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꽁치 2017. 1. 4. 2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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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스.jpg


이제부터 에디슨의 명과 암을 설명해 보겠습니다.



1. 에디슨이 전구를 발명했다고?


금속 조각에 전지를 연결해 가열하면 빛을 낼 수 있다는 건 에디슨 이전부터 알려져 있었다. 1800년에 알레산드로 볼타(Alessandro Volta)가 빛나는 전선을 선보였던 것이다.그러나 금속 필라멘트는 몇 시간 만에 녹아 버리는 단점이 있었고, 다른 방법으로 전구개발이 이뤄진다.


최초의 전구는 1816년 험프리 데이비(Humphy Davy)가 발명한 데이비 램프(Davy lamp)였다. 전류가 연결된 두 개의 탄소봉을 접근시키면 아크방전이 일어난다. 이 원리로 작동되는 데이비 램프는 촛불 4000개에 해당하는 엄청난 밝기 때문에 가정용으로 사용되지 못하고 등대, 탄광, 가로등, 공장, 기차역 등에서 제한적으로 사용됐다.


데이비램프.png

데이비 램프


험프리 데이비 말고도 헨리 우드워드(Henry Woodward), 매슈 에번스(Mathew Evans), 모지스 파머(Moses G. Farmer), 윌리엄 소여(William E. Sawyer), 워런 드 라뤼(Warren De la Rue), 윌리엄 그로브(William R. Grove) 등에 의해 전구의 개선작업이 수십 년 동안 이루어졌다. 관건은 상업용으로만 쓰이는 전구를 가정으로 끌어오는 것이었다.


1844년 신시내티 출신의 19세 천재 소년 존 웰링턴 스타(John Wellington Starr)가 진공관에 들어 있는 탄소 필라멘트로 빛을 내는 백열전구를 발명했다. 그러나 그는 22세가 되기 전 폐렴으로 목숨을 잃었고 그의 백열전구는 잊혀졌다.


1854년 하인리히 괴벨(Heinrich Göbel)이 다시 한 번 전구를 발명했다. 하지만 앞의 사례와 마찬가지로 상업화에는 실패한다. 괴벨이 전구를 발명하고 20년 뒤, 에디슨이 다시 한 번 백열전구를 발명했다. 에디슨의 전구를 보고 괴벨이 에디슨에게 소송을 걸었다. 재판을 하던 중 괴벨이 사망했고, 재판결과 괴벨의 미망인이 에디슨에게 보상을 받았다.


1877년 윌리엄 월리스와 모지즈 파머는 500W의 전구와 8마력짜리 발전기를 선보였다. 그들의 연구실에 초대받은 에디슨도 발전기를 보았고 에디슨은 그들의 발명품에 단점이 있다는 걸 알았다. 탄소 필라멘트의 수명이 짧았던 것이다. 에디슨도 비슷한 전구개발에 착수하는데, 관건은 필라멘트의 수명이었다.


1878년 영국에서는 조지프 스완(Joseph Swan)이 백열전구를 개발하는 데 성공한다. 스완전구는 진공으로 된 유리구에 탄소 솜을 사용했는데, 에디슨의 전구보다 10개월 앞서 등장했으며, 성능도 매우 우수했다.


스완전구.jpg

스완전구


10개월 뒤 전구를 발명한 에디슨은 10개월 이전에 전구를 만들었던 스완이 자신의 아이디어를 도용했다고 고소하지만 패소한다. 후에 에디슨은 스완의 특허권을 사들여 자신의 전구를 개량했다. 에디슨의 전구는 대나무를 필라멘트의 재료로 썼다는 점 외에 스완전구와 큰 차이가 없다. 유리구 내부가 진공상태라는 것도 스완전구가 먼저였다. 그런데 그것조차도 스완전구가 오리지널은 아니다. 진공관 안에 탄소 필라멘트를 넣는다는 개념 자체가 앞서 언급한 존 웰링턴 스타의 발명이었다.


여기까지 읽었다면 에디슨이 전구를 발명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에디슨은 전구라는 상품을 상업화 하는데 성공한 사람이지, 전구 발명가가 아니다. 빛나는 전선이라는 개념도 이미 에디슨 전부터 알려져 있던 것이고, 수많은 과학자들이 그 개념을 받아들여 전구 개량작업에 달려들어 수십 년에 걸친 연구결과가 쌓여 있었다. 그래서 에디슨과 비슷한 시기에 우후죽순으로 전구가 등장했던 것이다.


