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제철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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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문학기행에서 만난 공정식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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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관 탐방

2021. 6. 27.

1.마산문학기행에서  만난 공정식 시인

 

 이글은 마산문학기행을 마치고라는 제목의 문학기행 중에 말미에 담긴 내용이다.  2014년에 글을 재수록하여 공정식 시인께서 2021년 6월에 세상을 떠나셨다는 비보를 듣고 그분을 기리기 위한 추모의 글로 대신하고자 한다. 

 

마지막으로 정병산 깊은 자락에 농장 운영을 하시며「아리랑 움막」안에 낙월전시관과 집필실로 쓰고 있는 공정식 시인의 초대로 찾게 되었다. 번잡한 도심을 잠시 떠나 산새소리, 이름 모를 들꽃들에 묻혀 사셨다. 점심식사 대접을 하신다면서 고기를 삶아 안주삼아 술 한 잔을 내놓으셨다. 일행은 안으로 들어가 방이 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곳에 출구가 있는 그 곳은 보물이 잔뜩 들어 있었다. 정성이 깃든 병풍 글씨, 인내를 요하는 한 글자를 빽빽하게 적어 넣기 등으로 만든 작품들이었다. 그리고 그의 생활철학이 밴 삶의 체험담을 듣는 동안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돌아오는 길 뒷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배웅을 해주셨다. 더구나 인근 관장님의 도움을 얻어주어 마산역까지 무사히 도착할 수 있게 배려해주셨다. 1박 2일의 일정이 길게만 느껴지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빈 가슴에 많은 선물을 받아들고 나서는 고향집만 같았다. 문학의 진정한 색깔을 느낄 수 있었던 시간들이었다. 아무런 이해타산이 없이 순수하게 맞아준 김병수 회장님과 박희익 시인께 감사를 드린다. 그리고 행사하던 날부터 다음날까지 시간을 아끼지 않고 마음 쓴 배종애 사무국장님과 공정식 시인께도 감사드린다. 또한 항상 좋은 말씀을 잊지 않고 들려주신 이수화 선생님과 처음부터 끝까지 기획하고 마무리될 때 까지 인솔해 앞장서주신 윤지훈 (사)세계문인협회 사무총장님, 그리고 함께한 일행 여러분께도 감사드린다.

 

2. 이글은 필자의 문학이야기 중 스물네번째 내용으로 공정식 시인님과 움막 공아리랑에서 소주 한잔의 추억이 묻어 있어 귀하게 담아 올려놓았다. 언제나 친근한 벗이었고 마음을 열어 만나주셨던 순수한 시의 정신을 새겨주셨던 분이었다.

 

문학이란 - 24

 

 일상을 살면서 우리 주변의 도구들이 자신이 해야할 이야기들을 해주고 있다. 그 목소리를 듣지 못할 뿐 쉬지 않고 외쳐대고 있다. 자연인 공정식 시인의 움막 공아리랑 에서 종이컵에 딸아주는 소주를 마시면서 들려오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술을 양것 마시라며 더 마시고 싶지 않으면 술이 있다>고 하라는 것이었다. 그때 잔에는 술이 없었다. 그래도 되는 것이 잔속에 술이 있는지 없는지 보이지 않기 때문이었다. 

 술을 마시고 싶으면 조금 남아 있어도 없다고 하면서 잔을 내밀어 술을 받으라고 했다. 거짓말을 해서라도 주량을 조절하라는 종이컵의 조언이 들렸다. 유리잔이면 속이 빤히 들여다 보이니 속일 수가 없다. 그렇지만 술을 마시는 동안 답답한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색깔 없는 액체

종이컵에 따른 소주를 마시다가

앞에 있는 컵이

비었는지 남았는지 알 수가 없다

 

주거니 받거니 비롯되는 이야기

오가면서 들여다 볼 수도 없고

마시고 싶으면 술이 없다고 하고

마시고 싶지 않으면 술이 아직 있다고

거짓말하는 컵이다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유리잔은

술 상대에게 솔직하게 알려주어

속일 수가 없어 야박스럽다 해도

속이 보이지 않는 종이컵은

오히려 숨을 쉴 틈을 열어주었지만

술 마시는 동안 내내

상대방 마음을 답답하게 하였다

  - <종이컵> 전문

 

 종이컵과 충분한 대화를 나눈 필자는 메모지에 메모하여 시로 표현하는데 그리 어러움을 느끼지 않았다. 흐름에 맞는 시어로 바꾸어 넣기 위한 고민을 하지도 않았다. 이미 마릿속에서 정제된 언어로 메모할 수 있었다.  종이컵으로 술을 마신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닐텐데 유독 이 자리에서 종이컵의 말을 들을 수가 있었는지 의문이 간다. 문제는 그곳이 아둠 침침하여 가까이 가서 들여다 보지 않으면 볼 수가 없었다는 것 외에는 이유가 없었다. 시상은 상황에 따라 생겨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알 수 없는 시상의 생겨남을 다소 알 듯하였다. 그러나 저절로 굴러오는 것은 아니어서 항상 관찰하는 마음가짐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