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과 평안함

태어남과 죽음, 신과 인간을 화두로 삼는...

깨달음 후에 일어나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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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의 서

2022. 3. 29.

깨달음 후에 일어나는 일


1. 서론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등은 모두 하나의 바탕에서 일어납니다. 시각의 바탕이 따로 있고 촉각의 바탕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그 모두가 하나의 바탕에서 일어났다가 사라집니다. 그래서 우리는 시각과 청각 또는 시각과 후각, 미각과 촉각 등등, 어느 하나의 감각과 다른 감각을 동시에 인식할 수 없습니다.

음악을 들으며 책을 읽는 것도 청각과 시각이 순간순간 교대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것이지, 두 가지 감각이 동시에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인간은 오로지 하나의 감각이 일어났다가 사라진 후 다른 감각을 느낄 수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이들의 바탕은 여러가지가 아니라 하나입니다.

하나의 바탕에서 인체의 오감이 각각 일어났다가 사라집니다. 그 하나의 바탕을 우리는 마음이라고 표현합니다. 하나의 바탕자리에서 오감에 의한 감각뿐만 아니라, 감정과 생각. 의지. 기억. 이성적 사유 등이 일어났다가 사라집니다. 그런데 '바탕자리'라는 게 무슨 연극무대나 마당극에서처럼 유형으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무형의 텅 빈 침묵일 뿐입니다.

달리 말하면 텅 빈 침묵의 바탕 또는 무 無에서 유형의 실존實存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는 공간이 비어있어야 거기에 유형의 무언가가 들어갈 수 있는 이치와 같다고 하겠습니다. 지구 또는 우주라는 유형의 바탕은 텅 빈 무 無입니다. 아무것도 없는 텅 빈 무형 즉 공空에 지구를 비롯한 우주가 들어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공이란 허공과는 다른 개념입니다. 허공도 무형과 비슷하기는 합니다만 허공에는 무언가가 가득 채워져 있습니다. 우리가 아는 과학 상식으로도 허공 속에는 공기를 비롯하여 수증기나 빛 등이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러나 공이란 아무것도 없는 상태를 뜻합니다.

공이 절대적 무형이라면 허공은 상대적 무형이라고나 할까요. 따라서 절대계와 상대계가 서로 분리되어 있는 게 아니라, 절대계인 공에 상대계인 허공을 비롯한 물질이 담겨있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는 절대계에서 살고 있으며 또한, 절대적 존재인 신의 품에 안겨있는 것입니다.

다만 지구를 비롯한 우주는 아무것도 없는 무의 세계에 실존합니다. 따라서 아무것도 없는 무의 세계와 그 안에 담겨진 유有의 세계가 하나로 합쳐진 세계가 바로 신神입니다. 신이란 무의 세계만이 아니라 유 또는 실존의 세계를 아우르는 이름입니다.

2. 본론

서론이 좀 길었습니다만 이제 본론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깨달음이란, 부분적인 개체로 여겨졌던 자신이 전체임을 자각하거나 인식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이 개체가 아니라 전체임을 깨달았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계속하여 개체와 전체 사이를 오고 가곤 합니다.

다만 깨닫고 나서는 부분이자 개체라는 인식에 계속 파묻혀 사는 게 아니라, 벗어났다가 파묻혔다를 반복합니다. 물론 사람에 따라서 많은 시간을 자신이 부분이라는 인식에 다시 파묻히느냐, 또는 잠깐 잠깐 동안만 파묻히느냐의 차이는 있겠습니다. 그러나 깨달은 뒤에도 누구를 막론하고 순간순간 다시 부분적인 개체로 돌아가게 됩니다.