에디슨 위인전에는 그가 필라멘트 재료를 찾기 위해 수천 가지 재료를 썼다는 내용이 나온다. 하지만 탄소 필라멘트도 에디슨의 아이디어가 아니고, 필라멘트의 수명을 늘이기 위해 유리구를 진공상태로 만든 것도 에디슨의 아이디어가 아니다. 에디슨이 생각해낸 것은 일본산 대나무를 이용한 탄소 필라멘트였는데 나중에 텅스텐으로 재질을 바꾼다. 유리구를 진공으로 유지하는 것도 나중엔 아르곤-질소 가스로 대체한다.


세상 어느 누구도 텅스텐 필라멘트와 아르곤-질소 가스로 전구를 개조한 사람을 전구 발명가라고 말하지 않는다. 아니, 그 사람 이름조차도 모른다. 그런데 왜 에디슨은 전구 발명가로 불리는 것일까?



2. 축음기는 남의 아이디어를 도용했나?


소리를 기록하려는 노력은 16세기부터 시작됐고, 그 이후로 수많은 뮤직박스가 발명됐다. 특히 천공카드와 유사한 원리로 작동하는 뮤직박스와 자동 피아노(Player Piano)가 크게 인기를 끌었다. 그러다가 천공카드 같은 원리가 아닌 소리를 직접 녹음하려는 움직임이 생겼다.


포노토.jpg

포노토그래프


1857년 프랑스의 레옹 스콧 드 마르탱빌(Leon Scott de Martinvill)은 포노토그래프(Phonautograph)를 발명한다. 하지만 포노토그래프는 녹음만 했을 뿐, 녹음된 소리를 재생 하는 기능은 빠져 있어 이 기계를 최초의 축음기라고 말하기엔 논란의 여지가 있다. 겉모양과는 달리 구조적인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유연을 입힌 종이 원통과 뻣뻣한 털을 이용하여 소리를 녹음하는 방식이었는데, 재생을 하기 위해 원통을 건드리면 녹음된 내용이 훼손되었다. (그의 녹음을 재생한 건 무려 150여년이 지난 2008년이었다. 그리고 그의 녹음은 2010년 미국 국회도서관의 '국립 녹음 등재목록' (National Recording Registry)에 등재된다) 하지만 녹음된 음을 재생 하지는 못했어도 마르탱빌의 축음기는 에디슨의 것과 유사한 형태를 지니고 있다.


이 포노토그래프 이후, 마침내 소리의 녹음과 재생을 성공한 발명가가 등장했다. 그 발명가가 누군가 하는 것에 대해서는 논란의 소지가 있다. 왜냐하면 에디슨이냐 샤를 크로스이냐 결론을 내릴 수 없기 때문이다. 참고로 에디슨이 남의 아이디어와 설계를 도용했다는 의혹이 있다.


1877년에 샤를 크로스(Charle Cros)는 팔레오폰(Paleophone)이라는 축음기 설계를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에 제출했다. 내구성이 약한 유연에 뻣뻣한 털로 음파를 기록해 재생이 힘들었던 마르탱빌의 것을 개선한 설계였다. 샤를 크로스는 원통 레코드의 재질을 금속으로 바꾸고 바늘로 긁어서 기록하는 방식을 고안했다. 사진제판술(photoengraving)에서 사용되는 에칭(etching) 방식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한다. 금속 원통의 표면에 내산 코팅을 한 뒤, 원통을 회전시키면서 바늘로 녹음을 한다. 녹음이 끝난 원통을 꺼내 산성 용액에 담그면 바늘이 지나간 자리는 부식이 된다. 그리고 원통을 다시 소리통과 연결하면 굳어진 홈을 따라 바늘이 움직이면서 소리를 재생하는 것이다.


그러나 샤를 크로스는 돈이 없어서 이 제품을 상용화하지 못했다.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에 출품한 것도 상용화 시켜줄 후원자를 찾으려는 목적이었다. 그로부터 8개월 뒤, 바다건너 미국에서 에디슨의 유사품이 등장한다. 팔레오폰(Paleophone)과 외형이 상당히 흡사한.


에디슨이 발명한 축음기는 구리로 만든 원통에 홈을 판 다음에 주석박(tin foil)을 씌워 소리를 녹음하고 재생하는 것으로, 샤를 크로스의 것과 거의 동일한 방식이다. 샤를 크로스와 것과 다른 점이 있다면 전화기의 진동판을 이용했다는 점이다.


