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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전 2018. 11. 18. 20:12



"저는 마부였습니다" 총회장을 세번 하신 목사님의 고백

 


전북 김제시 금산교회(이인수 담임목사)는 ‘전라북도지방 문화재자료 136호’로 지정 되었다.
금산교회는 1908년 테이트(최의덕) 선교사가 당시 김제 부자였던
조덕삼(1867-1919) 장로의 헌금과 신도들의 도움으로 지은 독특한 모양을 지닌 한옥교회이다.

테이트(최의덕) 선교사는 미국 남장로회에서 파견한 7인의 선교사로
1891년 한국에 있던 언더우드 선교사가 한국선교 이야기로
강연하는 것을 듣고 큰 감명을 받아 한국행을 결심,

선교사로서 금산교회를 비롯해 1893년 6월에 전주 서문밖교회 등 전라도 일원에 수십 개의 교회를 지었다.
그는 전주 예수병원 창시자인 잉골드 여사와 결혼한 후
조선 선교활동을 열심히 하다가 은퇴하여 미국으로 돌아갔다.

한편 조덕삼 장로는 1904년 테이트(최의덕) 선교사로부터
처음 예수를 영접해 1905년 자기 집 사랑채에서 집회를 시작하여
차츰 교세를 넓혀 교회를 건축하기로 하고 땅을 헌납했다.

헌당식 예배는 1909년 이자익(1879-1958) 장로의 집례로 진행되었다
당시에는 한국전통사회의 유교 관습(남녀칠세부동석)에 따라
기역(ㄱ)자형 건물을 지어 남녀가 따로 앉아 예배를 드리게 하였다

놀라운 사실은 그 이전에 금산교회 장로 장립투표(1907년)를 했다.
투표결과 이자익 후보가 조덕삼 후보를 누르고 장로로 선출된 이변(상놈이 양반을 이김)이 발생했다.

이에 대해 조덕삼 후보는 “이 결정은 하나님이 하신 것입니다.
저는 하나님께 순종해 앞으로 이자익 장로님을 받들어
열심히 교회를 섬기겠습니다” 라고 섬겨 3년 후에 장로가 되었다.

이런 섬김이 있었기에 자기 집 머슴이며 마부였던
이자익 장로를 1910년 평양신학교로에 입학시켜
1915년 목사가 되게 하여 금산교회 제2대 목사로 부임토록 했다.

이 목사는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장(13,33,34대) 3번을 역임했고,
총회장 처음 취암 시에 "저는 마부였습니다"라고 신앙고백하며 설교했다
1954년 대전신학교를 설립하여 초대교장을 역임하는 등 전국에 20여개 교회를 설립했다.

이자익 목사를 한국교계 거목으로 성장하게끔 밑거름이 되게 했던 조덕삼 장로는
자기 집 종지기 머슴이었던 자를 배척하지 않고
주님의 이름으로 끝까지 헌신하고 섬김으로서 한 알의 밀알이 되었다.

조덕삼 손자인 조세형 장로(국회의원 4선)는
"조부가 일하지 않는 사람은 먹지도 말라시며
새벽마다 자식들을 깨워 과수원에서 일하도록 했고, 부지런함과 근면 성실을 가르치셨다.

1919년 12월 돌아가시면서도 할아버지는 '예수를 잘 믿어라'
'거짓말을 하지 말라'고 강조하셨고, 찬송가 525장(주 믿은 형제들)을
4절까지 모두 부르고 하나님의 품에 안겼다”고 전했다

금산교회 조덕삼 장로와 이자익 목사 이야기는 성경적 신앙과 삶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합니다.
우리 시대에 꼭 필요한 것은 성경적인 신앙과 삶이기 때문입니다.

1. 신앙의 영웅 이야기

양반과 상놈이라는 신분차, 봉건적 유교문화를 뛰어넘어 헌신과 섬김의
본을 보여준 김제 금산교회를 설립한 조덕삼 장로(1867-1919)와 이자익 목사(1879-1958)의 이야기다.

2. 신분의 극복

조덕삼 장로는 이 지역 용화마을의 유지였고,
이자익 목사는 그의 집에서 마부로 일하던 머슴이였다.
두 사람은 어떻게 신분의 차이를 극복하고 교회를 세웠을까?

3. 금산교회 설립

1904년 봄 말을타고 전주에서 정읍을 왕래하며 복음을 전하던
테이트(한국명 최의덕 1862-1929)선교사는 중간 지점인 용화마을에 머물곤 했다.
그는 당시 사교(邪敎)의 고장이던 금산에 교회를 세우고 싶었다.

