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가

양전 2008. 7. 18. 22:06
요약
독일의 오르가니스트 겸 작곡가. 아이제나흐에서 요한 암브로지우의 8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북독일의 뤼네브르크로 건너가 고등학교를 다니다 졸업 후 바이마르궁정악단의 바이올린 연주자, 아른슈타르의 교회 연주자로 활동했다. 이후 괴텐궁정음악단을 이끌었고 라이프치히의 성토마스교회에서 마지막으로 활동했다.
본문
바흐동상 / 독일 튀링겐주 아이제나흐 소재.

요한 세바스찬은 중부 독일에 있는 루터파 신앙의 중심지인 아이제나흐에서 거리의 악사인 요한 암브로지우스의 8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아버지에게 바이올린을 배웠고, 당숙 요한 크리스토프오르간 연주를 들으면서 성장하였다.

10세 때 양친을 여의고, 큰형 요한 크리스토프의 집에서 살면서 독일
오르간음악의 전통을 익히게 되었다. 큰형의 가족수가 늘어나자 자립을 해야 했던 바흐는 1700년 봄 북독일의 뤼네부르크로 가서 그 곳 고등학교 급비학생이 되어 루터파의 교육을 받으면서 교회의 합창단원으로서 북독일악파의 다양한 종교음악과 친숙하게 되었다.

1702년 고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이듬해 바이마르궁정악단의 바이올린 주자로 근무하면서 연주경험을 쌓았고, 3개월 후에는 아른슈타트의 교회 오르간 주자로 채용되었다. 오르간 주자는 오랫동안 희망하였던 자리였으므로 성능 좋은 오르간이 설치된 새 직장에서 오르간 연주법과 작곡법을 공부하였다.

그는
성가대를 훈련시키는 한편, 과거와 당시의 대가들의 작품을 필사·연구하여 점차 독특한 스타일을 확립해 나갔다. 유명한 라단조의 《토카타와 푸가》, 그리고 《여행을 떠나는 사랑하는 형에게 붙이는 카프리치오》 등이 이 시기에 쓴 작품들이다.

1707년 6월 바흐는 아른슈타트에서 같은 중부 독일의 뮐하우젠으로 옮겨, 성브라지우스교회의 오르간 주자가 되었다. 여기서도 그는 전과 같이 열심히 작곡하면서 교회 칸타타에도 손을 댔으며, 훌륭한 작품을 많이 남겼다. 이 해 가을에 그는 사촌인 마리아 바르바라와 결혼하였으며, 두 사람 사이에서 그 후 13년 동안에 7명의 자녀가 태어났는데, 그 중 빌헬름 프리데만과 카를 필립 에마누엘은 훌륭한 음악가로 성장하였다.

결혼한 이듬해 바흐는 다시
바이마르로 돌아가, 궁정예배당의 오르간 주자가 되었다. 약 10년간의 바이마르 시절에 그는 오르간 주자로서 명성이 높아지고 작품도 점차 원숙해져 대가로서의 풍모를 보이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의 가장 중요한 작품은 《전주곡과 푸가》, 《토카타》 그리고 《코랄전주곡》과 같은 오르간작품이었으며, 따라서 이 시기를 '오르간곡의 시대'라고도 부른다.

한편 그는 교회 칸타타를 거의 매달 한 곡씩 발표하였다. 또한 그는 궁정악단의 연주를 통해 비발디를 중심으로 하는 이탈리아 악파의 음악을 알게 되었다. 바흐는 이탈리아의 협주양식이라는 새로운 작곡법에도 착안, 비발디의 협주곡을 오르간이나 쳄발로로 편곡하였다. 이것이 훗날 협주곡의 명작을 낳는 기초가 되었다. 17년 말, 그때까지 궁정의 집안싸움에 휘말리기도 하고, 또 희망하고 있던 궁정악장의 지위도 얻지 못하자, 바흐는 바이마르궁정악단을 떠나 괴텐으로 이사하였다.

괴텐궁정악단의 지위는 새바람을 찾고 있던 바흐에게
가장 조건이 좋은 것이었으며, 그는 고액의 연봉을 받으며 17인으로 구성된 궁정악단을 이끌어 가면서 자유롭게 작곡과 연주에 열중하였다. 좋은 환경과 풍족한 생활 속에서 창작에 대한 의욕이 높아진 그는 잇달아 새로운 작품을 만들어 나갔다. 기악곡, 3개의 《바이올린협주곡》, 6곡의 《브란덴부르크협주곡》, 무반주 바이올린의 소나타파르티타, 무반주 첼로를 위한 모음곡 등은 이 시기에 작곡된 것이다. 이러한 작품들은 밝은 빛으로 충만되어 있는데, 이것은 바흐의 사회적·가정적인 행복이 반영된 것이라 하겠다.

1720년 아내 마리아 바르바라가 죽자, 이듬해 35세의 바흐는 안나
막달레나를 새로 아내로 맞이하였다. 그리고 그녀를 위하여 《막달레나를 위한 클라비어곡집》(《프랑스모음곡》도 포함)을, 그리고 장남 프리데만을 위하여 《인벤션》을 작곡하였으며, 《평균율 클라비어곡집》도 이 시기에 정리된 것이다.

1723년 바흐는 라이프치히의 성토마스교회의 칸토르에 취임하여 죽을 때까지 27년간을 교회음악가로 보내게 된다. 그의 임무는 기악과 성악의 개인지도와 합창단의 훈련, 그리고 이 도시의 교회음악을 작곡하는 일이었다.

성토마스교회와 성니콜라이교회에서는 일요일마다 칸타타가 연주되었고,
성금요일에는 수난곡이 불려졌다. 이러한 가운데 《우리의 하나님은 견고한 성이로다》 등을 포함한 140곡 이상의 교회칸타타, 《마태오수난곡》을 포함한 몇 곡의 수난곡, 《마니피카트》, 《크리스마스 오라토리오》, 《나단조미사》 등 많은 교회음악이 작곡되었다. 이 라이프치히시기를 '교회음악의 시대'라고 부르는 것은 어느 면에서는 옳지만, 사실상 그는 이 때 대학생의 연주단체를 위해 많은 세속적인 칸타타와 클라비어협주곡도 작곡하였고, 만년에는 대위법작법의 극치라고도 할 수 있는 《골트베르크변주곡》, 《음악의 헌정》, 《푸가의 기법》 등도 작곡하였다.

그러나 이 최후의 《푸가의 기법》은 급속히 쇠약해진 시력과
뇌졸중의 발작으로 미완성으로 끝났다. 결국 실명한 그는 7월 28일 그동안 복용해 온 약의 해독으로 급격한 전신 허약증세를 일으켜 세상을 떠났으며, 성요한교회의 묘지에 묻혔다.

잘읽고 갑니다.
많은 공부가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