축음기보다 약간 앞섰지만 거의 비슷한 시기인 1876년에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이 전화기를 발명한다. 참고로 여기에도 흑역사가 있는데, 전화기를 발명한 건 벨이 아니라 1849년 안토니오 무치였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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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슨과 축음기


아무튼 에디슨은 축음기 보다 먼저 등장한 전화기의 진동판을 응용하기로 한다. 구조나 원리는 샤를 크로스의 것과 유사하지만, 전화기의 진동판을 응용한 탓에 미세한 소리의 떨림까지 더 정확하게 기록할 수 있었다.


여러분도 눈치를 깠겠지만, 에디슨는 ‘상용화의 천재’다. 축음기의 구조는 샤를 크로스의 것을 베끼되, 전화기 부품을 이용해 개량한 것이다.



3. 영화는 코닥과 뤼미에르의 발명품!


에디슨이 영사기인 키네토스코프를 발명하고 특허까지 취득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키네토스코프는 실용성과는 거리가 멀었던 제품이며, 우리가 알고 있는 극장의 영화나 TV와는 전혀 다른 개념이다.


사실 사진이나 그림을 연속으로 보여주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은 매우 오래 전부터 알려진 사실이다. 영국의 사진가 에드워드 마이브리지(Eadweard Muybridge)는 1피트 간격으로 12대의 카메라를 설치하고 달리는 말의 움직임을 포착했고, 그 말고도 여러 사진가들이 활동사진 제작을 위해 여러 방안을 고안해 냈다.


그런데 영화가 등장하기 전에도 애니메이션이 존재했다는 사실은 잘 알려지지 않은 것 같다. 환등기(Magic Lantern)를 이용해서 그림이나 볼거리를 제공하는 쇼의 역사는 꽤 오래되었다. 그 쇼의 기법이 발전해서 1829년 페나키토스코프(Phenakistoscope)가 등장했고, 1834년에는 조이트로프(Zoetrope), 1877년에는 프락시노스코프(Praxinoscope)가 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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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조이트로프. 까만 원통을 돌리면 말이 움직이는 거 같다능


이 장치들의 원리는 다음과 같다. 그림을 원판이나 원통에 놓고 회전시키고, 작은 구멍을 통해 빛과 함께 증폭시킨다. 이런 방법으로 움직이는 그림을 보여주는 것이다. 영사기와 상당히 흡사한 면이 있는데, 다른 점이 있다면 손으로 그린 그림이라는 점이다. 다시 말해 영화보다 애니메이션이 먼저 등장했다는 것이다.


사진기술이 발전하자, 환등기 애니메이션 기법을 사진에 적용하는 연구로 이어진다. 앞서 언급한 에드워드 마이브리지를 필두로 수많은 방법이 고안되었다. 하지만 이런 시도들은 대부분 한계에 봉착하고 말았는데, 필름 때문이었다.


오늘날 영화가 본격적인 길에 들어선 것은 셀룰로이드 필름을 발명하고 특허권을 얻은 코닥에 의해서다. 코닥 이전에는 유리건판과 종이 필름을 사용했는데, 이것들은 활동사진에는 부적합했다. 반면 유연하고 질긴 특성을 가진 셀룰로이드 필름 활동사진에 매우 적합했고, 덕분에 영화의 가능성이 열렸다.


1888년 오귀스탱 르 프랭(Augusstin Le Prince)은 유리 슬라이드를 이용한 영사기 LPCCP Type-1 MkI을 내놓고 특허를 취득했다. 유리 슬라이스를 사용하는 제품이었다. 그래서 오귀스탱 르 프랭은 코닥이 신소재의 필름을 내놓자 재빨리 셀룰로이드 필름용으로 개량한 LPCCP Type-1 MkII를 만든다.


비슷한 시기인 1889년, 에디슨이 키네토스코프를 내놓는다. 커다란 상자에 눈구멍이 달려있는 외형을 지니고 있으며, 눈구멍에 눈을 들이대고 혼자 감상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면 상자 안에서 사진이 빠른 순서로 휙휙 지나갔다. 에디슨의 발명품은 르 프랭의 발명품보다 1년 늦게 등장하기도 했고, 가격 때문에 ‘값비싼 장난감’ 같은 취급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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뤼미에르 형제의 시네마토그래프


본격적인 영화의 출현은 시네마토그래프를 발명하고 특허를 얻은 프랑스의 뤼미에르 형제의 발명품 덕분이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영화의 특허는 코닥과 뤼미에르 형제의 것으로 보아야 한다.



4. 부하직원의 발명을 도둑질 특허!


