끄적끄적

맨발나그네 2014. 1. 21. 21:13

 

 

         영원한 만남 ‘칠삼회’

 

  요람에서 무덤까지 가는 동안 우리는 무수한 만남을 갖는다. 이 세상에 태어나며 어머니와 만나고, 가족과 만나게 된다. 그 이후 초등학교를 입학하며 많은 친구들을 갖게되고, 이후로 중고등학교와 대학, 직장, 그리고 사회의 여러 인연들이 있고 배우자와의 만남을 통해 일가를 이루게 된다. 오늘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 만남은 인연이 시작된지 40여년이 된 만남이다. 우리의 인연이 시작된 곳은 1973년 대학캠퍼스에서 꿈많은 프레쉬맨으로 만나면서 이다. 이런 저런 사정으로 신설대학이면서 후기대인 아주대에 입학하면서 만나 초대 학생회 회장선거에 같은 팀으로 선거에 승리하고 그 후 학생회를 구성할 때 학생회 임원이 되어 1년간 학생회를 운영하면서 맺여진 인연이니 참 오래된 인연이다.

 

 

   

▲  1973년 안성군 삼죽면 미장면에서 펼쳐진 농활의 이모저모

 

 

   

▲  1973년 안성군 삼죽면 미장면에서 펼쳐진 농활의 이모저모

 

 

▲  농활중의 휴식시간

 

 신설대학이다 보니 학생회를 꾸려 나가기가 쉽지 않았다. 물론 이들 중 많은 사람이 중.고등학교 시절 학생회 임원 경험이 있기는 하지만 대학 학생회는 그 차원이 다른 모임이었다. 우선 73년 첫 여름 방학을 맞아 치루어야 했던 하계농촌봉사활동(농활)팀을 꾸리는데 나서는 사람이 별로 없으니 임원들이 거의 나섰고, 그들의 친구들을 포섭하여 어찌어찌 팀을 꾸려 안성군 삼죽면 미장리라는 곳으로 농활을 떠나 성공적인 끝낼 수 있었다. 그후에도 74년 맞은 첫 축제는 그야말로 산적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이리뛰고 저리뛴 뒤에야 그럭저럭 치러낼 수 있었다. 이외에도 모든 일이 선배들의 경험을 이어받아 진행하는게 아니라 새롭게 시작해야 하는 일에 힘들어 하기도 하였다. 더군다나 우리가 학생회 임원을 지낸 시기는 유신헌법에 의해 비상계엄령하의 학교였으며, 1974년1월8일에는 긴급조치 1호가 선포되어 시위는 물론 학생집회까지 금지된 사회였으니 더더욱 활동의 제약을 받던 때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1975년 학도호국단 제도가 만들어져 우리 이후에는 학생회가 아닌 학도호국단이라는 병영체제로 운영되었으니 말해 무엇하랴.

 

 

▲  1박2일 모임중의 저녁식사(2014년 1월 17일)

 

 

  그렇게 만난 친구들이니 친할 수 밖에 없었다. 그때 정말 술을 많이 마셨다. 지금이야 건강 때문에 술을 피하는 친구들도 있고, 대부분 술을 줄여 먹지만, 옛날에야 주머니 사정이 빠듯해서 그렇지 술은 없어서 못 먹던 시절이었다. 대의원들과 부딪치고 나서도 마셔야 했고, 학생회가 추진하던 일이 잘 안풀릴 때도 마셔댔다. 쌍권총을 찬 학점 걱정에도 마셔야 했고, 시대적 아젠다에 비분강개하며, 조국의 안위를 통크게 걱정하면서 통크게 마셨다. 그시절 한참 히트를 한 이장희의 ‘한잔의 술’을 목청껏 외쳐대며 통음을 했다. 그렇게 제1대 총학생회를 마칠 무렵 자연스럽게 죽을때까지 모여보자는 취지하에 우리의 만남이 시작된 73년도를 넣어 ‘칠삼회’라는 모임을 만들고 40여년째 만나오고 있는 모임이니 정말 묵은지같은 모임이라 하겠다.

 

 

▲  아주대 초대 학장님댁을  방문(1992.1.2)

 

 

▲  가족들과 나선 나들이(1992년, 현충사)

 

 

  40여년을 이어오는 동안 가끔씩 가족들도 함께하며, 어린이날 같은 때는 아이들과 함께하기도 하고 부부동반으로도 만나고 하였다. 그러다가 아이들은 커서 쫒아다닐 생각을 안하고, 몇몇이 상처를 하게되는 경우가 생기고 하여 어느때 부터인가 우리들끼리의 모임이 되고 말았다. 일년에 서너번씩의 모임이니 작지 않은 모임이다. 그런데 올 신년에는 일박을 하잔다. 그래서 대진대에 있는 게스트하우스를 빌려 금요일 저녁부터 토요일까지 1박을 하면서 보냈다. 대학 입학후 40여년이 지나다 보니 각자의 처지는 제각각이다. 누구는 제법 알려진 중견기업의 CEO가 되어있고, 누구는 자기가 창업을 한 기업의 CEO가 되어있기도 하다. 누구는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누구는 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기도하다. 누구는 사업실패로 어려워진 경우도 있다. 현재의 위치는 제각각이지만 우린 만나면 73년의 프레쉬맨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밤새워 술을 마신다.  그리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눈다. 물론 프레쉬맨 시절과는 대화의 내용이 달라지긴 했지만....

