨울밤 오줌이 마려올 때 쥐 한 마리도 무서워 혼자서는 밖에 나갈 수 없어 곤히 잠든 어머니나 아버지를 깨워야 하는 신세를 져야 했다.

 

다행히 어머니가 먼저 일어났을 때는 추위도 참아가며 곁을 지켜주는데 어쩌다 아버지가 일어날 때면 귀찮아 방문만 열어 놓은 채 바라다만 보셨다.

어느 날에는 아예 곧바로 잠들어버린 적도 있었으니..

그때는 어떻게 나 혼자서 큰 모험을 하고 돌아왔을까 하는 안도감에 큰 숨을 내쉬기도 했다 

 

이후 몇 년이 지났을까.

시장에서 어머니가 사기 요강 하나를 사 오셨다.

편리해진 요강이 있다지만 추운 겨울 아궁이에 장작불 지펴 뜨끈뜨끈한 온돌방에 놓아둔다 치면 뚜껑이 없어 지린내 폴폴 나기에 마루에 내다놓고 용변시만 사용했다.

지금은 주거환경이 나날이 발전해 안방과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도 냄새가 나지 않는 쾌적한 화장실 있어 편리한 세상이 되었다.

 

또 웃목 한 구석에는 수수깡이나 짚으로 엮어 만든 둥그런 망태 안에 머리통만한 물고구마가 한겨울 동안의 간식꺼리로 가득 저장되어 있었다.

우리 집은 식구가 많은지라 늦가을 서리가 내릴 무렵 가족들이 모두 달라붙어 수확한 고구마를 많이도 보관했다.

따뜻한 이른 봄이 올 때면 그 많던 것도 어느새 온상에 싹틔울 씨 고구마 몇 개를 남겨 두고는 동이 났다.

 

그 시절에는 왜 그리도 춥고 또한 눈도 많이 내렸는지.

지금 생각해보면 내 고향 정읍은 역시 예나 지금이나 지리적 여건으로 다른 곳에 비해 눈이 많이 내린다는 것을 깨달았다. 

낮에 고구마 몇 개를 무릎까지 쌓인 눈 속에 묻어 두었다가 깊은 밤 조촐할 때 깎아 먹는 그 맛은 어떠하였는가.

 

또 마을 앞 꽁꽁 얼어붙은 수렁논에 동네 아이들이 모여 장작불에 벌겋게 달구어 만든 외발이나 앉은뱅이 스케이트를 타다가 점심때 집에 오면 어머니는 어김없이 가마솥에 막 삶아 놓은 고구마를 꺼내 놓으셨다.

초가 남향집 햇볕 잘 드는 마루에 둘러 앉아 뒤뜰 장독대에서 살얼음 낀 동치미와 통김치를 꺼내 고구마 위에 얹어 먹는 그 맛은 현 시대만 바라보며 달음질쳐 가고 있는 피자세대들은 상상 할 수나 있을런지..  

 

겨울밤은 길고 깊기도 한데 우리 몸을 괴롭히는 것이 있었다.

헐어진 내복 바느질 틈바구니나 재봉한 구석진 자리에는 늘 이 몇 마리가 제 집인 양 자리 잡고 괴롭혔다.

아예 식생하기 좋은 곳에는 얄밉게 알까지 품어 놓았으니 인간에 얹혀 사는 박멸의 기생충임에는 틀림없는가보다. 

어머니는 손톱을 세워 "여기? 여기?" 물으며 벌겋게 몇 겹의 줄 자국이 생길 때까지 연신 등을 긁어 주셨다.

그래도 가렵다 하면 내복을 뒤집어 벗긴 다음 석유 호롱불 곁으로 다가가 눈을 부릅뜨고 섬멸작전을 감행했다.

 

난 두꺼운 솜이불 속으로 기어 들어가 어머니의 성공을 기대하곤 하였다.

이번에는 그들이 얼마나 어머니의 재빠른 손놀림에 소탕될 수 있을까.

재봉한 곳을 따라 숨어 있는 이들은 어김없이 양손 엄지손톱 사이에서 문질러졌고 촘촘히 알이 박힌 곳을 호롱불에 지져대면 벌써 내 귀와 코에는 꼬실라지는 토도독 소리와 옷 타는 냄새가 고소하게 전해졌다. 

지금은 화학섬유에다 질 좋은 세제 탓으로 그 많던 기생충들은 멸종이 되었기에 이러한 추억도 아늑한 향수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말았다.

눈 내리는 겨울밤이면 아름다웠던 추억이 많이 떠오르는 이유가 이때문일 것이다.

 

일 년 중 밤이 가장 길고 낮이 가장 짧다는 24절기의 하루 동짓날

어머니는 동트기 훨씬 전 어둠 속에서 긴 머리 참빗으로 정갈하게 가다듬어 올리고 초가 마당 눈 쌓인 절구통을 행주로 닦아낸 뒤 밤새 물에 불려 놓았던 찹쌀을 덩그덩거리며 열심히 빻아댔다.

부잣집 귀한 딸로 태어나 애 띤 소녀 되어 가난뱅이 집으로 시집 와 허리 휘는 줄 모르며 딸린 식구 뒷바라지 모진 고생 한 방에 바수어 없애기라도 하려는 듯..
쌀가루 으깨 반죽한 다음 소쿠리에 담아 정지문(부엌)에 쪼그려 앉아 세월의 풍파에 헤진 손바닥 돌돌 굴려 새알 하나하나 정성들여 만드셨다.

등잔불 밑에서 만드는 수작업이지만 기계에서 뽑아낸 것과 다름없는 같은 크기로 만드는 것을 보면 한석봉의 어머니 못지 않게 섬세해 신기했다.


