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꽁치 2012. 2. 19. 00:08

 

 

 

 

 

 

일제 강점기에 불렀던

국내 최초의 대중가요

채규엽의 <희망가>


 

 

 

 

 

 

 

뉴스일자: 2009-02-12

 

 

 


 

 (1절)이 풍진 세상을 만났으니 너의 희망이 무엇이냐

부귀와 영화를 누렸으면 희망이 족할까

푸른 하늘 밝은 달 아래 곰곰히 생각하니

세상만사가 춘몽 중에 또 다시 꿈같다


(2절)이 풍진 세상을 만났으니 너의 희망이 무엇이냐

부귀와 영화를 누렸으면 희망이 족할까

담소화락에 엄벙덤벙 주색잡기에 침몰하랴

세상만사를 잊었으면 희망이 족할까

 

2009년 새해가 밝았다. 묵은해를 뒤로 하고 희망의 신년을 맞은 것이다. 매년 그랬듯 우리는 새해도 잘 풀리길 저마다 기원하며 ‘희망가’를 부른다. 건강, 돈, 명예, 벼슬, 가족행복 등 소망하는 건 대부분 비슷하다. 새해는 첫출발, 희망, 꿈과도 통한다.

그래서 대중가요 <희망가>는 새해에 맞은 노래다. 4분의 3박자 왈츠 풍으로 부르기가 쉽다. 노랫말엔 ‘희망’이란 말이 여러 번 나와 연초분위기와 맞아떨어진다. 희망이 담긴 노랫말이 의미를 더해준다.

게다가 2006년 11월 문화재청이 근대문화재 보존관리를 위한 대국민홍보차원서 벌였던 ‘근대문화 1호 찾기’ 캠페인 때 부각, 눈길을 끈 대중가요이기도 하다.


첫 대중가요…외국곡에 가사 붙여

<희망가>는 노래를 부른 가수와 관련된 재미난 사연들이 많다. 국내 최초 레코드취입가수가 불렀다는 점과 일제강점기 때 백성들이 자연스럽게 불렀던 외국 곡을 번안해 탄생된 노래란 점이 특이하다.

우리 노래로 알고 있는 건 곡조와 노랫말이 한국인 정서에 맞게 바뀌어 불린 까닭이다. 흐름이 대체로 부드럽고 멜로디가 쉽다. 1919년 3·1만세운동 물결이 지나간 뒤인 1923년 무렵부터 대중 속에 빠르게 퍼져나갔다.

민족염원이 물거품으로 돌아간 뒤 대중들 마음은 좌절과 허탈감에 빠졌다. 소위 문화정치를 내세운 일본의 통치방식이 다소 누그러져 조선사회가 활기를 띄는 듯 했지만 민중들 일상은 그렇잖았다. 이런 시대상황에서 애조 띤 노래(창가)가 유행하기 시작했고 사람들은 이 노래를 ‘희망가’라 불렀다. 일제강점기 억압에 시달린 민초들의 바람이 <희망가>란 노래를 낳은 셈이다. 모진 겨울바람에 시달리며 봄을 기다리는 꽃봉오리 같은 백성들 소망의 외침이 <희망가>로 나타났다.

아쉽게도 <희망가>의 바탕이 된 외국 곡을 번안한 사람과 편곡자 역시 밝혀지지 않고 있다. 다만 토마스 가튼의 <夢の外>가 원곡으로 가요계에 알려져 있을 뿐이다.

우리나라 대중가요로는 1925년 발매된 ‘조선소리판’에 실린 노래를 드는 사람들이 많다.

도월색의 <시들은 방초>, 김산월의 <장한몽>과 1926년 윤심덕이 불러 히트한 <사의 찬미> 등으로 알고 있으나 사실은 <희망가>가 이보다 훨씬 전에 나왔다.

1922년에 나온 노래집엔 <청년경계가>란 제목으로 실려 있다. 이어 전국적 유행에 힘입어 일축(일본축음기상회)에서 음반으로도 발매됐다. 음반이 처음 나왔을 땐 다시 제목이 바뀌어 <이 풍진 세월>로 나왔다. 명확하진 않으나 1925년 전에 나온 노래가 틀림없다. 음반으로 취입된 우리나라 유행가 중 가장 오랜 작품으로 기록된다. 문화재청의 대중가요 1호 찾기 목록에 오른 것도 이 때문이다.