 

 

▲  대진대 게스트 하우스에서 밤늦도록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는 칠삼회(2014년 1월 17일)

 

 

  대화의 주요내용은 역시 건강이다. 각자의 건강유지법과 그 많은 건강에 좋다는 먹거리가 등장한다. 그리고 지나온 세월들을 회상한다. 그리고 잔을 부딪친다. 그렇게 잔을 부딪치며 이야기는 앞으로 남은 인생설계로 이어진다. 그렇게 새벽이 되도록 술잔을 기울이며 추억을 하고, 이야기꽃을 피운다. 그리고 올 여름쯤 진천에서 다시 일박을 하기로 결정한다.

 

아마 멤버중의 대다수가 거동이 불편하지 않는 한 이 모임은 지속될 것이다. 이제 술먹는 량도 줄것이고, 미래에 대한 이야기보다는 과거를 추억하는 이야기가 더 많아질 것이다. 거동이 불편하거나 먼저 세상을 등져 참석을 못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옛날에는 안하던 짓이던 1박하기가 늘어가는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우리는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앞으로도 쭉 만남을 이어갈 것이다. ‘칠삼회’라는 이름으로....

 

                                                                                                   (2014년 1월에)

 

 

 
 
 

끄적끄적

맨발나그네 2013. 7. 18. 06:23

 

(그녀 ☞  http://blog.daum.net/yooyh54/47  )

(그녀 2  ☞  http://blog.daum.net/yooyh54/381 )

(그녀 3  ☞  http://blog.daum.net/yooyh54/491 )

 

(그녀 3)

아름다운 노스텔지어 그녀

 

 나의 고향은 여러번 밝혔듯이 화성시 양감면이다. 이곳은 화성시의 남쪽 끝에 위치한 곳으로 내 어릴적엔 산업이라곤 농업 뿐이었고, 도로망이 형편없어 교통이 불편하던 그런 곳이다. 하지만 나의 12대조 할아버지가 광해 임금때 정치적인 몰락을 당해 인조반정후 귀양에서 돌아와 낙향하여 터를 잡은 곳이니 나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이 고향이 된 곳이다. 그곳에서 나는 자식들을 끔찍이 사랑하시는 부모님 슬하에서 7형제중 4째로 세상과 만났다. 말이 아들 일곱이지 어릴적 내 눈에도 매일매일이 전쟁이었다. 방이라곤 사랑채를 포함해 달랑 3개인 집에서 농사를 돕는 머슴 아저씨를 포함하여 10여명이 북적거려야 했으며, 여자라곤 어머니 한분뿐인 집에서는 식사때마다 난리를 치루고서야 입에 풀칠을 할 수 있었다. 누나나 여동생이 있는 친구들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던 시절이었다. 그런 시절에 초등학교에서 고등학교로 이어지는 시절을 고향에서 지내야 했다.

 

 

▲ 초등학교 졸업 사진

 

 

 초등학교는 집에서 약 2km 떨어진 곳에 있는 양감초등학교로 각 학년마다 한 한급씩으로 대략 한 학년이 60여명이었다. 졸업앨범의 남녀구성비가 남 35, 28명이었다. 1967년 초등학교를 졸업한 나는 집에서 약 8km 떨어진 발안중학교에 진학을 하게 되는데, 1년간은 3살 많은 바로 위 세째형과 자전거 한 대로 함께 통학을 하다가, 1968년 자전거 한 대를 더 사서 헌 자전거를 물려받아 통학을 하게 된다. 그때 중학교는 4학급으로 편성되어 있었는데 1반과 2반은 남학생, 3반은 남녀 혼합반, 4반은 여학생으로 구성되어 있고 매년 반편성이 달리 되었건만 어쩐일인지 3년 내내 2반에만 편성되는 불운(?)이 계속되었다. 사실 누나나 여동생이 없던 내게 3반은 로망이었다.