우리의 몸은 부분이고 개체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자신이 전체임을 자각했다 하더라도 인간의 몸을 지닌 이상 우리는 부분이자 개체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완전한 깨달음 즉 해탈이란 부분적인 개체에서 완전히 벗어나 전체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부분이자 개체로 살아가면서도 자신이 전체임을 늘 자각하고 인식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부분으로 살아가면서도 전체임을 인식하며 일상을 사는 사람이 바로 해탈한 사람입니다. 우리가 생각하거나 행동하는 것은 부분인 개체로서 행하는 것이지 전체로서 행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전체임을 늘 의식할 때 우리는 개체로서가 아니라, 전체로서의 에너지를 받고 또한 능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육적으로 인간은 부분이고 개체이지만, 영적으로 우리는 전체이기에 해탈이 가능한 것입니다. 몸으로 사는 동안 우리는 부분적인 개체로서 활동하는 동시에, 영적으로는 전체로서 존재하고 있음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자각하는 것이 바로 깨달음입니다. 그리고 자각이 순간순간 일어나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하는 단계를 지나서 지속적으로 유지되는 때가 바로 해탈입니다.

해탈이라는 불교 용어를 빌려왔습니다만 달리 표현한다면 완전한 깨달음인 것입니다. '아디야샨티'라는 선각자는 '깨어남에서 깨달음까지'라는 그의 저서에서, 깨달음을 깨어남과 깨달음으로 구분하였습니다. 처음 깨달음을 깨어남으로, 나중에 완전한 깨달음을 깨달음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이는 중국 송나라 시대에 활동했던 청원유신 선사의 말씀과도 같다고 하겠습니다. 깨닫기 전에는 당연히 산은 산이었고 물은 물이었으나, 처음 깨달았을 때 그에게는 산이 산이 아니었고 물이 물이 아닌 것으로 보였으며, 나중에 더 깨닫고 보니 도로 산이 산이고 물이 물로 보이더라는 법문도 완전한 깨달음을 나타낸 것이라고 할 것입니다.

3. 결론

우리 인간이 몸과 더불어 이 세상에 태어난 목적은, 자신이 곧 신이며 전체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에 대한 기억을 잃어버리는 방식으로, 스스로 자신을 숨겨놓고는 이를 다시 찾고자 함입니다. 부분이자 개체로 인식하다가 어느 날 자각을 통하여 자신이 전체임을 깨닫고는, 여기서부터 다시 완전한 깨달음으로 가는 과정이 곧 우리의 삶이라고 하겠습니다.

자각으로 이끄는 방편의 하나를 서론에서 길게 설명하였으며, 본론에서는 처음 깨달음 또는 자각에 안주할 게 아니라 완전한 깨달음 즉 해탈의 길로 계속 가야함을 설명하였습니다. 완전한 깨달음으로 가는 길은 각자의 내면에서 저절로 보이고 이루어지며 또한 이 길은 끝이 없는 길입니다.

다만 혼자서 궁구하는 것과 병행하여 요즘 세상에 널려있는 스승 즉 선각자의 직접적인 말씀과 그들의 책 그리고 유튜브 등 각종 인터넷 매체를 통하여 배워야 합니다. 혼자서 사유해도 되지만 시간이 많이 소요되므로 비효율적입니다. 책이나 유튜브에서 선각자의 말씀을 듣고 문득 떠오르는 생각을 사유하는 방식을 추천합니다.

제가 이 글을 쓰는 것도 처음 깨달음이 시작된지 20개월이 지나서입니다. 깨달음이 시작된지 처음 4개월쯤 지나서는 나 자신이 드디어 깨달음을 얻었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누구에게 물어보거나 인가를 받고 싶은 생각이 사라졌습니다. 그런 뒤 다시 16개월쯤 더 지나서 이 글을 쓰게 된 것입니다.

깨달음의 끝이란 없습니다. 신의 끝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끝없는 자각이 이어집니다. 다만 깨닫기 전과 같은 추구심은 사라집니다. 따라서 생로병사의 고통에서도 벗어나게 됩니다. 충만함 속에서 여여한 슬픔과 아픔을 느끼기도 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