행여 서로 엉겨 붙을세라 쌀가루 솔솔 뿌려가며 흔들어 주고, 붉은 팥 삶아 체에 건져 펄펄 끓는 가마솥에 조금씩 붓고 휘저으며 동지죽을 만드는 모습은 어린 나에게는 어머니는 그저 불가능이 없는 만능인으로 생각했다.
정성을 다해 만든 동지죽을 먹기에 앞서 닳아빠진 바가지에 담아 장독대, 문짝, 기둥, 담장 할 것 없이 구석구석 한 바퀴를 돌며 악귀가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 뿌리던 어머니의 마음에는 어떤 소원이 담겨있었을까.

붉은 색은 부정과 잡귀를 물리치는 마력이 있다고 믿어왔던 풍습 그 이상을 초월하여 우리 가족의 안위를 바라는 간절한 염원의 신들림이었을까.


동지죽을 먹어야 나이 한 살을 더 먹는 것이라고 믿었던 쇠약했던 시절 형들처럼 빨리 키가 크고 덩치도 커 어른이 되고 싶었던 욕심에 몇 그릇을 뚝딱 먹어 치웠지만 나이는 동지죽으로 먹는 것이 아니라 한 해가 바뀜으로서 먹는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어른이 되어 있었다.

'農者天下之大本(농자천하지대본)'이라 하여 농업을 중시했던 시절 옛 선조들은 동짓날 눈이 많이 내려야 이듬해 풍년농사가 든다고 했던 아련한 동화같은 그 때가 그립다.

 

또 음력 1월15일은 새해 들어 처음으로 쟁반 같이 떠오르는 휘영청 보름달을 바라보며 무병장수와 무사평안을 기리는 신성한 날이기도 하다.

아직 스산한 겨울이 가시기에는 이르지만 오곡밥을 차게 해서 먹었고 마을을 돌아다니며 보름밥을 얻어먹었다.
부스럼이 생기지마라며 껍질이 단단한 알밤이나 호두를 까먹고 귀가 밝아지라며 막걸리를 마셔 얼굴이 후끈거렸던 기억이 떠오른다.

 

잠을 자면 눈썹이 하해진다며 천근같이 무거운 눈꺼풀을 비벼가며 뜬 눈으로 밤을 새웠던 보름날 어른들이 들려주는 솔깃한 정담들 그리고 아침 해가 떠오르기 전까지 상대방의 부름에 대답대신 "내 더위" "네 더위"를 외쳐대며 그해 더위를 사지 않으려  정신 바짝 차렸던 일, 자정이 되면 마당 한가운데 대나무 토막 내어 불을 지펴 마디마디 터지는 소리에 잡귀를 쫒아내려는 풍습들은 조상들의 애잔한 소망이었리라.

정읍 아양동 천변 둑 냄새가 진동하는 쓰레기 더미 속을 헤쳐 깡통을 주워 구멍을 내어 만든 횃불은 장남감도 없이 지냈던 그 시절에는 더할 나위 없는 보름날의 빼놓을 수 없는 즐거운 놀이갯감이었다.

 

쏘시개와 장작개비로 불을 지펴 횃불을 힘차게 돌리고 놀다보면 어느덧 잔불만 남아  마지막 불놀이 "망월이야" 크게 외쳐대며 공중을 향하여 힘껏 내 던졌다.
포물선을 그리며 흩어지는 화려한 불꽃가루 속에는 소중한 꿈도 하늘높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보름달이 중천에 떠오를 즈음이면 선후배들이 똘똘 뭉쳐  매년 치러왔던 앞 마을 행정리 친구들과 한바탕 치열한 마을싸움을 하곤 했다.

내장저수지에서 흐르는 냇물을 사이에 두고 우린 사방에 깔려있는 돌멩이를 주 무기로 삼아 달빛 그늘에 숨어있을 상대방을 향하여 사정없이 돌팔매질을 해대곤 했다.

 

어느 때에는 상대측 마을까지 진격하여 짚단과 움막에 불을 놓고 도망하였으니 어린 마음에 물불을 가리지 못하는 무서운 아이들이 되기도 했다.
던지고 받치기를 수 시간 쫓음과 쫓김을 반복할 즈음 어느 한쪽이 힘에 겨워 조용히 물러서면 싸움은 그것으로 끝이 났다.

그들이 우리들로부터 눈밖에 난 사람도 아니요 원한 질 사이도 아니건만 정월 대보름 밤이 되면 그렇게 내려온 마을의 풍습으로 인해 벌였던 것도 한해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바람에서 행하여졌던 것이었을까.

승자와 패자의 구별은 그 다음날 초등학교 교실에 모여 전날 있었던 서로의 무용담을 입씨름으로 털어 놓음으로써 결국 다음해를 기약하며 항상 무승부로 결말이 나곤 했다.

어제 다르고 오늘 다르고 또 내일 다르게 변화하는 눈부신 세태 속에 파묻혀 살아가고 있는 현실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정월 대보름날의 소중한 추억은 금은보화처럼 기억 속에 간직하고 싶다.  

 

 

- 우리 막둥이, 우리 막둥이-

어렸을 적에 방죽안, 구시골, 안가끔 세 곳의 다랑이 논과 밭을 합해 2천 평 남짓 농사를 지었는데 휴일이면 온 가족이 쉬지 않고 동원해 일궜다.

농토가 없는 가난한 친구들의 부모들은 대신 남의 일을 돕기 위해 품을 팔러 가기 때문에 종일 노는 것이 마냥 부럽기까지 했다. 

마을에서는 열 손가락 안에 들었지만 모두 가난했던 터라 산에 올라 땔감나무를 만들어 정읍시장에 내다 팔아 생계를 유지했는데 우리 집도 예외는 아니었다.