4. 선교사외의 만남

그날도 용화마을의 제일가는 부자였던 조덕삼의 집 마방에 말을 맡기고 하루밤을 묵었다.
오랫동안 테이트 선교사를 지켜봐온 조덕삼은
"그렇게 살기좋은 당신의 나라를 포기하고 이 가난한 조선땅에 왜 왔는가? 라고 물었다"

그러자 테이트는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 때문입니다" 라고 화답했다.
유교정신에 투철한 보수집안의 조덕삼은 헌신의 삶을 살기로 작정한
테이트 선교사의 용기에 감동하였고, 이후 사랑채를 내어 예배를 보도록 했다.
이것이 금산교회의 출발이다.

5. 서로의 만남

경남 남해에서 태어난 이자익은 17세 때 조덕삼을 만났다.
6세 때 부모를 잃고 소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한 이자익은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 고향인 남해를 떠나 걸어걸어 금산까지 왔다.
첫눈에 이자익의 영특함을 알아본 조덕삼은 그를 마방의 마부로 일하도록 했다.

6. 영특한 아지익

무학의 이자익은 고개 너머로 배운 천자문을 줄줄 외웠다.
그 모습을 지켜본 조덕삼은 비록 자신이 부리는 머슴이지만
아들(조영호)과 함께 공부할 수 있도록 배려했고, 신앙생활도 같이 했다.

7. 장로 투표

조덕삼과 이자익이 함께 믿음을 키운지 3년이 지난 1907년 금산교회는 장로 장립투표를 했다.
묘하게도 두 사람이 후보에 올랐다.
신분의 양극화가 뚜렷했던 그 시절 주인과 머슴이 경쟁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투표결과는 놀라웠다.
이자익이 주인을 누르고 장로로 선출된 것이다.
술렁이는 성도들을 향해 조덕삼이 겸손히 말했다.

8. 조덕상의 고백

"우리 금산교회 성도들은 참으로 훌륭한 일을 해냈습니다.
저희 집에서 일하는 이자익 영수(장로보다 낮은 직분으로
교회의 살림과 행정, 설교를 맡아서 함)는 저보다 신앙의 열의가 대단합니다.
그(저희 집 마부 아자익)를 뽑아 주셔서 참으로 감사합니다.

9 서로의 관계

이자익은 장로가 된뒤 테이트 선교사를 대신해 교회 강단에서 설교했고
조덕삼은 교회바닥에 끓어 앉아 그의 말씀을 들었다.
집에서는 이자익이 조덕삼을 주인으로 성실히 섬겼다.

조덕삼은 자신의 머슴을 장로로 섬겼을 뿐만 아니라
그가 평양에서 신학을 공부 할 수 있도록 지원도 아끼지 않았다.
조덕삼은 그로부터 3년 뒤 비로소 장로가 됐다.

10. 조덕삼은 교회를 신축할 수 있도록 자신의 땅을 헌납했다.

이 교회는 ㄱ자 모양으로 지어졌다.
ㄱ자 양 날개 부분에 남자와 여자 성도들을 따로 앉도록 했고 출입문도 양쪽으로 냈다.
예배 도중 남녀가 얼굴을 볼 수 없도록 가운데 휘장을 첬다.
ㄱ자 양쪽 성이 만나는 중간에 목사가 서는 강단이 있다.

강단 뒤쪽에 목사들이 출입하던 쪽문은 겸손을 자연스럽게 가르쳐줬다.
테이트 선교사가 교회에 들려 이 쪽문을 드나들 때면 늘
"주께서 겸손을 저에게 가르쳐 주시는 것 같다" 고 뿌듯해 했다.
금산교회는 1908년 부할절을 지내고 헌당예배를 드렸다.

11. 금산교회는 전북문화재 136호다.

한국 전통 사회의 남녀 구분이라는 큰 과제를 해결한 것 함께 이 교회는 더 큰 의미를 갖고 있다.
바로 지주와 머슴의 이름이 나란히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자익은 주인의 배려로 훗날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회자가 되어 1915년 금산교회 2대 목사로 부임했다.

당시 조덕삼은 이자익을 담임목사로 청빙하고자 적극 나섰다.
조덕삼은 이자익을 정성으로 섬겼고 많은 이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이자익 역시 사랑으로 성도들을 돌봤고, 교단에서 세번씩이나
총회장을 지내는 한국교회사의 거목으로 이름을 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