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고향 화성 & 수원 이야기

맨발나그네 2010. 5. 13. 07:23

화성의 역사 04 - 일제시대
 화성문화원  09-01 | VIEW : 824
일제는 한국 강점 후 전국의 행정구역을 식민지 통치 체제로 개편하기 위해 1914년 3월 1일 군면 통폐합을 단행하였다.

수원군의 종덕(宗德) · 토진(土津) · 수북(水北) · 청룡(靑龍) · 감미(甘味) · 율북(栗北) · 포내(浦內) · 현암(玄巖) · 승량(升良) · 안외(安外) · 광덕(廣德) · 가사(佳士) · 숙성(宿城) · 언북(堰北) · 오정(梧井) 등 16개 면은 진위군(振威郡)에 속하게 되었으며 남양군 중 2개면을 제외한(대부大阜 · 영흥永興면은 부천 · 옹진군으로) 분향리(分鄕里) · 음덕리(陰德里) · 화척지(禾尺只) · 둔지곶(屯知串) · 쌍수리(雙守里) · 마도(麻道) · 송산(松山) · 수산(水山) · 세곶(細串) · 서여제(西如堤) · 신리(新里) · 미지곶(彌知串) · 저팔리(楮八里) · 팔탄(八灘) · 공이향(貢以鄕) · 장안(長安) · 초장(草長) · 우정(雨井) · 압정(鴨汀) 등 18개 면과 광주군(廣州郡)의 의곡(儀谷) · 왕륜(旺倫) 2개 면, 안산군(安山郡)의 월곡(月谷) · 북방(北方) · 성곶(聲串)의 3개면을 편입하여 21개면 279개리로 개편 · 관할하게 되었다.

21개면 ; 수원면(水原面), 매송면(梅松面), 안용면(安龍面), 태장면(台章面), 봉담면(峰潭面), 동탄면(東灘面), 성호면(城湖面), 정남면(正南面), 양감면(楊甘面), 일형면(日荊面), 향남면(鄕南面), 팔탄면(八灘面), 음덕면(陰德面), 마도면(麻道面), 서신면(西新面), 송산면(松山面), 비봉면(飛鳳面), 장안면(長安面), 우정면(雨汀面), 의왕면(儀旺面), 반월면(半月面)

수원지역
수원면(水原面) ; 북부면(北部面) + 남부면(南部面)
                        → 1931.04.01 읍(邑) 승격, 1949.08.15 시(市) 승격
매송면(梅松面) ; 송동면(松洞面) + 매곡면(梅谷面)
안용면(安龍面) ; 용복면(龍伏面) + 안녕면(安寧面)
                        → 1936.10.01 일부 수원읍 편입
태장면(台章面) ; 장주면(章洲面) + 태촌면(台村面)
                        → 1936.10.01 일부 수원읍 편입
                        → 1963.01.01 안용면과 태장면을 태안면(台安面)으로
                        → 1985.10.01 태안읍으로
                        → 1994.12.26 영통리 일원, 신리 · 망포리 일부 수원 편입
                        → 1996.04.20 영통리 일원, 신리 · 망포리 일부 수원 편입
봉담면(峰潭面) ; 삼봉면(三峰面) + 갈담면(葛潭面)
동탄면(東灘面) ; 동북면(東北面) + 어탄면(漁灘面) 일부
성호면(城湖面) ; 산성면(山城面) + 청호면(晴湖面) + 초평면(楚坪面) + 어탄면 일부
                        → 1949.08.15 오산면으로
                        → 1960.01.01 오산읍으로
                        → 1989.01.01 오산시로
정남면(正南面) ; 남곡면(南谷面) + 정림면(正林面)
양감면(楊甘面) ; 상홀면(床笏面) + 양간면(楊澗면) + 감미면(甘味面) + 토진면(土津面)
일형면(日荊面) ; 일용면(日用面) + 형석면(荊石面)
향남면(鄕南面) ; 남면(南面) + 공향면(貢鄕面) 일부 + 분향리면(分鄕里面, 남양지역 소속)

남양지역
팔탄면(八灘面) ; 공향면 일부(수원지역 소속) + 분향리면(分鄕里面) + 팔탄면(八灘面)
음덕면(陰德面) ; 음덕리면(陰德里面) + 화척지면(禾尺只面) + 둔지곶면(屯只串面)
                        → 1949.08. 남양면(南陽面)으로
마도면(麻道面) ; 마도면(麻道面) + 쌍수리면(雙守里面)
서신면(西新面) ; 신리면(新里面) + 서여제면(西如堤面)
송산면(松山面) ; 송산면(松山面) + 세곶면(細串面) + 수산면(水山面)
비봉면(飛鳳面) ; 미지곶면(彌只串面) + 저팔리면(楮八里面)
장안면(長安面) ; 장안면(長安面) + 초장면(楚長面)
우정면(雨汀面) ; 우정면(雨井面) + 압정면(鴨汀面)