늦은 봄 쌀도 떨어지고 보리 수확도 아직 이른 보릿고개에는 어머니께서는 대가족이 먹어야 할 밥을 지을 때면 가마솥에 보리쌀을 쏟아부은 후 한 줌 흰 쌀을 씻어 흐트러지지 않게 올려놓았다.

 

마치 시루떡을 앉힐 때 쌀가루와 팥고물이 뒤죽박죽이 되면 안 되는 것처럼 조심을 기울였다.

그 쌀밥은 막둥이가 먹을 유일한 특식이었다.

따라서 막둥이 밥을 맨 먼저 푸셨는데 그렇지 않으면 보리밥과 섞이기 때문이다.

세상 모두의 어머니의 마음이 다 그랬듯 자식에 대한 사랑은 끝이 없지만 특히 막둥이에 대한 깊은 사랑이 남달랐는데 그 쌀밥에 참기름과 간장을 섞어 비벼주곤 했다.

밥상에 둘러앉아 먹던 형들이 고소한 냄새에 군침이 돌아 갑자기 "용인아 저기 좀 봐라. 뭐가 보이지 않느냐?" 해 시선을 돌리면 몰래 떠먹었던 일까지 벌어지기도 했다. 

 

이처럼 어머니는 다른 형제들에 비해 유별난 사랑을 주셨기에 더더욱 곁에서 떨어지지 않으려 했다.

참외, 가지, 고구마순, 계란 등 농축산물을 광주리에 담아 시장에 팔러 가거나 앞 산 높은 곳까지 올라 땔감 솔가리 둥지를 만들어 머리에 이고 정읍시장에 갈 때 따라나서겠다며 땅바닥에 드러누워 몸부림치기도 했다.

당시 놀이기구라고는 물을 길어 나를 때 사용하는 함석 통 밑받침으로 사용했던 굴렁쇠를 돌리거나 나무를 깎아 팽이를 만들어 노는 자체 생산한 것들뿐이었다.

그러나 어머니가 시장에 다녀올 때 사 주신 유일한 호각은 친구들을 가장 부럽게 하는 자랑거리였다.

 

어머니는 늘 바로 위 위의 형과 생일이 하루 차이로 늦지만 막둥이 생일상을 차려주지 않으면 안 된다며 떡가루를 빻아 시루떡을 만들어 윗목에 성주 물과 함께 올려놓곤 하셨다.

이처럼 듬뿍 넘치는 어머니의 일방적 사랑에 취해 성장하다 6학년이 되어 중학교 입학시험을 치렀다가 낙방이 되며 사건이 벌어졌다.

모든 형들은 전통 있는 학교로 여기는 정읍중학교를 다녀 이곳에 입학원서를 제출했지만 결과는 큰 슬픔을 안겨주고 말았다. 

학급에서도 늘 10등 안에 들며 공부도 할 만큼 했었다.

 

두 학급 110여 명 중에서 가정 형편이 어려워 진학을 포기하는 친구들이 대부분이었으며 당시 정읍중학교에는 딱 한 사람만 합격했다.

참담한 소식을 접한 어머니는 밤새 우시더니 다음 날 양 눈썹 사이에 팥알만 한 점이 있어서 부정을 타 시험에 떨어졌다며 탱자나무 가시를 꺾어 마구 쑤셔대는 것이 아닌가.

생채기가 생겨도 아프거늘 민 살을 마구 찔러 피가 줄줄 흐르는데 불구하고 그치지 않는 어머니의 구구절절한 돌발 행동을 바라보는 나에게는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어머니의 잘못이라고는 티끌만치도 없음에도 나에게는 한 마디 나무라지 않고 책임을 당신 탓으로만 돌리니 찢어질 듯 가슴이 아팠다.

그 일은 이듬해 정읍 시내 동초등학교에 재수를 하면서 단 하루도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책을 거의 달달 외울 정도로 공붓벌레가 되어 무난히 정읍중학교에 합격해 나 자신의 기쁨에 앞서 그토록 바랐던 어머니의 기쁨이 더 컸을 것이다.

과목마다 거의 만점을 맞아 장학생으로 선발된 줄 알았는데 뜻은 이루지는 못했지만 어머니를 기쁘게 해 드려 정말 가슴 뿌듯했다.

 

이렇듯 어머니는 자식들의 뒷바라지를 위해 몸을 사르듯 돌보다 진정 자신의 몸은 지키지 못해 결국 어느 즈음부터 몹쓸 폐결핵에 걸려 한 주먹씩 되는 약을 복용하며 병마와 싸웠다.

평소 어머니는 늘 붙어 있는 나에게 결핵균이 옮길까 봐 가급적 떨어져 있으려고 하셨지만 전혀 의식하지 않았다.

결국 초등학교 5학년 때 결핵검사를 했는데 나 자신도 모르게 균이 침투했다 사라져 오히려 면역이 생겼고 정상이었던 다른 친구들은 모두 어깨에 콩주사라는 BCG 예방접종을 해야 했다.

 

 

- 나의 사랑 나의 어머니-

나에게는 또 한 번의 큰 시련이 닥쳐왔다.

어린 나이에는 감당하기 힘들고 매서운 찬바람이 부는 바깥세상을 채 겪어보지 못한 채 살아가야 하는 급변이기도 했다.

중학교 1학년에 입학 두 달 남짓 재미를 붙이며 다니던 봄 어느 날 하교해 막 마을 안길로 들어서는데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며 빨리 집으로 가보라는 동네 어른의 말을 들었다.

죽음이라는 청천벽력 같은 말을 어린 14살 나이에 감당하기에는 너무 큰 짐이었으며 늘 의지하고 내 편이 되어줬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생각하니 앞이 캄캄했다.

