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작 글방

애기 2020. 12. 24. 12:32

조선왕조 500년 역사(1392-1910) 

-27대 518년간의 조선왕조 집권 역사 이야기-

 

1대 태조(1392-1398) 이성계(이단)

1335년 당시 원나라 지배를 받고 있던 고려 동계지역인 함경도 영흥(함흥)의 관리 이자춘과 어머니 최씨 사이에서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아버지로부터 사냥과 말타는 것을 배움,  이성계의 고조할아버지인 이안사는 전주에서 고려 북쪽으로 이사해 관직으로 있다가 원나라에 투항 지방관리를 얻어 기반을 닦기 시작하며 변방 지역에서 세력을 키움

그후 고려인 등 타 민족 차별 정책으로 이자춘은 반원정책을 펼치고 있던 고려 공민왕에 투항 관직을 이어받음

아버지가 죽고 27세의 나이가 되면서 홍건적의 난과 여러 외적의 공격 방어에 혁혁한 공을 세우고 화려하게 급부상 최고 사령관까지 오름

 

이후 우왕 때 원나라를 정복한 명나라가 계승하며 원나라 영토였던 고려의 철령 이북지역을 반환하라는 말에 이성계를 시켜 명나라 요동지역을 정벌하라고 하지만  4가지 참전 반대론을 펼쳐도 거절당하다 결국 출전 압록강 하류인 위화도에 주둔

당시 여름철 홍수 범람으로 인해 강을 건널 수 없다고 상소하지만 매번 거절당하자 반역자로 변신 대군을 이끌고 개경으로 진입 구테타를 일으켜 최영과 치열한 전투 끝에 성공(위화도 회군)

창왕을 허수아비로 두고 실권 통치를 하다 혈통을 문제삼아 공양왕으로 바꾸고 계속 권력을 장악하며 신진사대부와 개혁을 이어감

 

고려의 정통성을 유지하며 정치를 펼치자는 온건파 정몽주와 새로운 나라를 세우자는 경북 봉화출신인 강경파 정도전 사이에 갈등을 이어가다 다섯째 아들 이방원의 부하 조영규가 선죽교에서 반대 세력인 정몽주를 살해 후(하여가와 단심가)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함으로서 34대 475년의 고려는 멸망하고 조선왕국이 탄생(역성혁명, 이성계 59세의 나이로 이단으로 개명)

1대 조선왕으로 등국한 태조 이성계는 정도전, 조준의 도움으로 정치를 개혁해 조선의 기틀을 마련 중앙집권국가를 완성함, 수도를 개경에서 한양으로 옮김(1394년 10월 경복궁, 종묘, 사직단) 조선왕 중 두 번째로 장수하며 74세에 사망

고려와 달리 억불숭유 정책을 펼쳤으나 정작 본인은 불교를 신앙함

 

 

 

2대 정종(1398-1400) 태조의 둘째 아들 이방과 또는 이경(영안대군)

태조 이성계는 왕에 오르기 전 고향에서 17세에 결혼해 낳은 향처 신의왕후 한씨의 6남2녀와 둘째 부인인 21세 연하의 경처 신덕왕후 강씨의 아들 2명(방번, 방석)과 딸 1명(경순공주) 등 11명이 있었음(총 6명의 부인에 8남5녀)

조선 개국공신 정도전과 태조가 둘째 부인의 막내 아들인 11세 방석을 세자로 책봉 하려고 하자 첫째 부인의 5자인 이방원이 반발 형제의 난(무인정사 또는 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정도전을 제거하고 이복형제인 방번과 방석 그리고 태조의 사위(경순공주의 남편)까지 살해(1년 후 공주는 출가해 흥천사 스님) 후 정권을 장악했지만 주위 권유에도 불구하고 세자 서열상의 둘째 형인 이방과를 왕위에 올림

이방원은 이방과를 왕위에 올린 후 모든 통치권을 장악함으로써 태조는 사실상 허수아비 역할을 했다고 하지만 나름 왕권 강화를 위해 노력

1399년 수도를 한양에서 옛 수도였던 개경으로 옮김.

 

 

 

3대 태종(1400-1418) 태조의 다섯째 아들 이방원(정안대군)  세종대왕의 아버지

정종에게 아들이 없어 세자 책봉을 고민하던 중 태조의 넷째 아들 이방간과 다섯째 아들인 이방원이 왕위 찬탈을 위한 2차 왕자의 난(이방간의 난)이 일어나는데 선죽교에서 이방원이 승리하고 형 이방간은 귀양살이 보냄

2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성공한 이방원은 둘째 형인 정종으로부터 왕위를 물려 받았으며 후대에서의 왕위 찬탈 비극을 염려해 자신의 처남 4명을 죽이고 세종의 장인(심욘) 등 처가까지 죽이거나 노비로 만드는 만행을 저지름 

신하 정몽주를 죽이고 두 번에 걸친 아들간의 참혹한 왕자의 난을 지켜본 이성계(66세)는 이방원과 결별을 선언하고 개경을 떠나 오대산, 소요산, 함주 지금의 함흥인 고향으로 떠나 생활했으며 태종 이방원이 아버지를 궁궐로 모셔오도록 계속해 보내는 사신을 이성계가 활을 쏴 죽여버림으로써 되돌아오지 않아 소식이 없는 것을 비유해 '함흥차사'라는 말이 전래됨

 

함흥에 있던 이성계의 둘째 부인의 친척인 조사의가 군사반란을 일으켜 이성계와 힘을 규합 이방원의 군사와 결투하지만 실패(조사의의 난), 이성계는 왕사 무학대사의 간곡한 설득 끝에 궁으로 들어오고 이방원은 황해도까지 나가 마중,

1405년 이성계의 제안에 따라 수도를 다시 한양으로 옮겼어도 민심이 흉흉한데다 가뭄으로 기근 

이성계는 1408년5월24일 별궁인 창덕궁에서 사망(74세) 경기도 구리시에 건원릉 무덤이 있고 봉분에는 평소 그리워하던 고향의 억새를 옮겨 심음

이방원이 그동안 겪었던 왕권을 찬탈과정에서 겪었던 쓰라린 경험을 바탕으로 주변의 암투 세력들을 사전에 정리했으며 계미자라는 동활자를 개발해 편찬사업, 호패법, 학교를 건설해 교육을 양성하는 등 향후 조선 500년의 기반을 쌓음으로 세종시대에 들어서며 태평성대를 이루게 함

이방원은 민제의 딸과 원경왕후 민씨와 결혼해 4남(양녕,효령, 충녕, 성녕) 4녀를 뒀으며 첫째 아들이 폐세자인 양녕대군이고 셋째가 세종대왕임,  이방원이 처음에는 첫째인 양녕을 세자로 책봉했으나 공부를 하지 않고 여색에만 빠져 책읽기를 좋아하고 영특한 셋째 충녕(세종)으로 바꿈

한편 이방원은 왕비 1명과 후궁 9명을 둬 모두 12남17녀의 자녀를 둠

 

 

 

4대 세종(1418-1450) 태종의 셋째 아들 이도(충녕대군)

태종 이방원의 셋째 아들 충녕대군이 조선 4대 왕위인 세종에 즉위해 국가의 기반을 마련한 왕. 

1418년 6월 왕세자에 책봉된 후 8월에 태종의 양위를 받아 즉위하여 조선 초기 국가의 전반적인 제도를 갖추었고, 조선왕조가 지배 기반으로 삼은 유교문화를 융성하게 함

특히 훈민정음을 창제하여 백성들이 쉽게 쓰고 읽을 수 있도록 함

농사에 도움이 되는 천문기구를 개발하고 도량형을 정비했으며 출판사업을 크게 일으켰다. 

대외적으로 여진과 왜를 정벌하고 명의 요구를 적절히 조율했다. 

말년에 두 아들과 왕비를 잇달아 잃었으며 평소 몸이 비대하고 고기를 좋아해 건강이 크게 악화됨

유신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내불당(內佛堂)을 짓고 불경을 간행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숭유정책을 접지는 않았다.

 

세종의 대외정책은 태조 이래의 명에 대한 사대(事大)와 왜·여진 등에 대한 교린(交隣)이라는 틀 속에서 이루어졌다.

그러나 정치적·경제적인 안정과 국력의 축적을 바탕으로 대명외교에서는 처녀진헌(處女進獻)과 금은조공(金銀朝貢)을 폐지하는 등 불합리하고 무리한 명의 요구를 거절했다. 한편 고려말 이래 골칫거리였던 여진과 왜에 대해서는 정벌을 단행했다.

여진에 대해서는 김종서·최윤덕(崔潤德)으로 하여금 두만강·압록강 유역의 여진을 몰아내게 하고 6진(六鎭)·4군(四郡)을 설치, 이곳에 남쪽의 백성을 이주시켰다.

왜에 대해서도 1419년 이종무(李從茂)로 하여금 대마도를 정벌하게 했으나, 1423년 삼포(三浦)를 개항하면서 회유책도 병행했다. 그러나 왜인의 출입이 증가하자 이를 통제할 목적으로 1443년 계해조약을 맺어 세견선(歲遣船)과 세사미(歲賜米)의 양을 각각 50척과 200섬으로 제한했다.