문화재청 ‘1호 찾기’로 부각돼

<희망가>는 83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에도 불리고 있다. 김종서, 시나위, 최영철, 장사익, 한 대수 등 후배가수들이 리메이커 해서 취입했고 전국 노래방에도 반주가 깔려있어 이 노래를 찾아 부르는 이들이 적잖다.

특히 1980년 언론인들이 이 노래를 자주 불렀던 적이 있다. ‘전두환 정권’의 언론통폐합 방침 속에 그해 가을 새마을연수원에 강제 입소해 5공 새 정부의 이념교육을 받았던 언론인들이 신아일보, TBC(동양방송), DBS(동아방송) 등 언론사가 문 닫는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강의실에서 이 노래를 합창했다. 한국경제신문 정경부 기자였던 본인도 그 현장에서 선배들과 <희망가>를 목청 높여 불렀던 기억이 난다.

<희망가>의 작사가, 작곡가는 누구인지 모르지만 1925년 우리나라 최초의 레코드취입가수 채규엽(蔡奎燁)이 불러 히트한 것만은 사실이다. 채규엽은 일본서 음악공부를 한 사람으로 <봄노래> <방랑자의 노래> 등을 불러 인기가 높았다. 그는 국내 직업가수 1호이자 최초의 포크가수다.

일본 와세다대학 만돌린부에서 활동했던 한국유학생이 채규엽의 노래반주를 맡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만돌린부 학생들은 만돌린은 물론 통기타도 연주하곤 했다. 통기타반주가 위주이고 아코디언이 간주부분에서 받쳐준다.

그 때의 기타 줄은 섬유로 만들어져 언뜻 들으면 소리가 이상하지만 당시로선 최고로 좋은 악기 줄이었다. 가느다란 실을 여러 개 엮어 꼬아 만든 줄로 되풀이해 들을수록 담백하고 듣기도 좋다는 느낌을 준다.

1907년 함경남도 원산에서 태어난 채규엽은 신명학교를 졸업, 일본 동양음악학교에서 정식 가수수업을 받은 우리나라 최초의 유행가가수다. 1930년 콜롬비아레코드사의 전속가수가 돼 <봄노래 부르자>를 출반했다. 이어 <명사십리> <시들은 청춘> 등 히트곡들을 남기기도 했다. 일본 최고 인기작곡가 고가마사오(古賀政男)의 히트곡 <사케와 나미타까 타메이키까(酒淚溜息)>를 번안한 <술은 눈물이냐 한숨이냐>를 우리말로 취입, 대단한 인기를 끌기도 했다. 일제강점기 땐 한국 대중음악계 최고가수로 꼽혔다. 잡지사(삼천리)의 인기가수투표에서 1위를 차지했을 정도다.

채규엽, 친일활동하다 월북

호스티스의 염세자살을 주제로 한 <봉자의 노래>를 널리 유행시켰으나 1939년 이후 행방을 감췄다. 8·15광복 뒤 다시 연예계에 나타나 활동했던 그는 1947년 연예단체를 운영했으나 사업부진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특히 일제 말 적극적인 친일활동과 해방 후 월북으로 우리들의 관심에서 멀어진 사람이 돼버렸다.

채규엽은 가수 전영록의 고모부다. 별세한 배우 황해 씨(전영록 부친)의 여동생과 결혼, 딸을 하나 뒀다.

‘어른이 부른 동요’라 할 수 있는 <외양간 송아지>를 취입, 국내에 처음 포크음악을 선보였다.

 


이 뉴스클리핑은 http://www.sobiq.com에서 발췌된 내용입니다.

안녕하세요? 예전 노래를 찾아 다니다가 들렸습니다. 좋은 정보인 것 같아 참조하려고 합니다. 감사합니다. ^^ 제 블로그 ( http://blog.naver.com/yeonuson )에 이 내용을 참조하여 포스팅할 계획입니다. 항상 건강하세요.
감사합니다. 잘 읽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