 

한걸음에 집에 도착했더니 방 안에 반듯하게 누워있는 어머니는 막둥이의 얼굴도 바라보지 않은 채 이미 차가운 몸으로 굳어 있었다.

참기 힘든 커다란 충격에 울고 있는 모습을 지켜보던 아버지는 나를 꼭 껴안으며 따라 울기 시작했다.

어머니가 평소 몸이 좋지 않다는 것은 알았지만 죽음에 이를 수 있다는 것 까지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집에서 빤히 내다보이는 선산을 향하는 어머니의 상여소리는 펄럭이는 만장 깃발을 따라 애달픈 설움으로 바뀌어 마을 곳곳에 울려 퍼졌다.

 

말없이 바라보고만 있는 흑백 영정사진을 가슴에 안고 맨 앞에서 이끌며 환갑을 4년 앞둔 채 영면의 길로 인도를 해야 했다.

이런 슬픔과 고통은 나에게는 찾아오리라 전혀 생각하지 않았기에 두려움으로 다가와 더욱 고통스러웠다.

누구든 언젠가 한 번은 겪어야 할 이별의 시간이라지만 너무나 무겁고 힘들어 어찌할 바 몰랐으며 지금도 기억 저편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나의 사랑 나의 어머니]

     

어머니!

   

따뜻한 당신의 품 안에서

당신의 체온을 이어받으며

살아온 오늘 이제야

당신의 모습을 그려봅니다

   

 

지금은 차디찬 흙더미 속에 짓눌려

세월의 변화에 포기라도 한 듯

모든 것을 접은 채

맨땅에 말없이 누워 계십니다

   

 

당신의 곱디고운 그 모습 그 향기

자식들에게 아까운줄 모르고

당신의 소유마저 모두 넘겨주고서

빈껍데기의 흔적도 남겨놓지 않고

달랑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갔습니다

   

철없던 어린 시절

못난 자식으로 인한 눈물도 슬픔도

웃음으로 승화시키고

 

당신은

허기진 배를 움켜쥐면서도

자식들을 먼저 생각하며

배를 채워 주었고

   

 

당신은

배우지 못했어도

자식들 눈을 뜨게 하려고

이리 뛰고 저리 뛰며

학비를 벌어야 했습니다

   

두 사람이 들어도 버거운

갈퀴나무 둥주리를 머리에 이고

10리길 정읍 나무장터에

잰걸음으로 달려 나가

나무가 팔릴 때까지 밤이 깊도록

주인을 애타게 기다리며

자식들을 먼저 생각하였습니다

   

비바람이 불든

눈보라가 치든

젖은 손 시린 손

마다하지 않은 채

 

하얗게 빛바랜 당신의 머리는

쇳덩이처럼 아프지도 않던가요?

당신의 발걸음은

솜털처럼 그렇게도 가볍던가요?

   

 

부모 마음

자식 낳아 살다보면

안다 하였거늘

이제야 뒤늦게

당신의 진정한 마음을 깨닫게 됩니다

   

어젯밤 꿈속에서 허리 휜

당신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곱디곱고 아름다웠던

당신의 그 모습 사무치게 그리워

허전한 마음 속 빈 자리에

씻기지 않는 눈물로 남아 있습니다

   

 

태산처럼 머무는 당신의 빈자리

 

당신의 아름다운 그 모습은

이 세상 존재하는

어떠한 꽃과도 비교 할 수 없는

영원히 시들지 않는

아름다운 불멸의 꽃이십니다

   

 

나의 사랑

나의 어머니시여!

   

당신은 진정 삶의 올바른 방향을

자식들에게 제시해 주는

흔들리지 않는 나침판이요

   

당신은 어두운 밤길을

자식들에게 환하게 불 밝혀주는

영원히 꺼지지 않는 등불이십니다

   

이제 다시 돌아올 수 없는

머나먼 여행을 떠난 당신!

   

언젠가 이 자식도

당신의 뒤를 이어

당신의 품 안으로

돌아가야만 합니다

   

 

내가 있었던 그 자리

내가 왔었던 그 자리

 

품 안 그곳은

따뜻한 당신의 체온이 배어 있는

나의 영원한 보금자리입니다

   

어머니!

 

당신의 따뜻했던 가슴은

지금도 나의 곁에 함께하고 있습니다

   

좌절할 때

희망과 용기와 채찍을

불어주고 있고

 

슬플 때나 기쁠 때나

함께 울고

함께 웃어주는 버팀목으로 살아 계십니다

 

당신의 모습은

언제나 아름다운 천사의 모습입니다

   

변함없이

항상 내 곁에 있는

영원한 동반자의 모습으로 말입니다  

 

 

- 꿈 많던 사춘기 학창 시절은-

1969년 3월 3일 드디어 시골 초등학교에서 한 단계 상승한 정읍중학교 1학년 입학식이 열렸다.

중학교는 집에서 십리 가량 떨어져 있어 초등학교 다녔던 거리만큼 걸어 다녀야 했는데 눈비가 내리는 악천후에는 으레 진흙탕으로 변해 매번 운동화가 물에 젖었다.

특히 한여름에 장거리를 걷는다는 것은 온몸이 땀으로 젖고 마을 어귀마다 아름드리 느티타무가 있어 그늘 쉼터가 되어 주었다.

두 살 터울의 형들 역시 학생 신분이라 등교하는 시간이 많아졌고 형제간의 우애는 남달랐다.

 

어린 시절부터 중학교도 아니요, 고등학교도 아닌 초등학교 선생님이 되는 게 소박한 꿈이었다.