광주지역
의왕면(儀旺面) ; 의곡면(儀谷面) + 왕륜면(旺倫面)
                        → 수원지역의 일형면과 광주지역의 의왕면이 1936년 10월 1일에 일왕면(日旺面)
                            으로 통합. 1963년 1월 1일 당시 시흥군과 수원시에 분할 편입

안산지역
반월면(半月面) ; 월곡면(月谷面) + 북방면(北方面) + 성곶면(聲串面) + 달성면(達城面)
                        → 1979.08.10 반월출장소 개설, 1986.01.01 안산시 승격
                        → 1994.12.26 수원시, 안산시, 군포시로 분할 편입

1931년 4월 1일 수원면을 읍으로 승격하고 1936년 10월 1일 일형면과 의왕면을 일왕면으로 통합하는 동시에 수원군내 고등 · 서둔 · 지소 · 동리 · 영화의 5개 리와 안용면의 평리 · 세리 등 2개리, 태장면의 지리 · 인계의 2개리를 수원읍에 편입되면서 1읍 19면이 되었다.

 
 
 

내고향 화성 & 수원 이야기

맨발나그네 2010. 5. 13. 07:13

화성의 역사 03 - 조선시대

 

                                                                                  ◆ 화성문화원 09-01 | VIEW : 828

 

조선이 건국되자 태조(太祖) 3년(1394)에 수도를 개경에서 한양으로 천도하면서 양광도(楊廣道)에 속해 있던 수원부 · 남양부를 경기도로 편입하였다. 태종(太宗) 13년(1413) 전국을 8도(道)로 나누고 지방제도를 개혁할 때 수원도호부 · 남양도호부로 각각 승격되었으며, 수원도호부 밑에 쌍부(雙阜) · 영신(永新) · 정송(貞松) · 용성(龍城) · 광덕(廣德) 등 5개 현을 두었다. 세조(世祖) 12년(1456)에는 수원에 판관(判官)의 도임지인 진(鎭)을 설치하여 경사(京師)를 지키는 4보(輔)의 하나로 삼았으나 중종(中宗) 21년(1526)에 이 마을에서 부모를 죽인 패륜아가 생기자 다시 수원군으로 강등되고 진(鎭)도 인천으로 옮겼다가 중종 30년(1535)에 복구되었으며 임진왜란 직후인 선조(宣祖) 35년(1602) 방어사(防禦使)를 겸하게 하여 국방상 요충지로 삼았다.

 

한편 남양(南陽)은 200여년간 변동없이 내려오다가 인조(仁祖) 22년(1644)에 역적 형(衡)이 태어난 마을이라는 이유로 현(縣)으로 강등되었으나 효종(孝宗) 4년(1655)에 다시 도호부로 복구되었고 수원은 현종(顯宗) 6년(1665)에 남양 고을에 노비가 상전을 죽인 일이 발생하여 현으로 강등되었지만 현종 15년(1674)에 다시 복구되었다.

 

숙종(肅宗) 13년(1687)에 수원 소재의 진을 고쳐 총융좌영장(摠戎左營將)을 겸하도록 하여 국방요새로 이 곳을 더욱 강화하였고 정조(正祖) 13년(1789)에는 사도세자의 능을 양주 배봉산에서 수원의 화산(花山, 화성시 태안읍 송산리)으로 옮기고 화산 일대에 있던 수원부(水原府) 읍치(邑治)를 현재의 수원시 팔달산으로 동쪽으로 이전하면서 광주부(廣州府) 소속의 일용(日用) · 송동(松洞) 2면을 편입하였으며 정조 16년(1792)에는 남양도호부를 이곳에 속하게 하였다. 이 때 정조는 수도를 수원부로 천도할 계획으로 이듬해인 1793년 1월 수원부를 화성(華城)으로 고치고 아울러 유수부(留守府)로 승격시키면서 유수 2인을 배치하여 1인은 경기관찰사가 겸하고 다른 1인은 전관유수(專管留守)로서 장용외사(壯勇外使) · 행궁정리사(行宮整理使)를 겸무하도록 하였으나 천도는 실패하였다.

 

그 뒤 갑오개혁 이듬해인 고종(高宗) 32년(1895)에 이르러 근대식 행정제도를 채택하여 전국의 지방관제를 23부(府)로 개정할 때 수원과 남양은 인천부(仁川府) 관할에 속하면서 각각 군으로 되었고 1896년 8월 4일 23부제를 폐지하고 13도(道)로 지방행정구역을 개편할 때 수원에 경기도관찰부(京畿道觀察府)를 둔 것을 계기로 수원은 경기도의 수부(首府)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하였다.

