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발나그네/남이 본 맨발나그네

맨발나그네 2012. 10. 9. 18:24

 

(수원문화원에서 발간하고 있는 계간지 '수원사랑' 2012년 가을호에 실린 글입니다)

 

 

 

 

 

 

 

 

 

 

 

70년대

수원의 밤문화

                                                                                                  유 윤 희

 

 1970년대의 우리나라는 역동적이라는 말이 가장 적합할 것이다. 세계경제의 높고 험한 격랑 속에서도 연평균 10%이상의 비약적인 경제성장을 이루며 경제, 정치, 사회, 문화의 모든 부분이 변혁을 겪던 시절이다. 6.25이후에 태어난 베이비 붐 세대들이 영 파워를 형성하던 그 70년대를 가로지르며 나의 대학생활과 군대생활이 있었으니, 그 시절의 젊음과 객기를 추억해 보고자 한다.

 

 

통제와 금지의 시대

 

 70년대는 경제는 발전하고 있었지만, 정치적으로는 매우 암울한 시대였다. 1971년 3선개헌을 필두로 그해 12월에는 국가비상사태가 선언되었으며, 1972년에는 유신헌법이 공포되었고 1975년에는 학도호국단 제도가 만들어져 대학은 병영화되었다. 반복되는 계엄령, 긴급조치, 위수령, 휴교령으로 젊은이들에게 70년대는 모든 것이 금지된 시대였다. 반복되는 휴교령으로 대학생활은 반토막이었고, 머리가 길다고 경찰들은 가위로 머리를 자르고 짧은 치마를 단속하겠다고 여성들의 허벅지에 자를 들이대던 시절이었다. 사람들이 모이면 ‘불온집회’요 춤추고 놀면 ‘퇴폐문화’로 단속을 받기도 했다. 그뿐아니라 밤10시가 되면 방송을 통해 ‘이제 밤이 깊었습니다. 청소년 여러분들은 어서 집으로 돌아갑시다’라는 경고성 멘트가 흘러나왔고, 밤12시가 되면 싸이렌이 울리고 야간통행금지가 시작되었으니 지금에 비하면 밤의 문화라야 초라할 수 밖에 없던 시절이다.

 

 

(1971년 6월 푸른지대에서의 행사<사진:수원시청>)

 

 

(1976년 7월 28일 원천유원지<사진:수원시청>)

 

 하지만 그 시절에도 젊은이들은 무언가 젊음을 불태울 돌파구가 필요했으니 봄철이 되면 지금의 서둔동에 위치한 푸른지대와 노송지대의 딸기밭에서 미팅을 하기도 했고, 광교신도시로 편입된 원천유원지에서 쌍쌍보트를 타며 즐거운 한때를 보내기도 하였다. 그 미팅에서 짝을 이루는데 성공을 하게 되면 당시 수원에 있었던 중앙극장, 로얄극장, 수원극장, 아카데미극장으로 영화관람을 가서는 슬쩍 손을 잡아보는 행운을 얻기도 하였다.

 하지만 영화는 계몽과 반공을 강조하는 ‘문예영화’가 대부분이었고, ‘별들의 고향’이나 ‘겨울여자’가 그나마 화제작이었으며, 외화도 검열단의 가위질에 내용연결이 안될 정도라고 했지만 문화에 굶주린 젊은이들은 그 정도에 만족하며 극장을 찾았다. 그래도 시간이 남으면 그 시절 DJ가 있는 음악다방인 중앙다방, 아카데미다방, 제일다방 등으로 자리를 옮겨 자욱한 담배연기 속에서 양희은, 김민기로 대표되는 음악을 신청하고는 시간가는 줄 모르고 자리를 지켰고, 조금 더 폼을 잡고 싶으면 남문 근처의 고전음악감상실이라는 곳을 찾기도 했다.

 

 

 

(1974년 10월 11일 아카데미극장, 신성일 주연의 '속 눈물의 웨딩드레스'가 상영중이다

<사진:수원시청>)

 

부어라 마셔라, 젊음을 마시다

 

 젊은이에게 술이 빠질 수 없다. 국가의 장래를 걱정해서도 마셔야 했고, 긴급조치위반으로 수배령이 내려진 학우의 안위를 걱정해서도 마셔야 했고, 친구의 입영이 슬퍼서도 마셔야 했으며, 쌍권총을 찬 학점 걱정에도 마셔야 했다. 맨 처음 발동이야 학교 앞 허름한 대폿집에서 시작되지만, 거나해지면 중동사거리 근처의 곱창전골집으로 자리를 옮겨 시대적 아젠다에 비분강개하며 조국의 미래를 논하고, 각자가 살아 갈 미래를 그리며 각종 유언비어를 안주삼아 마셔댔다. 주머니 사정이 빠듯한 우리들은 음식점주인에게 양해를 구하고 지금의 리젠시호텔 근처에 있던 양조장에서 막걸리를 양동이로 사다가 마셔야만 직성이 풀렸다. 70년대 초반 히트를 친 가수 이장희의 ‘한잔의 술’을 목청껏 외쳐대며 통음을 했다.

 하지만 그것가지고도 성이 차지 않으면 아주 가끔은 남문 뒷골목이나 구천동의 퇴폐(?)술집을 기웃거리기도 하였다. 누군가는 그곳에서 마음씨고운 누님 또래의 술집아가씨와 하룻밤 풋사랑을 나누기도 하였고, 누군가는 그 누님과 오랫동안 사랑을 나누기도 하였다. 그리고 술값으로 손목시계나 학생증을 맡기곤 다음에 그 손목시계나 학생증을 찾기 위해 고향집에 향토장학금의 증액을 요구하기가 다반사였다.