 

세종은 소헌왕후 심씨와 결혼해 8남(5대 문종, 7대 세조인 수양, 안평, 임영, 광평, 금성, 평원, 영응)2녀를 두는 등 부인 6명에 18남4녀를 둠

 

 

5대 문종(1450-1452) 세종의 첫째 아들 이향(2년 3개월 만에 사망)

문종은 1414년(태종 14) 세종과 소헌왕후의 첫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왕 즉위 2년 3개월 만인 39세에 사망

세종이 왕위에 오르고 3년이 지난 1421년(세종 3)에 8세의 나이로 세자에 책봉

문종은 성품이 인자하고 명철했으며 학문을 좋아하고 음악과 여색은 즐기지 않았다. 그는 특히 문장에 뛰어났다.

세자 시절 문종이 집현전 학사들에게 귤을 담아 보낸 소반에 귤시(橘詩)를 지어 적은 일이 있었는데 이를 본 집현전 학사들이 그 뛰어난 문장과 글씨에 반해 서로 베껴 적으려고 소반을 놓지 않았다고 한다.

또 효성이 지극하기로도 유명했다. 문종은 부왕이 앵두를 좋아하는 것을 알고 궁에 손수 앵두나무를 심고, 앵두가 익으면 부왕에게 가지고 갔다. 이를 맛본 세종은 어디에서 가져온 앵두보다도 세자가 손수 심어 가져온 앵두의 맛이 가장 좋다며 기뻐했다고 한다.

 

문종은 1427년(세종 9)에 김오문(金五文)의 딸 휘빈 김씨와 혼인했다. 그러나 휘빈 김씨는 문종이 자신을 가까이하지 않자 은밀한 술법을 동원해 문종의 사랑을 얻으려고 했다.(신발과 뱀 정액) 이러한 불순한 행실이 결국 세종의 귀에까지 들어가 쫓겨나게 되었다.

세종은 1429년(세종 11) 폐출된 휘빈 김씨를 대신해 봉여(奉礪)의 딸을 새 세자빈으로 들였다. 순빈(純嬪) 봉씨다. 그러나 문종은 순빈도 가까이하지 않았으며 순빈은 시녀와 동성애로 폐출, 세종은 후사가 걱정이 된다는 신료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세자에게 세 명의 소실을 얻어 주었다.

그 후 문종은 소실들의 거처를 드나들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마음이 가지 않았는지 좀처럼 처소를 찾지 않았다.

워낙 몸이 허약해 여색을 즐기지 않았다.

 

문종은 세 명의 소실 중에서 당시 유일하게 자식(경혜공주)을 낳은 권씨를 세자빈으로 삼았다.

권씨는 이후 아들을 한 명 더 낳았는데 이가 단종이다.

훗날 현덕왕후로 칭송된 권씨는 단종을 낳고 사흘 만에 죽었으며 이후 문종은 더 이상 세자빈을 두지 않은 채 정비가 없는 상태로 왕위에 올랐다.

이 밖에 문종은 세 명의 소실 중 한 명인 양씨에게서 딸 하나를 더 낳았다.

 

문종은 29년 동안이나 세자의 자리에 있었던 준비된 왕이었다. 1445년(세종 27)부터 문종은 건강이 좋지 않은 세종을 대신해 섭정을 했다. 세종은 그 전부터 이미 여러 차례 "나의 계획한 일이 젊을 때와 다른 것이 많고, 또 풍질(風疾)이 있어 스스로 힘쓰기 어려우니 세자로 하여금 모든 정무를 대신 다스리게 하겠다."라는 뜻을 비쳤다. 대신들은 법도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이를 반대했으나 세종은 1443년(세종 25) 왕세자가 섭정하는 제도를 만들고, 이에 따라 1445년(세종 27)부터 본격적으로 모든 정무를 세자가 맡아보게 되었다.

 

1450년(세종 32) 2월 세종이 죽자 문종은 마침내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이미 세자 시절부터 노쇠한 부왕을 대신해 섭정을 했던 터라 왕위에 올랐다고 갑자기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언로(言路)를 넓히기 위해 문무(文武) 4품 이상의 관원들에게만 허락되던 윤대(輪對, 임금을 만나 직무에 대해 아뢰던 일)를 6품까지 참여할 수 있도록 했다.

 

또한 1451년(문종 1)에는 새롭게 고친 《고려사》를 편찬하고, 1452년(문종 2)에는 《고려사절요》를 편찬했다.

문종은 세종처럼 학식과 인품을 갖춘 성군으로 성장할 자질을 갖추고 있었다. 다만 세종이 말년에 세자 섭정을 시킨 것이 오히려 왕권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고, 그 와중에 문종의 두 동생 수양대군과 안평대군 등 종친 세력이 커진 것이 화근이었다. 더구나 몸이 허약했던 문종은 왕위에 오른 후에 점차 병색이 짙어져 2년 3개월 만에 죽고 말았다.(39세)

 

왕위에 오른 후 병색이 짙은데도 문종은 의욕적으로 국방 정책을 펼쳤다. 문종은 세자 시절부터 병법에 관심이 많았다. 또한 병기 제작에도 관심이 많았다. 세종 대에는 탄탄한 국가 재정을 바탕으로 여러 종류의 화포(火砲)와 신기전(神機箭) 등의 신무기를 제작했는데, 세자였던 문종은 대부분의 무기 제작에 직접 참여했다.

한편 문종은 1450년(문종 즉위)에 삼국 시대부터 고려에 이르기까지의 크고 작은 전쟁 기록을 담은 《동국병감(東國兵鑑)》을 편찬케 했다. 이 책은 "외적이 와서 침범한 일과 우리나라에서 미리 준비하고 방어한 계책의 수미(首尾)와 득실(得失)을 자세히 참고"하기 위해 집필된 것이다. 이는 과거의 일을 통해 현재의 국방을 튼튼히 하자는 것으로, 조선 시대 무장들이 반드시 읽어야 할 교양서로 여겨졌다.

 

1451년(문종 1) 6월에는 군제를 개편했다. 기존의 12사(司)였던 중앙 군제를 5사로 개편하고 각 사마다 5영(領)을 두었다. 또한 5사 중에서 2사는 입직(入直)하고, 3사는 출번(出番)하되, 3사 중에서 날을 나누어서 순찰하도록 했다. 이 밖에 별시위(別侍衛), 총통위(銃筒衛), 방패(防牌) 등 별도의 군사들을 5사에 나누어 소속시켰다. 문종은 이와 같은 군사 개편 내용을 직접 손질해 의정부에서 의논하도록 했다.

 

문종은 조선 건국 이래 적장자로 난이나 세자 교체 없이 왕위에 오른 최초의 왕이었다. 그러나 왕위에 오를 때부터 건강이 좋지 않았다. 

결국 왕위에 오른 지 2년 3개월 만인 1452년(문종 2) 5월에 39세의 나이로 사망

문종이 죽자 그의 적장자인 단종이 왕위에 올랐는데 이때 나이는 12세였다.

문종은 죽기 전 김종서, 황보인(皇甫仁) 등의 원로대신에게 한 명뿐인 아들의 보필을 신신 부탁했다.(고명대신)

그러나 왕권이 약화된 틈에 문종의 동생이자 단종의 숙부인 수양대군과 안평대군이 호시탐탐 정권을 노리고 있었다.

태어나자마자 모후를 잃고 또다시 성년이 되기도 전에 부왕을 잃은 어린 단종왕의 운명은 그야말로 풍전등화였다.

능은 경기도 양주의 현릉이다.

 

 

 

6대 단종(1452-1455) 이홍위(문종의 아들로 12세에 왕위)

어머니 현덕왕후 권씨는 문종이 세자이던 시절 소실로 들어왔다가 두 명의 세자빈이 폐출된 후 왕비가 되었다.

그러나 단종을 낳고 사흘 만에 죽었고 문종이 더 이상 세자빈을 들이지 않은 탓에 단종은 모후 없이 세종의 후궁인 혜빈 양씨의 손에서 자랐다. 형제로는 누나인 경혜공주와 이복동생인 경숙옹주가 있다.

단종은 1448년(세종 30) 8세의 나이로 세종에 의해 왕세손에 책봉되었다.

1450년 문종 즉위와 함께 왕세자가 되었고 1452년(문종 2) 5월에 문종이 죽으면서 왕위에 올랐다.

이때 단종의 나이 12세였다.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단종은 즉위 1년 만에 숙부인 수양대군이 일으킨 정란으로 유명무실한 왕이 되었다.

모든 권력이 수양대군에게 넘어간 상태에서 단종은 1454년(단종 2) 1월에 송현수의 딸을 왕비로 맞아들였다.

단종은 아직 삼년상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혼사를 치를 수 없다며 여러 차례 거절했으나 수양대군은 끝내 이를 관철시켰다.

이름뿐인 왕비가 된 정순왕후 송씨는 당시 15세였다. 단종과 정순왕후 사이에는 후사가 없었다.

 

문종으로부터 부탁 받은 고명대신들은 의정부의 의결을 거쳐 정사의 대부분을 처리했고, 어린 왕 단종은 그저 형식적으로 재가만 했다.

조선 전기의 강력했던 왕권은 세종 말기와 문종 대를 거치면서 다시 약화되기 시작해 단종 대에 이르러서는 더더욱 약해졌다.