 

 

▲ 중학교 졸업 사진

 

 

 그렇게 중학교 3년을 보내고 고등학교에 진학을 하게 되었다. 친구들중에는 서울에 있는 고등학교 시험을 보기도 하고 누구는 수원에 있는 인문계 고등학교에 원서를 내기도 하였다. 사실 그들이 부러웠다. 그 때 서울에 있는 고등학교로 진학하여 지금은 모대학에서 영문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S와 헤어짐이 섭섭하여 둘만의 이별여행을 떠난 적이 있다. 그 시절 이별여행이라고 해봐야 S의 고모님이 사시는 평택의 어느 겨울 바닷가를 찾아 헤어짐의 섭섭함을 달랬던 것 같다. 아마도 미래에 대해서도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겠지만 너무 오래전이라 내용은 기억에 없다. 노는데 바빠 공부는 뒷전이었지만 중학교 성적은 그리 나쁘지 않았으니 기회가 주어졌다면 아마 도시의 고등학교에 진학할 정도의 실력은 되었지 싶다. 하지만 7형제중의 4째인 나에게 선택의 문은 넓지 않았다. 첫째와 둘째를 서울로 유학보낸 우리집의 형편상 이미 3째형부터는 발안농업고등학교를 선택할 수 밖에 없었으니까... 하긴 나의 아우들 3명중 2명이 본인들의 의지로 도시의 고등학교로 떠난 것을 보면 그 때 부모님께 한 번 말씀이라도 드려볼 걸 그랬나 하는 생각을 아주 가끔 하기도 한다.

 

 

▲ 고등학교 졸업 사진 - 3학년 때 남학생이 9명이었는데....

 

 

 지금이야 이름도 발안바이오과학고등학교라는 거창한 이름으로 바뀌었고 학과도 바이오식품과학과, 기능성식품과학과, 푸드스타일링과, 레저생명산업과, 외식산업과, 레저동물산업과로 편성되어 있지만 내가 고등학교를 입학할 무렵의 발안농고는 두 학급이 있었는데 한 한급은 농업과(이하 농과)요 다른 한 학급은 상과였다가 내가 입학하기 전 해였던가 농업협동조합과(이하 농협과)라는 이름으로 개명된 과가 있었다. 농과와 농협과가 다른 점은 우선 농협과는 남녀 혼합반이고 상업, 부기, 주산과 같은 과목이 몇과목 추가된 커리큐럼을 갖고 있었으니 무조건 농협과를 목표로 원서를 제출한다. 그런데 전체 지원자가 대략 120여명에 여자 지원자가 50여명이다 보니 농협과에 우선 여학생 50여명을 채우고 나머지 10여명만을 남학생으로 채운다는 것이다. 농협과의 남학생 선발이 성적순이었는지 어쨌는지는 모르겠으나 결과는 농협과의 입학생이 되어있었다.

 

 

    

▲ 고딩1때의 봄소풍                                    ▲ 고딩시절 어느 봄날 교정에서 

 

 고등학교 1학년인 1970년 봄부터 여학생 50여명에 남학생 10여명의 동거는 시작된다. 초등학교시절 남녀 혼합반이기는 하였지만 사춘기였을 나에게 별안간 50여명의 여학생은 부담되는 상황이었다. 남학생이 10여명이었으니 어느때는 왼쪽에 한줄, 어느때는 오른쪽에 한줄이거나 맨앞이나 맨뒤에 한 줄로 앉아 수업을 받아야 했다. 맨 뒷줄에 앉았을 때는 그나마 나았지만 맨 앞줄에 앉아 수업을 받을라 치면 뒷통수가 땡겨 수업이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그들의 하얀 교복 블라우스를 보고 있노라면 눈길을 어디다 주어야 할지 망설여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것도 1학년 학기초 몇 달이고 그 시기가 지나니 우린 그저 같은반 동급생인 것이었다. 오히려 이런저런 일로 군면제를 받아 일찍 임용된 총각 담임선생님이 더 어리둥절해 하셨던 것 같다. 체육시간에는 체육복을 들쳐메고 적당한 곳에서 갈아 입어야 했고 가정시간에는 목공실로 자리를 옮겨 농과와 함께 목공실습을 해야 했다. 농고이다 보니 수업은 뒷전이고 실습이라는 이름으로 밭, 과수원, 목초지 등으로 옮겨다니며 하루 서너시간 이상씩 농사일에 매달려야 했다.

 

 

 

 

▲ 고딩시절의 소풍

 

 50여명의 여학생이 똑같이 좋을 수는 없으니 친하게 지낸 여학생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못한 여학생도 있었다. 그 옛날이기는 하지만 열일곱여덟살 소년소녀들이었으니 핑크빛 연분이 소문으로 돌기도 하였고, 쪽지편지도 주고받는 사이들이 되었다. 누구는 후배 여학생과 사귄다는 소문이 있기도 하고, 누구는 선배 남학생과 사귄다는 소문이 있기도 하였지만 촌띠기들인 우리들에게 많지않은 경우였다.  O는 나이먹어 만나 언젠가 내가 자기에게 쪽지 편지를 보낸 적이 있다고 놀려대던대 나에겐 기억이 없으니 뭐라 할말이 없다. 다행인 것은 젊은피가 펄펄 끓던 때였는데도 불구하고 몇몇을 제외하면 그저 동급생 이상도 이하도 아닌 관계가 잘 유지되고 있었다. 아니 나처럼 누군가를 짝사랑하고 있었는데 알려지지 않았을 수도 있었겠다.

