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 합팩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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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ster's IMAO/게임 이야기

2018. 9. 12.

합팩의 추억


작성 : 이홍기(http://blog.daum.net/zzang2314274)




이것은 '불법'이 아닙니다...?

처음에 나는 그것을 '합팩'이라고 부르는지도 몰랐다. 그리고 그런 것이 존재하는지도 몰랐다. 그저 어렸을 적에 어머니가 사주신 'TV에다 선 꽂고 하는 게임기(쉽게 말해서 NES)'에 딸려왔던 게임팩이 150-in-1이었을 뿐이다. 물론 지금은 이런저런 자료조사를 통해 '팩 하나에 게임 하나'가 정상임을 알고 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정상적인 팩들을 이사 오기 전에 어머니 친구네 집에서 봤었다. 하지만 어머니가 사주신 게임기가 너무나 좋아서 까맣게 잊어버렸고 나도 그렇게 어느 순간에 복돌이가 되었다. 우리나라 게임 산업에서 복돌이 논란이 끊이지 않는 것은 이런 '원죄'가 있기 때문...이려나?

다만 막연하게나마 이상하다는 것을 느끼긴 했던 것 같다. 기억력이 엄청나게 떨어지지 않는 이상, 150개 중에서 무작위로 골랐는데 번호가 다른데도 똑같이 생긴 게임이 나오면 의심할 수밖에 없잖은가. 하지만 그 때의 나는 아무것도 몰랐기에 그러려니 하고 넘겼고, 합팩 제작사가 다른 게임인 것처럼 설정만 바꿔둔 것들 중에서 유리한 설정인 것들(시작할 때부터 무적이라든지)의 번호만 외우고 그 게임만 골라서 했다. 그러니까 말이 합팩이지 실제로 했던 것은 10개 안팎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TV가 발전하고, 게임기를 수리하는 업체가 사라지고, 컴퓨터라는 게 안방으로 들어올 무렵이 되자 이번에는 다른 종류의 합팩이 등장했다. 'PC게임 모음'이라는 CD가 나타난 것이다. 지금 와서 보면 에뮬레이터를 자동 실행하게 해놓은 눈속임에 불과했지만, 그 시절의 나는 그것도 모르고 또 다시 순진하게 '낚였다.' 그나마 불행 중 다행으로, 학교에서도 이런 CD를 공유하는 경우가 있다보니 내 돈을 쓰지 않고도 그런 것들을 즐길 수 있었다.

솔직히 말하면 거짓말은 하지 않은 편이다. 'PC에서 (에뮬레이터로) 구동되는 게임들의 모음집'이니까. 게다가 내가 초등학교 때 즐겼던 NES나 제네시스를 PC로 옮겨놓은 물건이라 거기에 혹했는지도 모른다. 아니, 맞다. 하지만 역시 에뮬레이터를 짜깁기한 물건이라 CD 제작자가 의도한 방법으로 종료하지 않으면 십중팔구 에뮬레이터의 흔적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가령 제네시스의 게임들을 모아놓은 CD의 게임들을 하다가, (CD 제작자가 의도한 종료 방법은 잊어버렸지만) DOS 게임의 영향으로 무의식적으로 ESC를 연타하기 마련이었는데 여기서 제네시스 에뮬레이터 중 하나인 Gens의 메뉴가 뙇 하고 떠올랐던 게 기억난다. 해당 CD 제작자의 농간인지 에뮬레이터의 오류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메뉴에서 멈춰버려서 당황했지만 CD를 빼내는 극약처방으로 빠져나왔다. 그리고 그새 못 가서 잊어버렸다.

비밀은 언젠가 드러나는 법

내가 그러한 합팩의 실상을 알게 된 것은 그 합팩을 '다루는' 법을 알게 된 때였다. 그 당시에 잊을 수가 없는 합팩CD가 있는데, 앞서 말한 패미컴이나 제네시스가 아닌 오락실의 게임들을 PC에서 돌릴 수 있는 물건이었다. 당시 오락실에 미쳐 있던 나로서는 그 합팩CD를 갖고 있던 친구에게서 밥 먹듯이 CD를 빌려가고, 그 친구네 집에서 자고 오기도 하는 등 어떻게든 가까이 하려고 했는데 결국엔 손에 넣지 못했던 걸로 기억한다. (아니, 분실했었나?)