이 틈에 왕의 상투를 틀어쥔 고명대신들은 황표정사((黃標政事)(고명대신들이 정사를 결정하면 왕이 그 위에 황색 표시를 하여 형식적으로 승인하던 형태)를 통해 인사를 전횡할 정도로 막강한 권한을 갖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대신들을 견제하는 세력이 등장하였다. 바로 세종의 둘째 아들이자 단종의 숙부인 수양대군으로 대표되는 종친 세력이었다.

이들은 세종 말년 문종이 세자로서 섭정을 시작할 무렵부터 세력이 커지기 시작했다. 힘없는 단종에게는 왕권을 위협하는 가장 두려운 존재이기도 했다.

 

그렇다고 모든 종친 세력이 고명대신 세력과 대립각을 세운 것은 아니었다. 세종의 셋째 아들이자 수양대군의 동생인 안평대군은 오히려 고명대신들과 결탁해 새로운 실력자로 급부상했다.

한편 이런 가운데 인사권을 쥐고 흔드는 대신들 때문에 주요 관직으로 진출하지 못한 신료들, 그중에서도 집현전 학사들의 불만이 커지고 있었다.

이들은 고명대신 세력이 안평대군과 연합해 세를 키우자 수양대군의 편에 서게 되었다.

다분히 정치적 득실을 따진 행보였다.

결국 왕권을 둘러싸고 서로를 견제하던 종친 세력과 신료 세력은 다시 안평대군과 대신 세력, 수양대군과 반대 대신 세력의 구도로 나뉘게 되었다.

단종은 두 세력 간 권력 다툼의 틈바구니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처량한 신세가 되고 말았다.

 

결국 1453년(단종 1) 10월 계유정난이 일어났다. 계유년에 김종서, 황보인 등이 안평대군과 결탁해 반역하고자 한 것을 평정했다는 의미로 계유정난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는 수양대군이 왕위를 찬탈한 쿠데타였다.

수양대군은 어린 왕을 앞세워 권력을 독점하다시피 하는 고명대신들에게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던 중 그들이 자신을 견제할 목적으로 안평대군을 지지하고 나서자 마침내 거사를 결심하였다. 수양대군은 심복인 양정, 홍달손 등의 무사들과 한명회같은 모사(謀士)와 함께 일을 도모하였다.

수양대군은 김종서 등을 처단하기에 앞서 자신의 뜻을 밝혔다.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핑계에 불과했다. 수양대군에게는 왕이 되고자 하는 야망이 있었다. 적장자 계승의 원칙에 따른다면 그에게 왕이 될 기회는 없었다. 결국 그가 왕이 될 수 있는 길은 무력으로 어린 조카를 끌어내리고 그 자리를 차지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그러나 아무리 비정한 권력의 세계라도 숙부가 어린 조카에게 칼을 겨누는 것은 용서할 수 없는 패륜이었다.

따라서 그의 봉기를 정당화하기 위해서는 왕권을 위협하는 역적 도당이 필요했고, 화살은 바로 김종서를 비롯한 고명대신들 그리고 그들과 결탁한 안평대군에게 향했다.

수양대군과 수하들은 제일 먼저 김종서를 찾아가 격살하고 황보인을 비롯한 나머지 의정부 대신들도 차례로 처단했다. 또한 동생인 안평대군도 유배시켰다가 처형했다.

태종 이방원이 일으켰던 왕자의 난 이후 정권을 잡기 위해 혈육을 제거하는 비정한 참상이 또다시 벌어진 것이다.

계유정난을 계기로 수양대군은 영의정에 올라 이조판서와 병조판서를 겸임하는 등 조정의 모든 권력을 움켜쥐었다.

 

어린 단종은 숙부 수양대군이 무력으로 권력을 찬탈하는 동안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이름뿐인 왕의 자리를 지키며 수양대군의 처분만 기다리는 신세가 되었다.

결국 1455년(단종 3) 윤 6월에 단종은 "내가 나이가 어리고 중외(中外)의 일을 알지 못하는 탓으로 간사한 무리들이 은밀히 발동하고 난(亂)을 도모하는 싹이 종식되지 않으니, 이제 대임(大任)을 영의정에게 전해 주려고 한다."라는 말과 함께 수양대군에게 선위하고 상왕으로 물러났다.

상왕으로 물러난 단종은 세종의 여섯째 아들이자 수양대군의 동생인 금성대군의 집에 연금 상태로 있게 되었다.

그러다가 1457년(세조 3) 6월에 성삼문, 박팽년 등의 집현전 학사들이 단종 복위 운동을 펼친 것을 기화로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등되었다. 이때 단종의 나이 17세였다.

노산군으로 강등됨과 동시에 영월로 유배된 단종은 금성대군의 단종 복위 계획이 사전에 발각됨에 따라 사약을 받았다. 실록에는 조정 대신들이 노산군을 처형하라고 주장해 수양대군인 세조가 이를 윤허했는데, 사약이 내려지자 노산군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조선이 아무리 왕조 국가라고는 하지만 힘이 없는 왕의 즉위는 결국 정국의 혼란만 가중시킬 뿐이었다.

단종의 사례는 보호받지 못한 왕권의 말로가 이처럼 비참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 주었다.

그렇게 그는 권력 다툼의 희생양이 되어 짧은 생을 마감했다. 1457년(세조 3) 10월 향년 17세였다.

이후 단종은 1681년(숙종 7)에 노산대군으로 복위된 데 이어, 1698년(숙종 24)에 왕의 시호를 받고 추증되었다.

단종이 죽은 지 200년이 훨씬 지난 뒤였다. 묘는 영월에 위치한 장릉(莊陵)이며, 지금도 영월 청령포 주변에는 단종과 관련된 전설과 유적이 많이 남아 있다.

 

 

 

7대 세조(1455-1468) 이유(수양대군)

조카 단종을 물리치고 세조로 등국한 수양대군은 타고난 자질이 영특하고 명민(明敏)하여 학문도 잘했으며 무예도 남보다 뛰어났다.

처음에 진평대군에 봉해졌다가 1445년(세종 27)에 수양대군으로 고쳐 봉해졌다.

대군으로 있을 때 세종의 명령을 받들어 궁정 안에 불당을 설치하는 일에 적극 협력하였다.

또한 승려 신미(信眉)의 아우인 김수온과 함께 불서의 번역을 감장(監掌)하고 향악의 악보도 감장, 정리하였다.

1452년(문종 2)에는 관습도감도제조(慣習都監都提調)에 임명되어 국가의 실무를 맡아보았다.

 

1452년 5월에 문종이 죽고 어린 단종이 즉위하였다. 수양대군은 7월부터 심복인 권람, 칠삭동이인 한명회 등과 함께 정국 전복의 음모를 진행시켜 이듬해 1453년(단종 1) 10월12일 이른바 계유정난을 단행하였다.(한명회의 계획에 의거 단종을 보필했던 김종서, 황보인, 안평대군을 죽임)

하룻밤 사이에 폭력으로 정국을 전복시키고 군국(軍國)의 대권을 한 손에 쥔 수양대군은 자기 심복을 요직에 배치 국정을 마음대로 처리하였다.

조정 안에 있는 반대 세력을 제거하고 밖에 있던 함길도도절제사(咸吉道都節制使) 이징옥마저 주살, 내외의 반대 세력을 모두 제거하였다. 1455년 윤 6월 단종에게 강요하여 왕위를 이어 받았다.

 

즉위한 해 8월에 집현전직제학(集賢殿直提學) 양성지(梁誠之)에게 명해 우리 나라의 지리지(地理誌)와 지도를 찬수(撰修)하게 하였다. 11월에는 춘추관(春秋館)에서 『문종실록(文宗實錄)』을 찬진하였다.

1456년(세조 2) 6월에 성삼문, 박팽년, 이개, 하위지, 유성원, 유응부 등 이른바 사육신이 주동이 되어 단종 복위를 계획했으나 일이 발각되자 관련된 70여 명의 신하들을 모두 사형에 처했고 가족은 노비로 삼음(생육신인 김시습이 사육신 시신을 수습)  단종의 부인인 정순왕후의 생부인 장인 송현수는 수양대군의 친구임에도 처형, 외가와 처가까지 처벌, 단종 부인은 81세까지 장수하며 그러워하다 삶을 마감

 

이 해 6월에 단종이 사육신의 모복사건(謀復事件)에 관련되었다는 이유로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降封), 강원도 영월에 유배시켰다. 뒤따라 경상도의 순흥에 유배된 단종의 다섯째 숙부인 금성대군, 이유가 복위를 계획하다가 일이 발각되었다.

이에 신숙주, 정인지 등 대신의 건의에 따라 이 해 10월에 사사(賜死)하고 단종도 관원을 시켜 죽이게 하였다.

 

 

1458년에 호패법을 다시 시행하여 국민의 직임과 호구의 실태를 파악하고 도둑의 근절에 주력하였다. 이 해에 『국조보감』을 편수하였다. 즉 태조·태종·세종·문종 4대의 치법(治法)·정모(政謨)를 편집, 후왕의 법칙으로 삼으려는 의도에서였다. 그 뒤 『동국통감』을 편찬하게 했는데 이는 전대(前代)의 역사를 조선왕조의 의지에 따라 재조명한 것이다.

