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과 평안함

태어남과 죽음, 신과 인간을 화두로 삼는...

믿음과 깨달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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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의 서

2022. 1. 21.

믿음과 깨달음


나는 그동안 나 자신을 믿지 못했으며 또한 신을 믿지 못했다. 생각이나 말로는 무소불위하고 전지전능한 존재라고 하면서도 신의 능력을 과소평가해온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신에게 나에 관한 모든 것을 맡기련다. 내 건강과 풍요와 관계에 대한 모든 소망을 신에게 내맡기고자 한다. 그냥 턱 놔버리면 되는데 지금까지는 이게 그렇게도 어려웠다. 60이 넘은 나이에 나 자신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나서도, 2년이라는 세월이 더 걸렸다.

신은 무조건적인 사랑이자 무소불위하고 전지전능한 존재임을 이제야 몸으로 느낀다. 즉 신이 나를 사랑하지 않을 이유가 없으며, 내가 가진 소망을 들어주지 않을 이유가 하나도 없음을 이제야 깨달아 가고 있다. 또한 신이 나를 심판하고 벌 줄 이유란 무엇인가? 자신을 믿지 않는다고 나를 벌한다면, 그런 속 좁은 신을 나는 거부하련다. 어떠한 조건도 제약도 없는 신이 아니라, 자신을 믿어야만 사랑을 주겠다는 조건과 제약이 있는 신을 나는 믿고 싶지 않다.

내가 믿는 신은 무조건적인 사랑의 신이다. 내가 무엇을 하든지 무조건 나를 사랑하는 신이 바로 내가 믿는 유일신이다. 조건이 있다면 그러한 사랑은 아가페 즉 무조건적인 사랑이 아니지 않은가? 설사 내가 99마리 양이 아니라 길 잃은 1마리 양일지라도, 길을 잃고 헤매는 나를 찾아 안전한 곳으로 다시 이끄는 신을 나는 믿고자 한다. 이렇게 되면 신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믿고 누군가는, 내가 방종한 생활을 하지 않을까 하는 염려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는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 좁은 소견일 뿐이다. 신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느끼는 사람이라면, 악행의 충동을 느끼는 게 아니라 오히려 선행의 충동을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신의 심판이나 처벌이 두려워 선행을 하는 사람이야말로, 때로는 악행을 저지르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된다. 이는 자의라기보다는 강박에 의한 행동이기 때문이며, 무조건적인 신의 사랑을 깨닫지 못한 때문이다.

반면 신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온전히 깨달은 사람이라면, 방종이 아니라 오히려 신에 대한 순종과 사랑을 느낄 뿐이다. 죽음 이후의 두려움 때문에 의무감에서 선행을 하는 게 아니라, 기쁨 속에서 기꺼이 선행을 하기 때문이다. 똑같이 선행을 한다 해도 기쁨 속에서 행하는 사람과, 두려움 속에서 행하는 사람은 마음속에서 느끼는 바가 서로 다르다. 기쁨 속에서의 선행은 감사와 순종을 가져오나, 두려움 속에서의 선행은 고통과 불만을 가져올 뿐이다.

이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우리가 그동안 살아오면서 체험하는 바와 같다. 의무감 속에서의 행동과 자유로움 속에서의 행동에는 큰 차이가 있다. 전자는 즐거움과 고통이 윤회하는 삶이며, 후자는 기쁨과 평안이 충만한 삶이기 때문이다. 즐거움은 자연스레 받아들이면서도 고통은 거부하고자 할 때 우리는 윤회하는 삶을 살게 되며, 기쁨뿐만 아니라 고통도 겁을 내지 않고 받아들일 때 우리는 충만한 삶을 살게 된다. 우리는 무엇이든지 받아들여야 한다. 그게 인간으로 태어난 우리의 운명이다.

그런데 고통을 회피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깨달음이 필요하다. 그리고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는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믿음이 선행되어야 한다. 무조건적인 신의 사랑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한다. 신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깨닫기 위해서는, 믿음과 깨달음이 동시에 필요하다고 할 수 있겠다. 신의 사랑을 조건부라고 믿고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도 믿음은 있을 수 있지만, 깨달음은 영 다른 세계의 일이다.

조건부 사랑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믿음은 불안함 속에서의 믿음이기 때문에, 무조건적인 사랑에 대한 깨달음을 얻기란 우물에서 숭늉 찾기와 같다. 또한 자기 최면을 통해서 불안하지 않다고 아무리 세뇌를 한다 해도, 무의식 속에 있는 불안까지 사라지지는 않는다. 불안이나 두려움은 다만 저항하지 않고 받아들여야 사라진다. 자기 최면이나 세뇌도 저항의 한 방법일 뿐이다. 물론 받아들이는 게 불안하고 두렵지만, 용기를 내거나 또는 자포자기로써 받아들여야 한다.

이게 바로 불교식 표현을 빌리자면, '백척간두 진일보'이며 '은산철벽'을 뚫는 일이다. 참으로 어려운 과정이라는 말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과정에서의 불안과 두려움을 받아들임은, 수영을 처음 배우는 사람이 물에 대한 공포를 스스로 극복하고 물속으로 들어갔을 때, 몸이 가라앉는 게 아니라 오히려 뜨는 것을 경험하는 것과 같다. 받아들였을 때 오히려 불안과 두려움이 사라진다. 이 과정은 아무리 말로 설명해도 소용없다. 각자가 직접 몸으로 부딪쳐 봐야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