그러나 고등학교에 진학을 하며 부풀었던 꿈은 한 조각 휴지로 변하고 결국 현실에 맞는 직업을 선택해야 했다.

중학교 1학년 때 난생처음으로 충남 부여로 1박 2일의 수학여행을 갔었다.

형편이 어려워 이마저 가지 못할 뻔했으나 막둥이로서의 특혜를 누리는 행운을 얻었는데 지금도 잊히지 않는 부소산성의 추억들이 가물가물 떠오른다.

 

한창 사춘기에 접어드는 시기에 또 한 번 감래 하기 힘든 시련이 닥쳤다.

어머니와의 가슴 아픈 이별의 상처가 채 아물기도 전인 그 해 아버지는 나와 7살 아래인 아들을 데리고 온 새어머니와 한 마디 상의하지 않고 재혼을 했다.

당시 아버지와 누나가 같이 살았는데 누나는 곧 결혼을 해야 할 나이가 되었기에 앞으로 집안 살림을 꾸려 가야 할 여자가 필요했던 어쩔 수 없는 형편이기도 했었다.

하지만 어머니를 잃고 겨우 의지하며 살아가야 할 버팀목으로 믿어왔던 아버지마저 다른 여자에게 빼앗기고 말았다는 생각에 더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눈물 흘리며 감명 깊게 읽었던 콩쥐팥쥐와 신데렐라 소설에서 버림받는 주인공이 애처롭게 떠오르며 내 처지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피하지 못할 현실을 스스로 극복하겠다는 각오에 앞서 오기와 반항심으로 감당해야겠다는 생각만 머릿속에 가득 찼다.

아버지와 새어머니는 이런 마음을 헤아리고 이해하려 애를 쓰며 사랑으로 대하려 하지만 다가오는 만큼 더 멀어지려 했으며 이런 불평불만은 결국 새 동생에게 전해지며 회복될 수 없는 관계로 멀어져 갔다.

누나도 3년 지나 부안 줄포에서 농사를 짓는 종갓집 청년과 결혼을 해 내 편을 들어주던 가족 한 명이 그나마 사라져 외로움은 더해갔다.

자초했던 집안 분위기를 치유할 수 없는 상처로 남겨둔 채 시간이 흘러 어느덧 중학교 3학년에 오르게 되며 고등학교 입시를 염려해야 했다.

 

마침 나와 20년 차이가 되는 큰 형님이 군간부 후보생으로 입대해 소령으로 재직하던 1970년대 초 백마부대 소속 정훈장교 일원으로 베트남 전쟁에 참전을 했다.

따라서 큰 형수가 자녀들과 정읍 장명동 각시 다리 근처에서 자그마한 점방을 하며 살았는데 이곳에 잠시 머물며 영어와 수학학원에 다니는 입시 공부에도 치중했다.

당시만 해도 학력에 관계없이 취직해 생활 전선에 뛰어드는 것이 보편적이었던 힘든 시기였기에 대학에 진학한다는 생각은 꿈에도 없었다.

일반계보다 차라리 공고에 들어가려고 마음먹었지만 학비와 교통비 문제로 희망을 접고 1972년 3월 3일 정읍고등학교 문과에 진학을 했다. 

 

고등학교에 다니면서 왜소하기만 했던 키도 장마철에 호박 크듯 훌쩍훌쩍 크기 시작했다.

중학교에 다닐 때까지만 해도 얼마나 몸이 쇠약했는지 아침에 세수를 하지 못할 정도로 고개를 숙이면 코피가 쏟아지는 것이 일상이었다.

여름방학에 접어들면 유리로 만든 물고기 포획기를 가지고 내장천이 흐르는 도레미 방죽으로 가  시간을 보냈던 나만의 즐거움을 잊을 수가 없다.

재학 시절에는 지금은 사라진 교련이라는 과목으로 얼룩무늬 복장과 모자 턱끈을 내리고 총검술을 포함한 기초적인 군사훈련을 받았다.

고등학교 3학년이 되던 해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던 큰 형님이 임무를 완수함과 동시에 전역을 해 고향인 송산동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겠다는 제의에 따라 아버지와 새어머니는 그간 살던 집을 내어주고 정읍 덕천으로 이사를 가셨다.

나는 그대로 있게 되어 큰 형님 보살핌 속으로 재편되어 남은 학창 시절을 이어갔으며 큰 형님의 군 생활 패턴이 일반 생활에까지 그대로 적응되어 묻어났다.

학교에서 돌아오거나 휴일이 되면 일손을 도와야 했는데 군대의 일과처럼 정해진 시간에 작업하고 휴식하고 식사를 하는 엄격한 격식에 따라야 했다.

 

그동안 형제들의 탯줄을 끊었던 기역자 다섯 칸 짜리 초가를 헐고 그 자리에 블록 기와집으로 새로 지어 입주를 했다.

큰 형님은 새마을지도자로 임명되어 마을 발전 사업에 앞장섰으며 아버지가 물려준 몇 마지기 되지 않은 논밭이지만 초보 농사꾼으로서 노력하고 연구하며 귀농인답게 열과 성을 다했다.  

대학 입시 시즌이 다가오며 진학에 대한 꿈을 가져보며 지금의 군산대학교의 전신인 군산수전에 들어가려고 담임선생님과 상담도 했지만 결국 이마저도 이루지 못했다.

결국 비진학 희망자들은 밤늦게까지 학교 남아 야간 자율학습도 하지 않은 채 일과만 마치고 일찍 귀가했다.

이듬해인 1975년 1월 고등학교를 졸업을 한 뒤 취직을 하는데 우선을 두며 여기저기 일자리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이런 모습이 짠했는지 큰 형님께서는 3사관학교에 들어가 장교가 되라는 조언에 따라 향토사단에서 20kg 모래주머니를 어깨에 메고 달리는 체력장에서 낙제 점수를 받아 포기하고 말았다.