그 때 매우 중요한 사실을 하나 깨달았던 것이다. 하나의 게임을 곧바로 실행하는 게 아니라 '목록 어디선가 불러오는 것'임을. 물론 어딘가 이상하다고만 생각했지, 에뮬레이터라는 것을 곧바로 눈치챈 것은 아니었다. 어쨌든 그 부분을 인지하자 다른 '게임들'에서도 비슷한 부분이 발견됐다. 왜 어떤 게임은 가속이 되고 어떤 게임은 가속이 되지 않는가? 왜 같은 게임인데도 게임을 불러오는 과정이 다른가? 오락실이 아닌 PC인데도 굳이 동전을 넣는 기능이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 의문은 전혀 예상치 못한 부분에서 풀렸다.

당시 나는 명탐정 코난에 관심이 많아서 관련 사이트를 여기저기 둘러보는 경우가 많았다. 그 중에서는 명탐정 코난 게임을 다운받을 수 있는 링크도 있었는데, 설명이라곤 오늘날에 에뮬레이터를 쓰는 방법을 소개하듯이 그냥 '실행기 키고 open 누른 뒤에 롬파일 선택하고 확인 누르세요' 정도에 불과했다. 어쨌든 게임을 즐기긴 했지만, 그 때 나는 처음으로 에뮬레이터로 롬파일을 실행한 것이다. 물론 그 때까지도 '에뮬레이터'란 단어가 있는지도 몰랐고(대개 그냥 '에뮬'이라고 줄여서 불렀으니까), 다른 롬파일을 가져다 쓰는 방법도 몰랐다. 하지만 적어도 예전의 합팩CD와 같은 결과를 낸 것이다. 그리고 그제서야 비로소 내가 속아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충격을 받거나 분노를 느낀 것은 아니었다. '뭔지는 몰라도 신기하다'란 생각이 앞섰으니까. 그 다음은 자세하게 기억나진 않는다. 인터넷에서 게임으로 검색을 했는데 mame32가 자주 눈에 띄었고, 그 mame32로 예전에 내가 했던 구닥다리 게임들을 실행했던 게 기억난다. 그리고 오락실에서만 할 수 있었던 캐딜락&디노사우르스를 mame로 실행했을 때의 그 충격이란! 그렇게 나는 합팩의 마수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에뮬레이터라는 지옥에 빠져들어서(!) 지금에 이르고 있다.

합팩을 공개수배합니다

나무위키의 합팩 문서 등에서 거론하듯이 이 합팩에 놀아난 피해자는 나만이 아니었다. 구글에서 multicart와 게임기 기종(nes, snes...)을 합쳐서 검색하면 수많은 이미지들을 볼 수 있다. 합팩 전문 회사가 있는 게 아니니만큼, 합팩의 메뉴 화면은 모두 똑같진 않지만 대강대강 비슷한 구석이 많다. 제작사 이름, 내장된 게임의 개수, 게임들 목록, 끝. 아마 '우리에 대해선 몰라도 되니까 닥치고 이 수많은 게임이나 해!'란 생각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메인 메뉴를 정성들여 장식한 합팩도 있는지라 꼭 그렇진 않은 것 같다.

하지만 장식을 했건 안 했건, 그게 저작권 침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오히려 장식을 한 부분이 더더욱 문제가 되는데, 디즈니의 심바나 람보(콘트라의 주인공이 스탤론과 슈워제네거를 모델로 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를 그대로 넣었기 때문이다. 내가 접한 합팩들에서는 그렇게 뻔뻔스러운 작태는 없었지만, 합팩 자체가 남의 게임들을 가져다가 우겨넣어서 만든 것이기 때문에 문제라는 건 변함이 없다.