 

수원부는 군이 되는 동시에 팔탄(八灘) · 가질등(加叱等. 갓등) · 화방(禾方) · 수류(水流) · 마정(馬井) · 초장(楚長) · 사정(奢井) · 팔라(八羅) · 압장(鴨長) 등 9개 면을 남양군에 넘겨주고 대신 광주목(廣州牧)의 의곡(儀谷) · 왕륜(旺倫) · 등 2개 면과 양성군(陽城郡)의 승량(升良) · 감미(甘味) · 율북(栗北) · 소고니(所古尼) 등 4개면, 충청도 직산군(稷山郡)의 안외(安外) · 언북(堰北)의 2개면을 편입하여 38개면을 관할하였으며 남양부 역시 군이 됨과 동시에 앞의 수원군 9개 면과 인천부의 이포면(梨浦面)을 편입하여 19개 면을 관할하였다.

귀한 역사자료 잘 보고 갑니다.
구한말에 서해안으로 중국과 교역을
했던 기록이 있나요?
서신면(남양만)해안부두를 이용한 기록이
필요해서 문의해 봅니다.

 
 
 

내고향 화성 & 수원 이야기

맨발나그네 2010. 5. 13. 07:08

화성의 역사 02 - 고려시대

                                                                                                                           ◆ 화성문화원 09-01 | VIEW : 738

 

고려 태조(太祖)가 후백제를 정벌하기 위해 남진할 때 수성(水城) 사람이었던 김칠(金七/金柒), 최승규(崔承珪) 등 200여명이 귀순하여 고려 건국에 공로가 있었다 하여 태조 17년(934)에 수성군은 수주(水州)로 승격되고 당성진(唐城鎭)은 태조 23년(940)에 다시 당성군이 되었다.

 

그 뒤 성종(成宗) 14년(995) 지방관제를 개편할 때 수주의 별호를 한남(漢南) 또는 수성(隋城)이라 하고 도단련사(都團練使)를 두었다가 목종(穆宗) 8년(1005)에 혁파되었다. 또한 지방행정의 통제 · 지배를 확고히 하기 위해 지방제도를 정비한 현종(顯宗) 9년(1018)에는 다시 수주로 승격되어 지수주사(知水州事)를 둠과 동시에 안산(安山) · 용성(龍城) · 정송(貞松) · 쌍부(雙阜) · 진위(振威) · 양성(陽城) · 영신(永新) · 광덕(廣德) 등 8개 현(縣)을 영속시켰으며 당성군은 재양현(載陽縣)을 영속하여 수주의 속군(屬郡)이 되었다가 그 뒤 다시 인주(仁州, 지금의 인천)에 속하였으며 명종(明宗) 2년(1172)에 감무(監務)가 두어졌다.

 

그 후 원종(元宗) 12년(1271) 강화 앞바다의 손돌목(穿梁 천양)을 지키던 몽고병사들이 대부도(大阜島)에 들어와 약탈을 자행하므로 섬 주민들이 분노하여 몽고병 6명을 잡아 죽이고 난을 일으켰다. 이때 수주부사(水州富使) 안열(安悅)이 이를 평정하자 그 공으로 수주를 도호부(都護府)로 승격시킴과 동시에 수원(水原)으로 개칭되었다가 그 뒤 다시 수주목(水州牧)으로 승격되었다.

 

한편 충렬왕(忠烈王) 16년(1290)에 남양 출신 홍다구(洪茶丘)가 원(元)나라에서 정동행성승(征東行省丞)이란 벼슬을 하였다는 이유로 당성은 지익주사(知益州事)를 두는 고장으로 승격되었다가 뒤에 다시 강령도호부(江寧都護府)라 하였으며 충렬왕 34년(1308) 다시 익주목(益州牧)으로 승격되었다.

충선왕(忠宣王) 2년(1310) 모든 목(牧)을 혁파함에 따라 익주목은 남양부(南陽府)로 수주목(水州牧)은 수원부(水原府)로 강등되었다.

 

그 후 공민왕(恭愍王) 11년(1362) 홍건적(紅巾賊)이 침략하여 양광도민(楊廣道民)에게 항복을 권유하자 수원부민(水原府民)들이 제일 먼저 항복하여 적의 세력을 더욱 강성하게 한 일이 있었다. 이 일로 수원부는 수원군으로 강등되었으나 군민들이 당시 재상이었던 김용(金鏞)에게 뇌물을 주며 설득한 끝에 다시 수원부로 승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