세조는 정정이 안정됨에 따라 왕조정치의 기준이 될 법전의 편찬에 착수하였다. 최항 등에 명해 앞서 있었던 『경제육전』을 정비, 왕조 일대(一代)의 전장(典章)인 『경국대전』의 찬술을 시작하였다. 1460년에 호전(戶典)을 반행(頒行)하고 이듬해 1461년에는 형전(刑典)을 반행하였다.

 

세조는 무비(武備)에 더욱 유의, 1462년에 각 고을에 명해 병기를 제조하게 하고, 1463년에는 제읍(諸邑)·제영(諸營)의 둔전(屯田)을 성적(成籍)시켰다. 1464년에는 제도(諸道)에 군적사(軍籍使)를 파견해 장정(壯丁)의 군적 누락을 조사하게 하였다.

1466년에 관제를 고쳐 영의정부사는 영의정으로, 사간대부는 대사간으로, 도관찰출척사는 관찰사로, 오위진무소는 오위도총관으로 병마도절제사는 병마절도사로 명칭을 간편하게 정하였다.

 

그리고 종래의 시직(時職: 현직)·산직(散職) 관원에게 일률적으로 나누어주던 과전(科田)을 현직의 관원에게만 주는 직전제(職田制)로 바꾸어 시행하였다.

세조는 왕권을 확립한 뒤, 지방의 수신(帥臣: 병마절도사)에 그 지방 출신을 등용하는 것을 억제하고 중앙의 문신으로 이를 대체시켰다. 이에 반감을 품은 함길도 회령 출신 이시애가 1467년에 지방민을 선동, 길주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세조는 이 반란을 무난히 평정하고 중앙집권 체제를 더욱 공고히 수립하였다.

세조는 민정에 힘을 기울여 공물 대납(貢物代納)의 금령(禁令)을 거듭 밝히고, 잠서(蠶書)를 우리말로 해석하고, 국민의 윤리교과서인 『오륜록』을 찬수하게 하였다.

또 문화 사업으로서 『역학계몽도해』·『주역구결』·『대명률강해』·『금강경언해』·『대장경』의 인쇄와 태조·태종·세종·문종의 어제시문을 편집, 발간하였다.

 

외국과의 관계로는 왜인(倭人)에게 물자를 주어 그들을 무마, 회유시키고, 야인(野人: 여진족)에게는 장수를 보내어 토벌, 응징하였다. 또 명나라의 요청에 따라 건주위(建州衛)의 이만를 목베어 국위를 선양하기도 하였다.

세조는 신하들을 통솔함에 있어 자기에게 불손하는 신하는 가차없이 처단하고 자기에게 순종하는 신하는 너그럽게 대하였다. 즉, 양산군(楊山君) 양정(楊汀)이 정난(靖難)의 원훈(元勳)으로서 북변(北邊)의 진무(鎭撫)에 공로가 많았는데도 세조에게 퇴위를 희망하는 불손한 말을 한 이유로 참형에 처하였다.

하지만, 인산군(仁山君) 홍윤성(洪允成)은 세력을 믿고 방자하게 굴며 제 가신(家臣)을 놓아 사람을 살해하기까지 했는데도, 항상 순종한다는 이유로 주의만 시켰을 뿐 처벌하지 않았다.

 

정치 운영에 있어서 신하들의 의견을 받아들이는 이른바 ‘하의상통(下意上通)’보다는, 자기의 소신만을 강행하는 ‘상명하달(上命下達)’식의 방법을 택하였다. 세조는 즉위 직후에 왕권 강화를 목적으로 의정부의 서사제(署事制)를 폐지하고 육조 직계제(直啓制)를 시행하였다.

이것은 어린 단종 때 정치의 권한이 의정부의 대신들에게 위임된 것을 육조 직계제로 대체, 왕 자신이 육조를 직접 지배하고자 한 것이다. 즉, 중신(重臣)의 권한을 줄이는 반면, 왕권의 강화를 기도하고자 한 목적에서였다.

1456년 6월 성삼문·박팽년 등 사육신의 단종 복위 사건을 계기로 학문 연구의 전당인 집현전을 폐지하고, 정치 문제의 대화 토론장인 경연을 정폐시켰다.

 

때문에 국정의 건의 규제 기관인 대간의 기능이 약화된 반면, 왕명의 출납기관(出納機關)인 승정원의 기능이 강화되었다. 이 시기의 승정원은 육조 소관의 사무 외에도 국가의 모든 중대 사무의 출납도 관장하고 있었다.

승정원 직무의 중요성 때문에 직무를 맡은 관원은 반드시 국왕의 심복으로 임명하였다. 즉, 신숙주·한명회·박원형(朴元亨)·구치관(具致寬) 등 정난공신(靖難功臣)이 승정원에 봉직하면서 모든 국정에 참여하였다.

또, 세조는 국가의 모든 정무를 이들 중신 중심으로 운영했으므로 정부의 중요 관직은 자기의 심복인 대신급의 중신으로 겸무하게 하였다.

 

외교통인 신숙주는 겸예판(兼禮判)으로, 군사통(軍事通)인 한명회는 겸병판(兼兵判)으로, 재무통(財務通)인 조석문(曺錫文)은 겸호판(兼戶判)으로, 장기간 재직, 복무하게 하였다.

또, 중신들은 현직에서 물러난 뒤에도 부원군(府院君)의 자격으로서 종전대로 조정의 정무에 참여하도록 하였다.

이와 같이, 국가의 모든 정무는 세조 자신이 직접 중신과 서로 의논, 처결하여 국왕의 좌우에서 왕명을 출납하는 승지의 임무는 한층 더 중요해졌다. 따라서 승정원 기구는 점차 강화되고 이러한 추세 하에서 1468년에 원상제(院相制)가 설치되었다.

 

원상은 왕명의 출납 기관인 승정원에 세조 자신이 지명한 삼중신(三重臣: 신숙주·한명회·구치관)을 상시 출근시켜 왕세자와 함께 모든 국정을 상의, 결정하도록 한 것이었다. 이는 세조가 말년에 와서 다단한 정무의 처결에 체력의 한계를 느끼게 되고, 또 후사의 장래 문제도 부탁하려는 의도에서 설치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런 까닭으로 세조는 1468년 9월에 병이 위급해지자, 여러 신하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왕세자에게 전위(傳位)하고 그 이튿날에 죽었으니, 세조가 왕권의 안정에 얼마나 주의를 집중시켰는가를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세조 대의 정치는 실행 면에서 하의상통보다는 상명하달에 치중했기 때문에 정국 전체의 경색을 초래, 사회 도처에 특권 횡행의 비리적 현상이 많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결국, 이러한 세조의 무단강권 정치는 왕권 강화 면에서는 일단 긍정할 수도 있지만, 정치 발전 면에서는 세종·성종의 문치대화 정치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라 여겨진다. 능호는 광릉(光陵)으로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부평리에 있다.

숭불정책을 펼치고 현재 파고다공원에 원각사를 세웠고 오대산 상원사 불상 복장에 피고름 묻은 속적삼 넣어 피부병 완치 기원

세조의 꿈에 단종의 어머니가 나타나 어린 아들의 죽임을 비난하며 침을 뱉었는데 그곳에 피부병으로 변질했다는 일화

 

 

 

8대 예종(1468-1469) 이황(세조의 셋째 아들)  즉위 1년2개월 만에 20세로 사망(독살설)

예종은 1450년(세종 32)에 세조인 수양대군과 정희왕후 윤씨의 2남 1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세조가 즉위하자 해명대군에 봉해졌다.

첫째인 의경세자로 책봉된 지 2년 만인 1457년(세조 3) 20세에 죽자 둘째 아들인 그가 왕위에 올랐다.

성품이 영명과단하고 공검연묵하며, 서책에 뜻을 두어 몹시 춥거나 더울 때도 그만두지 않았다고 한다.

예종은 효성이 지극해 세조의 병환이 깊어지자 수라상과 약을 직접 챙기며 극진히 간호했는데, 이 때문에 본인의 건강이 나빠졌다.

병세가 깊어져 자신의 죽음을 예감한 세조는 죽기 하루 전날인 1468년(세조 14) 9월 7일 예종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이때 그의 나이 19세였다.

 

예종은 세자 시절인 1460년(세조 6) 12살에 한명회의 큰딸과 혼인했다.(한명회의 또 다른 딸 한 명은 예종의 조카뻘인 자을산군 성종과 결혼시켜 세조와 겹사돈이 됨)

그러나 한씨는 세자빈에 책봉된 이듬해에 인성대군을 낳고 3년만에 건강이 악화되어 죽었다.

한씨는 후일 장순왕후에 추존되었다. 예종은 두 번째 부인으로 당시 우의정이던 한백륜의 딸을 맞아들였다.

1462년(세조 8)에 세자빈으로 책봉된 한씨는 예종 즉위 후 안순왕후에 봉해졌다.

안순왕후는 제안대군(4세에 죽음)과 현숙공주를 낳았다.