이후에도 여러 번에 걸쳐 군 장교를 하라며 충고를 아끼지 않았다.

큰 형님의 속박에서 벗어나고 싶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얼마 지나지 가출을 시도해 서울 미원 회사에서 근무하는 작은 형님을 찾아 취직을 부탁하기도 했었다.

한편 그해 큰 형님은 면에서 동력분무기를 배정받아 남의 벼농사까지 곁들여 가루 농약을 치다 그만 중독되어 추석 때 생을 마감 마을 사람들 모두 안타까워했다.

7남매 중 형제 한 사람을 슬픈 마음으로 멀리 보내야 했다.

 

 

- 군생활을 어떻게 하면 보람찰까 고민하다 전투경찰로...-

전투경찰 생활 33개월은 앞으로 다가올 인생에 있어 많은 경험과 기틀을 마련하고 사회생활을 하는 데 있어 알토란 같은 양분의 밑거름이 되었다.

학창 시절까지만 해도 가정이라는 우군의 테두리 안에서 자유분방한 온실의 화초처럼 살다 군대라는 새로운 환경에 접어들어 몸소 부딪치고 헤쳐 나가려는 생존의 몸부림과 희로애락을 체험했기 때문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년을 지내며 앞으로 어떤 직업을 선택할 것인가 고민하기 시작했다.

대한민국의 남자라면 4대 의무 중의 하나인 병역은 작은 걸림돌이 아닐 수 없었다.

평범한 군생활보다 어떻게 하면 3년이라는 긴 시간을 알차고 보람 있게 보낼 수 있을까 고민한 끝에 중학교 3학년 시절 다니던 학원에서 고창 구시포 전투경찰 초소를 위문 갔던 생각이 떠올랐다.

그 당시는 지금의 전투경찰이 아닌 일반 경찰관들로 구성된 소부대 단위들이 간첩들이 침투하기 용이한 해안 주요 취약 장소에 초소를 설치하고 경계 근무를 했었다.

 

그러다 어느 때부터 병역을 필하기 위한 젊은이들을 시험으로 뽑아 일정의 군사훈련을 시킨 뒤 배치해 일반 경찰관이 부대장의 지휘 아래 근무하는 전투경찰대로 바뀌었다.

육군, 해군, 공군, 해병대, 캬튜사, 전투경찰 등 다양한 형태의 병역 중에 국방부 소속이 아닌 내무부 소속인 전투경찰이라는 특색 있는 군생활을 해보고 싶어 도전을 했다.

예전에는 체력검사를 포함해 일반상식 등 기본 지식을 테스트하는 방법으로 시험을 치렀는데 무사히 합격해 전투경찰 27기로 1976년 6월 3일 목요일에 입소하라는 통지서를 받았다.

 

머릿속에 고민으로 남아있던 취직은 잠시 뒤로 한 채 입대하는 날까지 집에 머물며 큰 형님을 여의고 홀로 농사를 짓는 큰 형수의 집안일을 도왔다.

드디어 입영 하루 전 가족과 마을 친구들의 융숭한 배웅을 받으며 정읍역에서 밤 8시 33분 발 논산행 열차에 올랐다.

 육군훈련소가 있는 논산에 도착 여인숙에서 하룻밤을 보낸 뒤 아침 이발소에 들러 귀를 덮었던 머리를 빡빡 깎고서 집합 장소인 연무지서 앞 광장으로 갔다.

오전 10시 전국에서 모인 인원을 경찰이 수용 연대로 인계를 하며 호남고속도로와 인접한 29연대에서 6주간의 전반기 군사교육과 27연대에서의 4주간의 후반기 군사교육이 시작되었다.

 

다음 날 신체검사를 실시했는데 흉부 엑스레이 사진 촬영과 방역 주사 3대 그리고 혈압 등을 점검했다.\

그런데 날씨마저 덥고 좁은 공간에 많은 인원을 가둬놓았고 너무 긴장한 탓에 혈압이 160/90로 너무 높게 나와 2을종 판정으로 귀향할까 걱정하기도 했다.

입소 사흘 지난 토요일 오후에 군복을 비롯한 필수용품을 수령하고 집에서 입고 가져온 물품들을 모두 회수해 집으로 보내졌다.

월요일부터 29연대로 이동해 장정이 아닌 훈련병의 신분으로서 전반기 교육을 받았고 입대 7일 만에 치약 칫솔을 배급받아 양치질을 하니 날아갈 듯 상쾌했다.

 

내무반 생활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며 항고 뚜껑에 머리를 박는 원산폭격, 쪼그려 뛰기, 앉아 뛰며 돌기, 취침 기상, 시계 돌기, 두발 고개 들고 눕기, 엎드려 뻗히기, 주먹 쥐고 기어가기, 누워서 좌우로 돌기, 선착순, 완전군장 연병장 돌기 등 기억해 내기 어려운 수많은 종류의 기합과 신체적 폭력을 밥 먹듯 받으며 고된 훈련은 계속되었다.

입대 전 이럴 줄 알았으면 운동이라도 해 둘걸 입영 초에는 온몸에 알이 배고 입술까지 부르터 피가 솟고 코감기까지 걸려 다음 날 기상해 걷다 그만 앞으로 쓰러지기까지 할 정도로 힘들었다.

특히 M1 소총의 PRI 훈련은 그야말로 '피가 나고, 알이 배고, 아이고 아파라'라는 말이 떠오를 정도로 기합에서 시작해 기합으로 끝이 났으며 취침 전에 실시하는 야간점호는 훈련병 모두 두려움의 시간이었다.

