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과 평안함

태어남과 죽음, 신과 인간을 화두로 삼는...

무상 無常하기에 영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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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의 서

2022. 1. 3.

무상 無常하기에 영원하다


불교 수행자나 불교학자들이 놓치고 있는 건 없을까? 우리 몸뚱이를 비롯한 모든 게 연기된 것이며, 인연 화합에 의해 생겨난 일시적인 것이기 때문에 무상하며 영원하지 않다고 한다.

그러나 연기와 인연 화합이 영원히 지속한다면 어떻게 될까? 무상하므로 영원하지 않다는 논리는 참이 아니게 될 것이다. 무상한 채로 영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주는 팽창하고 있으며 또한 진화하고 있는 것이다.

단 한 순간도 같은 게 있을 수는 없지만, 같지 않은 모습인 채로 영원히 이어질 수 있음이다. 매년 내리는 수많은 눈송이가 모두 다른 모양인 것처럼 말이다. 고로 무상하기 때문에 영원하지 않다는 논리를 더 이상 내세우지 말 일이다.

무상하기에 즉 항상 하지 않기 때문에 영원하지 않은 게 아니라, 오히려 무상하므로 영원한 것이다. 다만 우리는 지금의 몸뚱이로 영원한 게 아니라, 다른 모습으로 영원할 뿐이다. 눈에 보이는 감각적인 모습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의식 또는 기억이나 느낌으로 영원할 수 있음이다.

종교에서 말하는 사랑의 신이란 사랑의 느낌으로 신이 존재하는 것일 뿐, 인간 형상으로 신이 존재하는 게 아니다. 마치 크리스마스 때 산타처럼 신이 몸을 움직여 사랑을 실천하는 게 아닌 것이다. 이처럼 보이는 몸뚱이도 날마다 변하지만 대략 100년을 유지하는데, 보이지 않는 무형의 우리는 얼마나 유지할 수 있을까? 무한 즉 영원하지 않을까 싶다. 무 無란 한계가 없기 때문이다.

신에서부터 물질 우주까지 모든 게 무상하지만 영원히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 고정된 내가 없을 뿐 무상한 나는 있을 수밖에 없다. 불교의 무아 無我 사상도 석가모니 생존 당시 브라만교의 고정된 아트만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지 않은가. 무엇도 고정된 것은 없다는 무상에는 전적으로 동의하지만, 무아를 내가 없다고 해석하는 주장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석가모니 당시에는 '무상한 나'라는 개념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음이다. 오늘날의 힌두교인 당시의 브라만교에서는 말할 것도 없으며 불교에서조차 말이다. 그러나 '고정된 나(아트만)'가 아닌 '무상한 나'는 창세 이후 지금까지 여전히 존재하고 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