 

 

▲ 고딩2 설악산으로 수학여행을 가던중 어느 강가에서 점심을 먹으며 

 

 

 입학후 바쁜 학창생활중에 내 눈에 확 들어오는 한 여학생이 있었으니 Y였다. 미소가 아름다운 Y를 볼 때마다 가슴이 뛰는 경험을 하게되니 이른바 짝사랑으로의 발전이다. 큐피트화살이 하필 내 가슴에 맞아 나를 황홀하게도 하고 괴롭히기도 하였다. 그녀가 나만보고 웃는 것은 아닐진대 그녀의 미소에 가슴이 녹아내려 잠이 다 안 올 정도였다. 그녀를 바라보기만 하여도 좋았고 설레였다. 그녀를 보기위해 학교를 가는 8km가 항상 즐거움으로 충만해 있었다. 하지만 감히 표현을 하지 못하고 벙어리 냉가슴을 앓을 수 밖에 없었다. 그렇다. 짝사랑은 오히려 다른 여학생과는 그리도 재미있게 이야기하고 있다가도 그녀가 나타나는 순간 침묵모드로 전환된다. 제법 당당하게 생활한 학창생활이었지만 Y 앞에만 서면 말도 잘 걸지 못하고 그저 당황해 하기만 했다. 그녀 Y 주변을 맴돌 뿐 마음을 전하지 못한채 3년이란 세월이 흐른다. 고교 졸업후에도 개인적으로 몇 번인가 더 만났지만 나의 마음을 입 밖으로 말로 표현 못하고 함께 저녁 식사를 하고 헤어짐이 전부였다. 내 나이 스물 대여섯살때 결혼소식을 전하는 그녀에게 축하한다라고 모기소리 만하게 전한다. 난 아직 군 제대 전이었고, 대학생활을 2년이나 남겨둔 상태였으니 사랑은 사치라고 자위할 수 밖에 없었다.

 

 

▲ 고딩2 설악산으로 수학여행

 

 

 짝사랑!

 1936년 발표된 고복수의 짝사랑은 강물도 출렁출렁 목이 메고 / .... 바람도 살랑살랑 맴을 도는 / .... 사랑이 나를 울린다라고 노래한다. 가수 이선희는 정리될 수 없는 혼란함이 내 마음에 가득하지만 / 그 마음은 모두 당신을 향하고 있읍니다라고 노래하고, 가수 주현미는 그대 가슴에 눈물만큼 고운 별이 될래요라며 가슴만 두근 두근 아~ 사랑했나봐라고 짝사랑을 노래한다. 최근에 발표된 이하이의 짝사랑에서는 내 마음이 만든 단 하나의 영화 / 오직 너만이 출연하는 특별한 / 작품의 제목은 짝사랑 / 그리고 난 단 하나의 관객이라 하며, 이어서 그저 눈에 보이는 곳에 / 늘 그랬듯 매력적인 눈빛 몸짓 말투로 / 존재하면 돼 난 그거면 돼라고 노래한다. 동서고금을 통해 짝사랑은 애틋하기도 하고 아릿하기도 하며 소중한 기억이다.

 

 

     

▲ 풋풋한 미소가 아름다운 농협과 급우들

 

 전문가들은 짝사랑을 상사병의 일종이라 한다. 짝사랑이라고 하는 상사병은 감기, 죽음과 함께 인류의 의학이 아무리 발전해도 극복할 수 없는 병일 것이라 한다. 하지만 내 병력에 아직 상사병에 대한 기록이 없는 것으로 봐서 Y에 대한 짝사랑은 아픔과 고통이 아닌 가슴 벅차고 뿌듯한 소중한 기억인 듯 싶다. 92세를 일기로 몇 년전 세상을 뜨신 나의 아버지의 앨범에 소중히 간직되어 있던 일본 유학시절의 여학생처럼 Y도 이제는 누렇게 빛바랜 사진으로 내 앨범 한구석을 채워 가끔씩 나를 추억열차를 탑승하게 만든다. 다만 아쉬운 것은 왜 그 땐 그렇게 표현에 서툴렀을까? 아니 왜 고백 한 번 해보지 못했을까? 사랑한다고 말할 용기는 왜 없었을까? 라고 자문하며 그 이유는 아마도 여자형제가 없었던 것이 트라우마가 된 것이 아닐까 하는 답을 한다. 이 글을 끄적거리며 지금의 나라면 어땠을까 하는 상상을 해보니 입가에 짠한 미소가 돈다. 하여튼 Y는 그렇게 아름다운 노스텔지어가 되어 나의 가슴에 간직된 또 한명의 그녀이다. 하긴 그렇게 짝사랑으로 끝났기에 노스텔지어가 되어 40여년이 지난 지금도 추억할 수 있는 거겠지. 가수 이수미는 1972년 발표한 '여고시절'에서 "수많은 세월이 말없이 흘러 /  ~ 아~아~~~아~아~~~ / 지나 간 여고시절 조용히 생각하니 / 그것이 나에게는 첫사랑이었어요"라고 노래한다. 아마 우리들 모두의 마음을  대변해 주는 노랫말이 아닐까...........