 

젊은 나이로 왕위에 오른 예종의 정치적 영향력은 크지 않았다. 모후인 정희왕후의 수렴청정과 한명회, 신숙주, 구치관 등 원상의 정사 관여 때문이었다. 원상은 세조 말년에 도입된 제도로, 세조는 측근인 한명회, 신숙주, 구치관을 원상으로 임명해 그들로 하여금 예종의 정무를 돕도록 했다. 그들은 수시로 승정원에 드나들며 정무에 참견했다. 이것은 그들에게 막강한 권력을 부여했고 왕권은 그만큼 약화될 수밖에 없었다.

당시 훈신 세력의 권력이 얼마나 막강했는지를 알 수 있는 사건이 있다. 바로 '민수(閔粹)의 사옥(史獄)'이다.

민수는 춘추관에서 사관을 지낸 사람이었다. 그런데 세조가 죽고 사초를 제출하라는 명이 떨어지자, 민수는 자신이 당대 가장 막강한 권력을 지닌 훈신 한명회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기록한 사초가 마음에 걸렸다.

 

혹여 한명회가 이를 보고 노여워해 자신에게 불이익을 줄까 두려웠던 것이다. 그래서 민수는 자신이 제출했던 사초를 몰래 빼내 고쳐 썼는데 이것이 발각되고 말았다. 예종은 민수를 비롯해 이 일에 관련된 강치성(康致誠), 원숙강(元叔康), 이인석(李仁錫) 등을 처벌하는 것으로 일을 마무리했다. 이 과정에서 예종은 사관들이 훈신은 두려워하면서 왕인 자신은 두려워하지 않는다며 분통을 터뜨렸다고 한다.

그러나 예종을 불안하게 하는 세력은 훈신 세력만이 아니었다. 종친 세력이 훈신 세력에 대적할 만큼 성장해 있었던 것이다. 세조는 이시애의 난을 겪으면서 훈신 세력을 견제할 필요성을 느꼈고, 그 대항마로 종친 세력을 키우고자 했다. 종친 세력의 중심은 이시애의 난으로 부상한 구성군과 남이였다.

 

구성군은 세종의 넷째 아들인 임영대군(臨瀛大君)의 아들, 즉 세종의 손자였다. 그는 이시애의 난을 진압한 공으로 적개공신(敵愾功臣) 1등이 된 데 이어 병조판서와 영의정까지 지내는 등 세조의 두터운 신임을 바탕으로 조정의 실력자가 되었다.

남이는 태종의 외증손자로, 태종의 넷째 딸인 정선공주(貞善公主)와 의산군(宜山君) 남휘(南暉)의 손자다. 그는 훈신인 권람(權擥)의 사위이기도 했으며, 27세의 나이로 병조판서의 자리에 올라 주위의 부러움과 시샘을 한몸에 받았다.

예종은 세자 시절 부왕 세조가 자신의 정적이 될 수 있는 종친 세력을 키우는 것을 불안해했다.

특히 예종은 남이에 대해서도 경계하는 마음이 컸다. 그러던 중 유자광(柳子光)이 남이의 역모를 고했다.

 

때를 기다렸다는 듯 여기저기서 남이에게 불리한 증언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결국 남이는 가혹한 고문에 못 이겨 자신의 혐의를 인정하고, 공모자로 지목된 강순(康純) 등과 함께 처형되었다. 이 사건으로 이시애의 난 이후 성장한 종친 세력과 무인 세력은 큰 타격을 입었다.

예종은 왕위에 오르면서 분경 금지, 겸판서 폐지, 대납 금지, 면책특권 제한 등 훈신 세력들을 견제하기 위한 일련의 정치적 결단을 실행에 옮겼지만 역부족이었다. 그런 와중에 훈신 세력을 견제하던 종친 세력이 '남이의 옥'을 계기로 힘을 잃게 되자 이를 기회로 훈신 세력은 더욱 자신들의 입지를 공고히 하려고 했다. 그런 그들의 유일한 방해물은 오로지 왕인 예종뿐이었다.

 

예종이 계속해서 훈신들의 권한을 제한하는 정책을 고수한다면 정치적 대결도 불가피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은 예종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훈신 세력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한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1469년(예종 1년) 11월 28일, 승정원에 모여 있던 원상들은 예종이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이를 곧바로 정희대비에게 알렸다.

예종의 죽음은 그야말로 갑작스러운 것이었다. 예종은 평소 건강이 좋지 않았다고는 하나 죽기 전날만 하더라도 정희대비에게 문안을 드리고 일상적인 업무를 보았다고 한다.

신숙주가 "신 등은 밖에서 다만 성상의 옥체가 미령(未寧)하다고 들었을 뿐이고, 이에 이를 줄은 생각도 못했습니다."라고 한 것이나 정희대비가 "주상이 앓을 때도 매일 내게 조근(朝覲)했으므로, 나도 생각하기를 '병이 중하면 어찌 이와 같이 하겠느냐?' 하고 심히 염려하지 않았는데, 이제 이에 이르렀으니 장차 어떻게 하겠느냐?"라고 한 것으로 보아도 예종이 죽기 전의 상태가 그리 위중한 것은 아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갑작스러운 죽음에도 정희대비(세조의 아내)와 원상들은 왕이 죽은 바로 그날 일사천리로 덕종(의경세자, 예종의 형)의 둘째 아들인 자산대군을 왕으로 지목하고 즉위식까지 마쳤으니, 그가 바로 조선의 9대 왕인 성종(연산군의 아버지)이다.

왕위 계승 서열로만 따지자면 자산대군은 왕이 될 수 없는 위치에 있었다. 우선 예종과 안순왕후 사이에서 낳은 원자(제안대군)가 있었다. 원자가 너무 어려서 안 된다면, 그다음 계승 순위는 의경세자의 큰아들인 월산대군이 되어야 옳았다. 그런데도 정희대비는 자을산군을 왕으로 지목했다.

자을산군은 다름 아닌 당대의 권력자 한명회의 사위였다. 그래서 이를 한명회와 정희대비의 정치적 결탁으로 보는 시선이 많았고, 때문에 예종 독살설이 대두되기도 했다. 그러나 수렴청정을 하고 있는 정희대비와 훈신 세력의 좌장 한명회가 왕의 뒤에서 권력을 쥐고 있는 이상 이러한 의혹은 아무런 힘도 발휘하지 못했다.

결국 아쉬움과 의혹만을 남긴 채, 예종은 왕위에 오른 지 1년 2개월 만에 짧은 생을 마감했다. 이때 나이 20세였다.

시호는 양도(襄悼)이고, 능은 경기도 고양에 있는 창릉(昌陵)이다.

 

 

 

9대 성종(1469-1494) 이혈(예종의 형인 의경세자의 둘째 아들 자을산군)

성종은 1457년(세조 3) 세조의 큰아들 덕종(의경세자)과 한확(韓確)의 딸 소혜왕후(昭惠王后)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이름은 혈(娎)이며, 1461년(세조 7) 자산군(者山君)에 봉해졌다. 세자였던 아버지 덕종은 그가 태어나던 해 20세의 나이로 요절했고, 세조의 둘째 아들 예종이 왕위에 올랐다. 이렇게 왕위 계승 서열에서 멀어졌으나 1469년(예종 1) 11월 28일 예종이 급서하면서 예종의 다섯 살 난 아들 제안대군과 자신의 형 월산대군을 제치고 13세의 나이에 왕위에 올랐다.

 

세조의 부인인 정희대비(성종의 할머니)는 예종의 아들인 제안대군이 너무 어리고 월산대군은 어릴 때부터 병이 많다고 하며 자산대군을 왕위 계승자로 지목했다. 어리기는 하나 일찍이 세조가 "매양 자질과 도량이 보통 사람보다 특별히 뛰어나다." 하고 칭찬하면서 태조에 견주었다는 이유였다. 이렇게 정희대비의 지목을 받은 자을산군은 여러 원상들의 지지를 업고 예종이 죽은 그날 즉위식을 가졌다.

13세에 불과해 성년이 될 때까지 할머니 정희대비의 수렴청정을 받게 되었다. 또한 그가 왕이 되는 데 공을 세운 원로대신들, 그중에서도 장인인 한명회를 비롯한 훈신 세력들이 정치적으로 절대적인 영향력을 발휘했다.

그들은 예종이 금지했던 분경, 대납, 겸판서 등을 부활시켰다. 그리고 자신들을 견제하던 종친 세력의 핵심 인물인 구성군을 유배 보냄으로써 훈신 세력의 권력을 공고히 했다.

 

성종은 1467년(세조 13년)에 한명회의 막내딸과 결혼했다. 성종의 어머니 소혜왕후 한씨와 한명회가 정치적으로 야합한 것이다. 한명회는 셋째 딸을 예종의 첫 번째 부인으로 시집보낸 데 이어 막내딸도 성종과 결혼(공혜왕후)시킴으로써 딸을 두 명이나 왕비로 만들었다. 그러나 예종의 첫 번째 부인 장순왕후(추존)는 예종이 왕위에 오르기도 전에 죽었고, 성종의 정비인 공혜왕후(恭惠王后) 역시 성종이 즉위한 지 5년 만인 1474년(성종 5) 17세에 죽었다. 성종과 공혜왕후의 사이에는 자식이 없었다.

이후 성종은 윤기무의 딸 숙의 윤씨를 새 왕비로 맞아들였다. 후궁이었던 윤씨는 아들 한 명을 낳았는데, 그가 연산군이다. 그러나 윤씨는 성종과의 불화로 1479년(성종 10)에 폐위된 데 이어 1482년(성종 13)에 사사(賜死)되었다.