장식에서 눈을 돌려 메뉴를 들여다보면 원제와 다르게 창씨개명된 이름들이 나온다. 패미컴 합팩 중 하나에서 가져온 이름들인데, 어떤 게임인지 알아맞출 수 있겠는가?
 - ASUIT SALON
 - FIAME ROBOT
 - BATMAN 30
 - SHOTE GENTRY
 - SALO PECKER 5
 - LINK LOBSTER 5
 - HAG BUGER 80
대답하기 쉽도록 선택지도 제공하겠다.
(1) 슈퍼 마리오 1 (2) 아이스 클라이머 (3) 봄버맨 (4) 쿵후 (5) 배틀시티 (6) 그라디우스 (7) 트윈비

선택했는가? 유감스럽게도 저 중에는 답이 '하나도' 없다. 뭣보다 저 이름들은 '똑같은 게임을 설정만 다르게 바꾼 개조판'들의 이름들이다. 그러니까 저 이름들이 모두 '단 한 게임'을 가리킨다는 말이다. 그 게임의 이름은 예전 글에서 언급했던 콘트라 NES 이식판(원작은 아케이드, 코나미, 1987)이다. 이것도 묘한 규칙성이 있는데, 뒤에 숫자는 스테이지의 숫자나 목숨의 개수를 나타내고 이름은 개조된 설정을 대략적으로 눈치챌 수 있게 바뀌었다. FIAME(flame의 오타인 듯) ROBOT은 F총탄을 발사하고 SHOTE GENTRY는 S총탄을 발사한다든지. 물론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붙였는지 알 수 없는 이름들도 너무나 많다. 왜냐하면 저 이름들은 1200-in-1, 즉 1200가지 게임에서 가져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저 수많은 이명(異名)들만큼 설정들도 이것저것 개조되었는데, 문제는 상술했듯이 원본에서 시작할 때 특정 아이템을 가지거나 상태로 시작한다든지 시작하는 스테이지가 바뀐다든지 하는 식으로 중구난방이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누가누가 더 많은 게임을 우겨넣었는지 경쟁을 하던 그들에게는 밸런스 따위 장식이었다. 그 와중에서도 묘한 것은, 그렇게 뜯어고쳤는데도 에러가 발생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게임이 깨졌다면서 원래 제작사에게 클레임이 가서 들키는 것을 막고 싶었던 모양이다.

합팩은 미니게임 모음집의 시초다?

그런가 하면 합팩마다 필수요소급으로 꼭 들어가던 게임들이 있었는데 누구나 알 법한 슈퍼 마리오, 남극탐험, 배틀시티, 서커스 등이었다. 묵직한 게임들, 그러니까 RPG 같은 게임들은 별로 들어가지 않았는데 용량 등의 문제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내 경험상에서는 대부분 위처럼 누구나 명작이라 인정할 만한 게임들과 그와 비슷한 게임들이 꼭 끼어 있었다. 도둑질당했다는 게 문제지만.

어쨌든 합팩을 만든 이유야 내가 알 수도 없고 알고 싶지도 않지만, 그 게임들에는 묘한 공통점이 있었다. 변형하기에 따라서는 무한한 확장성이 내포되어 있었던 것이다. 위에서 선택지로 인용했던 게임들 중에서 아이스 클라이머와 봄버맨, 배틀시티, 트윈비 등은 적들이 다양해지는 것을 제외하면 맵이나 규칙에는 대체로 큰 변화가 없는 편이다. 당시에는 용량 제한 때문에 많은 것을 표현할 수가 없었지만, 오늘날에 무한 플레이가 가능한 모바일 게임들을 보면 앞의 게임들처럼 규칙에는 변화가 없으면서 맵만 무한하게 바뀌는 경우가 많다. 피처폰 시절에 있었던 미니게임천국 시리즈(컴투스, 2005)가 그러했고, 지금은 인디 게임처럼 거기서 하나만 떼어다가 좀 더 확장시킨 단일 앱들도 있다.

물론 모든 그러한 미니게임 혹은 단순한 게임들의 뿌리가 합팩으로 귀결된다는 괴상한 결론을 내리고 싶지는 않다. 이유와 과정이 어쨌든 남의 게임을 훔쳐다가 만든 것에는 변함이 없으니까. 그럼에도 내가 이렇게까지 합팩에 대해서 길게 글을 쓴 이유는, 다른 것은 차치하더라도 '조그만 게임들을 여러 개 묶어서 내놓는다'는 그 발상 자체에 대해서 말하고 싶어서였기 때문이다. 한 미니게임이 질리면 바로 다른 미니게임으로 갈아탈 수 있고, 밸런스는 엉망진창이긴 했지만 게임의 설정을 이리저리 뒤바꿔서 접근 방식을 다르게 하지 않았는가. 나는 그 '다양성'만큼은 합팩에게 면죄부를 주고 싶다. 다른 것들은 유죄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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