 

                                                                                                                   (2013717)

 

( 댓 글 )

 

  • 은순이

    짝사랑하던 그녀는 지금은 어디서 살고 있을까..무었을하고..무었을 그리워하며....혹 날 기억은 할까...말그대로 노스탈지어의 아름다운 그녀네요. 추억이 있어 옛날은 아름답고 그리운것..한번연락을 해보시면 어떨까...요..그녀는 바보.. 2013.07.19 09:35

  • 미수다

    Y는 여자..바보는 나그네님이죠. 남자가 좋아한다는 말 단 한마디를 못하고 떠나 보내다니... 그래서 추억은 아름답고 눈물겨운 얘기라지요? 2013.07.19 12:02

  • 해오름

  • 저도 한때는 나그네님과 똑같은 과정을 밟았지요. 앉으나 서나 그녀의 얼굴이..수없이 썻다가 찟어버린 편지...
    그녀 앞에만 서면 나는 왜 작아지는지..유행가 가사처럼..얼마전 동창회 모임에서 오랫만에 만난 그녀에게 나 기억나? 몰라 ..영 생각이 안나..뒷통수를 얻어맞은듯...환갑이 지난 그녀의 주름진 얼굴에도 아직 그날의 어여쁘던 얼굴만 찾아내던 난슬픈 광대처럼 허허 웃고 말았네요. 지나간 옛날은 언제나 아름답기만 한것인지....
    2013.07.19 22:15

  • 사랑산

    한사람으로 태어나서 운명이라고 밖에 말할수 없다면..넘 슬픈이야기..소심이 빚어낸 비극이랄까...
    유일의 인생을 걸고 도아니면 모를 외쳤어야..아...슬픔이여..회한의 눈물이 마르지 않는구나..눈에 흙이 덮힐때까지...
    2013.07.21 10:08

  • 연아

    요새 젊은이 같으면 누가 먼저라 보는이가 임자라고 데이트 신청부터.. 열번찍어 안넘어가는 나무 없다고..무소처럼 돌진 할거구먼..옛날 우리네만 병신짓 했당께...ㅎㅎㅎ 2013.07.21 10:17

  • 이루미

    빛바랜 흑색사진이 추억을 끄집어내네요. 슬픈기억도..기쁜기억도 지나놓고 보면 모두가 아름다운데..텅빈 허공처럼 비어버린 그대의 자리..무었으로도 채울길 없는 이아련한 아픔...그대라고 지금 나직히 불러 불러봅니다. 수줍게..그러나 확신에 찬 별리의 천길 나락만 어둠처럼 입을 벌리고 있네요. 그대.... 2013.07.22 13:05

    고량주

    저도 그렇다면 바보들의 행진에 동참? ㅋㅋㅋ 그때 우리는 참 순박했었지요. 때가 절 묻었달까? 2013.07.24 10:46

  • 조랑말

    그때는 모두 그랬지...너나 할것없이...그래서 옛날은 아름다운거지... 2013.07.26 11:30

  •  
    일인성주 13.07.19. 22:36
          좋은 추억....
     
    금샘 13.07.21. 07:07
    아름다운 추억...
    글이 참 좋으네요. ㅎ
     
    땅게 13.07.25. 22:35
    좋은추억이네요``~~~~
     
    갈뫼천 13.07.29. 13:41
    아름다운 추억이네요
    손목을 잡았다면 덜 아름다울텐데 ㅎㅎ

      

    김영희(고31) 13.07.19. 14:26
    와~ 농협과는 용모단정으로 뽑은듯ㅋ 지금도 충분히 멋지시지만 젊은시절의 멋진 모습과 추억들을 보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신채호중19 13.07.19. 17:27
    "그사람이 내사람이다" 왜 말못해!
    누구나 그런기억 하나쯤 있지 싶씁니다..
    잘 읽었습니다
     
    오숙현 중21 13.07.21. 10:40
    저희 외사촌 언니 얼굴도 보이네요..서너개가~~~~ㅎㅎ

     

    이희숙 13.07.19. 15:43
    짝사랑했던 Y가 의상대에서 찍은 사진 맨 오른쪽에 있는 여학생이었던가? ㅎ ㅎ ㅎ
    유윤희 13.07.19. 15:50
    글쎄??????????? ㅎㅎㅎ
     