 70년대 수원의 밤에 막걸리집만 있었던 건 아니다. 어딘가에는 룸살롱이나 요릿집이 있어 어른들의 쾌락과 정경유착이 오고가는 밤문화가 있었겠지만 아직 20대를 보내던 나는 소문조차 들어 본 적이 없다. 70년대 어른들의 또다른 밤의 문화였던 카바레는 남문과 수원역 근처에 꽤 여러개가 있어서 그 곳을 지나던 우리에게 넌지시 손짓하기도 하였다. 차차차, 지루박, 트위스트, 탱고등의 사교댄스를 출 수 있는 곳이지만, ‘제비족’, ‘꽃뱀’, ‘독사 부인’이란 단어가 생각나며, 일부 퇴폐 카바레에서는 주부들 대신 웨이터가 장을 봐준다는 소문이 돌기도 하였다. 그래서인지 카바레에는 극히 일부의 젊은이를 제외하곤 그저 어른들의 놀이터로 치부하고 눈길을 주지 않았다.

 

 

(1972년 11월20일 10월 유신선거 홍보 플래카드가 걸린 시가지 모습<사진: 수원시청>)

 

 

젊은이들의 청량제, 고고춤

 

 그시절 대학생들에게 숨통을 틔어 일탈을 맛볼 수 있게 한 것이 있었으니 바로 대학축제이다. 축제에 빠지지 않는 것이 댄스파티였고 그중 ‘고고춤’이 단연 인기였다. 고고춤의 인기에 힘입어 스펜서 데이비스 그룹의 ‘Keep on Running', Steam의 ’Na Na Hey Hey Kis Him Goodbye', Rare Earth의 ‘Hey Big Brother', Bay City Rollers의 ’Saturday Night'등의 노래가 대히트를 쳤다. 대학생들 사이에 가끔은 다방을 빌려 ‘고고미팅’이 이루어지기도 하였고, ‘고고’의 인기는 전국에 ‘고고장’(나이트클럽) 열풍을 불게 하였다.

 수원도 예외는 아니어서 팔달산자락의 ‘오아시스’, 중동사거리 근처의 ‘디기디기’등의 나이트클럽이 있어 유신시대 젊은이들의 해방구 노릇을 하였다. 나이트클럽에서 고고춤에 열중하다보면 학교기숙사나 학교근처 숙소로 가는 시내버스 막차를 놓쳐 학교까지 걸어가야 했다. 통금시간이 임박해서 성빈센트옆 지동파출소를 거쳐 학교까지 걸어가는 길은 쉽지 않았다. 더군다나 장발인채로 파출소 앞을 지난다는 것은 호랑이 굴 앞을 지나는 것과 같았다. 가끔 통금시간을 넘겨 다닐 때는 경찰이나 방범대원을 피하느라 무진 애를 써야만 했다. 각고의 노력에도 붙잡일 경우에는 대학생신분증이 보증수표가 되어 훈방으로 풀려나기도 하고, 경찰서유치장 신세를 지는 사람도 있었다. 가끔은 술을 먹다 통행금지시간이 되는 바람에 술집 주모는 한쪽에서 졸고, 우리는 밤새 통음을 하며 국사(?)를 논하다 새벽4시 통금해제가 되어야만 돌아가기도 했다. 또 가끔은 밤새 술을 마시며 고고춤을 추는 젊은이들도 있었으니 이름하여 그들을 ‘고고족’이라고 하였고 그들은 ‘올나이트했다’며 밤새 춤춘 무용담을 입이 닳도록 자랑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고고장에서 춤을 추다가 통금에 걸린 걸 핑계삼아 ‘하룻밤 만리장성 쌓기’를 하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고 한다.

 

 

계속되는 수원의 밤

 

 그렇게 나의 20대의 밤은 흘러갔다. 밤의 문화라고 하면 욕망과 음악이 어우러져 향락과 퇴폐에 젖어 끈적이는 것을 상상하겠지만 70년대 젊은이들의 밤은 지금과 비교한다면 갑갑한 현실에서 잠깐 잠깐씩 탈출을 하게해준 해방구였다.

군부독재의 탄압, 단속, 규제, 감시가 판치던 70년대이건만 지나고 보니 그 시절도 추억이었고, 낭만이었다. 이제 나의 아들 딸들이 그 20대의 젊은이가 되어 수원의 또 다른 밤의 문화를 찾아 헤매며 젊음을 맘껏 누릴 것이다. 그리고 먼 훗날의 추억으로 간직할 것이다. 그들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

 

 

 원문보러가기 ☞ 수원문화원 http://www.suwonsarang.com

 

 

   ( 답글 )


  • 할로윈

    옛날 생각이 굴뚝처럼 나네요. 누구나 그랬던 것처럼 ..
    이제는 두어깨에 무거운 가장의 멍애를 메고 허우적 거리는 오륙십대가 되었네요.
    그립군요. 그 고고자이..그리고 탁배기 기울이던 선술집도..
    2013.01.05 16:50

  • 재순이

    끝모를 터널같은 어두운 시절 우리는 춤을 추었지요. 그냥 흔드는 춤을..그리고 밤새워 통음하며 아침이슬을 불렀지요..그러나 지금 지나고 보면 우리의 젊음을 그렇게 낭비하는게 아니었어요. 삶의 목표를 가지고 매진했너라면 지금쯤 시대를 이끄는 주역이 되었을텐데... 젊은이들이여 야망을 가져라..그리고 그야망을 가구고 키우는데 최선을 다하라.. 2013.01.05 22:00