놀랍게도 영사기 키네토스코프의 발명가는 따로 있었다. 바로 에디슨 회사의 직원이었던 윌리엄 딕슨(William K. L. Dickson)이다. 딕슨은 오늘날 널리 쓰이는 35mm필름을 최초로 사용한 인물이다.


딕슨은 에디슨에 대한 신문기사를 읽고 감동해서 에디슨의 회사에 입사했다. 활동사진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연구하던 끝에 키네토스코프를 발명한다. 그 기계로 최초 촬영한 연속사진은 딕슨의 손이었다. 하지만 딕슨의 발명품으로 특허를 얻은 건 에디슨이었다. 에디슨이 딕슨의 고용주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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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키네토스코프다.


사실 오늘날에도 이런 일은 드물지 않다. 삼성에서 일하는 연구원의 특허도 삼성이라는 회사의 것으로 종속된다. 그런데 에디슨은 회사가 아닌 에디슨 본인의 명의로 특허를 등록했다. 삼성 직원의 발명품을 삼성의 이름이 아닌 이건희의 이름으로 특허를 낸다면 얼마나 웃긴 일인가? 이런 웃긴 짓을 했음에도 위인전에는 에디슨이 영사기를 발명한 것처럼 나와 있다. (게다가 오늘날의 영화와는 거리가 멀다)


거기다 에디슨은 딕슨의 발명품에 제동을 걸기도 했다. 혼자서 감상하는 장난감 수준의 영사기가 상업성이 떨어진다고 판단한 것이다. 결국 딕슨의 연구는 제동이 걸렸으며 영사기 연구는 금지된다. 그 사이 뤼미에르 형제는 영사기를 발명했고 공은 그들에게 돌아갔다. 딕슨은 이 때문에 에디슨과 결별하고 회사를 그만두었다.


에디슨 회사에 고용된 천재는 딕슨 말고도 많았다. 그 유명한 니콜라 테슬라도 에디슨 회사의 직원이었다. 테슬라는 원시적인 에디슨 발전기의 단점을 파악하고 다시 설계해 주었다. 테슬라의 설계대로 새로 제작된 24개의 발전기는 성능이 대폭 향상되었다. 테슬라는 그 대가로 에디슨에게 5만 달러를 받기로 약속 받았지만, 에디슨은 한 푼도 지불하지 않았고, 화가 난 테슬라는 회사를 나가버렸다. 그리고 테슬라와 에디슨은 숙명의 라이벌이 되어 피 튀기는 싸움을 벌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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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라 테슬라


에디슨의 발명특허는 총 1,093개라고 한다. (1300개라고 하는 자료도 있음. 어느 것이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에디슨의 특허가 1000개 이상임) 이렇게 엄청난 특허를 에디슨 혼자 발명했다고? 인간으로써 이게 가능한 일인가? 당연히 말도 안 된다.


에디슨은 발명가라기 보다는 CEO였다. 그는 테슬라와 딕슨 같은 수많은 천재들을 자신의 부하직원으로 고용했던 사장님에 불과하다. 그리고 부하직원의 발명을 자기 이름으로 특허를 내는 뻔뻔한 인간이었다.


영사는 그렇다 치고 테슬라의 발전기는 어떻게 된 것일까? 더 이상 자료를 찾을 수 없었지만, 아마 그것조차도 에디슨이 자기이름으로 특허를 냈으리라 추측해 볼뿐이다. 5만 달러는 그것에 대한 보상이었을 텐데, 에디슨이 입을 싹 씻어버리니 테슬라가 화날 만도 하다.



5. 테슬라와 피 튀기는 개싸움을 벌인 에디슨


에디슨과 테슬라의 싸움은 잘 알려져 있다. 전류전쟁이라는 싸움으로, 싸우는 과정에서의 에디슨의 추악함이 잘 드러난다. 회사의 운명을 걸고 테슬라와 싸워야 했던 에디슨은 ‘테슬라의 교류전기가 위험하다’는 중상모략에 올인했다.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경쟁이 어렵자, 상대방을 악의적으로 비방하는 비열한 수법을 쓴 것이다.


에디슨은 자신의 연구소에 기자, 관계자, 관람객 등을 대거 모아 놓고 개, 고양이들을 고압의 교류전류로 태워 죽이는 끔찍한 실험을 반복했다. 이 때문에 근처의 개와 고양이의 숫자가 크게 줄어들었다고 한다. 나아가 코끼리 한 마리를 통째로 태워 죽이기도 했다.



이게 코끼리를 죽이는 장면이다. 참 나빴다...