    지기호 13.07.19. 20:36
    학창시절을 풍미했던 아름다운 시간들이었구먼!
    중학교 고등학교 시절은 내가 다니질 않았으니 모르겠고 지금에 생각하니 함께했던 초등학교 시절에 언변이 좋았던 친구로 생각이 나는데
    어쩌면 위 글 내용처럼 남자만 있는 형제들과의 대화와는 전혀다른 여자의 내심을 몰랐던 고딩시절이 속세로 보이는구려~~

     

    브레드 13.07.18. 17:56
    시간이 흘러서 그분은 만나보셨나요?
    나그네 13.07.18. 18:30
    ㅎㅎㅎ
    그녀의 결혼 통보를 들은 날 이후 아직 한번도 못 만났다오...
    이제와 쭈구러진 얼굴을 보는 것 보다는 고딩 시절의 사진 속 그녀로 만족하는게
    훨씬 낫겠지요????
    브레드 13.07.18. 20:21
    언젠가 만나시겠지요^*^
     
    은하수별빛 13.07.18. 22:04
    첫사랑은 첫사랑일뿐 세월흘러 보는건 아니라고 생각하는 일인입니다. 훗
    서로의 이상형도 변화하고 그때 그와 내가 아니니깐!! >.<
    나그네 13.07.18. 23:36
    그렇지요....
    만약 봐야 할 상황이면 피하진 않겠지만 일부러 찾아보지는 않아야겠지요....
    은하수별빛 13.07.18. 23:37
    옆에서 보았는데 반가움보단 실망이크더라구영~ ^^
     
    브레드 13.07.19. 16:04
    그래도 저는 한번 찾아보고싶은 마음입니다

     

    아름다운 13.07.18. 20:55
    와~~~7형제중 넷째로 태어나 옷이나 모든것은 다 물려받았겠네요
    어머님께서 무지 고생 많이 하셨겠습니다

    그때 그시절 다 추억이 많겠지만 맨발님은 유독이 추억이 더 많았던거 같아요
    우린 꿈도 못꾸었던 20때 부터 산행을 했었고 암튼 존경스럽습니당
    맨발나그네 13.07.18. 23:24
    ㅎㅎㅎ
    그 시절 아들 7명중의 네째는 아래 위로 치받치는 낀세대였지요....
    그래도 그럭저럭 위 글과 같은 추억이 있어 살아 올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따스한마음(회장) 13.07.18. 22:02
    울 맨발 형님께서 사랑의 병이 도지시나 보네요
    짝사랑 하던 첫사랑을 그리워함이 물씬 물씬 풍겨집니다
    함께한 학창 고딩시절 사진속의 Y 그녀가 분명 있으리라 봅니다
    요즘 외도로 타 산악회 종종 다니시더니 첫사랑을 닮은 여인이 나타남이 분명하네요

     

     
     

     

    와 정말 블로깅 잘하시네요^^

     
     
     

    끄적끄적

    맨발나그네 2013. 7. 11. 04:02

     

    40여년을 이어온 아주 특별한 만남

     

     

    ▲ 2013년 7월 3일 아주대 앞 식당 '명동칼국수샤브샤브'집에서의 '아쭈73전자'모임

     

     

    ▲ 2009년 7월 3일 아주대 앞 식당에서의 입학 36주년 기념 모임

     

     

     어제 73일 아주대학교 전자공학과 73학번 동기들이 입학40주년을 기념하는 조촐한 모임이 있었다. 입학 80명 졸업 50여명이라는 쉽지않은 여정이었다. 누구는 향토장학금의 중단으로 학교를 그만두어야 했으며, 누구는 3회 학사경고로 학교를 떠나는 슬픔을 안아야 했다. 누구는 4년만에 졸업을 하였고, 누구는 십몇년만에 졸업을 하였다. 나 자신도 73년에 입학을 하여 812월에야 졸업장을 손에 쥘 수 있었으니 휴학과 군입대 등으로 8년만에 학업을 마친 것이다. 어째거나 우리들은 아쭈73전자동기라는 이름으로 자주 만나 소주잔을 기울여 왔다. 매년 73일이 되면 모교인 아주대 근처의 식당에 모여 앉아 학창시절을 회상하며 소주잔을 기울여 오고 있었는데, 올해에는 입학 40주년이니 감회가 남다르다. 돌이켜 보면 20살내외의 청춘이던 시절 만나 40여년이 흘러 이제 인생을 정리하여야 할 시기까지 함께 해 온 동기들이니 만나면 반갑다. 연락처가 확인된 동기들이 40여명, 가끔씩이라도 모임에 얼굴을 내미는 동기들이 대략 20여명쯤 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

     

     

    ▲ 1973년 여름방학 안성군 삼죽면 미장리에서의 농촌봉사활동 

     

    ▲ 1974년 충남 아산군 인주면 공세리에서 농촌봉사활동을 마치고 마을 주민과 아쉬운 이별을 하고 있슴

     

     