  • 촌놈

    샹하이 트위스트..이걸 야외전축에 틀어놓고 땀을 뻘벌 흘리며 춤을 추던 시절이 어제 같기만한데..벌써 한갑이 지났네요. ㅎㅎㅎ. 세상은 참 무상?하네요. 되돌아볼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2013.01.06 09:21

  • 후리지아

    몰래 언니들 옷 빌려입고 드나들던 고고장..생각이 납니다. 그리운 그날들..다시오지않을 나의 화려한 날들.. 2013.01.07 06:16

  • 미선이

    통행금지가 얼마나 우리를 괴롭게 했던가..그리운 옛날이여.. 춤을추고 노래하고 술을 마셔보아도..언제나 우리 마음속에는 울분투성이였는데...이제는 어느새 아이놈이 자라서 그때처럼 되어있으니..세월은 가고 오는것..
    그날을 그리워하면서 나그네님의 글을 읽고 갑니다.
    2013.01.07 20:36

  • 싸이

    술마시고 돼지 멱따는 소리하며 뒤골목 돌아다니는것이 문화? 아니죠. 그런건 현실도피...약한자들의 눈속임이지요. 세월이 지난후에는 두갈래길에서 우리가 서있었다는걸 알게 되지요. 때는 너무 늦은거지만...문화는 적어도 대다수의 공감대가 생겨야지 문화라고 볼수가 잇겠지요. 2013.01.08 20:59

  • 달빛토끼

    술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추는 곳이 밤문화라면 좀 서글프네요. 군밤을 팔고 군고구마를 팔고 호두빵을 팔고..심문을 돌리고시날을 닦고..우리의 일상이 문화가 되어야지 돼먹지 못한 퇴폐가 밤문화...좀 아닌것 같으네요. 좋은글 즐감하고 갑니다. 2013.01.10 06:21

  • 러브리숙

    밤에 일어나는 일은 밤문화..낮에 일어나는 일은 낮문화...하기야 어두컴컴한 뒷골목 이야기가 더 정겹지요. 2013.01.11 20:53

 
 
 

맨발나그네/남이 본 맨발나그네

맨발나그네 2011. 5. 17. 14:01

 

[화제 모임] 맨발산악회
“맨발로 산 오르면 몸과 마음이 건강해져요!”

봄기운이 완연한 4월 첫 주말, 파주 심학산 아래 한 무리의 사람들이 모여 있다. 배낭을 멘 차림세로 보아 산악회 회원들이 분명했다. 그런데 사실 심학산은 산악회의 산행지로 삼기에는 규모가 작은 곳이다. 해발 높이가 192m에 불과한 나지막한 산이다. 그러나 이들에게 심학산은 서울 근교에서 찾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인기 산행지다. 코스가 부드러워 맨발로 오르기 좋기 때문이다.

심학산 주차장에 모인 이들은 인터넷 카페 ‘푸른나무 맨발산악회’ 회원들이다. 지난해 9월 개설된 이 인터넷 카페의 회원은 500명 정도. 날이 지날수록 점점 회원 수가 늘고 있다. 맨발 걷기에 대한 관심이 그만큼 높아지고 있다는 반증이다.

이 카페를 개설한 남요현(닉네임 곰발바닥)씨는 허리와 무릎이 좋지 않아 맨발 산행을 시작한 케이스다. 평소에 알고 지내던 지인(현 서울지역대장 아드반님)의 권유가 계기가 됐다. 그는 맨발 산행을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일상생활은 물론 운동까지 자유롭게 즐길 수 있을 정도로 건강이 호전됐다. 그는 기적 같은 맨발 산행 효과를 공유하기 위해 카페를 만들게 됐다.

“맨발 산행은 신발을 벗고 걷는 것이 전부인 일상적이고 자연스러운 행위입니다. 하지만 시작이 쉽지 않다는 점이 문제입니다. 다른 사람의 시선 때문에 혼자하기에는 부담되고 쑥스럽습니다. 하지만 여럿이 같이 하면 그런 문제를 극복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모이게 된 것도 그 이유가 가장 큽니다.”

맨발 걷기의 또 다른 장벽은 부상에 대한 공포다. 포장도로와 달리 산길은 적지 않은 변수가 상존한다. 돌출된 돌부리나 나무뿌리는 물론, 날카로운 이물질로 인해 부상을 입을 염려가 있다. 하지만 맨발산악회 회원들은 그런 우려는 기우에 불과하다고 입을 모은다.

“맨발이기 때문에 조심하기도 하지만 발바닥이 다치는 경우는 거의 없어요.  저희들끼리 ‘콩’이라고 부르는 작은 돌멩이를 밟으면 상당히 아프지만 부상으로 이어지지는 않습니다. 뾰족한 돌이나 나무 조각도 별로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인간의 발바닥이 지닌 방어력은 정말 대단합니다.”

등산로 입구에서 간단한 체조로 몸을 푼 회원들은 신발을 벗어 배낭에 매달고 산길을 걷기 시작했다. 숲 속으로 이어진 흙길은 부드럽고 널찍했다. 이곳을 산행지로 고른 것은 맨발로 걷기에 적합한 환경 때문이다. 산이 나지막해 2시간 정도면 산행을 마칠 수 있는 것도 이곳을 선택한 이유 가운데 하나다.

“심학산이 벌써 세 번째네요. 모두가 만족할 수 있는 코스를 찾는 것이 쉽지 않아요. 간 곳을 또 찾는 경우가 많습니다. 서울에서는 청계산, 우면산, 도봉산, 북한산, 안산 등을 주로 갔고요, 가끔은 지방의 좋은 곳도 방문하고 있습니다.”