성종의 세 번째 부인은 윤호(尹壕)의 딸인 정현왕후(貞顯王后) 윤씨다. 정현왕후는 성종의 후궁으로, 폐비 윤씨가 폐출된 후 왕비가 되었다. 정현왕후는 1남 2녀를 낳았는데, 아들 진성대군(晉城大君)이 훗날의 중종이다. 이 밖에 성종은 12명의 후궁에게서 28명의 자식을 두었다.

 

성종이 이룩한 큰 업적 중 하나는 조선왕조 통치 체제의 근간이 되는 《경국대전》을 반포한 일이다.

《경국대전》 이전인 1397년(태조 6)에는 우리 역사상 최초의 성문 통일법전이라고 할 수 있는 《경제육전(經濟六典)》이 반포되었고, 태조 이후에도 기존 법전을 개정하거나 증보한 속전(續典)들이 계속 편찬되었다.

 세조는 1457년(세조 3)에 육전상정소(六典詳正所)를 설치하고 일반 백성들의 삶과 관련이 깊은 호전과 형전을 먼저 완성했다. 그 후 나머지 4전에 대한 편찬 작업도 진행되었으나 완성을 보지 못하고 죽었다.

 

이어서 즉위한 예종도 《경국대전》이 완성되기 전에 죽었고, 성종이 최종적으로 보완해 1485년(성종 16) 《경국대전》을 반포하기에 이르렀다. 《경국대전》으로 조선은 통일된 법전에 기초한 법치가 가능해졌으며, 이로써 조선왕조의 통치 기반도 안정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 밖에도 성종은 《경국대전》의 조항 중 세태에 맞지 않는 것을 새롭게 고쳐 《대전속록(大典續錄)》을 편찬하는 등 조선왕조의 통치 체제를 확립하는 데 지속적으로 노력했다.

 

성종은 불교에 의지했던 세조와 달리 숭유억불 정책을 펼쳤으며, 수조권을 국가에서 관리하는 관수관급제(官收官給制)를 실시했다. 관수관급제란 국가가 농민들로부터 직접 세금을 거두어들인 후 관리들에게 현물로 지급하는 제도였다. 이는 관리가 농민에게 세금을 과도하게 거두는 것을 방지하고, 급할 때는 그 재원을 국가에서 조달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것은 1550년(명종 5)의 과전 혁파의 전초전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성종은 국방에도 힘을 기울여 재위 내내 비교적 안정적으로 정국을 운영했다.

 

성종의 즉위는 훈신 세력의 지지를 바탕으로 이루어졌다. 따라서 13세의 어린 나이에 왕이 된 성종의 재위 초반은 훈신 세력이 강성했다. 수렴청정 중이던 정희대비도 훈신 세력들과 결탁하여 그들의 특권을 비호했다. 그러나 성종이 성년이 된 후로는 사정이 달라졌다. 1476년(성종 7) 1월 13일 정희대비는 마침내 7년간의 수렴청정을 끝냈다. 정희대비는 언문 의지(懿旨, 대비가 내리는 명령서)를 통해 다음과 같이 자신이 정무에서 물러날 때가 되었음을 밝혔다.

 

그런데 정희대비의 언문 의지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자신이 수렴청정을 하는 동안 세조와 성종의 뜻을 욕되게 하지 않으려고 부단히 노력했으며, 특히 자신의 형제들과 관련된 청탁을 들어준 적이 없다고 구구절절 변명하고 있다. 이는 정희대비 자신과 그의 동생인 윤사흔(尹士昕), 윤사흔의 아들 윤계겸(尹繼謙) 등을 비난하는 익명서가 승정원에 날아든 것에 대한 해명이었다. 익명서의 내용에 대해서는 진위가 밝혀지지 않았지만 이 사건이 정희대비를 정치 일선에서 물러서게 한 계기가 된 것은 확실하다.

 

정희대비가 물러나겠다고 하자 훈신 세력들은 이를 극구 만류했다. 자신들을 비호하던 정희대비가 물러나고 성종이 친정을 하면 입지가 줄어들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생각은 맞아떨어졌다. 성종은 정희대비가 수렴청정을 거두겠다고 하자 몇 번 만류하다가 곧 그 뜻을 받아들였다.

 

친정을 시작한 성종은 원상제를 폐지하는 등 훈신 세력의 영향에서 벗어나고자 노력했다. 사실 세조, 예종, 성종 조를 거치면서 강력한 정치 세력으로 부상한 훈구파들은 노쇠해짐에 따라 그 힘 역시 쇠퇴하고 있었다. 성종 즉위 초부터 친정이 시작된 시점에 이르기까지 구치관, 한백륜, 신숙주, 홍윤성, 정인지 등 대표적 훈신들이 차례로 세상을 떴다. 영향력 있는 훈신은 한명회와 정창손 정도만 남아 있었다. 그러나 이들의 세력도 그리 오래가지는 않았다.

 

성종은 첫 번째 부인인 공혜왕후의 아버지이자 자신이 왕위에 오르는 데 결정적인 공을 세운 한명회와의 관계 청산에 들어갔다.

빌미를 먼저 제공한 쪽은 한명회였다. 1481년(성종 12) 6월, 한명회는 성종에게 중국 사신과 함께 자신의 개인 정자인 압구정에서 연회를 열고자 하는데 장소가 좁으니 장막을 칠 수 있게 허락해 달라고 청했다. 성종은 장소가 좁으면 왕실 소유의 정자인 제천정에서 잔치를 열고 압구정에는 장막을 치지 말라고 했다.

그러자 한명회는 심기가 불편해져서 부인의 병을 핑계로 제천정에는 나가지 않겠다고 했다. 이 말이 전해지자 대간들이 한명회를 불경죄로 다스려야 한다고 탄핵했다.

 

이에 성종이 국문을 명하자 뒤늦게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한명회는 압구정 관련 일을 해명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결국 이 일로 한명회는 파직되었다. 이로써 계유정난 때 공신으로 책록되어 세 왕에 걸쳐 최고의 권력을 누리던 한명회의 시대도 끝이 났다. 그것은 훈구파의 몰락을 알리는 신호탄이기도 했다.

 

성종은 훈신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사림(士林)들을 등용했다. 사림은 향촌에 근거를 두고 성장한 지방 사족 출신들이다. 사림의 거두인 김종직(金宗直)은 길재(吉再)의 제자인 김숙자(金叔滋)의 아들이었다.

세조 조에 중앙으로 진출한 김종직은 영남과 기호 지방의 사림들과 새로운 정치 세력을 형성했는데, 이들을 사림파라고 한다. 특히 김종직 문하의 김굉필(金宏弼), 정여창(鄭汝昌), 김일손(金馹孫) 등은 초기 사림파를 형성했다. 성종 시대에 이와 같은 사림파가 등장한 것은 역사적으로 큰 의미가 있다.

 

성종은 훈신 세력을 견제할 젊은 인재들을 필요로 했고, 이는 김종직과 제자들이 중앙 정계에 진출하는 기회가 되었다. 사림들은 주로 대간으로 기용되어 언론권을 장악해 훈구파의 부정부패를 공격했다. 특히 사림들은 1478년(성종 9)에 예문관에서 분리된 홍문관을 비롯해 사간원, 사헌부 등 언론 삼사(三司)에 포진하여 세력을 구축했다. 이 중 홍문관은 세조가 혁파한 집현전이 예문관(藝文館)으로 개편되었다가 1478년(성종 9)에 예문관에서 분리되어 신설된 문한(文翰) 기관이다. 처음에는 대간을 감독하는 역할을 하다가 언론기관화되어 삼사의 하나로 군림하게 되었다.

 

또한 사림파들은 훈구파들이 장악하고 있던 향촌 지배권을 차지하기 위해 1488년(성종 9)에 혁파된 유향소(留鄕所)를 복설했다. 유향소란 경재소(京在所)의 예하 기관으로 수령의 지방 통치를 돕거나 견제하면서 지방민을 지배하는 향촌 자치 기관이다. 지방 양반과 향권을 다투는 향리의 발호를 억제하는 역할을 했으나 세조 때 이시애의 난을 계기로 토호의 근거지라 하여 혁파되었다.

그 후로 사림들은 여러 차례 유향소의 복립을 주장했으나 훈구파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다가 성종 조에 들어서 사림의 영향력이 커지자 사림 중심의 유향소가 복설된 것이다. 그러나 유향소에 대한 훈구파의 간섭은 계속되었다. 그러자 사림들은 이에 대항해 사마소(司馬所)를 만들거나 향약을 실시해 향촌 자치권을 강화해 나갔다.

 

성종 대 이후 새로운 정치 세력으로 자리를 잡은 사림파는 사상적으로 고려의 충신인 정몽주와 길재를 잇는 재야 학통을 만들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조카인 단종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세조와 세조의 비호 아래 성장한 훈구파를 비판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사림을 제일 먼저 등용한 인물이 세조였던 것은 역사적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세조는 집현전 학사들이 자기를 반대하자 새로운 세력으로 사림을 등용했다. 물론 훈구파들은 이들을 제재했다. 연산군 조부터 네 차례 일어난 사화(士禍)가 그것이다. 하지만 사림파의 진출이라는 역사적인 대세를 막을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선조 조에 이르러 사림의 시대가 열리게 된다.