     73학번인 우리들의 학창시절은 파란만장했었다. 19713선개헌을 필두로 19721017일에는 국가비상사태(비상계엄령)가 선언되었으며, 1972년에는 유신헌법이 공포되었다. 이에 재야인사들과 학생들은 유신헌법 개헌청원서명운동을 벌이게 되고 이를 저지하기 위해 197418일 긴급조치 1호가 선포되어 많은 재야인사들이 구속된다. 19743월부터 각 대학은 유신철폐시위가 빈발하게되니 민청학련사건을 만들어 긴급조치4호를 발표한다. 긴급조치의 내용은 일체의 유언비어 날조 및 헌법 비난행위의 금지, 학생집회 및 시위의 금지로 요약된다. 1975년에는 학도호국단 제도가 만들어져 대학은 병영화되었다. 경찰 정보요원은 아예 학교에 상주하였으며 데모를 주동할 만한 인물은 미리 군에 입대시켜 격리시키기도 하였다. 이후 긴급조치는 79127일 긴급조치 9호가 해제될 때까지 4년여 동안 지속되었으니 8백여명이 구속되어 <전국토의 감옥화> <전국민의 죄수화>라는 유행어를 만들어 낸 민주주의 암흑기였다. 하지만 유신체제의 몰락과 긴급조치 9호가 해제된 것은 민주주의의 발전에 의해서가 아니고 19791026일 박정희 대통령이 피살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두환정권에 의해 일어난 791212하극상과 1980517 비상계엄령 전국 확대 실시와 신군부세력의 광주학살로 다시 민주주의의 암흑기로 이어진다.

     

     

    ▲ 1981년 졸업앨범에서...  군입대, 휴학등으로 후배학번들과 함께 졸업을 하게 되었다

    (뒷줄 맨오른쪽이 필자)

     

     

     그 시절을 고스란히 학생과 군인이라는 신분으로 지내야 했다. 그러니 나를 비롯한 동기들의 대학시절은 반복되는 계엄령, 긴급조치, 위수령, 휴교령으로 점철된 시기였다. 복학후 어쩌다 참가한 데모에서 데모대를 가로막는 경찰의 선두에는 중고등학교를 같이 다닌후 경찰에 투신한 친구와 마주해야 하는 슬픈 현실에 직면하기도 했다. 반복되는 휴교령으로 대학생활은 반토막이었다. 박정희 피살사건이 일어난 19791026일에는 휴교령이 내려진 교정을 떠나 고향집에서 벼 탈곡을 돕기위해 따라 나섰다가 탈곡기(요즘은 벼 탈곡은 모두 콤바인이 하지만) 옆에 틀어놓은 라디오를 통해 전해들었던 기억이 난다.

     

     

    ▲ 1975년 군입대를 앞두고 무작정 떠난 여행(부산-여수-전주-진안-무주)

     

     

     

    ▲ 1975년 휴학후 입대한 군대

    1977년 유격장에서(뒷줄 서있는 사람 오른쪽이 필자)

     

     

     

    ▲ 1979년 동기이자 같은 복학생인 이신(지금은 고인이 되었지만)이와

    휴교령이 내려진 학교를 떠나 계룡산으로...

     

     

     하지만 우리는 젊었다. 20대의 젊음을 발산하지 않으면 안되었으니 반토막 대학생활 간간히 푸른지대와 노송지대의 딸기밭에서의 미팅도 있었고, 원천유원지에서의 쌍쌍보트타기로 젊음을 달래야 했다. 중간 중간 농촌봉사활동도 다녀왔으며, 혼자 또는 친구들과 배낭을 들쳐메고 무작정 떠나보기도 했다. 그것도 모자라면 술을 마셔대야 했다. 국가의 장래를 걱정해서도 마셔야 했고, 긴급조치위반으로 수배령이 내려진 학우의 안위를 걱정해서도 마셔야 했고, 친구의 입영이 슬퍼서도 마셔야 했으며, 쌍권총을 찬 학점 걱정에도 마셔야 했다. 맨 처음 발동이야 학교 앞 허름한 대폿집에서 시작되지만, 거나해지면 중동사거리 근처의 곱창전골집으로 자리를 옮겨 시대적 아젠다에 비분강개하며 조국의 미래를 논하고, 각자가 살아 갈 미래를 그리며 각종 유언비어를 안주삼아 마셔댔다. 주머니 사정이 빠듯한 우리들은 음식점주인에게 양해를 구하고 지금의 리젠시호텔 근처에 있던 양조장에서 막걸리를 양동이로 사다가 마셔야만 직성이 풀렸다. 70년대 초반 히트를 친 가수 이장희의 한잔의 술을 목청껏 외쳐대며 통음을 했다.