 
▲ 1 “우리들의 발을 보여 드릴게요!” 푸른나무 맨발산악회 회원들이 심학산에서 기념촬영을 했다. 2 배낭에 신발을 매달고 걷는 맨발산악회 회원. 3 등산로 입구에서 회원들이 산행을 위해 신발을 벗고 있다.
맨발 산행은 운동효과가 1.5배 이상

이들은 맨발로 걷기에 좋은 산으로 대전 계족산의 황톳길을 추천했다. 특히 초보자나 어린 아이가 있는 가족에게 최고라는 설명이다. 맨발로 걷는 일은 생각 외로 힘들다. 신발을 신고 걷는 것의 1.5배가 넘는 운동효과가 있을 정도로 체력 소모가 심하다. 그래서 동호회 산행은 보통 2시간을 조금 넘는 선에서 마무리한다. 이날도 심학산 정상을 넘어 능선을 타고 간 뒤 약천사로 돌아내려오는 코스를 밟았다.

“맨발로 산길을 가다보면 조심스러워서 천천히 걸을 수밖에 없어요. 일반 산악회는 누가 빨리 가는지가 이슈지만, 우리는 속도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정복이 아닌 자연과의 친화가 목적입니다. 회원들끼리 서로 배려하며 뒤에 처진 사람들을 기다렸다가 같이 갑니다. 젊은 여자 분들이 많은 것은 산행에 부담이 없고 분위기가 좋기 때문일 겁니다.”
건강 관련 모임이라 중년  이상의 나이든 사람들이 주축을 이룰 것이라는 통념과 달리 이 산악회는 30대 초중반의 회원이 모임을 이끌고 있다. 비슷한 연령대의 회원이 산행 참가자들의 3분의 2가 넘는다. 매주 빠지지 않는 젊은 여성 회원들도 있다. 한마디로 골수팬이 많은 모임이다.

한겨울 눈이 쌓였을 때는 제외하면 매주 정기산행을 한다. 보통 10~15명이 산행에 참가하는데, 많을 때는 20명이 넘는 회원들이 맨발로 산길을 걷는다. 한번 이상 산행에 참가한 회원들 수가 70명을 넘는다. 이들이 그룹을 지어 산행할 때 주변에서 “놀랍거나 걱정스러움”보다는, “맨발이 건강에 좋으니 나도 해보면 좋겠다”는 부러움 섞인 반응이 많다.

“여자 분들이 참여도가 높은 것은 아마 맨발의 효과를 확실하게 느끼기 때문일 겁니다. 변비나 손발이 차가운 증상은 곧바로 개선되는 것을 느낄 수 있어요. 맨발로 걷고 나면 저녁 때 몸이 후끈한 열감이 느껴지는데, 이는 피의 순환이 잘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효과를 경험한 여자 분들은 저절로 맨발 걷기 마니아가 됩니다.”


 
▲ 1 맨발산악회 회원들은 돌길, 흙길, 계단을 가리지 않고 걷는다. 2 회원 한 사람이 심학산 산행을 마치고 샘터에서 발을 닦고 있다. 3 젊은 여성 회원들이 맨발로 산길을 걷고 있다.
 
맨발산악회 회원 가운데는 산을 전혀 다녀보지 않은 이들도 있다. 하지만 서로 배려하고 모두 함께하는 분위기라 산행을 힘겨워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맨발 산행의 고수 역시 카페의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심학산 산행에 참가한 ‘맨발나그네’는 맨발로 전국의 산을 오르고 있는 특이한 경력의 소유자다.


“산에 다닌 지는 오래됐는데, 맨발 산행을 시작한 것은 3년 전부터입니다. 지금까지 맨발로 걸은 누적거리가 800km를 넘어요. 악천후와 겨울철만 빼놓고 거의 맨발로 산행하는데 1년에 300km 정도 걷고 있습니다. 건강 때문에 걱정해 본 적이 없어서 몸이 좋아지는지는 잘 모르겠네요. 하지만 마음의 고통을 이겨 내는 데는 확실히 효과가 있었습니다. 어느 정도 거리를 넘어서면 도를 닦는 듯한 마음으로 무념무상의 상태가 됩니다. 많을 때는 20km 이상을 걷는데, 거리가 멀수록 점점 발이 아파옵니다. 처음에는 통증이 1주일이나 갔지만, 지금은 적응이 되서 그런지 신발만 신으면 괜찮아요.”

푸른나무 맨발산악회는 맨발 산행의 긍정적 효과를 많은 사람과 공유하기 위해 만든 모임이다. 하지만 무작정 조직이 커지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이상적인 것은 맨발 걷기의 유용함을 아는 작은 모임이 늘어나는 것이다. 맨발 산행이 보편화되면 우리 사회의 평균 건강 수준이 높아질 것은 자명한 일이다. 인터넷 동호회지만 이들이 추구하는 목표는 이처럼 크고 높다. 보다 많은 이들이 맨발로 산을 오르는 그날까지 이들의 활동은 쉬지 않게 계속될 것이다.

< 월간 산 2011년 5월호 >

 

 

 

 

 

 
 
 

맨발나그네/남이 본 맨발나그네

맨발나그네 2011. 2. 16. 00:08

이글은 화성예총의 <화성예술 2010 제2호>에 실린 글입니다)

 

 

 

 

 

 

<화성의 숨결따라 화성 사랑하기>

                     맨발 나그네의 홀로 걷는 산행기

 

● 산 행 지 : 서봉지맥 화성시 구간

● 산행일시 : 2010년 5월 16일 (日)

● 산행코스 : 봉담읍 협성대- 태봉산(225m)~서봉산(241m)~동오리고개~천석산~양석골~주산봉(108m)~양감면 요당1리 (약9시간)

 

 

 

백두대간과 닿아있는 서봉지맥

 

  조선 초기의 문장가인 김일손은 '두류산 기행' 에서 “선비로 태어나서 덩굴에 달린 박이나 외처럼 한 곳에만 매어 사는 것은 운명이다. 천하를 두루 구경하여 견문을 넓히지 못할 바에는 자기 고장 산천이라도 두루 탐방해야 하겠지만, 사람의 일이란 매사가 어긋나기를 잘해서 항상 뜻을 두고도 이루지 못하는 경우가 십중팔구는 된다. “ 라고 말한다.

