家門의 영광

맨발나그네 2015. 5. 25. 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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家門의 영광

맨발나그네 2014. 6. 15. 10:04

 

전주류씨의 유래

 

  전주류씨에 관한 기록은 일본(日本) 성덕태자(聖德太子)의 요청으로 사천왕사(四天王寺)를 건축(建築)하러 백제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류중광(柳重光)은 본관이 전주(全州)이며, 그 후손은 지금도 사천왕사를 보수(補修)해오면서 사천왕사 인근(隣近)에 살고 있다. 

  고려 때 평장사(平章事)를 한 전주인(全州人) 류방헌(柳邦憲) 묘지명(墓誌銘)에는 증조부가 신라 때 각간(角干) 벼슬을 한 류기휴(柳基休)라고 하였으며, 그 계대가  고려말 류능(柳能)의 가문(家門)까지 이어지고 있다. 따라서 전주류씨는 고려 왕건(王建) 때 창성(創姓)된 문화류씨(文化柳氏)보다 훨씬 앞서 백제 때 창성(創姓)된 성씨(姓氏)인 것이다. 

  그리고 고려말에 문화류씨 류경(柳璥) 등은 전주류씨 류능(柳能)을 살해(殺害)하여 전주류씨 가문(家門)을 몰락시킨 인물인데 이 류경은 전주류씨의 선조(先祖)라고 하는 류양재의 당숙(堂叔)이다. 그런데 전주류씨를 몰락시킨 류경의 당질(5촌조카) 류양재가 전주류씨의 선조(先祖)라고 하는 것은 설득력이 없는 것이다. 

  문화류씨 류경 등에 의하여 무신정권의 일원(一員)인 류능이 피살(被殺) 당하자 그 일족(一族)은 역적(逆賊) 가문(家門)의 누명을 쓰고 전주로 낙향, 은둔(隱遁)하여 비참(悲慘)한 생활을 하였기 때문에 학문(學文)을 배우지를 못하여 계대(系代)가 실전(失傳)된 것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성이 있다. 

  한편 효종3(1652)년에 창간한 임진보(壬辰譜)에는 문화류씨로부터의 분관설(分貫說)을 기록하고 있으나 전주류씨 4번째 병자보(1876년)에는“전주류씨보계변증문”을 싣고 전주류씨는 문화류씨 계열이 아닌 토성(土姓) 전주류씨라 하였으며, 미완성 갑자보(1924년)에는 반증문을 싣고 전주류씨는 문화류씨 계열이라 하였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명종20(1565)년에 발간한 문화류씨 가정보(嘉靖譜) 서문(序文)에 전주류씨 분관설(分貫說)이 없고, 또한 본문에서도 전주류씨 시조라는 류양재(柳良梓)는 직함(職銜)도 없고 무후(无后)인데 후에 편집한 족보에는 전성군(全城君)이라는 군호(君號)를 가필(加筆)하고 전주류씨를 그의 후손으로 하였다.

  특히 2008년에 간행한 문화류씨족보에는 류양재의 큰아들을 방직(邦直), 작은 아들을 방헌(邦憲)이라 하고, 방헌의 주기(註記)에는 高麗惠宗甲辰生穆宗朝禮部侍郞己酉卒(고려혜종갑진생목종조예부시랑기유졸)이라 기록하였다. 즉,“류방헌은 고려 혜종1(944)에 태어나 목종 때 예부시랑을 하고 목종12(1009)년에 별세하였다”는 뜻이다. 이렇게 1009년에 별세한 류방헌을 1250년 전후 사람인 류양재의 둘째아들로 하였으니 누가 보아도 이것은 족보를 짜마춘 느낌이 든다. 

  순종2(1908)년 홍문관(弘文館)에서 간행한 증보문헌비고정오(增補文獻備考正誤) 제계고(帝系考)에는“전주류씨 시조 습(濕)은 완산백(完山伯)이다”라하고 그 상계(上系)는 밝히지 않고 있다.
 
  그러나 전주류씨는 백제 때부터 이어온 토성설(土姓說), 문화류씨로부터의 분관설(分貫說) 모두 확증(確證)할 문헌이 없어 시조(始祖) 선대(先代)의 계대를 이을 수 없다. 따라서 시조 완산백 습(濕)의 상계(上系)는 문화류씨분관설(文化柳氏分貫說)이나 토성설(土姓說)을 앞으로는 각파 종중(宗中)에서 각종 문헌(文獻)이나 금석문(金石文) 등에 사용하지 않는 지혜가 필요하다. 

  그리고 여기서 첨언(添言)할 것은 전주류씨는 3개 파가 있는 것이다. 즉, 습(濕), 혼(渾), 지(池)를 각각 시조로 하는 3개 파이다. 여기서 혼(渾)파는 고려 때 평장사(平章事)를 한 전주인(全州人) 류방헌(柳邦憲) 묘지명(墓誌銘)에 증조부로 기술한 신라 때의 각간(角干) 류기휴(柳基休)를 비조(鼻祖)로 하고 혼(渾)을 시조(始祖)로 하여 족보를 발간한 바 있다.