 

성종은 학문이 깊고 매우 안정적으로 정국을 이끌어 간 성군이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주연과 여색을 즐겨 비난을 사기도 했다.

성종의 재위 기간 중 가장 큰 오점으로 남은 일은 사사로운 감정 때문에 두 번째 부인이자 원자를 낳은 왕비를 폐위한 일이었다.

성종은 첫 번째 부인인 공혜왕후(한명회 딸)가 17세에 자식도 낳지 못하고 죽자 12살 연상의 숙의 윤씨를 왕비로 맞아들였다. 당시 숙의 윤씨는 원자를 잉태하고 있었고(연산군) 성종의 사랑도 깊었다.

 

그러나 윤씨는 왕비가 된 후 성종과의 사이가 급격히 나빠지기 시작했다. 이유는 윤씨의 투기 때문이었다. 성종은 10명이 넘는 후궁을 맞아 그들의 처소에 드나드느라 왕비인 윤씨에게 소홀했다. 게다가 윤씨의 집안이 크게 내세울 만한 명문가가 아니다 보니 집안이 좋은 후궁들이 은근히 왕비를 무시하며 그 자리를 위협했다. 원래 괄괄한 성격이었던 윤씨는 그런 왕과 후궁들의 태도를 참지 못하고 성종과 종종 다투었다. 윤씨는 성종이 머물고 있는 후궁의 처소에 갑자기 쳐들어가 성종의 노여움을 사는가 하면, 실랑이 하는 과정에서 성종의 얼굴에 손톱자국을 내기도 했다. 이러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성종의 모후인 인수대비는 노발대발했고, 며느리인 윤씨를 몹시 미워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급기야 왕비의 처소에서 독약의 일종인 비상과 후궁들을 저주하는 방법을 적은 글이 발견되었다.

결국 성종과 인수대비는 윤씨의 폐비를 결정하기에 이르렀다. 여러 대신들은 윤씨가 원자의 모후인 점을 들어 폐출을 반대했으나 윤씨는 1479년(성종 10)에 끝내 폐출되었다.

이때 원자인 연산군의 나이 불과 4세였다. 왕비를 폐출시킨 것은 조선 역사상 그때까지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리고 3년 후에 폐비 윤씨는 사사되었다. 그런데 성종은 왜 윤씨를 폐출시킨 것도 모자라 죽이기까지 했을까?

 

성종은 원자인 연산군이 왕이 되었을 때 폐비 윤씨가 왕의 모후로서 영향력을 발휘해 정국을 혼란하게 만들 것을 우려했던 것이다.

성종은 부인인 폐비 윤씨를 죽이고 원자(연산군)에게는 이 사실을 숨겨 후환을 남기지 않으려고 했다.(성종이 셋째 부인인 정현왕후 윤씨를 얻어 어린 연산군을 대신 키움) 그러나 세상에 완전한 비밀은 없는 법, 결국 훗날 연산군이 왕위에 올랐을 때 생모 윤씨가 폐출된 끝에 사사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관련자 모두에게 피바람이 몰아닥쳤다.

결국 연산군 대에 일어난 불행의 씨앗은 성종이 뿌린 것이나 다름없었다.(생모 폐비 윤씨를 제헌왕후로 복원)

여러 정치적 업적을 남기며 조선왕조의 통치 체제를 확립한 성종은 연산군이라는 희대의 폭군에게 왕위를 넘기고 1494년(성종 25) 3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시호는 강정(康靖)이고, 능은 서울 강남구 삼성동에 있는 선릉(宣陵)이다.

 

 

 

10대 연산군(1494-1506) 이융(성종의 둘째 부인 폐비가 된 숙의 윤씨 아들)

연산군은 9대 성종의 두번째 부인인 숙의 윤씨가 낳은 아들이며 그의 어머니는 관봉사시사 윤기견의 딸인 폐비 윤씨(사약 먹고 죽은 숙의 윤씨, 제헌왕후)다.

그러나 1483년(성종 14) 연산군이 세자로 책봉될 때 중종의 셋째 부인인 정현왕후 윤씨(자순대비)와의 사이에 아기가 아직 태어나기 전이라, 연산군의 무도함을 알면서도 세자로 삼았다고 한다. 19세에 왕위에 오름

1494년 12월 연산군은 성종의 승하와 함께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재위 12년 동안 무도한 짓을 많이 하여 폐위되었다. 

폭군의 대명사인 연산군 그는 무오사화, 갑자사화 등 두 차례의 사화를 일으켜 사림파를 비롯한 문신들을 대거 처형하고 언론 활동을 억압했으며, 당시 사대부들의 윤리관에 어긋나는 행동을 거듭하다가 중종반정으로 폐위된 인물이다.

덕분에 그는 대표적인 폭군으로 꼽힌다.

 

박종화의 소설 《금삼의 피》에는 그가 폭군이 된 이유를 모친 숙의 윤씨의 사사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다. 윤씨가 투기가 심했기 때문에 사사당했다고도 하지만 윤씨보다 출신 가문이 좋은 후궁들이 예종의 비 한씨와 결탁해 윤씨를 배척한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어쨌든 아들인 연산군이 이 사실을 알게 되었고 이는 갑자사화라는 결과를 낳았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연산군의 폭정을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

성종이 훈구파를 견제하기 위해 사림파를 등용했다면, 연산군은 사림들의 주장보다는 자신의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노력한 인물이었다. 성종에게는 정실 소생으로 훗날 11대 왕이 된 중종이 있다. 그러나 1483년(성종 14) 연산군이 세자로 책봉될 때 중종은 아직 태어나기 전이었고 폐비되었으나 윤씨는 정식 왕비였기에 연산군의 정통성에는 문제가 없었다. 1494년 12월 연산군은 성종의 승하와 동시에 왕위에 올랐다.

 

왕비의 몸에서 원자로 태어났고, 세자로서 제왕 수업을 받다가 관례와 혼례를 치른 뒤 부왕의 승하로 왕이 된 연산군의 즉위 과정은 그야말로 정석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연산군은 성종이 새로 맞은 정현왕후 윤씨가 어머니인 것으로 알고 성장했다.

연산군이 왕위에 올랐을 때 백성들의 삶은 매우 궁핍했다. 조세 제도의 부조리로 양반의 조세 부담은 크게 줄어든 반면, 농민들의 부담은 극에 달한 상황이었다. 관청에서는 공물을 더 많이 걷고 군역을 지는 양인 장정에게 군포(軍布)까지 걷기 시작했다. 게다가 그 많던 왕실 토지도 왕자와 공주에게 모두 나누어 주어 왕실의 곳간은 텅 비어 있었다. 왕실 재정의 악화는 자연스레 왕권의 약화로 이어졌다.

 

훈구파와 사림파의 극심한 대립 또한 연산군을 힘들게 했다. 부왕인 성종은 훈구 세력을 억누르기 위하여 사림들을 등용했지만 두 세력 사이의 대립은 불가피했다. 또한 왕의 입장에서도 두 세력 모두 온당하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훈구 세력은 왕실과 왕권의 절대성을 옹호했지만 이를 빌미로 기득권을 유지하고자 했고, 사림은 왕에게 명나라의 제후로 본분을 다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왕권을 상대적인 위치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연산군은 쿠데타로 집권한 세조의 훈구대신들을 더욱 못마땅하게 여겼다.

 

이런 상황에서 연산군은 즉위 초부터 원로대신들과 대간인 사림 사이에서 갈등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1498년 일어난 무오사화 역시 사림들이 당한 화이지만, 시작은 왕권을 강화하려는 연산군에 대해 사림들이 폭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무오사화는 오랫동안 대립해 온 훈구파와 사림파가 김종직의 제자 김일손의 사초를 빌미삼아 맞붙은 사건이다. 사림이 〈조의제문〉을 옹호하며 세조의 등극 과정을 왕권 찬탈로 생각한 것은 연산군이 중요시하는 왕권과 왕실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으려고 한 행위로 간주되었다.

 

무오사화를 통해 사림들을 축출한 후 연산군은 왕권의 위력을 실감했고, 더욱 포악하게 권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반대파를 제거한 훈구 세력들의 입지도 강화되었다. 연산군은 여기에서 다시 대신들과 대립했다. 이번에는 국가 재정 문제였다. 연산군은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며 내수사(內需司)의 재정을 확대해 나갔는데, 이 과정에서 재정이 부족하자 정부 재정을 사용했다. 그러던 중 훈구 세력의 재산마저 거두어들이려고 한 것이 대신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켜 1504년, 갑자사화가 일어났다. 직접적인 배경은 폐비 윤씨의 사사 사건이지만, 갑자사화 전후로 연산군은 훈구 세력들이 사소한 잘못을 저질러도 재산을 몰수했다. 또한 자신의 정통성에 문제가 있다고 깨달은 순간부터 광적인 모습을 보였다.

이 과정에서 성종의 두 후궁과 그 소생 왕자를 때려죽이기도 했다.