  비록 선비는 아니지만 화성시에 고향을 둔 터라 행정구역에 속한 산 중에 가장 높은 건달산과 만의사를 품고 있는 동탄의 무봉산, 봉담과 비봉에 걸쳐있는 삼봉산과 태행산을 맨발나그네가 되어 걸은 후 이번에 서봉지맥 화성시 구간을 걸어보기로 하였다.

  백두산에서 시작하여 한반도의 중심뼈대를 이룬 백두대간이 남으로 속리산에서 발원한 한남금북정맥이 경기도 산하를 휘젓게 되는데 안성의 칠현산에서 한남정맥과 금북정맥으로 갈라진다. 한남정맥은 다시 용인의 부아산과 수원의 광교산을 거치고, 김포평야를 거쳐 서해로 내려 앉는다. 이 정맥이 군포의 오봉산에서 수리산으로 치솟기 전 안양베네스트CC 근처에서 분맥하여 서봉지맥을 이루는데 내 고향 화성시의 산하를 휘젓고는 평택의 계두봉을 거쳐 아산만으로 숨어드는 것이다. 그러므로 화성시의 거의 모든 산들은 이 서봉지맥을 모태로 하고 있으며 백두대간과 닿아 있는 것이다.

  어머니의 품과 같은 서봉지맥을 걸어 보는 것은 뜻 깊은 일이 아닐 수 없는 일임에는 분명하나 이 서봉지맥은 대략 60 여km에 이르기 때문에 한 번에 전체구간을 종주하기엔 불가능하므로 3~4구간에 나누어 종주하는 계획을 세우는 것이 좋을 듯 싶다.

 

 40여년간 꿈꾸고 짝사랑하던 여인~서봉지맥

난 남들에게 종교는 광교이고, 나의 조강지처는 광교산이라 말한다. 그리고 나머지 모든 산들을 나의 애인으로 비유하기를 좋아한다. 하긴 내가 하는 일은 산을 오르는 게 아니고 그녀(山)들이 내준 품에, 그녀들이 허락한 시간동안, 그녀의 깊은 가슴선을 따라 그저 잠깐 안겼다 오는 일이다. 그래서 그녀들을 만나기 전부터 기대가 크다. 그러니 난 그녀(山)들을 만나기 100m전이 아니라 만나기 3~4일전이 되면 홍역을 앓는 것처럼 들뜨고 행복에 젖는다.

이번 주는 어떤 여인의 품에 안기지? 이번 주에 만나는 여인은 어떤 여인일까? 그녀는 키가 클까?(높이는?) 아님 몸집이 좋을까?(산행 길이는?)미모는 어떨까?(꽃, 계곡, 낙엽, 눈꽃은 아름다울까?) 성격은 내 취향일까?(바위산일까 육산일까?) 등등... 그래서 그녀들을 만나기 전 이런 저런 자료를 찾고, 그녀들에 대한 상상을 하며 즐거운 며칠을 보내게 된다. "원래 '함께 산책하다(Walk out together)'라는 영어 표현은 '교제하다'라는 뜻을 가졌는데 이때 '산책'은 구애행위였다는 점이다." 라고 미국의 문화 비평가이자 환경운동가인 레베카 솔닛은 그의 저서 <걷기의 역사>에서 말하고 있다.

  물론 레베카 솔닛이 말한 '함께 산책하다'에서 함께한 것은 그녀(山)가 아니라, 함께 걸은 또다른 사람을 일컫는 것이겠지만, 그 대상이 산이라 한들 어떠한가? 더군다나 이번 주 데이트는 40여년간 꿈꾸어 왔던 여인의 품에 안기는 일이다. 무슨 소리이냐 하면, 내가 수원에 삶의 터전을 잡은 것이 화성시에서 중.고등학교를 마치고 대학에 입학하면서 부터이니 벌써 40여년이 되었는데, 그동안 고향집을 오가느라 43번 국도를 지날적마다 보이는 산줄기를 한번 걸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계속 해왔던 것이다.

  서봉지맥 화성시 구간 중 서봉산과 서봉산~동오리고개 구간은 몇 번 걸은 적이 있으니 손도 잡아보고 뽀뽀도 해 본 사이로 볼 수 있겠다. 그러나 서봉지맥 화성시구간은 내가 그동안 꿈꾸고 짝사랑하던 여인의 품이니 그녀와의 운우지정을 위해 위성지도를 찾아보고, 선답자들의 산행기를 찾아 읽는 등 단단히 준비를 하였으니 제대로 된 오르가즘을 느껴보련다. 오늘의 들머리는 봉담읍에 위치한 협성대학으로 한다. 원래 서봉지맥의 화성시 구간은 오목천 삼거리부터 시작하여야 하나 이 구간은 원래 많이 변해있고, 도로를 많이 걸어야 한다고 하니 생략한다.