     

     

    ▲ 1992년 정월 입학당시의 학장이셨던 김현남 박사댁에 세배차

     

     

     하지만 그것가지고도 성이 차지 않으면 아주 가끔은 남문 뒷골목이나 구천동의 퇴폐(?)술집을 기웃거리기도 하였다. 누군가는 그곳에서 마음씨고운 누님 또래의 술집아가씨와 하룻밤 풋사랑을 나누기도 하였고, 누군가는 그 누님과 오랫동안 사랑을 나누기도 하였다. 그리고 술값으로 손목시계나 학생증을 맡기곤 다음에 그 손목시계나 학생증을 찾기 위해 고향집에 향토장학금의 증액을 요구하기가 다반사였다.

     

     오늘도 우리 동기들은 모여앉아 옛날을 추억하며 술을 마신다.

    몇 명은 건강을 핑계로 술대신 음료수를 마셔야 하고, 나머지도 옛날에 비하면 주량이 급격히 줄어들었지만 우리에겐 술이란 보편화된 문화다. 머리가 길다고 경찰들은 가위로 머리를 제멋대로 자르고, 짧은 치마를 단속하겠다고 여성들의 허벅지에 자를 들이대고, 노래가 퇴폐적이라고 제재를 가하던 시대에 젊음을 보내야 했던 우리에게 술은 유일한 낙이요 문화였던 것 같다.

     

     

    ▲ 2013년 입학40주년 기념 모임 

     

     

     우리 또래들은 대한민국의 한강의 기적을 만들어 낸 주역이지만 새로운 주역들에게 자리를 내주고 세월의 뒤안길로 물러 앉아야 하는 나이들이 되었다. 하지만 마음만은 청춘이어서 아직은 나름대로 활발한 사회활동을 하고 있으니 다행이다. 이런 우리를 가르켜 누구는 애플세대(APPLE generation, Active:활발한 사회활동, Pride:강한 자부심, Peace:경제적 시간적으로 여유와 안정, Luxury: 고급문화를 추구하는 노년층을 일컫는 말이라 한다)라 한다던데 아직은 뒤방 늙은이로 대접받기를 거부하는 친구들이 대견하기만 하다. 이런 묵은지 같은 친구들과 건강이 허락하는 한 열심히 만나려 한다. 비록 박상규의 <친구야 친구>처럼 가재를 잡고 동구밖 황토길에서 공차기 하던 어릴 적 친구는 아니지만 40여년을 두어깨 맞닿은 정에 노래 즐겁던 그런 친구들이 아니던가........

     

                                                                    (201374)

     

    (댓글)

     

    따스한마음(회장) 13.07.11. 18:40
    다른 분들은 늙어 보이시는데 울 맨발 나그네님은 그때나 지금이나네요 ㅎㅎㅎ
    추억이 아련 하시겠습니다 ㅋ
    맨발나그네 13.07.11. 19:57
    세월의 덫을 누구인들 비껴가겠습니까.............ㅎㅎㅎ
     
    조폭 13.07.12. 07:47
    멋찌십니다!!^^
    맨발나그네 13.07.12. 08:01
    어이쿠 행님..................ㅎㅎㅎ
     
    백치아다다 13.07.12. 11:07
    장마비가 촉촉히 내리는 날에 이 글을 보니 오늘은 저도 옛추억을 찾아봐야겠습니다
    나그네님에 40년전 추억을 보니 세월이 한없이 빠르다는것을 느낍니다~
    앞으로 40년후에도 지금에 추억처럼 다시한번 작성하여 주시길 바라며 건강하십시요~~~
    맨발나그네 13.07.16. 23:14
    ㅎㅎㅎ
    백치아다다님이 찾고 싶은 추억은 무엇인가요?????????????
     
    풍류 13.07.12. 11:38
    유신헌법 매일 쇠뇌교육 ㅎ 지겹도록 들엇죠 좋은 만남 이네요 ㅋ
    맨발나그네 13.07.16. 23:14
    풍류님도 유신헌법을 아시나요?????????? ㅎㅎㅎ
      
    아름다운 13.07.12. 21:36
    역쉬 맨발 나그네님은 멋지십니다~~~~~~~~
    맨발나그네 13.07.16. 23:14
    몸둘바를 모르겠습니다...................ㅎㅎㅎ
     
    too덜이 13.07.13. 13:13
    어따 겁나 멋져부리십니다
    좋은 추억 끝까지 간직 하시길!
    잘보고갑니다.

      맨발나그네 13.07.16. 23:15

    감쏴 합니다..............
     
     
    카봇 13.07.15. 10:32
    정말 멋지셔요~~~~
    맨발나그네 13.07.16. 23:15
    카봇님 어릴적 이야기지요?????????? ㅎㅎㅎ
    그러나 이제 같이 늙어가니............
     
     
    노루귀 13.07.16. 18:34
    나이 들수록 있어야 할 것 순위에
    추억은 몇번째일까요?
    맨발나그네 13.07.16. 23:16
    젊어서는 꿈을 먹고 살고 늙어서는 추억을 먹고 산다지요 아마..............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