 

"3선에 정렬~ 복창 소리 봐라~ 원 위치~" 

훈련병과 기간병의 신분상의 차이는 하늘과 땅 그 이상이었다.

열흘이 지나며 훈련소 생활도 비켜갈 수 없는 환경에 서서히 적응하기 시작하면서 배가 고파 밥을 두 번이나 타 먹었고 감춰 온 돈으로 밀가루 냄새 폴폴 나는 빵을 PX에서 사 먹는 재미 또한 행복했다.

뜨거운 햇볕이 내리쬐는 날 훈련을 마치고 돌아와 풀장에서 목욕을 시키는데 이쪽에서 저쪽 끝까지 가는데 3분의 시간을 주며 몸을 씻으라는 조교의 명령에 쓴웃음도 나왔다.

매주 금요일은 라면을 먹는 날로 힘들었던 한 주가 지나갔음에 안도하며 빨리 오기를 기다려졌고 친구들이 보내주는 응원의 위문편지는 큰 힘이 되어주었다.

 

시간이 얼마나 빨리 지나갔는지 6주간의 전반기 교육을 이수한 후 7월 16일 오전에 바로 앞 27연대 후반기 교육 장소로 옮겨져 4주간의 교육을 받았다.

후반기는 개인화기와 일반적 군사지식을 습득하기 위한 전반기 교육에 비해 수월하고 편했으며 LMG, AR, M60, 유탄발사기, 박격포 등 공용화기 위주의 교육이 대부분이었다.

전투경찰 생활을 하며 박격포를 제외한 공용화기는 실전에서 활용하므로 유익한 과목이었다.

후반기 교육 2주 차에 내무부에서 나와 이수 후 근무지 희망 조사를 했는데 전북-서울-전남-충남 순으로 적어 제출했다.

드디어 전후반기 논산훈련소 10주간의 힘들었던 군사교육을 무사히 마치고 훈련소 후문을 통해 배출 대대로 이동 전북으로 특명을 받아 전국 각지로 흩어지는 전우들과 아쉬운 눈물의 작별을 고했다.

바로 옆 전우는 경기도 출신임에도 제주도로 가고 말았다.

 

오후 5시경 연무역으로 가서 기차를 타고 강경역까지 갔다가 전북경찰에 인계되어 새벽 도경 상무관에서 첫 밤을 보냈다.

다음 날 해안 경비를 임무로 하는 208전투경찰대로 자대 특명을 받은 뒤 소속을 그대로 둔 채 내륙 전경대인 111전투경찰대가 있는 부안 상서로 옮겨 3주간의 신임교육을 받았다.

교육 내용은 대부분 이론 교육으로 전투경찰의 사명과 해안 경계 등 현장에서 필요한 일반적 사항이었다.

특히 접경 지역은 군에서 담당하지만 내륙과 인접한 해안의 대간첩작전은 경찰이 맡다가 이후 제주도를 제외한 전 지역이 다시 군으로 이관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군산, 부안, 고창 등 해안을 담당하고 있는 전북지역 역시 1개의 전투경찰대대의 산하에 내륙 전투경찰대와 3개의 해안 전투경찰대가 분할해 해안 경계를 수행하고 소대와 분대 단위로 소 분할해 구역을 맡았다.

부대를 지휘하는 호칭 또한 특이한데 경사와 경위급인 소대장을 군수, 경장과 경사급인 부소대장을 향도, 순경급인 분대장을 면장, 최 선임자를 초소장으로 불렀다.

전투경찰 계급으로는 육군의 병장급을 수경, 상병급을 상경, 일병급을 일경, 이병급을 이경이라 했으며 이를 통틀어 전경이라 불렀다.

1970년대 후반에 하사 계급인 특경 제도가 생겨 분대장 역할을 했는데 별도 모집을 운영했다가 일반 전투경찰과 잦은 다툼으로 선임 수경을 선발 육군 하사관학교에 일정의 위탁교육을 수료한 뒤 특경으로 임명 배치했는데 전역 후 경찰관 시험에 경장의 특혜를 주기도 했다.

또 1980년대 초에 의무경찰을 자체 선발 경찰행정 업무 보조나 집회시위가 주 임무인 기동대, 지역 방범순찰이 주 임무인 순찰대에 배치했는데 이들은 의경이라 불렀다.

 

3주간의 신임교육을 마치고 부안 하서에 있는 소속 부대 208전투경찰대로 부임 신고식을 한 뒤 1주간의 자대 교육이 시작되었다.

해안 경계 수칙이나 초소 실무 경험을 쌓는 교육이었으며 이수 후에는 본부에 남아 해안 초소에 발령되기까지 기존 선배들과 내무반 생활을 했다.

꽉 짜인 일과표에 의한 생활 방식인 현역과 달리 군기가 세지 않고 자율적 행동에 주민들과 접할 기회가 많아 군생활이라는 느낌을 받지 않았다. 

배구나 축구시합, 음주를 포함한 회식이 잦았으며 현역과 달리 아주머니를 고용해 가마솥에 일반 나무를 땔감으로 밥을 지어 가끔 의상봉으로 나무를 하러 가기도 했다.

매월 20일은 봉급날로 전투경찰에 들어와 처음으로 봉급을 받아 기뻤다.

총액 5,860원 중 휴가비 1,500원과 조의금 30원을 공제한 4,330원이었는데 보너스로 1,130원을 추가로 받았다.

어떤 선임은 이 돈을 모아 휴가나 외출할 때 부모님께 드렸다는 얘기를 들었다.

 

입대 후 4개월 만에 첫 외출을 허가받아 시골 버스를 타고 정읍 고향으로 달려갔다. 그 기분은 사뭇 달랐다.