  협성대학 캠퍼스를 가로질러 가장 꼭대기에 위치한 생활관 앞에서 오늘도 맨발이 된다. 그리고 봄내음이 물씬 풍기는 고즈넉한 산길을 걷는다. 산책로도 뚜렷하고, 여기저기 운동기구들도 설치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찾는 사람이 꽤 되는 것 같은데 오늘은 이른 시간이어서 인지 한산하다. 그렇게 한참을 걷다보면 문화재 발굴로 도로공사가 중단된 고개마루를 만나고, 우측 절개면을 따라 오른다. 가파른 오름길을 숨을 내쉬며 오르니 정상 0.3km 이정표가 맨발나그네를 맞는다. 주위 조망이 시원스럽게 펼쳐져 서남쪽으론 화성시 최고봉 건달산이, 서북쪽으로 지난주 함께한 삼봉산이 위용을 뽐낸다. 그곳에서 잠시 머문 후 태봉산 정상을 향한다. 손바닥보다 조금 큰 '태봉산'이란 표지판이 나무등걸에 걸려 있다. 이마저도 없었다면 그냥 지나쳐도 모를 보잘 것 없는 산봉우리이지만 명색이 화성시에서는 열손가락 안에 드는 산이다. 그곳에서 한참을 쉰후 길을 나선다.

 

 

 

  다음 목적지인 상방산을 향해 걷다 길을 잘못 들었다. 한참을 가다보니 정남면 관항리이다. 이런 낭패가.... 충분한 준비를 하였다고 큰소리 뻥뻥 친 자신이 우습게 되었다. 꽃잠자리인 그녀(서봉지맥)가 날 얼마나 우습게 보았겠는가. 준비가 부족하여 점직하긴 하지만, 다음번 그녀의 품에 안길 때는 더 애만지게 안길 것을 약속하는 도리 밖에 없다. 되돌아 가기도 그렇고 하여 관항리-오일리를 거쳐 정남면 백리에 도착하였으니 족히 30~40여분은 알바(산길 헤멤)를 한 셈이다.

 

 

 

서봉산 쉰길바위의 전설에 가던 걸음 멈추고...

  백리의 보호수인 200여년 된 느티나무 밑에서 한참을 쉰 후 다음 목적지인 서봉산을 향한다. 백리에서 마하 제3고가교(경부고속철도)로 나아가 서봉지맥에 접근하여야 하나 그냥 지나쳐 계곡을 따라 한참을 오르다 이정표를 만나고 나서야 제 길로 찾아들 수 있었다. 인공구조물이 그리 달갑지 않은 입장에서 이정표 만큼은 예산에 더 반영해도 좋겠다란 생각으로 전환이 되는 시점이다. 많은 사람들이 찾는 산일 수록 이정표를 꼼꼼하게 정비해 놓는 것이 바람직해 보인다. 힘들고 어렵게 도착한 서봉산(棲鳳山)은 이 서봉지맥 마루금의 대표적인 산으로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옛부터 봉황이 깃드는 산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비록 241m 밖에 안되는 낮은 산이지만 정상에서의 조망도 훌륭하거니와 팔각정에 앉아 세상사 시름을 잊기에도 좋다. 고스락에 위치한 쉰길바위 전설 안내판에 적힌 스님과 낭자의 지극한 사랑이야기가 사람들의 발길을 잠시 붙들어 둔다. 지고지순한 사랑이 이루어지지 못해 더 애틋하고 우릿하여 후대에 까지 전설로 남겨지었으리라. 전설이 있어 서봉산이 더 사랑옵다. 나도 다은햇살을 받으며 쉰길바위의 사랑이야기에 취해 잠시 머문 뒤 다시 길을 나선다.

 

 

 

  서봉산을 떠나 완만한 마루금을 걷다보면 동오리 고개를 만난다. 이곳도 몇번에 걸쳐 정감을 주고 받은 사이이다. 그런데 그 사이 이정표가 많이 늘어나 오가는 나그네들의 고민을 덜게 만든 것은 정말 잘한 일이다. 하긴 산길을 걷다 이정표를 만나면, 누군가가 그녀들의 성감대 표시를 해놓은 것 같아 기쁘기 그지 없는 속물이 되곤한다. 아니 그 이정표들이 꽃잠자리를 환영하는 연희같아 얼굴이 붉게 물든다.

  동오리 고개의 고개마루란 음식점에 들러 곰탕 한그릇으로 점심을 해결한다. 그리고 또 길을 떠난다. 주유소 옆으로 난 철계단을 오른후 앞으로 나아간다. 이곳도 작년 5월 서봉산-유봉산-초록산을 이어 걸을 때는 등산로가 정리되어 있지 않았는데, 아마 향남 택지 지구에 사람들이 입주하여 많은 사람들이 찾아서 인지 산책길로 잘 정돈되어 있다.

 

 

 

고독한 산길에서 만나는 한 줄기 바람과 친구가 되어

  작년에 그냥 지나친 천석산에는 '천석산의 유래'를 적은 안내판이 새로이 설치되어 있다. 그리고 이정표도 서너군데 생겨 훨씬 편한 나그네길이 되었다. 별로 돌이 없는 이 육산에 제법 큰 돌 하나 놓여 있으니 이야기 거리가 없을리 없다.

  그렇다. 현대는 스토리텔링의 시대이다.

  화성시의 산들은 높아봐야 삼백 몇십미터이고 모두 올망졸망 비금비금하다. 이 산들을 찾고 싶게 만들고 걷고 싶게 만들기 위해서는 많은 이야기거리를 찾아내야 한다. 아시다시피 이 서봉지맥 화성시 구간을 따라 걸으며 양 옆으로 만나는 여러곳에도 역사와 전설과 명승이 있다.