 

두 차례의 사화로 훈구파와 사림파의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이로 인해 연산군은 폭군이라는 별칭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여기에서 간과하는 부분이 있다. 신료들을 제거한 것보다 더욱 중요한 문제는 이 과정에서 연산군의 전횡을 막을 세력이 소멸되어 그 피해가 백성에게까지 미쳤다는 것이다. 연산군은 만 명이 넘는 기생을 뽑아 ‘흥청(興凊)’이라 칭하고 잔치에 동원했으며, 경회루 연못가에 만세산을 만들어 놀았다. 성균관을 흥청들과의 놀이터로 사용했고, 서울 동북쪽 100리를 금표로 지정해 사냥터로 만들기도 했다. 이런 연산군의 사치와 놀이에 수많은 비용이 들어가면서 국가의 재정은 더욱 악화되었고 그 부담은 모두 백성들의 몫이 되었다.(기생 장녹수)

 

연산군은 이 과정에서 자신을 비난하는 자는 죽이거나 온갖 고문으로 잔혹하게 죽였다.

당시의 사료에 “포락(凉烙, 단근질하기), 착흉(嫂胸, 가슴 빠개기), 촌참(寸斬, 토막토막 자르기), 쇄골표풍(碎骨瓢風, 뼈를 갈아 바람에 날리기) 등의 형벌까지 있어서…….”라고 기록되어 있을 만큼 그는 조선 시대의 대표적인 폭군이었다.

상황이 이러하자 조정에서는 바른말을 하는 대신들이 사라지고, 높은 자리를 얻기 위해 연산군의 가마를 메는 대신들이 많아졌다. 1505년4월1일 7명의 왕을 섬겼던 김처선(金處善) 같은 환관(내시)도 바른말을 하다가 활과 칼로 다리와 혀를 잘려 죽임을 당했다.

 

연산군이 폭군으로 낙인찍힌 이유 중에는 신료들과의 소통 부족 문제도 있다. 대간들과의 소통 부족에 대한 기록은 즉위 초기부터 나타난다. 연산군이 여러 이유를 들어 경연에 나오지 않은 것, 연산군의 부도덕을 건의한 환관 김순손을 유배 보낸 후 사형에 처하려 한 사건, 성종의 상중에 기생과 동거한 외척 윤탕로(尹湯老)의 탄핵을 거부한 사건 등 연산군은 대간들과 여러 가지 문제로 대립했다.

《연산군일기》 2년 5월 6일의 기록에는 그의 생각이 드러나 있다. “내가 즉위한 지 겨우 1년, 매양 언로가 막힌다고 말하는데 나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대간 역시 신자(臣子)인데, 꼭 임금으로 하여금 그 말을 다 듣도록 하는 것이 옳은가? 그렇다면 권력이 위에 있지 않고 대각(臺閣)에 있는 것이다. 나라가 위태로울 장본(張本)은 권력이 아래로 옮겨지는 데 있다고 여긴다.”

 

이후 이러한 소통 부족과 대립이 사화로 이어졌다고 볼 수 있다. 두 차례의 사화 이후 연산군은 신하들과 대화를 단절했고, 오직 강력하게 처벌하는 것으로 모든 일을 해결하려고 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급기야 민심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1506년 성희안(成希顔), 박원종(朴元宗) 등이 이조 판서 유순정(柳順汀), 군자감 부정 신윤무(申允武) 등과 규합하여 연산군의 폐위를 모의했다. 거사일은 연산군이 장단 석벽에 유람하는 날로 잡았다. 거사는 연산군의 유람이 중지되면서 차질을 빚을 뻔했으나 호남 지방에서 유배 중이던 유빈, 이과 등이 작성한 연산군 폐위에 대한 거사 격문이 한양에 나돌게 되자 당초 계획을 강행했다. 9월 1일, 박원종, 성희안, 신윤무를 비롯해 전 수원 부사 장정(張珽), 군기시 첨정 박영문(朴永文), 사복시 첨정 홍경주(洪景舟) 등이 무사들을 훈련원에 규합시켰다.

 

그들은 먼저 권력을 쥐고 있던 임사홍, 신수근, 신수영, 임사영 등 연산군의 측근들을 죽인 다음 궁궐을 에워싸고 옥에 갇혀 있던 자들을 풀어 종군하게 하였다.

반정에 성공한 박원종 일파는 군사를 몰아 텅 빈 경복궁에 들어가 성종의 계비이자 진성대군의 어머니인 대비 윤씨(정현왕후 윤씨)의 허락을 받고 연산군을 폐하여 강화도에 안치했다. 그리고 다음 날 진성대군(정현왕후 윤씨 아들)이 근정전에서 왕위에 올랐다. 그가 중종이다.

연산군은 12년간 폭정하다 중종반정으로 폐위되어 강화도 교동에서 그해 11월 병사했다. 그의 묘는 양주군 해등촌(海等村, 서울시 도봉구 방학동)에 있다. 이곳에는 ‘연산군지묘(燕山君之墓)’라고 적힌 석물 외에 아무런 장식이 없다. 연산군은 15대 광해군과 함께 조선 시대 폐주(廢主) 가운데 한 사람이며 《선원계보(璿源系譜)》에도 묘호와 능호 없이 일개 왕자의 신분으로만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그의 재위 기간의 실록도 《연산군일기》로 통칭된다.

 

 

무오사화는 『성종실록』 편찬 때 그 사초 중에서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수양대군이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를 찬탈한 내용을 풍자한 글)’이 발견됨으로써, 이에 관련된 사림학자들이 많이 참화를 입은 사건이다.

이 때 그렇게 많은 사류를 희생시킨 데는, 본래 학자들을 싫어하는 연산군의 성품을 이극돈 등 훈구 재상들이 교묘히 이용해 그들의 정쟁에 이용한 점도 있었다.

갑자사화도 결국은 연산군의 사치와 향락 때문에 그토록 큰 옥사가 벌어졌다는 측면이 더 큰 비중을 가진다.

연산군은 방탕한 생활에서 오는 재정난을 메우려고 훈구 재상들의 토지를 몰수하려 했다.

훈구 재상들은 왕의 이러한 횡포를 억제하려 했고, 이에 또 한 번 사화가 벌어진 것이다. 이 사화의 직접적인 이유는 물론 생모 윤씨의 폐비사건으로 소급되겠지만, 이 역시 연산군의 포학한 성품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던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이 두 사화의 결과는 참혹했다. 김종직은 부관참시 당했다. 폐비 당시의 두 숙의(淑儀)는 타살당했다. 할머니인 인수대비도 구타당해 죽었다. 그 밖에 윤필상·김굉필 등의 사형을 필두로, 한명회·정여창도 모두 부관참시를 당했다.

연산군이 그토록 광포하고 난잡한 성품을 가지게 된 동기를 주로 생모를 잃은 사실에서 찾으려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실록 『연산군일기』에는, 원래 시기심이 많고 모진 성품을 가지고 있었으며, 또 자질이 총명하지 못한 위인이어서 문리(文理)에 어둡고 사무 능력도 없는 사람으로 서술되어 있다.

 

그리하여 정계와 연산군 사이에는 갈등이 끊이지 않았다. 문신들의 직간(直諫)을 귀찮게 여겨 사간원·홍문관 등을 없애 버리고, 정언을 하는 언관도 혁파하거나 감원했다. 그 밖에 온갖 상소와 상언·격고 등 여론과 관련된 제도들도 모두 중단시켜 버렸다.

당시로서는 가장 패륜으로 생각되던 ‘이일역월제(以日易月制)’라는 단상제(短喪制)를 단행한 일도 있었다. 뿐만 아니라 성균관·원각사 등을 주색장으로 만들고, 선종(禪宗)의 본산인 흥천사도 마구간으로 바꾸었다. 민간의 국문투서사건을 계기로 한글 사용을 엄금한 일이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민심은 동요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1506년(연산군 12) 9월 성희안·박원종·유순정등의 주동으로 연산군 폐출운동이 일어났다. 그리고 성종의 셋째 부인인 정현왕후의 아들 진성대군이 옹립되니 곧 중종반정이었다.

묘는 양주군 해등촌(海等村: 서울시 도봉구 방학동)에 있다. 이 곳에 ‘연산군지묘’라는 석물 이외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다.

 

 

11대 중종(1506-1544) 이역 (9대 성종의 셋째 부인 정현왕후의 아들 진성대군)

연산군의 배다른 동생이 중종이다.

 

* 묘호(廟號)

왕이 죽은 뒤 그의 공덕을 칭송하여 종묘에 신위를 모실 때 올리는 칭호이다. 

뒤에 붙는 종·조의 경우 대개 '조'는 나라를 처음 일으킨 왕이나 나라의 정통이 중단된 것을 다시 일으킨 왕에게 쓰고, '종'은 정통으로 왕위를 계승한 왕에게 붙였다. 

한국에서 중국식 묘호를 쓰기 시작한 것은 신라의 태종무열왕부터이다. 

고려시대에는 태조만 '조'라는 묘호를 가졌으나, 조선시대에는 '조'를 쓴 묘호가 많다. 중종은 반정의 공이 있다 하여 '조'를 붙이자는 논의가 있었으나, 예관이 중종은 직계라는 점을 들어 '종'이 마땅하다 하여 중종이 되었다. 

선조도 본래 선종이었던 것을 임진왜란 극복의 공과 정통문제를 들어 선조로 바꾸었다. 인조는 반정의 공으로, 순조는 홍경래의 난을 진압한 공으로 '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