모든 것이 새롭고 환영해 주는 것 같았으며 모처럼 친구들과 회포를 푼 뒤 오후 늦게 부대로 복귀했다.

또 얼마 지나지 않아 2박 3일의 특박이 있어 아버지 찾아뵌 뒤 고향 마을에서 친구들을 만나고 홀로 농사를 짓고 계시는 형수의 일손을 거두기도 했다.

드디어 본부 생활 두 달여 만에 계화도 간척지가 시작되는 돈지초소라는 경장이 지휘하는 초소(향초)로 발령을 받았다.

경사 소대장이 주둔하고 있는 계화초소에서 계화도를 중심으로 인접한 돈지, 살금, 양지초소를 관할하고 있었다.

 

맨 졸병의 신분이었지만 해안 초소에서 근무하고 싶었던 희망이 실현되어 기뻤다.

지금은 계화도 밖으로 거대한 새만금 방조제가 축조되어 계화도 일대는 이제 뭍으로 변했지만 당시만 해도 바다와 인접해 있었고 돈지항 또한 많은 어선의 출입항 어선신고소이기도 했다.

낮에는 경계초소에서 해상 감시는 물론 계화도를 드나드는 차량과 사람에 대한 검문검색을 하고 밤에는 이와 곁들여 수문 바깥쪽에 있는 탐조등을 인접 초소와 시간을 조정 해상을 비추며 해안경계를 했고 다른 조는 해안선 순찰 및 매복 근무를 했다.

의식주는 본부에서 배정되는 쌀, 보리, 된장, 간장, 라면 등 기본적인 것을 제외하고 1주일에 한 번씩 부안시장에 나가 식자재를 구입해 와 말단 기수 2-3명이 며칠 씩 번갈아 식사 당번을 하는 자체 급식이었다.

연료는 석유를 사용하는 곤로나 연탄을 이용했다.

 

또 밤이면 반찬거리를 구한다는 핑계로 남의 논밭에 심어 놓은 농작물을 캐 오거나 출입항하는 선원들이 가져오는 생선으로 보충을 하기도 했다. 

인근 마을 부녀회의 노력 봉사로 겨울 대비 김장을 하는 등 초소 주변 주민들의 적극적인 호응과 지원으로 초소를 운영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맨 졸병 생활을 하다 2달 만에 기다리고 기다렸던 후임자가 부임해 얼마나 기쁘고 반가웠는지 모른다.

다른 동기들은 얼마 고생하지 않고서 곧 졸병을 면했기 때문이었다.

그동안 선임자들로부터 받았던 인간적으로 겪기 힘들었던 수모와 체벌은 후임자에게는 절대 물려주지 않겠다 다짐도 했다.

 

군 입대 후 25일간의 첫 휴가를 받아 긴 시간 굴레에서 벗어 자유로운 시간을 가졌다.

쥐꼬리 봉급에서 조금씩 떼어 모은 10,500원의 휴가비를 수령 후 동기들과 유흥을 즐겼고 각지에 살고 있는 가족들을 방문해 맛있는 음식도 먹고 용돈까지 두둑하게 받았다.

마침 육군에 입대했다가 휴가 나온 바로 윗 형님과 서울에서 만나 각기 다른 군복을 입은 채 장충단공원, 남산, 명동거리를 누볐고 음악다방에 들러 또래 젊은이들과 낭만을 누리기도 했다.

전투경찰은 현역과 달리 외출, 외박, 휴가가 빈번해 자식 한 명 전투경찰로 입대해 전역할 때까지 들어가는 비용이 고등학생 3년간의 학비와 맞먹는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돈을 낭비하는 일이 많다.

 

휴가 중 소속 부대가 해안 경계 임무 기간을 마치고 타격대 임무로 변경되며 신임교육을 받았던 부안 상서로 옮겼기에

복귀도 그쪽으로 했다.

이곳 타격대는 부대 전체가 집단생활을 하며 내륙에 무장공비가 침투하면 퇴로를 차단하고 섬멸하는 역할로 6개월간 머물며 작전에 필요한 전술, 수색, 체력 등을 단련하고 평가를 받아야 하므로 군기가 세고 해안초소 생활과 달리 자유가 별로 없었다.

6개월간의 타격대 생활을 마치고 부대가 다시 해안 경계를 맡기 위해 김제 진봉에 본부를 두고 소초인 망해초소로 발령을 받았다.

이곳 역시 분대 단위 생활로 수시로 한 명이 김제시장에 외출을 나가 부식을 구입 자체 급식을 하며 해안 경계에 임했다.

논산훈련소를 이수하며 이경 계급을 단 후 일경으로 진급을 했고 전역 2달을 남기고 마지막 계급인 상경으로 진급을 했다.

 

당시는 일반 현역과 마찬가지로 병장급인 수경을 달고 전역한 사람이 없었다.

김제 망해초소에서 근무를 하다 군산 회현에 있는 월하산초소로 발령을 받아 선임 생활을 이어갔다.

전역을 눈앞에 두면서 군 복무보다 앞으로의 인생 진로에 대해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기에 회사 취업보다는 봉급은 박해도 안정적인 공무원이 좋겠다 싶어 한문을 비롯해 기본적인 공부를 틈틈이 했다.

1979년 3월 6일을 끝으로 생소하고 험난했던 33개월의 군생활에 종지부를 찍고 다음 날 본부에 들어가 전역식을 마치며 사회 구성원으로 다시 돌아왔다.

이제 지금까지 살아왔던 경험을 토대로 생선 가운데 토막 같은 인생의 전성기를 향해 또 한 번 가열하게 달려가야 할 것 같다.

 

 

* 내 삶의 흔적은 앞으로도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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