  마을이름 마다에도 전설이 깃들여 있고, 삼천병마골, 마하리 백제고분군등 스토리텔링을 하면 정말 명승지가 될 소지가 많은 곳이 널려있다. 이들의 이야기를 찾아내고 널리 알리는 것이야 말로 화성시가 해야 할 일이다. 화성시는 '살인의 추억'으로만 기억되어서는 안될 소중한 우리의 고향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천석산에서 머문후 고요한 산속 명지바람이 얼굴을 간지럽히는 얄푸른 소로길을 맨발나그네되어 홀로 걷는다. 산길 조차 육산이어서 발에 닿는 촉감이 아주 좋다. 높낮이가 심하지 않아 힘들지 않게 걷는다.

  바람은 명지바람이건만, 바람타고 닥아온 고독이 가슴속에 잠시 머물다 떠난다. 고독의 옆자리에 외로움이란 놈도 함께 머물다 바람결과 함께 떠난다. 애절한 그리움이 밀려와 텅빈 가슴을 휘저어 놓고 떠난다. 이름 모를 새한마리 내 곁에 다가와 위로하고는 그마져도 떠난다. 때 묻고 지쳐 무거운 마음 헹구러 왔는데 마음속은 더 헝크러져 있다. 이래서 아마도 인간은 길을 가면서 동반자가 있기를 소망하나 보다. 인생길이 되었건 산길, 들길이 되었건 마음에 드는 사람과 같이 걸을 수 있다면 그 또한 행복이리라. 길이 평탄하고 좋으니 별 생각을 다한다. 그냥 즐기면 될 것을....

 

상처만 가득한 그리운 고향 땅

  그렇게 걷다보니 양석골(화리현1리)에 도착하고, 그곳 43번 지방도를 따라 조금 걷다가 누에박물관(뽕나무골)의 좌측으로 해서 오른다. 이곳부터는 나의 나와바리(?)라고 해도 좋을 고향땅 양감면으로의 진입이다. 그런데 댕이고개(대양리고개)에 올라 내려다 본 내고향 양감 땅은 찢어지고, 헐뜯겨져 형체를 알아 볼 수 없을 정도로 황폐해져 가고 있었다. 그나마 그곳에서 멀리 내가 다녔던 양감초등학교의 뒷산인 초록산을 볼 수 있어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지금까지도 이리 저리 헤메느라 목표 시간이 많이 지났는데 댕이고개~주산봉 구간은 첩첩산중이다. 산이 높고 골이 깊어 첩첩산중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걸은 길이 아니라서 우선 길이 확실하지 않다. 그리고 밤송이에 발이 찔려 발걸음을 더디게 한다.

  길은 선답자의 산행기와 그들이 매어 놓은 리본으로 간신히 찾아 걷는다지만, 밤송이는 도대체 해결할 방법이 없다. 배낭속의 운동화를 꺼내 신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사실 오기를 부릴 일이 따로 있건만 오기인지 신념인지 맨발로 계속 나아간다. 내발만 아픈 것이 아니라 내 고향 양감 땅도 많이 아프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여기저기 파헤쳐져 이제 마루금이란 말이 어색할 정도이다. 그런 절개지를 몇 곳을 지나야 하는지 모른다. 그렇게 내고향 마을 요당리의 주산인 주산봉에 도착한다.

  어렷을 적에 땔감을 구한다고 올랐고, 이른 봄에는 칡뿌리를 캔다고 쏘다녔고, 누이가 없는 우리집에서는 가끔 산나물을 뜯으러 오르던 그런 추억 어린 산이다. 정월 대보름날이면 불놀이를 위해 오른던 산이기도 하다. 다른 마을보다 더 큰 불꽃을 이루기 위해 추운 줄 모르고, 기를 쓰며 나무를 짤라 불꽃놀이를 즐겼던 그런 산이다. 해어스름에 주산봉 통나무 의자에 앉아 한참을 유년시절로 돌아가 그 시절을 음미하니 입가에 웃음이 절로 난다.

 

서봉지맥의 정기 받아 수 많은 박사를 배출한 박사촌

  주산봉에서 마을을 향해 조금 내려오다가 400여년전 이 마을로 낙향하여 마을을 이룬 전주 유(柳)씨의 9세손이자 나의 13대조 유(柳) 영(永)자 하(賀)자 할아버지의 묘소가 자리잡고 있는 곳이니 그냥 지나칠 수 없다. 이 서봉지맥은 내 고향 요댕이의 400여년된 은행나무를 통과해 마을 가운데를 지나 덕지산을 향해 마루금을 형성한다. 그래서 은행나무에 떨어진 빗방울의 운명은 대체로 세가지 중의 하나이다. 은행나무의 양식이 되면 그보다 더 행복할 수가 없을 것이요, 그 빗방울이 요댕이의 웃말 쪽으로 흐르면 조암만으로 흐르는 물줄기를 이룰 것이고, 그 빗방울이 아랫말로 흐르면 아산만으로 흘러드는 물줄기의 운명을 갖게 될 것이니 조금은 특이한 마을 구조이다.

 

 

   마을의 주산을 주산봉으로, 앞산을 덕지산으로 둔 서봉지맥의 기를 받아서 인지 2008년 5월 18일 MBC <일요일 일요일 밤에>의 '고수가 왔다'라는 프로에는 40여가구에 현존하는 박사가 15명이나 되는 명당으로 소개된 바도 있다.

  그 은행나무 밑을 지나 고향집에 잠깐 들려 발을 씻고 신발을 찾아 신은 후 아버지 어머니께 인사를 드리고 버스를 타기 위해 면소재지가 있는 생이(신왕리)를 향해 발걸음을 옮긴다. 정말 힘든 길이었다. 약 20여km에 이르는 서봉지맥 화성시구간을 9시간에 걸쳐 맨발을 찔러대는 밤송이와, 가슴을 후벼대는 고독과 싸우며 걸은 길이었다.