에디슨이 테슬라를 모략하려고 전기의자를 발명한 것도 유명하다. 에디슨은 로비를 벌여 뉴욕 주의 교도소에서 전기의자를 사형도구로 채택하게 만들었다. 에디슨은 처음에 사형수들이 고통 없이 죽어가는 걸 생각했던 모양이지만, 사형수의 온몸에 불이 붙고 난리도 아니었다고 한다. 사형수는 오랜 시간 고통에 절규하며 죽어갔다.


이런 에디슨의 끊임없는 모략질에 테슬라는 괴로워했다. 기자를 불러놓고 전기 스파크가 요동치는 실험실에서 테슬라가 태연하게 책을 읽는 사진을 찍게 하기도 했다. 자신의 교류전기가 안전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6. 최초의 영화 ‘복돌이’는 에디슨?!


*북돌이: 영화를 불법 복제하여 DVD를 제작하거나, 또는 인터넷 웹하드에 업로드 하는 사람


최초의 영화 복돌이는 과연 누구일까? 바로 에디슨이었다!


영화사를 언급할 때 반드시 언급하는 영화가 한 편 있다. <달세계 여행(A Trip to the Moon)>이라는 초창기 SF 영화로, 이 영화에는 '최초'라는 수식어가 여러 개 달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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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SF영화', '최초의 스톱모션 애니메이션 기법 사용', '최초의 불법복제 피해 영화'


1902년 프랑스의 조르주 멜리에스가 감독이 제작한 이 영화는 미국에서 대박을 쳤다. 얼마나 흥행을 했던지 돈을 갈퀴로 긁어 모을 정도였다고 한다. 이 영화를 미국에서 개봉한 것은 에디슨 회사였다. 그런데 충격적인 건 극장에서 상영한 게 불법 복제판이었다는 점이다. 프랑스 극장의 영사 기사를 포섭하여 필름을 잠깐 빼돌린 뒤 복제품을 만들었고, 복제품을 미국 전역에서 개봉했다. 때문에 영화 제작자 조르주 멜리에스는 엄청난 손실을 입었다고 한다.


에디슨 옹호자들은 이 사건을 회사 직원들의 부도덕으로 돌리려고 한다. 하지만 떼돈을 번 것은 에디슨 회사였고, 이렇게 큰돈을 버는데 에디슨이 몰랐을 리 없다.


게다가 에디슨 본인이 영화산업에 뛰어들었다는 점에서 더욱 책임을 회피할 수 없다. 에디슨은 1908년 영화특허회사(MPPC)를 만들어 영화시장을 장악하려고 했다. 이런 에디슨의 횡포에 반감을 가진 영화인들이 모여 만든 것이 바로 '헐리우드'다. 결국 에디슨의 영화장악 시도는 성공하지 못했다.


남의 영화를 불법 복제 상영 해놓고, 자기 자신은 영화특허회사를 만들어서 영화계를 장악하려 했다니 이 얼마나 이중적인가!



7. 에디슨의 진면목은 성공한 CEO


에디슨은 절대로 천재 발명가가 아니다. 그는 성공한 CEO다. 에디슨과 상당히 유사한 사람이 있는데, 바로 MS의 빌 게이츠다. 빌 게이츠 역시 프로그램을 다룰 줄 알고 베이직에 대해 애착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MS-DOS는 빌 게이츠가 만든 것이 아니며, Q-DOS를 돈을 주고 산 것이다. 그런데 Q-DOS 조차 오리지널이 아니다. 게리 킬달이 만든 CP/M의 여러 유사품 중에 하나였을 뿐이다.


IBM과 게리 킬달의 협상이 결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빌 게이츠가 재빨리 CP/M의 유사품인 Q-DOS를 구입해 IBM에 팔아먹은 것이다. 이 한 번의 결정으로 게리 킬달과 빌 게이츠의 운명이 갈렸다. 게리 킬달은 프로그래밍의 천재였지만 사업에 미숙했고, 빌 게이츠는 프로그래밍의 천재는 아니었지만 사업 감각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에디슨도 이와 똑같다. 에디슨은 발명의 천재가 아니고 성공한 사업가에 가깝다. 이 점을 분명히 알아둬야 한다.


끝으로 에디슨은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고 한다.


"산업과 상업에서 누구나 남의 것을 훔치기 마련이다. 나 자신도 많은 것을 훔치면서 살았다. 하지만 난 어떻게 훔치면 좋은지 그 방법을 알고 있다."









과학불패 뽕짝


편집: 딴지일보 챙타쿠


 

출처 : 배델창
글쓴이 : 배델창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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