 

 



출처 : 전주류씨 대종중 홈페이지

 


 
 
 

家門의 영광

맨발나그네 2011. 12. 13. 19:50

 

9세 류영하(柳永賀)

 

<조선왕조실록 - 류영하편>

광해04/07/17(기유)
  <금부(禁府)> 연좌인 류영하(柳永賀)는 거제(巨濟)에, 류정량(柳廷亮)은 남해(南海)에, 류여휘(柳汝輝)·류흥휘(柳興輝)는 진도(珍島)에, 이영로(李榮老)는 거제에, 류성(柳惺)은 삼수(三水)에 모두 <이미 위리> 안치하였다.
  【원전】 32 집 87 면

 

9세 현풍공 세거지-요당마을 입향기

 

        9세 현풍공 영하(永賀)는 전릉부원군 의(儀)와 증정경부인 교하 노씨 사이에서 명종8(1553)년에 3남2녀 중 셋째아들로 태어났는데 큰 형은 월봉공 참판 영길(永吉), 둘째형은 전양부원군 영의정 영경(永慶)이다.

    공(公)은 음사(蔭仕)로 직장, 주부, 지평, 좌랑 등을 거쳐 현풍현감을 하였고 별좌(別坐)를 할 때 호성원종공신(3등)이 되었는데 정인홍과 이이첨이 전양부원군을 무고(誣告)할 때 연루(連累)되어 광해군4(1612)년에 거제도로 귀양을 갔다가 인조반정으로 관작(官爵)이 복구되었다.

    공은 밀양박씨를 부인으로 맞이하여 2남3녀를 두었으며, 둘째아들 흘(忔)은 학생(學生)으로 호성원종공신(3등)이 되었고, 진사(進士)로서 세자익위사 세마(洗馬)를 하였는데 광해군4(1612)년 김직재의 옥에 연루되어 흥양으로 유배되었으나 1623년 인조반정으로 신원이 복구되었다.

    인조반정으로 귀양지에서 귀경(歸京)한 현풍공은 문중(門中)의 환란(患亂)을 격은 상처를 위안하고자 둘째 아들과 함께 가솔(家率)을 이끌고 낙향(落鄕)하여 정착(定着)한 곳이 경기도 화성시 양감면 요당리이다. 여기서 사위 신응두(申應枓)의 후손들이 양감면 용소리에 살고 있는 것을 보면 현풍공이 낙향을 할 때 사위의 도움을 받았을 것으로 짐작이 된다.

    이 때 심은 약 400년 된 은행나무는 화성시(市)의 보호수(保護樹)로 지정되었다. 요당리는 예전에 마을 중심에 호수(湖水)가 있었는데 그 주위에 갈대가 많이 있다 하여 갈대요(蓼)와 못 당(塘)을 써서 “요당(蓼塘)”이란 이름이 생겼다고 한다.

    요당리는 우리나라 초창기 낙농업을 이끈 마을이고 특히 화성군에서 젖소목축이 가장 먼저 시작된 마을이기도 하다. 특히 이 마을에는 축산대학으로 널리 알려진 건국대 졸업생이 많아 경기도에서 낙농마을의 시초가 되었고 황우석 박사의 복제소 “영롱이”가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이 마을에 정착한 전주류씨는 국내 굴지의 기업 회장을 비롯해 교수, 의사, 한의사 등 13명의 박사(博士)가 배출되었다. 경동제약(주) 회장 류덕희(명예경영학박사)를 비롯하여 한양대 명예교수 류준수(명예 철학박사), 단국대 대우교수 류인수(농학박사), 서울대 농업생명과학대학 교수 류관희(공학박사) 등 생존해 있는 박사만도 13명이며, 류관희 박사는 농업기계분야에서 서울대학교 농업생명과학대학 상록연구대상을 수상한 바 있다.

    이들은 경영학, 철학, 공학, 이학, 문학, 의학, 한의학, 교육학 등 각 분야에서 두루 박사로 배출되어 저마다 각자의 분야에서 고향을 빚내고 있다. 요당1리는 “4.19”가 발생한 1960년부터 대학생이 많기로 소문난 마을이었다.

    그 당시에 면(面)에서도 찾기 힘든 대학생이 요당리 마을에는 30명이 넘게 있었다고 한다. 공부를 못한 것이 한이 된 조상들이 광복 직후 땅을 팔아서라도 자식 공부를 시켜야겠다는 마을정서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약 400년의 수령을 자랑하는 마을의 지킴이로 자리한 은행나무는 단순한 나무가 아닌 마을의 상징으로, 해마다 이 나무 아래에서 마을 사람들과 타지인들이 함께 하나가 되는 축제가 열리고 있다.

    여름에는 에어컨보다 더 시원한 그늘 쉼터로 가을에는 너무나 멋진 정취 있는 쉼터로 변신하는 마을의 자랑거리이다.

    파조 현풍공(류영하)에 관한 문헌으로는 죽계일기(趙應祿 著)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乙巳 十二月 二十日 庚申 柳永賀 拜饔直

    선조38(1605)년 12월 20일 사옹원(司饔院) 직장(直長)에 임명되다.

    丙午 十二月 二十五日 己未 柳永賀 拜漢簿

    선조39(1606)년 한성부(漢城府) 주부(主簿)에 임명되다.

    [자료제공 22세 현풍공후 류관희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