  40여 년간 꿈꾸어 왔던 꽃잠자리이기에 달콤할 줄 알았는데 오랜만에 찾아 왔다고 그녀(서봉지맥 화성구간)가 토라져도 단단히 토라져 나를 애태운 그런 날이다. 하지만 마음만은 즐겁고 행복하다. 다산 정약용 선생은 "걷는 것은 청복(淸福)"이라 했으니 곧 맑은 즐거움이라는 말씀일게다.

 

  누군가가 그랬다지 "걷기야 말로 가장 가난한 방법으로 부유한 천국을 맛볼 수 있는 것"이라고....

 

(이글에 쓰인 순우리말) 

 

꽃잠 : 신랑 신부의 첫날 밤

점직하다 : 약간 부끄럽고 미안한 느낌이 있다

애만지다 : 소중히 여겨 어루만지다

 우릿하다 : 진한 감동을 느끼다

사랑옵다 : 마음에 꼭 들도록 귀엽다

다은 : 따사롭고 은은한

비금비금하다 : 견주어 보아서 서로 비슷하다

명지바람 : 보드랍고 화창한 바람

얄푸르다 : 옅게 푸르다

 

 

 

( 댓 글)

두리두리 12.10.11. 12:45
맨발나그네님의 홀로 걷는 산행기 잘 읽었습니다.
저도 뒤따라 걷고 있는듯한 착각을 일으키게 하는 글에 흠뻑 빠져 읽었습니다.
순우리말에 대한 풀이 고맙습니다.사랑옵다...자주 쓰고 싶어지는 예쁜 말이네요.
건강하시고 늘 행복하시길 기원합니다.
 
옥구슬 12.10.12. 01:33
와우!!!!!!!!!!
 
하얀소금 12.10.12. 13:27
*백두대간과 닿아있는 서봉지맥

백두산에서 시작하여 한반도의 중심뼈대를 이룸:
이 말의 설명으로 백두대간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대답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단어적인 정의만 생각하였는데, 실제로 우리나라의 모든 산맥의 큰 줄기가 거쳐가면서 한 맥을 이루네요.

큰 산들의 지명만 알고 있는 문외한에게 군데군데 위치한 작은 산들의 이름도 알게 되었습니다.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누군가와 대화를 하게 되면 이해의 속도가 빨라지는 데 도움이 되니까요.
[화성: 건달산, 동탄:무봉산, 봉담과 비봉:삼봉산과 태행산, 용인: 부아산, 수원: 광교산]
기타 지리적 맥락에 대한 설명 감사합니다.
 
하얀소금 12.10.12. 13:27
* 40여년간 꿈꾸고 짝사랑하던 ~서봉지맥

어릴 때부터 터전이 된 화성 고향에 위치한 산에 대한 동경심이 대단하였네요.
그곳에 이르고 싶다는 끝없는 갈망과 갈증을 오랫동안 품고 살아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마침내 이루게 되는 설레임
 
하얀소금 12.10.12. 13:28
* 서봉산 쉰길 바위의 전설에 가던 길 멈추고

서봉산 지명풀이.
스님과 낭자의 사랑이야기
산에 이르면 항상 이런 지명과 사랑에 대한 전설이 이야기이 중심이 되는데,
역시나 하나씩은 가지고 있네요.
고운 우리말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잘 배웠습니다.
 
하얀소금 12.10.12. 13:29
* 고독한 산 길에서 만나는 한 줄기 바람과 친구되어

그 생긴대로 이름을 지었으니,그 곳에서 유래된 역사와 전설이 함께 숨쉬는
한글로 작명된 동네이름에 호감이 생깁니다.
등산하면서 잠시 마음을 정화하는 시간이 참 소중하네요.
삶이란 그런 저런이겠지만
외롭다, 새가 친구가 된다, 바람이 스친다 하는 순간에
맑고 깨끗한 자연의 일부로 인간이 살아가는 것을 알게 하니까요.
 
하얀소금 12.10.12. 13:31
*상처만 가득한 그리운 고향 땅

고향 情을 담고 생각해보면 유년시절이 모두 살아나고,
그 곳에서 자리 잡은 나무는 제자리에 머물고 있지만
맨발나그네님은 고향을 찾아가 그들을 다시 만나고 오셨네요.
세월이 묻어나는 것들 속에서 크는 것은
꿈과 언젠가 고향에 돌아가리라는 생각이 분명 메아리치고 있을 것 같아요.

맨발 나그네님을 똑같이 기다리고 있었다고 말해주려고 그자리에...
 
하얀소금 12.10.12. 13:58
* 서봉 지맥의 정기 받아 수많은 박사를 배출한 박사촌

이 소식을 전할 때 저도 다행히 TV를 보고 있어서 그 때에 전해들은 내용을 기억합니다.
박사가 지맥의 영향으로 배출되었다고 명당자리라고 들었습니다.
柳씨 일가에서 박사가 많이 배출된 것이었네요.
산이 맨발나그네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맨발나그네님은 항상 더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돌려주려고 하네요.
자연인으로 걸어가는 인생길에 더 다가가고 싶어하시는 뜻 깊은 의미를 저는 대강 요약하며 읽었습니다.
소개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하얀소금 12.10.12. 13:33
비밀댓글 손의 힘이 더 세었다면 문학가가 되었을 텐데, 아마 발의 힘이 더 센가 봅니다.

등산 다니는 곳에 대한 기록을 적고 계시는 일상에 대해서 작문을 매끄럽게 잘하셔서 한 말씀 덧붙입니다.
(물론 글이 좋다는 뜻입니다.)
등산 한 번의 기회에 자연의 마음을 담기하는 노력에 감탄도 하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